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좋을 것 같아요. 빌라는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아, 이게 빌라입니다.”
사진을 한참 넘기던 이환이 어떤 집 내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부터 쭉 넘기며 보면 됩니다.”
천천히 살펴보라며 태블릿을 내게 넘겨준 이환이 슬쩍 침대 위로 엉덩이를 걸치고 내 옆에 기대었다.
“한남동에 소유한 빌라가 하나 있습니다. 그래도 들어가기 전에 인테리어는 다시 해야겠지만.”
“와아. 그럼 지금 보여 주시는 이게 실장님 집이에요? 집이 또 있는 거예요?”
“네. 여기 말고도 집하고 빌딩 몇 개 받아 둔 게 더 있긴 합니다.”
“와.”
조물주보다 더 대단한 건물주! 심지어 빌딩!
“실장님이 부자라는 게 확 느껴졌어요.”
“하하하. 과장이 아니라 진짜 감탄하는 얼굴이네요.”
“네. 진짜 감탄 중이에요.”
이환이 회장님과 거래하며 대가를 받아 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집과 빌딩을 몇 채나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SG 그룹 사이즈가 있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었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빌라는 좀 좁습니다. 단층이기 때문에 주택과 비교하기가 어렵죠.”
“지금 집이 과하게 넓은 게 아니고요?”
“그리 넓지도 않습니다. 그냥 보통 수준이죠.”
“와아.”
그게 넓은 게 아니면, 진짜 넓은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운동장에서 사나?
“이 빌라도 엄청 좋아 보여요.”
사진으로 마법을 부린 게 아니라면, 진짜 정직하게 찍힌 사진이라면. 이 빌라도 과하게 넓어 보였다. 방도 한두 개가 아닌 듯하고, 사진 속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도 대단해 보이고.
“마스터 룸은 침실로 쓰고. 서브 룸은 내 서재 하나, 해민 씨 공간 하나, 그리고 드레스 룸이나 홈시어터를 들여 놔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방이 엄청 많은가 봐요.”
“마스터 룸 한 개와 서브 룸 네 개뿐입니다. 좁아요.”
방이 다섯 개면 엄청 많은데?
“여사님 방은요?”
다 좋은데 여사님이 빠졌다. 그것을 지적하자 이환이 으음, 하고 잠시 말을 끌었다.
“이사를 가면 아마 여사님은 따라오지 않으실 겁니다.”
“왜요?”
“이제 제 뒤치다꺼리도 그만하실 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재작년부터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도 계속 붙잡아 두었으니. 아마 이사를 가게 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따로 사실 듯싶네요.”
“아…….”
생각해 보니 여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긴 했다. 앞으로 길어 봤자 일이 년이라고. 그 뒤에는 본인도 노후를 즐기며 살 거라고. 언제까지 일만 하다 죽을 수는 없지 않냐고.
그때는 그냥 나를 위로하고 계속 일을 하게 만들려고 하는 소리인가 했었는데, 일이 년 전부터 이환에게 말을 하셨던 거라면 여사님의 의사가 확고한 게 분명했다.
“아쉬우시겠어요.”
“하지만 여사님도 고생 그만하고 쉬시긴 해야죠. 나 편하자고 여사님을 계속 고생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여사님이 쉬겠다고 하실 때까지만이라도 지금 집에서 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기어코 여사님을 더 부려 먹겠다는 말입니까?”
“부리는 건 실장님이고요.”
누가 들으면 내가 노인 학대라도 하는 줄 알겠네!
부릅뜬 눈에 힘을 주어 이환을 쏘아보자, 농담이었다며 그가 손을 내저었다.
“나도 새로운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여사님이 함께 계셔 주시는 게 좋죠. 하지만 그만 쉬게 해 드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 때문에 여사님이 무리하는 것도 싫고요. 지금까지 계속 일만 하셨으니, 이제 친구분들과 교류도 하고 여행도 하며 시간을 보내게 해 드리는 편이 여사님에게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사님의 공백을 생각하면 아쉬우면서도, 여사님을 위해서라면 그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듯했다. 무엇이 여사님에게 더 좋은 선택일지는, 겨우 몇 달 함께 지낸 나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같이 지내 온 이환이 더 진지하게 고민했을 테고.
“그럼 집에 가셔서 여사님과 상의해 보세요. 저보다는 여사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시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이사 문제도 그렇고, 이사할 집도 그렇고.”
“그래도 신혼집인데, 해민 씨와 상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뭔 집이요?
잠시 머릿속에 버퍼링이 생겼다. 둥그렇게 뜬 눈을 끔뻑거리며 정지 상태로 있자, 이환이 나를 따라 눈을 깜빡거렸다.
“생각해 보니 조금 좁은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 신혼 때는 바짝 붙어 있어야 하니까. 좁으면 항상 같이 붙어서 지낼 수 있잖아요.”
방 다섯 개짜리 집에서는 붙어 있지 않아도 된다고! 그건 단칸방에서 살림 차리는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지.
아니, 그보다 왜 갑자기 신혼집이란 말인가.
“왜…… 신혼집을…….”
실장님 결혼하세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눈치로 보아 누군가와 결혼하는 이환의 신혼집에 내가 들어가 사는 게 아니라, 이환과 내 신혼집을 말하고 있구나. 대충 그런 의미가 느껴진 탓이었다. 이환이 내게 몇 번이고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도 하고.
문제는 왜 갑자기 ‘신혼집’이냐는 거지.
내가 이환과 몇 번의 히트 사이클을 같이 보내기도 했고, 그러면서 몇 번 정도 같이 자기도 했지만. 섹스 몇 번 했다고 결혼하는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애초에 결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결혼 이야기를 할 만큼의 관계도 아니고.
“아, 당황했습니까?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그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였음을 이환이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나의 이 당혹스러움을 설명해야 했다면, 추가로 더 당혹스러워질 뻔했다.
“네. 조금, 아니, 많이 당혹스럽네요.”
“속상해하지 말아요. 프러포즈는 나중에 정식으로 할 겁니다.”
“네?”
“집 매물 알아보고 공사를 하게 되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집부터 얼른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해민 씨가 빌라를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천천히 이야기했어도 좋았을 텐데, 마음이 급했습니다.”
“네?”
원치 않게 또다시 ‘네’봇이 되어 버렸다.
“집은 늘려 가는 거라고 듣긴 했습니다. 작은 집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죠.”
그러니까 그런 말은 단칸방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부부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라니까. 방 다섯 개짜리 고급 빌라에 신혼집을 장만하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라고요.
아니, 그보다 나는 왜 신혼이니 결혼이니 하는 말을 인정하듯이 생각하고 있는 거냐고.
“퇴원한 뒤에 빌라에 한번 가 봅시다. 직접 가서 봐야 어떻게 인테리어를 할 건지도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잠깐…….”
“직접 가서 보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으니, 매물은 더 찾아보겠습니다. 주택도 괜찮다고 한다면 평창동 쪽도 나쁘지 않은데.”
“주택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서울 근교에 땅 사서 집 짓는 것도 생각해 봐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원한다면 수영장도 만들 수 있고.”
“저 수영 못하는데.”
“물장구치면서 놀아도 됩니다.”
물장구의 문제가 아닌데, 자꾸 대화가 다른 쪽으로 흘렀다. 뭔가를 지적하고 싶은데, 아주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한번 어긋난 대화는 붙잡을 새도 없이 흘러가 정원과 텃밭의 유용성에 이르렀고, 어느새 우리는 텃밭에 무엇을 심는 게 좋은지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 ∞ ∞
퇴원은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졌다.
때맞춰 나오는 식사를 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환이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은 뒤 신발을 신고 병실을 나오면 끝이었다.
입원할 당시에는 의식이 없는 맨몸뚱이였으나, 그 뒤로 집에서 가져온 속옷과 카디건, 노트북, 책 등의 개인 물품도 있고 여사님이 챙겨 주셨던 반찬통도 냉장고에 그대로 있는데.
짐 챙길 생각은 하지 않고 나만 씻기고 입히는 이환에게 혹시나 싶어 묻자, 나중에 병실을 정리하며 알아서 짐을 모아 보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VIP 병실의 서비스인지, 아니면 이환이 업무 외의 일을 시킨 건지, 그도 아니면 따로 사람을 시켜 짐을 받아 오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른 짐은 몰라도 내 속옷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었기에, 가장 값나가는 노트북과 후줄근한 속옷 뭉치만 다급히 챙겨 들었다.
“그게 꼭 챙겨야 하는 물건입니까?”
그런 나를 만류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던 이환이 웃으며 물었다.
“노트북은 비싸잖아요. 그리고 속옷은…… 남의 손에 맡기기엔 창피하니까.”
“그 노트북보다 비싼 물건들이 병실에 수두룩한데…….”
옆에서 한마디를 덧붙이던 백윤경이 이환의 째림에 말끝을 흐렸다.
처음에는 엄청 진중하고 유능해 보였던 백윤경.
얼굴을 익히고 종종 말을 섞으며 몇 달의 시간을 보내자, 그의 유능함만큼이나 깐족거림도 수준급임을 알게 되었다.
진중함은 꾸며진 첫인상 같은 거였지.
조금 가까이에서 지내다 보니 그 진중함 대신 유쾌함을 알게 되었다. 너무 유쾌한 나머지 가끔 이환이 격하게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실장님이 출근 안 하셔서, 백 비서님도 휴가셨어요?”
“비서가 휴가라뇨. 상사가 놀러 가도 비서는 일하고, 상사가 밥을 먹어도 비서는 일합니다. 비서의 숙명이죠.”
숙명까지야.
그래도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특히나 백윤경은 회사 일 외에도 이환의 개인적인 잡무에 동원되는 경우를 꽤 보았기에, 더 고생이 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실장님 앞으로 회사 안 나가신다던데. 그럼 백 비서님도 같이 퇴사하세요?”
돈 벌겠다고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상사 때문에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다면 얼마나 슬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