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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37)화 (37/172)

37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마음을 다잡고 벨을 눌렀다. 이쪽 얼굴을 확인했는지 바로 문이 열렸다.

“해민 씨.”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집 밖에 나와 있던 여사님이 나를 불렀다.

“조용해서 자나 했더니 언제 나갔어요?”

다행히 정액 범벅이 된 침대는 아직 못 보신 모양이다. 그나마 조금 안도하며, 들어가자마자 그것부터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 링거라도 한 대 맞고 오지 그랬어요.”

“그게 아니라…….”

“아이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일단 들어가요. 너무 힘들어 보인다. 밥 아직 안 먹었지? 가뜩이나 마른 사람이 며칠 사이에 살이 쑥 내렸네.”

여사님은 연신 염려를 쏟아 내며 집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주방에 데려가 나를 앉혀 놓은 여사님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죽을 끓여 줄까?”

차마 나가서 먹고 왔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맛이 없다고 대충 둘러댔다.

“그래도 뭘 먹어야 할 텐데.”

“제가…… 병원에 다녀왔는데요.”

“으응.”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셨는지 여사님이 냉장고 문을 닫고 내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제가 오메가라고…….”

“검사받고 온 거예요?”

“……네.”

“그랬구나. 몸 아픈 곳은 없고? 난 어디 아파서 병원에 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 밥이라도 먹고 나가지 그랬어요.”

다행이라며 선하게 웃는 여사님의 얼굴을 마주하니 왜인지 죄책감이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응? 뭐가?”

“베타라고 했는데, 오메가라서……. 일부러 속인 게 아니고 진짜 오메가인 줄 몰랐어요. 의무 검사를 안 받기는 했는데, 발현 증상이 없어서 베타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제가 페로몬 수치가 낮아서 그런 거였다고.”

“응, 응. 해민 씨가 많이 놀랐겠네.”

뻗어 나온 손이 내 손등을 감싸 토닥거렸다.

“베타라고 쭉 생각했는데, 갑자기 오메가라니 많이 놀랐겠어요. 나라도 놀랐을 거야.”

“실장님 러트 온 거, 저 때문에…… 제가 히트 사이클이어서 그랬나 봐요. 죄송합니다.”

내 사과에 여사님은 가만히 침묵했다. 그 무거운 공백이 마치 나를 책망하는 듯했다.

“짐은 바로 싸서 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선금으로 주신 월급을 제가 써 버렸어요. 일을 해서 최우선으로 갚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응? 나간다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여사님이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왜?”

‘왜’라는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다.

고용주만큼이나 온화하고 다정한 성품을 지닌 여사님이 쌍욕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불쾌감은 표할 줄 알았다. 미안하지만 계속 일을 하는 건 어렵겠다고 여사님이 먼저 말을 꺼내는 상황도 생각했었는데……, ‘왜’라고 물으실 줄이야.

“여기서 계속 일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되어서요.”

여사님 볼 면목도 없고, 무엇보다 침대에서 같이 뒹굴었던 고용주의 얼굴을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혹시 말이에요. 혹시…… 도련님이…… 억지로 그랬어요?”

“네?”

“갑자기 나간다니까, 도련님이 해민 씨를 억지로 그러셨나 해서.”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그건 아니고…… 그냥 제가 여기서 계속 일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오히려 억울한 사람은 이환일 텐데, 더 억울하게 죄인이 될 뻔했다. 그건 절대 아니라며 손을 내젓자, 여사님이 한결 안도한 얼굴이 되었다.

“다행이야. 알파나 오메가는 그 시기에 제정신이 아니라잖아. 이성보다 본능이 더 강해지는데, 알파는 힘도 세니까. 혹시나 싶어서 걱정했어요. 나야 우리 도련님을 어릴 때부터 봐 와서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거야 내 생각이고. 당사자도 아닌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부모가 자기 자식을 제일 모르는 법이라고, 원래 가까운 사람이 더 잘 모를 수도 있고. 또 ‘우리 개는 안 물어요.’ 그런 말도 있잖아.”

지금 이환을 개에 비유한 건가?

뜻밖의 비유에 당황하여 눈을 끔뻑거렸다.

여사님이 이환을 끔찍이 아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별개로 객관화가 참 잘되신 분 같았다.

“이건 해민 씨와 도련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아요. 대신 정말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도련님에게 사과해 줬으면 좋겠어. 이게 사과할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둘이 이야기를 나눠 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요.”

그게 껄끄러워서 일찌감치 뜨려고 했던 겁니다만.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이환을 마주해야 할 듯싶다.

“도련님 오시기 전까지 해민 씨는 좀 쉬고 있어요. 죽 좀 끓여 줄 테니까, 올라가서 누워 있다가 그거 먹고 한숨 자 둬요. 얼마나 쪽쪽 빨렸는지, 곧 죽을 것처럼 비실거리네. 그러고 병원에는 어떻게 다녀온 거야.”

“놀라지 않으셨어요? 제가…… 실장님이랑 그…….”

남들 모르게 붙어먹은 것도 아니고, 삼 일 내내 침실에 처박혀서 대놓고 그 짓을 해 댔는데. 그사이에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준 여사님이 모르실 리가 없다. 애초에 그걸 알고 교도소에 사식 넣어 주듯 끼니를 올려 보내신 거겠지.

“도련님이랑 해민 씨가 그러고 있어서 놀랐지. 그런데 그게 도련님이라서 놀란 거고 해민 씨라서 놀란 거지, 그 행위에 놀란 건 아니에요. 애초에 도련님 집안에 알파가 몇인데, 내가 그 꼴을 한 번도 못 봤겠어? 회장님이랑 돌아가신 사모님부터 알파 오메가였는데. 거기에 큰 도련님도 알파, 작은 도련님도 알파인걸. 러트 올 때마다 난리도 아니었어요. 큰 도련님은 아주 그냥 거리낌이 없는 양반이라 홀딱 벗고 오메가들이랑 굴러다니지, 작은 도련님은 열녀문 받을 것도 아닌데 꾹꾹 참으면서 아프다고 굴러다니지. 두 형제가 하는 짓은 다른데, 늙은이 정신 빼놓는 건 똑같았다니까.”

면역이 있으셨구나.

생각보다 침착하셔서 의아했는데 이미 많이 겪으신 모양이었다.

“그러고 있지 말고 얼른 올라가 누워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어.”

그 일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서, 그리고 무작정 책망하는 기색이 없어서 조금 안도했다. 이후에 이환과 마주할 일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사님이 크게 놀라거나 화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 실장님 침대 청소는 제가 할게요.”

“힘도 없는 사람이 무슨 청소를 해. 그냥 둬요, 내가 할 테니까. 올라가서 푹 쉬기나 해요.”

“제가! 제가 꼭 해야 해서…….”

침대 수습을 여사님 손으로 한다면 누가 뭐라 하든 이 집에 남아 있을 수가 없을 듯했다. 아무리 면역이 있으시다지만, 그렇다고 정액으로 범벅이 된 침대 시트를 당당히 보여 드릴 뻔뻔함은 없었다.

“그, 그래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시트만 갈아 놓고 가서 누워요.”

여사님이 새 시트를 가져와 내게 내밀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으나, 오히려 나는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8.

간질간질한 기분에 눈을 뜨자, 머리맡에 앉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실장님?”

“푹 쉬었습니까. 더 자게 두고 싶었는데 곧 저녁 먹을 시간이라서요.”

이마 위로 내려온 손이 눈썹을 따라 그리듯 문지르다 손등으로 뺨을 살살 쓸었다. 묘하게 부드럽고 간지러운 그 행동에 잠시 멍하게 있다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퇴근하셨어요?”

“네. 오자마자 해민 씨 괜찮은지 보러 왔습니다.”

커다란 손이 살며시 목을 감쌌고, 이내 “열은 없네요.” 하고 안심하는 목소리가 따라 나왔다.

“병원에 다녀왔다고요?”

“네.”

주섬주섬 몸을 일으켜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같이 가자고 했는데, 왜 혼자 다녀왔습니까.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가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밖에 나갔어요.”

몸이 성치 않다니, 누가 들으면 중환자인 줄 알겠네. 실상은 고된 성행위에 따른 체력 고갈일 뿐이었다.

“좀 괜찮아져서 다녀왔어요. 쓰러지는 일도 없이 멀쩡히 갔다 왔습니다.”

“그래요. 그나마 다행이네. 나도 다녀왔습니다, 병원. 깁스를 멋대로 빼 버렸다고 혼났어요.”

과하게 혼낼 생각은 아니었는지, 분위기를 환기하듯 깨끗하게 새로 깁스한 손을 들어 보이며 이환이 해맑게 웃었다.

고용주의 기분을 맞춰 주고자 같이 웃어 주어야 했으나, 그런 편한 상황이 아니어서 슬쩍 고개를 수그렸다.

“제가…… 오메가래요. 역시 제 잘못이 맞았어요. 죄송합니다.”

“그게 왜 해민 씨 잘못입니까? 죄송할 것 없어요.”

“페로몬 수치가 엄청 낮아서 평소에는 모르고 지나가는데, 아무리 열성이라도 우성 알파를 만나면 일반 오메가처럼 히트 사이클이 오는 걸 느끼게 된다고. 아무래도 실장님 러트 사이클이 온 건 저 때문인 것 같아요.”

“열성이라니……, 의사가 해민 씨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까?”

“네. 앞으로 억제제를 항시 가지고 다니라는 말도 들었으니까, 제가 최대한 조심하…….”

최대한 조심해서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힐끗 본 이환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진 탓이었다.

“……실장님?”

“누구한테 감히 열성이라고. 사람을 우성이니 열성이니 하는 말로 나누고 그걸 환자에게 나불거리다니, 그 의사는 제정신이랍니까? 어느 병원에 다녀왔습니까. 그런 이상한 사상을 주장하는 새끼가 살아 숨 쉬고 있다니 너무 불쾌하네요.”

“……네?”

“없애 버려야겠습니다.”

“네?”

지금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기분인데. 뭘 없앤다고요?

“아, 오해하지 말아요. 의사 자격이 없는 놈이니 의사 면허를 없애 버려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네에?”

그게 없앤다고 없어지는 건지도 모르겠고, 보통 사람들은 전자로든 후자로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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