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손님하고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 차 한 잔씩 마시고 있어. 떡국은 먹고 왔는지 모르겠네. 넉넉히 했으니 빈속인 사람들은 말해. 떡국 한 그릇 내주지 못할 만큼 박한 집안은 아니니까.”
나름은 농담이라고 내뱉은 말에 사람들이 껄껄 웃으며 넙죽넙죽 고개를 숙였다. 유쾌함이 아닌 처세에서 나오는 웃음은 애달프기까지 했다.
미닫이문을 닫고 나온 회장님이 다시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걸었다.
설마…… 집 구경을 시켜 주시려고 그러나.
이 넓은 집을 한 차례 돌아볼 생각은 아니시겠지, 라며 회장님의 의중을 의심하고 있을 때,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간 회장님이 소파에 앉았다. 목적지인가 보다.
“넌 왜 따라 들어오느냐.”
“굳이 따라오지 말란 말씀은 안 하셔서요. 앉아요, 해민 씨.”
이환이 내 손을 붙잡아 회장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회장님이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인터폰 같은 것으로 차를 가져오라 말했다.
잠시의 침묵이 생겨났다. 소파에 기대어 팔걸이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던 회장님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엇을 보았느냐.”
“……네?”
갑자기 선문답을요?
선문답도 선문답 나름이지 너무 생뚱맞은데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라 눈만 끔뻑거리자, 이심전심이 통하지 않음에 실망한 회장님이 쯧쯧쯧 하고 혀를 찼다.
“응접실에 앉아 있던 놈들 말이다.”
“네.”
“하나같이 내 밑에서 삼십 년 넘게 일해 온 놈들이다. 계열사고 뭐고 달랑 회사 하나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십 년을 함께해 온 놈들도 있어. 내 어깨에는 저놈들과 저들의 가족, 그리고 저들 밑에 있는 수많은 사원들을 얹혀 있다. SG 그룹의 직원이 총 몇 명인지 아느냐.”
“…….”
답을 알고 있지도 않았고, 딱히 알고 있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질문이다. 이환이 아니었으면 SG 그룹 사옥이 어디에 있는지, SG 그룹 회장님 본가가 어디에 있는지도 관심 없었겠지.
물론 지금도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이환을 힐끔 바라보았다. 답을 알려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 회장님이 어째서 이런 뜬금없는 질문을 하시는지 의도를 짐작해 보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정작 그 시선을 받은 이환은 매우 심드렁하고 따분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십오만 명이 넘는다. 십오만 명. 십오만 명의 생계가 SG 그룹에 달려 있는 거지. 그 무게를 누가 감히 이해하고 짐작할 수 있을까.”
“…….”
“내 아버지는 사업에 그리 능한 사람은 아니었다. 자그마한 상회 하나를 열어서 죽을 때에도 그 상회 하나로 끝났지. 쌀 팔고, 밀 팔고, 야채 파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구멍가게 수준의 상회를 물려받아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대기업으로 키운 게 바로 나다. SG의 계열사가 몇 개고 부리는 직원이 몇 명인지, 범부는 감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키워 냈지.”
이거 혹시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건가.
SG 그룹의 연혁 소개 시간?
왜 이환이 시작부터 지루한 얼굴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자꾸 삐져나오려는 하품을 애써서 참고 있을 무렵,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가정부로 보이는 사람이 차를 가져다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냉차로 부탁할걸. 뜨거운 차를 마시고 배 속이 뜨듯해져서 더 잠이 올까 봐 두려워졌다.
회장님이 말씀을 짧게 하셨으면 참 좋겠는데.
가정교육을 못 받고 자라서인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용건이나 본론에서 벗어나 뜬금없는 소리만 늘어놓으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본능이 피어올랐다. 내가 졸거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전에 회장님이 나를 부른 용건을 얼른 말씀하시기를 바랐다.
“너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느냐.”
“…….”
“십오만 명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느냐.”
내 생계도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데, 십오만 명의 생계를 어떻게 책임져. 책임져야 할 이유도 없고, 책임질 능력도 없다.
“네가 서려고 하는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다. 어영부영 돈만 보고 머리를 들이밀 자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자리!”
“저기, 회장님.”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강렬히 쏘아보는 회장님의 시선을 덤덤히 받아 내며 입을 열었다.
“저는 회장님한테 회사를 물려 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뭐?”
“아니, 직원 먹여 살리는 자리는 회장님 자리잖아요. 그래서 혹시 회장님 사후 차기 회장 자리를 저한테 물려주시려나 했어요. 그게 아니면 갑자기 십오만 명 생계가 나올 일이 없잖아요.”
“네가 자격도 없이 환이 곁에 붙어 있으려 하니 현실을 말해 주는 거다. 이 집안의 일원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너 같은 놈은 절대 모르…….”
“아버지. 이놈 저놈 하시는 건 좀 듣기 그렇네요. 대화를 하시려고 부르셨으면 대화만 하셔야죠. 이러면 제가 해민 씨와 동행한 의미가 무색해지지 않겠습니까. 해민 씨 보기 민망해지려고 합니다.”
이제껏 회장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관심 없는 얼굴로 반쯤 졸면서 앉아 있던 이환이 이놈 저놈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끼어들었다. 불쑥 손을 들어 회장님의 말을 막은 그가 조곤조곤 회장님에게 건의했으나, 정중한 말투와 달리 의미는 결코 정중하지 않았다.
이놈 저놈 해도 되니까 얼른 용건을 말씀하시게 그냥 두시지. 말이 중단되어서 여기 앉아 있어야 할 시간만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좋다. 딱 잘라 물어보마. 네가 환이 옆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욕심, 욕망, 야망, 꿈, 그런 것들을 밀어놓고 객관적으로 말해 봐. 네가 그 자리에 어울리는지. 저기 모여 있는 저 사람들, 십오만 명이 되는 직원들의 무게를 감당할 그릇이 되는지. 결혼해서 내 아들 돈만 펑펑 쓰며 놀 생각은 하지 말아라. 무릇 배우자란 함께 짐을 짊어져야 하는 법이니.”
이게 본론이자 결론이고, 회장님이 나를 부른 용건이었다. 그래서 아까 아저씨들 모여 있는 곳도 굳이 들러 구경시켜 준 모양이다. 아랫사람 모아 놓고 자랑하듯 거드름 피운다고 생각했는데, 회장님의 큰 그림이셨네.
“그런데요, 회장님. 다 좋은데, 어차피 회사는 장남 물려주실 거잖아요. 실장님한테 회사 물려주실 생각 없잖아요. 그러면 십오만 명의 직원이 무슨 상관이에요? 부회장님이 회장 되시면, 나머지 형제들은 그냥 나가리 되는 거잖아요. 쫓아내지 않고 그룹에서 일하게 해 준다고 해도, 그래 봤자 이정 부회장님 밑에서 월급 받아 가는 월급쟁이잖아요. 그런 질문은 차기 회장님이 될 장남한테 물어보셔야 하지 않아요?”
기껏해야 같은 월급쟁이가 될 텐데, 무슨 남의 생계를 책임져. 아니, 나는 SG 직원도 아니니 같은 월급쟁이도 아니지. 이환도 아니고 나한테 책임이니 자격이니 묻는 건 너무 나가신 듯했다.
“그리고요. 저는 실장님이랑 결혼한다는 말 한 적 없는데요.”
“해민 씨?”
내 말에 얌전히 앉아 있던 이환이 날벼락을 맞은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회장님도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얼빠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결혼…… 안 한다고? 환이랑 결혼 안 하겠다고?”
“안 한다는 게 아니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요.”
안 한다고 말한 것과 한다고 말한 적 없는 건 엄연히 다르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나보다 못 배운 사람은 없을 테니 당연히 그 차이도 알고 있을 텐데, 이환도 회장님도 왜 저리 멍한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아, 그런데 제가 실장님이랑 연애는 해요. ……저희 연애하고 있는 거 맞죠?”
이게 ‘오늘부터 1일’ 이렇게 딱 확정 지어서 말한 게 아니라 애매하기는 하지만. 한 번도 입에 내어 물은 적이 없고 확답을 받은 적도 없지만. 그래도 같이 잠도 자고, 외식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파티도 하고 그랬으면 얼추 연애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네, 연애하는 겁니다. 그리고 결혼도 합시다.”
이것도 저것도 다 확정지을 기세로 말하는 이환을 무시했다.
“아무튼,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질문은 장남한테 하셔야지 저한테 할 질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십오만 명의 직원 생계도 그렇고, 삼십 년 동안 부린 저쪽 아저씨들도 그렇고. 저한테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말을 꺼내셨는지 모르겠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랑은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이런 건 딱 잘라 말해야 한다. 회장님이 무슨 의도로 말을 꺼내셨든, 맞는 건 맞는 거고 틀린 건 틀린 거다. 괜히 어영부영 네, 네 하다가 덤터기 쓰기 쉬운 세상이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책임, 의무, 그런 건 일단 내가 뭘 좀 누려 보고, 혜택 좀 받고 난 뒤에 나와야 할 말이 아닌가. 득 되는 것도 없는 책임과 의무만큼 개소리도 없다.
그런데 회장님이 그런 개소리를 하고 계시네.
나이 먹은 사람들이 뭣 모르는 어린애들 후려치는 것과 비슷한 전개에 경계심을 넘어 적개심이 생겨났다.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겪어 왔다. 남한테 책임 전가하는 사람들. 교묘히 말로 남에게 책임이든 일이든 떠맡기는 사람들. 어릴 때 뭣 모르고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기에, 진심으로 혐오하는 부류였다.
이환의 아버지가 그런 부류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회장님의 말속에 나오는 책임이니 의무니 하는 단어에 어쩔 수 없이 경계부터 하게 된다.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회장님이 팔걸이를 손으로 내려치며 호통을 쳤다.
“……할 말이 있어서 부르신 건 회장님 아니신가요?”
아니, 왜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나이 먹은 노인네를 놀리려는 것도 아니고, 버릇없이 대드는 것도 아니다. 진심으로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되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