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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닷 (186)화 (186/240)

- 186화 -

준성은 깊이 심호흡을 한 뒤에 창고 문 앞에 섰다.

남기혁이 멀쩡한지 아닌지는 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좀비들의 괴성은 멀어지다 못해, 지금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고요함만 있을 뿐이다. 5층에서 몰려온 좀비들은 아무래도 전부 남기혁을 쫓아서 멀리까지 가버린 모양이다.

제아무리 남기혁이라 하더라도 아까와 같이 수십에 달하는 좀비 모두와 한 번에 싸워 이길 순 없다. 주변에 이것저것 활용할 도구나 조형물이 많다든지, 한 번에 달려드는 좀비의 수를 조율할 수 있는 좁은 골목 같은 게 있다면 모를까.

‘옥상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있다고 하더라도 남기혁은 안경이 꼭 필요할 정도로 시력이 극히 나빠져 있는 상태였고 한쪽 눈은 자신이 아예 망가뜨려 버렸다. 그런 상태라면 주변에 쓸만한 게 있어도 급히 활용하기엔 무리가 있을 거다.

남기혁이 무수히 많은 좀비를 상대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준성이 이전에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방법이었다.

황경오를 구하기 위해 그의 낡은 아파트로 들어갔을 때.

서창민은 준성이 감히 시도하지 못할 방법으로 많은 좀비를 단번에 처리했던 적이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뛰어들 듯 매달리며, 자신을 바짝 뒤쫓던 지능 없는 좀비들을 우르르 창밖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던 방법이다.

한쪽 팔이 엉망이 되긴 했지만 남기혁이라면 같은 방법으로 좀비들을 모조리 처리할 수 있을 거다.

비록 꿈속이라고는 하나, 7층 오피스텔 옥상에서 자신을 안은 채로 로프 하나에 의지해서 덜컥 뛰어내렸던 전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 정도의 담력과 피지컬을 가졌다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볼 수 있었다.

약간 빠른 감이 있는 호흡을 다듬으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체테를 쥔 오른손에는 언제든 바로 휘두를 수 있도록 긴장을 줄 수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왼팔을 들어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그의 손끝까지 흐른 붉은 피가 문손잡이를 질퍽하게 물들였다.

끼익, 하는 기분 나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남기혁은 옥상 난간을 잡자마자 그대로 건물 밖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훅 날아간 그의 몸이 그대로 바닥을 향해 떨어질 것 같았지만, 난간을 꽉 붙잡은 그의 오른손 덕분에 그대로 바깥에 매달릴 수 있었다.

이를 모르고 그저 달려들기 바빴던 좀비 무리는 난간에 허리가 그대로 걸려 고꾸라졌다. 앞선 좀비들이 고꾸라져 떨어지고, 지척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던 뒤쪽 좀비들 또한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줄줄이 뒤를 이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단체로 자살이라도 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큭….”

남기혁은 왼팔이 엉망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오른팔 하나로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수히 많은 좀비가 줄줄이 떨어져 내리는 동안, 그는 자신의 육체를 지탱해주는 오른팔의 근육이 툭툭 터져버릴 것 같은 감각에 시달려야 했다. 금방이라도 탈골될 것처럼 어깨가 삐걱거리는 느낌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오른팔이 통째로 뜯겨 나갈 것 같은 통증을 참아내며 좀비들이 모두 떨어져 내리길 기다렸다. 마지막 남은 좀비가 거꾸로 떨어지는 걸 확인한 남기혁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우르르 떨어져 내린 좀비들 대다수는 머리가 깨져 그대로 쓰러진 채 멈춰버렸다. 몇몇 좀비들은 사지가 기묘하게 뒤틀리거나 부러진 채 바닥을 기고 있었고, 다른 이들을 쿠션 삼아서 그나마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게 된 좀비들은 다른 먹잇감을 찾은 것처럼 어딘가로 몰려들었다.

‘다른 먹잇감?’

순간,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부하들이 떠올랐다. 그의 측근, 우석진의 얼굴도.

남기혁이 매달린 위치는 건물의 정면부에서도 끄트머리였다. 얼른 고개를 돌려, 정문에 나열해 있을 부하들과 그들의 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부하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차까지 전부.

대신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징그러운 거대 지렁이처럼 건물 앞 차도를 줄줄이 메운 좀비 떼였다.

“하….”

남기혁의 잇새로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머리가 절대 나쁘지 않은 남기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상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저렇게 많은 수의 좀비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건물까지 올 때 근처에 있던 좀비들은 극히 일부였고, 그들 대다수는 맹렬히 달리는 부하들의 차에 치여 날아가거나 소음기 낀 총에 맞아 맥없이 쓰러졌다.

건물 안에 있는 좀비들은 1층 중앙을 포함한 까마득한 어둠 속에 갇혀 있으니, 밖의 부하들을 보고 우르르 몰려나갔다고 보긴 어려웠다.

‘좀비들이 저렇게 많으면 차로 멀리 도망이라도 쳤어야…….’

그렇게 생각하던 남기혁의 눈에, 부하들의 가장 앞차를 막고 있는 검은 차 한 대가 보였다. 트렁크 쪽 외에는 딱히 좀비들이 몰려있지도 않았고 운전석도 활짝 열려 있었다.

‘어떤 새끼지?’

도주로를 막듯, 가장 앞차와 거의 부딪힐락 말락 할 정도로 박치기하듯 바짝 세워둔 검은 차의 의도가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안에 타고 있었을 운전자도.

남기혁의 머릿속에 일순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놈인가?’

강준성과 키스하던, 바로 그놈.

남기혁의 맞부딪친 이빨이 서로 거칠게 비벼지며 빠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강준성이 구성한 버스 팀의 일원이 여기까지 도우러 왔을 리가 없다. 떨어져 있는 거리도 거리지만, 저런 중형차 한 대에 탈 수 있는 인원이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도 않는다. 그 정도 인원으로는 총을 든 이쪽 무리를 절대 어찌해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하지만 단 한 사람.

‘그 겁 없어 보이던 새끼….’

강준성이 보란 듯이 남겨놨던 영상 속에는 그들이 좀비와 싸우는 모습 또한 담겨있었다. 강준성이야 워낙 꿈속에서 많은 경험을 쌓아온 덕에 시원시원하게 좀비를 처리하는 게 그다지 새롭진 않았지만, 처음 보는 검은 옷의 남자는 달랐다.

좀비들의 머리를 정확하게 박살 낼 뿐만 아니라 일말의 주저함조차 없었다. 좀비 정도는 전혀 무서워할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이.

어쩌면, 세상에 무서운 것 따윈 하나도 없는 게 아닐까.

남기혁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엿보았던 강준성의 꿈을 떠올렸다.

NPC 남기혁이 부여했던 트라우마의 장소, 폐공장.

그곳에 불쑥 나타나 강준성을 품에 안았던 기분 나쁜 새끼.

꿈으로도 모자라 강준성의 현실에서까지 자신 대신 그의 곁을 차지한 남자.

“하아…, 씨발….”

욕을 내뱉은 남기혁이 살기 어린 눈으로 왼팔을 뻗었다. 아직도 피가 멈추질 않는 너덜너덜한 팔이 어렵사리 난간을 붙잡았다. 한쪽 팔만으로는 올라갈 방법이 없었기에, 왼팔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피를 토해도 그저 무시했다. 혹시라도 왼쪽 손아귀에 있는 ‘그것’을 놓칠까 싶어서, 고통이고 뭐고 난간을 잡은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하지만 다친 팔, 게다가 ‘그것’을 쥐고 있는 상태로 다시금 옥상에 올라가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았다. 왼팔에서부터 퍼져가는 어마어마한 고통 때문에 제대로 힘을 쏟을 수가 없다.

그런 남기혁의 손목을 누군가가 덥석 붙잡았다.

“형, 님…!”

생각지도 못한 음성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자 얼굴에 뜨거운 액체 몇 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우석진?”

남기혁은 저도 모르게 아래쪽의 좀비 떼를 내려다보았다. 당연히 저 안에 우석진이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갑자기 들린 그의 음성은 남기혁조차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떨어진 뜨거운 액체가 피라는 것을 알아챔과 동시에 그의 몸이 단숨에 끌려 올라갔다.

난간을 넘어 다시금 옥상을 밟게 된 남기혁은 자신을 도와준 우석진이 털썩 주저앉는 걸 볼 수 있었다. 시력 때문에 우석진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긴 어려웠지만, 그의 목에서 시뻘건 피가 무섭게 흘러내리고 있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우석진, 왜 이래? 누가 이랬어? 준성이야?”

준성이 한 짓이냐고 말하자마자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석진의 목에 꽂혀 있는 날붙이는 준성이 다룰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준성이 무기로 삼는 것은 어디까지나 좀비의 머리를 박살 낼 정도로 강하게 휘두를 수 있는 것들이다. 완력이 그리 높지 않은 그가 이런 짧은 단검류를 사용해봤자, 좀비의 두개골에 칼끝을 박아 넣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남기혁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우석진이 입가에서 피를 토하며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혀, 형님…, 이상한 놈…이 있습니다.”

“이상한 놈?”

“아마도……, 쿨럭!”

목에 걸린 핏덩이를 토해낸 우석진이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면역자…인 것 같습니다….”

남기혁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눈이 천천히 옥상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아하….”

남기혁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차피 반드시 죽여야 할 새끼였네.”

남기혁의 탁한 외눈이, 산산이 부서진 옥상 입구를 느긋이 걸어 들어오는 한 남자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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