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214)

침식 게이트는 멸망한 세계의 잔흔이다.

철의 시대는 신이 이미 떠나간 시대였으므로, 설령 신이라도 그림자를 투영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연이 있는 던전에서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다.

만약 존재의 손상까지 감내한다면 특정인의 인식에 닿도록 투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침식 게이트를 통하는 것이다.

이는 그 역으로도 가능했다. 현소라는 철의 시대의 인간이었으나 스토얀의 자식을 품었다. 태아를 보호하고 키우기 위해 모체는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두 세계의 혼성인 아들과 비슷한 특질이 되었다. 이아드와 연결된 침식 게이트 너머의 흑암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방문한 스토얀의 거처에서 어머니를 내려다보며, 현규하는 나직이 읊조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침식 게이트를 통해 이아드로 건너갈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여기에 어머니가 있는 걸 보니 성공했던 모양이고요.”

침식 게이트가 멸망한 원인이 이아드처럼 생기가 쇠잔하는 세계였을 가능성. 그 게이트에 이아드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

현소라는 불가능이나 다름없는 확률을 넘어 이아드로 돌아왔다. 그리고 죽었다. 지하에서 죽음을 관조하는 스토야조차 눈치챌 수 없을 만큼 한순간에.

“인간이 넘을 수 있는 게이트가 아닙니다, 그건……. 그런데도 나는 그 사실을 어머니와 연관하지 못했어요.”

현규하가 신음처럼 낮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유리 관 속의 현소라는 마치 깊은 잠이 든 것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어머니가 죽을 거라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나 봐요. 진작 깨달았다면 어머니가 떠나지 못하도록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았을 텐데.”

인유신의 안에 여러 말들이 감돌았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든가, 어머니의 선택이라든가, 그런 위로의 말들.

하지만 어떤 위로의 말도 제 부족함 때문에 부모를 잃었다는 죄책감에 빠진 사람을 보듬어 줄 수 없다는 걸 안다. 자신 또한 그랬으니까. 하여 인유신은 그저 현규하의 손만 말없이 붙잡았다.

억눌린 숨결이 그 손 위로 뜨겁게 쏟아졌다. 저를 붙잡은 인유신의 손등에 오래도록 입술을 누르고 있던 현규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엄마, 이 사람이야. 유신 씨가 있어서 나는 괜찮아. 할머니도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엄마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라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어. 엄마가 그렇게 가 버리고 난 뒤에 좀 힘들긴 했지만 뭐, 내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현규하는 그렇게 어머니의 관 앞에서 두서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날부터 땅에 발을 딛고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조차 하지 못하던 아이가, 이제야 표착하여 앞을 향해 걸음을 딛게 된 이야기를.

이야기의 끝에 현규하는 관을 열었다. 이미 소멸된 육체를 보존 마법을 사용하여 억지로 붙잡아 두고 있던 관이다. 마법이 깨지고 외부에 노출된 현소라의 주검은 서서히 재처럼 스러지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삭아 가는 현소라를 말없이 지켜보던 인유신은 불현듯 위화감을 느꼈다.

‘규하 씨의 어머니는 왜 하필 침식 게이트로 넘어가셨어야 했을까 침식 게이트를 통과하면 소멸될 거라는 걸 모르셨던 걸까’

몰랐다고 하더라도 위화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예 능력이 없는 거라면 모를까, 현소라는 세계를 넘나들 수 있는 고유 능력인 파계를 보유했다. 물론 파계로는 이아드를 특정해서 넘어갈 수 없다지만, 세계를 특정하지 못하는 건 침식 게이트 또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막말로 끊임없이 세계를 랜덤으로 넘나들다 보면 언젠가는 희박한 확률을 뚫고 ‘살아서’ 이아드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소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고유 능력을 현규하에게 주었다.

스토얀을 위해서 낳은 현규하에게 그전까지는 특별한 정을 보이지도 않다가, 갑자기.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는 것을.

스멀거리던 위화감이 오싹오싹하게 등골을 거슬러 올라왔다. 인유신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잘근 깨물었다. 어머니를 잃은 지 얼마 안 된 현규하에게 ‘어머니가 유일한 희망을 줄 만큼 규하 씨를 사랑했을까요’라는 요지의 말은 절대 꺼낼 수 없었다.

근거가 필요했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요소가 아니라 보다 뚜렷한 근거가.

무엇보다 지금은 밖에 스토얀이 있었다. 스토얀이 들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섣부른 의혹의 말을 꺼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유신은 잠자코 기다렸다. 현소라의 마지막 머리카락 한 올까지 재로 화하자, 현규하는 가지고 갔던 유골함에 사이코키네시스로 재를 옮겨 담았다.

“어머니는 어디에 모실 거예요”

“으음, 잘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오고 싶어 하셨던 여기에 모시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네요. 인왕산이라면 바로 내려다볼 수 있겠죠.”

인유신은 살짝 고개를 저으면서 재킷의 소맷자락을 손끝으로 쥐었다.

“규하 씨의 할머니는 따로 무덤이 있으세요”

“아뇨. 집안에 다른 가족도 없고 내가 어려서 무덤을 돌볼 형편이 안 되니까 바로 화장했어요.”

“그러면요, 돌아가서 할머니 옆에 모시는 건 어때요”

“……그게 좋겠네요.”

‘돌아가서’라는 말에 현규하는 비로소 희미한 미소를 올렸다. 돌아가자. 돌아가야겠다. 어머니의 행방도 알게 되었으니 더는 미련이 없었다. 머릿속에 새겨진 저주 같은 울림만 지운다면 남아 있을 이유도 없다.

어린 시절부터 품고 있던 살의는 여전히 자신의 안에 잔여물처럼 남아 있을 테지만, 인유신과 무사히 돌아가는 것 이상의 가치는 없다.

아공간에 유골함과, 관에 함께 보관되어 있던 그녀의 유품까지 챙겨 넣는 것으로 볼일은 끝났다. 현규하는 인유신과 나란히 서서 문을 열었다.

밖에는 스토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마주한 인유신은 순간 평정심이 다시 흔들리는 걸 느꼈으나, 애써 억눌렀다. 다행히 두 번째 만남이었기 때문인지 처음 보았을 때처럼 동요가 크지는 않았다.

“다 끝났니”

온화한 미소가 텅 빈 관까지 훑는다. 자신의 아이까지 낳은 여자가 한 줌의 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흔들림이 없는 미소였다.

빌어먹을. 현규하는 가슴 안에서 꿈틀거리는 살의를 심호흡으로 가다듬었다. 어머니는 어째서 이딴 인간을 사랑하게 된 걸까.

“할 말이 있는데요.”

“그래, 나도 마침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지난번에는 소라가 죽었다는 걸 알고 너무 놀라워하길래 말을 꺼내지 못했단다.”

스토얀도 선선히 응하자, 현규하는 허리를 굽혀 불안하게 올려다보는 인유신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밖에 공태성이랑 최진혁도 있으니까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따라갈게요.”

“혼자 괜찮겠어요”

“안 괜찮은데, 아버지한테 패드립을 하게 될지도 모르거든요. 유신 씨에게는 예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어요.”

그 말을 들으니 인유신은 어쩐지 더 불안해지는 기분이었지만, 탁 터놓고 얘기하려면 자신이 없는 게 낫긴 할 것이다. 그는 ‘패드립’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머리를 갸웃하는 스토얀에게 인사하고 툇마루를 걸어갔다.

왜곡된 공간은 마당으로 이어졌고, 인유신의 뒷모습은 금세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현규하는 스토얀을 바라보았다.

“차 마실래”

“그건 됐고요.”

한복을 입은 뱀파이어가 한낮에 쌍화차를 따라 준다는 광경을 두 번 보고 싶진 않았던지라 단칼에 거절했다. 애초에 마주 앉아 차나 마실 만큼 친밀한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내 머리에 심어 놓은 게 뭐예요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거 맞죠”

“연락 수단이 없잖니. 네가 아빠를 잊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해서 말이야.”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뇌를 터트려 버릴 저주를 여기에서는 연락 수단이라고 하나 보죠”

“내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머리를 설마 터트렸겠니”

“네.”

단호한 대답에 스토얀이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을 그렸다.

“우리 아들이 아빠를 잘 아네. 서로 닮아서 그런가”

스토얀까지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기분이 더욱 더러워진 현규하는 그냥 내질렀다.

“말 잘 듣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지워 줘요.”

“그래. 기특하게도 고생하면서 왔으니 아빠가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순순히 지워 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던 현규하는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오늘은 일단 운부터 떼 봤다가 그의 다른 요구 조건을 듣고 딜을 걸어 보려 했는데.

물론 스토얀이 원하는 거야 뻔하니, 시간을 끌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알아낸 뒤에 틈을 봐서 튈 작정이었다.

‘저주를 지워 주는 척하면서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니겠지’

천천히 다가온 스토얀이 현규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여차하면 공격하기 위해 긴장을 풀지 않았으나.

“됐어.”

긴장한 것이 무색할 만큼 스토얀은 이내 머리에서 손을 내렸다.

“…….”

확실히, 머리가 가벼워졌다.

19년 전, 세 번째 우르시토아레가 스토얀의 부름으로 인한 두통을 가라앉혀 줬던 적이 있다. 그 이후 크게 동요할 때가 아니라면 스토얀의 부름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지는 않았다. 하나 그럼에도 머릿속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처럼 은근한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무슨 짓이에요”

스토얀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워 주었는데도 불만이니”

“아버지가 날 닮았다면서요. 그럼 순순히 지워 줄 리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죠. 바라는 게 뭐예요”

“얘기가 빨라서 좋구나.”

자신보다 키가 조금 더 큰 아들을 훑듯이 슥 올려다본 스토얀이 턱을 문질렀다.

“너도 짐작하고 있질 않니”

“아버지처럼 세계에 바쳐진 산 제물이 되라고요”

“응.”

시큰둥한 현규하의 대답에도 스토얀은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세계를 위한 아름다운 희생이니, 살아 있는 생명을 위한 숭고한 선택이니, 하는 입에 발린 소리들은 해 봤자 안 먹힐 테지.”

“…….”

“하지만 이건 확실해. 이 세계는 나와 스토야만으로는 더 지탱할 수 없어. 우리 남매는 너무 낡았거든.”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내가 산 제물이 되면 상황이 달라진단 거예요”

“그렇단다. 네가 우리와 함께 새로운 ‘왕’이 되면 멸망이 지연되겠지. 어쩌면 이대로 현상 유지가 가능할지도 모르고.”

스토얀이 처음으로 한숨을 쉬며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얘야. 나는 죽기 싫어.”

“그만큼 살았는데, 아직도요”

“내 나이가 되었을 때의 너에게 묻고 싶구나. 지겨운지 안 지겨운지.”

현규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30년을 살기도 전에 진전이 없는 권태에 지쳐서 소극적인 자살을 골몰하던 그에게는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그 원인이 눈앞의 아버지라면 더욱이나.

“신에게 제물로 바쳐져 세계의 왕이 된다 하여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부여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네 주인이라는 그 아이가 평생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해 주는 건 쉽단다.”

“생각해 볼게요.”

일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신 씨 얘기가 나온 김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니”

“아버지가 CCTV를 단 것처럼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다면서요.”

“CCTV 아, 내 능력을 알게 된 사람이 주도하여 만들었다는 그거”

여기에서는 희한한 방향으로 CCTV가 발명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므로 대충 넘어갔다.

“그거 피할 수 있는 방법 없어요 예를 들어 던전에 들어간다거나 방에 불을 끈다거나 해서요.”

“왜”

“유신 씨랑 모처럼 동거를 하게 됐는데 아무것도 못 하고 있잖아요, 지금.”

“뭘 못 하고 있는데”

“아니, 씨발. 남친이랑 둘이 살면서 뭘 하겠냐고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날 임신하기 위해 밤이고 낮이고 했을 행위죠.”

스토얀이 깜짝 놀랐다.

“남친 남자 친구라는 뜻 맞지 사귀는 사이였어 주인이라면서”

“주인님이니까 사귀는 게 맞죠.”

“……”

스토얀은 얘기를 들을수록 더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세대 차이, 아니 시대 차이인가…….”란 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현규하가 재차 다그쳤다.

“내가 함뜨 한 번 하겠다고 부모 눈치나 봐야 할 나이는 아니잖아요. 나 진짜 욕구 불만으로 돌아 버릴 거 같거든요”

“보이는 게 뭣하면 이불 뒤집어쓰고 하면 되잖니 소리는 못 들어.”

“…….”

인유신은 현규하를 칭찬해 줘야 마땅했다. ‘이거 미친 새낀가’라는 욕설이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는 걸 훌륭히 참아 냈으니 말이다.

“불을 끄든 던전에 들어가든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내가 보지 못하는 건 없단다.”

“…….”

현규하는 이번에도 ‘씨발. 관음증 변태라는 게 자랑인가’라는 욕설을 참아 냈다.

“그리고 애초에 네가 왜 성행위를 그 정도로 거리끼는지 모르겠거든. 이런 것도 세대 차이인가 물론 일부러 노출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잖니.”

세대 차이라는 말에 현규하는 자기보다도 어려 보이는 눈앞의 이 남자가 아주 오래된 사람이라는 걸 새삼 인식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최소로 잡아도 기원전이다. 귀족도 아닌 평범한 농민으로 태어난 스토야와 스토얀은 현대 기준으로 움막 같은 집에서 살았을 것이다. 부부 침실이 따로 나뉘어 있지 않았고, 온 가족이 방 한 칸에서 지내며, 가축들까지 들여서 살던, 프라이버시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 그런 집.

‘이런 미친.’

현규하는 갑자기 어머니가 존경스러워졌다. 어떻게 기원전부터 묵은 개꼰대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거지 자신은 말 몇 마디밖에 나누지 않았는데도 뻗쳐오르는 성질을 참기가 힘든데 말이다.

기원전의 사고방식이 남아 있는 꼰대에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현규하는 더 이상의 대꾸 없이 그냥 인사만 하고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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