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56화 (156/172)

156화

“변하지 말아요. 그냥 이대로, 이대로 살다가 이대로 죽어. 애초에 엄마가 후회하거나 반성할 사람도 아니지만. 마지막에 울고불고 후회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나 그런 거 싫어. 그냥 내가 마지막까지, 엄마가 죽을 때까지, 엄마가 죽고 나서도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싫어하게 해 줘요.”

엄마를 용서하기엔 내가 너무 아팠어. 지금도 많이 아파.

아무리 지독한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문다지만, 상처가 났을 때 소독도 하고 약도 바르고 주사도 맞고 해야 낫는 거다. 작은 상처라도 그냥 두면 곪아 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은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엄마가 때리고 할퀴고 꼬집어 놓은 내 마음은 결국 곪을 대로 곪아 버렸다.

그래 놓고 엄마만 편해지면 나는 어떻게 해. 엄마는 내가 불쌍하지 않아? 끝까지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잘 지내고 있어요. 밥 잘 먹고. 다음에 올게.”

붙잡고 있던 손을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석거리는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던 손가락이 힘겹게 휘어지며 내 손끝을 붙잡았다.

“……여보……, 가지 마…….”

애처로울 정도로 앙상한 손을 내려다보다 차분히 그 손을 떼어 냈다.

“엄마. 아버지는 죽었어. 엄마랑 나 싫다고 죽었잖아요.”

제발 잊지 마. 기억해 내. 유일하게 엄마가 슬프고 절망스러웠을 그 기억을 망각하지 마.

엄마라는 사람은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 ∞ ∞

가 볼 곳이 있다던 이환이 나를 끌고 간 곳은 강남의 어느 커다란 빌딩이었다. 이환과 나, 그리고 열댓 명의 경호원을 내려 준 차들이 마치 기차놀이를 하듯 줄줄이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이거 좀…… 창피한데.

조폭 회장님 행차하시듯 줄지은 검은 세단과 검은 양복 사내들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기 충분했다. 예상에 부응하듯, 평일 낮이라고는 하지만 도심지인 만큼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적지 않게 몰리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며 슬쩍 한 걸음을 물러나 이환의 뒤로 몸을 숨기자,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해민 씨?”

“네?”

“표정이 이상해서. 어디 아픕니까?”

“마음이……, 아니에요. 안 아파요. 햇살이 너무 환해서요.”

하하, 억지웃음을 토해 내자 남의 속도 모르는 이환이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마주 웃었다.

“들어갑시다.”

“여기요?”

“네.”

여기가 대체 어디인데 들어가자고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이환에게 이끌려 걸음을 내디뎠다.

자동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또 다른 유리문이 있었다. 이환이 품에서 꺼낸 카드 키를 대자 유리문이 열렸다.

입구부터 이중으로 된 문이라니, 이 어마어마한 빌딩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1층에는 널찍한 로비와 한쪽에 전면 유리창으로 만들어진 관리 사무소, 그리고 반대쪽에 작은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24시간 매니저가 상주하고 있다고 하니 불편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무허가 방문객도 건물 입구에서 1차로 걸러질 거고요.”

“아, 네에.”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주는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 빌딩은 엘리베이터조차 카드 키로 작동했다.

“카드 키가 건물 입구, 엘리베이터, 그리고 현관에 사용됩니다. 잘 관리하도록 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올라가며 이환이 내 손에 카드 키를 쥐여 주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그 이유는 금방 알게 될 겁니다.”

소리 없이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 엘리베이터가 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투명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창 너머로 낮게 깔린 건물들의 옥상이 보였다. 몇 초 걸리지도 않았는데 엄청 높이 올라온 모양이다.

“해민 씨? 내려요. 경치 구경은 안에 들어가서 해도 됩니다.”

“네? 네.”

딱히 경치 구경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환이 어느 문 앞에 서서 전자 도어락을 가리켰다. 들고 있는 카드 키를 대자 띠리릭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 몰라서 특수 키 하나 더 달았습니다. 안전한 게 좋으니까요.”

이환이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전자 도어락 위에 있는 자물쇠 구멍에 넣고 돌렸다.

“이것도 가지고 있어요.”

사용한 열쇠를 내 손에 넘겨준 이환이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온 경호원들이 문 앞에 자리를 잡았다. 안으로 함께 들어오지는 않을 모양이다.

경호원들을 남겨 두고 이환이 잡아끄는 대로 문 안으로 들어섰다. 움직임을 감지한 현관 등이 켜짐과 동시에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여긴…… 뭐예요?”

“일단 신발 벗고 올라올래요?”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네.

조심조심 이환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흰색의 아치형 통로가 드러났다. 입구부터 범상치 않았다. 마치 터널을 통과하듯 통로를 빠져나가자 깔끔한 실내가 나타났다.

어디를 봐도 새것이라고 온몸으로 주장하고 있는 소파와 침대 기타 등등의 가구들.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라 있는 주방 싱크대. 전자기기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까지.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집의 내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번에 말했잖아요. 강남 오피스텔.”

“…….”

주변을 둘러보며 구경하다가 이환의 말에 놀라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럼 여기가…….”

“해민 씨 겁니다.”

“네에?”

“인테리어만 조금 손봤어요. 마음에 안 들면 바꿔도 됩니다.”

“아니, 인테리어의 문제가 아니라요.”

내 다급한 손짓에 이환이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고마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저번에 사 주겠다고 말한 강남 오피스텔.”

“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네. 그런 것으로 농담할 이유가 없죠.”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걸 왜 저한테…….”

그냥 남들처럼 농담을 해. 아니, 그때는 이환도 분명 농담으로 했던 말 같았는데. 왜 농담으로 한 ‘강남 오피스텔’이 현실로 튀어나오냐고.

“가끔 혼자 있고 싶을 때 여기 와서 있어요. 해민 씨가 모텔방이나 찜질방을 전전하게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런 곳을…….”

“가끔 가출하고 싶으면 여기 와 있어도 되고. 스무 살이면 한창 가출하고 싶을 나이 아닙니까.”

“아니거든요!”

스무 살이 가출하고 싶은 나이라니,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본다. 애초에 가출할 집도 없었고, 내 소원이라면 집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갈 집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 이제 스물한 살인데요.”

“그러게요. 스물한 살이나 되었네요.”

대단하다며 반응해 주는 이환이 얄미웠다.

“그렇게 있지 말고 구경해요. 생각보다 잘해 둔 듯해서 조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너무 잘했는데 왜 마음에 안 들어요?”

“너무 좋으면 해민 씨가 만날 여기 와 있을까 봐.”

정말이지 쓰잘데기 없는 이유였다.

“방이 하나뿐이라 조금 좁아요. 다행히 저게 가벽이라서 유리 벽으로 대체해 실제보다 약간 넓어 보이지만, 그래도 좁긴 할 겁니다.”

거실과 침실을 구분 짓는 유리 벽을 가리키며 이환이 말했다. 따로 방문이 달려 있지 않은, 침대 넓이만큼의 유리 벽이 중간에 세워져 있었다.

“구경하라고 데리고 왔는데, 구경할 게 없긴 하네요.”

너무 작아서, 라고 덧붙이는 말이 진심인지 모르겠다. 이보다 더 작은 크기의 방에서도 감사히 먹고 자고 했던 내게는 궁궐처럼 보이는데.

“이건 좀 마음에 들더라고요. 해민 씨는 어떻습니까. 우리 집에도 하나 만들어 놓을까요?”

거실 소파 옆 창가에 싱글 사이즈의 매트리스가 놓여 있었다. 이환이 좁다고 한탄했으나 실제로 좁은 것도 아닌데, 하고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이면 창가에 매트리스를 올려놓았을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침대가…… 창문에 있네요?”

“윈도우 시트라고 창가에 앉거나 누울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겁니다.”

침대도 있고 소파도 있는데 왜 굳이 창가에 매트리스를, 이라는 의문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였으나 이환의 말처럼 보기에는 좋았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울 듯하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참 좋아 보였다.

“그런데 여기는…… 실장님 아이디어로 꾸미신 거예요?”

“화이트 컬러로 깔끔하게 해 달라는 요청을 전문가에게 남겼습니다. 이런 건 직접 하는 것보다 전문가에게 맡겨야죠.”

직접 하고 싶은 의욕도 좋지만 결과물을 생각한다면 역시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화이트…… 컬러. 그래서 그런지 참 하얗네요.”

마치 병원 같다.

천장도, 벽도, 바닥도 죄다 하얗고, 침대도 하얗고, 가구도 하얗고, 심지어 소파도 연한 베이지색이었다. 다행히 전문가님께서도 병원처럼 보일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셨는지, 바닥에 깔린 러그나 쿠션 같은 아이템에 진한 색으로 포인트를 주었지만. 그럼에도 눈을 찌르는 하얀색의 향연이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마음에 안 듭니까?”

“아뇨, 엄청 깔끔하고 예뻐요. 예쁜데…… 뭐랄까. 사람 사는 곳 같지는 않아요. 음, 모델 하우스 같아요.”

내 말에 눈을 끔뻑이던 이환이 아, 하고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과 다릅니까?”

“마음에는 드는데, 뭔가 조금.”

무슨 말로 설명해야 할지. 오늘따라 내 표현력의 한계를 맞이한 기분이었다.

“예쁘게 잘 만든…… 인형의 집 같아요. 네, 인형의 집.”

“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아니, 그걸 알아듣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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