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하게 쇄도하는 곤봉을 허공에서 붙잡는 건 현규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헌터에게는 도망치는 것조차 지난한 문제였다.
“사, 살려 줘!”
아까부터 헌터를 눈독 들이고 있던 거인 하나가 성큼 팔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현규하가 미처 그쪽을 보기도 전에 거인은 ‘평소처럼’ 입 안에 헌터를 털어 넣었다.
끔찍한 비명에 이어 살과 뼈가 으깨지는 참혹한 소리가 거인의 입술 사이에서 우물우물 흘렀다. 입 안에 든 것을 꿀꺽 삼킨 거인이 입술 밖으로 흐르는 핏물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히죽 웃었다.
“오랜만의 진미로군.”
“왕의 자식이라면 색다른 맛이 날까.”
거인들이 그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거야 익숙했지만, 하다못해 식량도 아닌 간식거리로 자신을 보는 시선은 현규하로서도 처음이었다.
‘이런 경험 신선한데’
현규하는 배 속으로 삼켜진 다음에 뱃가죽을 뚫고 나오는 공략법을 상상하면서 말했다.
“어차피 니들 다 뒈진 시체라면서 시체가 시체를 먹는 것도 동족 포식인가”
그 도발은, 인간을 증오하고 인간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 있는 시체가 되기를 선택한 우리아쉬들을 노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크으……!”
곤봉을 붙잡힌 거인이 팔뚝에서 힘줄이 불뚝 솟을 만큼 힘을 주었다. 사이코키네시스로 인해 강한 압력을 받는 팔뚝의 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현규하의 머리 위로 다른 거인이 주먹을 내리쳤다.
그늘이 드리우기가 무섭게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거인이 뽑아낸 나무를 뿌리째 휘두른다. 집중이 흐트러진 틈에 사이코키네시스의 압력에서 풀려난 거인이 곤봉을 찍었다.
후우웅, 붕! 빠르게 피하는 현규하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가한 공격은 없었으나, 육중한 거구에서 비롯되는 움직임은 공기를 뒤흔들었다. 그는 태풍의 가운데에서 휩쓸리는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사방을 부유했다.
“파리 새끼처럼 도망만 다니다니!”
“기왕 비교할 거라면 날개 달린 쥐라고 해. 음, 역시 박쥐인가.”
“닥치거라!”
모기가 눈앞에서 알짱거리면서 잡히지도 않으면 얼마나 짜증이 날까. 그들의 심정이 그러했다.
거인들의 혈압도 손쉽게 돋운 현규하는 피부를 찢어발길 것처럼 몰아치는 공기의 비명을 피해 하늘 높이 몸을 날렸다. 어느 정도 시간을 끌었으니 유인해도 되겠지만, 사람까지 잡아먹은 놈을 이대로 보내기에는 아쉽다. 몸도 덜 풀렸고.
‘이놈들의 덩치가 예상 이상으로 커. 마나의 눈이 좁은 협곡 같은 곳에서 열렸으면 입구 틀어막고 몰이사냥을 할 수도 있었겠군.’
현규하는 아직도 방주에서 나오지 못하는 거인들을 훑었다. 산 중턱도 운신하기에 좁은 건 마찬가지니 입구를 틀어막은 것과 비슷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죽어라!”
팔다리를 찢어 버리겠다는 당초의 윽박지름은 어디 갔는지, 거인이 곤봉으로 그를 후려쳤다. 이번에도 재빨리 피한 현규하는 아공간에서 로켓포를 10대 넘게 꺼냈다.
“금속 탄이 나오는 것이다!”
이미 그것의 정체를 목격한 거인들은 로켓포를 쓰지 못하게 달려들었으나 현규하가 발사하는 게 더 빨랐다.
“금속 탄이라니, 10점 만점에 5점이야.”
투콰앙!
산을 우렁우렁하게 울리는 폭음을 뱉으며 발사된 폭탄은 거인들의 몸에 명중하자 그대로 터졌다. 콰앙! 쾅! 투콰아아아! 콰아앙! 폭발음과 발사음이 정신없이 뒤섞이고 짙은 포연 사이로 거인들의 비명이 울렸다.
거인들은 고통스러워하긴 했으나 절명하지는 않았다. 강철보다 단단하게 강화한 그들의 육체는 중요한 장기를 폭탄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현규하도 로켓포로 우리아쉬들을 죽일 수 있으리란 낙관은 하지 않았다.
산산이 부서진 죽은 산의 흑백 잔해가 자욱하게 일어난 가운데, 그는 아까 사람을 산 채로 씹은 거인을 높이 들어 올렸다. 원래 목적은 이거였다.
“뭐, 뭣……!”
허공으로 발이 뜨자 당혹하여 버둥거리던 거인은 사방에서 옥죄는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고통 어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냐!”
짙은 포연으로 인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거인들에게, 현규하는 사이코키네시스로 들어 올린 거인을 그대로 휘둘렀다.
“살 좀 빼.”
그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서.
카아앙!
“크아아악!”
“아악!”
육체와 육체가 부딪히는데, 마치 둔탁하게 속을 채운 쇳덩이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무기가 쉽사리 통하지 않는 단단한 무언가가 있다 그렇다면 그 무언가를 바로 새 무기로 쓰면 된다. 현규하는 거인을 무기로 썼다.
로켓포에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된 거인은 사이코키네시스에 억압되어 꼼짝달싹도 못 하고 곤봉이나 봉처럼 동족들을 후려갈겼다.
“이 미친놈이! 당장 그만두지 못…… 끄허억!”
안 그래도 연이은 폭음으로 인해 청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신이 혼란스러운데 동족한테 두들겨 맞고 있었다. 좁은 산 중턱에서 거인들은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일방적으로 처맞았다.
방주 안의 거인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역시 나오지 못했다. 억지로 나오려면 앞에 있는 거인들을 깔아뭉개야만 할 것이다.
“크아아아아!”
사이코키네시스로 붕붕 휘두르는 거인의 이마에 머리를 직격당한 다른 거인이 외마디 비명성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던 거체가 쿠웅 나뒹굴었다. 지진이 발생하는 것처럼 땅이 요동치고, 그녀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흑백의 산속에, 먼지로 화한 거인의 유체가 흩날린다.
“———!”
동족의 이름을 부르며 거인들이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현규하에게 농락되고 있는 게 동족이기에 차마 대응하지 못하고 있던 거인이 연이어 날아드는 그의 ‘무기’를 양손으로 콰직 붙잡았다.
그러고는 즉시 그 거인의 목뼈를 비틀어 꺾었다.
무기로 휘둘리던 거인은 차라리 안도하며 먼지로 스러졌다. 현규하는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오, 동족 포식에 이어서 동족 살해. 너희 몇 명 남지도 않았는데 팀 킬 해도 돼”
“네놈만은 반드시 씹어 죽이겠다!”
“시체 주제에 먹는 거 되게 좋아하는군. 좀비랑 동족인가.”
현규하는 살기와 분노로 이글거리는 거인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시간을 가늠했다. 슬슬 유인해도 되겠다.
오늘 점심은 한국인과 조선인의 소울 푸드, 비빔밥이었다. 인유신은 고추장을 듬뿍 떠서 싹싹 비볐다. 이쪽 세계의 조선에도 고추가 전래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철의 시대와는 달리 명나라의 해금령(해상 무역 등 바다에서의 활동을 금지하는 정책. 조선도 영향을 받았다.)도 없었고, 혼란스러운 중국 대륙의 상황을 이용하여 중개 무역도 재개하면서 들여오게 되었다고 들었다.
‘규하 씨는 경계 서느라 점심으로 주먹밥밖에 못 먹을 텐데…….’
고기와 채소 등의 재료를 섞은 든든한 주먹밥이지만 그래도 허전하지 않겠는가. 인유신은 걱정스레 현규하의 좌표를 띄웠다. 별일은 없어 보였다.
그의 시선이 잠깐 허공을 헤매자 맞은편에서 같이 식사를 하던 장범이 놀리듯이 웃었다.
“이열, 밥 먹다가도 남친 생각나고 막 그러나 봐 방금 ‘후긴의 눈’ 쓴 거지”
“그, 그냥 별일 없나 싶어서요.”
괜히 민망해져서 밥만 열심히 퍼먹는 와중에 공태성의 표정은 어딘가 미묘해졌다. 그걸 놓치지 않은 장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아저씨는 또 스토킹을 부러워하고 있네.”
“무슨 말이냐.”
“부회장님이 너한테도 스토킹 아티팩트 써 줬으면 좋겠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줬으면 좋겠지 스토킹도 불사할 만큼 엄청나게 관심 가져 줬으면 좋겠지”
“…….”
그 말을 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이혼남을 보는 인유신은 아리송했다. 현규하도 저래서 ‘후긴의 눈’을 써 달라고 한 걸까. 그가 원하는 도착적인 쾌감에 비하면 공태성의 희망은 순수하고 소박하게 들리지만 말이다.
뭔가 현규하의 논리와 궤변에 점차 물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은 착각일 것이다.
방어 본부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헌터들로 북적거렸다. 원래 세계의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S급 헌터를 총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A급 헌터도 각 지부를 유지할 최소한의 인력을 제외한 전원이 소집되었다.
저쪽 테이블에서 맛있게 비빔밥을 먹고 있는 올리비아를 비롯하여 인유신의 눈에도 익은 한양 지부의 헌터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스토얀은 여전히 실종 상태라 하고…….’
그의 진의가 무엇이든 현규하가 위험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방주의 시간이 뒤틀려 있으니까 최악의 상황에는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어떤 도움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웠던 스토야의 그 말에 조금 기운을 냈다. 가장 좋은 건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일 테지만.
“여기에 있었나”
식사를 거의 끝마칠 무렵, 누군가가 다가오며 테이블에 그들 몫의 물컵 3개까지 탁탁 놓아 주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허정현이었다. 장범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누나는 식사 안 해”
“벌써 먹었지. 밥 먹고 가는 길에 너희가 보여서.”
친근감 있게 대하는 장범과는 달리 공태성은 슬쩍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빈 의자를 빼내어 털썩 앉는 허정현의 옆에 다른 사람도 보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잘들 지냈느냐”
만신 손희애였다.
“선생님도 사제들과 같이 오셨어요”
허정현이 씨익 웃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종의 무전기 역할도 겸하신다고 할까”
“이놈이 말본새하고는.”
짝 소리 나도록 그녀의 등을 찰싹 때린 손희애가 부연 설명을 했다.
“만약의 사태에 신령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하니 말이다.”
“원래는 둠네제울을 섬기는 최고 사제께서 오시려고 했는데, 그분이 너무 고령이셔서. 둠네제울의 신전은 부산에 있거든.”
“아하.”
마지막 남은 계란 프라이를 우물거리는 인유신에게 손희애가 물었다.
“한데 너는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것이야 최전선이나 다름없는 곳이 아니냐.”
“실드 코어를 쓸 수 있는 최고급 아이템이 있거든요.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거로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도 버틸 수 있대요.”
“아아, 맞다. 너 예전에 실드 코어 썼었지 선생님, 그거 엄청 튼튼했습니다. 어지간한 마수는 접근도 못 할걸요.”
고개를 끄덕거리며 호응하는 허정현의 반응에도 손희애는 못내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위험할 텐데.”
“괜찮아요, 선생님.”
언제 손희애와 안면을 텄던 건지, 장범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규하도 있고, 규하가 없을 때는 저랑 태성이가 얘 보디가드거든요.”
“허어, 그랬던가 어쩌다가 보디가드로 고용이 된 거지”
인유신에게서 실드 코어가 내장된 팔찌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던 허정현이 대신 대답했다.
“가까운 인척 관계라던데요.”
“예!”
느닷없는 설명에 인유신은 물론이고 허정현을 피하고 있던 공태성까지 놀랐으나, 그녀는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니야 처남의 남친이라니까 유신이도 그냥 가족 같은 느낌인 줄 알았는데”
“…….”
어쩌다가 공태성과 현규하가 매형과 처남 관계라는 제 헛소리가 허정현의 귀까지 들어간 걸까…….
장범만 배를 잡고 신나게 웃고 있을 때, 불현듯 고주파 경고음이 울렸다. 이어 오퍼레이터의 음성이 상공에서 들려왔다.
- 우리아쉬 출몰. 우리아쉬 출몰. 모든 헌터와 사제들은 각자의 위치로 이동하십시오.
허정현이 퉁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하거라.”
팔찌를 돌려준 허정현은 빠르게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녀만이 아니라 삼삼오오 앉아 식사를 하던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이동했다. 각성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일반인들은 안전 구역으로. 손희애도 인사하고 급히 서낭당으로 향했다.
장범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낮게 감탄했다.
“훈련이 엄청 잘되어 있는데”
“게이트의 위험이 우리보다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고 있을 테니까. 아무튼 우리도 나가지.”
식당 밖으로 나가자마자 이변을 알 수 있었다. 인유신은 저 멀리 솟은 백두산을 보며 기함했다.
흑백의 산에, 어렴풋하게나마 색이 보였다. 색채를 잃고 죽은 땅에 색깔이 보인다는 게, 심지어 이 먼 거리에서도 목격될 정도라는 게 어떤 의미이겠는가.
“돌았…….”
장범이 입을 떡 벌렸고 공태성도 욕설을 중얼거렸다. 인유신은 급히 상태창을 살펴보았다.
[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애정. 살의. 분리 불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