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튼 퓨리티-166화 (166/172)

166화

“그럼 실장님이 회사 물려받으시는 거예요?”

내 물음에 이환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왜요?”

“윤경이 그런 비슷한 질문을 했었거든요.”

“백 비서님이요?”

“아주 군침을 흘리던데요. SG의 이인자가 될 기회라면서. 해민 씨도 욕심납니까? SG의 숨은 실세라거나, 안주인이라거나.”

“아니거든요! 저는 그냥……, 장남이 밀려났으니 이제 차남에게 기회가 오는 건가 싶어서.”

“기회라. 어떻게 보면 기회이기는 하죠. 또 어떻게 보면 짐이기도 하고.”

“SG를 짐이라고 하는 사람은 실장님뿐일 거예요.”

사모님마저도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달려오실 정도로 SG의 차기 회장이라는 명패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짐이라며 심드렁한 사람이 이환 말고 또 있을까.

“그럼 이정 부회장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감옥 가나요?”

“그렇게 시끄럽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죠. 실제로 죽거나 크게 다친 사람도 없으니 들어가 봤자 금방 나올 테고. 아버지가 병원에 처넣겠다고 병원 공사 중이랍니다. 아마도 거기서 평생 썩겠죠.”

“결국 들어가시네요, 병원.”

“누가 봐도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처벌이지만. 네, 결국 들어가네요.”

길고 길었던 이정의 연극 무대가 막을 내렸다. 심지어 정상적인 엔딩도 아니고 배우가 무대에 똥을 싸서, 혹은 떨어진 무대 장치에 맞아서 강제로 퇴장당하는 것과 비슷한, 조금은 허무하고 또 조금은 씁쓸한 마무리였다. 그럼에도 아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이십 년 가까이 온갖 미친 짓을 저지르고도 멀쩡했던 사람이 회장님에게 칼 한 번 휘둘렀다고 그대로 아웃이라니. 허무해요.”

“사람이 어디까지 치졸하고 비열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예죠.”

희대의 막장이자 망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름의 교훈도 있었구나.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환이 픽 웃으며 입가에 묻은 우유 거품을 손가락으로 훑어 닦아 주었다.

“청소는 여사님이 하실 테니, 우리는 이불 빨래나 할까요.”

“아까는 엄청 불만이셨으면서.”

“오늘 이불 빨래를 해야 다음 주에 꽃구경 가 줄 것 같아서.”

“서재 들어가 계세요. 시트 갈고 봄 이불 꺼내 놓기만 하면 돼요. 이불은 세탁기가 빨아 줄 테니까.”

이불 빨래를 해야 한다고 거창하게 말하긴 했으나 사실 이불은 세탁기가 빨아 주는 거지. 내가 할 일은 시트를 교체하고 이불만 바꿔 주면 된다. 힘들거나 시간이 걸리는 일은 아니었다.

“같이 합시다. 그리고 이불 바꾼 뒤에 진짜로 시원한지 한번 누워 볼까요. 원래 물건 사기 전에 체험부터 해 보지 않습니까.”

“네?”

봄 이불이 무슨 쿨 매트도 아니고 진짜로 시원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냥 덜 무겁고 덜 더울 뿐이겠지. 게다가 안 시원하다고 계속 겨울 이불을 덮을 것도 아닌데.

이환의 영양가 없는 헛소리에 질색한 표정을 짓자, 그가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요구했다.

“얼마나 시원한지 체험 좀 해 봅시다.”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하실 거죠?”

“…….”

아무래도 시원한지 아닌지의 문제만은 아닐 듯했다.

∞ ∞ ∞

학교에 가기 싫어 아침마다 투정을 부리는 아이도 소풍날만 되면 기대감에 새벽부터 일어나 입을 옷을 뒤적거린다. 잘 놀고 오라며 용돈을 주는 사람이 없어도, 예쁘게 말린 김밥 도시락을 챙겨 주는 사람이 없어도. 나 역시 소풍날 아침만큼은 즐거워했다.

꽃구경이 예정되어 있는 오늘의 이환은 마치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설레하며 내가 깨우기도 전에, 아니,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 나를 깔아뭉갰다.

“요정님은 자는 얼굴도 예쁘네요.”

그런 말을 알몸으로 깔아뭉개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젯밤 설레고 신난 마음을 내게 몸으로 마음껏 표현한 이환 때문에 정작 내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리고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아랫도리의 물건이 몇 시간의 휴식과 수면으로 다시 힘을 내어 빳빳하게 서서 내 가랑이를 찔러 댔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유난히도 활동적인 거시기였다.

“좀만 더 잘래요.”

드물게 잠투정을 하며 뒤척이는 내가 신기했던지, 빤히 바라보는 이환의 시선이 감은 눈꺼풀 너머로 느껴졌다.

“보지 마세요.”

눈을 뜨고 싶어도 퉁퉁 부어서 뜨기가 힘들다. 꾸물거리며 몸을 뒤집어 엎드리는 것으로 시선을 차단하자, 이환이 내 등 위로 몸을 포개었다. 커다란 근육 덩어리를 짊어지는 기분이라 절로 윽 소리가 흘러나왔다.

“요정님, 더 자고 싶어요?”

“네에.”

“요정님은 아침잠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요정님 파업했어요.”

아침잠이 없는 요정님은 어제부로 사망했다. 내일이면 부활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오늘은 부재 상태였다.

“지금 일어나야 아침 먹을 텐데?”

“아침도 안 먹을래요.”

“진짜로?”

“진짜로.”

“요정님이 끼니 거를 생각을 하다니. 정말 큰 일인데요.”

침대에 얼굴을 묻은 상태에서도 웅얼거리며 대꾸해 주는 게 좋았는지 이환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 왔다.

“실장님도 조금만 더 주무세요.”

내 위에서 알몸으로 부비부비를 하고 있는 이환의 팔을 잡아 끌어당기며 말하자, 그가 순순히 침대로 내려와 내 옆에 몸을 뉘었다. 코앞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자꾸 보지 마세요.”

“예뻐서 보는 건데, 왜 자꾸 보지 말라고 합니까.”

“하나도 안 예뻐요.”

퉁퉁 부어서 개구리 눈이 됐을 텐데. 이환의 심미안이 남다르지 않다면 하룻밤 사이에 시력이 나빠진 것일 수 있다.

“하나보다 더 예쁜데.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술도 예쁘고 이마도 예쁘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예쁩니다.”

얼굴 위로 떨어지는 온기 어린 숨결이 좋아서, 조곤조곤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좋아서, 간질이듯 조심스럽게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실장님만큼 절 예쁘다 해 주고 좋아해 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사람 또 있으면 큰일 납니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말해요. 경쟁자는 일찍 제거해야 하니까.”

소리 소문 없이 쓱싹해 버릴 거라고 무서운 말을 달콤하게 속삭인다. 하마터면 네, 하고 얌전히 대답할 뻔했다가 뒤늦게 의미를 이해하고는 떠지지 않는 눈에 힘을 주어 이환을 흘겨보았다.

“그런 사람 평생 없을 거예요.”

“그럼 나야 좋지. 평생 나만 좋아해야겠네.”

“평생…….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변함없이, 누군가를 순수하게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요정님은 모르겠지만, 사랑은 순수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욕심이 생기거든. 욕심은 추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다들 사랑을 하는 거겠죠. 그만큼 인간적인 것도 없으니.”

“실장님은…… 추하고 집착하는 사랑도 괜찮으세요?”

내가 지켜봤던 유일한 사랑은 그 대상이 괴로워할 정도로 집착적이고 맹목적이었기에, 나는 순수한 사랑이 뭔지 알지 못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너무나 추하고 괴로워 보여서, 내가 그런 모습으로 보일까 두려웠다.

“내가 해민 씨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

“그러면 제가……, 제가 실장님을…….”

“네.”

무엇을 말하려는지도 모르면서 이환이 네, 하고 답했다.

“나한테 집착해요. 온 힘으로 내게 붙어 있어요. 온 마음으로 나만 생각해요. 매 순간 나만 바라봐요.”

“정말 그래도 괜찮으시다고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걸 바랍니다. 해민 씨가 평생 내 옆에서 나한테 집착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귓불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해 줄래요?” 하고 이환이 속살거렸다. 간지러운 손길을 피해 이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두근두근 평온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전해져 왔다.

“……저 지금, 혼인 신고서에 도장 찍고 싶어졌어요.”

“서류 어디에 뒀습니까.”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환을 꽉 끌어안았다.

“실장님이 좋아요. ……나중에, 제 사랑이 추해져도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제 마음이 버거워지는 때가 와도 도망치지 말아 주세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그래도, 대답해 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부족하니까, 힘내서 집착하고 매달려요.”

나는 대답 대신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 ∞ ∞

“씻고 내려와요. 아침도 안 먹었으니 점심은 조금이라도 먹고 나가야지. 도시락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서두르지는 말고.”

도시락은 내가 만들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본인이 준비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이환이었다. 여사님이 옆에서 거들어 주실 테니 못 먹을 음식이 나오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 그러라고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고, 샤워를 한 뒤에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이전보다 더 넓어진 드레스 룸 한쪽에 내 옷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일 층 공사만 한 줄 알았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옷이며 짐이 이환의 방으로 옮겨와 있었지.

그때의 당혹스러움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듯이,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드레스 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내 옷을 보며 ‘앞으로 여기까지 와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나?’ 하고 멍청히 생각했더랬다. 침실을 같이 쓰겠다는 이환의 큰 그림인 줄도 모르고.

덕분에, 아니, 덕분에라고 말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영부영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환과 같은 침실, 같은 침대에서 자고 일어나며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대충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 하나를 골라 입고 나오려다 문득 드레스 룸 한쪽의 옷장에 시선이 닿았다.

이번에 드레스룸을 넓히면서 따로 만들어 놓았다던 비밀 공간.

구조 문제로 지하처럼 세이프 룸을 만들지는 못했으나, 예비로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을 작게 만들어 놓았다며 보여 주는 이환 때문에 방을 합친 문제가 후 순위로 밀렸었구나. 어쩌면 그걸 노리고 비밀 공간부터 자랑하듯 보여 줬었는지도 모르겠다.

뒤늦은 의심을 하며 옷장 안쪽으로 손을 밀어 넣어 숨겨진 잠금장치를 건드렸다. 고정되어 있던 뒷벽이 헐거워지고, 힘을 주자 소리 없이 옆으로 밀려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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