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뭐. 이렇게 될 거 같긴 했지.”
현규하는 의미 없는 혼잣말을 낮게 중얼거리며 바이크의 앞 유리에 양팔을 얹었다. 분명히 어제 방문했을 때까지만 해도 한옥이 있던 곳은 건물을 올리다 만 공터로 바뀌어 있었다.
사유지임을 뜻하는 팻말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고,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보기도 했지만 평범한 공터일 따름이었다. 결계나 아이템 등을 사용했다는 흔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법일지도 모르겠는데.’
마법의 원리는 현규하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스토얀이라면 게이트가 열리면서 발현된 마법이 아니라, 신대의 마법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신이 내려 준 가르침이 남아 있는, 아주 오래되고 고강한 마법을.
‘초대하지 않은 사람은 들이지 않는다는 건가.’
현규하는 혹시나 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말해 보았다.
“아빠앙♡ 아들램 왔쩌요오옹♡♡”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문전 박대 하는 아버지라니 야박하군.
바이크에서 몸을 띄워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본래의 한옥을 가린 눈속임이 어디까지 커버하는지 알아볼 작정이었지만 풍경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이만한 능력, 또는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라면 다른 능력 또한 범상하지는 않을 터.
‘약점을 찾아내야 할 텐데…….’
산 제물이 되지 않겠다는 담판도 지어야 하고, 뇌에 심어 놓은 저주도 해주해야 한다. 그러한 요구들을 스토얀이 순순히 들어줄 거 같지는 않았다. 말 한마디에 선뜻 해주를 해 줄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 머리에 저주를 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협박이나 회유가 먹히기는 할까’
인유신과 동행하고 있으니, 스토얀을 살해함으로써 해주하는 방법이 아니라 온건한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만약 설득이 통하지 않아서 무력적인 수단이 동원되어야 한다면……. 담피르인 그는 대적자이자 천적이라는 상성상 뱀파이어를 상대할 때 유리하지만 스토얀은 진조에 가까우니 쉽지는 않을 터다.
여기에 온 건 겨우 어제이니 천천히 방법을 찾아보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공터 뒤쪽으로 날아갔을 때였다.
[‘무닌의 눈’이 반응합니다.]
갑자기 떠오른 알림창에 갸웃하며 아공간에서 ‘무닌의 눈’을 꺼냈다. 아티팩트가 이유도 없이 반응했다는 메시지가 뜰 리가 없는데 영문을 모르겠다. 기계처럼 재부팅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살피다가 마나를 주입해 보았다. 도래까마귀의 눈알이 번쩍 빛났다.
[‘무닌의 눈’이 ‘후긴의 눈’을 감지했습니다.]
‘후긴의 눈’이라니.
‘무닌의 눈’과 ‘후긴의 눈’은 세트인 아트팩트지만 ‘무닌의 눈’과 달리 ‘후긴의 눈’은 실종된 지 30년은 되었다. 그게 여기에서 반응한다고
‘……잠깐, 잠깐만.’
갑자기 불쑥 떠오른 추측에 현규하는 당황하여 이마를 짚었다. 만약, 어디까지나 정말 만약에.
30년 전에 어머니가 ‘후긴의 눈’을 입수했고, 그것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면. 인유신의 추측대로 무사히 이아드에 도달했다면. ‘무닌의 눈’이 거기에 반응했다면.
그렇다면 지금 ‘무닌의 눈’이 반응한 곳에 어머니가 있다는 뜻이다. 바로 스토얀이 머물고 있는 곳에.
‘속단하지 말자.’
현규하는 순간 치밀어 오른 격정을 천천히 억눌렀다.
‘무닌의 눈’과 ‘후긴의 눈’은 분명히 세트 아티팩트다. 하지만 그 세트가 동일한 세계의 아티팩트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혹은 어머니 외에도 파계 스킬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가능성은 여럿이었다.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때 현규하의 머릿속 상념을 확실하게 지워 버릴 수 있을 사건이 발생했다.
삐이이이이.
허공에서 고주파의 경고음이 울리고.
- 남부 성신방 일대에 1각(약 15분) 후 갑형 게이트의 출현이 관측되었습니다. 인근 지역의 주민들은 시급히 대피하십시오.
마법으로 가공한 기계적인 음성이 이어 출력되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분명히 성신방은 사택 아파트가 있는 곳이다.
급히 ‘무닌의 눈’의 좌표를 띄워 지도와 비교해 보았다. 맞다. 인유신의 위치가 보인다. 방금까지 머리를 혼란하게 했던 의문은 사라지고, 현규하는 단번에 사택 방향으로 날아갔다.
마도공학으로 인한 기술의 발달은 매연이라는 단어 자체를 지워 버린 듯했다. 자동차가 오가는 도심지에서도 청정한 공기를 느끼며 걷는 인유신의 머릿속은 정작 최진혁에게 들은 이야기로 꽉 차 있었다.
〈식량이야 식물 공장에서 마법으로 재배하거나 대체육과 마수의 고기로 조달하고 있지만 생명의 탄생은 인위적으로 손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니 말이다. 출생률은 0명대를 찍은 지 오래야. 오히려 먹이가 부족해서 인간보다 일찍 멸종할 줄 알았던 야생 동물이나 곤충 등이 어느 정도 번식하더군. 지구에서는 인간이 제일 먼저 멸종할 거다.〉
거기다가 나이가 들어 원기가 쇠할수록 사망률 또한 높아지니 평균 수명은 해마다 단축되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조선을 제외하면 인공 자궁 기술을 연구하는 미국이 그나마 버티고 있지.〉
회령 같은 지방의 도시에도 사람이 드물지 않게 보여서 간과했었다. 조선이 특수한 경우였다.
외국은 대다수의 지방 도시가 소멸하고 수도를 비롯한 대도시 몇몇을 중심으로 겨우 유지 중이라고 했다. 국가의 통제력이 극도로 높아지거나, 또는 무정부 상태가 되는 극과 극의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조선은 왜 예외인 거지〉
〈스토얀이 있으니까. 그 양반을 괜히 세계를 유지하게 하는 왕이라고 신들이 일컫는 게 아니더군.〉
30년 전, 스토얀이 한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사실은 명확해졌다. 그의 힘이 보다 확실히 미치는 한반도에서는 아이가 조금씩이나마 더 태어나기 시작했고, 노인의 수명이 길어졌다. 그가 떠나간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일대는 정확히 그 반대의 전철을 밟았다.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자식을 낳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민을 받아 달라며 문을 두드렸다. 거리에 외국인이 많이 보이던 게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아프가니스탄에 기반이 있는 준의 신전이 왜 한양에도 있겠나.〉
다시 업무를 보러 간 최진혁과 헤어져서 근처를 산책하다 공원까지 접어들었는데도 뇌리에서 생각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식량이 있고 거리에 사람들도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어서 멸망이라는 단어를 은연중에 가볍게 여겼나 보다.
파우치에 얌전히 있던 8세가 위로하듯이 인유신의 손등에 얼굴을 부볐다.
“꽤나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인데.”
“최 팀장님 얘기 들어도 괜찮으세요 어쩌면 돌아가지 못하고 여기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잖아요.”
여차하면 영영 옛 친구와 지인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각오도 했고, 현규하와 다른 세계의 이방인으로 남아도 괜찮다는 각오도 했다. 사실을 알게 되고도 인유신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지만 공태성이 걱정되기는 했다.
공태성은 대수롭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안나의 약을 무사히 전했으니까 나는 당장 죽어도 상관없어. 이쪽에도 끝녀가 있었다면 생각이 좀 바뀌었을지 모르겠다만.”
그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끝녀가 태어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서 살아가려면 많이 힘들었겠지. 가뜩이나 귀한 남자 손이 더 귀해졌으니 민 회장의 아들 닦달은 더 심했을 테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여기에서 최진혁과 만났을 때는 반가운 마음도 있었는데, 이제는 아는 사람과 만났다고 해서 기뻐해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회장님이 태어나셨더라도 여기의 길드장님이 무슨 수를 써서든 도와주셨을 거 같아요.”
성격부터 시작해서 딱 천생연분인 두 사람이었으니 어떤 세계든 만나기만 했다면 변함없는 모습일 듯했다. 공태성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하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내가 알아봤는데 이아드에 계약자는 없어.”
갑자기 허공에서 솜노로스가 불쑥 튀어나와서 인유신은 깜짝 놀랐다. 8세가 “찍!” 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땅을 받치고 있는 게 아니었어요 두 번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는데…….”
“본체는 신계에서 받치고 있어. 어젯밤에 살짝 지진이 있었지 날 대신해서 받치고 있던 슨티온 님께 넘겨받느라 그랬던 거야.”
자느라 하나도 못 느꼈지만 인유신은 예의상 ‘아하!’ 하는 얼굴을 했다. 현규하라면 예의상의 표정을 알아봤겠지만 솜노로스는 마냥 뿌듯해했다.
공태성도 고개를 올려 솜노로스를 바라보았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죽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영혼의 근원은 같으니까 계약자가 이아드에 있다면 알아볼 수 있거든.”
“참, 그러고 보니 여기에서 제가 알던 분을 만났는데 각성 능력까지 동일하더라고요. 영혼의 근원이 같아서 그런 거예요”
“응.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보통 그래.”
삐이이이이.
그 순간, 갑작스럽게 울린 고주파음이 대화를 끊었다.
- 남부 성신방 일대에 1각 후 갑형 게이트의 출현이 관측되었습니다. 인근 지역의 주민들은 시급히 대피하십시오.
“헉, 마수잖아. 징그러워……. 난 다시 자러 갈게. 나중에 봐!”
솜노로스는 허둥지둥 사라졌다. 인유신의 마음도 급해졌다. 갑형 게이트라면 분명히 돌발 게이트였다. 대피소가 어디에 있었더라 휴대폰으로 급히 검색해 봤지만 화면이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글자까지 낯선 부분이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공태성은 태연했다.
“1각이 15분 정도였던가 마나를 다루는 마법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계측이 가능하군. 15분이면 대피하기 충분한 시간이지.”
“최 팀장님한테 대피소에 대해 들은 거 있으세요”
“굳이”
아, 맞다.
인유신은 그제야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공태성도 S급이었지.
민끝녀에게 두들겨 맞거나 최진혁에게 갈굼당하고 장범한테 짜증 내는 모습에 너무 익숙해져서 깜빡했다. 거기다가 현규하에게 탈탈 털린 모습까지 목격해 버렸고.
얼빠진 얼굴을 본 공태성이 피식 웃으며 머리를 토닥거렸다.
“보디가드가 되어 준다고 했으니 염려하지 마라.”
“네, 넵!”
놀랐던 정신이 돌아오니 현규하에게 받은 아이템도 떠올랐다. 아공간에서 실드 코어가 내장된 팔찌를 꺼내 착용하자 공태성이 눈썹을 들썩였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 아이템은 분명히 발렌타인 길드장이 소유하고 있던 건데.”
“그, 글쎄요.”
“……설마 발렌타인 길드가 궤멸한 게 현규하 짓이었나”
“우.와.세.상.에.그.런.일.이.있.었.나.요 저.는.잘.모.르.겠.습.니.다.”
국어책을 읽는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은 현규하와 이혜연에게는 먹혔지만 공태성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대번에 어이없어하는 얼굴이 된 공태성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뜨끔한 인유신은 그냥 못 본 척했다.
그렇게 15분이 지나고 길 건너편의 상공에 돌발 게이트가 열렸다. 쏟아지는 마수 떼는 공태성의 화염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인유신의 실드 코어도 뚫지 못했다.
“꾸우……!”
“8세야. 무서우면 기절해도 돼.”
8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여차하면 자기 몸으로라도 주인을 지키겠다는 결심 속에 달달 떨리는 앞발로 파우치를 굳건히 붙잡았다.
그리고 인유신은 이 시간 또한 금방 끝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타다다다당!
마수의 기성만이 가득하던 소란 한가운데에 느닷없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에 뜬 채 사방으로 총알을 난사하는 소총들이 매우 익숙한 모습이라, 괜히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이 세계가 어떻게 멸망해도 현규하만 있으면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