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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7)화 (7/172)

7화

예의상 한 말이 아니라 짐은 정말 옷뿐이었다.

전세에서 월세로, 고시원으로, 여관으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짐은 점점 줄었고, 찜질방이나 길바닥에서 하루를 보내는 일도 생기자 가구나 가전은커녕 개인 식기도 없이 다니게 되었다.

가방 두 개에 옷가지를 나눠 담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문득 메모라도 한 장 남겨야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했다.

숙박비가 없어 인력 사무소가 문을 열 때까지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잠을 자며 기다리던 나를 데려와 준 사람이 최 씨 아저씨였다. 본인도 손바닥만 한 방에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쪽방 신세이면서도, 길바닥에서 자는 내가 안쓰러워 잠이라도 누워 자라며 끌고 들어와 이불 한쪽을 내어 주었다.

방세의 반이라도 부담했으면 미안하지나 않지. 소주 두어 병으로 입 닦아 놓고, 신세 한번 잘 졌다.

[일을 구하게 되어 인사도 못 드리고 급하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쉬시는 날 찾아뵐게요.]

선반 위에 메모지를 올려놓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여자가 택시비로 준 돈을 꺼냈다. 왕복으로 택시를 타라는 의미였는지 오만 원짜리가 두 장이었다. 택시나 버스나 복잡한 서울 바닥에서 속도는 비슷할 거라며 부득불 버스를 타고 와 고스란히 남았다. 잠시 고민 끝에 그것을 메모지 밑에 끼워 두고,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여자는 서두르라고 했지만, 가방 두 개 챙기는 정도야 서두르지 않아도 그리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가방을 챙겨 나온 나는 마지막으로 근처 은행에 들렀다.

사실 병원비를 모았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은 부족한 돈을 채우기에 무리였으니까. 그렇다고 병원비를 다 모을 때까지 입금을 미룰 수도 없다. 앞으로 먹고 자는 비용이 들지 않을 테니, 모아 둔 돈을 싹싹 긁어서 병원비 일부라도 입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통장 정리가 되길 기다려 잔액을 확인하는데, 마지막에 찍힌 숫자가 나를 놀라게 했다.

“이게 왜…….”

낯선 이름으로 입금된 돈은 어제 여자가 월급이라고 보여 주었던 금액과 일치했다. 고용주님이 미리 월급을 준비하셨다더니,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바로 넣어 주신 모양이다.

아직 일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짐을 챙겨 오겠다며 자리까지 비웠는데……. 여자는 무엇을 믿고 칼같이 월급을, 그것도 선금으로 입금해 준 것일까.

주머니에 자리한 계약서가 불현듯 무겁게 느껴졌다.

∞ ∞ ∞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올 수 있으려나 걱정했는데. 일찍 왔네요?”

“네, 챙길 것이 별로 없어서요.”

서두르라고 택시비까지 줘 놓고 여자는 나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들어와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 도련님도 곧 도착하신다고 연락이 왔어요.”

“일요일인데 회사 가셨어요?”

“아니, 일이 있어서 본가에 가셨거든. 곧 오실 테니까 식사 준비를 서둘러야겠어. 짐은 한쪽에 두고 들어와요. 쓸 방은 도련님 오면 상의해서 결정하고.”

드디어 여리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서른네 살의 도련님을 보게 되는 것인가.

조금 긴장도 되고, 여러 가지 의미로 두렵기도 했다.

“도와 드릴까요?”

“아냐, 아직은 손님인걸. 혼자 있기 뭐하면 티브이를 보든가, 아니면 주방 들어와서 말벗이나 해 줘요.”

혼자 멀뚱하게 앉아 있기가 뭐해서 쭈뼛쭈뼛 여자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짧은 시간에 빠르게 움직였는지 커다란 냄비 안에서 무언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저…… 아까 오는 길에 통장 정리를 했는데요. 혹시 월급 미리 넣어 주셨어요?”

“아, 봤어요?”

“네.”

“일당으로 받아야 한다기에 급하게 돈 필요한 일이 있나 싶었어요. 마침 도련님이 월급을 미리 준비해 두셔서 바로 보냈지. 아무래도 일당보다는 월급으로 받는 게 더 이득이잖아요.”

월급으로 받으면 쉬는 날까지 포함되니까.

하지만 그건 내 입장에서나 이득인 거지, 일 시키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신경 쓸 거리가 되지 못했다.

“돈 받고 안 오면 어쩌시려고요.”

“내가 말했잖아요. 해민 씨 눈에서 선량함을 봤다고. 그런 사람들은 남 등쳐 먹고 못 살아. 애초에 성격이 그래.”

“성격은 환경을 이기지 못하잖아요. 진짜 죽을 것 같으면, 남의 등이라도 쳐 먹고 살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눈동자에 ‘선량함’이라고 적혀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너무 믿는 게 아니냐고, 그 돈이 진짜 간절한 사람은 남의 등을 치는 게 아니라 찌를 수도 있는 법이라고. 이유도 없이 울컥 화가 치밀었다.

신뢰할 무언가가 전혀 없는 나를 믿고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월급을 보내 준 사람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다. 이건 그냥 내 상황이 싫고, 내 처지가 싫어서 부리는 억지였다.

입을 꾹 다문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여자는 이내 “괜찮아요.” 하고 웃었다. 상당히 뜬금없지만,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듯한 위로였다.

“어휴, 이제부터 해민 씨가 나 대신 고생해 줘야겠다. 우리 도련님이 아침잠이 많거든. 해민 씨는 어때요?”

그녀는 분위기를 환기하듯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기꺼이 여자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인력 사무소는 일찍 나가 있지 않으면 일이 없어서요. 보통 새벽에 일어나 사무소에 가서 기다리며 눈을 붙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구나, 많이 피곤했겠네. 도련님 출근은 아홉 시에 맞춰 가는 편이라, 아침에는 조금 여유로울 거예요.”

“네.”

“아침 식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여덟 시예요. 도련님 깨워서 씻으라고 들여보내고 상을 차리거든. 아니면 출근 전까지 늑장을 부려서 아침을 못 먹어. 아침 먹는 것도 싫어해서 아침 메뉴는 거의 죽이에요. 해민 씨는 아침에 빵 먹는 타입인가? 아니면 밥?”

“있으면 있는 대로 다 잘 먹습니다.”

“죽이 부담은 없는데, 금방 배가 꺼져. 물어보니 점심은 잘 챙겨 먹는다니까 걱정 안 했거든요. 해민 씨가 걱정이네.”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죽도 좋아요.”

뭐든 좋지 않을까. 집에서 누군가가 차려 주는 밥, 그것도 공짜로 준다는데 멀건 쌀죽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라도 감사할 것 같았다.

“아침 식사 끝나면 도련님과 같이 출근하면 돼요. 출근해서는 쭉 우리 도련님과 함께 있을 테니까, 내가 따로 당부할 건 없고.”

그런데 개인 비서도 있는 사람이 나를 무슨 용도로 필요로 할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집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면야 청소나 심부름이라도 시키겠거니 싶지만.

“점심은 도련님 스케줄에 맞춰서 같이 먹든 따로 먹든 할 거고. 저녁은 다른 일 없으면 보통 집에 와서 드시는 걸 좋아해요. 나는 끼니 챙겨 먹는지가 가장 걱정이 되는 할머니라서 식사 외에는…….”

냄비 안의 음식이 완성되기만 하면 되는지, 대충 싱크대를 정리하다 돌아선 여자가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 못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나 보지. 멋쩍은 마음에 손으로 뺨을 감췄다.

“너무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은 하지 마요. 어려운 일은 없을 거야. 시키지도 않을 거고.”

그렇게 말을 해도 걱정스럽고 막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선금을 미리 받았다는 점이랄까.

설마 생각이 바뀌었다며 먹은 돈 뱉어 내고 나가라는 말은 안 하겠지.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병원비를 입금해 버려서, 나가라고 해도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겠지만.

“해민 씨는 그냥 우리 도련님 옆에만 있어 주면 돼요. 가끔 식사 거를 때 밥 먹으라고 얘기해 주면 내가 고마울 거고, 술 마실 일이 있을 때 조금만 마시게 해 주면 역시 내가 고마울 거고.”

그건 전혀 내가 해야 할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한다면 돈 받으면서까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지도 않고.

서너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밥 안 먹는다고 따라다니면서 밥을 먹이겠나, 아니면 미성년자도 아닌데 술 마시는 것을 금지시키겠나. 아무리 여리고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 한들 서른네 살의 사회인이 아니던가.

“저는 그 도련님이라는 분에게 고용된 겁니까, 아니면…… 사모님께 고용된 겁니까?”

“응? 사모님이라니, 아냐. 차라리 할머니라고 불러요.”

“……네?”

“우리 도련님을 오래 돌보긴 했지만, 사모님은 아니야. 그냥 편하게 불러요.”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눈앞의 여자 역시 이 집의 고용인이 분명했다.

하지만 똑같이 일하는 처지라고 해도 진짜 똑같은 처지는 아니겠지. 편하게 부르라지만 마냥 편하게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월급은 그분이 주시는 것 같은데, 지금 말씀하시는 일들이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가 않아서요. 정말 도련님을 옆에서 따라다니며 지켜보고 유치원 선생님처럼 점심시간이니까 식사하세요, 반찬은 골고루 먹어야 해요.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싶어서요.”

“내가 말을 조금 잘못했나 보네요.”

내 말투가 뾰족했는지 여자는 미안해요, 하고 웃으며 사과했다.

“해민 씨를 고용한 사람은 당연히 도련님이에요. 지금 한 말들은 그냥 회사에서 쭉 같이 있을 거니까 신경을 좀 써 줬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이었고. 해민 씨가 도련님 옆에서 할 일은 아마도 도련님이 그때그때 말씀해 주실 거야.”

그러니까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그 일이 대충 어떤 일인지에 대해 알고 싶은 거지만, 여자의 태도를 보아 거기까지 말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힘쓰는 일도 아니고 전문적인 일도 아니라고 하시니, 제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가늠이 되질 않네요. 이미 돈을 받아 버렸으니 무를 수는 없지만, 말로만 들으면 제가 필요할 일이 없을 듯싶어 걱정되기도 하고요.”

“음, 도련님의 다친 손이 할 일을 해민 씨가 대신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겠지만, 정신적으로 조금 피곤하기는 할 거예요.”

“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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