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214)

뭘까, 이 광경은.

인유신은 눈앞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피가 흘렀다. 피 묻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의 옷에 시뻘건 선혈이 번졌다. 쓰러졌다. 왜 어째서 위험은 이제 없는데. 그에게 해를 가할 사람은 없…….

“삐얏! 삣!”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건 혼몽에 젖은 뇌리를 날카롭게 가르는 작은 울음 덕분이었다.

“규하 씨! 규하 씨!”

의문 따위가 중요한가. 인유신은 바닥에 피를 쏟으며 나동그라진 현규하를 감싸며 허겁지겁 힐을 했다.

조금씩이나마 회복되고 있던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모으자 겨우 상처가 나았다. 아니다. 나은 게 아니다. 표피의 피만 멎게 했을 뿐이다. 관통되고 헤집어지면서 찢긴 내장은 그대로였다.

피에 젖은 입술이 다시금 왈칵 피를 토했다. 찢어진 내장 조각 몇 개가 선홍색 피 사이에 섞여 있었다.

“피는 오랜만이구나.”

선혈로 흠씬 젖은 손을 여상하게 핥는 스토얀을 보며, 인유신은 저 사람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했다.

“무슨……!”

스토얀의 앞에서 현규하를 감싸려던 인유신의 몸이 사이코키네시스로 튕겨 나갔다. 속절없이 뒤로 날아가던 몸을 공태성이 팔을 뻗어 황급히 받았다. 이곳으로 오던 헌터들도 갑작스러운 변고에 크게 당황했다.

“……스토얀”

스토얀을 알고 있는 소수의 인물 중 하나인 허정현의 얼굴에 경악성이 어렸다.

다른 이들은 이 상황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못 하는 기색이었다. 인 이어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 만 국장의 음성이 급박했다.

가까스로 인유신만 날려 보낸 현규하가 외쳤다.

“여기에서 당장 피해!”

“늦었단다, 아들.”

스토얀이 피범벅인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 위의 허공에 휘황한 빛이 일렁거렸다. 그의 발밑으로부터 세상은 빠르게 색채를 잃어 가며 죽은 땅이 되었다. 동시에 침식 게이트를 유랑하다 수속된 망령들이 빛으로부터 역행하며 발산되었다.

해가 삼켜졌다. 이슥한 어둠을 밝히던 건물의 불빛이 일거에 사라지고, 서녘으로 넘어가던 태양 빛이 추락했다.

짤랑짤랑. 새까만 암흑 속에서 조개껍질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는 별의 악령, 치치미메의 강림이었다.

선혈이 떨어지는 인간의 심장과 손으로 만든 목걸이를 한 치치미메가 마침내 태양에게 승리하여 이 세상에는 영원한 일식과 종말이 내려왔다. 태양을 집어삼킨 치치미메는 이어 남은 인간들까지 먹어 치우기 위해 하강했다.

“아, 아아…….”

종말을 맞이한 사람들이 공포에 젖어 흐느꼈다. 종말, 종말이다. 태연하게 웃고, 하루를 살고, 내일을 바라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근원적 공포인 종말이 도래했다. 죽을 것이다. 전부 죽을 것이다.

정신 계통의 헌터인 제임스가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다들 정신 차리시오! 땅이 변한 건 맞지만, 나머지는 전부 환상이야!”

“맞아, 환상이지.”

스토얀이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거짓이라는 걸 인지하고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환상이 있다는 건 알까”

그의 손 위에 다른 환상이 생겨났다. 신과 인간에 의하여 만상의 세계에 초래되었던 멸망의 조각들이 일렁거렸다.

“어디 보자. 생기가 쇠하는 멸망과 대홍수로 인한 멸망은 저번에 써먹었고, 남은 게 뭐가 있을까.”

느긋하게 이어지는 말끝으로 다시금 빛이 산란하며 멸망이 찾아왔다.

멸망이 찾아왔다. 극심한 겨울이 도래하고 늑대들이 우짖으며 불의 거인들이 무지개다리를 무너트린다. 세계수가 불탄다.

멸망이 찾아왔다. 버섯 모양의 구름이 하늘 높이 솟는다. 아찔한 섬광에 눈이 멀고 전신이 녹아내린다.

멸망이 찾아왔다. 본디 지구를 비껴가야 했을 운석이 대륙으로 낙하한다. 빙하기가 시작된다.

멸망이 찾아왔다. 지옥의 왕이 그녀의 자식인 냉기를 억압하던 사슬을 끊는다. 영원한 겨울이 세상을 얼린다.

멸망이 찾아왔다. 별자리에 묶인 개가 도주한다. 하늘의 천체가 혼란해지고 별들이 추락한다.

멸망이 찾아왔다. 감염된 괴물이 인간을 물어뜯으며 역병을 전염시킨다. 시체만이 붕괴한 문명의 잔해를 배회한다.

멸망이 찾아왔다. 토끼의 신이 태양을 활로 쏜다. 산산조각이 난 태양이 추락한다. 대지가 불타오른다.

멸망이…….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인 이어 너머도 잠잠했다. 스토얀이 느긋한 손짓으로 현규하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목을 꺾었다.

멸망에서 비롯되는 환상에서 그 역시 자유롭지 않을 텐데도, 부릅뜬 눈동자는 고통에 젖어 있을지언정 흐려지지 않았다. 스토얀은 저와 같은 색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며 나른히 속삭였다.

“슬슬 아빠 말을 들어서 왕이 될 결심이 섰니”

현규하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뱉으며 사납게 웃었다.

“구라 치지 마요. 이아드가 멸망하게 된 원인이 누군데 무슨 헛소리죠”

“하하, 너무 티가 났어”

“방주에 거인 가뒀다가 풀었잖아요. 모르는 게 등신이지.”

“우리아쉬들은 나도 실망이야. 적어도 이 반도와 옆의 대륙 정도는 짓밟아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만에 몰살될지는 몰랐지.”

“아들 잘 뒀죠”

“그래, 네가 없었다면 우리아쉬들이 더 오래 버텼을 테니까. 이건 계산 착오였네.”

태연하게 말을 잇는 스토얀의 낯에 조급함 따위는 없었다.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현규하는 인유신이 있는 방향을 살피고자 하는 시선과 본능을 꾹 눌렀다.

대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답파할 방법을 찾기 위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시간을 끌어야 했다.

“거인들이 사람은 싫어해도 아버지는 좀 믿는 거 같던데요”

“그럴 리가. 우리아쉬들이나 나나 서로를 이용했을 뿐인 관계인걸. 나는 우리아쉬들이 원한을 해소할 방법을 제시했고, 우리아쉬는 나에게 틈을 주었지.”

“무슨 틈이죠”

“신들이 개입하지 못하는 틈.”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자세한 내용은 차치하고도, 눈앞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가 뭔가의 틈을 만들기 위해 숱한 인명이 상할 사태를 태연히 저지르는 인간이란 건 확실히 알겠다.

“멸망에 가까운 이아드는 아슬아슬한 균형으로 지탱되고 있단다. 거기에 신들이 우리아쉬를 막기 위해 신력을 쏟아부었으니 현재 상황은 흘러넘치기 직전의 물잔과 같다고 할 수 있겠구나.”

“…….”

“내가 무얼 하든, 한동안 신들은 개입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현규하는 부들거리는 팔로 배를 감쌌다. 피는 멎었지만 호흡을 하느라 복부가 움직일 때마다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올라왔다. 아니, 이미 찢어졌나.

“그래서 뭘 바란 건데요”

“네가 이아드를 위한 왕이 되길 바란 건 진짜란다. 얘야, 영생불멸하고 싶지 않니”

“지랄 마요. 유신 씨도 없이 혼자 영원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늘 ‘생각해 볼게요’ 같은 말로 대답을 회피하던 현규하에게서 처음으로 나온 솔직함에, 스토얀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 죽여 웃었다.

“사실 애초에 네 의사는 필요 없었어.”

스토얀이 현규하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손가락을 적신 피가 흰 뺨에 얼룩처럼 붉게 남았다.

“나에겐 불로불사가 된 네 육체만 필요하거든.”

아버지가 미소하며 속닥거렸다.

〈……응. 꿈에서 깨면 엄마가 우리 유신이가 좋아하는 소시지 굽고, 떡볶이도 만들어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얼마나 푸근하고 안온한 풍경이었을까. 2세는 케이지 안에서 놀고 있고, 부모님 옆에서 할머니와 마주 앉아 바비큐를 먹는 펜션의 밤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만 아니었다면 즐겁게 누렸을 그 밤은.

하지만 그 밤은 사위를 살라 먹는 흉흉한 불길과 아비규환의 비명이 핏빛으로 넘실거리는 악몽으로 돌아왔다. 그를 구하기 위해 어머니와 아버지의 숨이 다하고 할머니의 영혼을 무너트려 버린 그 밤은, 인유신이라는 개인의 종말이었다.

종말의 순간이 반복된다. 아버지의 마지막 숨이 산소마스크 위로 스러진다. 불길 너머에서 어머니가 꺾인다. 할머니가 울부짖는다. 모든 것이 그의 종말을 노래한다.

“……아니야.”

인유신은 스멀스멀 올라와 독소처럼 심장에 스미는 종말로부터 고개를 올렸다. 그 밤은 더없이 참혹한 기억이고, 과거로 돌아가서 바꾸어 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를 자신을 안다.

또한 인유신은 그 밤의 다른 이야기도 알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선택을. 홀로 살아남는 게 아닌, 자신을 살린 부모님의 선택을. 그 선택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바라보지 못하고 자책의 늪으로만 침전하던 저를 기꺼이 포옹한 사람이 있다.

〈그 두 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유신 씨 앞의 나는 없었을 거예요.〉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부모님의 선택이다. 자신을 사랑했기에, 부모님은 선택했다.

사람을 불신하던 그는 부모님으로 인해 사랑을 알고, 사람의 마음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애정을 거리낌 없이 자신에게 주었다. 자책과 후회만이 넘실거리던 오래된 늪에 사랑이 가득하도록.

그러니 그 밤은 인유신의 종말이 아니다.

인유신은 그 밤으로부터도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으므로.

“……!”

급격히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태양이 먹힌 시야는 여전히 어두웠고 빛을 잃은 대지는 무채색으로 죽어 가고 있었지만, 종말은 더 이상 그를 침해하지 못했다.

“규, 규하 씨는…….”

사람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렇다면 현규하는, 현규하는 어디에 있나.

혼란한 머릿속에 핏물이 훅 번지듯 기억이 떠올랐다. 가까스로 비명을 삼킨 인유신은 스토얀에게 붙잡혀 있을 현규하를 찾기 위해 자리를 박차려 했다.

그런 그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퍼뜩 돌아보니 낯선 얼굴의 소년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지나가다가 스쳐도 기억에 남지도 않을 듯한 평범한 외양의 소년이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한데도 그를 보자마자 인유신은 직감했다. 이 소년의 정체는…….

시선을 마주한 소년이 하얗게 미소했다.

“안녕. 네가 이 시대에 태어난 크르스니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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