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맹수의 사랑법-1화 (1/9)

[우리깜디] 맹수의 사랑법 1권

prologue

차였다.

횟수로 열 손가락을 넘어간 뒤로는 세어 보질 않았으니 이번이 몇 번째인지 알 수 없었다. 범지훈은 눈앞에 놓인 에스프레소 잔을 손가락 끝으로 훑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해요…. 대표님. 그렇지만 전 제 애인을 사랑하고 있어요.”

비슷한 레퍼토리와 비슷한 거절 인사. 범지훈의 입술 새로 자조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처음부터 난 마음에도 없었단 소리군.”

그에 사색이 된 얼굴로 절대 아니라며 당황해하는 남자는 역시나 또 비슷한 말들을 읊었다. 대표님은 너무 멋진 남자니까 별 볼 일 없는 저 같은 사람보다 훨씬 더 좋은 인연을 만날 거다. 이렇게 절 좋아해 주셔서 감사하다 등등의.

그러나 그런 감언이설의 밑바닥에는 범지훈에 대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감히 그 범지훈의 고백을 거절했다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 좋아한다며 고백받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반응이라기엔 이상했다. 미안함 혹은 난처함이 더 어울려야 할 텐데 두려움이라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범지훈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멈칫했다. 자신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아기자기한 카페의 내부를 휘이 둘러본 그는 다시 담배를 넣었다. 금연이란 팻말이 굳이 없어도 카페 내에서 흡연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범지훈 또한 알고 있었다.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는 남자의 손에 시선을 던지다 범지훈은 턱을 까딱였다.

“알았으니 그만 가 봐.”

애인이랑 잘 살아 보라느니 예쁜 사랑 하라느니 같은 인사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그 말을 했다간 저 하얗게 질린 예쁜 얼굴이 이젠 파랗게 질릴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범지훈을 예의 주시하며 카페 바깥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남자의 애인에게도 괜한 시비가 붙고 싶지는 않았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있을 애인에게로 후다닥 달려가는 모습을 끝으로 범지훈은 미간을 만지며 눈을 감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 미간은 또 잔뜩 구겨져 있었다.

범지훈, 서른다섯 살. 직업은 번듯해 보였다. 대표직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표를 맡은 회사라는 게 범상치 않아 문제였다. ‘범호 캐피탈’. 요즈음 회사 이미지 변신을 위해 발랄한 분위기로 미디어 광고를 열심히 때리는 제3금융권의 대부업체였다. 그리고 범지훈 대표는 토털 10여 번을 넘게 차인 남자이기도 했다.

직업이 그래도 어쨌든 돈도 잘 벌고 있고 사업체를 이끄는 대표라면 으레 있을 카리스마 있는 면모에 젊은 나이인데도 아직 애인 하나 없는 게 이상하긴 했다.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나 차일 수가 있나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간과한 범지훈 대표만의 단점이 있었다. 하나는 여자에겐 절대 성욕을 느끼지 않는 뼛속까지 진성 게이라는 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범지훈의 이미지와는 정반대의 동성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자면, 초식 동물 같은 남자들이라고 할까? 어떨 때는 토끼 같거나, 또 작은 말티즈 같거나 사슴 같은 정말 무해하기 그지없는 하얗고 순진한 남자들은 늘 그렇듯 범지훈의 취향을 저격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그런 순진한 남자들에겐 임자가 생기곤 했다. 빠른 시일 내로든지 범지훈의 눈에 들기 전부터 이미 생겨 있다든지.

초식 동물 같은 남자들의 취향도 어쩜 다 비슷비슷한지 그들의 임자들은 주로 거대한 대형견 같은 남자들이었다. 골든 리트리버나 사모예드처럼 온순한 외모로 먼저 무장 해제를 시킨 후에 자신의 애인에게 무한정의 애정을 퍼 주는 임자들은 범지훈이 눈독 들인 초식 동물들을 아주 손쉽게 사로잡아 버렸다.

그러니 초식 동물들에게 구애한 범지훈은 그 커플들 사이의 불청객이 되기 십상이었다. 닭 쫓던 개, 아니 맹수가 지붕 쳐다보듯이 범지훈은 오늘로 또 한 번의 차임 기록을 달성했다.

이번엔 정말 마음에 들었던 남자라 온갖 정성을 쏟았는데 역시나 그 정성도 물거품이 되었다. 카페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남남 커플을 바라보던 범지훈은 미련을 털기 위해 애쓰며 차 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푹신한 카페 소파에 구겨지듯 앉아 있던지라 그렇게 커 보이진 않는 것 같았던 범지훈이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때맞춰 그의 옆으로 방금 받은 음료를 들고 지나가던 남자가 흠칫해서 한참을 올려 봐야 할 정도로 범지훈의 키는 높았다.

낮은 한숨을 끝으로 범지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피곤함이 그가 움직이는 발자국마다 따라붙는 듯했다.

운전석에 앉아 벨트를 매려던 범지훈의 시야 속,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빈말로도 못났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또 어찌 보면 무섭게 생기기도 했다. 잔머리 하나 없이 포마드로 넘긴 머리부터 짙은 눈썹, 쌍꺼풀 없이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까지. 자기주장 강한 티 존에 매서운 눈매가 그 그늘에 가려졌지만, 인상이 진하니 무표정이면 더 무서워 보였다.

웃으면 초식 동물 같은 남자들이 좋아할까 싶어 입술 끝을 끌어 올려 봤지만 비웃는 느낌만 날 뿐이었다. 하긴 부하 직원들 앞에서도 예전에 한번 웃어 본 적이 있었는데 다들 사색이 되어 뭐 잘못한 게 있느냐고 울먹이기만 했다.

범지훈은 웃어 보려는 걸 깔끔히 포기했다.

그렇다고 범지훈이 웃는 걸 모를 만큼 불행한 유년 시절을 산 건 아니었다. 러시아 사람인 범지훈의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배우 일을 할 정도의 빼어난 미인이었고 호쾌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또한 지금도 그렇지만 젊은 시절, 미남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다고 했다.

한국으로 여행을 왔던 범지훈의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에게 먼저 반해 대시를 시작으로 연애결혼을 한 것도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부모의 배경에 있었다. 범지훈의 아버지는 그 당시에 대부업체로 사업을 시작하려던 거대 조직의 외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 조직을 사람들은 ‘범호파’라는 조폭 단체로 불렀다. 그것뿐이면 차라리 문제가 덜하겠는데 그저 러시아 배우인 줄 알았던 어머니가 사실, 러시아 마피아의 하나뿐인 귀여운 손녀라는 것에 있었다.

그러니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범지훈의 유년 시절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어찌 되었건 범지훈은 오늘로서 또 차였고 그는 실연의 아픔에 젖어 술이 고팠다. 그러려면 함께 마실 사람 또한 필요한 법이었다.

[와이프랑 분위기 좋았는데, 꼭 이래야겠냐. 지훈아?]

[…음,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사실 지금 상견례 중이라….]

[여부떼여? 울 아빠 똥 싸러 갔는데 누구떼여?]

친구도 부하 직원도 대학 선배까지도 전화하는 족족 까였다. 범지훈은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아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야. 괜찮았다. 술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액셀을 밟으며 범지훈은 자주 가는 와인 바로 핸들을 틀었다. 자작이 뭐 어떻다고. 집에서 청승맞게 정말 혼자서 마시는 건 그랬지만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마시는 것쯤이야 할 수 있었다.

***

범지훈은 눈을 떴다. 잠을 잘 때 자세를 잘못했는지 등허리가 무척 뻐근했다. 조금 더 잘까 싶어 눈을 감았다가 범지훈은 다시 떴다.

누워 있는 침대가 어쩐지 낯설었다. 아니 눈을 뜨고 바로 보이는 이불의 색이 익숙한 블랙이 아닌 짙은 청록색이라는 것에 범지훈의 두 눈이 깜빡였다. 정확히는 그 이불을 덮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에 있었다.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남자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걸친 제 팔을 슬그머니 빼내며 범지훈은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누구?

어젯밤의 기억은 와인 바에 도착해 술을 마시던 게 마지막이었다. 아, 옆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와 대화를 한 것 같았는데 그게 누구였지? 범지훈은 뒤늦게야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매만졌다. 숙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은 남자를 깨워야 했다. 깨워서 상황 설명을 듣고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술에 취해서 과연 뒤처리는 제대로 해 줬는지 범지훈은 걱정이 됐다. 의외로 다정한 남자인 범지훈은 자신에게 안겨 밤새 고생했을 남자를 깨우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다 멈칫했다.

아팠다. 뻐근한 등허리뿐만이 아니라 더 아래 둔덕 사이가. 그러니까 말 못 할 은밀한 그곳이 화끈거리며 아팠다.

꼭 두꺼운 무언가를 여러 번 넣었다 빼낸 것처럼 그러니까….

범지훈은 그제야 삐걱거리는 제 온몸을 깨달았다. 뭐지? 시야 가까이 들어 올린 손은 손가락 끝까지 멍이 들어 있었다. 누구한테 맞은 걸까? 생각했지만 맞았다기엔 잇자국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그것도 손뿐만이 아닌 팔과 어깨까지. 아니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빼낸 허벅지와 종아리까지 불그스름한 멍과 잇자국이 가득한 것에 범지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시야는 여전히 꿈나라에 가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범지훈이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며 몸을 빼내 움직이느라 남자의 허리께까지 이불이 내려가 있었다.

그 탓에 드러난 남자의 등에는 뱀이 그려져 있었다. 움푹 들어간 척추 부근부터 허리까지. 등 한쪽에 그려진 화려한 꽃을 품은 채 똬리를 틀고 있는 거대한 뱀.

범지훈은 이성은 거기까지였다. 소리 없이 서둘러 침대를 빠져나온 범지훈은 정신없이 자신의 옷을 찾았다. 침대 아래에 마구잡이로 떨어져 있을 줄 알았던 옷은 꼭 동화 헨젤과 그레텔 속 길을 따라 빵 조각을 흘린 헨젤처럼 침실부터 현관까지 길을 따라 떨어져 있었다. 그 덕에 수월하게 현관을 찾은 범지훈은 셔츠의 단추를 급하게 잠그며 도어 록을 열었다.

맹세코 범지훈은 잡아먹었으면 먹었지 이렇게 잡아먹힌 적은 처음이었다. 멘탈이 가루가 된 범지훈이 정신을 차린 것은 택시를 타고 급하게 도착한 자신의 집 안에서였다.

닫힌 현관문에 등을 기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으며 범지훈은 가쁜 숨을 골랐다. 엘리베이터를 탈 정신도 없어 고층인 자신의 집까지 뛰다시피 걸어 올라와 후끈한 열이 났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온몸이 삐걱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범지훈은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1. Dramarama

우정선은 범지훈의 오래된 소꿉친구이자 범지훈의 개인 비서다.

그래서 우정선은 그 누구보다 범지훈에 대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잘 알고 있었다. 다섯 살 코흘리개 시절 만난 인연이 지금까지 닿아 비서 업무까지 하고 있지만 우정선은 범지훈을 친구로서 누구보다 잘 알았고 아꼈다.

겉으로는 의연한 척 강인한 척하고 있지만 범지훈의 속이 말랑말랑한 푸딩처럼 얼마나 여린지도, 좋아했던 사람에게 차인 게 이번이 벌써 열여섯 번째인 것도. 초, 중, 고, 대까지 동고동락하며 지낸 세월이 얼만데 차인 뒤에 늘 술을 미친 듯이 퍼마신다는 버릇이 있는 것도, 같이 마실 사람이 없어도 우정선만은 절대 부르지 않는다는 것까지도 알았다.

우정선의 친구이자 범지훈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와 상황 설명은 이미 다 들은 뒤였다. 와이프와 둘째를 만들려던 찰나에 범지훈에게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거절은 했다지만, 목소리를 들어 보니 또 실연이라도 당한 눈치던데 정선이 네가 연락해 보라는 친구의 말에 전화를 걸어도 범지훈은 받지 않았다.

우정선을 부르지만 않을 뿐이지 연락은 꼬박꼬박 받던 범지훈이었는데 우정선이 걱정한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몇 통을 더 걸어 보고 문자까지 보내 봤지만, 다음 날까지 답이 없던 범지훈은 출근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우정선에게 뒤늦은 문자 한 통을 보내왔다.

[미안. 연락한 거 이제 봤어. 몸이 안 좋아서 며칠 쉬어야 할 것 같아. 일 처리 좀 부탁할게.]

맞춤법과 마침표까지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걸 보니 범지훈이 보낸 문자는 확실하지만 우정선은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표님?”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공은 공, 사는 사였다. 지금 있는 곳이 회사 내부이니만큼 범지훈의 이름이 아닌 직급을 조심스레 부르며 우정선은 평소와 달리 전화를 늦게 받는 범지훈을 걱정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건가요?”

복도를 걸어가는 우정선을 보고 인사를 건네는 회사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우정선은 범지훈의 대답을 기다렸다.

[…응.]

그 한마디에 우정선의 발걸음이 멈췄다.

“집인가요?”

뒤잇는 긍정의 대답에 우정선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원래였다면 고층에 있는 비서실로 출근해야 했지만 우정선은 범지훈의 집으로 가기 위해 차 키를 꺼내 들었다.

“야, 너….”

익숙한 도어 록을 거리낌 없이 열고 들어가며 대체 어디가 어떻게 안 좋냐는 말을 우다다 쏟아 내려던 우정선은 거실로 걸어 나오는 범지훈을 보고는 고작 그 말만을 꺼냈다.

그도 그럴 것이 범지훈의 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포마드로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각 잡힌 표정은 어디로 갔냐는 듯 범지훈은 포마드 한 점 바르지 않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범지훈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금방 포슬포슬하게 내려와 모양 예쁜 이마를 덮어 내리는 앞머리와 초가을이라고 하기엔 더운 날씨에도 턱 끝까지 덮은 검은 터틀넥 니트가 낯설었다.

검은 면바지와 검은 양말, 검은 슬리퍼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 블랙인 건 범지훈 같은데 지금의 상황과 저 모습은 평소의 범지훈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범지훈은 꼭 온몸을 꽁꽁 가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 같았다.

“출근하지 뭐 하러 왔어?”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마음이 상하기 딱 좋은 말이었지만 우정선쯤 된다면 그 속에 담긴 범지훈의 배려는 이제 눈 감고도 척이었다.

“목소리는 또 왜 그래? 전화로도 그렇더니.”

“…그냥, 감기 걸린 거지.”

“아주 죽어 가네. 목도 완전히 갔고 초가을에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있는 거 보니까. 밥은 먹었어? 죽 시킬까? 약도 사 왔는데.”

‘응.’ 가볍게 대꾸하는 범지훈이 소파에 걸터앉았다. 우정선도 재킷을 벗어 팔에 걸며 범지훈 쪽으로 다가갔다.

“어젠 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전화를 그렇게 안 받았는데? 준혁이가 연락 왔던데. 술 마시잔 거 거절해서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하다고.”

“아무튼, 나한테 너 좀 챙겨 달라더라. 준혁이 안 된다면 차라리 나한테 연락하지.”

“회사에서도 보는 얼굴 밖에서도 보는 건 그렇잖아.”

범지훈의 옆자리에 몸을 앉히며 우정선은 범지훈 쪽으로 몸을 틀었다.

“넌 제발 그 말버릇 좀 고쳐. 회사에서도 시달리게 해서 미안한데 밖에서까지 나한테 시달리게 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길게 좀 이야기해 주면 어디가 덧나? 그것부터 고치면 인간관계도 지금보다 훨씬 넓어질 거다. 진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지만 우정선도 알고 있었다. 범지훈의 저 말투가 하루아침에 고쳐질 리가 없다는 걸. 아무리 이야기해도 천성인 것인지 35년을 저렇게 살았는데 고쳐지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니 우정선은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얼마 없는 범지훈의 사적인 인간관계는 저놈의 말투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의 외모도 한몫했다.

“이렇게 보니 순해 보이는데.”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곤 피곤함에 젖은 얼굴로 눈을 감고 있는 범지훈을 관찰하며 우정선은 손을 뻗었다. 포슬포슬한 반곱슬의 앞머리를 젖히니 평소에 늘 보던 익숙한 범지훈인데 내리면 같은 사람인데도 새롭고 나름 순둥해 보였다.

“…뭐 해?”

“이미지 체인지 중. 외모를 바꾸면 뭔가 달라질 것 같기도 해서. 어려 보이기도 하고.”

“좋을 거 하나 없군.”

어려 보인다는 말에 뒤이어 따라붙는 대답을 들으며 우정선은 범지훈의 머리카락에서 아쉽게 손을 뗐다. 하기야 범지훈의 말처럼 어려 보여 봤자 회사에선 쓸데가 없었다. 아무리 범호 캐피탈을 설립한 범상철 회장의 아들이라고 해도 나이 지긋한 꼰대 간부들은 아직은 어린 범지훈이 본인들을 제치고 회사의 대표직을 맡는다는 걸 못마땅해했다. 그 나이 따윈 단점도 아닐 정도로 대표의 역할을 잘 해내는 범지훈인데도 그랬다. 회사부터가 범지훈의 대표직을 호시탐탐 노리는 약육강식의 세계이니 자연스레 범지훈 또한 날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우스워 보이지 않도록 평소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게 잔머리 하나 없이 머리를 넘겼고 각 잡힌 정장과 반짝반짝 광이 나는 남성 구두는 그의 유니폼과도 같았다.

항상 철두철미한 범지훈 대표. 빈틈 따윈 보이지 않는 범지훈 대표. 그래서 더 어렵고 무서운 범지훈 대표. 사내 직원들 사이에서 범지훈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런 범지훈의 이미지를 상쇄시키고자 우정선은 자신이라도 직원들에게 허물없이 다가가며 유쾌한 분위기를 냈지만 돌아오는 건 범지훈 대표님 옆에 있으면 숨 막히지 않냐는 걱정 섞인 물음뿐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생각하는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범지훈의 진가를 알아보는 소수의 주변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친구 우정선과 이준혁, 범지훈의 범접할 수 없는 외모에도 속없이 허허실실 다가왔던 범지훈과 우정선의 대학 선배와 최근엔 부하 직원 하나까지.

회식 후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직원의 토도 직접 치워 주며 범지훈은 주소도 얘기 못 하는 직원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살뜰히 챙기고 잠까지 재워 주었다. 그 뒤로 형, 동생처럼 지내는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사적인 인간관계가 협소해도 되는 건지 우정선은 슬쩍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동성들은 대부분이 범지훈을 무서워하기 일쑤였고 이성인 여자들은 그래도 카리스마 있는 잘생긴 대표님이라며 좋아하는 것 같던데.

“지후….”

여자인 사람 친구들은 어떠냐? 라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려던 우정선의 시야에 바로 그때, 머리카락에 반쯤 덮인 범지훈의 귀가 들어왔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뻗어진 우정선의 손은 목 끝까지 가리고 있던 범지훈의 터틀넥을 잡아 내렸다.

“너 이거 뭐야?”

귀에 모기라도 물렸나 했더니 귀 옆으로 살짝 보이는 살갗에는 옷에 가려진 잇자국이 있었다. 잘못 본 건가 했지만, 옷을 내리고 보니 알 수 있었다.

“이거 뭐냐고!”

우정선의 목소리가 커졌다. 감기로 아파서 골골대는 줄 알았더니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귀부터 목덜미 어느 곳 하나 멀쩡한 부분이 없었다. 울긋불긋한 멍들과 잇자국이 빼곡한 살갗을 바라보는 우정선에 범지훈은 그의 손을 치웠다. 다시 옷에 가려진 목덜미에서 우정선이 시선을 떼지 않자 범지훈은 몸을 들어 우정선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았다.

“그럴 일이….”

“있기는 뭐가 있어? 이건 너무 심하잖아. 짐승한테 물어뜯긴 것도 아니고!”

짐승이라는 말에 어울리진 않았지만 범지훈의 머릿속엔 그 순간 뱀이 떠올랐다. 화려한 꽃을 품은 거대한 뱀. 입을 벌려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낸 채 혀를 날름거리는 뱀을 떠올리며 범지훈은 오소소 소름이 돋기 시작하는 뒷목을 문질렀다.

얼굴도 기억 안 나지만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여자 아니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범지훈의 움직임이 멈췄다.

“여자가 남겼다기엔 말이 안 되는 자국이잖아.”

빼도 박도 못하는 우정선의 말에 범지훈은 두 눈만 깜빡였다. 그 우정선조차도 범지훈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모를 터였다. 범지훈이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너… 설마, 어제….”

말을 잇던 우정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범지훈은 결국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게이라고 한다면 혐오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건데. 범지훈은 자신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을 우정선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졌다.

“강제로… 당한 거지?”

“…뭐?”

“어쩐지 칼같이 받던 전화를 안 받는다 했어. 그것도 모르고 전화 몇 통으로 끝내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찾아다녔어야 했는데, 씨발…!”

잘 하지도 않는 욕까지 하며 애꿎은 소파에 주먹을 꽂아 넣고 씨근덕대는 우정선을 보며 범지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뭐가? 그보다 그 새끼 어떤 새낀데? 얼굴 봤어? 이름은? 나이는?”

“내가… 남자랑 할 수 있는 거. 언제부터 알았냐고.”

“30년을 지훈이 네 옆에 붙어 다녔는데 그걸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래서 그 개새끼 누군지 알아?”

우정선은 범지훈이 남자랑 했다는 사실보다 강간당했다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 같았다. 범지훈은 더 복잡한 얼굴이 되었다.

이 키에 이 덩치로 같은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곧이곧대로 믿으며 화를 내는 우정선이 이상한 건지 게이인 걸 말 안 했다고 30년 지기 친구가 지금껏 모를 거라고 생각한 범지훈이 이상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정선은 끈질겼다. 그 강간범 잡아 처넣기 전엔 못 나간다는 걸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현관까지 내보냈지만, 갑자기 또 걸음을 멈췄다.

범지훈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뻗어진 우정선의 손은 범지훈의 손목을 잡아채 갔다.

“…이거 아주 미친 새끼 아니야?!”

긴 니트 소매로 손등까지 가렸지만, 키만큼이나 길쭉한 범지훈의 열 손가락을 모두 가리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우정선은 그사이, 범지훈의 손가락 끝까지 남은 잇자국과 멍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무슨 짐승들 영역 표시도 아니고 만약 범지훈의 머리카락이 없었으면 머리통 끝까지 이런 거 남겼을 개또라이 새끼라고 우정선은 소리쳤다. 그건 맞는 말인 것 같아 범지훈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래, 어쩐지 아픈 적도 손에 꼽는 녀석이 열도 안 나는 감기에 며칠씩이나 쉰다는 게 이상하긴 했어! 이러니까 꼼짝도 못 하지! 미친 또라이가 강제로 이딴 짓을 했는데!”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이 펄펄 뛰는 우정선에 범지훈은 곤란해졌다.

“…강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지금 네 꼬라지를 보고도 강제인지가 헷갈려?! 사람 몸에 이따위 짓거리들을 했으면 그게 강제지 다른 게 강제겠냐고!”

“기억이 안 나서.”

“그래! 기억이… 뭐?”

“기억 안 나. 술을 많이 마셔서.”

우정선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30년 지기인 우정선도 범지훈과 함께 일하게 된 뒤론 회식 이외엔 같이 술을 마신 게 오래되긴 했다. 회식 때도 정도를 아는 범지훈은 주량을 넘어서까지 마신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우정선은 범지훈이 취했을 때 어땠는지 그때서야 떠올렸다.

“그래서… 취했어?”

“응. 기억 안 나니까.”

우정선은 마른세수를 했다. 범지훈이 주량을 넘어서까지 마시는 걸 본 게 10년이 훨씬 넘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 마지막으로 목격한 취한 범지훈은….

“쌍방…인가.”

우정선이 중얼거렸다.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범지훈도 취중에 드문드문 나는 단편적인 기억과 술을 함께 마셨던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본인의 술버릇을 알고 있었다. 직접 목격했던 우정선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그렇대도 남자면서 같은 남자가 그러는데 그걸 옳다구나 하고 홀랑…!”

“…게이들이 오는 와인 바였어.”

우정선은 얼굴을 문질렀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강간범이라며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신랄하게 까댔더니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이 바로 여기 있었다. 분명 취해서 맛이 간 범지훈과 쌍방 합의하에 한 게 분명했다.

***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보이는 듯한 우정선을 보내고 범지훈은 그제야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정선이 온다고 해서 급하게 꺼내 입었던 더운 니트를 벗어 올리는 범지훈의 시야에 살갗 위로 번진 멍들이 들어왔다. 얼마나 세게 씹었는지 피가 몰릴 정도로 깊게 패어 아직 가셔지지 않는 잇자국들까지.

범지훈은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이길래 예쁜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이 건장한 몸을 손가락 끝까지 이렇게 물고 씹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럴 마음이 드는 건가?

전신 거울 앞을 지나가려던 범지훈의 걸음이 멈췄다. 기다란 전신 거울 속에는 거울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 큰 키와 운동으로 다져진 군살 없는 몸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어딜 봐도 가녀린 구석이라곤 없었다. 거울 속 냉랭한 분위기와 무표정을 보며 범지훈은 본인 같은 남자는 전혀 취향이 아니라고 다시 한번 느꼈다. 이런 남자는 트럭으로 가져다줘도 성욕이 들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살색을 드러낸 단단한 상반신에 열꽃처럼 군데군데 번진 보랏빛 멍과 잇자국에 범지훈은 마땅히 할 다음 말을 찾지 못했다. 사실 멘탈에 타격을 입어 정신없이 그 집을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자신과 잤던 그 남자가 정확히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분명한 건 색소 옅은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를 가졌다는 것, 허리 부근에 커다란 뱀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는 게 전부였다.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를 피하자.

범지훈은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벗기지 않는 이상은 등 뒤에 문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일이었고, 안 그래도 회사 업무만으로도 복잡한 머리인데 얼굴도 모르는 이상한 취향의 남자 때문에 더 복잡해지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을 때에는 간단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답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범지훈은 며칠 만에야 출근한 회사에서 목 끝까지 덮고 있는 터틀넥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잇자국은 좀 나아졌다지만 시간이 지나도 도통 없어질 줄 모르는 멍에 더위를 참고 니트를 껴입은 게 무색하게도 범지훈은 지금 열이 나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마케팅부에서 어제부로 새로 근무하게 된,”

범호 캐피탈의 새로운 광고 안건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처음 보는 얼굴이 범지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타 회사에서 광고 기획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미리 전해 들었는데, 이번 새 광고 안건에 대해 PPT로 신경 써서 준비까지 해 온 장본인인 모양이었다.

“사위민이라고 합니다.”

빔 프로젝터를 켜 놓은 스크린 옆, 단상에 서 있는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렸다.

포메라니안. 범지훈은 사위민을 보며 갈색 털이 푹신푹신할 만큼 자란 그 강아지를 떠올렸다. 작고 귀여운 강아지 상. 그건 범지훈의 취향을 저격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문제는 왜 하필이면 포메라니안이냐는 거였다. 갈색 털을 가진 강아지. 자연 갈색으로 보이는 옅은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를 가진 미인 사위민. 그가 범지훈을 올곧게 바라보며 작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를 피하자는 범지훈의 다짐은 눈 녹듯 사라졌다. 열이 나기 시작하는 범지훈의 귀 끝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찾았다. 내 사랑. 내가 찾던 사랑.

머릿속엔 기억도 안 나는 어느 옛날 드라마의 OST가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

범 대표님. 범호 캐피탈 직원들은 그를 종종 호랑이 대표님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특이한 성씨에도 그랬지만, 출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소문으로는 범 대표님의 등 뒤에 커다란 호랑이 문신이 새겨져 있다고도 해서였다.

안 그래도 어려운 사람인데 그런 소문까지 더해지니 범호 캐피탈 사람들은 범 대표님을 더 무서워했다. 돈을 빌려주고 수십 배의 이자로 배를 불리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웃기겠지만 놀랍게도 제3금융권 대부업체라고 이자를 말도 안 되게 부르고 돈을 못 갚는 채무자를 찾아가 살벌하게 협박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정확히는 10년 전만 해도 그런 짓을 일삼았지만, 범 대표님이 범호 캐피탈에서 팀장직으로 첫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달라졌다. 범상철 회장님과 이야기가 잘 된 건지 팀장으로 부임한 범 대표님이 가장 처음으로 한 것은 나라에 정식으로 범호 캐피탈의 사업장을 등록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힘만 쓸 줄 아는 살벌한 양아치 직원들이 아닌 평범한 직원들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고객의 대출 상담을 도와줄 친절한 전화 상담원들부터 범호 캐피탈 회사를 직접 방문해 주는 감사한 고객님들을 위한 1층 로비의 안내 데스크 직원들과 전문적인 금융 행정 업무와 경영 지원을 담당할 부서를 만들었고 금융과 대출 등에 관련된 학과와 자격증, 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그러니 말만 제3금융 대부업체였지, 범호 캐피탈은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웬만한 은행 못지않은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뤄 냈다. 10년 전엔 그저 주먹이나 쓸 줄 알았던 범호 캐피탈 간부들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대표라며 아직까지도 범 대표님의 흉을 봤지만 범호 캐피탈 직원들은 그가 얼마나 능력 있고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현재는 서울에만 벌써 세 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었고 경기도와 광역시들 및 중소 도시들까지 범호 캐피탈의 영역이 뻗어 나가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범호 캐피탈에서 마지막으로 생긴 마케팅부. 정확하게는 힘만 쓸 줄 아는 양아치 직원들을 쫓아내는 대신 그들만으로 구성된 사내 경호 단체가 가장 마지막으로 만들어졌지만, 부서 자체로는 마케팅부가 가장 마지막으로 만들어졌다.

회사의 이미지 또한 얼마나 중요한지 범 대표님이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의 범호 캐피탈 미디어 광고로는 흑백 화면 속 화면을 응시하던 거대한 호랑이가 울부짖으며 쉽고 빠른 대출을 도와준다는 짧은 설명 자막으로 끝이었다. 그 덕에 처음 보는 신박한 대부업체 광고라며 꼭 명품 브랜드처럼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있다는 칭찬으로 한때 큰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범호’ 캐피탈의 브랜드 그 자체만 각인시켰을 뿐이지, 심약한 고객님들을 불러 모으는 데에는 크게 실패하기도 했다. 그에 서둘러 마케팅부를 제대로 만든 범 대표님은 대중들에게 친숙할 미디어 광고 시안들을 확인하는 데에 요즘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범호 캐피탈 마케팅부의 부장직을 맡고 있는 A씨는 마케팅 부서 회의실 내부의 묘한 분위기를 일찌감치 눈치챘다. 원인은 아마도 저기 단상에 서서 이번 새 광고 안건을 범 대표님에게 제안하고 있는 저 신입이지만 경력은 있는 직원 때문일 터였다.

이름은 사위민. 받은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로도 확인했지만 직접 면접을 보며 A씨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 직원이었다. 귀여우면서도 예쁜 외모도 그랬지만, 강단 있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A씨는 마케팅부를 이끄는 부장으로서 그에게 홀딱 반해 버렸다. (*사실 외모가 3할 아니, 5할을 차지하긴 했다.)

이런 직원이라면 출근 이틀 만에 그 호랑이 대표님 앞에서 광고 안건에 대한 발표 또한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A씨는 어제 첫 출근을 한 사위민과 마케팅부 팀원들이랑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금까지의 광고 시안들로 의견을 나눴다. 다 함께 날밤을 새우고 만든 PPT로 지금 A씨가 신임하게 된 직원 사위민은 자신감 넘치게 발표를 이어 갔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A씨는 마케팅부의 부장으로서 마땅히 집중해야 할 회의실에서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사위민과 범 대표님 때문에.

사회생활 짬밥이 몇 년이며, 여자의 몸으로 범호 캐피탈 마케팅부의 부장 자리까지 쟁취한 A씨인데 이 정도 눈치야 당연했다. 일찍이 범 대표님이 여자에겐 관심이 없는 분이라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잘생긴 대표님에 아쉽게 입맛을 쩝쩝 다셨지만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가질 수 없는 거라 그것에 만족하고 멀리서 바라만 봤는데, 요즘 들어 대표님의 취향까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생긴 게 꼭 토끼 같았던 귀여운 전화 상담원 아방수 씨인 것 같았는데, 지금 사위민을 바라보는 범 대표님의 눈빛이 방수 씨를 멀리서 지켜보던 그때의 눈빛과 똑같았다. A씨는 범 대표님을 한 번, 사위민을 한 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강아지 상이네. A씨는 방수 씨와 사위민의 공통점을 금세 찾아냈다. 귀엽고 무해한 동물. 그리고 그건 범 대표님의 취향이란 소리였다.

A씨는 무서운 범 대표님의 구애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며 바들바들 떨었던 토끼, 아니 방수 씨를 떠올리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사위민 또한 방수 씨와 비슷한 꼴이 될 거야 뻔할 뻔 자였다.

우리 범 대표님, 분위기가 그래서 그렇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겉모습만 보고 범 대표님을 지나치게 무서워했던 방수 씨가 조금 얄밉기도 했었던 A씨는 안타까우면서도 동시에 약간의 심술도 일었다.

솔직히 전화 상담부서의 부장도 아니고 마케팅부의 부장이었음에도 A씨도 알 정도로 범 대표님의 구애는 그 정성에 눈물겨울 정도였다.

점심 식사 후, 입가심으로 남들 다 마시는 아아메가 아닌 휘핑크림이 듬뿍 올라간 달달한 과일 프라페 종류를 방수 씨가 쪽쪽 빨며 돌아다니는 걸 종종 목격했는데 그 후, 회사의 직원이라면 원래 50%가 할인되었던 사내 카페가 프라페 종류 한정으로 갑자기 공짜 이벤트가 열리기도 했다.

거기에 대표님이 쏘는 거라며 법카가 자주 전화 상담부서의 부장 손에 쥐어졌으며 며칠간 회식을 자주 가는 듯하더니 내성적인 성격의 방수 씨가 회식 이후 얼굴빛이 계속 안 좋자 거짓말처럼 회식이 멈추고 대신 전화 상담부의 업무 의자와 테이블이 인체 공학적 설계 디자인으로 갑자기 변경되거나 부서 내에 보너스가 보름에 한 번꼴로 내려오기도 했다. 두 팀으로 나뉘어 번갈아 포상 휴가를 다녀왔다고도 전화 상담부서의 부장이 비밀이라며 슬쩍 자랑을 흘리기도 했는데 A씨는 그때 조금 배가 아팠다. 어쩐지 며칠간 회사에 안 보이더라니. 얄미운 인간.

아무튼 방수 씨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개인이 아닌 팀으로서 이렇게나 조심하며 정성을 퍼붓는 범 대표님에 A씨는 차라리 본인이 방수 씨가 되고 싶었던 적도 많았다. 잘생긴 남자가 한눈에 반해서 이렇게나 지극정성인데 겁만 내는 방수 씨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게 이제는 우리 팀원인 사위민에게 오게 되다니. A씨는 안타까움 반, 얄미움 반, 그리고 마케팅부의 부장으로서 얻어먹을 콩고물을 떠올리며 행복감까지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우리 범 대표님과 꼭 어울릴 만한 착하고 예쁜 남자가 대표님 곁에 생겼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까지 살짝 빌었다.

***

성공적인 회의를 마치고 사위민은 부장님의 칭찬까지 받으며 퇴근했다. 정확한 정시 퇴근에 회사 로비를 나서는 사위민의 발걸음이 못내 가벼웠다.

그러다 그의 걸음이 멈춘 건 회사 앞 통유리로 만든 흡연 부스 안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범지훈을 보면서부터였다. 막 불을 붙였는지 아직 담배를 물고 있던 범지훈은 사위민과 눈이 마주치자 미련 없이 장초를 꺼 버렸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신입 직원답게 각 잡힌 몸짓으로 곧장 고개를 숙여 보이는 사위민에 기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사위민에게 다가온 범지훈이 답했다.

“퇴근하는 길입니까?”

“네. 대표님도 퇴근하시던 중이셨나 봐요.”

“그렇죠. 오늘,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사위민 씨.”

“감사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우리 마케팅 팀 모두가 머리 맞대 열심히 낸 결과물이었는데 대표님이 만족해하시니 정말 행복하네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사위민은 싱그러웠다. 신입 직원답지 않게 범지훈을 무서워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으며 밝고 명랑하게 대답하는 사위민에 그를 내려다보는 범지훈의 귀 끝이 조금 더 달아올랐다.

“…댁은 어느 쪽입니까?”

성급하게 말을 뱉고 나서야 범지훈은 아차 했다. 찰나의 감정이라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 떠오르진 않았지만 범지훈은 속으로 자책했다. 이제 곧 사위민이 부담스러운 얼굴로….

“마포구 쪽입니다! 미남대 근처에 살아요. 본가가 인천에 있어서 혼자 자취 중이거든요. 학교도 졸업해서 이제 대학생이 아닌데도 아직도 대학가 쪽이 저는 살기가 좋더라고요. 아, 대표님은 댁이 어느 쪽이세요?”

쉴 새 없이 삐약대는 새끼 새처럼 예쁜 입술을 빠끔거리며 쫑알대는 사위민에 범지훈은 가슴속 어딘가가 간질거리는 걸 느꼈다.

“저도 그 근처입니다.”

“와, 진짜요? 완전 잘됐네요. 출퇴근길에 말동무가 없어서 심심했는데 대표님이 괜찮으시면 혹시 제 말동무 어떠세요? 대중교통 이용하세요?”

회사 지하 주차장에 세워져 있을 범지훈 소유의 데르메데스 블랙 벤츠는 오늘부로 안녕이었다. 범지훈은 지금부터 차가 없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퇴근하는 사위민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퇴근 시간이 정확히 되자마자 우정선을 버려 두고 회사를 빠져나와 건물 앞에서 서성였다. 할 게 없어 이리 갔다 저리 왔다 하다가 흡연 부스에 들어가 피운 담배만 두 개비째였다.

그리고 정문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사위민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물고 있던 담배를 끄며 범지훈은 사위민이 담배 냄새를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했다. 때문에 사위민에게 최대한 냄새가 덜 가게 일부러 바람을 앞에 두고 거리까지 벌렸다. 그런데 고작 그 짧은 기다림의 결과가 무려 출퇴근길 말동무 역할이라니. 범지훈은 집으로 돌아가면 당장 우정선에게 부탁해 미남대 근처에 새로운 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당연히 대중교토….”

“위민아.”

범지훈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사위민을 반갑게 불렀다. 남자 목소리였다. 범지훈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선배!”

마찬가지로 사위민 또한 범지훈 뒤의 누군가를 발견하고 반갑게 대답했다. 범지훈은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길에 너 여기서 일한다는 게 생각나서 들렀는데….”

사위민에게로 뛰듯이 다가온 남자의 말꼬리가 끊어졌다.

“뜻밖의 사람을 만날 줄 몰랐네.”

범지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남자가 말을 끝맺었다.

“오랜만이네, 범지훈?”

여사빈. 범지훈도 잘 아는 남자였다. 그리고 잘 아는 만큼 탐탁지 않은 인물이었다.

여사빈은 범지훈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고등학교 내내 성적을 가지고 전교에서 서로 1, 2등을 다투었다. 사람들은 그런 범지훈과 여사빈을 라이벌 관계라고 불렀다. 성적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면 탐탁지 않아 하는 것도 이해가 갔으나 범지훈은 고작 성적 하나 가지고 신경전을 벌일 만큼 예민한 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던하다면 무던하달까.

그런 범지훈인데도 탐탁지 않아 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범지훈의 아버지 범상철이 현재 수장으로 있는 범호파와 비등한 라이벌 관계인 조직, 독사파의 손자가 바로 눈앞의 이 여사빈이었기 때문이었다.

뱀처럼 간사한 새끼라며 아버지 범상철이 이를 갈며 독사파의 수장 욕을 해 대는 걸 어릴 때부터 봐 온 범지훈이기에 아버지처럼 범지훈 또한 독사파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며 독사파의 손자인 여사빈 또한 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지훈이 여사빈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 선배랑 대표님 두 분 아는 사이세요?”

“응, 고등학교 때 동창.”

“알지만 친하진 않습니다.”

여사빈과 범지훈의 대답이 동시에 나왔다. 싸늘한 범지훈의 시선과 사위민을 향해 미소 짓는 입꼬리와는 다르게 무감정한 여사빈의 시선이 마주쳤다.

하필이면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데 취향까지 닮았다. 범지훈은 그게 가장 짜증 났다.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여사빈과 부딪치면 좋을 일이 없었다.

범지훈이 좋아하게 된 애가 있으면 여지없이 여사빈이 수작을 부렸고, 범지훈의 눈에 들어와 몇 반의 누구인지 알아보려 하면 여사빈과 친하다거나 여사빈과 이미 사귀는 중이라는 소식을 듣게 됐다. 항상 그랬다. 둘은 하필 동성을 좋아하는 것도 취향까지도 지랄맞게 똑같아서 누가 먼저 꼬시느냐만 달랐지 항상 같은 남자들을 좋아했다.

좆같은 새끼.

범지훈은 오랜만에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아버지가 독사파의 늙다리 수장을 욕하는 수위만큼은 아니었지만 범지훈이 욕을 하게 만드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범지훈은 짜증이 솟았다.

“뭐, 범지훈 말이 맞긴 하지. 그나저나 위민아. 퇴근한 거야? 집에 가는 거면 데려다줄까?”

누구 마음대로. 범지훈은 여사빈을 자연스럽게 어깨로 가로막으며 사위민에게 말했다.

“말동무, 저도 필요합니다. 사위민 씨.”

“대표님이랑 말동무하고 싶어 하는 회사원도 있나? 위민아, 가는 길에 저녁 같이 먹을래? 내가 아직 저녁을 안 먹고 와서 배가 고프네.”

씨발 새끼. 범지훈은 두 번째로 욕을 뱉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개같은 일이었다. 하필이면 여기서, 하필이면 사위민을, 하필이면 여사빈이.

범지훈은 화가 나다 못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남자만 가능한 범지훈과 다르게 여사빈은 여자도 가능했다. 그러니까 양성애자란 소리였다.

하나만 가능한 범지훈과 다르게 두 가지의 선택지가 가능함으로써 범지훈은 더 이해가 안 갔다. 범위가 넓으면 범위가 좁은 사람을 좀 배려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귀엽고 예쁜 하얀 미인. 남자보다는 여자 쪽에서 더 찾기가 쉬운 게 당연했다. 그러니까 범지훈은 여사빈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고 개씨발 놈이라고 느끼게 된 거다.

“죄송해요, 선배. 대표님하고 같이 퇴근하자는 이야기 먼저 하던 중이었어서요.”

그런데 사위민이 말했다. 뜨겁게 열이 받기 시작하던 범지훈은 바로 그 순간, 머리 위로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상쾌하단 소리였다.

“아, 그래? 아쉽네. 저녁 약속까지 잡힌 거야?”

사뭇 아쉽단 얼굴로 여사빈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절대 태평하지 않을 거란 걸 범지훈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입꼬리가 움직이려는 걸 자제해야 했다. 그리고 사위민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에 범지훈은 선수를 쳤다.

“같이 퇴근이 저녁 약속으로 이어지는 거지. 그것도 모르는 건가?”

“너한테 물은 거 아닌데, 지훈아.”

친한 척 이름을 부르는 것이 범지훈의 화를 더 돋웠다. 사위민이 없었다면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라는 뜻으로 여사빈의 멱살을 잡았을 터였다.

“나 지금 되게 배고픈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혼자 먹긴 쓸쓸하잖아.”

불쌍한 척 눈썹을 늘어뜨리는 뻔뻔한 작태에 범지훈은 비소가 흐를 뻔했다. 쓸쓸은 무슨. 사위민을 노린 새빨간 거짓말인 게 범지훈의 눈에 빤히 보였다. 그렇다고 착한 사위민이 범지훈과의 선약을 무시하고 여사빈을 선택할 리는 없….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거 어떠세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짝 손뼉을 치는 사위민은 와중에 그런 모습마저 깜찍했다. 범지훈은 쿵쿵 뛰는 심장에 가슴께를 지그시 눌렀다.

여사빈과 범지훈 모두 똥 씹은 표정으로 창밖만 주시했다. 뒷자리에 앉은 사위민만 밝은 얼굴로 차 냄새가 좋다며 말을 걸어 댔다. 똥 씹은 얼굴이던 여사빈은 금세 표정을 바꾸며 백미러 너머로 사위민과 다정히 눈을 맞추고 대화를 이어 갔다. 대학 선후배 사이라며 범지훈에게 설명한 대로 범지훈은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친분 가득한 가벼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리고 여사빈의 옆자리, 조수석에 탑승한 범지훈은 창틀에 팔을 걸친 채 이마를 매만졌다. 여사빈의 차에 탑승한 뒤부터 범지훈의 기분은 하향 곡선을 그렸다. 거기다 사위민이 조수석에 타려는 걸 막아 낸 범지훈이 제 발로 이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여사빈의 옆자리에 앉는 게 좆같았지만 사위민이 여사빈의 옆에 나란히 앉아 가는 건 더 좆같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와중에 범지훈이 지독하게 싫어하는 단내가 차 안에 가득했다. 사위민을 태울 생각으로 그런 건지 여사빈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게 달달한 향의 방향제를 품은 차 안에 범지훈은 하지도 않는 멀미가 올라올 것 같았다.

“함께 식사 정말 괜찮으시죠, 대표님? 두 분 친하지 않다셨지만, 대표님이랑 같이 퇴근하기로 약속해 놓고 사빈 선배 따라가기도 그렇고 여기까지 저 보러 온 사빈 선배 저녁도 같이 못 먹고 보내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요.”

“네, 괜찮습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사위민 씨.”

“그래, 친하지만 않다 뿐이지 그래도 우리 둘 서로 알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잖아. 위민아.”

여사빈은 짜증 났지만 그가 맞장구를 친 것만큼은 잘했다. 미안한 낯을 한 사위민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는데 범지훈은 뭐든 못 할까 싶었다. 그 말에 사위민은 다행히 조금 안심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선배, 아까부터 긴가민가했는데 혹시 염색했어요? 머리 색이 더 밝아진 것 같아서.”

“어? 역시 위민이. 아무도 못 알아보던데 어떻게 알았어? 기분 전환 삼아 밝게 염색했거든. 한 지 며칠 되긴 했어.”

그 소리에 여사빈에게 쥐똥만큼도 관심 없는 범지훈도 자연스레 여사빈에게 눈길이 돌아갔다. 밝은 갈색. 그때서야 여사빈의 현재 머리 색이 범지훈의 뇌리에 박혔다.

“선배 원래 자연 갈색이었잖아요. 옅은 밤색이었던가? 머리 색 예뻐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래? 예뻤어?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밝게 빼지 말 걸 그랬나?”

“아뇨, 지금 머리도 너무 잘 어울려요. 제 머리 색이랑도 좀 비슷한 것 같은데 어때요?”

“위민이 너도 염색했었지? 어디서 한 거야? 혹시 네가 한 곳에서 내가 한 거 아니야?”

하하 호호 농담을 주고받는 여사빈과 사위민하고는 다르게 범지훈은 여사빈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이제야 알았는지 여사빈 또한 사위민의 머리 색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색 옅은 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깨닫고 나니 여사빈의 외모 또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범지훈과 비슷한 눈높이에 비슷한 덩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피부만큼은 웬만한 여자 연예인들 못지않게 잡티 하나 없이 우유처럼 새하얀 것도 말이다.

그에 범지훈은 사위민 때문에 잠시 잊고 있던 ‘갈색 머리와 하얀 피부를 피하자.’는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확실히 지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사빈 따위에게 해당될 의도의 다짐은 전혀 아니지만, 여사빈은 피하는 게 상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똥이 무섭다기보단 더러워서 피한다는 맥락과 같았다.

그나저나 사위민과의 대화가 퍽 즐거운지 운전을 하면서도 눈을 한껏 휘어 내리고 웃는 여사빈은 그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범지훈이 보기에도 미남이긴 했다. 그러니까 범지훈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대형견 상 미남이라고 할까. (*‘대형견 상’을 안 좋아할 뿐이지 범지훈은 대형견은 물론 동물 자체엔 아무 악감정이 없었다.) 쌍꺼풀이 진 채 살짝 내려와 전체적으로 인상을 유순하게 보이도록 하는 눈매와 오똑한 코, 코 위의 미인점까지.

선 자체가 굵직굵직해서 남자라는 게 확연히 느껴지기에 미남이었지, 만약 여사빈이 저 얼굴의 여자로 태어났다면 분위기 있는 미인으로 연예계를 평정했을지도 몰랐다.

“선배는 연예인들 담당하는 실력 좋은 샵들 많이 알 거 아니에요. 샵들마다 각자 스타일들은 어때요?”

어느새 염색을 벗어나 다른 화제로 흘러가는 이야기에 범지훈은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여사빈은 사위민과 즐거운 대화를 이어 가느라 범지훈이 자신을 쳐다보든 창밖을 보든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대표님, 여기 사빈 선배가 하는 일이 뭔지 혹시 아세요?”

“네. PS 엔터테인먼트 이사직인 건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는구나. 순수한 감탄이 사위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위민이 말을 걸 때마다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던 범지훈은 그런 사위민의 표정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쌍꺼풀이 진 눈인 건 같은데 여사빈의 눈은 꼴 보기 싫어도 사위민의 눈은 왜 이렇게 예쁜지. 사실 이유도 알고 있었다. 범지훈이 사위민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토끼를 꼭 빼닮은 아방수에게 퇴짜를 맞은 이후 이젠 연애를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범지훈은 또 다른 설렘을 느꼈다.

“경영하시는 분들은 진짜 서로에 대해 잘 알고 계시나 봐요. 사빈 선배도 제가 여기 입사했다니까 대표님 얘기하며 이미 잘 알고 있더라니까요?”

나를? 이라는 눈으로 시선을 옮긴 범지훈은 마찬가지로 자신을 보고 있던 여사빈과 눈이 마주쳤다. 때맞춰 신호가 바뀌어 차가 출발하면서 여사빈이 다시 정면을 보긴 했지만 범지훈은 여사빈이 지은 표정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있었네?”

그리고 여사빈은 첫인사 이후, 처음으로 사위민이 아닌 범지훈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

“내가 PS 엔터 이사인 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않나? 손꼽히는 대형 기획사인데.”

“관심 없으면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잖아, 범지훈 넌.”

“알려고 하는 것과 들려오는 건 다르지.”

“귀를 닫으면 되는 거 아닌가? 집안끼리 사이도 안 좋으면서 굳이 기억하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맞는 말이긴 했다. 범지훈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을 옆모습에 시선을 던졌다.

PS 엔터테인먼트. 풀 네임 Poisonous Snake Entertainment. 독사파가 설립한 기업이었다. 범호파가 대부업체로 사업의 시작을 알렸다면 독사파는 연예계로 뛰어들었다. 여사빈의 아버지 시절, 힘 좀 쓴다는 양아치들이 무슨 무슨 기획이라며 너도나도 기획사를 차리고 매니지먼트 일까지 하며 폭력으로 연예계를 주름잡던 때였다.

그런 곳에 거대 조직이었던 독사파가 뛰어들고 독사파는 [독사 기획]이라는 신생 기획사를 시작으로 체계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그건 여사빈의 아버지 때문이기도 했다. 이어받으라는 조직엔 관심도 없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걸 좋아했던 여사빈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가출을 했다고 한다. 그 후,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약육강식 같은 연예계에서 여사빈의 할아버지만큼의 깡도, 대단한 강단도 없었던 여사빈의 아버지는 양아치들에게 얻어터지고 힘들게 번 공연비 등을 빼앗기기 일쑤였고 결국엔 기획사의 양아치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시도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 범상철에게서 직접 들은 소식이기에 사실일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 독사파가 당시 큰돈을 만지는 게 불분명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뜬금없이 뛰어들 리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여사빈의 고모가 대표로 있는 PS 엔터테인먼트는 눈부신 성장을 했다. 이사 직함으로 고모를 도우며 함께 사업을 시작한 여사빈의 공이 가장 컸다. 그전에는 그저 그런 중대형 기획사였다면 여사빈이 이사로 일을 시작한 이후엔 국내에서 손꼽히는 초대형 기획사로 단기간에 성장했다. 그건 아마도 여사빈의 이름으로 책임지고 데뷔시켰던 아이돌 그룹 하나의 거대한 성공 덕분일 터였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시비를 거는 건가? 여사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범지훈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차 안 공기는 집안끼리 사이도 안 좋다는 여사빈의 발언 후 말없이 창밖만 보기 시작하는 사위민에 더 그랬다.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면서 흘끔흘끔 이쪽을 살피는 사위민의 눈이 당황에 젖어 있는 걸 백미러로 보았음에도 여사빈은 말을 이었다.

“네가 나 싫어하는 건 아니구나 싶어서.”

“…뭐?”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범지훈의 눈썹이 치켜 올랐다.

“싫어하는 사람한텐 관심도 안 주는 사람이잖아, 넌.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예 만날 일이 없었던 나를 알고 있다는 게 뭐랄까, 되게 신기하고 묘해서.”

개소리를 하는군. 범지훈은 여사빈이 하는 이야기를 그렇게 일축했다. 당연히 싫어 죽겠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범지훈은 여사빈의 오해를 정정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관심이 없어도 그건 알고 있는 게 기본이야.”

“감동이네. 나한테 관심은 있었구나.”

미친 새끼인가? 작게 웃어 보이는 여사빈의 옆얼굴을 노려보며 범지훈은 생각했다. 능글맞아 보이는 미소가 이제 보니 개새끼가 아니고 뱀새끼였다. 범상철이 이를 박박 갈며 그렇게 싫어하던 이유를 범지훈 또한 동감할 수 있었다. 독사파 새끼들은 그냥 상종을 안 하는 게 답이었다.

때맞춰 타이밍 좋게 진동이 울렸다. 범지훈은 전화가 끊어질세라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더 이상 여사빈과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범지훈만의 표현이었다.

[지훈아, 바쁘냐?]

누군지 보지도 않고 받은 핸드폰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 이준혁이었다. 와이프와 둘째는 잘 만들었는지 평소보다 쾌활한 이준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범지훈의 일그러졌던 미간이 자연스레 풀어졌다.

“왜?”

[안 바쁘면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밥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럴 줄 알았다, 새끼야. 밥 좀 잘 챙겨 먹고 다니라니까. 정선이가 매번 식재료들 주문해서 너희 집에 보내면 뭐 하냐? 먹는 거엔 별 관심이 없는 놈인데.]

“무슨 일인데?”

보통 사람이라면 나랑 통화하기가 싫은가 하며 주눅이 들게 마련일 범지훈의 단답에도 이준혁은 익숙하다는 듯 통화를 이어 갔다.

[나 이번에 회사 옮긴 거 알지? 담당하게 된 연예인이 누군지 알아?]

“글쎄.”

[놀라지나 마라. 너도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이니까.]

“그렇겠지.”

업계에서 이미 인정받고 있는 유능한 매니저 이준혁이기에 범지훈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유능한 매니저가 담당하게 될 연예인도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인 건 당연한 일일 텐데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러고 보니 이준혁 때문에 그 유명하다는 PS 엔터테인먼트 이사가 여사빈인 것도 알게 됐다. 원인 제공을 한 친구에 범지훈은 잠깐 입매를 굳혔다.

[백사현!]

동시에 범지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대답 없는 것 봐. 새끼, 놀랄 줄 알았다! 더 놀랄 얘기 해 줄까? 지금 옆에 무려 백사현이 있는데 사현이가 같이 저녁 먹는 거 괜찮다고 하거든? 저녁도 먹고 연예인 친분도 만들 겸 어때? 올래?]

백사현이라는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범지훈이 놀란 건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백사. 이준혁이 말하는 동시에 떠오른 뱀 때문이었다. 범지훈과 잔 남자의 등 뒤에 그려진 꽃을 품은 뱀. 화려한 보라색 꽃에 똬리를 틀고 있던 뱀은 분명 백사였다. 남자의 피부가 희었다는 건 바로 그걸로 분명히 기억할 수 있었다. 꽃을 보라색으로 물들였음에도 뱀은 음영만 주고 굳이 물들이지 않은 건 기본적으로 남자의 피부가 희었기에 할 수 있는 표현이었기 때문이었다.

범지훈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의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범지훈은 전혀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 이유는 눈앞에 있는 놈 때문이었다.

“어떡해, 진짜 너무 떨려요. 선배, 저 긴장한 거 티 나요?”

“음, 조금? 근데 누가 봐도 귀여워. 백사현 씨도 오면 귀여운 팬이라며 좋아할 거야.”

바로 눈앞에서 사위민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는 여사빈 때문이었다. 범지훈은 애꿎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솟아오르려는 화를 인내했다. 발 빠른 여사빈에 사위민의 옆자리를 빼앗긴 게 범지훈은 꽤 화가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준혁 쪽으로 갈걸 싶다가도 꽃받침을 하듯 두 손으로 귀엽게 얼굴을 감싸며 ‘정말요?’라고 묻는 사위민에는 여기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어떻게 음식은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회사 대표님에다 유명 연예인도 곧 오신다는데.”

음식이 잔뜩 올려진 트레이를 끄는 직원과 함께 방으로 들어오며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물었다. 사위민의 이모였다.

“보기만 해도 너무 맛있어 보이는걸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범지훈보다 발 빠르게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여사빈에 물컵을 든 범지훈의 손이 살짝 떨려 왔다.

사빈이 넌 볼 때마다 더 잘생겨져서 온다느니, 내가 아들만 줄줄이 낳지 않았으면 우리 딸 사위를 시켜 줬을 거라느니 하며 사위민의 이모 또한 만면 가득 웃음을 띠고 대답하는 게 여사빈이 사위민과 함께 이곳을 얼마나 자주 방문했는지 알게 해 줬다.

여긴 사위민의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고깃집이었다. 사위민의 부모는 인천에서 본점을 운영 중이고 장사가 너무 잘되어 이모네 가족이 이곳에서 2호점을 오픈해 운영한다고 했다.

오픈한 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 아직은 새것의 느낌이 물씬 나는 가게는 내부 또한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고 단체 손님들을 위한 프라이빗 룸 또한 여러 개 운영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 때라 프라이빗 룸 바깥은 많은 손님으로 북적였기에 잠깐의 대화를 마치고 사위민의 이모는 바쁘게 방을 나갔다.

이곳은 보통은 15인 이상의 단체 손님들을 위해 만든 방이었지만 사위민의 부탁에 손님들을 일부러 내보내고 룸 하나를 전부 비워 둔 모양이었다. 고작 세 명만 앉아 있기엔 심하게 넓은 식탁에서 범지훈은 손목에 있는 시계를 흘끔거렸다. 퇴근길이라 한창 차가 막힐 시간대였다.

“연예계 쪽엔 관심도 없을 줄 알았더니 백사현 씨랑은 어떻게 이어진 친분이래?”

그러다 여사빈이 범지훈을 향해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전, 여사빈의 차 안에서 통화를 하던 범지훈이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는 불쑥 ‘일행이 오고 싶다는데 같이 끼어도 되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지금의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사위민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여사빈이 범지훈을 바라봤고, ‘일행 누구?’라는 여사빈의 물음에 범지훈은 ‘친구랑 백사현.’이라는 말로 일축했었다. 그리고 사위민은 그 말에 굉장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백사현이요? 그 백사현? 제가 아는 가수 백사현 맞아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 사위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범지훈을 바라봤고, 범지훈은 ‘맞긴 한데, 역시 어렵겠죠.’라며 다시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려 했다.

[아니요! 당연히 되…! 되죠, 선배…?]

흥분하여 소리치려던 사위민이 여사빈의 존재를 깨닫고 슈렉 속 장화 신은 고양이의 눈빛으로 동의를 구한 게 좀 전의 상황이었다. 범지훈은 그 뒤로 일행들에 대해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궁금증을 참다못한 여사빈이 물어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위민 또한 범지훈을 빤히 바라보며 궁금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범지훈은 불편한 얼굴로 톡톡 식탁을 두드렸다.

유명 연예인이다 보니 사람들이 몰릴 걸 피하고자 프라이빗 룸 하나를 통째로 비워 달라고 했을 때부터 사실 범지훈은 폐를 끼친 사위민과 그의 이모님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여사빈은 범지훈이 알 바 아니었다.) 게다가 전화 속 이준혁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끈질긴지 저녁 선약이 있다는 범지훈의 거절에도 매달리며 네 자랑 잔뜩 해 놨는데 너 안 오면 무슨 쪽이냐느니, 미남 친구랬더니 사현이도 너 무지 보고 싶어 한다느니 구구절절 이유를 대면서 범지훈을 아주 귀찮게 만들었다.

음식점에 아직 도착도 안 했다고 사현이가 너 먹고 싶은 곳으로 가자고 여태 기다렸는데 어떡하느냐는 마지막 이준혁의 말엔 마음이 약해진 범지훈이 실례를 무릅쓰고 사위민에게(*다시 말하지만 여사빈은 알 바 아니었다.)물어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친구가 매니저인데 담당하게 된 연예인이 백사현이라서.”

알아서 뭐 하려고, 라는 식의 불퉁한 대답은 여사빈 옆에서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사위민에 입 안으로 쏙 들어갔다. 범지훈은 최대한 성의 있는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와, 너무 멋있어요. 대표님. 저 백사현 씨 진짜 팬이거든요.”

그리고 선망의 눈으로 범지훈을 바라보는 사위민에는 범지훈의 기분이 상향 곡선을 그렸다. 이어질 대화에서 여사빈이 끼어들 자리라고는 없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습니까?”

“네! 팬 된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데. 저 백사현 씨 솔로 앨범 나왔을 때 뮤비 보고 한눈에 반했었거든요. 대표님은 백사현 씨 무대 보신 적 있으세요?”

“노래는 들어 봤습니다. 정말 잘 부르시더군요.”

“그렇죠? 특히 그 부드러운 고음! 진짜 미쳤… 아, 아니 대박이에요.”

잔뜩 흥분하여 비속어까지 내뱉을 뻔한 사위민이 당황하는 모습이 자못 귀여워 범지훈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느슨히 풀어졌다.

“이번에 두 번째 솔로로 컴백한다는데 혹시 얘기 들으셨어요? 티저 떴는데 벌써부터 대박적이거든요.”

“궁금하네요.”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든 사위민은 백사현의 티저 영상을 보여 줄 기세였다. 귀여운 사위민의 모습을 지켜보며 범지훈은 슬쩍 여사빈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범지훈을 보고 있었던 건지 곧장 눈이 마주친 여사빈에 범지훈은 불쾌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예요, 대표님! 선배도 같이 봐요.”

범지훈의 미간이 다시 펴졌다. 핸드폰을 여사빈과 범지훈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세운 사위민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유니크한 비트가 세 사람이 있는 룸 안을 울리며 검은 화면 속,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내 화면은 전환되어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비췄다. 그때서야 범지훈은 백사현이라는 가수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영상의 분위기 때문인지, 흑백 화면 속 백사현은 권태로운 눈빛에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연예인은 연예인인지 무시할 수 없는 아우라가 풍기는 미남이었다. 범지훈은 백사현을 그렇게 생각했다.

[Baby, we can stay up.]

30초가량의 짧은 영상의 막바지. 비트가 끝나며 처음으로 백사현의 노래 한 자락이 흘러나왔다. 영상은 끝났지만 범지훈은 순간, 백사현의 목소리가 꽤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어때요?”

“좋은데? 한 소절만으로도 실력파라는 게 느껴져. 목소리도 얼굴처럼 잘생겼네.”

여사빈도 같은 생각인지 대답했다. 자신의 가수가 좋은 평을 받으니 기쁜지 사위민이 신이 나서 다른 영상도 하나만 더 보여 주겠다며 찾기 시작했다.

범지훈은 어쩐지 새로운 기분이었다. 백사현이라는 이름이야 워낙에 유명해서 지나가면서도 들었고 거리에서도 그의 노래를 들었으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는 사람들에 호기심이 동해 직접 노래를 재생해 들어 본 적도 있었다.

가게에 붙어 있는 백사현의 광고 포스터를 본 적도 있었고 뮤직 플레이어 속 앨범 아트 디자인이 본인 얼굴이라서 본 적도 있었지만 새 티저를 통해 본 백사현은 범지훈이 알고 있던 그 얼굴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천의 얼굴. 연기파 배우들을 보통 그런 식으로 많이 표현했지만 아이돌 가수임에도 백사현에게는 그렇게 표현을 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이거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상이거든요.”

사위민이 보여 주는 화면 속에는 또 아까와는 다른 백사현이 있었다. 아까는 앞머리가 이마를 완전히 덮고 있었다면 지금은 반쯤 넘겼다고 해야 할까. 절반 정도의 머리카락이 이마를 흐트러지게 덮은 채 나른한 시선으로 화면을 응시하는 백사현은 붉은 벨벳 소파에 누워 있는 채였다.

몽환적인 음악이 흘렀고 범지훈은 화면 속 백사현, 정확히는 재킷 하나만 걸친 백사현의 상반신을 응시했다. 벌어진 재킷 사이로 남자라는 게 느껴지는 백사현의 단단한 몸이 설핏 드러나 있어 섹슈얼한 느낌이었다.

여사빈도 흥미가 생겼는지 처음 봤던 티저 영상에 비해 이번 영상은 꽤 열심히 시청 중이었다.

“지훈아!”

동시에 프라이빗 룸의 문이 열리고 이준혁의 얼굴이 보였다. 범지훈을 보고 밝아지는 그가 서둘러 들어오며 뒤를 따르는 남자 또한 함께 들어왔다.

검은 캡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알이 큰 안경을 끼고 큼직한 마스크로까지 얼굴을 거의 가린 남자였다.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 아, 지훈이랑 선약하셨던 분들이시죠?”

“안녕하세요.”

나긋한 목소리가 뒤이어 인사를 건넸다. 범지훈은 어쩐지 낯설지 않은 남자에 그가 캡 모자를 벗는 걸 바라보았다. 모자에 눌렸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금세 편 남자가 마스크까지 벗고 나서야 안경만 낀 맨얼굴이 드러났다.

“백사현이라고 합니다.”

하얗게 미소 짓는 남자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 아이돌 그룹인 ‘에스’의 멤버이자, 첫 번째 솔로의 대성공 후 두 번째 솔로 활동을 준비 중인 가수 백사현이었다.

그리고 범지훈은 조금 놀랐다. 미디어 매체나 영상으로 접한 게 전부지만 그 속에서 백사현은 존재감이 크고 단단해 보였다. 바꿔 말하면 언뜻언뜻 드러나는 선이 곱긴 했지만 분명 미남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의 백사현은 예상을 많이 뛰어넘었다.

손님들의 등장에 여사빈과 사위민 마지막으로 범지훈까지 일어서니 알 수 있었다. 백사현은 미남보다는 미인 쪽이었다. 알이 큰 은테 안경을 낀 얼굴은 앞머리까지 내려오니 훨씬 유하고 앳되어 보였다. 30대라고 들었는데 액면가는 고등학생이래도 당연히 믿을 정도였다. 그리고 사위민보다는 컸지만 여사빈과 범지훈의 눈높이보다는 훨씬 아래였다. (*여사빈과 범지훈은 평균 남자 키보다 매우 큰 키를 소유했다.)

저 어디에 아까의 단단한 몸이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범지훈이 입어도 조금 남을 듯한 백사현의 박시한 흰 티는 백사현을 더 가냘퍼 보이게 했고 그 아래 청바지의 조합은 제 나이보다 심하게 어려 보이는데 한몫을 했다. 마지막으로 웃고 있는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맑았다.

아까의 영상 속에서의 나른하고 섹시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범지훈은 입을 가리며 턱을 매만졌다. 사위민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범지훈이 꽂힐 정도로 취향인 외모였다. 게다가 제일 마음에 드는 건 피부도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하얬지만, 머리카락 색도 갈색이 아닌 하얀색에 가까운 백발이라는 것이었다. 범지훈은 그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얀색이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백사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지훈이랑 식사하시려는데 끼여서 방해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유능한 매니저인 만큼 친화력 또한 만렙인 이준혁의 너스레를 시작으로 백사현 또한 미안한 듯 웃었다. 백사현이 들어올 때부터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 사위민이야 절대 아니라는 듯 도리질 쳤고 여사빈은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띠었다.

범지훈은 어느새인가 늘어난 일행들에 복잡한 얼굴이었다.

“준혁이 형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정말 미남이세요.”

그러다 불쑥 말을 거는 백사현에는 살짝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범지훈과 시선을 맞추며 백사현은 눈을 휘었다.

“…네.”

감사합니다, 라며 여사빈처럼 능글맞은 비즈니스 미소를 짓거나, 미남은 무슨요, 라며 이준혁처럼 떠는 너스레는 범지훈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뚝뚝한 대답을 하고 나서 범지훈은 후회했다.

“지훈 씨는 저 알고 계시나요?”

하지만 굴하지 않고 백사현이 다시 말을 걸었다. 범지훈은 이번에 성의껏 대답하리라 다짐했다.

“노래, 들어 봤습니다.”

왜인지 백사현의 옆에 앉은 이준혁이 마른세수를 하는 것 같았다. 범지훈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비어 있는 범지훈의 옆자리에 당연히 이준혁이 앉지 않고 백사현을 앉힐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좋더군요. 이번 신곡도 기대됩니다.”

이준혁의 눈치를 살피며 범지훈은 뒷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은지 마른세수를 멈춘 이준혁은 백사현을 쳐다봤다.

“감사해요, 준혁이 형이 지훈 씨 칭찬을 정말 많이 해서 한 번쯤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친해지고 싶어서요.”

그제야 범지훈은 깨달았다. 이준혁이 아싸 범지훈을 위해 연예인 동생이란 멋진 인간관계를 만들어 주려는 것을.

“티저만 봤는데 벌써 기대되더라고요, 백사현 씨.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PS 엔터테인먼트 이사 여사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또 여사빈이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PS 엔터 소속은 아니지만 다른 초대형 기획사 소속의 인기 아이돌 멤버이니만큼 관심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사현은 여사빈의 소개에도 만나서 반갑다며 의외로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마자 다음 타자는 사위민이었다. 정말 팬이라며 얼굴이 빨개진 채 손을 내미는 사위민은 백사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게 긴장을 하는 게 뻔히 보였다.

“위민 씨라고요? 예쁜 이름이시네요. 저 좋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여사빈이랑은 다르게 사위민과는 똑바로 눈을 맞추며 악수를 하는 백사현이 화사하게 웃었다. 이준혁을 뺀 세 남자가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이었다. 연예인은 연예인인지 웃는 얼굴이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

아까에 비해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사위민의 얼굴에 백사현은 걱정을 했다. 연예인과 팬의 만남에 여사빈 또한 쉽게 끼어들지 못했고 범지훈도 예쁜 미인과 귀여운 미인이 나누는 대화들을 즐겁게 구경했다.

“어머, 세상에. 진짜 티비에서 보던 그분이네. 백사현 씨 맞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위민의 이모가 방으로 들어왔다. 끌고 온 트레이 위에는 시키지도 않은 소주와 맥주가 한가득이었다.

“이건 내가 쏘는 서비스. 남자들끼리 모여서 할 게 술 마시는 것밖에 더 있나.”

넉살 좋은 여사빈과 이준혁이 감사하게 받으며 황량할 만큼 넓었던 테이블이 어느 정도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도 백사현은 사위민과 그의 이모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핸드폰도 꺼내 들며 부탁하는 것에 백사현은 흔쾌히 포즈까지 취했다.

***

“농담 아니구 대표님 진짜 조-온나 잘생겼어요.”

이 중 가장 먼저 취한 건 사위민이었다. 혹시 소맥 좋아하느냐며 자신이 비율을 기가 막히게 탄다고 본격적으로 숟가락까지 꺼내 들어 술을 말았으면서 본인이 제일 먼저 맛이 갔다. 초점이 없는 눈으로 범지훈을 손가락질하며 말하는 사위민에 범지훈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사위민의 욕은 굉장히 찰졌다.

“무섭기는 뭐가 무섭다고! 가까이에서 가만히 보면 진짜 씨발, 존나 귀엽단 말이에요. 대표님도 본인이 귀여운 거 알아요?”

범지훈은 진짜로 할 말이 없었다.

“알아요, 몰라요?!”

“…압니다.”

“그래, 아니 진짜 존나 잘생기고 귀여운데 왜 무서워하냔 거예요. 사람들이 말이야 그러면 안 돼요. 저는 대표님 개잘생겨서 처음부터 존나 좋았어요.”

범지훈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좋다고 해서 기쁘기는 한데 술에 취해 욕을 하는 사위민은 너무 박력적이라 감당하기 어렵기도 했다. 사위민을 챙길 때는 언제고 여사빈은 먼 곳을 보며 술만 홀짝였다. 백사현만 사위민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사위민을 다독이며 조용히 시켰다.

술에 취해도 팬은 팬인지 박력적이던 사위민도 그때마다 고분고분했다. 그러다 백사현의 손을 붙잡은 것도 갑자기였다.

“형, 제가 형도 진짜 좋아하는 거 알아요? 나 씨발, 백사현 찐으로 사랑해.”

이쯤 되면 매니저인 이준혁이 말릴 법도 하건만, 이준혁은 아내의 전화를 받으러 이미 방 밖을 빠져나간 뒤였다. 범지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여사빈 쪽을 바라봤다.

“위민이 쟤 취하면 원래 저래. 저러다 잠드니까 그냥 놔둬.”

여사빈은 지금 상황이 퍽 익숙한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범지훈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백사현 씨가 곤란해하잖아.”

“미안한데 나도 취한 위민이는 감당 불가라서. 뭣하면 백사현 씨랑 네가 먼저 나가던지. 난 여기서 위민이랑 둘이 마실 테니까.”

“널 뭘 믿고 둘이 놔두지?”

“그럼? 내가 위민이 잡아먹기라도 해?”

“여기선 잡아먹지 않겠지만, 또 모르지.”

여기선 잡아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을 거다. 나가면 사위민의 이모가 돌아다니고 있을 게 뻔한데. 대신 취한 사위민을 어디로든 데리고 나가 어떻게 할 수는 있었다. 범지훈이 술에 취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누군지도 모르는 뱀 문신의 남자에게 먹힌 것처럼.

“안 나가, 못 믿으니까.”

범지훈은 여사빈에게 빼앗긴 그동안의 남자들을 떠올리며 맥주잔에 소주를 부었다.

“잔 비었는데 마시지.”

여사빈의 빈 맥주잔에 말이다. 범지훈은 여사빈이 취해 나가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에 여사빈 또한 너도 비어 있다며 범지훈의 잔에 술을 따랐다. 가득 차 있는 범지훈의 맥주잔이 아닌 옆에 있던 빈 물컵에 말이다. 안 마셔? 여사빈이 물었고 마주치는 두 남자의 시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주량이라면 범지훈은 자신 있었다. 독한 양주를 온더락으로 가득 채워 몇 잔을 연거푸 비워도 멀쩡했는데 고작 17도 정도의 소주에 나가떨어질 리는 없었다.

“사현아, 지훈아. 와이프가 화가 많이 나서 집에 가 봐야….”

한참이 지나, 축 처진 얼굴로 돌아온 이준혁이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로를 노려보며 전투적으로 술을 따라 주고 그대로 들이켜고 또 술을 따르는 여사빈과 범지훈, 백사현의 손을 붙잡고 구구절절한 주접문을 읊고 있는 취한 사위민까지. 이준혁은 통화를 좀 길게 하긴 했지만, 그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사현아, 이게 무슨 일이냐…?”

그나마 이성이 있는 백사현에게 물었지만 백사현 또한 곤란하게 웃고 말았다.

“먼저 가, 형. 누나 화 많이 났다면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곳에 너를 혼자 두고 어떻게….”

“괜찮아, 택시 타면 여기서 금방인데. 여기 위민 씨 가족 가게이기도 하고 금방 챙겨 주고 가면 돼.”

“야, 그래도 사현아.”

“두 사람도 멀쩡하잖아. 팬이라는데 이대로 손 뿌리치고 일어나긴 그래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35세의 덩치 큰 두 남자를 눈짓하며 백사현은 사위민에게 꼼짝없이 붙들린 제 두 손까지 들어 보였다.

결국 적당히 하다 들어가라면서 이준혁은 못 이긴 척 방을 나섰다.

“사현이 너 집에 들어가면 바로 문자 해. 내일은 오후 스케줄 하나밖에 없다지만. 범지훈, 너도 인마! 집에 잘 들어가고.”

그리고 거기까지가 범지훈의 선명한 기억의 전부였다. 얼핏 본 소주병의 뚜껑이 흔히 알던 초록색이 아닌 빨간색이라는 것에 작은 의문을 품으며 여사빈이 또 따라 준 술 한 컵을 그대로 비운 범지훈은 기억이 끊겼다.

***

누군가가 범지훈을 안은 채 침대에 바로 눕혔다. 바스락. 시트에 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고 눈을 감고 있는 범지훈의 얼굴에 인기척은 잠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곤 그는 침대에 앉은 몸을 그만 일으키려고 했다. 갑자기 커다란 손에 손목이 잡히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름…이 뭐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린 범지훈은 물었다. 술이 깨지 않아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이었다. 키만큼이나 길쭉하고 큰 범지훈의 손에 누군가의 손목은 단단히 틀어 잡힌 채였다. 이름을 답하기 전까진 놔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악력에도 잡힌 이는 태평했다.

[글쎄.]

범지훈의 손목을 잡은 채로 손쉽게 그 손아귀에서 제 손목을 빼낸 이는 웃었다.

[전에도 말해 줬는데 기억 못 했으면서. 술이 깨면 또 잊을 거잖아.]

범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에. 남자는 그때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말대로 이름은 분명히 들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범지훈이 밤새 그 이름을 말하며 남자에게 애원하고 매달렸을 리가 없으니까. 근데,

“좋, 았는데….”

[뭐가?]

“키스…랑 섹스.”

남자에게서 작은 웃음이 흘렀다. 범지훈의 손목을 그러쥔 채 다가온 남자가 침대를 짓누르곤 범지훈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나도 좋았어요. 당신이랑 한 거.]

“…예뻐.”

[예뻐?]

“응.”

그러니까 하고 싶어.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코앞에서 속삭이는 남자의 입술을 겹쳐 물려던 범지훈은 가볍게 어깨를 밀어 다시 침대에 눕혀 버리는 남자에 시도에서 그쳤다. 술에 취해 물먹은 솜이 됐다지만 범지훈은 왜인지 이 남자의 앞에선 한없이 무력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안 돼. 잊었잖아, 날.]

‘얄밉네.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도.’ 중얼거린 남자가 말과는 다르게 흐트러진 범지훈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내가 누군지 생각해 봐요, 그리고 날 찾아내. 그러면.]

‘원하는 만큼 마음껏 안아 줄 테니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범지훈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그리고 잡고 있던 범지훈의 손목을 끌어와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이건 벌이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가 범지훈의 손가락을 입 안에 넣었다. 움찔 범지훈의 눈썹이 구겨지고 입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는 남자의 입술 사이로 긴 은사가 늘어졌다. 그런 범지훈의 손에 남은 건 익숙한 잇자국이었다.

[상큼토끼, 갠소, 공금,절갠♥]( ˘ 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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