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내 문제도 아닌데 왜 집에 갇혀 있어야 하냐는 불만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개인적으로 외출하여 돌아다니는 취미도 없거니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원인이 아님에도 불합리한 일이나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기 때문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돈 없고 빽 없고 힘없으면, 괜히 길 가다가 뺨 맞아도 찍소리 못하는 세상 아닌가.
그래도 피해를 입게 두지 않고 경호원까지 붙여서 보호해 준다고 하니, 상황이 잘 정리될 때까지 몸조심하는 게 최선이었다.
집과 일터가 같은 공간이라는 점이 오늘따라 큰 장점으로 다가왔다.
길거리에서 납치 한번 당해 보니까, 나 혼자 조심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나라 치안이 아무리 좋아도, 작정하고 범죄를 일으킨다면 그냥 죽는 거지. 뒤늦게 범인 잡아 봤자 내가 죽거나 다치면 무슨 소용인가.
이번 일을 통해 나는 내 몸뚱이와 삶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게는 꿈도 미래도 없고, 죽느니만 못한 삶이라고도 생각했는데.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살고 싶다고. 꿈도 미래도 없지만, 그런 내게도 현재가 있다고.
머리 한 번 깨지고 삶을 돌아보는 계기를 얻었다. 싼값에 깨달음을 얻었으나, 역시나 이정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 ∞ ∞
이제 SG 건설에 출근하는 일 없이, 원래 자신의 회사 일에만 매진하면 된다던 이환은 그 뒤로도 출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내가 출근하지 않아도 잘 돌아가던 회사입니다. 새삼스럽게 출근할 필요는 없죠.”
왜 출근하지 않느냐는 내 물음에 이환이 답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출근할 필요가 없다면 출근하지 않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집에서 일을 할 거면 회사는 왜 만들었지?
회사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없기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언제 회사에 취직을 해 봤어야 할지. 만날 몸으로 때우는 일만 해 온 내게는 대표가 출근하지 않고도 멀쩡히 돌아가는 회사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중간에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다며 하루 외출한 일을 제외하고 내내 집에서 뭉그적거리던 이환이 어느 날 외출을 제안했다.
며칠간 집에서 삼시 세끼를 먹었더니 서서히 여사님의 시선이 싸늘해진다고.
모처럼 밖에서 점심을 먹고, 이환이 운전하는 차에 탑승하여 도달한 곳은 커다란 건물이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정집으로 보이는 현관문 앞에 도달하는 동안 몇 차례의 보안 절차를 거쳤다.
“여긴 어디예요?”
소리를 낮춰 묻자, 이환이 대답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일단 들어갑시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는 말에 어딘지도 모르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 그냥 신발 신고 들어가요. 비워 둔 지 꽤 되어서 먼지가 많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아무리 돼지우리 같은 집이라도 신발을 벗는 게 한국인 아닌가. 머뭇거리며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이환이 시범을 보이듯 구둣발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질끈 눈을 감고 신발을 신은 상태로 이환의 뒤를 따랐다.
“실장님?”
“이리 와요.”
회사 사무실도 아니고, 엄연히 가정집으로 보이는데. 설마 남의 집을 이렇게 막 신발 신고 들어와서 활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환의 목소리를 따라 걷자, 거실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양옆으로 걷어 내고 유리문을 활짝 여는 이환이 보였다.
“실장님.”
“그때 말했던 빌라입니다.”
“……여기가요?”
“네.”
이환이 집주인이라 다행이다. 그러니까 신발 신고 다니라고 했을 테지만.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 가끔 와서 지내던 곳인데. 그마저도 한 삼사 년은 그냥 비워 둔 것 같네요. 인테리어도 그렇고, 가구도 싹 바꿔야 할 겁니다.”
“멀쩡해 보이는데요?”
이환의 말처럼 오래 비워 둔 탓에 먼지가 살짝 내려앉긴 했지만, 그건 청소만 하면 해결될 문제였다. 쓸고 닦으면 바로 사람이 살아도 될 정도인데, 무슨 인테리어를 다시 하고 가구를 다시 사야 한다는 건지. 이해하기도, 동의하기도 어려웠다.
“뷰는 좋죠?”
밖이 훤히 보이는 발코니에 나란히 서서 저 멀리 보이는 한강을 응시했다.
“한강 보이는 집은 엄청 비싸다던데.”
“원하는 걸 가지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법이죠.”
“한강뷰를 원하신 거예요?”
“딱히 한강뷰를 원했던 건 아니고. 다른 건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습니까. 창문을 열었을 때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보다는 앞이 확 트여 있는 게 더 좋으니까요.”
뭔가 이해는 되지만 공감은 되지 않는 발언이었다.
풍경이나 조망은 내가 집을 고른다면 가장 후순위의 조건이었을 만큼, 크게 관심도 없고 상관도 없는 부분이었다. 오로지 집값, 방세에만 관심을 가졌겠지.
“답답한 건 싫잖아요. 창밖을 볼 때만이라도 좀 확 트이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
“오기 전에는 좁다고 생각해서 내키지 않았는데, 직접 와서 다시 보니 또 괜찮네요.”
“가끔 와서 지내셨다면서, 그때도 좁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땐 혼자 와서 혼자 지냈던 거니까요. 둘이 사는 건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
“열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 넘게 아버지와 형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나도 챙길 만큼 챙겼던 거래인지라, 막연히 나 혼자만의 희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자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갑갑하고 짜증스러운 마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 갑갑하고 짜증스러웠던 마음을 한강을 보면서 해소했다는 건가.
“이어져 있던 가족을 끊어 낸 덕분인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은 덕분인지. 이제는 눈앞에 콘크리트 벽이 보여도, 넓지 않은 집에서 살아도, 한강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죽을 때까지 이어질 연극도 아니었고,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들어서 적절한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왜 조금 더 일찍 손 떼지 않았을까 잠깐 후회될 정도로 홀가분하기도 하고.”
“……회장님이랑은 말씀 잘 나누고 오셨어요? 이제 완전히 끝난 거예요?”
“잘 나누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내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끝이지. 이 판을 만들고 실행하는 건 납니다. 아버지가 어떤 대가를 준다고 해도 내가 싫으면 끝인 거예요. 아버지가 반대하고 용납하지 못한다고 해도, 선택권은 아버지에게 있는 게 아니니까요.”
“혹시…… 통보하고 오신 건…….”
설마 하는 마음이지만, 혹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온 게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를 던지고 온 것은 아닌지. 잠깐 의심이 들었다. 아니다. ‘설마’라고 했지만, 사실 그쪽으로 무게가 많이 기운 추측이었다.
“상의든 통보든.”
어느 쪽이든 별 상관없다는 투로 이환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아버지는 힘겨루기를 시도하겠지만, 결국 인정하게 될 겁니다.”
“실장님이 만들고 실장님만이 움직일 수 있는 판이라는 사실을요?”
“해민 씨는 감탄할 정도로 현명하다고, 내가 말했던가요.”
몸을 돌려 나를 내려다보며 이환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올라온 손이 쓱쓱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고 뺨을 감쌌다.
“힘겨루기는 뭐예요?”
“뭔가 압박을 넣는 겁니다. 나 혹은 내 회사에. 돈으로든 법으로든 사람으로든, 귀찮게 만들겠죠.”
“불법적인 일 하세요?”
“아뇨. 하지만 한국은 돈만 있으면 합법을 불법으로 만들고,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기 쉬운 나라입니다. 돈에 의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기도 하고요.”
서글프지만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돈 없는 게 죄’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니까.
“그럼 실장님, 감옥 가세요?”
“네?”
“돈으로 불법 만드신다기에……. 아니에요?”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내 뺨을 감싼 손에 힘을 주어 장난스럽게 볼을 꾸욱꾸욱 눌러 댔다.
“안 갑니다. 감옥.”
“하지만 회장님이…….”
“날 건드린다면 장남 잃을 각오를 해야 할 텐데, 아버지는 그런 위험 부담을 안고 싶지 않을 겁니다.”
“아……, 부회장님.”
회장님이 장남을 많이 좋아했었지.
차남도 좀 좋아해 주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잘난 사람인데. 그깟 장남이 뭐라고.
칫, 하고 혀를 차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보다는 해민 씨가 걱정입니다.”
“저요?”
“정면 승부가 어려우면 약점을 찾기 마련이거든요.”
“……제가 ……약점이에요?”
“네.”
“함정 같은 건가요?”
내가 지뢰인가? 코끝을 찡그리며 머쓱하게 묻자 이환이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 약점입니다. 내가 질 수밖에 없는, 내 유일한 취약점이죠.”
“지금…… 저 말씀 하시는 거죠?”
확인차 내뱉은 물음에 이환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아버지 성격상 이대로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결국 방법이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가 해민 씨를 만나러 오겠죠.”
“으음…….”
그건 좀 곤란한데.
예전에 호텔 개관식에서 사모님을 마주했을 때 상상만 하고 실현되지 않았던, 봉투가 날아오는 그런 상황이 일어나는 건가.
“이제까지 잠잠하던 내가 변하게 된 이유를 해민 씨에게서 찾으려 할 겁니다.”
“물 뿌리고 봉투 날리고 그러나요? 내 아들이랑 헤어져. 이런 거?”
내 말에 이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몸을 구부리고 한참을 웃어 대던 그가 숨을 고르며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온 눈가를 훔쳤다.
“그것도 드라마에서 나옵니까?”
“네. 클리셰? 그런 거라던데요. 요즘은 좀 변형되어서 막 김치 싸대기도 나오고 한대요.”
“그건 뭔지 모르겠네요.”
이환은 김치 싸대기 짤을 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게 대놓고 물을 뿌리거나 손찌검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봉투는 줄지도 모르겠네요. 가장 편한 게 돈으로 해결하는 방법이니까. 회유와 협박을 적절히 섞어 해민 씨를 압박할 겁니다.”
“몰래 납치해서 어디에 묻고 그러지는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