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이환의 기분은 근래에 상당히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첫 관계 이후로 해민이 그를 밀어내려 했을 때는 누가 하나 걸리기만 하면 작살낼 것처럼 흉포했고, 페로몬 자극제 사건 때 해민이 스스로 다가온 후로는 봄날의 훈풍처럼 한없이 따스했다.
“미친.”
옆에서 지켜보는 윤경이 가끔 선 넘는 욕설을 내뱉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못 들은 척 넘어가 줄 만큼 그는 너그러웠다.
“아니, 좀 가만히 기다리시라니까요!”
휴대폰으로 연신 전화를 걸었다 끊었다 걸었다 끊었다를 반복하는 이환을 보며 윤경이 빽 소리를 질렀다.
“운전 배우러 간 사람한테 무슨 전화를 그렇게 겁니까?”
“학원에 무사히 도착했는지 궁금하잖아.”
“김 기사님이 태워다 줬는데 무사하겠죠. 정 궁금하시면 김 기사님한테 연락을 해 보시든가.”
“이런 건 직접 전화해서 들어야 의미가 있는 법이야.”
그런 것도 모르냐며 하찮게 바라보는 시선에 윤경이 뒷목을 잡았다.
“그럼 학원 끝날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하든가요. 가뜩이나 긴장해서 운전 배우고 있을 사람한테 전화를 왜 겁니까? 위험하게.”
“내가 그만큼 신경 쓰고 있다는 표시지. 사람의 감정은 드러내야 하는 법이다.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모르지.”
“아니, 씨발. 행동도 적당히 해야지. 그 정도면 병이거든요.”
벌써 오십 번이 넘어가는 통화 시도를 지켜보며 윤경이 작게 욕설을 뇌까렸다. 물론 그러한 비서의 건방진 태도 또한 이환은 여유롭게 넘어가 주었다. 받지 않는 사람에게 연달아 전화를 거는 휴대폰만 여유롭지 못할 뿐이었다.
“항상 관심이 있음을 표현해야지. 실제로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보살피고, 신경 쓰고, 예뻐해 주고, 소중하게 가꾸고.”
“아니, 무슨 화분도 아니고. 가꾸긴 뭘 가꿉니다.”
“이런 게 연애라는 건가?”
“연애는 무슨. 연애는 혼자 하나? 잘 쳐 줘 봐야 썸이나 타는 수준이고만.”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뻔히 듣고도 이환은 개의치 않았다.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환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던 윤경이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저것이 ‘연애하는 나’의 모습에 매몰되어 버린 모태 솔로의 현실인가.
나이 먹어서 연애를 시도하면 이런 부작용이 있구나. 지금은 상사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있던 여자 친구와도 깨졌지만, 그래도 모태 솔로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하는 윤경에게 이환이 물었다.
“요즘은 학원만 다니면 백 퍼센트 면허 딴다고?”
“거의 그렇죠. 돈으로 면허 산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첫 시험에서 떨어져도 두 번째 시험에서는 거의 붙는다고 합니다.”
“그럼 일주일 안에 따겠네?”
“해민 씨가 트럭으로 가로수를 들이받지 않는 이상, 떨어지기가 힘들겠죠.”
운전면허라.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해 줘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무언가 받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이지만, 이유가 있다면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기념이 될 만한 날을 만들어서 부지런히 챙기는 게 옳았다.
“선물을 해야겠다.”
“네,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차를 한 대 뽑아 줄까.”
재벌의 선물 스케일은 남달랐다. 그걸 본인만 몰랐다.
조금 안쓰러운 눈으로 이환을 보던 윤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수동 트럭으로 운전대 처음 잡아 본 사람이 면허 땄다고 차 사 주면 잘도 끌고 다니겠습니다.”
“윤경. 너 요즘 말투가 너무 띠껍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차를 선물한다고 해민 씨가 받을 것 같지도 않고, 만에 하나 받는다고 해도 그걸 언제 어디에 끌고 다니겠습니까? 실장님의 첫 선물이 주차장에 처박혀 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시면 다른 걸 생각해 보시죠.”
그런가.
머릿속으로 해민이 끌고 다닐 만한 차종을 떠올리던 이환이 윤경의 지적에 멈칫했다.
“차 말고, 요정님에게 어울릴 만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
“액세서리라도 하나 사 주시든지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팔찌가 좋겠다.”
목걸이는 현재 착용하고 있고, 저번에 이정에게 받았다가 던져 버렸던 시계가 떠올랐다. 여러모로 팔찌가 괜찮을 듯했다.
“팸플릿 좀 보내라고 해.”
이환의 요구에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SG 백화점에 입점한 유명 주얼리 브랜드의 팔찌 목록이 책상 위에 놓였다.
“요정님 손목에 걸 만한 게 없네.”
딱히 눈에 들어오는 물건이 없다. 이것도 저것도 죄다 성에 차지 않았다.
“오더메이드는 어느 정도 걸리지?”
“서둘러도 일주일 안에는 불가능할 겁니다.”
어지간한 요구가 아닐 것임을 일찌감치 파악한 윤경이 사전에 차단을 했다. 목을 울리며 못마땅한 소리를 내던 이환이 팔찌 하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걸로.”
“미리 포장해서 준비해 둘까요?”
“여기에 GPS 넣을 수 있나?”
“…….”
“못해?”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이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보다 선물이라면서요. 거기에 GPS를 왜 넣습니까?”
“관심이야, 관심.”
“관심이 아니라 범죄입니다. 일반인에게 그러시면 안 됩니다, 실장님.”
“이게 바로 해민 씨를 걱정하는 내 마음이지.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뜻이고.”
“네, 범죄입니다.”
주먹으로, 칼로, 총으로 싸우던 시대는 지났다. 현대의 싸움은 누가 빨리, 그리고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느냐로 승패가 좌우되었다. 그건 국가 대 국가의 싸움에서도, 기업 대 기업의 싸움에서도, 개인 대 개인의 싸움에서도 통용되는 정의였다.
그렇기에 사람을 붙이고, 뒷조사를 하고, 위치 추적은 물론 전자 기기 해킹 정도야 기본이자 애교였다. 이환의 곁을 몇 년간 지켜 온 백윤경 또한 익숙하고 조금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래도 나름의 선은 있었다.
“연애는 평범하게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물론 이환이 지금 서해민과 진짜 연애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연애 중인지 썸 타는 중인지 이환 혼자 착각하는 중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대립 세력도 아니고 일반인에게 그러는 건 좀…….
“걱정되니까 그래. 혹시라도 해민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누가 봐도 ‘도망갈까 봐.’인데?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해. 그러다 요정님이 납치라도 당하면?”
차라리 솔직하면 당당해 보이기라도 하지. 너무 구질구질한 변명이다.
이미 결심을 내린 듯한 이환을 보며 윤경은 차마 말하지 못하는 감상을 속으로 삭였다.
“그러게요. 참 걱정입니다.”
“그렇지?”
서해민의 앞날이 걱정이었다.
“표 안 나게 잘 해 와.”
“알겠습니다.”
이 중생을 어찌해야 하나. 앞이 보이지 않는 상사의 연애에 윤경은 암담함을 느꼈다.
∞ ∞ ∞
케이스에서 팔찌를 꺼내 이리저리 뒤집어 살피던 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미리 듣지 않았다면 GPS가 장착되어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끔했다. 휴대폰으로 연동시키자 GPS 신호가 지도에 나타났다.
“잘 어울리겠어.”
“그 감상을 GPS 연동시키며 말씀하시니 참…….”
“참?”
“해민 씨에게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렇지.”
가끔은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말을 감추며 뻔한 칭찬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게 바로 사회생활이고, 이게 바로 어른이 되어 간다는 증거겠지.
창밖으로 착잡한 시선을 던지며 마른 눈가를 훔치는 윤경을 보며 이환이 픽 웃음을 흘렸다.
“목걸이는?”
“세공 들어갔으니 곧 완성된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주말 전후로 연락이 올 것 같습니다.”
해민이 걸고 다니는 목걸이가 있었다. 원래부터 그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는 아니고 제가 준 것이었는데, 착실하게 착용하고 다니는지 가끔 옷 안쪽으로 목걸이 줄이 보이곤 했다.
그랬는데 하필이면 그 목걸이가 은도 아니고 도금한 쇠일 줄이야.
같은 목걸이를 나눠 걸었고, 샤워할 때도 잠잘 때도 착용한 건 이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 않은 저와 달리 하필이면 해민이 쇳독에 걸릴 줄 누가 알았겠나. 곧바로 목걸이를 주문해 두긴 했으나, 쇳독 오른 부위를 소독하고 약 바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면목이 없었다.
“받아 오면 목걸이에도 넣어 두고.”
“……GPS요?”
“그럼 뭘 넣으려고?”
“아니, 팔찌가 있는데 왜 굳이 목걸이에…….”
“팔찌는 안 하고 다닐 수 있잖아. 목걸이는 한번 하면 잘 안 빼도, 팔찌는 손 씻을 때 끼고 뺄 수 있으니까.”
차라리 잘되었다. 부담스럽다고 안 하고 다니면 어쩌나 약간의 걱정도 있었는데, 해민의 성격상 일단 팔찌와 목걸이를 받게만 한다면 미안해서라도 두 개 다 빼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팔찌나 목걸이 중 하나를 빼놓고 다녀도 다른 하나는 착용하고 다니겠지.
“안전 수단은 여러 개 만들어 두는 편이 좋지.”
안전 수단이라기보다 스토커 수단에 가깝지 않을까.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그것도 5캐럿짜리 블랙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를 누가 항상 하고 있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윤경이 “그러시겠죠.” 하고 영혼 없는 대꾸를 내뱉었다.
“오늘 주면 딱 좋았을 텐데.”
가뜩이나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인데, 이유도 없이 선물을 안겨 주면 받지 않으려 할 게 틀림없었다. 운전면허 합격 선물로 팔찌를 주고, 녹슨 목걸이 사태의 여운이 가라앉기 전에 목걸이를 주면 딱 좋은 타이밍인데.
다음 주라면 안 받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 팔찌를 받게 하면 반쯤 성공이지만, 다음 주에 목걸이를 줄 때 팔찌 때문에라도 더 부담을 느낄 터이다.
기념할 만한 명분을 만들어야 할 텐데.
“슬슬 나가 보셔야죠. 이러다 해민 씨가 먼저 오겠는데요.”
생각에 빠진 이환을 현실로 건져 올리며 윤경이 시간을 알려 주었다.
“그러게. 시험 합격했으려나.”
“웬만하면 합격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팔찌가 담긴 케이스를 닫아 쇼핑백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합격 소식을 전해 올 해민을 축하해 주러 갈 시간이었다.
∞ ∞ ∞
“벌써 일어나?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지.”
“됐어.”
밥 같이 먹었으면 됐지, 뭐 좋은 자리라고 차까지 마시나.
가족 식사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이환의 뒤로 이정이 따라붙었다. 차가 나오길 기다리던 이환이 문득 이정을 돌아보았다.
“형.”
“응?”
“해민 씨 만났다며.”
“아, 만났지.”
말을 돌리거나 숨기려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당당해서 물어본 사람이 머쓱할 정도였다.
“왜 내 요정님한테 접근하지?”
“그냥 길 가다 만난 거야.”
“우연히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렇지.”
“형은 우연을 안 믿잖아.”
“그런데 만나 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