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 사람은 얼굴이 되게 하얘. 이상하다.”
“저 먼 곳에서 배를 타고 온 포르투갈 사람이라서 그래.”
코흘리개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남자의 다정한 설명에 인유신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포르투갈 사람은 아닌데요.”
“그럼 네덜란드에서 왔나”
“거기도 아니고요. 저 멀리 동쪽에 있는 한국, 아니 조선……”
이 시대라면 조선에서 왔다고 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조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평행 세계일지도 모른다.
피부색이 다른 사람은 포르투갈인이나 네덜란드인밖에 보지 못한 남자는 버벅거리는 인유신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아내로 보이는 여자가 참견했다.
“그래서 포르투갈 사람들이랑은 피부 색깔이 좀 달랐나 보다. 이쪽이 코끼리 상아처럼 더 희네.”
“하긴 그치들은 희다기보다는 좀 불그스레한 느낌도 있지. 아무튼 노예 장사하려고 온 건 아니지”
“그렇지는 않아요.”
“그럼 됐어.”
그들은 흰 피부의 낯선 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인유신도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무슨 의미가 있나.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닌데.
“이거 먹어.”
아이가 카사바 가루를 쪄서 만든 떡 같은 걸 주었다. 고맙게 받아서 한 입 먹어 보았다. MSG에 길든 그의 입맛에는 싱겁게 느껴졌지만 쫀득쫀득한 찰기는 포만감을 채워 주었다. 하지만 정말 배가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이 가족처럼, 이 요리 또한 허상이니까.
전사 차림의 여자가 길 저쪽에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은징가 님이 찾으신다.”
인유신은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은징가가 머무르는 곳으로 걸어갔다.
중앙아프리카의 태양을 고스란히 옮겨 온 은징가의 영역은 언제나 뜨거운 한낮이었다. 길가에는 나무판자나 나뭇잎과 풀을 엮어 지붕을 올린 흙집들이 즐비하다. 벽에는 갖가지 전통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수백 년의 식민지화에 의해 현재는 소실된 전통들도 온존된 거리다. 역사학자나 문화인류학자들이 이 영역에 발을 딛는다면 제정신을 차리지도 못할 만큼 흥분할 터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인유신도 들떴겠지만 지금은 착잡할 뿐이다. 거리가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대다수가 무기를 들고 있다. 전쟁 준비다.
은징가의 거처는 왕궁이 아니라 길가의 흔하디흔한 집이었다. 집 안은 의외로 시원했다. 햇살이 잘 비치는 벽에 앉아 무기를 손질하던 그녀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인유신은 꾸벅 인사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이번에는 양반다리다. 무릎 꿇고 오랜 시간 앉는 건 아무리 임금님 앞이더라도 곤란한 자세라는 걸 저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찾으셨어요”
“도시는 잘 둘러보았나”
“사람들이 엄청 활기차게 보였어요. 은징가 님의 기억인 거죠”
“기억은 왜곡되기 십상이니.”
은징가는 덤덤하게 중얼거리며 창날을 숫돌에 갈았다. 조금 궁금했다. 하인을 시켜도 될 일인데 왜 직접 하는 걸까. 전사로서의 몸가짐 거처가 수수한 것도 같은 맥락인 건지.
처음 나타났을 때 깃털과 가죽으로 장식한 화려한 옷을 입고 시녀의 등에 오만하게 앉아 있던 사람 같지 않았다.
‘아니, 사람은 아니구나…….’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은징가가 여전히 창날을 갈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편히 묻거라. 나는 너의 왕이 아니며 너도 나의 백성이 아니지 않은가.”
그 말이 맞았다. 히든 보스라는 두려움에 왕이라는 혼란까지 더해져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녀를 어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이전과는 달리 많이 소박해지신 거 같아서요.”
“나는 인정 받지 못한 쭉정이였다. 그렇기에 위엄 있게 보이려 화려하게 차려입었고, 나를 멸시하는 포르투갈 총독 때문에 시녀를 의자로 썼으며,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 때문에 남장을 했다. 지금은 억지로 과시할 필요가 없지.”
“후궁의 첩들이 여장하게 했던 이유도 그래서였어요”
은징가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렇긴 했다만, 썩 변변치 않더군.”
“으음, 여장도 어려운 거였네요.”
어려워할 이유는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이는 건 문제도 아닌 히든 보스다. 역시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은 있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어 긴장을 조금 푼 인유신은 정말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은징가 님은 뭘 하고 싶으신 거예요”
당장에라도 마수들을 풀어 게이트 밖으로 몰아칠 것 같았던 은징가는 잠잠했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너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있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잘은 몰라요. 앙골라에 은징가라는 왕이 있었다는 것도 이름을 듣고서야 겨우 기억이 났거든요. 아, 그때는 나라 이름이 앙골라가 아니었죠.”
“그렇다면 긴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은징가는 손질을 끝낸 창을 옆에 두고 도끼날을 천천히 갈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무기를 손질하는 모습은 마치 하나의 의식 같았다.
“나는 평생 적들과 싸웠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동생이 그녀의 적이었다. 왕이 된 후에는 나라 밖에서는 포르투갈이, 나라 안에서는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그녀의 적이었다.
은징가는 그들의 반란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나 국외로 도주하기도 했다. 건실한 동맹이었던 남편 중 하나도 기어이 그녀의 등에 칼을 꽂으려 했다. 그럼에도 은징가는 승리하여 두 왕국의 왕이 되었으며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가까이에서 본 그녀의 피부는 거칠거칠했으며, 햇볕에 장시간 노출된 피부 특유의 잔주름이 가득했다. 그녀의 궁전은 곧 전쟁터였다.
“최후에는 승리하였으나 적잖은 배신과 반란으로 인해 크디큰 대가를 치렀다.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나는 평생 적들의 칼날 앞에 서야 하는 운명이었던 거지. 단 하루도 편히 잠든 적이 없다.”
전력을 다하여야 하는 전쟁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전쟁을 하는 와중에도 또 다른 전쟁을 우려해야 했다. 모든 전쟁의 끝에 남은 건 긴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토였다. 그녀의 사후에 왕국은 끝내 무너졌다.
거리낄 것이 없어진 지금, 은징가는 뒤돌아볼 필요가 없으며, 제 미진함에 대한 후회가 남지 않도록 그녀의 전력을 온전히 투사할 수 있기를 원했다.
“하니 전쟁을 할 것이니라. 나의 모든 것을 건 전쟁을.”
“…….”
“밖에서 너희의 동족도 준비를 하고 있겠지. 상대 또한 만전의 준비를 갖춰야 나도 전력을 다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전쟁이라……. 인유신은 가만히 입술을 사리물었다. 은징가가 무엇을 바라는지는 알았지만 가슴은 더 무거워졌다. 살아온 시대가 다르니 그녀가 느끼는 전쟁과 자신이 느끼는 전쟁의 감각 또한 다르다.
“표정이 어둡군. 너의 곁에 있던 왕의 아들도 전쟁을 바라지 않던가 그리해야 나의 주검에서 결정석을 가져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 왕의 혈계가 나에게 기억을 덧씌웠고.”
틀린 말은 아니다. 현규하가 ®ÀÇ로 가는 열쇠를 얻기 위해서는 히든 보스의 결정석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와 싸워야 했으니. 하지만 그것을 위해 던전 밖까지 상황을 끌고 나오게 될 줄은 몰랐다.
인유신은 무심결에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상태창을 살폈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 ]
차라리 저를 향한 살의만이 가득하던 때가 나았다.
“……그 혈계라는 게 뭔가요”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다만 신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세계의 왕이니만큼 내 삶의 기억을 통째로 덧씌울 정도의 힘이 있더군. 너의 세계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광신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의지처에 가까워요.”
“내 세계 또한 그러했다. 바다의 신이며 어부를 수호하는 키안다를 섬기긴 했지만 신봉한 건 아니었으며, 조상신을 모시는 것도 의식에 지나지 않았지. 하지만 기록이 덧씌워진 나는 키안다의 신성한 음성을 직접 들었다. 포르투갈인의 종교에 귀의하여 ‘안나 드 소사’라는 새로운 이름까지 받았지. 종교를 이용하자는 것 자체는 매우 합리적인 발상이었다만.”
“…….”
“그뿐만이 아니다.”
은징가의 검은 눈이 고요하게 응시했다.
“왕의 혈계가 너에게 전하고자 하는 기억이 있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