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실장님. 이러다 출근 늦으실 것 같아요.”
“아, 그렇죠. 출근 준비.”
로봇처럼 뻣뻣하게 침대에서 일어선 이환이 욕실로 삐걱삐걱 걸어갔다. 작게 한숨을 삼키며 이환을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멍하니 세면대 앞에 선 이환은 거울로 제 얼굴을 바라보다 뒤따라온 내 얼굴을 보곤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이환의 행동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며 고민하고 반응하기엔 준비 시간이 부족할 듯하여 이후로는 일단 모른 척하기로 했다.
묵묵히 서 있자 슬쩍슬쩍 훔쳐보던 시선이 쭈욱 이어졌다.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거울을 통해 마주하자, 까만 눈동자가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돌아간다.
“벗으세요.”
“네?”
이대로 있다가는 진짜 출근도 못 하게 생겼다. 업무 첫날부터 고용주를 지각시킬 수는 없기에 샤워기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하자 이환이 기겁을 했다.
“샤워 도와 드릴게요.”
아침부터 때를 밀지는 않을 테니까 비누칠만 도우면 되겠지.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쭉쭉 짜서 거품을 냈다. 이쪽은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어필하며 시선을 마주하자 브리프의 허리밴드 부분을 손가락으로 잡고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비교하여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단단해 보이는 가슴, 근육의 선이 살아 있는 복근, 훌쩍 높은 허리선, 쭉 뻗은 다리, 말 근육처럼 튼실한 허벅지.
부끄러울 만한 포인트는 저곳뿐인가.
유일하게 속옷으로 가려져 내보이기를 주저하고 있는 저곳.
이환이 부끄러워할 이유는 저것뿐이리라 생각하고 예의상 슬쩍 눈을 감고 고개 돌리는 시늉을 했다.
문득 풀 냄새가 짙어졌음을 느꼈다. 시원하면서도 싱그러운 그 냄새는 허브향과 비슷하면서도 달랐고, 마치 녹음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향기였다.
아……, 침실이 아니라 화장실 방향제였나.
부잣집은 화장실 방향제도 향수 냄새로 착각할 만큼 고급스러운 걸 쓰는 모양이다.
눈을 감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잠시 주춤거리던 이환이 속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깁스한 손은 위로 들어 주세요. 물 들어가면 안 되니까.”
내 말에 이환이 삐걱거리며 왼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팔꿈치만 구부려서 들어도 되는데…….”
저렇게 손을 들고 있으면 팔이 아프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내 말에 이환은 ‘저요!’ 하고 발표를 시켜 달라고 손을 든 아이처럼 뻗은 손을 슬그머니 구부렸다.
……일하는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는 마음이 넓은 고용주구나.
애써 좋게 생각하며 넓은 등판을 샤워볼로 슬슬 문질렀다. 목부터 허리까지, 위에서 아래로, 옆구리도 쓱쓱. 가끔 손끝이 닿을 때마다 등 근육이 파도치듯 움찔거렸다.
멀쩡한 오른손을 붙잡자 화들짝 놀라서 손을 거둔다. 왜 그러시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이환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듯 돌렸다.
“손을 주셔야 닦아 드리는데요, 실장님.”
“아, 네.”
새치름하게 살짝 내민 손끝을 붙잡고 어깨부터 손목까지 샤워볼로 쓱쓱 문질렀다. 이환은 붙잡혀 있는 손가락을 풍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덜덜 떨어 댔다.
피부 접촉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다.
고용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머릿속 한구석에 단단히 새겨 놓고, 거품이 잔뜩 묻은 손을 놓아주었다.
“이제 앞부분 닦아 드릴…….”
이환의 앞으로 몸을 움직이다 덜렁거리는 살덩어리를 보고 잠시 침묵했다.
유일하게 그의 부족한 부분이자 그가 부끄러워하는 부위라고 생각했던 거시기는 내 예상과 달리 크고 우람하고 건실했다. 목욕탕에서 보았던 그 누구의 고추보다 뛰어난 모양과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했을까. 겉모양은 뛰어난데 영 실속이 없나?
콜라병만 한 거시기에 주먹만 한 불알을 달고 있으면 절대 부끄러울 일이 없을 듯싶은데. 안 가져 봐서 가진 사람의 마음을 모르겠다.
“손은 계속 올리고 계세요. 불편하시면 벽에 기대셔도 될 것 같아요. 얼른 닦아 드릴게요.”
오른손으로 가랑이 사이를 은근슬쩍 가리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들고 있던 왼손을 슬금슬금 내리려고 하는 이환의 자세를 지적했다.
존재감을 내뿜는 거시기에서 애써 신경을 돌리며 이환과 마주 서서 앞가슴을 북북 문질렀다.
이환의 근육은 최상급에 리듬감마저 훌륭했다. 손이 닿을 때마다 물결치듯 꿈틀거렸다. 가슴 근육이 씰룩거리는 모습을 보며, 티브이에서 연예인 장기 자랑으로 나왔던 양쪽 가슴 번갈아 씰룩거리기가 떠올랐다.
그 탄탄한 가슴 근육 밑으로는 예쁘게 골이 파인 배 근육이 존재했다. 이환의 신체 어느 부위도 근육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는 듯했다.
이제 상체를 다 닦고 나면 밑으로 내려가야 할 텐데…….
엉덩이도 엉덩이지만 거시기도 씻겨 줘야겠지? 간병한다고 생각하자. 간병인이 환자 목욕시켜 줄 때 이상한 생각 안 하잖아. 여기만 빼놓고 씻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직업 정신으로 이겨 내자.
무릎을 접어 앉아 하체를 씻겨 주려 하자, 이환이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뒤로 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불가피한 시선 집중이 부끄러웠는지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려 보지만, 한 손으로 가려질 리 없는 사이즈의 성기가 손 밖으로 빼꼼 대가리를 내밀고 내게 인사하듯 덜렁거렸다.
“다, 다리는 내가 해도 됩니다.”
다리가 아니라 거시기를 말하는 거겠지.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는 중환자도 아닌데 남의 손으로 거시기를 만져지는 건 본능적으로 꺼려질 수 있었다.
다른 자세였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하필이면 거시기와 딱 눈이 마주친 자세였다. 이환이 말을 할 때마다 긍정하듯 거시기가 끄덕거렸다. 거시기에 더빙을 입힌 느낌이다. 대화 상대가 이환이 아닌 이환의 거시기가 된 듯한 착각마저 느꼈다.
아니, 거시기는 이제 그만.
시선을 두고 있자니 거시기 생각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었다. 계속 남의 거시기를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어서 이환의 손에 샤워볼을 건넸다.
“헹구는 건 혼자 할 수 있으니 나가 있어요.”
“그럼 나가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축축하게 젖은 바짓단을 접어 올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잘 마른 수건을 들고 욕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 한참이 지난 뒤에 이환이 문을 열고 나왔다.
혼자 닦고 나왔는지 앞부분은 물기가 없었지만 오른쪽 팔과 손이 닿지 않는 등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조용히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자 이환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옷 갈아입으셔야죠.”
어떤 옷을 입을지 몰라 준비해 두지는 못하고 넌지시 돌려 말하자, 그가 침실의 한쪽 벽으로 향했다. 벽이라고 생각했던 문을 옆으로 밀자 드레스 룸이 나타났다. 빠르게 드레스 룸의 내부를 살폈다.
셔츠는 이쪽, 정장은 저쪽. 액세서리는 가운데 진열장에. 속옷은 저쪽 서랍장인가.
슬그머니 장으로 향하여 서랍을 열자 돌돌 말려 정리된 넥타이가 보였다.
“실장님. 속옷은 어디에 있어요?”
“위는 타이, 가운데는 양말, 속옷은 아래입니다.”
아하, 아래 칸.
속옷이 있는 서랍을 열어 보이자 그가 남색 브리프를 꺼냈다. 그것을 받아 속옷을 활짝 펼쳤다. 잠시 주저하던 이환이 발을 밀어 넣었고, 가능한 한 사타구니를 쳐다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속옷을 위로 올렸다.
브리프를 잡고 있는 손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 허벅지에 닿았다. 근육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피부가 손끝에 닿아 오는 느낌이 묘했다.
중심을 잡으려 살짝 어깨를 붙잡고 있던 이환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에서 축축함이 전해졌다.
“잠시…….”
내게서 등을 돌린 이환이 끙, 하고 소리를 내며 브리프를 정리했다.
“손 하나 다친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은 몰랐네요.”
“이제까지 어떻게 입으셨어요?”
“한 손으로 열심히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지각을 좀 했지요.”
혹시 여사님이 도와주셨나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이환이 이마에 맺힌 땀을 훑으며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 같아 보이는 와이셔츠 중에서 선택된 셔츠를 꺼내 이환의 두 팔에 끼워 주었다. 앞으로 돌아와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주노라니 수그린 정수리에 간질간질한 숨결이 와 닿았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이환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음을 알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느껴져 단추를 잠그는 손끝이 떨렸다.
문득 코끝에 풀 냄새가 스쳤다. 이 향기는 향수 같기도 하고, 방향제 같기도 하고.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나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묘하게 평온한 기분이 들면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기도 했다.
아, 이거 실내 디퓨저 같은 건가? 아로마 오일이라든가.
타인의 피부와 접촉하다 보니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애써 딴생각을 끄집어냈다.
“타이는 이것으로.”
이환이 지목한 넥타이를 꺼내 그를 마주 보고 섰다. 길게 늘어진 타이를 그의 목에 두르고 요령껏 이리저리 돌려 보다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저…… 실장님.”
“네, 해민 씨.”
“제가 넥타이 매는 법을 몰라서……. 아까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긴 했는데 이게 잘…….”
잘 안되네요.
면목이 없어서 끝맺지 못한 말에 이환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샤워에 이어 옷을 입혀 주는 내내 어색하던 분위기가 약간 느슨해졌다.
“해민 씨가 아직 정장 입을 나이는 아니니 모를 수 있지요.”
장난스럽게 뺨을 톡톡 두드린 손끝이 매끄럽게 턱을 타고 내려왔다. 부드러운 손길에 목뒤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