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54)화 (54/172)

54화

백윤경이 전화로 예약을 해 두어, 호텔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레스토랑으로 직행하여 테이블로 안내되었다. 메뉴를 시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곧장 음식이 나왔다.

코스 요리는 어느 레스토랑이든 양이 적고 맛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양이 적으니 왜인지 천천히 먹어야 할 듯한 기분이 들고, 한입에 충분히 들어갈 크기의 고기도 작게 잘라 오래 씹게 된다. 천천히 오래 씹어 소식하게 만드는 건강한 식습관을 강제당하는 기분이다.

마지막 디저트로 나온 찹쌀떡인지 아이스크림인지 모호한 것을 씹어 삼키고 있노라니, 타이밍을 기다렸는지 직원이 케이크와 와인을 가져와 세팅했다.

“무슨 케이크예요?”

“해민 씨 운전면허 시험 합격을 축하하는 케이크입니다.”

직원은 조용히 와인을 따라 주고 사라졌다. 모쪼록 저 직원이 방금 이환의 발언을 듣지 않았길 바라지만, 바로 옆에 있었으니 들렸겠지. 엄청 크고 정확하고 확실하게 들었겠지.

남들도 다 가지고 있을 운전면허를 땄다고 케이크라니. 누가 보면 고시 합격한 줄 알겠지만, 정작 운전면허 시험 합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어이없을까.

내 마음을 모르는 이환은 차에서 내릴 때부터 들고 다닌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건 축하 선물이고요.”

“……저 주시는 거예요?”

“네.”

열어 보라는 뜻으로 살짝 턱짓을 하는 이환을 보며 쇼핑백에서 상자를 꺼냈다. 고급 벨벳 재질의 하드 케이크. 탄력 있게 열리는 상자 안에는 둥근 팔찌가 고정되어 자리하고 있었다.

“…….”

“목걸이를 제작 주문했는데 오더메이드는 시간이 좀 걸린다더군요. 면허 합격 선물로 팔찌까지 맡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받아 보기엔 힘들다고 해서요. 대신 해민 씨와 어울릴 만한 것으로 골랐습니다.”

케이스를 끌어당겨 팔찌를 꺼낸 이환이 내 손목에 그것을 끼워 주었다.

“예쁘네요. 뱅글 타입도 잘 어울려요.”

동그란 링 팔찌가 딸칵 손목에 채워졌다. 은팔찌 차는 기분이 이러할까. 그것보다 비싸고 예쁘긴 하지만, 손목에 감기는 금속의 느낌이 영 어색했다.

하나로 되어 있지만 마치 두 개의 링을 비스듬하게 겹쳐 놓은 디자인의 팔찌는 한 줄이 금으로, 다른 한 줄은 희고 투명한 보석이 주르륵 박혀 있었다.

“이거…… 큐빅…….”

설마 큐빅이겠지 싶지만, 이환이 큐빅 박힌 팔찌를 선물한다는 게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큐빅이 아닌 다른 무언가라면 그걸 내게 선물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나와 달리 이환은 빙긋 웃기만 했다. 그의 얼굴을 보며 ‘아, 이거 큐빅이 아니구나.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지는 바로 그 보석이구나.’ 하고 감을 잡았다.

“이걸 제가 받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동안 이환에게 많은 것을 받아 왔다.

편한 잠자리에 끼니마다 따뜻한 밥을 받아먹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 그가 사 주는 옷도 받았고, 여가용으로 쓰라며 노트북도 받았다. 그를 따라다니며 한 끼에 십만 원이 넘는 밥도 먹어 보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얼마인지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귀금속은 선을 넘었다.

“왜요?”

“너무 고가라서요.”

“생일 선물 받을 때 가격 상한제 둡니까?”

“생일 선물이 아니잖아요.”

“생일 선물이나 운전면허 합격 선물이나 다를 게 있습니까. 축하하는 마음으로 주는 건 같은데요.”

생일 선물을 받아 본 것이 꽤 오래전이지만, 이렇게 고가품을 생일 선물로 주고받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안다.

“축하하는 마음으로 주고받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싼 거잖아요.”

금팔찌를 낀 손목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금팔찌에 다이아몬드가 줄지어 달려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무거운 공사장 자재를 나른 뒤에도 이렇게 팔이 무겁지는 않았다.

“해민 씨.”

부담감에 어정쩡하게 팔을 올리고 있는 나를 보며 이환이 작게 웃었다.

“선물의 기준을 받는 사람에게 맞춰야 할까요, 주는 사람에게 맞춰야 할까요.”

“아무래도 받는 사람을 기준으로…….”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값싼 것을 주고, 부유한 사람에게는 비싼 것을 사 줘야겠네요. 가난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에게 선물도 주지 못하겠군요.”

“선물이, 꼭 싸고 비싸고 하는 걸로만 구분할 수는 없잖아요.”

“그럼 뭐가 중요할까요. 마음? 마음이 없는 선물은 주고받을 수도 없습니까? 진심이고 아니고를 누가 구분합니까.”

“……실장님.”

왜인지 이환이 슬슬 주둥이에 시동을 거는 듯 느껴졌다. 현란한 말장난에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 없게 되는 순간, 팔에 건 금팔찌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것을 선례로 앞으로 더 부담스러운 무언가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나라고 비싸고 좋은 것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타인에게서 이유도 없이 ‘운전면허 합격’ 같은 알량한 핑계로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팔찌를 냉큼 받아 챙길 수는 없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선물은 가볍든 절절하든 어쨌든 축하해 주려는 마음의 표시이고. 선물의 가격은 주는 사람의 기준에 맞춰지겠지만, 선물의 가치는 받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고요. 내가 백 억짜리 다이아몬드를 준다 한들 해민 씨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해민 씨에게 백 억짜리 쓰레기나 마찬가지겠죠.”

“무가치한 게 아니라 부담스럽다는 뜻이죠.”

“그 부담스럽다는 마음은 상대방이 비싼 물건을 선물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상대방의 기준에서 비싼 물건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주는 사람은 좋은 마음으로 선물하고 싶어도 받는 사람이 부담스럽지는 않을지, 어디까지 가격의 기준을 낮추어야 할지, 어느 정도의 가치를 낮추어 적정선의 선물을 해야 할지를 선물하기도 전에 고민해야겠네요. 그렇다면 순수하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선의의 마음이 너무 안쓰럽지 않습니까.”

논리에 이어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동정심까지 더해졌다. 왠지 여기서 반박하면 쓰레기가 되어 버릴 듯한 기분이다.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이환이 마음을 먹고 입을 털어 대면 반박하기가 어렵다고, 결코 논리적인 측면에서 그를 이기기란 불가능하다고.

“그냥…… 받겠습니다.”

“그래요. 잘 생각했습니다.”

나의 패배 선언에 이환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혹시나 팔찌가 마음에 안 들면 말해 줘요. 그래도 목걸이는 내가 디자인했으니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팔찌를 주셨으니 목걸이는 안 주셔도…….”

“팔찌는 합격 축하 선물이고요.”

“목걸이는 다른가요?”

“다르죠. 지난번에 주었던 목걸이를 내가 다시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여사님 말씀처럼, 나와 해민 씨에게 기념이 될 만한 것으로 골랐습니다.”

어깨를 으쓱하는 자신만만한 표정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이환이 자신만만해할 정도인 목걸이의 정체가 나를 두렵게 했다.

∞ ∞ ∞

면허증을 직접 발급받을 수도 있고, 학원에서 대리로 발급받아 줄 수도 있다고 해서 직접 가기로 했다.

이환에게 점심시간 전까지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운전면허 시험장을 찾았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더니, 발급받는 데에도 금방이었다.

이렇게 빨리빨리 처리될 만한 일은 아닌 듯한데.

손에 들어온 따끈따끈한 운전면허증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대리 운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이상 내 손으로 운전할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했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꽤 좋았다.

이래서 이환이 내게 무엇이든 좋으니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 보라고 했던 걸까. 점점 몸으로 때우는 일에만 익숙해져 가던 삶에 아주 작은 활기를 느낀 기분이다. 실상은 예비 신분증을 하나 얻은 것과 다름없지만.

기능사 자격증도 딸 수 있지 않을까.

운전면허증이야 돈으로 산다는 말을 할 정도로, 학원에 등록만 하면 운전면허 시험에서 불합격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지만. 국가 기능사 시험은 난도의 차원이 다르겠지. 그래도 시도해 볼 마음이 생겼다.

물론 지금 당장은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여건도 되지 않으나, 언젠가 여유가 생긴다면…….

그리 생각하다가 그냥 웃어 버렸다. 언제 내게 여유가 있고 여건이 되는 적이 있었던가.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하루 잘 곳을 걱정한다. 한 달 병원비를 마련하고자 일을 하고, 한 달이 지나면 그다음 달 병원비를 모으려고 또 일을 한다. 항상 똑같이 허덕이고 여유 없는 삶이다.

그래도 엄마를 병원에 입원시킨 건 후회하지 않았다.

돈을 벌러 나가면 엄마를 옆에서 보살필 방법이 없기에, 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는 지금의 상황에 안도하는 건 아니다. 그냥…… 엄마와 떨어져 있어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무리 싼 병원을 찾는다 한들 한 달 입원비는 비싸다. 엄마가 한 달 내내 술을 먹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남의 물건을 가져오거나 때려 부숴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지만, 그것이 병원비보다 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엄마의 술값과 이리저리 나가는 배상금과 엄마에게 맞아서 쓰게 되는 약값을 아무리 합쳐 봐야 지금 엄마의 병원비보다는 싸게 먹혔다.

그래도 나는 지금의 상황이 낫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치매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지금까지 엄마와 같이 살아야 했더라면…… 내가 먼저 죽었을 거다.

맞아 죽었거나, 굶어 죽었거나, 내 손으로 자살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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