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재벌가에서 숙식까지 제공하며 일할 사람을 구하는데, 이력서 한 장 달랑 받고 사람을 들이겠는가. 일찌감치 뒷조사라도 해 두었겠지.
유일한 가족으로 기록되어 있는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는 조금만 수고를 들여도 쉽게 알 수 있었을 테고,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어제 미리 말을 해 두었으니 이환이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길이 어긋나지 않고 버스 정거장에서 만난 건 타이밍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넋 놓고 있지 않고 정신 챙겨서 버스 타고 가는 중이었다면 이환이 헛수고할 뻔했다.
“점심까지 드시고 올 줄 알았는데, 일찍 나오셨나 봐요.”
열한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아침 한 끼 같이 먹었으면 충분하죠. 인사하러 찾아오는 사람들로 정신없어서 그냥 나왔습니다.”
“그러다 회장님한테 혼나시려구.”
“한 달에 한 번씩 얼굴 보여 드리고 같이 밥 먹는 걸로 도리는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가족들에게는 정을 주지 않는 듯 보였다. 새어머니나 이복동생들을 거부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아버지나 친형에게도 그리 살가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렇게 지쳤습니까.”
“날이 더운가 봐요.”
“몸보다 마음이 지쳐 있는데요.”
“……엄마한테 못된 말을 했거든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저는 효자가 아닌가 봐요.”
“그것 역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내게 정당성과 타당함을 부여하는 이환이 웃겼다.
웃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내가 옳다 말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을 들어 주는 이환이 있어 조금 든든한 기분도 든다.
생각해 보면 고용 첫날부터 그러했다. 백윤경에게 사과하는 내 옆에서 덮어 놓고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내가 사과를 하고 있는데도 무조건 백윤경의 잘못이라고 억지를 부려서 어이없었던 기억이 난다.
“어색한데 좋아요.”
“뭐가요?”
“무조건 내 편 들어 주는 사람.”
“…….”
“어릴 때 참 많이 부러웠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쫓아와서 편들어 주는 거. 같이 싸워 주는 거. 대신 화내 주는 거. 엄마가, 아빠가, 하다못해 만날 싸운다던 형제라도 옆에 있으면 자기가 잘못했어도 일단 당당해지더라고요.”
“저런.”
“이상한 게, 선생님도 친구들도 자연스럽게 그쪽 편을 들게 돼요. 삼투 현상처럼. 자기 편이 있는 애들은 계속 계속 편이 늘어나고, 편이 없는 아이는 끝까지 없어요. ……한 명도 없어.”
“나는 요정님 편이에요. 끝까지.”
이환의 말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이환이 내 뺨을 간질이듯 살살 쓸었다.
“피곤해 보입니다. 눈 좀 붙여요.”
“금방 집에 도착할 텐데요.”
“그러니까요. 집에 가고 있으니까, 긴장 풀고 잠깐 눈 감고 있어요.”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내 가슴 위에 덮어 준 이환이 초록 불을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의 체온이 스며 따스한 재킷을 품으로 끌어당기며, 운전하는 이환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분명히 이환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언제 눈을 감고 자 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그 얼굴이 구경하면서 잠이 올 얼굴은 결코 아닌데. 심지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침대로 이동되어져 푹 자고 일어났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잠든 상태로 차에서 내려 방까지 걸어와 침대에 누웠을 리는 없고. 어떻게 이환의 차에서 침대까지 오게 되었을까.
쭉 기지개를 켜며 일단 방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여사님에게 잘 다녀왔다는 인사도 못 드렸다. 비록 하나도 먹지 못하고 바닥에 버려지긴 했으나 전을 챙겨 주신 수고까지 생각하면 감사 인사도 전했어야 했는데.
일 층으로 내려와 주방을 기웃거리는데 묘하게 집 안이 고요했다. 두 시 반. 점심은 이환과 여사님만 했으려나. 방에서 쉬고 계시나 싶어 여사님의 침실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여사님.”
두어 번 노크와 함께 불러 보았으나 역시나 답이 없었다.
어디 나가셨나. 미리 잔뜩 장을 봐 와서 내일까지는 시장에 갈 일도 없다고 하셨는데.
터덜터덜 거실로 나왔다. 유난히도 저택 안이 고요하게 느껴졌다. 적막이 내려앉은 공간 속에서 혼자 방치된 기분을 느끼며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는데,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해민 씨?”
“……실장님.”
“왜 그러고 있어요?”
머그잔을 손에 들고 일 층으로 내려온 이환이 거실 중앙에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보고 조금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일어나서요. 저도 모르게 잠들었나 봐요.”
“피곤했나 보더라고요. 깊이 잠들어서 깨우지 않고 그냥 방으로 옮겼습니다.”
“……실장님이요?”
“네.”
“어떻게…….”
“어떻게는. 이렇게 안아서 옮겼죠.”
두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안아 옮기는 시늉을 하는 이환을 보며 조용히 마른세수를 했다.
“여사님은…… 어디 가셨어요? 방에도 안 계시던데.”
그 꼴을 여사님이 보셨냐고 물어보려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내 심신 건강에 좋으리라 판단을 내리고 질문을 바꾸었다.
“아, 여사님은 휴가 가셨습니다.”
“……휴가요? 아침까지만 해도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갑자기 휴가라니.
명절이지만 딱히 갈 곳도 없다고, 연휴 동안 맛있는 거나 해 먹으면서 놀자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호캉스 가셨습니다. 이번에 오픈한 호텔 시설이 꽤 괜찮다기에, 어제 여사님 고생하시기도 했고 연휴 동안 특별히 하실 일도 없을 듯해서 쉬다 오시라고 보내 드렸어요.”
호텔 바캉스라면 미리 계획을 짜거나 준비할 필요 없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갈 수 있긴 하다만. 그렇다고는 해도 말 한마디 없이 훌쩍 가실 줄이야.
지금까지 잠들어 버린 내 탓이 크지만 조금 아쉬웠다.
“여사님 혼자 가신 거예요?”
“당연히 친구분들과 가셨죠. 여사님이 얼마나 마당발이신데. 여사님이 전화 돌리면 삼십 분 안에 여기 정원이 사람들로 가득 찰 겁니다.”
“와, 그 정도로요?”
“이 구역의 잘 나가는 왕언니입니다.”
왕언니는 또 뭐야.
이환의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해민 씨가 일어나는 거 못 보고 출발해서 미안해하셨습니다.”
“제가 잠든 탓인데요. 모처럼 친구분들과 외출하셨으니 편히 쉬다 오셨으면 좋겠어요.”
“해민 씨가 그렇게 생각해 주면 여사님도 마음이 조금 편하실 겁니다.”
그러면서 가까이 다가오라는 듯 손짓을 한 이환은 정작 한 걸음 다가가자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했다.
다가오라는 뜻이 아니라 따라오라는 뜻이었나.
이환의 뒤를 졸졸 쫓았다.
“여사님이 저녁에 먹으라고 갈비찜 해 두셨는데. 배고픕니까? 늦었지만 점심 먹어야죠.”
“실장님은요?”
“해민 씨도 자고,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냥 넘겼습니다.”
여사님이 용케 이환의 점심을 챙기지 않고 그냥 가셨다. 왜인지 먹기 싫다고 버티는 이환과 엄청나게 잔소리하는 여사님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그럼…… 저랑 같이 드실래요? 데우기만 하면 되니까 금방 차릴 수 있는데.”
조금 전에 일어난 탓에 나 역시 입맛이 돌지는 않았지만, 저녁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굶고 있기에도 뭐 했다. 마침 이환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고 하니 겸사겸사 같이 먹을까 해서 물었다.
커피를 리필하려고 내려왔는지 빈 머그잔을 내려놓고 물을 끓이던 이환이 음, 하고 말을 끌었다.
“그럴까요.”
“그럼 얼른 준비할게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아니, 올라가 계시면 제가 상 차리고 말씀드릴…….”
“같이 합시다, 같이.”
밥이 있는지부터 확인한 이환이 갈비찜을 작은 냄비에 덜어 가스 불 위에 올렸다. 본인 손으로는 물 한 잔 안 떠 마시게 생긴 사람이 의외로 행동이 빨랐다.
“제가 할게요.”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접시에 먹을 만큼씩 덜었다.
“해민 씨.”
“네, 실장님. 밥 많이 드릴까요?”
식당으로 가지 말고 주방 테이블에서 먹자는 이환의 말에 반찬 접시를 식탁 위에 올리고, 주걱과 밥그릇을 들었다.
“……조금만 줘요. 그보다 해민 씨.”
이 용건이 아니었나.
왜 부르시냐며 눈을 끔뻑거리자, 내 얼굴을 바라본 이환이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도 휴가 갈까요?”
“……휴가요?”
“명절에 주말까지 붙어서 우리 둘이 사 일 동안 있어야 하는데. 집에만 있기엔 시간이 아깝지 않을까요.”
“여사님 일요일에 오세요?”
“네.”
“실장님 일은요?”
“명절 연휴에는 나도 쉬면 안 됩니까?”
“아니, 일하시라는 게 아니라……. 새벽까지 일하시니까 연휴에도 일하셔야 할까 봐요.”
“일 안 합니다.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어서 연휴 내내 해민 씨가 놀아 줘야 해요.”
그럼 진짜 일요일까지 이환이랑 둘이서 지내야 한다는 뜻인가.
둘이서 멀뚱멀뚱 얼굴만 보고 있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환이 티브이를 시청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으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벌써부터 암담해졌다.
“만약에…… 휴가를 간다고 하면 어디로 가요?”
왜인지 질문을 하면서도 이환에게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환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동해에 별장이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 밥 먹고 출발하면 오늘 저녁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녁은 거기 가서 먹으면 되겠네요. 먹을 건 준비되어 있으니 따로 장은 안 봐도 됩니다. 가서 입을 옷 정도만 가볍게 챙겨요. 아, 여사님이 소불고기 양념해 두고 가셨으니 이건 챙겨 가야겠네요.”
내 손에서 밥그릇과 주걱을 가져간 이환이 밥을 푸며, 미리 생각해 둔 사람처럼 막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혹시 미리 계획 다 짜 두셨어요?”
“……갈비찜 데워졌나 한번 볼래요?”
말 돌리는 게 너무 어색한데!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타는 냄새가 아니라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
하지만 코끝에 스치는 갈비찜 냄새에 진짜 탈 수도 있겠다 싶어 얼른 냄비 안을 살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