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답지 않게 무겁게 침묵하던 현규하는 불현듯 손으로 눈을 가리며 인유신의 얼굴을 피했다. 몹시 창피해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주인님이 너무 눈부십니다. 나같이 추잡한 인간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성스러운 후광이 비치고 있어요……. 어떻게 이따위 더러운 쓰레기 같은 미물에게 감히 유신 씨처럼 홀리한 주인님이 생겨서……. 그야말로 홀리몰리네요…….”
이건 또 새로운 패턴이었다. 어지간하면 그의 헛소리를 흘려 넘기는 인유신마저도 민망해서 뺨이 발갛게 익었다.
“……아무튼, 갖고 있으세요”
“있긴 있어요……. ‘무닌의 눈’이라고…….”
현규하는 황송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아공간에서 새로운 아티팩트를 꺼내 양손으로 바쳤다. 그의 아공간에는 무기를 제외하고도 인유신의 살림살이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아이템들이 들어 있을 거 같았다.
공손히 바친 아티팩트는 오딘에게 보고하는 한 쌍의 까마귀라는 신화 속에서의 묘사 그대로 작은 도래까마귀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무닌의 눈’을 쓰면 24시간 내내 주인님의 행적이 나한테 보이는데 괜찮겠어요 솔직히 이건 스토킹 용도로도 아주 쓸 만합니다.”
“저야 뭐 규하 씨나 승기 만나는 거 아니면 맨날 집에만 있는데요. 말하지 못할 이상한 곳을 다니는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어요.”
“역시 성스러운 나의 주인님……. 세계 5대 성인으로 주인님이 칭송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인유신은 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말문을 돌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소유주로서 내 기록은 이미 되어 있으니까 유신 씨가 여기에 마나만 주입하면 돼요. 마나가 없으면 피를 떨어트려도 되고요.”
얼른 마나를 주입하자 현규하가 허공을 손가락질했다.
“유신 씨 눈에는 안 보이겠지만 여기에 당신의 좌……. 아니, 위치가 뜹니다. 병원 침대에 있네요.”
“와, 그렇게 자세히 나와요”
“화면을 확대하면 1미터 이하의 거리를 이동해도 실시간으로 갱신돼요.”
인유신은 신기하게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긴 하지만.
“오딘의 까마귀는 무닌이랑 후긴이잖아요. 혹시 ‘후긴의 눈’은 없어요”
“있습니다. 역시 우리 주인님은 모르는 게 없네요. 원래 ‘무닌의 눈’과 같이 세트인 아티팩트인데 30년 전쯤부터 행방이 묘연해졌다고 하더라고요. 쌍방이 한 세트를 같이 쓰면 활용도가 훨씬 높다는 얘기는 있던데……. 아무튼 스토킹만이 아니라 경호용으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보니까 각국의 정부에서 노리고 있는데 아직도 찾았다는 소식은 없네요. 뭐, 득템한 걸 숨겼을 수도 있지만요.”
“규하 씨는 어떻게 갖게 됐어요”
“정정당당하게 던전에서 획득했습니다.”
현규하는 발키리가 까마귀와 이야기를 나누던 던전에서 아티팩트를 획득하게 된 과정을 재미나게 풀어 주었고, 던전 얘기에 재미를 붙인 인유신도 귀를 쫑긋 세웠다.
“이 모든 고단한 파밍의 과정이 전부 인간 이하의 비루한 현규하 놈을 구원하기 위해 친히 하늘에서 내려온 성 인유신 님께 바치기 위한…….”
결국 인유신은 현규하의 입을 베개로 막고 말았다.
주접인지 헛소리인지 모호한 현규하의 발언으로 인한 창피함이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게이트 뒤처리로 한창 바쁜 시기에 계속 병가를 내는 것도 미안해서 화요일에 바로 퇴원했다.
아침을 먹고 가방을 싸고 있는데 현규하가 문득 ‘만두카이의 부스’와 ‘중긴 카툰의 벅특’을 아공간에서 꺼냈다.
“주인님에게 주는 걸 깜빡할 뻔했네요.”
300억+α원의 아티팩트다. 인유신은 바짝 긴장하여 두 손으로 아티팩트들을 받았다. 300억+α원을 들고 있다는 걸 자각하니 손까지 발발발 떨렸다.
“근데 이거 어디다 보관하면 될까요 집에 놔두면 도둑 들어올까 봐 쫄아서 밖에 나가지도 못할 거 같은데……. 은행 금고”
은행 금고는 사용료가 비쌀 거 같아서 고민하는데, 현규하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아공간에 넣으면 되잖아요.”
“제 아공간에는 이거 무거워서 못 들어갈걸요.”
“……둘 합쳐서 2킬로그램도 안 될 텐데요”
“확실히 안 되겠네요.”
“…….”
인유신은 제 아공간을 탈탈 털어서 현규하에게 보여 주었다. 긴급할 때 쓰기 위해서 소분한 햄스터 사료 봉지 몇 개가 전부였다. 그 모습을 본 현규하는 난생처음으로 고시원에 들어간 재벌 같은 표정이 되었다.
충격받은 얼굴로 미간을 누르며 고뇌하던 그는 인유신이 짐을 다 싸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무겁게 침음했다.
“그, 아공간의 용량을 조금 늘릴 수 있는 제작템이 있어요. 가성비 최악이라서 쓰는 사람이 거의 없긴 한데……. 물불 가릴 때가 아니군요.”
“1킬로그램만 더 늘어나도 저는 두 배쯤 늘어나는 거잖아요.”
“……그렇네요.”
서민 체험을 하는 재벌처럼 연이어 충격을 받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인유신은 그냥 웃고 말았다.
사실 아공간의 용량 따위는 늘리지 않아도 되지만, 조금이나마 그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면 뭐라도 하고 싶었다. 지금은 현규하가 제 버프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아공간에 마나를 증폭하는 아티팩트를 갖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 그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인유신은 이를 다짐하는 것처럼 왼손의 반지를 오른손으로 꼭 감쌌다. 손바닥의 피부를 찌르는 햄스터의 굴곡이 힘을 주는 것 같았다.
한국 최초로 제작 스킬을 각성한 장인의 공방이 있던 곳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 한국에서 가장 번화한 공방 거리가 되었다.
정부의 지원은 물론이고 공방에서 제작한 아이템과 무기를 사용하는 길드들의 후원도 탄탄하다. 그 덕분에 공방 거리에는 마수들의 접근을 막는 최고급 실드 코어가 빽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청와대와 대형 길드 본사들 다음으로 안전한 곳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떠올리면서 인유신은 신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방 거리에는 와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제작템을 살 일이 없다 보니까요.”
“음, 그러고 보니 나도 공방에서 뭔가를 산 적은 거의 없네요.”
현규하와 공통점이 하나 더 생겼다. 자신과는 달리 그는 갖고 있는 아티팩트만으로도 차고 넘쳐서 구입하지 않는 것뿐이지만.
“형님!”
“금방 왔네 퇴원 축하한다. 몸은 괜찮냐”
“수액 맞으니까 거뜬해요.”
병원에서 나오기 전에 현규하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권성길이 인유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인유신의 입가에 헤벌쭉 웃음이 그려졌고, 현규하의 미간에는 미세한 금이 생겼다.
등 뒤의 현규하가 갑자기 티셔츠 밑단을 슬쩍 잡아당기자 인유신이 돌아보았다.
“어, 규하 씨. 왜요”
“하찮은 미물은 치졸한 질투심을 참는 중이에요.”
“……”
갸웃하는 인유신의 옆에서 권성길이 입을 열었다.
“아까는 밥 먹다가 전화받아서 제대로 못 물어봤는데 규하가 아니라 유신이의 아공간 용량을 확장한다고”
“주인님 주려고 마나를 증폭하는 아티팩트를 샀는데 무게 때문에 아공간에 못 들어가더라고요. 이런 치명적인 실수를 하다니…….”
“크흠, 큼……. 그래.”
권성길은 ‘유신이의 마나를 늘려서 어디다 쓰려고’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온 눈치였지만 현명한 어른답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제까지 겪은 것 중 가장 선량한 반응이었기에 인유신의 눈에는 다시 콩깍지가 쓰였다.
“아공간 용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마나 전도율이 제일 높은 오레이칼코스를 써야 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추천하는 편은 아니야. 가격을 생각하면 너무 비효율적이라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게 훨씬 싸게 먹히거든.”
“주인님의 가녀린 팔로 무거운 캐리어를 어떻게 끌고 다니게 해요.”
인유신은 힐끔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요새는 운동을 좀 해서 그 정도로 깡마르지는 않은 거 같은데.
“권장하는 건 아니지만 돈 준다는데 안 할 수는 없지. 술식이 완성되어 있는 제작 기술이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유신아.”
“넵.”
“공정 전에 와서 네 마나를 주입하면 돼. 그 전에 어떤 문신을 할 건지도 생각해 둬라.”
“문신이요”
“착용하는 아이템이 아니라서 그래. 오레이칼코스를 결정석으로 만든 특수 용액과 섞어서 신체에 문신으로 새겨야 하거든. 용량에 따라서 문신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거 유념해 두고.”
왼쪽 손목에 테이밍한 햄스터들과 박쥐의 문신도 있으니 더 새겨도 별 상관은 없었다.
“유신 씨, 몇 킬로그램 늘릴까요”
“아티팩트를 보관할 정도면 돼요.”
용량이 커질수록 편하기야 하겠지만 자신이 거기에 넣을 게 햄스터 사료나 햄스터 간식 말고 뭐가 있겠는가.
인유신의 대답을 들은 현규하는 권성길과 의논을 시작했다. 오레이칼코스와 특수 용액의 배합이라든가 재료 조달이라든가 하는 전문적인 부분으로 넘어가서 대화를 들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사이, 안쪽 사무실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왔다. 한 명은 인유신도 아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비서님.”
“유신 씨!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벌써 퇴원했어요 게이트 사건 때문에 바빠서 병문안을 가지도 못했네요.”
박승기만큼이나 친화력이 좋아 보이는 한준수였다. 같이 나온 남자는 권승길의 도제여서 따로 소개를 받았다. 한준수는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게이트에서 소모한 길드의 무구 주문을 위해 공방을 직접 찾아온 참이라고 설명했다.
“비서님이 이런 일까지 하시는 거예요”
“하하. 저야 원래는 길드장님 수발을 드는 게 일이지만, 권 장인님께는 얼굴도장도 찍을 겸 직접 찾아뵙는 게 좋으니까요. 유신 씨는 웬일이에요”
“아공간 용량을 늘리려고요.”
“오, 그 문신이요 나도 있어요.”
성큼 정장 소매를 걷는 한준수의 팔뚝에 새겨진 문신을 본 인유신은 질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