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시무룩하지 말고. 타이 다시 풀어서 내가 말하는 대로 해요.”
“네.”
“끝이 가는 쪽을 짧게, 굵은 쪽을 길게 빼세요.”
“네.”
“짧은 쪽은 기둥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움직이지 말고, 긴 쪽을 짧은 쪽의 위로 교차시켜서 한 바퀴 돌리고. 다시 앞에서 뒤로.”
짧은 쪽이 기둥, 긴 쪽만 움직여서…….
이환의 말에 따라 타이를 돌리자 머리 위에서 “잘하고 있어요.” 하고 부드러운 칭찬이 떨어졌다.
“그 상태에서 앞으로 꺼낸 다음에 그 사이로 넣어서 빼면 매듭이 됩니다.”
“이렇……게요?”
“네, 잘했습니다. 거기서 매듭을 예쁘게 정리하면 끝. 쉽죠?”
뭔가 순식간에 된 것 같은데. 마법 같은 상황에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장은 저게 좋겠네요.”
짙은 감색의 정장을 꺼내 바지를 입혀 주었다. 셔츠를 단정히 넣어서 바지의 버클을 채웠다. 지퍼를 올려 주다 불룩한 사타구니에 손끝이 살짝 닿았는데, 예민한 부위임을 증명하듯 꿈틀거리는 기색이 느껴져 괜히 눈치가 보였다.
진열장을 열어 꺼내 준 벨트를 허리에 둘러 주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도 채워 주었다. 이리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내내, 또 말이 없어진 이환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긴장감은 일을 잘하지 못해서 꾸중을 들을까 하는 염려는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근본적이고 본능적인, 타인의 시선으로 인한 말초적인 긴장에 가까웠다.
의자를 가져와 이환을 앉히고 양말을 신겨 주는 손끝이 살짝 떨려 왔다.
“……해민 씨를 고생스럽게 만드네요. 미안합니다.”
목이 잠긴 듯, 약간 낮고 거친 목소리가 위에서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이런 일 하려고 온 사람인데요. 지식도 없고 기술도 없는데, 월급 주며 일 시켜 주시는 데에 오히려 감사하죠.”
이환의 한쪽 발을 잡아 양말을 신기고, 반대쪽 발에 양말을 마저 신겼다.
“손이 빨리 나아야 해민 씨에게 이런 번거로운 일을 시키지 않을 텐데.”
“그럼 제가 필요 없어지겠죠. ……그렇다고 실장님이 빨리 낫는 게 싫다는 건 아니고요.”
혹여 빨리 낫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들렸을까 봐 얼른 말을 덧붙이며 눈치를 살폈는데, 이환의 표정은 뭔가 미묘했다.
역시나 불쾌했을까.
아무리 고용주가 상냥하다 할지라도 말조심을 했어야 했다며 잠시 반성을 했다.
“마저 입으셔야죠.”
정장 윗도리를 마지막으로 이환의 출근 준비가 끝났다. 서랍에서 손수건 하나를 챙겨 주머니에 넣은 이환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제 됐으니 가서 해민 씨도 준비하고 내려와요. 나 때문에 정작 해민 씨 준비 시간이 빠듯해져서 미안합니다.”
“아녜요. 저야 옷만 갈아입으면 되는데요.”
“그래요. 나는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준비되면 식사하러 내려오도록 해요.”
드레스 룸을 나온 이환이 얼른 가서 준비를 하라며 나를 내보냈다. 침실을 나서는 내 등 뒤로 누구의 것인지 확실한 시선이 한참을 머물렀다.
∞ ∞ ∞
회사에 따라가긴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회사에 출근하는 건 아니잖아. 회사 직원도 아니고 이환에게 개인적으로 고용된 입장이니 정장을 입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입어야 한다고 해도 없는 정장을 어디서 구해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가지고 온 옷 중에서 최대한 깨끗한 티셔츠와 바지를 골라 입었다. 옷장 문에 붙은 거울로 살펴보았지만 회사에 일하러 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괜찮다. 단정하게 입었으면 되었지. 이게 내 최선이니까.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방을 나와 일 층으로 내려왔다. 먼저 내려가 있겠다던 이환과 여사님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너무 웃지는 말고요. 그렇게 좋은 표를 내면 부담스러우니까.”
“압니다, 여사님.”
“알기는. 도련님 얼굴에 꽃이 폈는데.”
“그게 보입니까?”
“당연히 보이지. 내가 도련님 태어날 때부터 옆에서 봐 온 사람인데, 그것도 모를까.”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작게 웃음소리도 들렸다. 대화를 방해할 생각이 없어서 뻘쭘하게 식당 근처에 서 있자, 힐끔 이쪽을 본 여사님이 나를 발견하고 손짓을 했다.
“내려왔으면 들어오지. 왜 거기 서 있어요.”
“대화하시는 듯해서요.”
“해민 씨 기다렸어. 식사 가져올 테니까 얼른 앉아요.”
기본 반찬이 세팅된 상태에서 죽을 내오겠다며 여사님이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예쁘게 입었네요.”
그나마 제일 깨끗한 것으로 골라 입었다지만, 그냥 흰색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다. 예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 상냥한 고용주는 애써 칭찬을 했다.
“이렇게 입어도 괜찮을까요. 회사 출근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요.”
“괜찮아요. 해민 씨는 회사 직원이 아니니까.”
“다행이네요.”
“요정처럼 예쁩니다.”
무시!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다급히 식탁으로 시선을 내렸고, 때마침 여사님이 쟁반을 들고 왔다.
“제가 정장이 없어서 어쩌나 조금 걱정했어요.”
좋아, 자연스러웠어.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수준에서 말을 돌렸는데 이환이 잠시 흐음, 하고 소리를 냈다. 이 차림도 괜찮다고 방금 말해 놓고 뭔가 걸리는 듯한 반응에 잠시 긴장을 했다.
“역시 정장을 입어야 할까요.”
“아뇨, 그건 아니고. 아닙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런데 왜 그런 찜찜한 소리를 내셨죠?
“내가 보기에도 괜찮은데? 직장인이 아니니까 복장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식사해요.”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죽을 한 그릇씩 앞에 내려놓으며 여사님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어서 들어요, 해민 씨.”
여사님은 대체 식사를 언제 하시는지. 오늘도 자리를 비켜 주는 여사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환의 채근에 숟가락을 들었다.
참기름을 뿌렸는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숟가락으로 표면을 긁듯이 살살 떠서 한입 물자, 따스한 기운이 입안을 채웠다.
“맛있어요.”
“입맛에 맞을지 여사님이 걱정을 하셨는데 다행이군요.”
“어제도 느꼈는데 여사님 음식 솜씨가 좋으신 것 같아요. 그런데 여사님은 왜 같이 식사를 안 하세요?”
일하는 사람과 겸상을 하지 않는 주의라고 하기엔 이환의 바로 앞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는 내가 있지 않나.
“여사님은 따로 드십니다. 본가에서 독립해 나오면서 같이 드십사 말은 해 봤는데, 여사님께서 극구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셨구나.”
역시 이환이 아니라 여사님의 의견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나도 이환보다 여사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힐끔 이환의 눈치를 보며 죽 그릇을 싹싹 비웠다. 숟가락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귀신같이 알고 나타난 여사님이 죽은 배가 금방 꺼진다며 새로 한 그릇을 더 퍼 주셨다. 결국 이환이 죽 한 그릇을 먹을 동안 두 그릇을 해치웠다.
“해민 씨, 그러고 회사 가는 거예요?”
양치를 하고 내려와 이환을 기다리며 서 있자 다가온 여사님이 내 차림을 보고 물었다. 아까는 괜찮다고 하더니, 왜 살짝 못마땅한 목소리로 묻는 걸까. 이환의 출근길에 따라 보내기엔 미흡하다고 생각되셨나.
“역시 좀 이상한가요?”
“아니.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건물 안에는 에어컨을 틀어 놓으니 추울 수도 있거든요. 걸칠 거라도 하나 가져가야 하지 않나 싶어서.”
아, 걱정되는 건 그쪽이었구나.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얇은 재킷이나 카디건 같은 거 없어요?”
“괜찮아요. 시원하면 좋죠.”
“그러다 냉방병 걸릴라.”
“……그럼 남방이라도 하나 챙겨 갈까요?”
걱정하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재킷이나 카디건 같은 옷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바람막이 점퍼가 하나 있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에서 걸칠 옷은 아니었다. 그나마 긴팔 남방이 하나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말하자 여사님이 잠깐 기다리라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환도 그렇고 여사님도 그렇고,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 보다. 걱정되는 건 나뿐인가.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여사님과 이환이 함께 내려왔다. 여사님이 들고 온 회색 카디건을 내게 내밀었다.
“도련님 사이즈라 좀 클 거예요. 그래도 냉방병 걸리는 것보단 나으니까, 추우면 꼭 걸치고 있어요.”
“실장님 옷이잖아요. 괜찮습니다.”
“이것 말고도 카디건 몇 개 더 있으니까 챙겨 가요. 어차피 잘 입지도 않으셔.”
“그래요, 해민 씨.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일단 챙겨 가요. 사이즈가 안 맞아서 그러면 맞는 사이즈로 하나 사 오라고 하겠습니다.”
“아녜요. 괜찮습니다. 이거 입을게요. 감사합니다.”
누구한테 뭘 사 오라고 시킬 생각인지 모르겠으나, 그냥 안 입는다는 눈앞의 카디건을 챙기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이런 일로 실랑이를 하다 출근 시간에 늦으면 안 되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카디건을 받아 챙겼다. 달랑 휴대폰 하나 들고 있던 손에 도톰한 옷가지가 추가되었다.
“도련님. 해민 씨도 있으니 점심 꼭 챙겨 먹어요. 맛있는 걸로.”
“네, 알겠습니다.”
출근 인사가 뭔가 이상한데. 그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여사님에게 떠밀려 집에서 나왔다.
“다녀오겠습니다.”
상체만 뒤로 돌려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자 여사님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누군가에게 배웅을 받는 건 무척 오랜만이라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학교 잘 갔다 와. 차 조심하고.」
책가방을 메고 뛰어가는 어린 아들을 보며 소리치던 엄마의 목소리.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그때처럼 활달한 목소리도, 환한 얼굴도, 그 안에 담긴 염려도…… 모두 오래전의 것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