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
[현재 상태 애정.]
인유신을 만나기 전부터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지독한 감정이 사라지자, 오롯한 그의 진심 하나만이 남았다.
주검은 더 이상 검은 짐승으로 변하지도, 안개나 박쥐로 변하지도 않고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치 이 별에 거부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규하 씨!”
인유신은 스토얀의 심장을 꿰뚫은 창을 쥐었던 제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는 현규하에게 달려갔다. 무표정하게 식어 있던 얼굴이 그를 눈에 담자 온화하게 밝아졌다.
상처가 적지 않았다. 얼른 힐부터 하고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집에서 신경을 거스르게 하던 해충을 박멸한 것처럼 상쾌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냥, 뭐. 그렇네요. 해야 할 일을 끝낸 느낌이라고 할까.”
인유신은 말없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현규하가 오히려 위로하듯 등허리를 토닥거렸다. 무엇보다 그의 마음이 크게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울 것 같은 기분으로 현규하를 부둥키고 있던 인유신은 뒤늦게야 정신을 수습했다.
“참, 태양 빛 아무튼 저거 거두어야 해요. 마나가 거의 고갈되어서 더 이상 유지하는 것도 어려울 거 같고요.”
“으응 저거 때문에 이렇게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로 눈 부신 거였어요 난 또 주인님의 후광인 줄 알았는데.”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의 말에 인유신은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인 채 상공에 구축한 마법진의 술식을 정지했다.
현규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마법진 거둔 거 맞아요 여전히 주인님은 빛 그 자체라서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는데요”
점점 더 붉어지는 인유신의 홍안증은 다행히 장범이 구해 주었다.
“야, 이 커퀴들아. 저건 네 아빠가 저지른 짓 아냐 근데 왜 그대로 남아 있대”
사방에 깔렸던 어둠은 전부 지워졌으나 어지러이 맺힌 흉성들은 여전했다. 종말의 징조들이 남긴 기운을 전부 수속한 흉성의 저편은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그저 검기만 하다.
이따금 일렁이는 기운만이 그 내부가 나선 모양으로 요동치고 있음을 알려 줄 따름이었다. 헌터들도 불안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수런거리고 있던 그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미키! 미키!”
어느 헌터가 테이밍하여 데리고 있던 마수가 흉성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뭐, 뭐야!”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급히 소년을 돌아봤으나 그도 놀란 얼굴인 건 매한가지였다. 아직 햄스터로 돌아가지 않은 8세가 기겁하여 인유신의 다리에 바짝 붙었다.
하늘과 죽은 지면, 무너진 잔해 등을 가리지 않고 시커먼 구멍이 뚫린 것처럼 곳곳에 생겨난 흉성들을 둘러본 현규하는 ‘보았다’. 저것이 어떻게 이 세계를 좀먹어 나가고 있는지. 위태로이 지탱 중인 이아드에 어떠한 해악이 되는지.
신을 제외하고 이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지상과 지하를 통틀어 스토야와 그밖에 없을 것이다.
‘……씨발. 나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보여 준다고’
현규하는 자신의 상태창을 가만히 띄웠다.
[히든 특성]
- 뱀파이어 특질
- ■■■■■ ■■■ ■■■■■■■와 이아드의 혼성
- 담피르
- 왕의 사생아
담피르의 힘을 쓰면서 특질이 되돌아왔으나 그의 신경이 쏠리는 곳은 다른 항목이었다.
“…….”
뱀파이어 특질이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이면 돌이킬 수 있나. 돌이켜야 하나.
어수선한 가운데 공태성이 솜노로스를 호출했다. 흉성에 거대한 육신의 일부가 겹쳤으나 본체가 아니기 때문인지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신어를 목격하게 된 헌터들은 더욱 소란스러워졌으나 일일이 설명할 계제가 아니었다. 솜노로스가 소심하게 눈치를 살폈다.
“왕자님한테 축하한다고 해도 되려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 검은 게 뭔지 알겠나”
“안 그래도 신계에서는 내가 상황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의아했는데…….”
가까이에 얼굴을 가져간 솜노로스가 커다란 눈동자를 세차게 끔뻑거렸다.
“이거 기운이 조금, 세계의 틈과도 비슷한데 왕이 한 짓이야 어떻게!”
“스토얀이 종말을 뜻하는 상징들을 불러냈다. 그것들을 죽이다 보니 생성되고 강화되었고.”
“아, 알았어. 내가 금방 가서 다른 신들께 여쭙고 올…….”
허둥지둥하던 솜노로스가 신계로 돌아가기도 전이었다.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유신 씨!”
저 멀리에서 달려온 손희애가 가쁜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인유신의 팔을 붙잡았다.
“빨리, 빨리 돌아갈 준비를 해라!”
“예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현규하는 알았다.
【말세가 도래하면 길이 열릴 것이다.】
아아.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현규하는 입술 안쪽의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목 안으로 삼켜졌다.
손희애가 숨을 몰아쉴 겨를도 없이 연이어 설명했다.
“구삼승할망께서 말씀하셨다. 지금 이때를 놓치면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지금 당장요 어, 어떡하지. 6세도 없는데!”
이 순간이 바로 구삼승이 이전에 말했던 말세란 의미일까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군다나 위험한 장소에 오느라 6세는 한양에서 최진혁이 며칠 보살펴 주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서 바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던 인유신은 당혹하여 현규하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갑작……”
“…….”
그를 내려다보는 현규하의 눈빛에 담긴 건 그와 비슷한 놀라움이나 당혹감이 아닌, 기묘한 고요함이었다.
〈당신에게 그 말을 들었으니 됐어요, 정말로.〉
인유신의 가슴 안에 불현듯 기시감이 치밀었다. 거인과 싸우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의 끝자락에 느꼈던, 그 불안감.
갑자기 손희애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아드의 것들은 눈을 감고 귀를 덮고 의식을 닫을지어다.】
놀라서 웅성거리던 헌터들이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이라도 된 양 일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인 이어에서 들리는 잡음으로 볼 때 지휘부나 서낭당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의식을 잃지 않은 사람은 구삼승의 공수를 받은 손희애, 그리고 철의 시대에서 건너온 넷뿐이었다.
“미잉…….”
8세가 불안한 표정으로 더욱 인유신의 다리에 매달리듯 밀착했다. 구삼승이 그를 응시했다. 손희애의 신장은 인유신보다 더 작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는 이아드의 것이 듣지 않는 게 좋으리라.】
“뭐……. 다른 세계로 탈출할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하니 그렇기도 하겠습니다만.”
낯선 신의 음성에 대꾸하는 한편으로 공태성은 다른 상념을 품었다. 그 방법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의 인구가 전부 탈출할 수 있는 건 아닐 터. 일부만 탈출하느니 다 같이 죽으라는 건가.
이것이 신의 공애(公愛)라면, 신력이니 마법이니 하는 것을 쓰지 못하더라도 인간이 자신의 뜻을 결정하는 철의 시대가 훨씬 더 낫지 않은가.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구삼승이 재차 말을 이었다.
【보편적으로 불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남은 시간이 짧은데 닿지 않을 곳에 헛되이 손을 뻗으며 낭비할 이유가 있는가.】
이를 판단하며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도 이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의 권리라고 공태성은 생각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보는 시각이 아득하게 다른 신과 입씨름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도 제 할 말을 참지 않을 현규하가 묘하게 조용했다.
손희애의 육신을 빌린 구삼승이 팔을 올려 흉성의 하나를 가리켰다. 현규하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끝을 따라갔다.
【본디 멸망에 다다를 때 별의 가장 안쪽에서 생성되어 종국에 세계를 잠식하는 것이다.】
“……완전히 삼키게 되는 건가요”
【그러하다. 동시에 이 흉성은 다른 세계로 별의 종언을 전하는 통로가 되어 박혀 있는 파편 또한 최후를 맞이하고 변질된다.】
“아…….”
침식 게이트를 설명하던 스토야와의 대화가 기억났다.
【물론 이것은 스토얀이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나 잠깐이나마 통로의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왕이 혼자였다면 두 세계의 혼성이라 철의 시대로 통로를 특정하지 못했을 터이나, 다행히 철의 시대의 것이 세 명이나 있구나. 말세가 도래하면 길이 열리리라 전한 건 이를 뜻함이라.】
멍하니 설명을 듣던 인유신은 도중에 언급된 이상한 단어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구삼승이 재촉했다.
【내가 인도하겠다. 한시 빨리 닫아야 하니 결정하거라. 돌아가겠느냐】
“자, 잠깐만요.”
왕 스토얀은 이미 죽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스토야를 일컫는 뉘앙스도 아니었다. 오히려, 두 세계의 혼성이라면…….
해연한 눈빛이 현규하를 향했다. 인유신만이 아니라 공태성과 장범의 놀란 시선을 받고도 현규하는 무표정하게 구삼승을 응시했다. 이대로도 신과 소통할 수 있나. ‘나’에게 가능한 일인가. 아, 되었다. 구삼승의 신성이 그의 안에 은은히 이어진 게 느껴졌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이어지는 질문을 들은 구삼승의 답은 간단했다.
【가능하다.】
그럼 되었다.
마지막 망설임이 이로써 온전히 거두어졌다. 현규하는 창백한 눈동자에 불신을 가득 담고 올려다보는 인유신에게 고요히 속삭였다.
“먼저 가서 기다릴래요 여기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규, 규하 씨가 어째서요!”
그답지 않은 격정적인 반응으로 인유신이 현규하를 붙잡았다.
“이아드를 망가트린 게 스토얀이라서 그런 거예요 책임감 때문에요! 저는……!”
현규하는 인유신이 걷잡지 못할 말을 쏟아내기 전에 그의 입을 제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다. 이미 들었다.
〈저는 온 세상 사람들이 위험하다거나, 큰일이 난다거나, 하는 그런 위급한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규하 씨가 더 소중해요.〉
충분하다, 정말로.
자신 또한 그와 같은 마음이므로. 이 세상 전부를 다 가져와도 인유신을 갈음할 수 없기에, 현규하는 선택했다.
“계속 숨기려던 건 아니고 나도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 백두산 일이 끝나면 말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꼬였네요.”
“…….”
현규하는 입술이 가로막힌 채 울 것처럼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전부 제 안에 담으며 낮게 말했다.
“한 부부가 있어요. 아내는 완력을 강화하는 능력을 각성했고 남편은 화상을 덜 입는 능력을 각성했죠. 조선에서 실질적으로 전투 능력이 있는 각성자는 전부 국가에 소속된 헌터니까 아내도 마찬가지였어요. 헵타곤의 헌터인 아내는 개성으로 발령을 받았고, 소방관인 남편도 같이 부임지를 옮겼죠.”
부부의 각성 능력을 듣자 인유신의 낯에는 채 다스리지 못한 경악이 차올랐다.
“개성으로 기반을 옮긴 부부는 여름휴가의 장소를 언제나 북쪽의 평안도나 동해로 잡았어요. 파주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 그럼…… 그, 계속…….”
“맞아요. 개성에는 헌터 김지원과 소방관 김정훈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인유신의 입술이 느리게 달싹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말을 하고 있기나 한 걸까.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거칠고 단단한 현규하의 손끝이 눈가를 닦았다. 자신의 눈앞이 뿌연 습막으로 얼룩져 있었다는 걸 가까스로 인식했다. 겨우 트인 시선에 비치는 현규하의 고요한 표정은 굳게 결심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아.
그 표정을 본 순간 인유신은 깨달았다. 현규하를 잡을 수 없다는 걸.
그를 붙잡지 못하리라 여겼던 침식 게이트에서의 직감과는 다르다.
죽고자 하는 게 아니라, 다시금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결심이었으므로. 아마도 그것은…….
“부부는 개성으로 이사하기 전에 보육원에서 아이를 입양했어요.”
자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