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냥 그러려니 합시다. 이제는 산타클로스가 올 일도 없으니까. 것보다는 해민 씨와 함께 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니 파티에 힘 좀 줘야겠네요.”
무슨 힘을 주냐고, 적당히 하라고 이환을 만류해야 하는데. 사실 조금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의 사람들은 모두 즐겁고 상기된 얼굴이었다. 거리는 인파로 복잡하고, 흘러나오는 캐럴 송으로 떠들썩하고, 술자리며 선물이며 피곤하다고 하면서도 설레고 기대하는 얼굴들.
예수님 생일인데 정작 예수님은 이용만 당할 뿐, 산타클로스가 주인공처럼 되어 버린 크리스마스.
매년 유난이라며 짜증스러워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근심 걱정 없이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친한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외식을 하고 술을 마시는 여유로움이.
“크리스마스 파티는 생일 파티랑 달라요?”
“모여서 먹고 노는 건 비슷하지만, 컨셉이 다르죠.”
“컨셉……이요?”
“크리스마스 하면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이 있어야 하고. 침대 머리맡에 걸어 둘 커다란 양말도 있어야 하고. 아, 해민 씨를 위해서 산타클로스랑 루돌프도 섭외해야겠네요.”
“섭외요?”
“그런 거 하는 이벤트 업체가 있을 겁니다. 현실성을 반영해서 썰매 타고 오라고 해야겠습니다.”
“그건 좀…….”
아무리 돈이 오간다지만, 그래도 서로가 민망하지 않을까.
“이번에도 제가 꾸며요?”
“이번에는 그냥 돈을 씁시다. 한 번 정도는 즐기면서 할 수 있지만, 매번 하려면 피곤해요. 이럴 때를 위해 우리는 돈을 벌어서 전문직을 고용하는 겁니다.”
어른스럽게 말하는 이환을 선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진짜 어른처럼 보였어요.”
“내가 아이처럼 순수하고 귀여워도, 듬직한 어른입니다.”
“……아, 네.”
“왜 대답이 시원찮습니까.”
“아뇨. 어른이시라고요. 어른이 맞긴 하지만, 아무튼, 오늘따라 유난히, 특별히, 더 어른처럼 느껴졌어요.”
이환의 입으로 들으니 살짝 저렴해진 느낌이지만, 아무튼 그는 어른이었다. 돈은 이렇게 쓰는 거지, 하고 보여 주는 성공한 어른. 이환은 성공을 할 것도 없이 원래부터 돈이 많았겠지만, 아무튼.
“크리스마스,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처음으로,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졌다.
∞ ∞ ∞
“그래서…… 윽, 전문직을 부르겠대요.”
“해민 씨. 잘못 넣었어. 빼서 다시 넣어 봐.”
“여기 아니에요?”
“굵기가 달라. 잘 보고 넣어요.”
크리스마스트리를 조립하자는 여사님의 말에 창고에서 꺼내 온 상자를 열었다.
초록색 플라스틱 나무들을 거실에 늘어놓고 나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암담해졌다. 그래도 여사님에게만 맡겨 둘 수 없어서 힘쓰는 일은 내가 하겠다며 손을 걷어붙였는데, 창의력이 부족한지 손이 똥손인지 도통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기둥부터 세워요. 그래야 돼.”
뼈대를 만든 뒤에 나뭇가지를 꽂으면 쉽다는 여사님의 조언에 기둥을 찾아 뒤적거렸다.
“그럼 파티 준비할 필요도 없고, 요리도 안 해도 되겠네?”
“……아마도요?”
“그러면 굳이 내가 있을 필요 없으니까, 도련님이랑 해민 씨랑 둘이 알콩달콩 지내면 되겠다.”
“네?”
“뭐가 ‘네?’야. 둘이 노는데 괜히 늙은이가 껴 있으면 눈치 없다는 소리나 듣지.”
“아니에요.”
“그리고 나도 내 친구들이랑 노는 게 재미있지, 도련님이랑 해민 씨하고 놀면 재미없어.”
“아…….”
여기서 또 여사님의 단호함이.
눈치껏 피해 주겠다고 말씀하시지만, 같이 놀면 재미없다는 말씀 또한 90퍼센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렇……지. 딱히 이환이나 내가 같이 있다고 해도 여사님이 재미있지는 않겠지. 괜히 옆에서 치다꺼리하시느라 재미있기는커녕 피곤하시기만 할 테지.
“크리스마스 때 송도연이가 콘서트를 한다던데. 잘됐네. 그거 보러 가야겠다.”
“콘……서트요?”
“응. 아는 동생이 저번에 호캉스 데려가 줘서 고맙다고, 표 생겼는데 같이 가자는 거 됐다고 했거든. 그런데 음식 할 필요 없으면 내가 굳이 집에 같이 있지 않아도 되잖아. 웬일이야, 진짜. 해민 씨가 있으니 내가 이렇게 든든하다.”
이환이랑 둘이 지내라고 자리를 피해 주시는 건지, 아니면 이환을 나에게 맡기고 외출하시는 건지. 살짝 의미가 아리송했다. 왜인지 베이비시터가 된 기분을 느꼈다.
“진짜…… 콘서트 가시려고요?”
“왜? 가지 말까? 나 가면 해민 씨가 서운할까? 그래도 도련님이랑 둘이 딱 달라붙어서 지내는 게 해민 씨도 좋지 않아요?”
딱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데.
내 기분을 염려하듯 바라보는 여사님의 시선에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여사님이랑 같이 보내는 것도 좋고, 여사님이 콘서트 가시는 것도 좋아요.”
“원래 크리스마스는 애인이랑 알콩달콩 보내는 거야. 괜히 크리스마스에 모텔이며 호텔이 만실이겠어.”
“네?”
“아니, 그냥 그렇다고.”
갑작스러운 모텔 발언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멋쩍게 웃은 여사님이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기둥을 세우자 크리스마스트리가 서서히 모양을 찾아 갔다. 뾰족뾰족한 나뭇잎이 달린 가지들을 홈에 맞춰 끼우자, 엄청난 크기의 플라스틱 나무가 거실을 차지했다.
“엄청 크네요.”
“저기 밖에 커다란 나무 있지? 그걸 크리스마스트리로 장식하겠다는 걸 겨우 말려서 그나마 이걸로 절충한 거야. 하마터면 매년 사다리 탈 뻔했어.”
이제는 나이 먹어서 관절도 안 좋은데, 괜히 사다리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그냥 아작나는 거라는 여사님의 살벌한 농담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나무는 만들었으니까, 이제 꾸미기만 하면 되겠네.”
빈 상자를 모아 정리하고, 장식을 모아 둔 상자를 가져왔다.
“이건 또 어떻게 달죠?”
“그냥 해민 씨 마음대로.”
방법이 정해진 것은 아니니 달고 싶은 곳에 달고 싶은 장식을 걸면 된다고 여사님이 쉽게 말씀하셨다.
“인터넷에 크리스마스트리 쳐 봐. 이미지 많이 나오니까 보고 대충 그렇게 하면 돼.”
“‘대충’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엄청 어렵게 느껴져요.”
“어려울 거 하나 없어. 정 모르겠으면, 그냥 일단 몽땅 다 걸어 놔요. 나중에 전구 두르면 괜찮아 보여.”
경험이 담긴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장식하고 있어. 나는 내려가서 사슴 좀 데려올게요.”
“네?”
뭘 데려와요?
무언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여사님은 내 질문을 듣지 못했는지 지하 창고로 내려가셨다.
이곳에서 지낸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사슴을 키우고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역시 잘못 들은 거겠지.
미심쩍은 의문을 밀어 두고 내 앞에 놓인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해결하기로 했다.
나는 센스도 없고 개성도 없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꾸며야지. 같은 장식을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아 빈 곳만 없게 하면 그래도 중간은 가지 않을까.
빨간색과 은색의 장식 볼을 촘촘하게 달고, 중간중간 리본도 매달아 주고, 사탕 모양의 장식도 걸어 놓고. 비둘기나 아기 천사, 선물 상자 같은 모형 장식을 여기저기 흩뿌리듯 걸고 있는데,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사슴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사슴이었다.
그냥 사슴도 아니고 뿔 난 사슴.
심지어 두 마리.
양팔에 끼고 온 사슴 두 마리를 내려놓은 여사님이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어휴, 이 망할 놈의 사슴.”
“…….”
“이놈의 사슴은 대체 왜 사 와 가지고.”
아마도 이환을 향한 원망이겠지.
여사님의 한탄을 모른 척하며 하얀색 사슴을 구경했다. 비록 눈 코 입은 없었으나 누가 봐도 사슴이라고 말할 만큼 잘 만들어진 장식품은 마치 엄마 사슴, 아기 사슴처럼 크기가 달랐다. 큰 사슴은 뿔 길이까지 합치면 내 어깨 언저리에 닿을 크기였고, 작은 사슴은 허리 정도였다.
“귀여워요.”
“잠깐 볼 때만 귀엽지, 얘들이 창고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요. 뿔 부러질까 봐 겹쳐 놓지도 못하고. 아주 애물단지라니까.”
“하, 하, 하.”
애환이 담긴 여사님의 푸념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어디 보자. 장식 예쁘게 잘했네.”
“잘했는지는 모르겠고, 열심히 했어요.”
“잘했어. 예뻐. 이제 여기에 전구만 두르면 되겠네.”
공 모양의 전구가 과실처럼 달린 전선을 박스에서 꺼내 크리스마스트리에 빙글빙글 감았다.
“해민 씨, 멀티탭 하나만 가져다줄래요? 불 들어오게 하려면 코드 꽂아야 하니까.”
“네.”
“그래. 나는 사슴 좀 닦아야겠다.”
끝까지 “망할 놈의 사슴.” 하고 원망 어린 말을 내뱉은 여사님이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여사님이 물티슈를 가져와 사슴의 먼지를 닦아 내는 동안, 멀티탭 하나를 찾아와 콘센트에 꽂고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를 연결했다.
“여기 사슴도.”
“사슴도 불 들어와요?”
“응.”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 쪽으로 트리를 세우고 그 옆에 두 마리의 사슴도 나란히 세워 두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게 커튼을 내리고 거실의 불을 끄자, 전원을 켠 전구가 반짝거리며 빛을 밝혔다.
“와……, 예뻐요.”
“그나마 보는 맛이라도 있으니 이 고생을 하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여사님이 겨우 끝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해민 씨 사슴이야. 앞으로 잘 챙겨요.”
“……네?”
“내가 언제까지 같이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 앞으로는 해민 씨 몫이지. 저게 애물단지이긴 하지만, 물 건너 온 거라고 하더라고. 저놈의 사슴이 뭐라고 해외에서까지 사 오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지만, 아무튼. 마음에 들면 잘 뒀다가 계속 써먹고, 정 귀찮으면 나중에 도련님 몰래 버려 버려.”
아니, 조금 전에는 내 몫이라고 하더니 은근히 버릴 것을 종용하신다고요?
여사님의 진심을 살짝 엿본 기분이다.
이환도 그렇지만, 여사님도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겠지.
하나둘씩 내려놓는 여사님을 볼 때마다 약간의 안쓰러움과 차마 진실을 알려드리지 못하는 죄송함, 그리고 하나둘씩 내려놓는 그것들이 어째서 내게로 떠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와 같은 의문이 살짝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