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 (88)화 (88/172)

88화

“이쪽 분 말이 맞는데 왜 화를 내는 겁니까?”

“그쪽은 뭔데 끼어들어요!”

그러게. 나도 나지만, 나한테 괜찮냐고 생뚱맞게 물었던 남자는 또 왜 끼어들고 난리람.

무언가 상황이 혼란스러워졌다.

뜬금없이 내 편을 들며 끼어든 남자, 어색한 어투로 내 참견에 화를 내는 여자, 사고를 일으켜 놓고 피해를 입은 여자보다 갑자기 끼어든 남자를 힐끔거리는 자전거 운전자.

사고 당사자가 될 뻔하였으나 그 위기에서 벗어난 탓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도 뭐하고 그냥 무시하고 가기에도 뭐한 상황이다. 그런데 아무 관련 없던 남자가 덜컥 참전하여 더욱 어색하고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내가 끼어들 타이밍이 아니었나 하는 후회감이 밀려와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 더 있어 봐야 좋은 꼴은 못 볼 성싶어서 그냥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시장을 둘러보다가 저녁에 대구탕을 끓이겠다는 여사님의 말이 생각나서 생선 가게에 들렀다. 비슷하게 보이는 생선 중 대구가 어떤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고서도 어떤 놈이 싱싱한지 몰라 대충 예뻐 보이는 생선을 골랐는데,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내가 고른 대구를 가로챘다.

“이걸…….”

“이거 한 마리 주시죠.”

얼마나 급했는지 그 사람은 내가 가리킨 대구를 맨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고개를 틀어 옆을 보자 말쑥하게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나와 시선을 마주해 왔다.

“혹시 먼저 고른 건가요? 이런, 생각이 통했나 보네요.”

“…….”

맨손으로 생선을 쥔 상태에서 그런 멘트를 날린다고?

이상한 사람이다.

시장에 정장을 입고 온 것도 이상하고, 비린내 나는 생선을 맨손으로 집어 드는 것도 이상하고, 이런 상황에서 ‘생각이 통했다’는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다. 아니, 그게 제일 이상하다.

문득 낯선 남자에게서 이환의 모습이 겹쳐 보였으나, 허튼 생각을 털어 냈다.

“아뇨. 사 가셔도 돼요. 아주머니, 대구 한 마리 주세요.”

어차피 뭐가 좋은 놈인지 모르니 다른 생선을 사도 괜찮다. 설마 상태 좋은 놈을 놓아두고 나쁜 놈을 골라 줄까 싶어서 가게 아주머니에게 선택을 맡겼다.

“아이고, 오늘 대구 물 좋은 거 어찌 알고. 잘생긴 청년들이 보는 눈까지 있네. 한 마리씩 드리면 되죠?”

“대구탕 할 거니까 손질해 주세요.”

“오케이. 예쁜 총각이 먹을 거니까 예쁘게 손질해 드릴게.”

“저도 그렇게 해 주시죠. 저녁에 대구탕 해 먹으려고요? 나도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대구탕이 당기더라고요.”

“…….”

아주머니에게 손에 든 대구를 건넨 남자가 내게 친한 척 말을 걸어 왔다.

이 친화력 조금 부담스러운데.

네에,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아주머니가 손질하는 대구에 고정했다.

“대구탕에 소주 한 잔 하면 크. 사 먹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집에서 편하게 먹는 것도 좋잖아요.”

“네에.”

낮 시간에 정장을 입고 시장에 와서 저녁에 요리할 대구를 사는 이 남자의 정체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근처 사시나 봐요?”

“네, 뭐.”

“이야, 같은 동네 주민이었네. 반가워요.”

“네에.”

그렇게 반가워할 일인가. 여기 시장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동네 주민일 텐데. 게다가 만약 남자가 이 근처에 산다고 가정하면, 가장 가까운 시장이라 여기로 왔을 뿐 차를 끌고 와야 하는 나와는 같은 동네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대구탕은 누가 끓이는 거예요? 본인이? 어머니가?”

“네에.”

“나는 자취해서 혼자 만들고 혼자 먹거든요. 와, 부럽다. 나도 가끔은 누가 해 주는 밥 먹고 싶고, 내가 해 주는 밥을 누가 먹어 주었으면 싶고 그러네요.”

“네에.”

“아휴, 총각들이라 금방 친해지네. 여기 먼저.”

영혼 없이 ‘네에’만 반복하고 있었더니 내 대구가 먼저 손질되어 나왔다.

“대구탕에 뭐 들어가는지 알아요? 무가 들어가나요? 대파는 있어야겠죠?”

“인터넷 찾아보세요.”

계산을 하고 자리를 뜨려는 나를 붙잡으며 남자가 물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알아도 나보다 가게 아주머니가 더 정확하게 알겠지. 정 모르겠으면 휴대폰으로 찾아보든가.

“네, 여사님.”

마침 적당한 타이밍에 여사님에게서 전화가 와 남자를 털어 낼 수 있었다.

―해민 씨, 미안. 내가 수다 떠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어디예요?

“저 지금 대구 샀어요. 또 뭐 사야 해요?”

―생선 파는 곳까지 들어갔어? 입구에서 야채 파니까 나머지는 내가 사고 있을게요. 입구 쪽으로 나와.

“네, 여사님. 지금 갈게요.”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참기름 짜는 집도 지나치고, 건어물 파는 곳도 지나치고, 옛날 과자 파는 집도 지나친다. 조그만 골목이라 툭툭 부딪치는 사람들을 때때로 피하고 때로는 부딪쳐 가며 시장 어귀로 향했다.

“저기요.”

뒤에서 낚아채는 손이 없었다면 별일 없이 시장 입구로 나갔겠지. 뒤를 돌아보자 한 손에 검은 봉지를 든 양복쟁이가 서 있었다.

“지갑 떨어뜨리고 갔어요.”

생선 가게에서 대구탕으로 일방적인 의기투합을 시도하던 남자였다. 그의 손에 들린 낯익은 지갑을 보고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계산하고 분명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는데 언제 떨어졌을까. 그걸 돌려주겠다고 용케 쫓아온 남자에게 작은 고마움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본인 지갑 맞죠?”

“네.”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확인시켜 줄 수 있어요?”

지갑 안에서 신분증을 꺼내 사진을 보여 주었다. 남자는 신분증의 사진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는 시늉을 하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민 씨?”

“네.”

“스무 살이에요?”

“네.”

“난 스물다섯인데.”

“…….”

“고마우면 커피 한 잔 살래요?”

뭐지, 이건.

신분증을 지갑에 집어넣다가 남자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조상 복이 많다거나 도를 믿는다거나 그런 건가. 지갑을 열어 봤으면 개털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요즘은 다들 현금 대신 신용카드를 들고 다니니, 지갑에 든 현금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나. 이환이 사 준 옷이 고가 브랜드라 있는 집 자식처럼 보였나.

“이것도 인연인데, 같은 동네 주민끼리 커피 한 잔 어때요. 좋은 동네 친구 한 명 사귈 기회인데.”

“…….”

“내가 위험해 보이나? 나 그렇게 위험한 사람 아니에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

“지갑 찾아 준 거 안 고마워요? 커피 한 잔에 그 고마움을 털 기회인데. 원래 지갑 찾아 주면 사례금 받아야 하는 거 알죠? 내가 해민 씨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커피 한 잔만 받을게요.”

이걸 개수작으로 봐야 할까, 호의로 봐야 할까. 이 남자는 게이일까, 같은 동네 주민일까.

혼란스러운 남자의 정체를 차분히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나타난 여자가 덮치듯 남자의 팔짱을 끼었다.

“오빠! 여기서 뭐 해?”

오해였나.

“누, 누구세요?”

“뭐야, 그거. 농담이야? 뭐 하고 있었어? 누구랑 커피 마시려고?”

“누구세요!”

“내가 오는 시간을 못 참고 또 바람피우고 있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너 지금 발뺌해? 저번에도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고 빌어서 넘어가 줬더니, 이젠 시장에서까지 작업질이야?”

눈앞에서 여자와 남자가 갑자기 싸우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익숙한 여자였다. 아까 자전거 충돌 사태 때 나 대신 멸치 박스를 맞았던 여자. 시장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차림에 아직까지 머리에 꽂고 있는 멸치 한 마리가 확신을 주었다.

“해민 씨, 오해입니다. 미친 여자예요.”

“내 눈앞에서 바람피우다 걸린 주제에 뭐? 미친 여자? 너 죽을래?”

“미친년이. 왜 자꾸 아는 척이야!”

“이 새끼가. 뭐 잘했다고 욕질이야!”

혼란스럽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화가 많은 듯했다. 의도치 않게 그 싸움에 한 발을 걸친 듯 안 걸친 듯 애매하게 엮여서 더욱 곤란했다.

“해민 씨, 나 믿죠? 절대 아는 여자 아닙니다.”

언제 봤다고 댁을 믿어.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 내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이런 여자는 무시하고 커피나 마시러 가죠.”

“너 진짜 죽을래? 우리 애는 어쩌고!”

“미치겠다, 진짜. 애는 씨발, 무슨 애!”

시장에 정장을 입고 온 커플이라서였을까, 아직까지도 머리에 꽂고 있는 멸치가 안타까워서였을까. 왜인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믿음이 갔다.

금방이라도 머리채를 붙잡고 싸울 기세인 커플에게서 조용히 등을 돌렸다.

“해민 씨.”

“오빠! 집에서 우리 애가 울고 있어. 밥 먹을 시간 지났잖아. 나가서 쌀 사 올 생각은 안 하고 지금 남자나 후리러 다닐 때야?”

“해민 씨!”

시장에 쩌렁쩌렁 울리는 내 이름이 부끄러웠다.

신분증 보여 주지 말걸.

왜인지 지갑에서 생선 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 ∞ ∞

오늘따라 이환마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웃으며 말하는 얼굴은 평소와 비슷한데, 평소보다 한결 차분하기도 했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예전에는 이환의 과한 관심이 부담스럽기만 했는데, 말없이 식사를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편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어색하다.

“실장님. 오늘 회사에서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아니요. 별일 없었습니다. 왜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요.”

“아아, 미안합니다. 표정이 이상했습니까?”

“아니요. 실장님이야 항상 잘생긴 표정이시죠. 그냥 분위기가 살짝 그랬어요. 우수에 찬 가을 남자처럼.”

뺨을 문지르며 정말 별일 없었다고 웃는 얼굴이 애쓰는 듯 보여서,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립 서비스를 해 주었다. 예상보다 더 큰 효과가 있었는지 이환의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내심 아닌 척을 하느라 입술에 힘을 주어 꽉 깨물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래서 더 표가 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