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범이 형. 권 사장님 뵙고 왔는데 화살 깃을 웡윗으로 교체하려면 재료 조달에 시간이 걸린다네요. 형이 직접 재료 조달해서 주면 빨리 되고요.”
“오케이. 빡세게 던전 돌면서 깃털이나 주워 모아야겠구만.”
“길드장님은 아직 위에 계시죠”
“아직 출발 안 했어.”
장범에게 용건을 전한 한준수는 지원팀에 들른 뒤 다시 공태성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오늘은 공태성이 ‘풀 한 포기까지 경애하는 왕’의 게이트를 공략한 기여도에 따른 보상 문제로 아 국장과 협상하러 이능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직속 비서인 한준수도 덩달아 바빠졌다. 바쁜 와중에도 인유신과 얘기할 짬을 낸 건 그 애가 꽤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다람쥐처럼 순해 보이는 애가 어쩌다 현규하와 만나게 된 건지 여전히 미스터리라니까.’
보다 보니 현규하가 잡혀 있는 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말이다.
“길드장님, 다녀왔습니다.”
막 준비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오던 공태성이 가볍게 고갯짓했다.
“공방에서의 용건은 잘 끝났나”
“범이 형이 부탁했던 화살 깃의 재료가 없었다는 것만 빼면요. 참, 유신이와 현규하도 만났습니다.”
공태성이 힐끗 눈을 치떴다.
“퇴원이 꽤 빠르군.”
“현규하가 오버해서 입원한 거 같기도 합니다. 히든 보스에게 납치되었으니 오버할 만도 하지만요.”
그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다시 걸어가면서 한준수는 수다를 늘어놓았다.
“경매에서 현규하가 낙찰했다는 아티팩트를 보관하기 위해 아공간의 용량을 늘리려는 모양입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까 어째 저보다도 무게 한도가 낮은 거 같습니다.”
한준수의 수다를 한 귀로 흘리던 공태성이 그 말에 문득 입술을 뗐다. 시선은 여전히 무심하게 앞을 향한 채였다.
“오레이칼코스로”
“넵.”
“그럼 앞으로 적어도 두 번 이상은 권 장인의 공방에 방문하겠군.”
“음, 그렇겠죠.”
이런 걸 왜 궁금해하나 싶었지만 되묻기도 전에 공태성은 앞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점심을 이르게 먹고 권성길의 공방에 잠깐 들렀다가 귀가한 참이다. 옥탑방까지 올라왔는데도 여전히 해가 훤한 시간이었다.
병원에서 하는 거 없이 쉬기만 했지만 집보다 편하지는 않았다. 현규하도 어느 정도 피로할 것이다. 돌아가서 쉬라는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입에서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일요일 저녁부터 하루 종일 현규하와 같이 지내다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몰려온 허전함 탓인가. 그렇게 추측한다고 하면 더욱 의아해졌다. 침식 게이트 때는 일주일이나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으면서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눈치챈 현규하가 시선을 기울였다.
“집에 가면 뭐 할 거예요”
“음, 6세 수발도 들어야 하고, 8세에게 밥도 주고, 계속 집 비웠으니까 청소나 좀 하려고요.”
“애완쥐의 미덕 21조. 주인님 청소 도와주기.”
“규하 씨는 저 때문에 밤에 잠도 잘 못 잤잖아요. 게이트의 피로도 덜 풀리셨을 텐데.”
“내가 50미터 달리기를 하면 몇 초가 나올 거 같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11초보다 빠를 거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만큼 체력도 자신보다 좋다는 뜻으로 한 말일 터다. 허전함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머지 조항들은 뭐예요”
현규하가 입가에 검지를 세우며 왼쪽 눈을 찡긋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비밀은 남자를 아름답게 만들죠.”
“거기서 더 아름다워져서 뭐 하시려구…….”
“팔놈보다 주인님에게 더 귀여움받을 거예요.”
그야 8세는 귀엽다. 지능이 높은 덕인지 보통의 햄스터들보다 표정도 다양하고 온갖 울음소리로 재잘거리는 것도 귀여웠다. 그렇지만…….
‘당연히 규하 씨가 더 귀엽지 않나’
속에서 말이 몽글거렸지만 그 말을 했다가 집 안에 있는 8세가 들으면 크게 낙담할 거 같아서 현관문부터 열었다. 나중에 둘이 있을 때 말해 줘야겠다.
그날 인유신은 현규하의 능력이 청소할 때에도 아주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이코키네시스로 물건을 척척 들어 올리니 평소에는 손이 가지 않던 구석구석까지 쓸고 닦을 수 있었다. 다음에 대청소를 하게 되면 현규하에게 꼭 부탁해서 냉장고나 선반 아래까지 싹싹 청소해야겠다.
두 마리 햄스터와 뜨거운 상봉을 하고, 청소도 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옥탑방의 몇 안 되는 장점 중의 하나가 전망 좋은 옥상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는 거라던데, 정작 인유신은 2년째 살면서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불러서 만날 사람이야 박승기뿐인데, 둘이 옥탑방에서 고기를 구워 먹기에는 준비해야 할 게 많아서 번거로웠다. 자주 만나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옥상에서 뭘 먹은 적 없어요”
“날씨 좋을 때는 저 혼자 밥 먹긴 했어요.”
“그럼 나랑 같이 고기나 구워 먹어요. 주인님의 첫 경험을 하나 가져가서 기쁘네요.”
“어,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는데요”
“애완쥐의 카드는 모두 주인님의 카드랍니다.”
현규하는 즉시 인유신을 데리고 근처 마트로 가서 숯과 화로, 가마솥 뚜껑 불판 등등을 한 아름 사 왔다. 중간에 정육 식당에 들러서 채끝살과 된장찌개도 사는 건 물론이었다.
해가 저물며 옥탑방에도 선선한 공기가 흘러들었다.
“우리의 첫 경험을 위하여.”
인유신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소주잔을 쨍하고 부딪쳤다. 첫 경험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이상한 의미로 들리는 건 과민 반응을 하는 것일 테다. ……정말 다른 뜻은 없겠지
기운을 회복한 8세도 현규하가 구워 주는 고기를 오물오물 먹었다. 입이 작아서 쌈을 싸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엄청 좋아할 거 같은데.
8세는 고기를 먹으면서도 화로가 신기한지 기웃기웃 구경했다. 그러다가 불판을 닦으려 들어 올리고 있을 때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찌익!”
“8세야!”
벌겋게 타는 숯 위로 추락하기 직전, 손바닥에 쏙 올라오는 자그마한 몸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현규하가 혀를 차며 8세를 도로 테이블에 앉혔다.
“주인님 앞인데 정신도 안 챙기고 뭘 하는 거야. 쓸모없는 놈.”
8세는 대꾸도 없이 풀썩 기절했다.
약간의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저녁 식사는 무척 맛있었다. 인유신은 어둠이 으슥하게 몰려오는 동시에 점차로 밝아지는 거리의 불빛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이 옥탑방에서 수도 없는 야경을 보았지만, 지금처럼 탄성이 나온 적이 있었던가.
문득 돌아보니 현규하가 있으며 8세가 있는 풍경이 펼쳐진다. 야경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 풍경은 인유신의 일상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해 준 사람에게 제 마음의 혼란함을 숨기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인유신은 솔직하지도 못하고 회피하는 자신이 몹시 한심하게 느껴졌다.
현규하는 위험한 불길을 헤치고 와 어린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곳에서 죽었어야 한다며 후회하고 있다는 걸 그가 알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무리 테이밍으로 얽매여 있다 하더라도 결코 좋은 감정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나에게 실망하겠지.
인유신은 소주를 마시는 척하며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감추었다. 차라리 그의 실망을 받는 것이 나은가. 짙은 실망감이 생기면 스스로의 감정 중 무엇이 진심인지 그가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더 이상 테이밍으로 엮일 이유도 없고,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이유도 없다. 그가 자신으로 인해 더는 다치지 않아도 된다.
단지, 현규하의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기만 한다면.
그의 냉담한 시선을 상상해 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미는 쓰라린 감정이 있었다. 이 순간 자신의 감정 또한 시스템에서 읽을 수 있다면 불안감이라는 단어로 가득할 것이다.
인유신은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 불안감을 느끼는 거지. 바라 왔던 결과여야 할 텐데.
‘……나는 너무 이기적인 거 같아.’
그렇다면 적어도 제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보는 게 그에 대한 도리일 것이다.
인유신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규하 씨.”
“응”
“할 말이 있는데요…….”
그 말에 테이블을 정리하던 현규하가 옆에 앉아 경청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옥상에 따로 불을 밝히지 않아 현규하의 얼굴은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 인 걸까……. 마음의 약한 부분이 수군거렸다. 그가 얼굴에 전에 없던 냉담함을 드러내더라도 잘 보이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인유신은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회피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그가 했었던, 회피.
현규하의 얼굴에 드러나는 사소한 감정의 편린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인유신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어요. 14년 전에 절 구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은은하게 비치는 현규하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 차올랐다. 잠깐 숨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짓던 그는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알고 있었어요”
“지난번의 게이트에서 떠올렸어요. 규하 씨가 갖고 있던 그 펜던트가 저한테 기억을 전하게 해 주었대요.”
인유신은 은징가가 했던 말을 전해 주었다. 묵묵히 듣던 현규하가 무거운 날숨을 토해 내었다.
“경매에 나왔던 결정석의 주인이 은징가인 걸 알고 혹시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트라우마가 살아나는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그런 일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만 펜던트가 대체 왜 유신 씨의 기억을…….”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바로 말하지 않았던 건 순전히 제 탓이에요.”
인유신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깍지를 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14년 전에 절 구해 준 사람이 규하 씨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순간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규하 씨가 절 구해 주지 않았어야 했는데, 하고.”
“…….”
“진짜 못된 생각이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부모님이 그렇게까지 해서 절 살릴 이유가 있었는지…….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부모님이 살아 있었다면 그분들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구했을 텐데……. 그래서 규하 씨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터무니없이 이기적인 말이 아닌가.
그 어린 나이에도 불길 속에 뛰어들어 자신을 구해 준 사람에게, 제 부모님을 보고 사랑을 믿게 되었다는 사람에게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매도하는 것과 다른 바가 무엇인지. 당장 그가 경멸하고, 화를 내고, 비난하고, 외면해도 지당했다.
인유신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무엇이든 충격받지 말자고 다잡으며 깍지를 낀 손에 힘을 더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현규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인유신은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역시 많이 언짢겠지. 기껏 구해 줬더니 이딴 말을 하는 인간을 겪는 건 그도 처음일 테니까.
“정말 죄…….”
다시금 입을 열었을 무렵, 툭 하고 어깨에 뭔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인유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현규하가 마른 음성으로 속삭였다.
“유신 씨는 죽고 싶어요”
건조한 음성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인유신은 어깨에 닿는 무게감만으로도 추락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대답했다.
“자살을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는, 죽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나 기회가 오면 그걸 피하지 않고 바로 수긍할 거 같아요. 제 죽음에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그게 바로 절 구하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보답할 기회가 아닌가 하고…….”
느릿느릿 말을 잇던 인유신은 뒤늦게 멈칫했다. 어깨에 기댄 현규하의 얼굴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기대었을 때부터 아니면 자신이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현규하의 입술 사이에서 가늘게 흐르는 메마른 음성의 끝이 잘게 떨렸다. 그것은 인유신으로서는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던 절박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