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실장님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뭘? 해민 씨 생일?”
“네.”
“말 안 하면 모를까 봐? 우리 도련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데. 해민 씨 생년월일을 본 순간부터 하루도 잊은 적이 없을걸.”
“설마요.”
“연회장에 끌려간 뒤에야 내 말을 믿으려나.”
여사님이 놀리듯 하는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해민 씨도 연회장을 빌려서 전문가가 준비하는 쪽이 좋은 거지?”
“아뇨. 너무 불편할 것 같아요. 집에서 조용히 밥 먹는 게 더 좋아요.”
빠르면서도 명확하게 내 뜻을 전달하자, 여사님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혹시…… 농담하신 거예요?”
“아니, ‘진짜로 엄청나게 너무 싫다’고 해민 씨 표정이 말하고 있거든. 질색하는 게 귀여워서.”
“아까부터 입으로도 말하고 있었어요.”
아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은 여사님이 가슴을 쓸며 숨을 골랐다.
“그럼 나한테 협조할 거예요? 파티 준비할 거죠? 해민 씨가 확실하게 답을 줘야 나도 도련님이 연회장 예약하기 전에 우리의 계획을 전달하지. 아니, 며칠 안 남았으니 벌써 예약했으려나. 취소가 될까 몰라.”
“아아…….”
세상을 잃은 듯한 내 탄식에 여사님은 끅끅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여사님, 저 진짜 진지하게 너무 걱정돼요. 이때까지 이렇게 무언가를 걱정했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진지하게요.”
‘진지하게’를 강조하여 진지하게 말했으나, 그 진지함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여사님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다.
“이러다 해민 씨 걱정 때문에 잠도 못 자겠네. 내가 도련님한테 그러지 말라고 말해 놓을게요.”
“진짜요?”
“응, 대신 우리끼리 열심히 준비해야겠지? 도련님이 보고 실망하면 당장 파티장 준비하라고 연락 돌릴지도 모르니까.”
좋아하는 음식을 해 먹자던 이야기가 거실 파티를 거쳐 이환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파티로 발전하였다. 점점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내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던 여사님이 나를 수렁으로 밀고 있었다.
“그리고,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면 갖고 싶은 거라거나. 요즘 이십 대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여기서 먹고 자고 다 하는데 필요한 게 뭐 있겠어요.”
“그럼 선물은 내가 주고 싶은 거 줘야겠다. 해민 씨가 깜짝 놀랄 만한 선물로 준비해야지.”
“괜찮습니다.”
이미 고용주님 덕분에 하루하루가 놀라워서, 더 놀랍다가는 심장에 해로울 것 같습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양했으나 여사님은 마냥 즐거워했다. 무슨 말을 한들 들리지 않을 얼굴이었다.
여사님에게 나는 그저 같은 집에서 일하는 타인일 뿐일 텐데. 생일날 음식 차려 주는 것에 더해 선물까지 해 줄 필요가 있을까. 타인의 태어난 날을 축하해 주는 게 본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돈 들여서 선물까지 해 주려는 걸까.
생일 선물을 받아 본 적도, 줘 본 적도 없는 나에게는 꽤나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점심은 도련님이랑 나가서 먹을 테니까, 저녁에 파티 하면 되겠다. 아침부터 파티 할 수는 없으니까 미역국으로 체면치레하고.”
“아뇨.”
“응?”
“미역국…… 싫어해요.”
“미역국을 싫어해?”
여사님은 무척 놀란 얼굴을 했다.
“나 지금 엄청 놀랐잖아.”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고. 해민 씨가 뭐 싫다고 말하는 게 처음이라서. 뭘 해 줘도 항상 좋다 맛있다 이러니까 정말로 음식 가리는 게 없는 사람인가 싶었는데, 해민 씨가 싫어하는 음식도 있다니까 내가 안 놀라겠어? 이제껏 뭐가 싫어도 어려워서 말을 못 했던 거라면, 이제는 호불호를 표현할 정도로 우리가 가까워졌다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기쁘고.”
호호호 하고 웃은 여사님이 또 뭐가 싫고 뭐가 좋으냐고 물었다.
“다른 건 가리지 않고 다 잘 먹어요.”
“미역을 안 좋아하는 거예요? 예전에 미역줄기 반찬으로 냈을 때 잘 먹었던 것 같은데, 있어서 그냥 먹은 건가?”
“그냥…… 생일 미역국은 안 먹고 싶어서요.”
“으응.”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여사님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아침에는 평소처럼 죽 먹고, 도련님이랑 점심 먹고 들어와서 파티 준비를 하는 거야. 그리고 저녁에 도련님 퇴근해 들어오면 파티 해요.”
“실장님 퇴근하면 피곤하실 텐데요.”
“피곤은 무슨. 웬만한 일로는 안 지치는 체력인데. 해민 씨나 내가 도련님 체력 걱정하는 것만큼 웃긴 일도 없어요.”
누가 누굴 걱정하느냐는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쥐가 고양이 생각해 주는 격이다.
“와, 해민 씨 생일 너무 기대된다. 빨리 왔으면 좋겠어.”
음식 준비하는 것도 일이라서 힘들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집에서 생일상 차리는 건 오랜만이라며 여사님은 진심으로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 ∞ ∞
왜인지 약간 초조한 기분이다.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슈트 재킷 밑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기대해요.’라고 말하며 출근하던 이환의 모습이 떠올랐다.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기대하라고 했으나, 언제나 상상 이상의 것을 보여 주는 이환이었기에 무엇을 기대하든 부질없음을 알고 있기도 했다.
오늘 하루는 평범하게 지나가게 해 주세요.
생일이라는 특별한 날이라 평소와는 분명 다른 일이 벌어질 테지만, 그렇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기준으로 평범한 생일을 보내게 해 주세요.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는 신에게 두 손을 모아 조용히 기도하였으나, 기도에 대한 응답 대신 이환이 탄 차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해민 씨. 얼른 타요.”
쌀쌀한데 왜 이렇게 일찍 나와 기다리고 있냐고 타박하며 이환이 나를 옆자리에 태웠다.
“예쁘게 입고 나왔네요.”
이환이 출근 전에 여사님에게 무슨 언질을 주었는지 모르겠으나, 점심시간에 맞춰 나갈 준비를 하려는 나를 붙잡은 여사님이 기합을 넣으며 베이지 컬러의 슈트에 셔츠와 벨트까지 골라 주셨다. 여사님의 선택이 이환의 기준에 부합하는 듯하여 다행이다.
“여사님이 골라 주셨어요.”
“여사님의 안목은 훌륭하죠.”
베이지 컬러 슈트를 입으니 아가처럼 예쁘다고 칭찬을 하는데, 그게 정말 칭찬인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해민 씨가 미역국을 싫어하는 줄 몰랐네요.”
깍지 껴 잡은 손을 조물조물 만지며 장난치던 이환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안 먹어도 아침상에 한 그릇 올려 두기라도 했어야 하나 싶은데. 서운하지는 않고요?”
“네. 그게 싫었던 거라서요. 괜찮습니다.”
생일이라는 명목으로, 생일을 기념해서, 생일이기 때문에. 미역국에는 죄가 없지만, 미역국에 따라붙는 이유가 너무나도 싫었다.
“해민 씨가 싫으면 나도 싫어요.”
원래도 딱히 좋아하지 않았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이환이 시선을 마주하며 생긋 웃었다.
“저녁에 파티 할 거라고 해서 점심은 그냥 식사만 할 겁니다. 연회장에서 하는 건 싫다고 들어서 취소했는데…….”
그걸 진짜로 예약했었어?
“해민 씨 생일 파티를 해민 씨 손으로 준비하게 두는 게 맞나 싶네요.”
“것보다 굳이 파티를 해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당연히 해야죠.”
은근슬쩍 밥만 먹고 끝내자고 이환에게 신호를 주었으나 먹히지 않았다.
“실내 연회장에서 파티를 할까, 야외 파티장을 마련할까, 놀이동산을 빌릴까, 한강이나 남산에서 불꽃놀이를 할까. 계획은 엄청 많았는데 말입니다.”
“…….”
“첫 생일인 만큼 기억에 남을 정도로 화려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여사님이 해민 씨가 편하게 즐기는 게 가장 좋은 파티라고 해서 말이죠.”
“저는 처음 뵀을 때부터 여사님이 현명하고 지혜로우시다고 생각했어요.”
뜬금없는 칭찬에 이환이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꾸밀 건지는 생각해 뒀습니까?”
오늘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인지, 번쩍번쩍한 호텔 정문 앞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꽉 쥔 손을 놓지 않고 가볍게 흔들며 이환이 물었다.
“음, 풍선이요.”
“풍선이요?”
“글자 모양 풍선을 팔더라고요. 폭죽이나 반짝이는 나중에 청소하기가 너무 귀찮을 것 같아서요.”
“즐겁게 즐길 생각을 해야지, 청소할 생각부터 하면 어떻게 합니까.”
마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타박하듯 손가락을 살짝 깨문다. 놀라서 이환을 올려다보자, 그는 무엇이 즐거운지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시선을 느낀 이환이 고개를 틀어 나를 바라보았다.
“손…… 계속 잡고 계실 거예요?”
“네.”
“사람들이 보는데요.”
“아무도 안 봅니다. 그리고 보면 또 어때요.”
어차피 오늘 하루 보고 또 볼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오늘이 지나면 기억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분명 맞는 말이긴 하지만, SG 그룹 회장님 둘째 아들인 이환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하는 내 마음도 알아주었으면 싶다.
“내가 부끄러워요?”
“아뇨.”
제가 부끄러워요.
이환이야 부끄럽든 말든 어차피 이환의 인생이니 상관없지만, 나는 좀 부끄러웠다. 타인과의 스킨십이 익숙하지도 않고, 남의 눈이 있는 곳에서의 스킨십은 더더욱 그러했다.
빼낼 타이밍을 노리며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자, 내 속내를 파악한 듯 붙잡고 있는 손아귀에 꽉 힘이 들어갔다.
호텔의 엘리베이터는 빨랐고, 약간의 기다림 끝에 탑승하여 레스토랑이 있는 층까지 바로 올라왔다. 이환을 알아본 직원이 다가와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전면 유리창, 탁 트인 전경, 사람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시작된 연주, 그리고…… 텅텅 빈 레스토랑.
“실장님.”
“네, 해민 씨.”
“레스토랑에…… 손님이 한 명도 없어요.”
장사가 안되는 날이라고 해도 이렇게 한 명도 없을 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