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메시지가 뜨는 것과 동시에 던전 전체에 지직거리는 잡음이 꼈다. 마치 오래된 구형 TV가 전파를 제대로 수신하지 못하는 듯한 영상이 눈앞에서 갈라졌고, 한순간 새하얀 빛이 명멸했다. 어쩐지 현규하를 테이밍하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어 새로운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던전의 히든 보스 ‘용궁차사 수언백’이 나타납니다.]
인유신은 몹시 당황했다.
“어, 왜 중간 과정은 다 건너뛰고 이게 바로……”
현규하도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저번에는 마수 사냥하고 칭찬받는 거 까먹어서 이번 던전에서는 꼭 유신 씨에게 잔뜩 칭찬받을 준비를 하고 왔는데!”
“사냥하다가 칭찬하면 그게, 그렇게 되니까 안 할 건데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요”
“그딴 거에 어떻게 익숙해져요!”
그 와중에도 눈앞의 허공에서는 결정석이 서서히 맺히고 있었다. 거세게 공기를 진동시키며 형성된 결정석을 핵으로 한 히든 보스 용궁차사 수언백이 나타났다.
저승사자답게 시체처럼 창백한 안색에 적색의 관복을 갖춰 입은 그의 모습에서 왠지 기시감이 느껴졌다. 눈 밑에 다크 서클이 거무죽죽하고 피로에 찌든 초췌한 얼굴은 그야말로 계속되는 야근과 과로에 시달리는 회사원의 그것이었다.
수언백은 무기를 들기는커녕 늘어지게 하품하며 소맷자락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저승사자들이 갖고 다닌다는 생사부 같았다.
“소직은 염왕전의 용궁차사 수언백이올시다. 먼저 확인부터 하겠소이다. 이름 현규하, 향년 28세…….”
“뭐”
“아, 실수. 요새 눈이 침침해서 말이외다.”
눈을 비빈 수언백은 애체(안경)를 꺼내 썼다. 이어 인유신을 확인하던 그는 낮은 탄성을 뱉었다.
“호오, 이쪽 세상의 귀하는 본래 8살에 수명이 다할 팔자였는데 현 공이 살려 주었구려.”
그 말을 들은 인유신의 눈이 동그래지거나 말거나 수언백은 피곤함이 어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어쩐지 근래 이쪽 세상의 인간들이 종종 사고로 죽을 수명을 넘어서 살거나 일찍 명이 다한다 했더니 현 공이 원흉이었구먼. 귀공 때문에 우리 차사들의 업무가 더 많아졌소.”
“원래는 내가 철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인간이다, 그 뜻이에요”
“그렇소이다. 다른 세계와의 혼성은 흔치 않으니 생사부로도 가늠할 수 없는 존재요.”
“그건 그렇고 왜 그쪽이 나왔는데요”
던전의 보스와 히든 보스는 반드시 그 배경과 연관이 있는 이여야 한다. 그것은 게이트를 구성하는 세계의 법칙이었다. 신조차 쉬이 거스르지 못하는 법칙이기에 인안나 또한 그녀와 연이 있는 던전에 현규하가 입장하는 것을 19년간 기다려야 하지 않았던가.
“본래 이곳……. 이승의 언어로는 던전과 보스라고 하지요 여하튼 이 던전의 히든 보스로는 서해 용왕의 따님인 저민의 용녀께서 강림하실 예정이었소만 뭐, 윗전들의 사정이 있다 보니.”
길게 설명하는 것도 피곤한 듯 수언백은 대충 넘기려는 기색이었다. 그러다 현규하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언제 대충 하려고 했냐는 듯 근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 공의 고모인 스토야는 지하에 묻힌 죽은 왕이자 명계의 주민이 아니오 명계란 곧 저승과 같은 관념이니 귀공에게 수나로이 열쇠를 건네도록 우리 염라대왕님과 모종의 협의가 있었소이다. 어떤 협의인지는 소직도 알지 못하오.”
수언백은 더욱 피곤해하는 낯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용녀께서도 쾌히 응해 주신 덕분에 용궁과 연관이 있는 용궁차사라는 이유로 소직이 불려 나온 것이외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구먼…….”
“당장 자기한테 튀어 오라고 엉덩이를 걷어차는 걸 보니 아버지 발등에 불이 떨어졌나 보네요.”
“그 동네 사정은 소직도 모르고.”
“내가 여기 들어올 줄은 어떻게 알고요”
“스토야가 염라대왕님만이 아니라 명계의 여러 신들과 협의를 했소이다. 하필 재수 없게 귀공이 이 던전에 입장해서 대기하던 소직이 호출된 것이고. 아무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혹여 궁금하다면 귀하를 낳은 부모의 이름 정도는 알려 줄 수 있소이다.”
뒷말을 할 때 그의 시선은 인유신을 향하고 있었다. 인유신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제 부모님은 절 키워 주신 그분들인걸요.”
“후후, 맞는 말이오.”
흐뭇하게 턱수염을 쓰다듬은 수언백은 더 할 말이 있냐는 표정으로 현규하를 힐긋 응시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인 미관말직의 차사에게 더 캐물을 만한 건 없어 보였다. 현규하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소. 무운을 빌겠소이다. 요즘 현세의 인사는 이렇다지요”
수언백은 손 하트를 만들어 보이면서 사라졌다.
[던전의 히든 보스 ‘용궁차사 수언백’이 당신을 인정했습니다.]
커다란 결정석만이 허공에 덩그러니 남았다.
인유신은 속으로 가만히 계산했다. 본래 현규하가 갖고 있던 열쇠가 세 개, 아타베이라에게서 한 개, 은징가에게서 한 개, 공태성에게 받은 것 한 개, 눈앞에 보이는 것 한 개.
“…….”
거듭 계산해 봐도 일곱 개가 맞았다. 저 결정석이 마지막 열쇠다.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서워졌기에 인유신은 슬쩍 고개를 숙였다. 현규하는 대수롭지 않게 결정석을 가져와 아공간에 던져 넣었다.
“그 물고기 놈 결국은 쓸모가 없었네요.”
“……그러게요.”
인유신은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20년에 걸쳐 겨우 완성한 열쇠가 아닌가. 축하해 줘야 한다.
“규…….”
하지만 얼굴을 들자마자 현규하가 허리를 굽히며 오른쪽 귓불에 가볍게 키스했다. 쪽, 하고 입을 맞추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귓가로 흘러들었다.
“유신 씨의 아티팩트를 쓸 일은 없어서 다행입니다. 저승사자가 나왔는데 귀신까지 봤다면 큰일 났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현규하의 목소리도 그다지 기쁜 기색이 아닌 듯 들리는 건, 제 나쁜 이기심이 왜곡하고 있기 때문일까. 인유신은 들숨을 한 번 크게 삼킨 뒤, 입술을 움직였다.
“마지막 열쇠죠 정말 잘됐어요.”
“세 개 구하느라 내 인생을 그냥 꼬라박았는데, 유신 씨를 만나고 나니 몇 개월 만에 나머지를 다 얻게 되는군요.”
역광을 등진 현규하가 인유신의 귓가에 입술을 댄 채 비스듬히 허리를 굽히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마침내 원하던 것을 갖게 되었으니 후련한 표정일까. 기쁜 표정일까.
“당신과 있으면 운이 좋아서 열쇠를 빠르게 획득했다는 얘기를 했었잖아요.”
“네…….”
귓불을 보드랍게 핥은 입술이 턱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살결에 닿는 미세한 온기가 호흡에 섞여 느리게 번져 왔다. 숨을 쉬기라도 하면 그 온기가 흐트러질까 봐 인유신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손만 겨우 움직여 그의 재킷을 붙잡았다.
이윽고 마른 입술 위에도 온기가 부드럽게 스몄다. 가볍게 비벼 오는 감촉이 버거워 인유신은 힘겹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입술을 맞댄 채로, 현규하가 나직이 속삭였다.
“그 말했던 거 취소하고 싶다, 진짜. 너무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