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85)화 (85/172)

85화

“환이가 많이 의젓해졌네. 나이 먹었다고 일 이야기도 하고. 키도 크고, 덩치도 엄청 좋다, 야. 내가 너희 집 놀러 갔을 때가 너 초등학생 때였는데, 뭐 먹었기에 이렇게 큰 거야? 밖에서 봤으면 못 알아봤겠다. 난 아까 들어올 때 누군가 했잖아. 사실 살짝 쫄았다, 나.”

“우리 환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귀엽지.”

그렇게 말하는 이정보다 이환이 키도 덩치도 더 크지만, 혈육의 눈에는 마냥 귀엽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나도 가끔 이환에게 귀여움을 느낄 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남들 앞에서 대놓고 귀엽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데.

역시나 혈육의 정은 무서웠다. 아니다. 그냥 이정의 멘탈이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다.

“옆에는 누구야? 누군데 같이 오셨을까.”

초면에 프로젝트 두 개를 날려 먹고 이집트로 쫓겨난 이미지로 남아 버린 최대영이 괜스레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환이 생명의 은인.”

“생명의 은인?”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우두커니 앉아 ‘아무것도 안 들립니다’를 시전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내뱉기에는 최대영의 첫인상이 너무 뭉개진 탓이었다. 타인의 사회적 체면과 지위를 지켜 주고자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을 시도했다.

통성명을 원했다면 이환이나 이정이 소개를 시켜 주든 최대영이 말을 걸든 했을 거라고, 그전까지는 그냥 가만히 앉아 가마니 시늉이나 하는 편이 신상에 좋다는 판단을 내렸다.

“건설 현장에서 환이 다칠 뻔한 걸 구해 줬대. 생명의 은인이지.”

“귀인이시네?”

“귀인보다 더 귀한 환이 요정님이지.”

이정의 불필요한 설명에 최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필이면 왜 그런 설명을 덧붙여서.

속으로 이정의 욕을 하며 평온한 척 앉아 있는데, 똑똑 노크를 하고 들어온 비서가 가져온 음료를 이환과 내 앞에 내려놓고 나갔다.

“요정님. 진짜 오랜만에 들어 본다.”

허벅지를 때리며 웃던 최대영이 꺽꺽거리며 숨을 골랐다.

“어릴 때 그 얘기 듣고 나 엄청 당황했잖아.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네 동생이 요정에 미쳐서 ‘요정님은 진짜 있어요!’ 하고 소리치면서 돌아다녔던 거. 내가 ‘요정님은 없어! 요정님 있다는 건 거짓말이야.’ 하고 놀리니까 막 달려들어서 때리고 소리 지르고.”

“환이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말리는 시늉을 했으나 이정은 왠지 즐거운 표정이었다. 진심으로 최대영을 말리기보다 가볍게 응수하며 부추기는 쪽에 더 가까웠다.

나는 바쁘게 눈을 굴리며 이환과 이정, 최대영의 눈치를 살폈다.

첫인상이 뭉개진 최대영 씨는 마치 복수하듯 이환의 어릴 적 흑역사를 끄집어냈고, 이정은 마냥 즐겁고, 이환은 그저 묵묵하게 제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홀짝였다.

“환이는 아직도 요정 믿는 거 아니지?”

“우리 환이는 아직 순수하거든.”

“미친. 야, 우리 나이가 마흔이야. 쟤도 서른 넘었잖아. 몇 살 차이였지?”

“여섯 살.”

“와, 환이가 벌써 서른넷이야? 요정님 믿던 그 꼬맹이가 서른넷이라니.”

“요정님을 믿는 서른네 살이 되었지.”

“큭큭, 요정님. 다시 생각해도 골 때린다. 그러고 보면 환이가 진짜 순진하긴 했어. 요즘 애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아냐?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산타가 없다는 걸 안다니까.”

“최대영, 우리 환이는 산타클로스도 믿어.”

왜인지 분위기가 몹시 묘했다. 무언가 엄청 잘못된 상황이라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요정과 산타클로스를 믿는 이환의 잘못인지, 친구와 동생 사이에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마냥 즐거운 이정의 잘못인지, 악의적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웃어 대는 최대영의 잘못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무 연관 없이 끌려와 여기 앉아 있는 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나도 어릴 때 산타클로스 안 믿었던 것 같다. 그냥 선물 받는 게 좋았지. 요정? 그건 애초에 믿지도 않았어. 그거 믿는다고 선물이 나오길 하나, 돈이 나오길 하나. 믿는 시늉을 할 가치도 없지.”

“동심이 썩었네.”

“동심 썩은 걸로 치면 이정, 네가 최고지.”

“그래도 나는 우리 환이의 순수함을 응원해.”

“서른 넘어서까지 요정하고 산타를 믿는 건 순수함이 아니지. 이환, 너 진짜로 아직까지 요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거 뭐 서프라이즈 같은 거야? 오랜만에 형 봤다고 큰 웃음 주려는 거야? 어? 요정 있어, 없어? 말해 봐.”

소파에 기대어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최대영이 이환을 가리키며 물었다. 기어코 이환의 입으로 요정의 존재 여부를 들어야겠다며 그는 재차 이환에게 답을 요구했다.

“형님, 요정 이야기는 그만하시죠.”

이환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왜? 어릴 때 이야기가 부끄러워? 어릴 때는 다 그렇지. 산타도 믿고, 요정도 믿고. 옛날에는 망태 할아버지가 최고였는데, 어째 요즘은 죄다 수입산이야.”

“미친놈. 우리 때에도 망태 할아버지는 아니었어. 넌 대체 몇 세기에서 살다 온 거냐.”

최대영의 말에 이정이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둥글게 말아 던지며 핀잔했다.

“호환 마마도 안다, 새끼야. 그래서 환이는 이제 나이 먹었다고 이미지 관리하는 거야? 옆에 있는 생명의 은인이 듣기엔 좀 부끄러워?”

“요정이 없다고 말할 때마다 요정이 죽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말하지 마세요.”

“…….”

차분히 내뱉는 이환의 말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고,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이정과 이환을 바라보던 최대영이 이내 프흐흐흐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뱉어 내며 웃음을 흘렸다.

“환이 너, 진짜 아직도 요정이 있다고 믿는 거야? 이거 진짜야?”

“우리 환이는 여전히 순수하다고 했잖아.”

이정이 어깨를 으쓱이며 최대영에게 확신을 주었다.

“으하하하하. 미쳤다. 환이 너 요즘 회사 일 돕고 있다며. 직원들한테도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거 아니지? 요정? 아하하하하하. 요정.”

최대영이 소파 팔걸이를 내려치며 으하하하 하고 숨넘어가게 웃어 댔다. 그는 너무 웃어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꺽꺽거리며 중간중간 “요정, 으하하, 요정, 으하하끄윽, 요정.” 하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와. 환아, 너 진짜 찐이구나? 어이구, 그래쪄요? 요정이 없다고 하면 요정이 죽어쪄요? 야, 이정. 너희 애들도 요정은 안 믿지 않냐? 환이 얘 괜찮은 거 맞아?”

세상에나. 하고 탄식하며 뒤늦게 과장된 표정으로 놀란 얼굴을 한 최대영이 이정의 팔꿈치를 툭툭 건드리며 동의를 구했다. 이정은 무슨 생각인지 모를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세상에 요정이 어디 있냐? 너 초등학생 때는 그나마 어리니까 이해하고 넘어갔다지만, 지금 나이에서까지 그런 소리 하면 병원 끌려가. 환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지? 오랜만에 형 만났다고 농담하는 거지?”

어울리지 않게 걱정하는 시늉을 하며 최대영이 이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죽 휘어진 입술 위로 묘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으나, 여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인 내가 그것을 지적할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맞네. 그때도 그랬다. 내가 요정 없다고 하니까, 환이가 요정님 죽는다면서 나한테 막 화냈잖아. 그거 웃겨서 ‘요정 없음. 진짜로 없음. 요정 가짜. 요정 사망.’ 이러면서 막 환이 쫓아다녔는데.”

최대영의 인성도 알 만했다. 초등학생을 상대로 동심을 파괴하겠다고 굳이 쫓아다니면서까지 그래야 했을까.

“아, 이것도 있다. 환이 장래 희망. 이정, 너 기억나? 그때 언제였더라. 환이 숙제라고 장래 희망 글짓기 했던 거. 우리 그거 몰래 훔쳐보고 완전 뒤집어졌잖아.”

어? 기억나? 기억나지?

이정의 팔뚝을 툭툭 치며 최대영이 얼른 기억난다고 말하라며 대답을 강요했다. 이정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으나, 최대영은 저 좋을 대로 판단하며 “기억나지? 완전 웃기지 않았냐?” 하고 동의를 구했다.

“그때 환이가, 크흐흐, 커서 요정님이랑 결혼할 거라고, 끄흐으윽, 요정이랑 결혼하는 게 장래 희망, 흐흐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자지러지게 웃으며 최대영이 거의 흐느끼다시피 웃어 댔다.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사람처럼 끄윽끄윽 하고 숨찬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유쾌한 사람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도 유쾌하고 듣는 사람도 유쾌한, 모두를 유쾌하게 만드는 사람. 말하는 사람은 유쾌하지만 듣는 사람은 유쾌하지 않은, 저 혼자만 유쾌한 사람.

최대영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해도, 한자리에 앉아 듣고 있는 입장으로서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명백한 후자였다.

이환이 왜 최대영을 반기지 않고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고 악담까지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것과 별개로 너무 이환을 자극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아무래도 이환의 재회 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최대영은 건수 하나 문 사람처럼 아득바득 요정을 걸고넘어졌다. 그만하라는 이환의 경고에도 그는 옛날이야기를 들먹이며 계속 요정의 존재 여부에 대해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에 몇 번 동조하며 추임새를 넣던 이정도 이제는 그냥 미소만 지을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 상관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나만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숨죽인 채 이환의 눈치를 살폈다.

비웃는 의도가 여실히 느껴지는 최대영의 웃음소리가 집무실에 이질적인 배경음처럼 떠다녔다.

아무 말 없이 커피만 마시던 이환이 이내 손에 든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입을 다물고 잠시 침묵하는 이환을 따라 실내의 공기가 한순간 숨 막히게 무거워졌다. 조금 전까지 방정맞게 웃으며 떠들어 대던 최대영 또한 급격하게 변한 분위기에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나불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웃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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