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아이는 무사히 잘 자라서,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알바도 하고 있어요. 성적도 좋고 친구도 많고 가족과도 아주 화목해요. 한양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가 적적할까 봐 자주 놀러 갈 만큼 착하고요.”
인유신은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알았다. 정제되지 못한 감정이 울컥 치밀더니 서럽게 튀어나왔다.
“그건 제가 아니잖아요!”
이 세계의 인유신, 아니 김유신은 자신이 아니다. 저 하나 때문에 현규하가 스스로 희생한다 하여도 견딜 수 없을 텐데, 김유신이라니. 안 돼. 절대 안 돼.
그가 세상에 묶이고 바쳐진 산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스토얀의 결과가 어떠한가. 스토야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저도 아닌데, 왜, 왜……! 저였어도 안 되는 건데!”
“부부가 입양한 아이가 유신 씨가 아니라는 건 물론 나도 알고 있습니다. 유신 씨를 겹쳐서 보는 것도 아니고요.”
그럼 도대체 왜 이러냐는 설움이 터져 흐르는 그의 얼굴을 현규하가 가만히 끌어안았다. 비통이 흐느낌이 되어 가슴팍에 짙게 번졌다.
쿵쾅거리는 한 쌍의 고동이 귓전을 요란하게 울렸다. 고요해 보였지만, 인유신 못지않은 격정으로 요동치는 그의 진심이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유신 씨가 가족들과 행복해질 수 있었던 어떠한 가능성이 이루어진 세계잖아요. 외면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고개를 돌리면 이 가능성은 정말 빠르게 무너질 테니까.”
“그래도 싫어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규하 씨가 희생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현규하는 심장을 사르는 듯한 괴로움을 짓씹었다. 언어를 가다듬지도 못하고 중언부언하며 울면서 붙잡는 인유신의 흐느낌이 다시금 발목을 옭아맨다. 이제라도 모든 걸 취소하고, 없던 일로 되돌리고, 그와 함께 돌아가고 싶다며 영혼이 외친다.
그렇게 그와 돌아가면 편해질까.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하고 돌아간 뒤에도 그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을까.
빨갛게 부은 인유신의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인유신이 토해 내는 붉은 진심이 입술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 열망이 살갗 밑으로 침범하여 심장까지 뜨겁게 달구었다.
그와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부터 생의 접점을 교차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보육원에서, 화마에 살라 먹히던 펜션. 그리고 그 후의 시간들. 현규하는 은행에서 조우하기 전에도 그와 스친 편린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때로는 길가에서. 때로는 식당에서. 때로는 공원에서.
그 모든 가능성을 집약하면 무엇이 되었을까.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지는 못했겠지만 일찍이 서로의 위안이 되어 줄 수 있었을까. 내가 조금 더 빨리, 당신의 아픔을 알 수 있었을까.
이 세계의 김유신은 현규하라는 가능성을 배제한 다른 행복을 손에 넣었다. 부모님은 건강하고 할머니와도 사이가 좋다. 친구도 많으며 좋아하는 공부도 마음껏 하고 있다.
언제 멸망이 닥칠지 모른다는 뿌리 깊은 불안감만 제한다면 김유신의 삶은 지극히 평탄하고 온화했다.
그 불안감은 자신이 지워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 희생이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다.
현규하는 괴로움을 억누르며 천천히 목소리를 저 깊은 곳에서 끌어 올렸다. 다행이다. 걱정했던 것처럼 크게 떨리지는 않았다.
“폼 잡아 놓고 솔직히 말하자면요, 나중에 내가 따로 돌아갈 길이 없었다면 외면했을 겁니다. 근데 방법이 있다는 걸 확신했거든요.”
“저도 여기 남을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인유신은 세차게 얼굴을 내저으며 현규하를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한 충동 따위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인유신은 그가 받아들인 운명에 그만 홀로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의 운명을 함께 나누어 지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조곤조곤한 음성이 인유신의 격정을 부드럽게 품었다.
“나에겐 당신뿐이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잖아요. 나 하나의 만족감을 위해 유신 씨의 모든 걸 버리고 오라고 할 수는 없어요. 게다가 멸망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괴로움을 유신 씨가 겪게 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럼 규……!”
목 안에서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튀어 나가려는 말을 간신히 막았다. 억지로 꽉 깨문 아랫입술에서 엷은 피가 비쳤다.
그럼 당신이 멸망하는 세계에서 겪을 괴로움을 알면서도 두고 가는 나는 괜찮을 거 같으냐고, 외치고 싶다. 그에게 부딪치고 싶다. 홀로 두고 가는 힘듦을 알면서도 자신을 보내려는 그가 야속하다.
하지만 그 말까지 전부 꺼내면 서로에게 가시를 곤두세우는 결과가 될 것이기에, 다만 인유신은 서러운 눈물만 떨구면서 현규하의 재킷을 꽉 붙잡았다. 붙잡고 있으면 그를 홀로 두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돌아올 수 있다고 해도 엄청 오래 걸리잖아요. 제가 죽을 때까지 규하 씨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인유신을 괴롭게 하는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별을 움직이게 하는 흐름이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한다. 하나 차츰 멸망으로 추락하는 세상을 아주 긴 시간 지탱하노라면 괴롭지 않을까. 힘들지 않을까.
“어떻게, 제가 규하 씨를 혼자 두고, 어떻게…….”
【2년이다.】
여태 말을 섞지 않고 침묵으로 지키던 구삼승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철의 시대로 보내 주마. 시간을 역행하게 해 줄 터이니 이후 보내게 될 멸망까지의 순간들은 왕의 기억에 남지 않을 것이다.】
“…….”
인유신은 더욱 입술을 깨물었다. 구삼승은 그가 겪을 간난신고를 부정하지 않았다. 기억에 남지 않는다고 하여 괴로움이 무디어질까. 완전히 잊힐까.
놓고 싶지 않다. 이 사람을 홀로 두고 싶지 않다.
이아드의 김유신은 그의 말처럼 분명히 잘 살아가고 있을 터다. 아마도 행복이라 칭할 수 있을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유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와 보낸 자신의 나날 또한 충만한 행복으로 가득했다. 그가 열어 준 새로운 세상을 겪으며 기뻤고, 놀라웠고, 때로는 무서운 경험을 하기도 했고, 그보다 더욱 많이 즐거웠다. 그 모든 시간에 현규하가 존재했다.
현규하가 인유신을 양팔로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언젠가의 별장에서, 달빛만이 아스라이 비치던 그날, 정체하지 않고 변하기로 결심했던 밤의 기억처럼 인유신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건물의 조명 덕분에 그날처럼 완전히 어둡지는 않지만, 여전히 현규하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고 있기에, 눈물만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방울 사이로 현규하의 나직한 속삭임이 일렁거렸다.
“유신 씨. 나는 그때 유신 씨의 부모님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30분이라도 일찍 펜션을 지날 수 있었다면, 하는 후회를 혼자 곱씹기도 했어요.”
“…….”
“비로소 새로운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유신 씨의 부모님과 유신 씨를 구할 수 있게 도와줄래요”
인유신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나쁜 사람이었다. 이 말까지 듣고서, 어떻게 구하지 말고 같이 가자고 붙잡을 수 있겠는가.
울음에 젖은 음성이 서럽게 아래로 흘렀다.
“다음에……. 다음에는 환할 때 올려서 안아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다음에 하면 되잖아요. 못 만나는 것도 아닌데.”
“2년 지났는데도 규하 씨가 안 오면 저 9세 입양해 버릴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네요……. 신들 앞에서 자살 공갈 협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간 맞출게요.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6세 누나는 걱정하지 말고요. 이참에 남매끼리 돈독한 우애를 쌓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거 알아요”
“응”
“규하 씨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거울로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분명히 엉망진창일 것이다. 현규하를 두고 갈 수 없다는 괴로움과, 슬픔과, 미련과, 설움과, 고통이 여과 없이 뚝뚝 떨어지는 엉망진창의 얼굴로 인유신은 그에게 입을 맞췄다.
포개진 입술이 순간 갈급하게 인유신의 숨을 받아 삼키려다가, 억제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 안을 더듬었다. 인유신은 살그머니 감아 오는 홧홧한 살덩이를 깊이 빨아 당겼다. 얽히는 숨결마다 마지막인 것처럼, 더욱 깊이, 더욱 뜨겁게.
엉망으로 젖은 얼굴 위를 현규하의 입술이 부드럽게 스쳤다. 빨갛게 퉁퉁 부은 눈가에 입 맞추고, 고인 눈물을 핥고, 상처 난 아랫입술을 살그머니 보듬으며, 속삭였다.
“오직 유신 씨만이 나를 돌아가게 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자세한 건 고모에게 말해 놓겠습니다. 그러니까 유신 씨.”
“…….”
“꼭 돌아갈게요.”
현규하는 인유신의 왼손을 잡으며 약지에 입을 맞췄다. 늘 끼고 있는 햄스터 반지가 두 사람의 살갗을 눌렀다.
〈그러니까 이건……. 너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사람에게 주렴.〉
이정표는 처음부터 줄곧 변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미련이자 진심이며 의미가 있는 곳. 그가 바라보는 미래에 있는 사람. 그를 살아가게 하는 사람.
사이코키네시스가 인유신의 몸을 뒤쪽에 서 있는 공태성과 장범에게로 옮겨 주었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8세도 현규하의 다리에 얼굴을 마지막으로 비비고는 인유신에게 달려갔다.
그를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인유신을 스스로 놓음으로써, 현규하라는 인간의 삶에는 잠깐의 마침표가 찍혔다.
세계에 새로운 왕이 아로새겨졌다.
[앙리 레이몬드 샤를 프랑소와즈 7세의 히든 특성이 변화합니다.]
[뱀파이어 특질과 왕의 사생아가 사라집니다.]
[이아드의 왕이 새겨집니다.]
[테이밍의 조건에 위반됩니다. 테이밍이 해제되었습니다.]
인유신의 눈앞에 알림창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와 이별하게 된다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 나서 왈칵 감정이 북받쳤지만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꾹 참았다. 그를 담을 마지막 순간을 눈물로 버릴 수는 없었다.
종언의 때로 달음박질치던 급격한 추락이 완화되었다. 죽었던 땅이 색채를 되찾았다. 시시각각 별을 좀먹어 가던 흉성의 잠식이 멈추었다.
별 위에서 살아 숨 쉬던 모든 생명체의 의식이 일순간 한곳으로 쏠렸다. 별에서 태어날 때부터 품고 있던 본능이 직감했다. 이 땅에서 살아감을 허락받은 시간이 이어지게 되었음을 그들을 깨달았다.
신들의 탄식을 들으며 현규하는 눈을 떴다.
세상이 새롭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변했다. 위태로우나 결코 멈추지 않는 별의 고동이 들린다. 최후까지 빛남을 포기하지 않는 생의 경이로움이 그에게로 흘러든다.
전부, 스토얀이 외면했던 것.
별은 이제 자신의 아이들이 죽어 지하로 흘러간 뒤에야 왕의 보살핌을 받는 게 아니라, 삶을 이루는 동안에도 왕에게 의지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안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유일한 광경이 있다.
“……유신 씨.”
현규하는 심장에 새겨진 낯선 울림을 힘겹게 읊었다.
“유신 씨.”
유신.
유신.
인유신.
처음으로 부르는 것만 같은 이름. 그러나 영혼이 기억하는 이름.
제 의지를 강제하던 굴레에서 벗어난 심장이 환희했다. 현규하는 눈부실 만큼 황홀한 빛으로 자신의 안을 물들이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해, 표정만을 굳혔다.
〈그것들도 전부, 테이밍이 억지로 기워 붙이고 뜯어고친 가짜잖아요.〉
유신 씨. 나는 지금도 단호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틀렸어요.
테이밍이라는 속박에 제어되던 건 오히려 그의 진심이었다. 영혼에 가교를 놓고 주인과 이어져 있다는 절대 명제에 묶여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오듯이 풀려났다. 범람하는 사랑이, 붉은 심장에 새겨 넣은 오롯한 진심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그가 평생 잊지 못할 늦봄의 어느 날.
바이크가 신호등에 걸리지 않았다면 굳이 방향을 돌리지 않았을 은행의 소동. 인유신에게로 이어졌던 길. 아아, 그래. 그랬던 거였지.
아버지가 도구로 쓰기 위해 그를 낳은 것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어머니가 그를 버리고 간 것도, 한때 아버지처럼 여겼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도, 모두. 모두.
제 삶의 모든 질곡이, 걸음마다 피가 맺히던 가시밭길이 인유신을 위해 나아가는 여정이었으므로, 현규하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아버지가 태어나게 했기에 나는 저 사람을 만났어.
“당신은 정말, 나에게 봄 같은 사람이에요.”
자신에게는 평생 오지 않을 거라 여겼던 봄 같은 온화함도, 새싹처럼 움트는 새로운 빛도, 처음으로 가진 희망도, 단 하나의 사람을 향한 믿음도, 그 모든 이름은 전부 인유신이다.
이쪽 세상이든, 저쪽 세상이든, 어디서든 당장 죽어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이제 현규하는 그 지독한 권태감이 아득한 먼 기억처럼 흩어졌음을 안다.
그것은 인유신의 곁으로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삶의 의지였다.
“그날 은행으로 간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저도요.”
울음을 참느라 입 안에서 말이 형편없이 망가졌다. 혹여 현규하가 듣지 못한 게 아닌지 걱정되어 인유신은 다시 외쳤다.
“저도요! 저 그날 보이스 피싱범들 때문에 은행에 간 거였는데,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던 하루였는데……! 사실은 최고로 운이 좋았던 날이었어요!”
구삼승이 흉성에 길을 열었다. 인유신이 남겨 두고 온 그의 삶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현규하가 곧 다시 밟아 가야 할 길이다.
현규하는 인사했다. 헤어지는 안녕이 아닌, 다시 만날 것임을 기약하는 안녕.
“그런 일이 있었어요 결과적으로 고마운 인간들이긴 한데, 아무튼 유신 씨를 고생시킨 건 사실이니까 돌아가면 그 피싱범들 전부 조져 놓겠습니다.”
그다운 인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흉성은 닫혔다.
돌아 나온 곳은 가로등의 빛만이 어른거리는 어둑한 공원의 한가운데였다.
“우왓!”
하필 연못의 가장자리로 나와서 빠질 뻔한 장범은 겨우 균형을 잡았다. 외마디 비명이 작게 들려서 돌아보니 반려견의 목줄을 잡은 채 눈을 휘둥그렇게 뜬 행인이 있었다.
“놀라셨죠 죄송함다! 저는 나르샤 길드의 헌터인데요, 급하게 텔레포트를 하느라요.”
“아, 장범 헌터님이세요”
마침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행인은 그제야 안도하여 가슴을 쓸어내렸다. 방금까지 전투를 치른 흔적이 역력한 장범의 모습까지 본 행인은 별말 없이 인사만 꾸벅하고 길을 돌아 사라졌다.
인유신과 공태성이 나타난 건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인유신은 바닥에 풀썩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거칠게 들썩거리며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장범은 어떻게 해야 할지 서슴서슴하다가 인유신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규하 정말 나쁜 놈이지”
“좋은 사람이니까 혼자 남은 거잖아요.”
흐느낌에 먹혀서 불분명한 발음으로도 인유신은 현규하의 역성을 들었다. 아니, 역성이랄 것도 없다. 전부 사실이니까.
장범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지,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만은 우주 제일 좋은 남자잖아. 이야아, 내가 유신이었다면 규하한테 또 반했다!”
일부러 과장된 호들갑을 떨던 장범은 공태성에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뒤에야 입을 다물었다. 세계를 넘어오며 다시 햄스터의 형상으로 돌아온 8세가 쭈뼛거리다가 인유신의 어깨로 올라갔다.
“찌이이…….”
“응, 알아. 괜찮아…….”
괜찮다는 말을 하는데도 걷잡지 못하는 석별의 슬픔과 회포가 범람하여 그를 휩쓸었다. 그에 인유신은 마음에 품고 온 현규하의 마지막 모습만을 하염없이 되새겼다. 약속했다. 돌아오겠다고 꼭 약속했다.
멸망을 떠올릴 수조차 없는 평화롭고 조용한 어느 밤. 어둑한 공원에 숨죽인 흐느낌만이 고요히 고여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