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화 -
자랑스럽게 ‘충견’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한서가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강하게 주었다. 강한 완력이 만들어낸 압박감은 남기혁의 목을 단번에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
“크윽-!”
남기혁은 자신의 목에 가해진 강력한 압박감에 숨을 삼키면서도 부릅뜬 눈으로는 한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워낙 거리가 가까웠기에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유로운 얼굴과 달리, 도한서의 눈빛만큼은 당장 이 목을 꺾어 죽여버리고야 말겠다는 차가운 의지가 담겨있었다. 웃고 있는 입매는 벌써 자신의 육신을 갈가리 뜯어먹은 것처럼 새빨갰다.
‘준성이가 이딴……! 이딴 새끼와……!’
산소가 부족해진 머릿속은 오직 딱 하나, 눈앞의 남자가 했던 발언만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좆 박다가 꼴려서 씹어놨는데, 그걸 못 보다니.”
“궁금하면 강준성한테 옷 좀 다 벗어보라고 할까? 몸 전체에 내가 씹어댄 흔적이 가득할 텐데.”
“어젯밤에 하도 예쁘게 울어서 목울대도 좀 씹어줬는데, 숨 쉴 때마다 쓰라려서 나만 노려보던걸.”
“난 너 같은 멍청한 새끼와는 달리, 숨을 못 쉴 때가 아니라 ‘숨 쉴 때마다’ 내 생각만 나게 만들어보려고.”
한서가 했던 말들은 하나하나 충격적이었다.
남기혁은 꿈속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을 별개처럼 취급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NPC 남기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소중해서.
너무 소중하고 예뻐서.
그래서 강준성을 감싼 모든 ‘쓸데없는 것들’을 정리한 후에 그를 안을 생각이었다.
맨살을 비비고 숨과 타액을 나누고 느끼는 곳마다 모두 핥아주며, 불룩해질 때까지 배 속에 제 것을 뿌려줄 예정이었다. 박힐 때마다 쉬지 않고 지리게 해서 침대가 매일매일 축축해졌으면 좋겠고, 그의 몸에서는 항상 자신이 뿌린 정액 냄새가 페로몬처럼 지독하게 풍겼으면 했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게 된 강준성이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결국 그를 바라보는 단 한 사람에게 의지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뿐.
그렇게 되면 강준성은 다시금 자신을 향해 예쁘게 웃어주게 되겠지.
제 목을 수도 없이 베던 그때처럼, 딱 하나의 목적에 도취되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해사한 미소로 오직 ‘남기혁만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래야 했는데…….
이미 눈앞의 개새끼가 강준성의 몸을 더럽혀놨다고 한다.
그를 더럽게 만드는 건 자신뿐이어야 하거늘.
“이……! 개, 새……!”
쇳소리를 닮은 욕설을 기합 삼아, 남기혁은 피투성이가 된 왼팔을 휘둘렀다. 한서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는 주먹은 도저히 다친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매섭고 묵직했다.
한서는 관자놀이를 노리는 주먹을 뒤로 머리를 젖혀 피해냈다.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피투성이 팔이라서 살짝 드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는데, 의외로 공격이 예리해서 한서조차도 움찔하고 말았다.
그 탓에 순간적으로 남기혁의 목을 쥔 손이 움찔하며 아주 잠깐 힘이 약해졌다. 남기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서 몸을 뒤로 확 빼내며 한서의 배를 발로 밀듯이 차버렸다. 그와 동시에 단검을 쥔 손목 역시 단숨에 꺾일 정도로 비틀어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복부를 강하게 차였으면서도 신음 하나 없이 뒤로 밀려 나간 한서가 제 손에서 벗어난 남기혁의 목을 노려보았다. 그새 빨갛게 손자국이 남아버린 남기혁의 목이 격하게 들썩거리며 급히 호흡하고 있었다.
헐떡이며 기침하던 남기혁이 이번엔 한서의 품으로 자리를 박차며 뛰어들었다.
“이 더러운 새끼-!”
남기혁의 칼날이 도한서를 향해 쇄도했다. 한서는 자신을 향한 칼끝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의 공격을 하나하나 침착하게 피해내었다.
이에 놀란 건 당연히 남기혁이었다.
‘이 새끼, 뭐야?!’
도한서는 남기혁의 공격을 적은 보폭으로 능숙히 흘려내고 있었다. 난간에 매달렸던 여파로 인해 칼을 휘두르는 속도 자체는 분명 떨어진 게 맞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남기혁의 공격은 일반인이 몇 번이나 회피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급소를 노리는 족족, 이미 그럴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약간 비트는 정도로 손쉽게 피해버린다. 급소만큼은 아니어도 단박에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거나 극한의 고통을 줄 수 있는 위치 또한 남기혁의 머릿속을 훤히 엿보는 것처럼 당연하게 흘려보낸다.
그 결과, 십수(十手)가 넘는 공격 중에서 도한서에게 타격을 입힌 거라고는 고작 두 줄의 생채기가 전부였다.
아무런 무기도 없이 제 공격을 여유롭게 흘려보내는 도한서를 보며, 남기혁은 본능적으로 깨닫고 말았다.
‘죽이기 위해’ 휘두르는 칼끝의 궤적을 알아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동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남기혁은 한서의 목을 가로로 베어버리려다가 여지없이 허공을 갈라버린 단검 끝을 노려보며 조소했다.
“너, 나랑 똑같구나?”
남기혁의 입가가 길게 찢어지듯 올라갔다.
“살인마 새끼.”
한서는 남기혁의 조소 어린 호칭을 들으면서도 그저 웃고만 있었다.
도한서에게 남기혁의 공격을 읽는 건 손쉬웠다.
연구소에서 수도 없이 살인을 하며 익힌 거라고는 상대를 죽이는 방법뿐이었다. 어디를 찌르면 고통스러워하는지, 어디를 가르면 과다출혈이 되는지, 어디를 찢으면 숨이 멈추는지, 싫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그걸 잘 알게 되고 나니, ‘죽음을 피하는 법’ 또한 관심이 갔다.
그래서 양부모가 모처럼 대학을 허락해줬을 땐, 그나마 흥미가 있던 검도학과를 선택했다.
자신을 노리는 죽도의 끝이 서슬 퍼런 칼날이라고 생각하면 등골에 식은땀이 생길 정도로 짜릿했다. 살인을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것과 죽도를 휘두르는 건 상당히 달랐지만, 그 끝이 스치기만 해도 즉사할 수 있는 공격이라 생각하면 묘한 짜릿함이 전신을 움직여줬다.
그렇게 자신 혼자만의 ‘목숨 건 대련’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도한서는 ‘무패(無敗)’로 이름난 검도학과 수석이 되어있었다. 물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대련 상대를 엉망으로 만들어서 반칙패 해버린 대련은 셈에서 뺐을 때의 기준이다.
수도 없이 누군가를 죽이며 죽도 속에 숨은 허상의 칼끝을 오래도록 마주했던 도한서였다. ‘죽이기 위해’ 휘두르는 검의 궤적을 피하는 것쯤은 일일이 긴장할만한 일조차 아니었다.
“준성이는 알아?”
남기혁이 뻐근한 목을 단검 든 손등으로 닦듯이 훑으며 웃었다.
“네가 살인마 새끼인 거, 알고는 있냐고.”
강준성에겐 ‘살인’ 또한 트라우마일 것이다. 믿고 따랐던 남기혁이 무서운 ‘살인마’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그를 가장 먼저 찾아왔을 정도였다. 충격받은 얼굴로 울면서 왜 그랬냐고 매달리던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만 본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강준성의 많은 게 변하고 말았으니, ‘살인’이라는 단어에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을 게 뻔했다.
믿고 있던 자가 사실은 같은 인간을 죽이던 살인마다.
이는 남기혁과 도한서,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이었다.
남기혁은 조소를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의 저 여유롭고 거만한 얼굴의 남자 또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강준성의 충격받은 얼굴을 마주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강준성은 현실에서 의지하던 눈앞의 남자에게 또 한 번 꿈속과 같은 배신감을 느끼고 털썩 주저앉게 되지 않을까.
현실에서조차 정신적으로 망가진 강준성을 제 입맛대로 길들일 시작점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흐음. 살인마 새끼라…….”
남기혁의 발언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그가 말한 제 호칭을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남기혁에게로 뛰어들었다.
“미안하지만.”
남기혁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품으로 깊이 파고든 한서가 눈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우리 주인님은 내게 꽤나 관대하거든.”
“뭐?”
대응할 무기도 없어서 피하기만 하던 도한서가 갑자기 달려드는 바람에 움찔하던 남기혁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바람 가르는 소리에 온 신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눈이 망가진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거라서 인식하는 게 너무 늦었다.
허공에서 날아오는 물건을 왼손으로 정확히 붙잡은 도한서가 뒤늦게 자신과 떨어지려 하는 남기혁을 향해 그것을 휘둘렀다.
“이것 봐.”
도한서가 쥔 날붙이가 위에서 아래로 무겁게 내리그어졌다.
“내가 살인마 새끼든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보고 너 좀 물어뜯어 달라잖아.”
몸을 뒤로 빼던 남기혁의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뜨거운 피가 남기혁의 볼과 목, 어깨와 가슴팍까지 순식간에 흠뻑 적셔버렸다.
높이 튀어 오른 제 핏물을 충격받은 얼굴로 노려보는 남기혁의 눈에, 도한서가 제 팔을 자를 때 썼던 검은 날붙이가 보였다.
그것은 분명, 강준성이 이때껏 믿어왔던 그 누구에게조차 내어주지 않던 그의 마체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