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214)

“사투리 좋지, 좋아. 다 좋은데……. 저렇게 하드코어하게 쓰는 사투리를 이제 누가 통역해 주냐고. 유신 씨, 개성도 같은 북쪽인데 육진 사투리 알아요 나는 서울 촌놈이라서 사투리는 하나도 모르거든.”

“지방 차별적인 발언인데요! 그건 인천도 서울 남쪽이니까 제주도 사투리 안다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개성도 사투리 거의 없어요.”

공태성이 미간을 찌푸리며 참견했다.

“저 고래, 텔레파시 쓸 수 있다.”

“뭐야. 쓸 수 있는데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고”

“슳슴메(싫어). 텔레파시느 답답함메.”

“흠, 그래”

손짓으로 인유신을 뒤로 물러가게 한 현규하가 목을 가볍게 꺾으며 고래에게 걸어갔다. 텔레파시를 쓸 때까지 존나 패 버리겠다는 의지를 눈빛에서 읽은 고래가 황급히 외쳤다.

『알았어! 텔레파시 쓸게요! 쓰면 되잖아!』

“진작 그럴 것이지.”

현규하는 눈빛 한 번에 바닥에 납작 붙은 고래에게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너 왜 사투리를 하드하게 써.”

『세계를 건너올 때마다 처음 만나는 인간에게 언어를 학습하거든. 여기에서는 그 인간이 평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회령에만 살았던 할머니였단 말이야.』

“그래서 네 정체가 뭔데.”

그 말이 나오자 고래는 으쓱으쓱한 표정으로 지느러미를 파닥거렸다.

『대지를 떠받치고 있는 북쪽의 고래, 그게 바로 나야.』

인유신은 혹시나 해서 루마니아나 구 세르비아 신화에 비슷한 내용이 있는지 휴대폰으로 찾아보았다. 있긴 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검색한 내용에 나오는 신화는…….

현규하도 미간을 찌푸리며 같은 지점을 지적했다.

“그건 고래가 아니라 물고기잖아.”

『그치만 물고기보다는 고래가 훨씬 더 귀여운걸! 창세신께 부탁드려서 투영되는 영상을 고래로 바꿨어.』

본질은 물고기라는 걸까. 마침 생각나는 게 있었다. 공태성에게서 느껴졌던 거대한 물고기의 그림자가 바로 저 고래였나 보다.

‘이 얘기는 규하 씨랑 둘이 있을 때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지금은 일단 고래의 얘기를 듣기로 했다.

검색해 본 신화에 따르자면 이 고래의 이름은 솜노로스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계속 졸기만 하는 이 잠꾸러기는, 잠시 다른 신과 자리를 교대했다. 하필 그 무렵이 창세신 둠네제울이 거인들을 벌하기 위한 대홍수를 일으켰을 때였기 때문에 그만 물살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솜노로스는 신화 밖의 이야기를 했다.

『떠내려가다가 졸려서 자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세계의 틈을 지나 ®ÀÇ가 아닌 다른 세계로 떨어졌지 뭐야. 그때부터 돌아가려고 계속 틈이 생길 때마다 세계를 지나다니고 있었어. ‘파계’ 스킬을 쓰든, 세계의 틈을 지나든 어느 세계로 갈지는 전부 랜덤이니까.』

“뭐 이런 멍청한 물고기 새끼가 다 있지.”

“동감이다.”

현규하와 공태성의 의견이 최초로 일치한 날이 아닐까, 하고 인유신은 생각했다.

솜노로스가 주둥이를 부르르 떨었다. 아마 삐쭉거리는 거 같다.

『세계의 틈도 나 정도 되니까 찾을 수 있는 거거든』

“운에 맡기고 랜덤으로 방랑하다가 공태성을 만났다는 건가”

『응! 얘기를 나눠 보니까 ®ÀÇ에 가면 약을 구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서로 손을 잡기로 했지. ®ÀÇ로 가는 방법을 알려 주기로.』

“그 방법이 내 심장이라는 거고.”

지금까지 제법 뻔뻔했던 솜노로스도 그 말에는 눈치를 살폈다.

『®ÀÇ의 피가 흐르는 인간을 이용하면 열쇠를 쓸 수 있으니까……. 나도 이 세계에 도착했을 때 정말 놀랐어. 설마 신들이 떠나간 세계에 열쇠가 뿌려져 있을 줄은 몰랐거든.』

처음부터 현규하를 노렸던 건 아니었다고 솜노로스는 설명했다. 이아드로 가는 열쇠들이 세계에 뿌려져 있다는 걸 알게 된 솜노로스는 그 열쇠를 사용할 사람, 즉 이아드의 피가 흐르는 인간이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다 찾게 된 게 현규하였다.

『나는 ®ÀÇ를 나온 지 오래되어서 왕이 자식을 낳았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 정말이야.』

“어쨌든 규하 씨를 노린 건 사실이잖아요.”

『그건 미안해……. 변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아. 그치만 고향에 정말 돌아가고 싶었는걸…….』

“규하 씨에게 부탁하면 된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왕자님을 알게 된 게 계약을 한 뒤라서……. 계약까지 했는데 배신할 수는 없었거든…….』

인유신의 날 선 추궁에 솜노로스가 시무룩해하는 표정으로 지느러미를 꼼지락거렸다. 그에 비해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전설 속 신비를 앞에 두고도 현규하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ÀÇ에서 멸망이 진행 중이라는 건 알고 있고 가 봤자 너도 곧 죽을걸”

멸망하는 세계, 이아드.

그 단어의 의미가 인식된 순간, 인유신의 의식은 삽시간에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솜노로스의 경악성이 아주 먼 곳에서 흩어졌다.

사위를 지배하는 흑암. 화려한 예복과 너덜너덜한 누더기를 입은 여자. 들려오는 목소리. 멸망하는 세계를 지탱하는 왕과 그의 유일한 자식. 알고 있다. 겪었다.

그리고 앞서가는 작은 소년의 등. 피에 젖은 등. 그를 지켜 주던 등.

【작은 아가야.】

흑암 속에서 여자가 고요히 미소했다.

【첫 번째 기억은 억지로 떠올리지 않아도 된단다. 그 아이의 기억과 같은 걸음을 딛지 못한다면 굳이 필요 없는 기억이니까.】

이어.

어둠이 걷혔다.

“유신 씨, 괜찮아요”

인유신은 멍하니 눈썹을 깜빡거렸다. 의식이 끊겼을 때 휘청거리기라도 했는지 현규하가 그를 품에 안고서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앰버색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잠들어 있던 기억이 짙게 번지며 살아났다. 그와 휩쓸렸던 침식 게이트. 그곳에서 만난 신.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

……어째서 이걸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거지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서 멍한 시선을 느리게 깜빡거리자, 현규하가 표정을 굳히며 일어났다.

“역시 어제 일 때문에 많이 놀라고 피곤했나 봐요. 잠깐만 기다려요. 저 원흉을 당장 죽여 버릴 테니까.”

“야.”

『멸망! 멸망이라니!』

“아, 아뇨. 괜찮아요. 현기증만 조금 난 거예요.”

“공태성 개새끼야. 주인님을 레스토랑으로 모셔 갔으면 최소 20코스 요리는 바쳤어야지.”

『왕자님! 갑자기 멸망이 왜 나와!』

“네 주인이 스테이크 썰던 중에 창문 깨고 들이닥친 게 누구였지”

“멸망이 무신 말임메!”

다른 대화에 몰두한 그들이 텔레파시를 무시하자 솜노로스가 소리를 꽥 질렀다. 그는 커다란 눈동자를 꿈뻑거리면서 정신없이 서성거렸다.

얼굴만 해도 벽 한 면을 다 차지하고도 남는 크기다. 그 덩치로 왔다 갔다 하니 엄청나게 정신 사나웠다.

“멸망이 멸망이지 무슨 뜻이 따로 있겠어.”

성의 없이 대꾸한 현규하는 인유신을 양팔로 번쩍 안아 올렸다.

“공태성, 네가 주인님 뒷조사를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나”

“별걸 다 알아냈군. 네가 연애질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인유신도 ®ÀÇ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공태성이 앉아 있는 침대의 아래쪽 다리가 우지끈 부러졌다. 들을 건 다 들은 현규하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공태성과 “왕자님! 멸망! 멸망이 무시기라구! 제대로 말해 줍소꼬망!”이라 외치는 솜노로스를 무시하고 창문 밖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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