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12)화 (12/172)

12화

“여사님은 혹시, 실장님의 유모인가요?”

내 물음에 여사님의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도련님을 젖 물려 키우기엔 내가 나이가 많았지.”

냉장고에서 여러 가지 해물을 꺼내 싱크대로 옮겨 놓은 여사님이 하나하나 손질을 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원래 아가씨, 아니, 돌아가신 사모님 친정에서 일했거든요. 그러다 결혼하시면서 이쪽 집안으로 같이 넘어왔어요. 그러니 큰 도련님 태어나는 것도 봤고, 작은 도련님 태어나는 것도 봤지. 작은 도련님이 독립하시면서 다시 이곳으로 따라온 거고.”

그녀의 이력을 설명해 주는 말이었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이환이 둘째 아들이라는 것, 그의 모친이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여사님이 이환의 나이보다 더 오래 이환의 집안에서 일해 왔다는 것.

“혹시…… 큰 도련님이라는 분도 순수하신가요?”

이환처럼? 형제가 쌍으로 요정을 믿고 있나?

그러한 물음에 여사님이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양반은 어릴 때부터 어른보다 더 냉철했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는 콧방귀만 꼈어요. 눈앞에 증거를 들이밀지 않는 이상은 씨알도 안 먹혀. 어린아이가 동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으니, 큰 도련님이랑 둘째 도련님 때문에 사모님이 이래저래 걱정이 많았어요.”

큰아들은 동심이 말라비틀어졌고, 작은아들은 동심이 넘쳐흘러서 각각 걱정이었다는 말인가. 이래저래 그들의 모친이 고생이었으리라 짐작되었다.

“아무튼 요정 이야기는 도련님이 앞으로도 가끔 할 텐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절대로, 요정이 없다는 말만 안 하면 돼. 정히 대꾸할 말이 없으면 그냥 웃어 버리고.”

못 들은 척하라는 말을 어렵게도 한다.

하지만 이환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요정이 없다고 말해 줘야 하지 않을까. 괜히 다른 사람 앞에서 요정 어쩌고 하는 말을 해 버리면 그게 더 큰 일이 아닐까. 번듯하게 회사를 다니는 서른네 살 남자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요정님 발언으로도 멀쩡할 수 있을까.

여러모로 걱정이 되었으나, 고작 고용 첫날인 나보다 삼십 년 넘게 곁에서 지켜봐 온 여사님이 더 깊이 고민했겠거니 싶어 말을 아꼈다.

“슬슬 올라가서 씻어요. 도련님 잠 깨우고 준비시키려면 해민 씨도 시간이 부족할 거야.”

힐끔 시간을 확인한 여사님이 이제는 서둘러야 한다며 주의를 주었다.

“우리 도련님이 잠이 많은 건 아닌데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고 삼십 년을 잔소리했는데도 아직까지 못 고쳤네요. 식사 준비해 둘 테니까, 출근 준비해서 같이 내려와요.”

“네.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아침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대로 충격에 빠져 있기에는 할 일이 많았다. 업무 첫날부터 고용주를 지각하게 만들 수는 없기에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여리고 순수한 서른네 살의 남자를 깨워야겠지.

내키지 않는 걸음을 꾸역꾸역 내디뎌 이 층으로 올라갔다.

∞ ∞ ∞

이환의 침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예상대로 돌아오는 답이 없어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침실 안은 캄캄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하여 창문 근처로 이동해 암막 커튼을 반쯤 걷어 냈다. 어두웠던 침실에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밝나.

암막 커튼을 양쪽으로 쭉 잡아당겨 묶고, 그 너머 얇은 커튼을 쳤다. 여전히 밝긴 하지만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하던 햇살이 차단되었다.

코끝에 희미하게 풀 냄새가 감돌았다. 공사장에서 남자를 끌어안고 뒹굴었을 때 문득 맡았던 향기다. 향수 냄새라고 생각했는데 침실 방향제 같은 거였나 보다.

조심조심 걸어 침대 근처로 다가갔다. 곤히 잠든 남자가 보였다.

처음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참 잘생겼다. 모래 먼지가 묻었던 그때도, 눈을 감고 잠든 지금도 여전히 잘난 얼굴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누군가 비율을 맞춰 배치한 것처럼 완벽한 위치를 찾아 자리 잡았고, 몸 또한 뭘 먹고 무슨 운동을 하는지 근육으로 알차게 짜여 있었다.

잠든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품평을 하면 안 되는데, 속옷만 입고 자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오네.

멋쩍은 마음에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사람을 부리며 혼자 살 정도의 재력과 최상급의 외모, 비율 좋은 몸뚱이.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것이 없는데 심지어 성격마저도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했다. 갑질을 부리기는커녕 상냥하고 친절하다.

지금 나이에 불필요한 순수함만 걷어 내면 완벽했을 텐데.

완벽하게 그려진 명화에 구정물이 튄 것처럼 찝찝하고 아쉬웠다.

“실장님.”

적당히 품평을 끝내고, 슬슬 깨울 요량으로 조용히 소리 내어 불러 봤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한 번에 일어나는 사람이었다면 여사님이 그렇게 당부를 하지도 않았겠지.

“실장님!”

조금 큰 목소리로 부르자 꽉 닫혀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팔랑팔랑 흔들리다 잠잠해졌다.

“실장님. 일어나실 시간인데요.”

좀 더 제대로 깨우자 살짝 들어 올려진 눈꺼풀 밑으로 흐릿한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했다.

“……해민 씨?”

이환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아이처럼 웅얼거렸다.

“네. 일어나서 씻으셔야죠.”

“해민 씨네.”

남의 이름만 웅얼거리지 말고 일어나라고.

이게 일어난 상태인지 아닌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 얼굴을 알아볼 정도면 일어났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해민 씨다.”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며 아직도 반쯤 잠든 상태임을 깨달았다.

서른넷 먹은 남자가 잠투정도 참 귀엽게 하네.

뜬금없는 생각에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실장님. 일어나신 거 맞아요?”

“와, ……해민 씨 얼굴, 해민 씨 목소리.”

“꿈이라도 꾸고 계세요?”

“이거 꿈이에요?”

“현실입니다. 정신 차리세요.”

일어날 생각은 안 하고, 꿈 같은 소리만 하고 있다.

보통 잠을 깨울 때는 등짝을 때려서 깨우는 게 직빵인데. 아무리 깨워서 출근을 시켜야 한다지만, 고용주의 등짝을 때려도 괜찮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실장님!”

등짝 대신 이환의 눈앞에서 손뼉을 짝, 하고 치자 잠에 취해 가물거리던 눈동자가 선명해졌다.

“해민 씨?”

“제 이름만 벌써 다섯 번을 부르셨어요. 이제 그만 하시고 일어나세요.”

“해민 씨가 왜 여기…….”

“실장님을 깨워 달라고 부탁받았거든요.”

잠자는 숲속의 왕자님처럼 누워 있던 이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속옷만 걸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 또 벗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해, 해민 씨.”

응, 여섯 번째.

얇은 이불로 몸을 감싸 가리며 얼굴을 붉히는 이환의 반응을 모른 척했다.

같은 남자끼리 내외하는 것도 새삼스럽고, 가릴 정도로 부끄러운 몸매도 아닌데 무슨 유난을 떠나 싶을 뿐이다. 어차피 씻는 것도 도와줘야 하는데, 그땐 입고 있는 것마저 벗어야 하지 않나.

“이거 마시세요.”

침실에 들어오며 가져온 미지근한 물을 건네자, 어리벙벙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컵을 받는다. 살짝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리는 이환의 손가락을 보며, 저게 저혈압의 증상인지 저혈당의 증상인지 잠시 고민했다.

“씻으셔야죠. 샤워하는 거 도와 드릴게요.”

요 며칠간 어떻게 씻었는지 모르겠으나, 세수나 양치는 괜찮더라도 샤워할 때는 도움이 필요할 듯싶었다.

“샤, 샤워.”

저혈압인지 저혈당인지 모를 증세에 더해 안면 홍조라.

몸만 보면 참 건강해 보이는데, 의외로 이런저런 지병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씻으실 거예요?”

이환의 손에서 덜덜 떨리는 물컵을 가져오며 묻자, 그는 손으로 입매를 감추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실장님?”

“잠깐만, 숨을 못 쉬겠습니다.”

“어디 아프세요?”

바닥을 내려다보며 심호흡을 하는 이환의 행동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진짜 심각한 지병이 있나. 여사님에게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먹고 있는 약이라도 있다거나…….

“일어나자마자 해민 씨 얼굴을 보는 게 타격이 크네요.”

“…….”

무슨 의미인지 잠시 고민했다.

눈 뜨자마자 못난 얼굴을 봐서 안구에 손상을 입었다는 뜻인가. 농담하자는 건가? 설마 진담인가.

심각한 표정과 말투로 봐서는 농담이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선선히 받아들이자니 왜인지 마음에 상처가 새겨지는 기분이다.

“제 얼굴 봐서 놀라셨구나.”

“네.”

긍정해 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착하게도 고개까지 끄덕이며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너무 좋아서…….”

“…….”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웅얼거렸지만 그럼에도 똑똑히 들려온 말에 덩달아 입을 다물게 되었다.

“해민 씨가 깨워 주니 참 좋네요.”

“……제가 일 그만두기 전까지는 계속 깨워 드릴 것 같아요.”

“그렇군요.”

무언가 기쁜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이환이 머리를 주억였다.

“이제 잠이 깨셨으면 씻으셔야죠.”

어색한 분위기에서 탈피하고자 말을 꺼냈는데 더 어색해져 버렸다. 굳어 버린 이환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왜 이런 반응이냐고. 겁먹은 토끼 모양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왜 흠칫 놀라서 몸이 굳는데? 누가 보면 내가 구박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정작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은 나인데.

성격이 소심하다기엔 어제저녁에 밥도 같이 먹고 멀쩡하게 대화도 잘했잖아. 타인과의 교류에 면역이 없다고 하기엔 회사도 잘 다닌다며. 그런데 무슨 말만 하면 왜 이렇게 굳어서 삐걱거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