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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 퓨리티 (107)화 (107/172)

107화

어서 전화를 걸지 않고 뭐 하냐는 이환의 시선에 박성태가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박성태입니다. 네, 회장님 댁에 나와 있습니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혹시 나흘 전에 회장님 댁에 출장 나온 분이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 네, 도련님이 물어보셔서……. 네, 네. 그럼 혹시 창고, 아니, 네. ……네. 네, 그러겠습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휴대폰에 대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통화하던 박성태가 전화를 끊었다.

“윤 대리가 나흘 전에 왔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윤 대리라는 분을 알까. 창고 자물쇠는요?”

“지금 윤 대리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겠습니다.”

일 처리가 조금 답답했지만, 그래도 본인에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겠다는 성의를 보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저 박성태입니다. ……네. 윤 대리님, 나흘 전에 회장님 댁에 오셨지 않습니까? ……네, 그렇게 되었네요. ……네, 네. 그때 혹시 창고 자물쇠 고쳤습니까? ……네, 네. 잠시만요. 도련님. 창고 자물쇠 고리를 고쳤답니다.”

잠시 윤 대리를 기다리게 한 박성태가 이환에게 답변을 전해 주었다. 이제 되었냐는 시선에 이환이 “그러면요.” 하고 입을 열었다.

“누가 시켰는지도 물어보세요.”

“아, 윤 대리님? 창고 자물쇠 고리를 고치라고 누가 시켰는지……. ……아니요. 도련님이 궁금해하셔서요. ……네, 옆에 계십니다. ……네, 잠시만요. 사모님께서 창고 잠금장치가 고장 났다고 고쳐 달라 하셨다네요.”

“직접 들었는지도 물어봐 주세요.”

왜인지 질문이 익숙하다고 생각한 박성태가 조금 묵직해진 목소리로 윤 대리에게 물었다.

“큰 도련님께서 말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요?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지금 통화는 보고 안 올렸으면 좋겠네요. 윤 대리님도, 박 대리님도.”

“네. 말 전해 두겠습니다.”

“전 용건 끝났으니까, 박 대리님은 좀 쉬었다가 시간 맞춰 식사하러 가세요.”

“네, 들어가십시오. 도련님.”

등 뒤로 통화를 마무리하는 박성태의 목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창고 자물쇠를 고치라고 한 사람은 아버지의 새 여자. 그 말을 전달한 사람은 이정.

창고에 짐을 옮겨 두라고 시킨 사람은 아버지의 새 여자. 그 말을 전달한 사람은 역시나 이정.

언제부터 형이 심부름을 대신 전달할 정도로 아버지의 여자와 사이가 좋아졌을까.

친해진 걸까, 아니면 그 여자의 이름을 빌리고 싶었던 걸까.

그 여자는 진짜로 심부름을 부탁하긴 했을까.

같은 자리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어느 쪽이든 같잖긴 한데, 누구인지는 좀 궁금하긴 하네.”

생각이 깊어질수록 이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이정이 이환을 불러 세웠다.

“환이도 뭐 마실래?”

“아니.”

곁으로 다가간 이환이 이정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드러누웠다.

“우리 환이. 어제는 하루 종일 안 보이더니, 오늘은 왜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녀?”

“하루 종일 안 보이는데 찾을 생각은 안 했어?”

“술래잡기라도 같이 해 줄 걸 그랬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친한 척이지.

평소와 다른 이정의 태도에 이환이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말할까, 말까. 물어볼까, 말까.

마치 이환의 고민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이정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창고에 갇혀 있었다며?”

“어떻게 알았어?”

“아까 전략실 직원한테 들었어. 설마 어제 하루 종일 갇혀 있었던 거야?”

“…….”

“그 여자 짓이지? 네가 어리니까 너부터 어떻게 하고 싶었나 보다.”

속상한 표정으로 종알거리는 이정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환아. 동화에서 많이 봤지? 신데렐라를 괴롭히고 백설 공주를 죽이려고 했던 계모들. 그 여자도 그런 계모들과 아주 똑같은 새엄마인가 보다. 우리 환이도 계모에게 죽으면 어쩌지? 공주님은 왕자님이 구해 주던데, 우리 환이는 왕자님이잖아. 왕자님은…… 누가 구해 주지?”

순간 감이 왔다.

이 새끼구나.

이 새끼가 그랬구나.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동생에게 아는 척을 하고, 반갑게 맞이하고, 말을 걸고, 관심을 준다 싶었는데. 이쪽의 반응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완벽하게 감추지 못한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범인은 이정이라고.

순간의 재미는 아니다. 그럴 리 없지만 진짜 순간의 재미를 위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면, 며칠 전부터 여자의 이름을 팔아 가며 창고의 잠금장치를 고치는 등 나름의 알리바이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나름대로 알리바이라며 머리를 굴려 댄 결과라는 사실이 짠해서 더욱 웃기다.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이환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갸우뚱 머리를 기울이자 이정이 눈 끝을 접어 웃었다.

“계모가 우리 환이를 괴롭힌 거잖아. 앞으로 더 괴롭히면 어떻게 해. 아버지랑 형 몰래 환이를 막 괴롭히고 구박하고 다치게 하고. 계모가 원래 그렇잖아.”

앞으로 더 괴롭히겠다는 뜻인가? 괴롭히고 구박하고 다치게 만들겠다는 선전 포고인가.

이환은 눈을 끔뻑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새끼, 지금…… 해 보자는 건가?

∞ ∞ ∞

범인은 특정 지었으나,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얻지 못했다.

왜.

왜 이정은 자신을 창고에 가두었을까.

왜 이정은 아버지의 여자에게로 그 책임을 미루려 했을까. 수많은 고용인 중 한 명의 실수로 떠넘겼어도 될 일인데, 왜 하필이면 그 여자였을까.

왜 이정은 ‘계모’라는 단어에 동화 속 계모의 프레임을 씌우려 했을까.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이정이 그리고 있는 그림이 있음은 분명했다.

이환은 이정에게 따져 묻는 대신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이정의 말을 들어 보면 앞으로도 무언가 일을 벌이겠다는 뉘앙스였기에, 한 번으로 알 수 없다면 두 번 세 번 겪어 보며 이정의 목적을 파악해 보겠다는 의도였다.

그 일 이후로 이환에게 불운한 일이 연이어 벌어졌다. 이 층 베란다에서 머리 위로 화분이 떨어지고, 정원에서 타고 놀던 자전거의 브레이크가 고장 나 나뒹굴기도 하고, 하굣길에 학교 앞에서 갑자기 오토바이가 달려와 부딪치기도 했다.

다행히 알파의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크게 다치는 일은 면하고 있었으나, 그때마다 찾아와 ‘역시 계모가 나쁘다. 계모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 같은 말을 지껄이는 이정의 행동이 이환을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단순한 장난을 넘어섰단 말이지.”

이 층에서 화분이 떨어지고, 집에서만 타는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는 건 이정이 충분히 손 쓸 수 있다. 하지만 학교 앞에서 오토바이가 달려드는 건 사람을 샀다는 이야기가 된다. ‘청부’로 넘어간다면 더 이상 장난의 수준이 아니었다.

제 머리를 향해 벽돌이 날아왔을 때, 이환은 이정보다 앞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 계모는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우리 집 계모도 동화 속 계모처럼 나쁜 계모야?”

그때 이환은 이정의 환히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어 낸 표정이었다.

이환의 만들어 낸 표정으로 이정은 만족했고, 이정의 만족으로 이환은 그의 머릿속을 어렴풋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이환은 확신을 얻고자 몇 번의 시험을 거쳤고, 마침내 확신이 굳어졌을 때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 형이 저를 괴롭혀요.”

이환의 고자질에 아버지는 귀찮아하면서도 언제나 애어른 같았던 아들의 처음 보는 모습이 신기한 듯 픽 웃음을 흘렸다.

“형제끼리 다투고 싸울 수도 있지. 사내놈이 아비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이르면 되겠냐.”

“이틀 동안 창고에 가두고, 머리 위로 화분을 떨어뜨리고, 자전거 브레이크를 고장 내고, 오토바이로 치라고 청부하고, 벽돌을 던지는 것도 형제끼리 싸움이에요?”

“…….”

이환의 말에 그의 아버지이자 SG 그룹의 회장인 이수한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럼 제가 형 대가리를 깨 놓고 차로 밀어 버려도 괜찮겠네요. 저는 이게 도를 넘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참다가 말씀드린 것인데, 형제끼리의 다툼으로 웃고 넘길 수준인 줄 알았다면 일찍 되갚아 줬을 거예요.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자, 잠깐.”

꾸벅 고개를 수그려 인사하고 깔끔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이환을 이수한이 허둥거리며 붙잡아 앉혔다.

“그걸 왜 정이 탓이라고 하는 거냐. 아니, 애초에 네가 그런 일을 당하는 동안 주변 놈들은 대체 뭘 했어!”

“다 집 안에서 일어난 일인데, 집에서야 사람이 따라다니질 않으니까요. 그리고 오토바이 사고는 하굣길에 학교 정문 앞에서 일어난 거고요. 형 말에 따르면 계모가 그랬다고 하던데, 그냥 그 여자가 한 일이라고 생각할까요. 왜 굳이 형을 지목했느냐고 한다면, 수가 너무 뻔했거든요.”

“…….”

“형은 상상력이 빈곤해요. 항상 같은 패턴으로 일을 벌이고 다가와 계모 짓이라고 속닥거리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러면 누가 믿겠어요.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닌데.”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이환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치졸해요. 학교에서 힘없는 동급생 하나를 찍어 괴롭히는 것으로 유명했대요. 그러면서도 꼭 본인이 움직이지 않고 주변 친구들을 시켜 괴롭히게 만들고, 자기는 뒤에서 지켜보며 즐거워했다던데. 나름 머리를 굴려서 흑막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나 보지만, 그냥 치졸한 거죠. 흑막이나 모사를 하기엔 두뇌가 딸려요. 창의성도 없고, 완벽하지도 못해요. 이제까지 형에게 책임이 돌아오지 않은 건, 형 뒤에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지 형이 완벽하거나 똑똑하게 일을 처리해서는 아닌데 그걸 몰라요.”

그러니 멍청한 거죠, 라며 시니컬하게 조잘거리는 둘째 아들을 이수한이 멍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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