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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닷 (193)화 (193/240)

- 193화 -

한서의 말에 준성의 호흡이 단숨에 흐트러졌다. 부상으로 인해 차올라 있던 열이 머릿속까지 짓누르는 느낌이 났다.

‘죽어…간다고…….’

좀비가 된 남기혁에게 목을 물어뜯긴 시점에 이미 인지하고 있던 바였다.

아직 백신도 없는 이 세상에서 좀비에게 물려버린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된 사리 분별을 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몸 바쳐 도한서를 지켰고, 그 결과가 지금 이 순간이었다.

‘내가…, 나 자신이 선택한 일이야.’

머리가 시켰든, 몸이 스스로 나섰든, 아무렴 상관없었다.

도한서를 지켰으면 됐다. 도한서가 죽느니, 차라리 자신이 물려버린 게 백배 나았다.

도한서는 백신의 주재료이다. 도한서가 죽어버리면 이 세계는 정말이지 아무런 답도 없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버스팀에게 남겨둔 혈액들과 연구자료로 충분히 백신을 만들 수 있겠지만, 그것마저 실패하면 결국 진짜 해결책인 도한서의 존재가…….

‘뭐라는 거야, 난.’

도한서를 몸 바쳐 지킨 것에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려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백신의 주재료이든 뭐든, 자신이 죽든 말든, 좀비가 되든 말든.

그냥 ‘도한서라서’ 지켰던 건데.

준성은 한서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냉기가 흐르는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오직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그 너머에 보이는 건, 서툰 도한서로서는 도통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를 인간다운 감정 한 조각이다.

‘도한서도 걱정을 하긴 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도한서는 언제나 자신을 걱정했다. 말과 표정으로 직접 드러내진 않았지만, 조금만 곁에 있어 보면 알아채기가 참 쉬웠다.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으면 탐탁지 않아 하고, 언제나 직접 나서서 지켜줄 수 있는 거리에 있길 바랐다. 남기혁과의 담판을 지으려 할 때도 자신을 걱정했기에 대놓고 싫다는 말을 했던 터였다.

살면서 누굴 걱정해본 적 따윈 없을 것 같은 미친놈인데.

그런 미친놈이, 강준성이 죽을까 봐 스스로 피를 줄줄이 뽑아내고 있었다. 분명 귀하디귀한 피인데 이깟 것쯤, 널 살리기 위해서라면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내어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죽음’이라는 단어에도 크게 요동치지 않던 가슴 한쪽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왜 웃어.”

한서가 한쪽 눈꼬리를 꿈틀했다. 준성은 그런 한서에게 붙잡힌 손을 비틀어, 따뜻하게 맞잡았다.

“나 괜찮아.”

왜 웃냐는 말에 답을 주는 대신, 흔들림 없는 차분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한서를 바라보는 강준성의 눈동자는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평온하기만 했다.

진통제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어깨의 심한 욱신거림도, 목의 시큰거림도, 손등의 따끔함도 확연히 둔해졌다. 그래서인지 잠들기 편한 몸 상태가 되어, 눈꺼풀이 조금씩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낫고 싶어서 졸린 거니까 그냥 이대로 푹 자.”

한서가 의사나 할 법한 말을 하며 이불을 끌어 올려주었다. 이런 모습은 아직까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준성은 뻐근한 어깨 때문에 잘 움직여지지 않는 왼손으로 오른쪽 손등 위를 더듬었다. 자는 동안이라도 수혈용 바늘을 뽑아내고 더 이상 한서의 피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금세 제지당했다.

“안 돼.”

“하지만…….”

“강준성, 말 들어.”

한서의 완강한 손아귀 힘과 그의 단호한 눈빛은 도저히 지금의 준성이 이길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이거 떼어내면 내 팔 잘라서 입에 처넣고 억지로 마시게 할 거야.”

“넌 무슨 말을 그렇게 끔찍하게…….”

하여튼 또라이 새끼들 생각하는 거 봐.

준성은 미친놈들은 다 이런가, 하는 눈빛으로 한서를 노려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몰려드는 수면욕이 머리를 통째로 둔하게 만드는 기분이다.

‘일단 좀 자자. 머리가 안 돌아….’

자꾸만 눈앞에 있는 것 위주로만 생각하려 하는 이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처럼 통증이 생생할 땐 그래도 머리가 자극되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몸도 머리도 온통 느슨해져서는 뭘 깊이 생각하려 들질 않았다.

“너…, 일단 내가 자고 일어나면…….”

느릿하게 말을 내뱉던 준성은 하던 말을 완성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까무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몇 시간 후.

준성은 어깨에서 아릿한 통증이 피어오르는 감각을 느끼며 다시금 힘겹게 눈을 떴다.

‘진통제 효과가 다 되어가는 건가….’

새삼 제 부상의 심각함을 통증으로 체감하게 된 준성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도한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방 안에는 준성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었고, 그 옆에는 각종 약품과 도구들이 담긴 수술용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트레이에 올려진 물건 중에서 한서의 온전한 혈액팩 하나를 발견한 준성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눈을 들어 링거 스탠드에 고정된 혈액팩을 확인했다.

“미친…….”

어느새 반이나 줄어있다.

준성이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손등에 연결된 바늘을 급히 뽑아냈다. 찌릿한 따가움과 함께 손등에서 자신의 것인지 한서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혈액팩에 연결된 호스 부분의 잠금장치를 이용해서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조절한 준성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바늘을 트레이에 올려놓았다. 그 끝에 방울져 있던 붉은 피가 몇 번에 걸쳐 똑똑 떨어져나왔다.

한시름 놓고 나니, 이번엔 제 몸의 찝찝함이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씻지도 못했지.’

몸에 몇 시간이나 피가 묻어 있다는 찝찝함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깨와 목의 상처 부분은 치료를 위해 도한서가 직접 닦아둔 모양이지만, 그 외의 부분은 여전했다.

자신의 피, 남기혁의 피, 그리고 좀비의 피까지.

전부 다 닦아내고 싶었다. 상처고 뭐고, 그냥 빨리, 최대한 빨리 닦아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둑하게 남은 핏자국이 꼭 남기혁이 계속 옆에 붙어서 매만지고 있는 것 같아, 생각만으로도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머릿속에 남기혁의 얼굴이 떠오르려 했다.

그 웃는 얼굴이, 그 끔찍한 모습이, 그 악랄한 목소리가.

‘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억이 흐렸다.

‘왜지?’

마치 뿌연 뭔가가 남기혁의 얼굴을 살살 지워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에게 그가 뭘 해왔었고 옥상에서 어떻게 싸웠는지까지도 다 기억나는데, 신기하게도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눈에 띄게 흐려지고 있었다.

‘머리가 멍해서 그런가.’

의문도 잠시, 전신에 차오른 열 때문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잊을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기에 괴로웠던 거니까, 이참에 열 때문이든 자신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든, 그냥 그를 다 잊을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열에 들뜬 몸을 움직인 준성은 조심스레 방을 빠져나왔다. 어디선가 도한서가 불쑥 나와서는 다시 침대에 던져놓고 피부터 마시게 할 것 같아서, 왠지 공포영화 한복판에 있는 듯 스릴감이 넘쳤다. 마침 배경도 딱 알맞은 어둑한 연구시설이고.

씻는 곳이라면 이전에 와서 둘러볼 때 대충 봐뒀었다. 격리 소독실을 지나 살균실에 들어가면 약품 냄새로 가득한 1인 샤워실이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샤워실에 들어가 옷을 벗던 준성은 그제야 거울 앞에 서서 제 몰골을 볼 수 있었다.

열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몸, 왼쪽 어깨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

그리고 목을 감싼 붕대 한쪽에 두툼이 숨겨져 있는 거즈까지.

준성은 거울에 비친 퀭한 눈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서 목을 더듬어 보았다. 목을 감싼 붕대의 질감이 이전 것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견고했다.

손끝이 붕대 속, 두꺼운 거즈가 자리한 위치에 닿는 순간.

“헉…!”

갑자기 숨이 멈췄다. 목을 졸린 것처럼 목구멍이 틀어막히고, 호흡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창백하게 입만 뻐끔거렸다.

손끝이 닿은 상처 부위에서 느껴지는 통증 따윈 아무렴 상관없었다. 1일째 때 지하철 대피소에서 이미 한 번 피가 날 정도로 손을 물려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적응하기 어렵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어깨의 부상이 훨씬 심각하고 아팠기에 목의 통증이 굉장히 둔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온갖 통증 속에서도 목을 물린 자리에서 퍼져 나오는 기이한 감각만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육체적 고통이 배제되어 있었기에 더욱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바로 그 감각.

물린 자리에서부터 주변 세포를 하나하나 갉아 먹고 삼키며 넓게 변이시켜가던 그 끔찍한 감각이 지금, 목에서 여실히 느껴졌다.

꿈속에서 필연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와 연결 지을 수밖에 없었던 그것이 이제는 현실의 강준성을 빠르게 잠식시키고 있었다.

[GAME OVER]

여타 게임에서 흔히 ‘캐릭터의 죽음’을 알릴 때 떠오르던 문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읍!”

‘죽음’이라는 단어를 제 몸에 퍼지는 기이한 감각 속에서 명확히 인지해버린 준성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일시적으로 호흡이 멈춰버린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죽어…? 내가……?’

언제나 냉철하던 머릿속이 거친 파도에 삼켜져 내리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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