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온 뒤에 진짜 야식을 시켜서 치킨을 뜯었다. 오랜만에 맥주를 마셨더니 졸려서 잠들었고…….
인유신은 퍼뜩 이불 밑으로 손을 넣어서 제 몸을 더듬었다. 옷이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속옷도 제대로 입고 있다. 그럼, 아무 일 없었던 게 맞겠지……
그 기색을 눈치챈 현규하가 새치름하게 눈을 흘겼다.
“핥아 보지도 못했는데 오해를 사다니 억울하네요.”
“서, 서, 성희롱……!”
“빨아 보지도 못했는데 오해를 사다니 억울하네요.”
“더 심해졌는데요!”
“억울하니까 오해를 기정사실화하도록 하죠.”
말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정말 현규하는 매트리스 위로 올라오려 했고, 인유신은 비명을 지르며 쿠션을 붕붕 휘둘렀다. 현규하는 고개만 이리저리 꺾으면서 쿠션을 샥샥 피했다. 얄미웠다.
결과적으로 아침부터 신나게 온몸을 흔드는 운동을 한 게 되어 버린 인유신만 헥헥거리며 엎어졌다.
“아침 운동은 혈액 순환에 좋습니다.”
“근데 매트리스도 아니고 왜 바닥에서 자고 있었어요”
“매트리스가 좁으니까 잠든 유신 씨가 차려 놓은 밥상이 되어서 바로 옆에 있잖아요. 내가 과연 인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서요.”
“……만약에 다음번에 저희 집에서 자게 되면 규하 씨가 매트리스 써요. 제가 방바닥에서 잘게요.”
“쥐새끼가 어떻게 감히 주인님을 몰아내고 혼자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요.”
“원래 집사들은 자기가 굶어도 반려동물들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 주는 거잖아요.”
왠지 납득된 기세로 끄덕거리던 현규하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넘어갈 뻔했네. 주인님도 꽤 고단수가 되었는데요 집이 좁아서 매트리스 큰 거는 못 넣으니까 내 침낭 갖고 올게요.”
그렇게 은근슬쩍 하룻밤 자겠다는 얘기를 찔러 넣은 현규하가 분위기를 환기하듯 가볍게 손바닥을 쳤다.
“그럼 오늘은 오후 출근이니까 산뜻하게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해 볼까요.”
“밥! 밥부터 먹어야죠!”
인유신은 다급히 냉장고를 열었으나 밥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새 정신이 없어서 밥하는 걸 잊었다. 배달 어플을 둘러보니 영업을 시작한 샌드위치 가게가 있었다.
“여기서 시킬까요”
“내가 갔다 오는 게 더 빨라요.”
샌드위치를 사러 가는 현규하를 배웅하고 온 인유신은 매트리스에 털퍽 드러누웠다. 아침부터 열심히 움직였더니 벌써 피곤하다.
목을 1,080도 돌려 버리고 싶어 하는 현규하를 피해 어젯밤부터 계속 은신처에 숨어 있던 8세가 그제야 슬금슬금 케이지에서 나왔다.
“삐웅, 삐웅.”
“에이, 규하 씨도 정말 널 죽이려고 하는 건 아닐 거야. ……아마도.”
“뵤오…….”
가슴팍으로 올라와서 이마를 콩 박는 8세의 등을 어루만지며 치맥과 함께한 어젯밤의 대화를 상기했다.
인유신은 갑자기 침식 게이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는 사실과 은징가에게 들었던 얘기, 공태성을 볼 때마다 거대한 물고기를 느꼈던 일 등을 전부 말했다. 현규하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 신이 유신 씨의 기억을 지웠던 거 같습니다.〉
〈그럼 진짜 ®ÀÇ의 신이에요 찾아보니까 우리 쪽 루마니아 신화에도 동명의 신이 있던걸요.〉
〈여기는 신이 없는 세계니까요.〉
〈아, 참.〉
어제부터 갑자기 솜노로스니 우르시토아레니 하는 이들과 마주치다 보니 깜빡했다.
〈침식 게이트에서 내가 멸망의 원인에 대해 했던 말 기억나죠〉
인유신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생기가 쇠락하여 서서히 잦아드는 멸망도 있죠. 동물은 새끼를 수태하지 못하고, 식물은 열매와 낟알이 영글지 못하게 될 겁니다. 대지는 버석하게 메마르고, 태양조차 온전한 빛을 내리쬐지 못하는 잿빛 하늘의 아래에서 느릿느릿 종국으로 흐르는, 절망이 아닌 체념이 지배하는 온건하고 고요한 멸망이에요.》
요약하자면 생명력이 쇠잔하여 멸망한 세계라는 설명이었다.
〈®ÀÇ가 멸망하고 있는 원인도 그거예요. 그 침식 게이트는 ®ÀÇ와 연결된 일종의 통로였거든요. 으음, 말로 설명하려니까 복잡하네.〉
파계나 세계의 틈을 통해서 이동할 때에는 자신이 가고 싶은 세계를 정할 수 없다. 하지만 특정한 침식 게이트를 통하면 이아드와 철의 시대를 잠깐이나마 이을 수 있었다. 생기를 잃으며 멸망한 침식 게이트는 바로 이아드의 미래였으므로.
그렇게 이어진 침식 게이트는 보스 몬스터가 없었다. 9살에 겪은 침식 게이트도 그가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와 만난 뒤에야 보스 몬스터가 생성되어 클리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현규하는 설명했다.
〈내가 ®ÀÇ에서 온 존재를 만나지 않고 게이트만 클리어해서 빠져나갈까 봐 그런 거 같아요. 여하튼 그래서 침식 게이트를 둘러싸고 있던 그 어둠도 ®ÀÇ의 피가 흘러야 진입할 수 있는 건데……. 유신 씨는 어떻게 들어갔을까요.〉
〈으음, 그러게요.〉
다시 생각을 되짚어 봤지만 자신이 어쩌다 흑암 너머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 어째서 우르시토아레와 만날 수 있게 되었는지 상세한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기억을 다 돌려준 게 아닌가 봐요.〉
〈유신 씨의 기억을 건드린 게 불쾌하지는 않아요〉
〈뭐……. 그렇게 나쁜 신은 아니었던 거 같아서요. 뭔가 지금 알아서는 안 된다거나, 굳이 알 필요는 없다든가 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요 규하 씨의 아버지에 대한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제가 엄청 혼란스러웠을 거 같거든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규하 씨 어머니는 ®ÀÇ에서 돌아오셨다고 했죠〉
〈그랬죠.〉
〈어떻게 돌아오신 거예요 파계 스킬을 써도 이동하는 세계는 랜덤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현규하의 입가에 씁쓸한 고소가 맺혔다.
〈혈통이 이어진 사람을 이정표로 삼을 수 있거든요. 피가 짙을수록 확실하죠.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할머니가, 그리고 날 낳은 뒤에는 내가 어머니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이아드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기 어려운 세계.
그곳에서 현규하를 임신한 현소라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아드에 계속 머물렀다가는 아이를 유산할 확률이 높았으므로.
태어난 아이를 두고 이아드로 다시 가기 위해 끊임없이 세계를 방랑하던 그녀는 결국 실종되고 말았다.
〈나에게 스킬을 물려준 뒤 침식 게이트로 갈 거라고 하셨어요. 무슨 생각이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 말은, 현소라가 이아드에 도착하기는커녕 침식 게이트에서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었다. 인유신은 이를 눈치챘으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냥 현규하의 손등에 제 손만 겹치니, 그는 언제 고소를 지었냐는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했다. 인유신의 손가락 사이로 그의 손가락을 넣으며 장난치는 기색은 평소와 같았다.
〈사실은 나도 ®ÀÇ로 간 뒤에 여기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어요. 이쪽에 별로 미련이 없어서.〉
〈멸망하니까 고래도 죽을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최악의 상황이어도 몇십 년은 버틸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영생하던 고래 입장에서는 몇십 년 뒤라고 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죽는 거나 다름없지만요.〉
인유신의 손에 제 손을 깍지 낀 현규하가 그의 손등을 살살 긁었다.
〈내가 죽기 전에 멸망한다고 해도 별 상관은 없었어요. 좀 일찍 죽는 거뿐이니까.〉
〈…….〉
〈®ÀÇ로 가면 거기서 죽을 테고, 어차피 그곳은 멸망이 진행 중인 세계니까 나는 한 번도 미래를 그려 본 적이 없는데…….〉
손깍지를 푼 현규하가 인유신의 손을 올리며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돌아올 방법을 반드시 찾아볼게요.〉
다른 세계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다던 남자가 자신을 위해 돌아오겠다고 속삭였다. 가슴 안에 뜨거운 무언가가 둥글게 맺혀서 숨통을 턱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어떤 대답이 그의 마음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나.
창백한 시선만을 내리뜬 그의 앞에서, 현규하는 맑은 웃음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떨쳐 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를지도 모르니까 주인님은 나를 안 기다려도 돼요.〉
〈……얼마나 걸릴 거 같아요〉
〈안 기다려도 된다니까요. 잊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뿅 하고 나타나 있지 않을까요 그동안은 다른 햄스터를 입양해도 괜찮아요. 뭐, 당장 가겠다는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 중요한 건 치맥입니다. 입만 나불거리다가 치킨 다 식겠네요.〉
인유신의 손을 놓은 현규하가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인유신의 입에 닭 다리 살을 물렸다. 인유신은 쫄깃쫄깃한 닭 다리 살을 우물거리며 예전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고백을 했다.
〈마수가 아니라 진짜 닭으로 튀긴 치킨은 비싸서 자주 먹지는 못했지만, 저 사실 퍽퍽 살 좋아해요.〉
〈……뭐라고요!〉
현규하는 전 재산을 투자한 주식이 바닥을 뚫고 뚫고 뚫고 또 뚫은 사람처럼 좌절했다.
[현재 상태 살의. 애정. 절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