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attraction
범지훈은 눈을 떴다. 흰색 커튼에 가려진 커다란 창밖은 아침 해가 밝았다는 걸 알려줬다. 범지훈의 시야는 낯선 방 안을 담았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범지훈은 덮고 있는 이불이 흰색인 것과 낯설지만 익숙한 방의 구조에 이곳이 호텔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러자마자 시선은 아래를, 정확히는 입고 있는 자신의 차림새에 향했다. 다행히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런대로 입고 있었다. 재킷은 어디로 갔는지 검은 목 폴라와 정장 바지만 입고 있었지만 헐벗지 않았다는 사실에 범지훈은 안도했다. 지난번,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다 깨어난 직후의 일이 꽤 충격이었는지 낯선 곳에서 일어나자마자 옷차림새부터 확인하는 게 범지훈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 시선은 자신의 오른손을 향했다. 정확히는 옷차림새를 확인해 보던 시선에 오른손이 들어왔다.
“어….”
그 범지훈 대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얼빠졌다. 하지만 실제로 범지훈은 꽤 얼이 빠졌다. 오른손에 남은 건 익숙한 잇자국이었다. 아니,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아무리 봐도 본 적이 많은 자국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범지훈의 몸에 빼곡히 남았던 흔적이었으니까.
그때서야 범지훈은 깨어나기 전까지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꿈, 이… 아니었어?”
또다시 혼잣말이 얼빠지게 흘러나왔다. 칭얼대듯 요구하던 술 취한 범지훈과 그를 달래 주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범지훈의 머리에 떠올랐다.
[안아 주면 또 도망갈 거잖아. 나만 혼자 버려 두고.]
마지막엔 달라붙는 범지훈을 침대에 가만히 내리누른 채 달래듯 그의 이마에 입 맞추던 부드러운 입술이었다. 그렇게 범지훈은 잠이 들었고 지금에서야 일어났다. 그런데 그게 모두 꿈이 아니라고 오른손에 남은 흔적이 말하고 있었다. 범지훈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지금 그 남자를 찾아 범지훈은 넓디넓은 호텔 스위트룸 안을 전부 돌아다녔다. 다른 방도 부엌도 거실도 욕실과 파우더 룸, 옷장 속도 심지어 침대 아래까지 전부. 범지훈은 성인 남자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뒤졌다. 그럼에도 남자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잠든 범지훈을 혼자 이곳에 두고 남자가 가 버린 것이란 결론에 다다랐다.
범지훈은 허탈한 숨을 뱉었다. 이건 그날, 잠든 남자를 두고 범지훈이 도망치듯 떠나간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때와 지금, 서로의 역할만 바뀌었을 뿐이지 다를 것 하나 없었다. 범지훈은 이게 꽤 기분이 더럽다는 걸 알게 됐다. 역지사지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다.
모든 기운이 빠지니 뒤늦게서야 찝찝한 아랫도리가 느껴졌다. 무언가를 지린 건지 질척하게 젖어 있는 축축한 속옷의 느낌에, 둔해 빠진 범지훈은 그제야 욕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돌았군.”
이마를 짚으며 범지훈이 중얼거렸다. 스스로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흐릿하게 기억하는 꿈속 아니, 어젯밤엔 남자와 어떠한 성적 행위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검은 드로즈에 선명히 묻어난 건 정액이었다. 범지훈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서른다섯 살을 먹고 몽정을 했다. 아랫도리엔 분명 그 어떤 자극 행위도 없었다. 아니, 사실 어젯밤의 남자가 야해 빠지긴 했다. 아니, 그렇지만 얼굴도 기억 안 나는데. 믿을 수 없는 사실에도 오락가락하는 생각에도 범지훈은 애꿎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까치집이 된 머리와 거북한 속은 어제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알게 했다.
어제…? 그리고 범지훈의 복잡한 머릿속은 분명한 기억이 나는 어제를 떠올렸다.
[범지훈, 너도 인마! 집에 잘 들어가고.]
방을 빠져나가기 전, 범지훈에게 그렇게 작별 인사를 한 이준혁이 문을 닫았고 그때 방 안에 남은 사람은.
“사위민… 여, 사빈… 백…사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꼽던 범지훈은 침음을 흘렸다. 셋과 함께 있었던 게 분명히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그럼 취한 범지훈을 여기로 데려온 게 그 셋 중 하나가 되는 거였다. 그리고 동시에, 그 셋 중 하나가 범지훈을 잡아먹은 남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누가 되었든 범지훈에겐 최악이었다. 아니, 사위민은 그나마 나은가 싶다가도 범지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작고 예쁜 사위민에게 애원하며 매달리는 커다란 덩치의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상상만 해도 조금… 비위가 상하는 것 같았다.
여사빈이랑 백사현은 해당되면 안됐다. 해당되지 않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냥 해당 자체가 되면 안 됐다. 씨발.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범지훈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여사빈은 상상조차 끔찍했고 백사현은 그러니까, 자신의 친구 이준혁을 생각하면 이딴 식으로는 아니었다.
…그 셋을 피해 다녀야 하나?
잠시 혹했지만 범지훈은 생긴 게 누아르였지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뻔뻔한 인간이 아니었다. 범지훈은 자신의 무서운 배경과는 다르게 꽤 도덕적인 가치관을 소유했다. 누가 되었든 사과는 해야 했다. 술에 취해 함부로 들이댄 것도, 합의하에 관계를 했음에도 잠든 상대방을 그대로 두고 혼자 가 버린 일에 관해서도.
매너라곤 전혀 없는 자신의 행동에 한 손엔 젖은 속옷을 든 채 범지훈은 마른세수를 했다. 상종 못 할 쓰레기라는 글자를 얼굴에 써 붙이고 다녀도 할 말이 없었다.
***
우선 범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생체 리듬이 이미 몸에 박혀 술을 얼마나 퍼부었든 몇 시에 자든 일어나는 시각은 항상 같은 새벽녘이었다. 이제 막 아침 6시를 알리는 스마트폰 화면의 잠금을 풀고 범지훈은 서둘러 인터넷 창에 백사현이란 세 글자를 입력했다.
남자와 잤던 그때의 날짜는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몰라 다음 날, 우정선에게 출근을 못 하겠다는 문자 속 날짜까지 확인했다.
9월 1일. 그날 사위민과 여사빈, 백사현이 뭘 하고 있었는지 확인하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연예인인 백사현이 가장 확인하기 쉬웠다. 이준혁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는 게 사실 제일 간단했지만 범지훈은 이준혁에게 이유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21세기 인간답게 검색을 하기로 했다.
‘200901 백사현 스케줄.’
검색을 하기가 무섭게 현직 인기 아이돌인 백사현 스케줄 모음이라느니 직찍이라느니 그날의 백사현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오전엔 새로운 솔로 곡 뮤비 촬영 스케줄이 있어 촬영 현장으로 출근했고 뮤비 현장 직찍이라며 소속사에서 공식 사진들까지 올라왔다. 그 후엔 팬들과 소통하는 라이브 방송을 했다. 라이브 방송이 끝났을 때가 오후 3시경. 그리고 사진은 없었지만, 소속사 홈페이지 속 공식 스케줄 표와 인터넷 기사들은 백사현의 깜짝 예능 출연에 대해 알리고 있었다.
항상 늦은 저녁 촬영을 고집하는 매니아층이 탄탄한 추리 예능. 살인 사건을 다루는 음산한 분위기의 예능답게 한번 찍으면 다음 날 새벽 5시 정도에 촬영이 끝나기로 유명한 프로그램이었다. 고정 출연자들이 ‘또 연장 촬영이야? 지금이 몇 시인 줄 알아? 새벽 5시라고! 지금이면 촬영을 마쳤어야 정상이지!’ 하며 과장되게 항의하는 걸 그대로 내보낸 적도 있기에 한때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걸 확인한 범지훈은 빠르게 계산했다. 아방수에게 차이고 실의에 빠진 자신이 와인 바로 차를 몰았던 시간과 백사현의 예능 촬영 시간까지. 일치했다. 정확히 몇 시 몇 분에 촬영이 들어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늦은 저녁이래 봤자 오후 8~11시 사이였고 그 시간에 범지훈은 아방수와 카페에 있다가 와인 바로 향하고 있었다. 필름이 끊기기 전, 와인 바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이 오전 12시쯤이었기에 더욱 확실했다.
백사현은 분명 아니었다. 다음 주 금요일 밤에 방송될 그 예능의 공식 예고편 영상 속, 백사현이 등장하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범지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럼 용의자는 사위민, 여사빈 이 둘로 나뉜다는 건데.
아까 본 추리 예능 예고편의 영향 탓인지 범지훈은 꼭 탐정처럼 사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둘 중 누구든 끔찍했지만 그래도 범지훈은 백사현 다음으로 검색하기 나은 기업인 여사빈의 이름을 쳤다.
그러다 손가락은 잘못하여 그만 홈 버튼을 터치했다. 검색창 대신 새까만 홈 화면으로 돌아오고 통화에 뜬 알람 1이 그제야 범지훈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못 봤던 부재중 전화 표시에 눌러 들어가 보니 처음 보는 핸드폰 번호가 찍혀 있었다. 그것도 새벽 4시에 걸려 온.
아래로는 같은 번호로 통화한 기록이 남아 있었는데 범지훈은 이 상대와 1시간이 넘게 통화한 것에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천성이 말이 많지 않은 범지훈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애인은 물론 부모와도 1시간 동안이나 통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범지훈은 아직 이른 아침 시간임에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길래 평생 해 본 적 없던 자신만의 규칙까지 깨며 통화를 한 건지 실례임에도 당장 확인하고 싶었다.
[…여보세요?]
긴 연결음 끝에 아직 잠기운이 남은 잠긴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들려왔다. 남자였다.
“누구시죠?”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범지훈은 물었다.
[범지훈?]
상대방은 그에 이상하다는 듯 범지훈의 이름을 불렀다.
“…절 아십니까?”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잠 덜 깼어?]
범지훈의 눈이 커졌다. 분명 들어 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뭐야. 너… 설마, 잊었어? 어제 그렇게까지 했으면서?]
황당하다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낯익었다.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뒷목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사빈이었다.
“무…슨 말이지?”
범지훈은 태연해지려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까진 어찌하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방 아니 여사빈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초조해지는 건 범지훈이었다. 주먹 쥔 손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려 오는 것에 침대 위로 꾸욱 내리누르며 범지훈은 다시 한번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 냐고 물었어.”
[…됐어.]
“뭐?”
[나만 기억하는 걸, 술 깨니까 전부 잊은 사람한테 말하면 뭐 하냐고.]
범지훈의 숨이 멈췄다.
[-말해 줬는데 기억 못 했으면서. 술이 깨면 또 잊을 거잖아.]
[-얄밉네.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도.]
여사빈의 말과 동시에 떠오르는 건 희미한 어젯밤의 일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범지훈을 내려다보며 속삭인 남자. 조금은 투정을 부리듯 내뱉어진 그 말들.
“…말 해.”
가까스로 숨을 내쉰 범지훈은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말했다.
“말, 해 주면 기억날 것 같으니까 말하라고.”
[싫어.]
허?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뱉었다.
“여사빈.”
[어제는 그렇게 안 불렀는데.]
“…뭐?”
[사빈아, 라고 불러 줬잖아, 다정하게.]
씨발. 결국, 범지훈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다시는 술을 처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핸드폰 너머 여사빈은 퍽 즐거운 듯 이젠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더 불러 주면 말해 줄지 말지 생각해 볼게.]
“…여, 사빈.”
[불러 줄 생각도 없지? 다 보여.]
다시는, 죽어도 다시는 술 따윈 입에도 대지 않을 테다. 범지훈은 다짐하고 계속 다짐했다.
***
우정선은 흘끔 주변을 살폈다. 우정선과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뒷걸음질을 치는 사람들은 이내 귀신이라도 본 듯 뒤를 돌아 헐레벌떡 걸음을 옮겼다. 물론 우정선이 무서워서는 아니었다.
“…대표님.”
원인은 범지훈. 범호 캐피탈의 대표 때문이었다. 우정선의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범지훈은 누가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단단히 화가 난 사나운 맹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늘… 컨디션 괜찮으십니까?”
“네.”
우정선의 물음에 곧장 대답하는 범지훈은 대답과는 다르게 얼굴에 드러난 것처럼 지금 매우 저기압이었다. 그건 오늘 아침 여사빈과의 통화를 끝맺으면서부터였다.
[다정하게 불러 주기가 힘들면 만나 주기라도 해. 언제 시간 돼?]
분명 누구인지 찾는다면 가장 먼저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기로 생각했는데, 안 봐도 능글맞은 미소를 만면 가득 그리고 있을 여사빈이라서 범지훈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과는 하는 게 도리였다. 그러니까, 미….
[…범지훈? 대답 안 해? 그럼 나도 말해 주기 곤란한데.]
미….
[어떡한다?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되게 재밌는 이야기인데.]
미친놈아, 네가 날 말렸어야지! 여사빈에게 그렇게 외치고 싶은 걸 범지훈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냈다. 어젯밤의 상대가 야해 빠져 보였었다고? 범지훈은 차라리 눈으로 똥을 싸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사빈 따위를 보고 야해 빠져 보인다고 느낀 눈은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아니면 뇌가 잘못됐던지. 그래, 뇌가 문제였다. 알코올에 절여진 뇌는 정말로 맛이 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온갖 생각들을 이어 가던 범지훈은 재촉하는 여사빈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다음 주, 금요일.”
“네?”
“다음 주 금요일 날, 제 스케줄이 어떻게 됩니까?”
“따로 중요한 일정은 없으십니다. 퇴근 후에 바로 귀가하시면 되는데, 약속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약속이라, 약속이라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있긴 했다. 다음 주 금요일. 바로 여사빈과 만나기로 정한 날짜였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은 것도 아닌 날짜. 일주일 정도면은 그래. 범지훈은 생각이란 걸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1년 뒤에나 만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여사빈도 가만있지 않을 것 같고 범지훈도 아무리 여사빈이라지만 그건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 비서님.”
“네. 대표님.”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벌써부터 본인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긴 회사였으므로 우정선은 똑 부러진 우 비서의 얼굴로 대표의 이어질 이야기를 경청했다.
“배고픈 호랑이가 먹이를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토끼 고기를 발견해서 얼른 집어 먹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뱀 고기라서 크게 탈이 났습니다.”
“…뱀 고기를 먹는데 호랑이가 왜 탈이 나죠?”
“뱀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 네. 그래서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우정선은 인내를 갖고 들었다. 범지훈은 종종 전래동화식으로 본인의 고민을 우정선에게 상담받곤 했다. 역시 문과는 문과인 모양이었다. 이과인 우정선과는 차원이 다른 범지훈의 비유에 그의 고민을 들어 주면서도 우정선은 놀랄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런 전래동화를 들려 줄 때에는 범지훈이 유일하게 말이 가장 많아지기도 하는 시간이었으니 우정선은 그게 기껍기도 했다.
“몇 날 며칠을 호랑이가 앓다 겨우 털고 일어났는데 어느 날, 호랑이의 동굴에 호랑이와 지독한 원수지간인 사자가 찾아온 겁니다.”
하이에나로 비유하고 싶었지만, 자신과 별 차이가 없는 여사빈의 신체 사이즈를 고려해서 범지훈은 큰마음 먹고 그를 사자로 비유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기분이 나쁜지 범지훈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사자가 하는 말이 네가 먹은 뱀 고기가 내가 아껴 놓은 비상식량이라며 책임지라고 하는데 호랑이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리고 우정선은 깊게 고민했다. 예전엔 그저 이상한 전래동화랍시고 가볍게 생각한 적도 있어 함부로 대답을 해 줬다가 벌어졌던 후폭풍들이 엄청났었다. 그 기억들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신중을 기해야 했다.
“대표님이 호랑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것 같은데요?”
“물어 죽이고 싶지만 그건 비도덕적이니 일단 맞고소를 하면 될까요? 죄명은 생각하면 금방 나오니까요.”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범지훈은 상식도 있었고 폭력을 지양하기도 했지만 본인에게 피해를 준 자에 한해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되기도 했다. 좋은 예로는 중학생 때엔 왕따를 당하던 학급 친구를 보곤 그 친구 대신 증거들을 모아 학폭위가 아닌 법원으로 고소하기도 했고 (*그러나 학급 친구가 직접 고소를 한 게 아닌 학급 친구의 이름을 빌린 범지훈이 고소하여 후폭풍이 엄청났다.), 나쁜 예로는 고등학생 시절, 범지훈에게 좋아하던 여자애를 빼앗겼다며(*그 여자애는 그저 범지훈을 혼자 좋아했을 뿐이다.) 악의를 품던 선배가 있었는데 범지훈은 그것에 제 사비로 집 앞은 물론 학교 내 자신이 움직일 만한 모든 동선에 CCTV를 설치했고 결국 그 학생은 덜미가 잡혀 범지훈이 끼워 맞춘 죄목들(*재물 손괴죄, 절도죄, 협박죄 등등)로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다가 자퇴를 했다고 한다. (*물론 선배가 잘못은 했으나 그 한 놈을 잡으려고 쓸데없이 시간과 돈을 들여 온 사방에 CCTV를 설치한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다른 사건들에 비해 매우 약과였다.
우정선이 기억하기론 그중 우정선조차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가장 심했던 건 아마도-
“대, 대표님…!”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 같은 모양새로 뽈뽈뽈뽈 뛰어와 범지훈 앞에서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직원에 우정선의 생각은 멈췄다.
이 사람 아마 이름이 마케팅부 사위민이었던가? 경력직에다 특이한 성씨를 가지고 있어 기억난….
“어젯밤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 말엔 우정선도, 범지훈도 얼어붙고 말았다. 무서운 범지훈을 피하느라 그나마 지금 주변에 사람이라곤 하나 없다는 게 그 순간엔 다행일 정도였다.
“제가 술에 취해서 그만, 대표님께 해서는 안 될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우정선처럼 범지훈도 아득해졌다. 그러고 보니 잡아먹혔던 그날이나 어젯밤이나 범지훈도 취해 있었지만, 상대 또한 항상 함께 술을 마셨었다. (*직접 운전을 해야 하는 이준혁을 제외하곤 사람 수에 맞춰 술잔을 각자 네 개씩 나눠 가졌었다.) 사위민이 술에 취하면 박력적으로 변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 귀, 귀엽다고 말한 것 죄송합니다! 대표님 앞에서 욕한 것도 정말 죄송합니다!”
잘생겼다고 말한 발언은 쏙 빼놓고 사위민은 사과했다. 그리고 그 말에 범지훈은 정신을 차렸지만 우정선은 튀어나올 듯 눈이 커졌다. 저 솜뭉치가 뭐라고? 그 범지훈한테 귀엽다고 해? 거기다 욕까지? 우정선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범지훈을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사위민 씨.”
평온한 낯이지만 우정선이 보기엔 기뻐한다는 게 티가 나는 범지훈이 대답했다. 사위민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렁한 큰 눈으로 그제야 범지훈을 올려다봤다.
“회사 밖을 나오면 더는 대표도 아니고 사위민 씨나 저나 동등한 사이인걸요. 제가 대표가 아닐 때에는 사위민 씨가 뭘 하시든 아무렇지 않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그렇게 미안해하지 마세요.”
꼭 큰 숙제 하나를 털어 낸 개운한 얼굴로 범지훈은 입꼬리마저 끌어 올렸다. 멍하니 범지훈을 올려다보던 사위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결론지었다. 사위민은 뱀이 아니었다. 취할 정도로 마셨지만, 필름까지 끊긴 건 아닌지 자신의 행동들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하며 사과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범지훈은 붕붕 뜨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실룩이려는 얼굴 근육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 했다.
“…사위민 씨?”
이어져야 할 사위민의 대답을 기다리던 범지훈은 그제야 사위민을 살폈다. 어쩐지 사위민의 얼굴이 넋이 나가 있었다.
“네, 에?”
“저는 괜찮으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씀 드렸습니다.”
“아, 네! 네에… 가, 감사합니다.”
감사할 정도까지는 아닌데. 오랜만에 받아 보는 감사 인사에 어색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옮기던 범지훈의 눈에 우정선이 들어왔다. 왜 저런 표정이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범지훈을 보고 있던 우정선에 범지훈은 두 눈을 깜빡였다.
“죄송합니다만, 사위민 씨. 대표님께서는 대표실로 가시려던 중이라.”
이내 사위민과 범지훈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우정선이 재촉했다. 회사 안임에도 범지훈의 등을 거리낌 없이 밀어 대며 서두르길 재촉하는 우정선에 떠밀려가면서도 범지훈은 애처롭게 사위민을 바라봤다. 이대로 가긴 어쩐지 아쉬웠다.
“대표님!”
그러다 범지훈을 멈춰 세운 건 사위민이었다. 범지훈이 의지를 갖고 멈춰 서니 더는 밀어 대지 못한 우정선도 함께 멈춰 서며 작은 한숨을 뱉었다.
“저, 오늘도 퇴근 말동무 가능할까요?”
범지훈의 귓속으로 팡파레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로는 천사들의 합창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범지훈은 얼빠진 표정으로 사위민을 바라봤다. 누가 사내에서 이런 음악을 트는 거지? 와중에 그런 의문까지 들었다.
“말동무라면서 어제는 둘이서 제대로 이야기를 못 했잖아요.”
“가능합니다.”
사위민의 말이 끝맺어지자마자 범지훈은 서둘러 대답했다. 혹시나 마음이 변한 사위민이 실언이었다고 이야기라도 할까 조급해졌다. 그제야 사위민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이번엔 범지훈이 아까의 사위민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정선은 그걸 보며 마치 쓴 약이라도 먹은 듯한 얼굴을 했다.
***
범지훈은 하늘 위를 걸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며칠째, 범지훈의 데르메데스 벤츠는 주차장에 처박혀 있었지만 처량한 애마의 처지와는 다르게 범지훈의 출퇴근길은 항상 꽃밭이었다.
“대표님!”
저 멀리서 범지훈을 발견한 사위민이 붕붕 손을 흔들며 범지훈을 향해 팔랑팔랑 뛰어왔다. 범지훈은 뻐근해지는 심장께에 또 지그시 가슴을 눌렀다. 평소에는 멀쩡한데 사위민만 보면 주체를 못 하고 뛰어 대니 큰일이었다.
사위민과 함께 출퇴근을 시작한 지는 저번 주 금요일 이후로 두 번째였다. 곧 있으면 여사빈과의 약속 날짜도 다가왔지만 그건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을 정도로 범지훈은 행복했다. 처음엔 퇴근길 말동무였는데 이젠 출근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에 범지훈은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점점 서늘해지는 가을 날씨에도 여긴 봄볕 같았다.
범지훈도 같은 동네에 산다는 걸 알게 된 후,(*물론 범지훈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범지훈은 새벽같이 일어나 택시를 타고 사위민의 동네까지 가서 사위민을 먼저 기다렸다.) 사위민은 함께 출근까지 제안했다. 자신의 자차가 있음에도 출퇴근길은 대중교통이 최고라며 사위민은 차 보험비만 아깝다고 혀를 찼다. 그게 못내 귀여워 범지훈은 끌어 올려지려는 입꼬리를 멈추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차 보험비를 몰래 내주고 싶을 정도였다. 사위민이 알면 큰일이 날 게 분명했지만.
그나저나 우정선에게서 올 연락이 늦어지고 있었다. 사위민과 같은 동네에 새로운 집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에 대한 답. 범지훈이 부탁한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빠르면 하루, 늦으면 이틀 안에 해결해 버리던 우정선인데 주말까지 끼어 5일째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새 집을 찾기가 그렇게 힘든가? 범지훈은 의아했다. 대학가 근처라곤 하지만 원룸촌도 아니고 사위민이 사는 곳은 신축 오피스텔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그 오피스텔의 최고층에 산다는 사위민은 전망이 좋아 한강까지 내려다보인다며 언제 범지훈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말까지 흘러가듯 건넨 적이 있었다. 사위민은 그냥 한 말이었겠지만, 그 말을 들은 범지훈은 그날 쉽게 잠들지 못할 정도로 설레기도 했다.
하여튼 범지훈은 여사빈까지 까맣게 잊을 정도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회사에서 늘 보게 되는 우정선의 기분이 요즈음 들어 바닥을 치고 있는 것 같다는 걱정 외엔 딱히 걱정거리도 없었다. 아, 딱 하나.
우웅-
울리는 진동에 범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약속 안 잊었지? 나흘 남았어^^]
까맣게 잊을 만하면 약속을 상기시켜 주는 여사빈의 문자는 범지훈의 심기를 거스르게 했다. 답장도 보내지 않고 그대로 화면을 끈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으며 범지훈은 사위민이 보고 있는 태블릿 PC 속 화면을 함께 응시했다. 사위민과 한쪽씩 사이좋게 나눠 끼고 있는 무선 이어폰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엔의 질문이네요. 닉네임은 ‘백사현하고픈거싹다해라’ 님. 사현 오빠, 요즘 게임에 빠져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게임인지 살짝 알려 주실 수 있어요?]
백사현이었다. 사위민이 들고 있는 커다란 태블릿 화면 속, 1080p의 초고화질로 배시시 웃고 있던 백사현은 이내 Q&A 질문지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오비왓치요. 유행은 지났다고 느낄 것 같은데 저는 뒤늦게 빠져서 하는 중이에요. 근데 잘하지는 못하니까 절대 기대는 하지 마세요. 언제 우리 엔들이랑 소소하게 게임 방송도 한번 해 보고 싶긴 한데.]
화면의 우측 구석에서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댓글들은 ‘백사현 존나 사랑해’부터 ‘백사현은 4위야 우리 엄마 사위’까지 온갖 주접들을 발산하고 있었다. 하트 이모티콘까지 쉬지 않고 떠오르는 걸 곁눈질하던 범지훈은 이내 영상에 푹 빠져 있는 사위민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엔이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궁금한 건 아니었지만 사위민과 단둘이서 보내는 귀한 출근 시간을 영상만 보며 말없이 흘러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백사현의 팬이라는 말이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는지 사위민은 범지훈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불쑥 백사현의 이야기를 꺼냈고 아예 이것 좀 보라며 백사현의 영상까지 틀어 주었다. 지난번엔 퇴근하며 함께 백사현 직캠을 본 것 같았는데, 지금은 지난 솔로 활동 때 백사현이 팬들과 했던 솔로 기념 라이브 방송을 보는 중이었다. 그래서 범지훈은 딱 한 번 본 백사현이었지만 요즘 들어 사위민 덕에 백사현에게 친근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저희 팬덤명이요!”
그리고 사위민은 반갑게 대답했다. 아이돌 그룹 ‘에스(S)'와 그들의 팬덤 '엔(N)'. 자석의 S극과 N극이 만나기만 하면 항상 떨어지기 싫다는 듯 찰싹 붙어 버리는 것처럼 항상 함께 있자는 의미로 맏형인 백사현이 직접 지었다는 말에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작은 감탄을 뱉었다.
“작명 진짜 끝내주게 잘하죠?”
“네. 그럼 백사현 씨가 맏형이면 리더입니까?”
“아뇨, 리더는 둘째 형인 콘다구요, 사현이는 메인 보컬이에요!”
이젠 백사현 씨가 아닌 사현이라며 편하게 부르기 시작하는 사위민은 백사현만큼 범지훈이 꽤 편해진 것 같았다. 처음엔 백사현 씨라고 부르기 시작해 범지훈의 눈치를 보며 그제는 사현이 형, 그리고 지금은 사현이까지. 백사현이 분명 사위민보다는 형인 걸로 아는데 범지훈은 팬덤 문화를 잘 알지는 못하기에 그런가 보다 이해했다.
“하긴. 백사현 씨가 노래를 잘하긴 하죠. 멤버들이 백사현 씨까지 포함해 다섯 명이랬나요?”
“네! 사현이랑 콘다랑 모사랑 맘바, 보아까지 전부 다섯 명이요.”
스네이크의 앞 글자를 따서 지은 그룹명 에스. 그렇기에 사현을 제외한 다른 멤버들의 예명은 하나같이 뱀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아나‘콘다’, 살‘모사’, 블랙‘맘바’, ‘보아’뱀까지. 그런데 왜 백사현 씨는 뱀 이름이 아닌가 싶어 범지훈은 문득 궁금해졌다.
“원래 예명은 백사현에서 현 자만 빼고 백사로 가려고 했는데 사현이라는 이름 자체도 너무 예뻐서 그냥 이름으로 가자고 했대요.”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범지훈에 사위민은 자랑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 뒤로 백사현이 얼마나 노래를 잘 부르는지 원래는 메인 보컬로 들어왔는데 이젠 춤까지 곧잘 춰서 지난번 에스의 컴백 때에는 노래 중간에 댄브까지 맡았다며 쉬지 않고 쫑알대는데 범지훈은 지루한 줄을 몰랐다. 역시 사위민이 너무 귀엽기 때문일까? 본격적으로 경청을 시작하려는데 진동이 울렸는지 사위민이 갑작스레 핸드폰을 꺼내 놓았다. 덜컹거리는 지하철이라 못 느꼈는데 사위민에게서 무슨 연락이라도 온 모양이었다.
“…왜 그러죠?”
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며 한참을 말이 없는 사위민에 기다리다 못한 범지훈이 물었다.
“대… 대표님.”
떨려 오는 사위민의 목소리에 범지훈 또한 덩달아 심각해졌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넋 나간 얼굴인지. 사위민에게 큰일이라도 생겼다면 범지훈은 온 마음과 재력을 다해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아, 미치겠다…. 대표님… 아니, 아… 진짜 어떡해….”
“무슨 일인데 그럽니까?”
뭐든 도와주겠습니다, 란 말은 간신히 삼키며 범지훈은 사위민의 대답을 기다렸다.
“저… 저, 어떡해… 저, 사현이 솔로 쇼케 팬석 당첨됐어요….”
그리고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사위민에 범지훈은 당황했다. 당첨이면 좋은 거 아닌가?
“아, 어떡해. 이건 대박이에요. 저, 대표님, 저, 저 잠시만요. 저 잠깐 파랑새 좀 할게요. 아, 너무 떨려요.”
팬이라면 누구든지 필수로 하는 SNS라고 사위민에게 설명은 들었기에 범지훈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폰 화면에 코를 박고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는 사위민을 보며 범지훈도 넣어 둔 제 핸드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파랑새를 켜면 기본 5~10분은 여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걸 알고 있기에 그동안 무슨 연락이라도 온 게 없나 범지훈은 확인할 생각이었다.
[지훈아]
진동과 함께 화면에 떠오른 까톡에 범지훈은 시선을 던졌다. 이준혁이었다. 웬일이지? 범지훈은 의문이 들었다. 지난번, 백사현을 데리고 함께 술을 먹고 난 후로 범지훈에게 부쩍 연락의 주기가 잦아진 이준혁이었다. 처음엔 ‘사현이 만나보니 어떠냐?’부터 시작해 좋은 녀석이라고 둘이 친하게 지내라는 식의 말을 하더니 최근엔 ‘소개 한번 받아 볼래?’까지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한창 사위민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범지훈은 ‘만나는 사람 있어.’라는 답장 하나를 보냈다. 그 뒤로 이상할 만큼 연락 하나 없었는데.
[표가 남아서 그런데 올래?]
까똑.
[사현이 솔로 컴백 쇼케]
까똑.
그리고 그 말에 범지훈은 여전히 파랑새 삼매경에 빠져 있는 사위민을 흘끔거렸다. 분명 사위민도 갈 게 틀림없을 텐데. 고민하던 범지훈은 ‘좋아.’라는 답장을 치려다 멈췄다. 갑작스레 고개를 들어 범지훈을 보는 사위민 때문이었다.
“맞다, 대표님. 이거 표 1매에 2인 입장 가능하다는데 혹시 저랑 쇼케이스 보러 갈 생각….”
“있습니다.”
그리고 사위민이 혹시나 실수라며 물리기 전에 범지훈은 빠르게 대답했다. 이준혁에게 보내려던 답장은 보내지도 않고 그대로 화면을 끈 범지훈이 핸드폰을 집어넣는 것과 동시였다. 이준혁에겐 미안하지만 범지훈의 1순위는 지금 누가 뭐라 해도 사위민이었다.
“정말요?”
범지훈의 걱정은 기우였는지 사위민이 퍽 기쁜 듯 물었다. ‘물론입니다.’ 다시 한번 더 단호한 대답을 하는 범지훈에 사위민은 밝게 웃었다.
“그럼 금요일에 같이 보러 가면 되겠어요!”
행복하다는 듯 두 손을 맞잡는 사위민에 그를 따라 표정이 풀어지려던 범지훈이 멈칫했다.
“…금요일이요?”
“네, 금요일 오후 3시요! 6시 음원 공개 전에 하는 거라 그 시간대예요. 저는 혹시 몰라 미리 월차 썼는데 대표님도 그때 괜찮으시죠?”
시간대가 문제라 여겼는지 사위민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혹시나 안 된다는 답을 할까 조마조마해 하는 듯한 표정으로 범지훈을 올려다보는 사위민에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대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녁쯤엔 제가 약속이 있어요.”
망할 여사빈.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필이면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아서는. 지금이라도 아침 식사 약속으로 바꿀까 했지만 범지훈은 양심을 갖고 간신히 인내했다. 오전 동안 근무하다 오후 반차를 쓰고 사위민과 함께 쇼케이스 장소로 가면 알맞긴 했다. 그 후엔 사위민과 저녁 식사도 못 하고 헤어져선 바로 여사빈을 만나야 했지만.
모든 건 술이 원수였다.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숙이는 범지훈을 보며 사위민은 꽤 아쉬운 얼굴을 했다.
***
친구들이 이상했다. 범지훈은 그렇게 느꼈다. 요 며칠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였던 우정선도 우정선이었지만, 이준혁도 이상했다. 회사에 도착해 사위민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올라온 대표실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이준혁에게 답을 보낸 참이었다.
[표 안 줘도 돼. 같이 가 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표로 가기로 했어.]
그러자마자 읽었다는 표시가 사라지고 곧장 걸려 온 건 이준혁의 전화였다.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은 범지훈이 채 묻기도 전에 이준혁의 질문 폭격이 다다다 쏘아졌다.
[누구? 누구랑 같이 가기로 했는데? 너 요즘 만난다는 사람이 설마 쇼케 같이 간다는 사람이야?]
뭐지? 범지훈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범지훈이 알기론 아내 바라기 이준혁은 남의 연애사에 태생적으로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오히려 본인 연애사를 떠벌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정이었지. 초등학생 때 처음 아내를 만나 지금 현재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슬하에 아이까지 있는 일편단심 해바라기답게 이준혁은 본인의 연애사에만 지대하게 관심이 많은 놈이었다.
그렇기에 범지훈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인 것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겠지. 우정선만큼은 아니지만, 중학생 때 알게 된 이준혁과 친구로 지내 오며 그는 아직도 범지훈이 자신과 같은 이성애자인 줄로 철석같이 믿고 있을 터였다.
“…아니. 그냥.”
[그냥?]
“아는 동생.”
그렇기에 거짓말도 당연했다. 쇼케이스장에 가면 분명히 백사현의 매니저 이준혁이 있을 게 뻔한데 같이 온 사위민과 마주칠 수 있는 상황에서 곧이곧대로 말하는 건 곤란했다.
그 뒤론 이준혁은 쏘아 대던 아까의 기세보단 한결 나아졌다. 관계자석 표라 더 잘 보이는 편한 자리가 제공될 텐데 백사현 매니저인 친구를 두고 뭐하러 굳이 팬석으로 가려고 하느냐, 아는 동생이 팬은 팬인 모양인데 지금부터라도 취소하고 내가 주는 표로 둘이 오면 되지 않겠느냐 설득했지만 범지훈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출근길 때 범지훈과 저녁은 함께할 수 없단 아쉬움도 잠시, 같이 간다는 기쁨에 얼굴이 환해진 사위민은 다시 또 파랑새에 고개를 박았다. 그러다 갑작스레 시근덕대며 화를 냈다. 며칠 전, 그룹 에스의 한 멤버가 생일맞이 팬 미팅을 열었던 모양인데 거기서 진상을 피운 여자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관계자석에 앉아 있었던 빽녀였다며 씩씩대던 사위민의 이야기를 범지훈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빽녀는 싫다던데.”
[빽, 뭐? 네가 그 단어를 어떻게 알아?]
“아는 동생이 알려 줬어. 팬이라면 본인의 손으로 직접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자리를 쟁취해야 한다면서.”
그제야 이준혁은 알아들은 눈치인지 더는 권하지 않았다.
***
사위민이 그토록 고대하던 쇼케이스 당일이었다. 어제는 놀랍게도 여사빈의 날짜 카운트 문자가 오지 않아서 범지훈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의 업무에 매진했다. 역시 문자를 계속 씹어 댄 게 의미가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약속 당일까지 서로 아무 연락을 안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범지훈은 마지못해 여사빈에게 문자 한 통을 보내 놓았다.
[20시. 장소는 라이언 다이닝 룸. 예약 완료.]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확실히 고지했고 식당까지 직접 예약해 놓았다. 범지훈은 이 정도라면 충분히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했다. 장하다, 범지훈. 흐뭇한 시선으로 문자 창을 보고 있던 범지훈은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반차 냈던데?”
우정선이었다. 회사 안에서는 아무리 단둘뿐이더라도 서로 존대가 암묵적인 룰이었는데 우정선은 아무렇지 않게 그 룰을 깨며 범지훈에게 물었다. 쾅. 큰 소리를 내며 범지훈의 책상 위로 묵직한 결재 서류들을 내려놓는 것과 동시였다. 딸꾹. 갑작스레 나온 딸꾹질에 입을 가린 범지훈은 멍하니 우정선을 올려다봤다.
“왜 나한테 바로 얘기 안 하고 비서 팀한테 말했어?”
“…바쁜 것 같아 보이길래.”
그럴듯한 이유를 댔지만 우정선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범지훈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우정선의 눈빛이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원래는 범지훈보다 조금은 낮은 눈높이의 우정선이었는데 서 있는 우정선을 앉은 채로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 눈빛이 더 실감 나게 느껴졌다. 범지훈은 꼬리 만 호랑이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래? 하나뿐인 직속 비서가 바쁜 것 같아 보여서 우리 대표님이 비서한테 직접 말을 안 하고 비서 팀에다 이야기한 거구나. 정말 배려심이 깊은 대표님이네.”
사실은 우정선이 무서워서였다. 저런 눈빛을 한 채 입꼬리만 쭈욱 끌어 올려 범지훈을 보고 있는데 범지훈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저렇게 화가 났지? 눈치를 보는 범지훈을 보곤 우정선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후 반차는 뭐 때문에 낸 거야? 저녁 식사 약속이라고만 저번에 들은 것 같은데.”
“사위민 씨랑….”
사위민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고개를 든 우정선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범지훈은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무래도 우정선은 사위민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위민의 동네로 집을 알아봐 달란 부탁은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할 우정선이 아닌데 왜 사위민을 싫어하는 건지 범지훈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위민이 우정선에게 피해를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역시, 갑작스레 집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게 문제였나.
마음에 걸리는 우정선을 뒤로 하고 그렇게 범지훈은 이른 퇴근을 했다. 정문에서 범지훈을 기다리고 있던 사위민은 회사를 빠져나오는 범지훈을 발견하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출근을 하지 않은 터라 사위민은 평소의 정장 차림이 아닌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정선 때문에 복잡하던 범지훈도 사위민을 보자마자 모든 걸 잊었다.
“대표님!”
붕붕 손을 흔드는 사위민의 뒤로 강아지 꼬리가 휙휙 돌아가는 것 같았다. 범지훈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옷 잘 어울립니다.”
사위민을 보자마자 이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위민은 귀여웠다. 가을 느낌이 가득한 브라운색 셔츠 위로 오버사이즈 핏 니트 조끼를 껴입은 사위민은 허리에 큼직한 크로스백까지 야무지게 맨 상태였다. 실제 나이는 스물아홉 살이지만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사위민은 그 귀여운 외모에도 그랬고 평소엔 단정하게 내려와 있던 갈색 머리를 가르마를 태워 왁스로 살짝 넘겨 고정시킨 상태가 또 분위기를 바꾸는 데 한몫했다. 어쩐지 애인과의 데이트를 손꼽아 기다리던 풋풋한 20대 초반 대학생의 느낌이었다. 데이트라니. 범지훈은 그것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감사해요, 대표님. 사현이 만나러 가는 건데 나름 엄청 신경 써 봤거든요. 어울린다니 진짜 다행이에요.”
범지훈은 다시 복잡해졌다. 이번엔 우정선 때문이 아닌 백사현 때문에.
차를 가져왔다는 사위민에 범지훈은 여사빈 다음으로 처음, 남의 차를 얻어 타 보았다. 처음 보는 사위민의 차는 작고 앙증맞은 사위민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커다란 SUV였다. 장정 일곱 명은 타도 너끈할 정도로 커다란 차체에 조수석에 몸을 실으면서도 범지훈은 얼떨떨했다. 오늘 사위민의 색다른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았다.
도착한 쇼케이스장에서는 이준혁이 이미 범지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계자석 표를 더 이상 권하진 않았지만, 아는 동생이 누구냐고 꼬치꼬치 캐물어 대길래 범지훈은 솔직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에 이준혁은 잘됐다며 사위민을 데리고 함께 가수 대기실에 잠깐 들렀다 가는 건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사진을 찍거나 백사현을 귀찮게 구는 것도 아니고 매니저의 친구에다 백사현과는 개인적으로도 이미 만난 적 있는 사이인데 공연 전에 잠깐 인사 나누는 게 그렇게 어렵겠냐고 열심히 설득하는 이준혁에 사위민의 동의까지 얻어 범지훈은 끝내 승낙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준혁을 따라 팬들의 대기 줄과는 정반대 편인 뒷문으로 돌아가며 범지훈은 어쩐지 이준혁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범지훈의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이준혁은 아주 강하게 범지훈과 백사현이 만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지훈 씨?”
그 증거로 범지훈이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잠깐 놀란 눈을 하던 백사현이 이내 미소 지었다. 백사현의 머리에 헤어스프레이를 뿌리는 걸 마지막으로 헤디가 자리를 비켜 주고 백사현은 거울을 통해서만 보던 범지훈과 사위민을 똑바로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사현은 그사이, 저번에 본 백발이 아닌 살짝 웨이브가 진 예쁜 은발로 바뀌어 있었다. 아이돌 가수라서인지 머리 색을 정말 자주 바꾸는 것 같았다. 지난번 촬영했다던 추리 예능 예고편 속에서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 있으면 자칫 검은색으로 보일 정도로 짙은 초콜릿색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백발의 백사현이랑은 사뭇 다른 느낌이라 범지훈은 여태 기억하고 있었다.
“준혁이 형한테서 온다는 얘기 못 들었는데. 지인석 표가 있어서 원래는 지훈 씨랑 위민 씨 두 분 같이 초대하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미 표를 가지고 있다고 들어서요.”
“헐.”
그 말에 범지훈의 옆에 있던 사위민이 숨을 들이켜며 입을 막았다. 초대하고 싶은 사람에 본인의 이름까지 거론될 줄은 모른 눈치였다. 빙긋 눈을 휘어 내린 백사현은 범지훈과 사위민에게 자리를 권하며 대기실 소파에 함께 앉았다. 여기까지 안내했던 이준혁은 바쁜지 이미 대기실을 떠나고 없었다.
“저, 사… 사현이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그러다 눈치를 보던 사위민이 용기 내어 물었다. ‘왜 안 되겠어요?’ 나긋하게 대답하는 백사현에 사위민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범지훈은 아주 어색하게 그런 팬과 가수 사이에 끼어 앉아 있었다. 어쩐지 지금은 불청객이 된 느낌이었다.
“형, 저… 제가 사실은 선물을 가져왔는데요.”
지난번 술에 취해 실례를 저질렀다는 사과부터 시작해 쇼케이스 힘내라는 응원까지 조잘거리던 사위민은 이내 메고 있던 크로스 백을 주섬주섬 뒤졌다. 그러다 작은 박스를 꺼내는 사위민에 범지훈의 눈이 커졌다. 꼭 반지가 들어가 있으면 어울릴 법한 예쁜 선물 상자였다. 설마. 순간, 머릿속엔 반지를 꺼내 들며 ‘저랑 결혼해 주세요, 형’ 하고 백사현에게 고백하는 사위민이 그려졌다. 범지훈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거 직접 만든 비즈 팔찌예요. 사과의 뜻이기도 하고 절대 비싼 건 아니에요. 비싼 선물들 안 받으시고 마음 담긴 편지들만 받으시는 것도 잘 알아서 비즈들 직접 사다가 제가 하나하나 꿰어 만든 거거든요. 여기 보시면 형 이니셜도 박아 놨어요.”
혹시나 백사현이 거절할까 상자를 내밀며 재빨리 덧붙이는 사위민은 그러면서도 백사현이 받지 않을까 걱정이 가득한 눈이었다. 하지만 백사현은 직접 만들었다는 말에 두말하지 않고 건네받으며 열어 봐도 되냐고까지 물었다. 팬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눈이었다.
“네, 네! 그럼요! 형 손목 되게 예쁘잖아요. 여기에 이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마음에 들면 좋겠어요.”
범지훈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고 말았다. 백사현과 사위민 사이에 이렇게 끼어 앉아 있을 게 아니고 일어나 둘 사이에서 피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사위민의 말에 상자를 열어 본 백사현은 예쁘게 놓여 있는 비즈 팔찌를 보곤 감탄을 뱉었다.
이내 팔찌를 꺼내 든 백사현이 손목에 직접 차는 것에 범지훈은 시선이 갔다. 사위민의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닌지 하얗고 가느다랗게 예쁜 손목이었다. 흰 피부 톤과도 잘 어울리는 푸른빛의 비즈가 박힌 팔찌를 차니 백사현의 것이라는 듯 찰떡이었다.
“시간 됐습니다! 준비 부탁드릴게요.”
그때 대기실의 문을 열며 스태프가 외쳤다. 그제야 백사현과 함께 사위민과 범지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쇼케이스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 번 더 관계자석을 권하는 이준혁을 거절하고 팬석에 앉은 범지훈은 열광하는 사위민의 옆에서 백사현의 솔로 무대를 전부 지켜봤다. 댄서들과 춤을 추는 백사현의 소매 사이로 설핏설핏 푸른빛 비즈가 보이는 것엔 사위민이 입을 틀어막으며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무대 위까지 차고 올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백사현은 팬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이었다. 범지훈은 호기심에 한번 들어 본 백사현의 잔잔한 발라드 노래도 좋다고 느꼈지만, 통통 튀는 비트의 댄스 곡도 꽤 좋다고 느꼈다. 음악이라곤 이따금 듣는 클래식이 다였는데 백사현 같은 목소리라면 대중음악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지막 음악이 끝나며, 조금은 가쁜 호흡을 뱉던 백사현이 팬석을 향해 사르르 미소 지었다. 부드러운 반죽 속에 서서히 녹아드는 설탕 같은 웃음이었다. 범지훈 또한 그런 백사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약 2시간여 정도의 쇼케이스가 끝나고, 범지훈은 팬들에 섞여 쇼케이스장 밖으로 나왔다. 들어갔을 땐 쨍한 대낮이었는데 밖은 벌써 어둑한 기미가 올라오고 있었다. 젊은 여성 팬층이 주인 팬덤은 사위민처럼 귀여운 남팬도 아니고 범지훈 같은 타입은 처음인지 범지훈을 흘끔거리며 저희끼리 속삭여 댔다. 범지훈은 어색한 기분에 조금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에 간 사위민이 오기 전까지 사람이 없는 구석 부근에서 담배를 피우고 갈 생각이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사위민이 차 키까지 넘겨줬기에 범지훈은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후문 쪽 구석 자리에 주차해 둔 사위민의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차 뒤쪽에 서서 막 안주머니 속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려던 범지훈은 사위민의 차 앞을 스쳐 가는 것에 고개를 들었다. 낯선 여자 하나와 낯선 남자 하나, 그리고 남자의 등 뒤에 업힌 누군가였다. 머리끝까지 겉옷을 덮어쓴 채 남자의 등에 미동 없이 업혀 있는 누군가에 이 시간에 벌써 술에라도 잔뜩 취했나 싶어 범지훈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와 남자는 옷으로 가린 사람을 업고도 다급하게 잘만 뛰어갔다.
툭.
범지훈에게서 서서히 멀어져 가는 도중, 업혀 있던 사람의 한쪽 팔이 겉옷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과 손목이 먼저 보였고 차고 있는 건 푸른빛의 비즈 팔찌였다.
동시에 태평하게 담뱃불에 불을 붙이려던 범지훈의 행동이 멈췄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탈진해서 쓰러진 건가? 그 생각이 들며 범지훈은 이준혁에게 전화라도 해 봐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이준혁은 어디 가고 모르는 남녀가 백사현을 업고 가는 거지?
가장 끝자리, 주차되어 있던 흰색 승용차 뒷좌석의 문을 열고 업고 있던 백사현을, 외투를 덮어씌운 그대로 밀어 넣는 모습을 지켜보며 범지훈은 사위민의 차 뒤로 제 몸을 가린 채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준혁은 다행히 금방 전화를 받았다.
[…야, 나 지금 바쁜데 이따가 통화-]
“백사현 지금 어디 있어?”
[네가 웬일로 사현이를 다 찾냐? 어, 근데 백사현 씨도 아니고 백사현이라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백사현 어딨어?”
뒷좌석의 문을 닫은 두 남녀가 운전석과 조수석에 각자 탑승했고 시동을 건 차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범지훈은 차 키를 꺼내 들고 일단 SUV의 문을 열었다.
[화장실 간다고 잠깐 나갔지. 금방 들어올 거야. 왜?]
“…경찰에 신고해.”
그 한마디를 끝으로 범지훈은 전화를 끊었다. 서둘러 운전석에 타자마자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는 범지훈의 시야에 벌써 손톱만큼 작아져 가는 흰색 승용차가 들어왔다. 주위 사람이 알아볼까 외투를 덮어씌운 건 이해한다지만 차 안으로 눕혀 놓고 나서도 외투를 벗기지 않는 데에서 이상함을 느끼던 참이었다. 설마 했더니 이 백주대낮에 막 공연을 끝낸 연예인을 납치한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서둘러 승용차의 뒤를 쫓으며 범지훈은 백사현이 제발 무사하길 빌었다.
도로를 달리며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흰색 승용차에 범지훈의 미간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8차선의 넓은 대로임에도 하필이면 번화가 한복판이라 도로에는 방해물이 되는 차가 많았다. 흰색 승용차의 뒤를 바짝 쫓으려던 원래의 목표와는 달리 차들에 가로막혀 승용차에서 한참은 떨어진 뒤에서 범지훈은 차선을 바꾸기 위해 거칠게 핸들을 틀었다.
차들에 가로막혀 납치범이 몰고 있을 차량의 번호판 구별이 어렵다는 것도 난관이었다. 이준혁에게 차량 번호를 알려 주려던 계획도 뒤집고 범지훈은 일단 끝까지 저 차를 쫓아가기로 했다. 범지훈이 따라붙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은 빠른 속도로 곧장 달리던 차는 이내 방향 지시등을 켜더니 옆쪽 샛길로 들어갔다. 범지훈 또한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들어온 길은 복잡한 골목길이었다. 음식점과 술집, 노래방 등이 즐비한 골목길은 차량 두 대가 한꺼번에 들어오기에는 조금 좁았다. 이런 좁은 골목길에서 그새 어디로 사라졌는지 흰색 승용차는 온데간데도 없었다. 범지훈은 당황했다. 그 짧은 시간에 마법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게 믿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범지훈이 누구인가. 당황했지만 잠깐이었다. 범지훈은 돈을 빌려 놓고 제때 갚지 않는 채무자를 지옥 끝까지 쫓았다던 범호파 범상철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합법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현 대표이기도 했다.
짧은 시간 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졌다면 답은 하나였다. 이 근처에 차를 숨겨 놓았다거나 모텔 주차장이나 지하 주차장 같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갔다는 소리였다. 범지훈은 우선 이 주위에 모텔과 지하 주차장이 있을지부터 찾았다. 다행히 모텔은 보이지 않았고, 아파트가 아닌 상가 건물들만 즐비한 터라 뻥 뚫린 지상 주차장은 있어도 지하 주차장 또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범지훈의 눈에 띈 건 어느 상가 건물 안, 1층 지상 주차장의 가장 구석 자리에 세워진 흰색 뒤꽁무니였다. 차체가 높고 큰 SUV 차를 옆에 끼고 담벼락 가까이 바짝 세워 놓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다. 교묘할 정도였다. 그리고 범지훈은 다시 한번 확신했다. 잘못된 짓을 벌였기에 차 또한 이런 식으로 주차해서 숨겨 놓기에 급급했을 거라고.
번호판은 정확히 보지 못했으나 차의 겉모습만큼은 확실히 외워 두었다. 연식이 오래된 2008년도 세단. 선팅도 해 놓지 않아 차 내부가 훤히 보여서 범지훈은 주인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차량의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차를 관찰했다. 차의 뒤 창문에 놓여 있는 익숙한 강아지 인형 몇 개가 아까의 그 납치범의 차량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을 납치하는 범죄를 저질러 놓고 대체 이런 평범한 상가 건물엔 무엇 때문에 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2층과 3층에 각각 노래방, 당구장 등의 간판이 붙어 있는 것을 올려 보며 범지훈은 가늘게 눈을 떴다.
사장인가? 노래방이든 당구장이든 저곳을 직접 관리하는 주인이라면 사람 하나 데려와 숨겨 놓는 건 일도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범지훈은 우선 2층을 향해 올라갔다. 하지만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입구는 철문으로 굳게 잠겨져 있었다. 지금이면 노래방이 한창 영업을 시작할 시간대일 텐데 범지훈은 의심에 확신이 드는 걸 느꼈다. 급한 걸음은 남은 계단을 올라가 하나 남은 3층 당구장으로 향했다. 당구장 또한 문이 닫혀 있을까 노심초사했던 것과는 달리 손님을 맞으며 영업을 하고 있었다. 범지훈이 들어오자마자 문에 달려 있었는지 딸랑이며 종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고 남자 몇 명만 있던 한가한 당구장 내에선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출입구를 열고 들어온 범지훈의 등장에 당구에 열중하던 손님들은 물론 카운터의 주인까지 일제히 범지훈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
아무도 입을 열지 않기에 범지훈은 결국 먼저 입을 뗐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카운터에 앉아 있던 50대 후반의 주인 남자가 서둘러 일어서 범지훈을 맞았다.
“혼자 오셨어?”
“…당구 치려는 건 아니고 여쭤볼 게 있습니다.”
‘뭔데 그러셔?’ 손님이 아님에도 심드렁해하지도 않고 여전히 호감과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묻는 주인 남자에 범지훈은 짧은 순간 그가 꽤 친절하다고 여겼다.
“2층에 노래방 문이 닫혀 있던데요.”
“아, 노래방? 거기 2층은 노래방이 아니고 사무실인데. 노래방 주인이 자기 집처럼 사는 곳이야. 간판만 눈에 잘 띄라고 그렇게 달아 놓은 거고.”
“그 주인분 어디 가셨습니까?”
“뭐, 오늘 여자 친구랑 같이 여행 간다고 그것 때문에 당분간 장사 안 한다며 그러긴 하는 것 같던데.”
“…여자 친구라면, 혹시 노래방 주인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그저 노래방을 찾은 손님이라기엔 이상한 질문임에도 친절한 주인 남자는 선선히 대답해 주었다.
“한 30대 중반쯤 됐지? 사람이 참 말수도 없고 조용하던데. 여자 친구는 어떻게 사귀었나 몰라. 용하다니까.”
범지훈은 확신했다. 납치범은 노래방 주인이었다. 2층의 문을 잠가 놓고 여자 친구와 작당하여 백사현을 가둬 두고 있단 가능성에 범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할 수는 없기에 지금부터는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여기 지하에도 한번 가 보셔. 노래방은 지하거든. 문 열어 놨을 수도 있어. 말만 그렇지, 아르바이트생이라도 써서 영업하겠지. 설마 며칠을 장사를 접겠어?”
이준혁의 번호를 띄워 두고 우선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범지훈의 행동이 멈췄다. 지하? 그러고 보니 지상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중에 지하로 내려가는 작은 철문이 하나 열려 있는 걸 보긴 했다. 설마.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주인 남자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범지훈은 급하게 당구장을 나와 뛰기 시작했다. 납치범에게 잡힌 백사현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구해야 했다. 쇼케이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힘 있게 춤을 추던 모습과는 다르게 외투 밖으로 힘없이 툭 떨어졌던 백사현의 팔은 범지훈을 조급하게 했다. 지체할수록 백사현에게는 해로울 터였다.
급하게 뛰어 내려와 다시 확인한 철문은 다행히도 열려 있는 상태였다. 좁은 계단을 밟고 조금 더 내려가니 노래방이라고 적힌 작은 유리문도 열려 있었다. 지하실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서는 범지훈을 맞았다. 복도에만 불이 켜진 채 사람 하나 없이 썰렁한 노래방 내부를 향해 범지훈은 한 걸음 한 걸음 소리 없이 신중히 발을 떼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같이 일을 저질러 놨으면서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는 잘못 없다 이거야?”
처음엔 작았던 것 같은데 조금씩 커지는 대화 소리에 소리를 따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복도의 끝 방, 23이라고 적혀 있는 룸 넘버 아래 불투명한 스티커에 반쯤 가려진 유리문 너머로 싸우는 남녀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남녀의 뒤, 노래방 소파 위로 쓰러져 있는 건 백사현이었다. 천으로 눈이 가려진 채 다리는 물론 등 뒤로 팔까지 둘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묶여 있었다. 예쁘게 세팅되었던 은발은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의 절반이 가려져 있으니 멀쩡한지도 현재 정신을 차린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범지훈은 백사현을 살피다 고개를 드는 남자에 서둘러 문 옆으로 몸을 숨겼다.
“오빠 말하는 게 그렇잖아! 내가 시키는 거라면 하늘에 별도 따다 줄 수 있다더니 지금에 와서 그건 무슨 말인데! 책임 전가하….”
“잠깐만.”
“잠깐만은 무슨! 내가 얘기하잖아!”
소리를 질러 대는 여자에 안의 동태를 살피던 범지훈도 멈칫했다. 여자의 목소리에 가려져 유리문 바로 앞까지 남자가 와 있는 줄 뒤늦게 알아챘다. 남자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범지훈은 남자의 목을 휘어잡았다.
“억…!”
“오빠!”
남자보다 월등히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은 버둥거리는 남자를 제압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범지훈의 팔을 붙잡고 어떻게든 빠져나오려는 남자에 범지훈은 남자의 목을 휘감은 팔에 위협적으로 힘을 주어 남자를 얌전하게 만들었다.
“당신 뭐야! 우리 오빠 풀어 줘!”
“그 전에 네 뒤에 있는 백사현이나 풀어.”
찢어져라 소리치는 여자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범지훈은 여자의 뒤쪽을 턱짓했다. 이 소란에도 미동 하나 없이 누워 있는 걸 보니 두 남녀가 백사현에게 무슨 짓을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남자의 목을 휘감은 범지훈의 팔에 저도 모르게 더 힘이 들어갔다.
“지, 지랄하지 마! 어떻게 데려온 건데 이렇게 쉽게 풀어 줄 것 같아?!”
이쯤 되면 겁먹은 여자가 백사현에게 묶여 있는 것들을 풀어 줄 줄 알았는데 여자는 범지훈의 생각보다 더 독한 이였다. 드르륵. 어디서 꺼낸 건지 커터 칼을 드러낸 여자가 누워 있는 백사현의 목에 날을 세운 칼을 가져다 댔다.
“우리 오빠 안 풀어 주면 얘 목 그어 버릴 거야.”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눈엔 무서울 만큼의 독기가 가득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뒷골목의 생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느껴 본 범지훈이 보기에도 저 여자는 뱉은 말을 그대로 지킬 사람이었다. 백사현을 너무나도 좋아해 남자 친구랑 같이 납치한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큰 착각인 모양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백사현의 하얀 목덜미에 바짝 칼을 들이대는 여자에 결국 범지훈의 팔에서 먼저 힘이 풀렸다. 빠져나온 남자가 컥컥대며 기침을 했다.
“오빠, 빨리!”
그리고 재촉하는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범지훈의 코와 입을 틀어막는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상한 냄새가 코를 파고들며 순식간에 범지훈의 시야가 흐려졌다. 완전히 암전되기 전, 마지막으로 본 건 백사현의 목에서 커터 칼을 치우는 여자였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범지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처음, 정신을 차린 범지훈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좋은 냄새에 대한 것이었다. 깨어난 범지훈의 오감 중 가장 먼저 자극된 건 시각도 아닌 후각이었으니까.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지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윤곽으로 누군가가 앞에 있다는 걸 알려 줬다. 범지훈은 두 눈을 깜빡였다. 좋은 냄새는 눈앞에 있는 누군가에서 맡아졌다. 섬유 유연제의 향인지 향수를 쓰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살냄새인지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 있어도 맡아지는 향은 포근했다. 이 상황에서 쓰기엔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였지만, 단 냄새를 질색하는 범지훈이 맡기에도 계속 맡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포근한 향이었다. 어디선가 맡아 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꼭 햇볕에 냄새가 있다면 이런 향이려나 싶기도 했다. 단가 싶지만 단내가 나는지 안 나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미묘한 향에 천천히 숨을 들이쉬다 내쉬던 범지훈은 그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백사현 씨?”
조심스럽게 불러 본 이름에 범지훈의 눈앞에 있던 이가 움직였다. 작은 신음이 범지훈의 정수리 위에서 울렸다. 정수리? 천천히 고개를 드는 범지훈이 그제야 누군가의 얼굴 윤곽을 알아차렸다. 지나치게 가깝게 말이다. 들이 내쉬는 누군가의 호흡은 곧장 범지훈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지금까지 사람의 등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게 누군가의 가슴팍이었다는 것과 지나치게 가까이 얼굴이 붙어 있다는 것에 범지훈은 천천히 뒤로 몸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여의치가 못 했다. 단단히 묶인 발목과 등 뒤로 둘린 팔이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사현 씨?”
그래서 범지훈은 다시 한번 불렀다. 어둠에 익숙해졌다지만 날까지 저물었는지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지나치게 깜깜한 장소였다. 윤곽만 겨우 보이는 정도라 아무리 코앞에 있어도 누구인지는 정확히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범지훈이 묶인 것처럼 사지가 묶인 채 이런 곳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을 사람이라면 백사현밖엔 없었다.
“정신 차려 보세요, 백사현 씨.”
얼마 동안 정신을 잃었는지 모르겠지만, 범지훈이 깨어난 뒤에도 한참을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니 지독한 약을 쓴 모양이었다. 옅은 신음을 흘리던 백사현은 이내 입을 열었다.
“…범…지훈…?”
평소의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다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범지훈은 반갑게 대답했다.
“네, 접니다. 정신 드십니까?”
“이게, 어떻… 그쪽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혼란스럽다는 게 그대로 묻어나는 물음에 범지훈은 그건 나도 모르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으려다 입을 열었다. 바닥에 머리를 대고 쓰러져 있는 상태로는 고개를 움직이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납치당했습니다. 혹시 정신 잃기 전에 기억나는 거 있으십니까?”
“…납치?”
“네. 백사현 씨를 납치해 가는 2인조를 보고 쫓아왔다가 저도 잡혔습니다. 납치범들하고는 아는 사이입니까? 어떻게 잡힌 겁니까?”
정신없이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백사현에게선 잠시 답이 없었다.
“…백사현 씨?”
“모르는 사람입니다. 스태프인 줄 알고 웬 남자가 화장실로 따라 들어오는 것까진 봤는데.”
“봤는데요?”
“…그 뒤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범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납치범에 대한 아무런 실마리가 없었다. 대체 뭐 때문에 백사현 납치 계획을 세운 건지 독기 가득한 여자의 눈으로 보아 백사현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뭔지 지금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지훈 씨.”
그러다 백사현이 범지훈을 불렀다. ‘네.’ 범지훈은 대답했다.
“지훈 씨도 눈이 가려져 있나요?”
“…네?”
“앞이 하나도 안 보여서요. 천 같은 게 눈을 가리고 있는데 지훈 씨도 그런가요?”
아무리 어둡다지만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인데 왜 얼굴 윤곽이 흐릿한가 싶었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으니 당연할 수밖에. 범지훈은 일단 몸을 일으키려 해 보다가 포기했다.
“백사현 씨.”
“네.”
“풀어 드릴 테니까 그 전에 저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손발을 꼼짝 못 하게 묶인 상태에서 몸을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범지훈은 크게 깨달았다. 겨우겨우 몸을 맞춰 서로 등을 맞댄 상태가 되는 중에도 문제는 곳곳에 있었다. 가장 먼저, 쓰러진 백사현과 범지훈의 몸과 얼굴이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먼저 몸을 조금 움직여 보려다 범지훈은 자신의 이마에 말캉한 무언가가 곧장 부딪치는 걸 느꼈다. 그게 뭔지 범지훈은 바로 알아챘다.
“…죄송합니다.”
백사현의 입술이었다. 사과를 뱉는 범지훈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백사현은 괜찮다는 한마디를 건넸다. 범지훈은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꾸물꾸물 뒤로 몸을 빼려고 노력하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보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백사현의 턱이나 가슴팍에 범지훈의 머리가 부딪쳤다. 딱딱한 질감에 범지훈도 아팠지만, 그때마다 백사현에게 사과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간신히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누웠을 때는 범지훈은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범지훈이 대체 뭘 하나 주의를 기울이는 백사현도 열심히 몸을 돌리는 범지훈에 말하지 않아도 눈치 빠르게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아이돌 가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건가. 유연하게 몸을 돌리는 백사현의 기척에 범지훈은 존경스러워졌다.
겨우 서로의 등을 맞댄 채로 범지훈은 백사현의 묶인 손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댔다. 유연하고 날쌔던 몸놀림처럼 백사현의 손놀림 또한 빨랐다. 자신이 풀어 볼 생각이었는데 말하지 않아도 범지훈의 손목을 묶은 로프를 만지작대다 금세 매듭을 찾아내어 백사현은 기가 막히게 잽싸게 풀어냈다. 묶여 있어 손을 자유롭게 놀리는 게 어려울 텐데도 대단한 솜씨였다. 범지훈은 감탄했다. 납치범들이 로프를 일부러 엉성하게 묶은 건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한 사람의 손이 풀리니 다른 묶인 것들이 풀어지는 것도 빨랐다. 범지훈은 가장 먼저 오랜 시간 동안 백사현의 눈을 가리고 있을 천을 풀어냈다. 눈을 가린 채로 백사현의 머리를 감싼 천의 매듭은 한 번 묶고도 또 묶어 놓아서 푸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간신히 풀어냈을 때는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이었다는 것에 범지훈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백사현의 머리가 얼마나 작으면 이런 천 조각으로 매듭을 이렇게나 많이 묶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다음으론 백사현의 손을 풀어 주고 범지훈은 자신의 발목에 묶인 로프까지 손쉽게 풀어냈다. 그사이 백사현은 발목에 묶인 로프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범지훈의 손목을 풀어 줄 때와는 다르게 자꾸만 헛손질하며 좀처럼 백사현은 줄을 풀지 못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말하는 것과 동시에 범지훈의 두 손이 백사현의 발목으로 향했다. 손을 떼어 내려던 백사현의 손과 범지훈의 손이 스친 것도 그때였다. 아까 전 로프를 풀어 주며 맞대지던 손과는 심할 정도로 다르게 백사현의 손은 차가웠다. 범지훈도 멈칫할 정도였다. …수족냉증이 있나? 잠시 생각하던 범지훈은 백사현이 힘들게 씨름을 하던 것과는 반대로 아주 손쉽게 로프를 풀었다. 의심대로 납치범들이 직접 묶어 놓았을 로프의 매듭은 엉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로프를 묶은 납치범들은 이런 납치가 처음인 어리숙한 부류인 것 같았다.
“일단, 여긴 노래방 창고 같긴 합니다. 아까 제가 잡히기 전에 납치범들을 쫓아 들어온 곳이 지하 노래방이었는데 남자가 노래방 주인이었습니다. 한 명은 여자이고. 그 두 사람 얼굴도 제가 분명히 기억….”
정신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를 백사현에게 설명을 이어 가던 범지훈의 목소리가 끊겼다. 범지훈이 이야기할 때마다 한 박자 느리긴 했어도 대답을 꼬박꼬박 해 주던 백사현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대꾸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집중해서 듣고 있는 건가 싶어 백사현을 살펴도 어둠 속에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기절한 동안에 제 핸드폰도 빼 간 모양입니다. 백사현 씨도 그렇죠?”
붙어 있었던 게 민망해 일부러 거리를 벌려 떨어져 앉았었는데, 범지훈은 다시 바닥을 짚고 슬그머니 백사현의 가까이 붙어 앉았다. 왜 대답이 없는지 범지훈은 점점 더 이상함을 느꼈다.
“백사….”
가까이로 간 뒤에야 알았다. 백사현의 호흡이 가빴다. 가쁜 호흡을 억누르고 있는지 색색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고 있었지만, 소리까지 숨기진 못했다.
“왜 이래요? 어디 아픕니까?”
범지훈의 표정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뻗어진 손이 백사현의 한 손을 쥐었다. 그저 수족냉증이라고 넘기기엔 단시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손이었다. 아까는 온기가 있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괜, 찮아요. 그냥… 별거 아니, 아닙니다.”
간신히 입을 여는 백사현이었지만 목소리가 확연히 느껴질 만큼 떨리고 있었다. 호흡을 억누르며 범지훈에게서 손을 빼고 떨어지려는 백사현에 범지훈의 손에 조금 더 악력이 들어갔다. 별거 아니긴 뭐가.
“지병이 있는 겁니까? 제가 도울 방법이 있다면 얘기해 주세요.”
“그냥, 제가 폐…쇄, 후우. 공포증이 조금, 조금 있어서요. 정말, 별거… 별건… 아니에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중간마다 백사현의 더욱 가빠진 호흡이 섞였다. 뻗어진 범지훈의 손은 백사현의 목에 닿았다.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이런 상태로 별게 아니라니.
“별거 아니지 않습니다.”
단호한 말에 백사현의 시선이 범지훈의 얼굴에 닿는 듯했다. 여전히 가쁘게 호흡하는 백사현에게선 대답은 없었다. 범지훈도 마음이 급해지긴 마찬가지였다. 막 입을 열려는 범지훈보다 먼저 백사현은 말했다.
“…어릴 때, 조금… 후우, 안 좋은 일을 겪어서. 많이… 나아, 졌다고 생각했는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크게 들썩이는 백사현의 어깨를 바라보며 범지훈은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백사현 씨.”
가쁜 호흡을 뱉는 백사현의 시선이 범지훈을 향하는 것 같았다. 고민을 짧았고 결정은 금방이었다.
“실례하지만, 제가 안아 드리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범지훈은 백사현을 당겨 왔다. 아무런 저항 없이 순식간에 딸려 온 백사현이 폭 소리가 날 만큼 품 안 깊이 들어오자마자 범지훈의 팔은 백사현의 등 뒤로 둘러졌다. 뒤늦게 바르작댈 줄 알았던 백사현은 의외로 가만히 있었다. 범지훈의 어깨에 얌전히 묻은 얼굴은 여전히 가쁜 호흡을 뱉어 댔다.
폐쇄 공포증은 심리적인 요인이 컸다. 스트레스나 트라우마가 가장 대표적인 이유였다. 그 원인이 대체 뭔지 범지훈이 알 도리는 없으니 지금으로선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불안해하지 않도록 곁에 있으며 달래 주는 것.
“…괜찮습니다, 백사현 씨. 괜찮아요.”
낮게 속삭이며 범지훈의 손이 백사현의 등을 토닥였다. 예쁘고 하얗고 작은(*범지훈만 모를 뿐이지 백사현은 성인 남자 표준 키였다.)사람이라 몸집 또한 마냥 작고 가녀릴 줄 알았던 백사현은 의외로 단단한 몸을 갖고 있었다. 범지훈의 품에 다 차지 못하는 백사현의 넓은 어깨 위로 범지훈은 얼굴을 기대며 백사현을 조금 더 깊이 안았다.
“제가 옆에 있습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주문처럼 되뇌며 범지훈의 손은 백사현을 토닥이기도, 부드럽게 쓸어내리기도 했다.
“괜찮아요, 사현 씨.”
그때서야 백사현의 호흡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호흡이 조금 더 골라질 때까지 범지훈은 등을 만져 주는 걸 잊지 않았다. 괜찮다는 주문의 말 또한 함께였다. 한참을 더 그러고 있다 범지훈은 백사현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젠 가쁜 호흡은 많이 진정된 것 같았다. 애인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틈 없이 바짝 밀착하여 오래 안고 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낯간지러워져 범지훈은 백사현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있던 백사현의 팔이 범지훈의 허리를 감싸 당긴 건 그때였다. 떨어지려던 몸이 그대로 다시 밀착되는 걸 느끼며 범지훈은 조금 크게 눈을 떴다.
“…잠시만.”
낮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범지훈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잠시만 더.”
애원조의 말과는 다르게 백사현의 목소리는 진득했다. 범지훈의 허리를 감은 팔은 푸는 게 어려울 만큼 단단히 힘을 주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던 것 같았다. 두 손을 둘 곳이 없어 엉거주춤하게 있던 팔은 다시 백사현의 등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색색 가느다랗게 내쉬는 숨이 범지훈의 어깨에 닿으며 부서졌다.
“…향수 써요?”
이젠 정말 많이 진정이 됐는지 목소리의 떨림이 멎었다. 백사현의 질문에 범지훈은 어둠 속에서 눈을 굴렸다.
“아주 가끔 쓰긴 하는데 자주 쓰진 않습니다.”
심지어 오늘은 뿌리고 나오지도 않았다. 매일 샤워를 하는데 향수의 잔향이 그렇게 강한가 싶어 범지훈은 손목을 들어서 한번 냄새를 맡아 보았다. 하지만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렇구나. 좋아서요, 향이.”
범지훈을 안고 있던 팔을 아주 느리게 풀어내면서 슬그머니 몸을 떼어 낸 백사현이 덧붙였다. 완전히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범지훈 또한 안심했다.
“돌아가면 물어보겠습니다. 친구가 선물해 준 향수라서요.”
그 말에 백사현이 웃는 것 같았다. 숨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 듯한 백사현을 바라보던 범지훈은 여전히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백사현의 손에 시선을 내렸다.
“손, 조금 더 잡고 있어도 되죠? 지훈 씨랑 떨어지면 다시 불안해질 것 같아서요.”
“상관없습니다.”
대답하고 나서야 너무 정이 없었나 싶었지만 백사현은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이제 여기서 어떻게 나갈까요?’ 백사현이 말했다. ‘꼭 오늘 날씨가 좋죠?’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톤이었다. 범지훈도 어쩐지 쉽게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범지훈이 말했다.
***
복도 끝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랗게 소리치는 남성의 목소리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굳게 잠근 창고 문을 열었다. 오늘은 영업을 안 해서 다행이었지만 손님이라도 있었다간 사람을 잡아 가두고 있다고 광고를 해 댈 목청이었다. 그 와중에 노래방 용도로 운영하고 있어 지하 전체에 방음벽을 두른 게 다행 중의 다행일 정도였다. 바깥까지는 들리지 않지만, 저 커다란 목소리를 계속 듣고 있기가 귀찮기 그지없어 문을 연 창고 안에서 남자는 멈칫했다.
“도와주세요, 백사현 씨가 이상합니다!”
백사현의 개인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키의 남자가 소리쳤다. 품에는 천으로 눈을 가린 채 묶여 있는 백사현을 안은 채였다. 아니, 저 남자는 어떻게 밧줄을 풀었지? 고민할 시간은 짧았다.
“빨리 도와 달라는 말 안 들립니까?!”
귀가 아플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는 경호원에 남자는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밧줄을 풀었든 지금 중요한 건 경호원의 품에서 축 늘어진 백사현이었다. 목덜미와 온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걸 보며 남자는 아차 싶었다. 양 조절을 못 하고 마취 약을 너무 여러 번 맡게 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남자는 억울했지만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백사현이었다. 이대로 백사현이 잘못된다면 화가 난 여자 친구가 난리를 쳐도 제대로 칠 것이라 직감한 남자는 서둘러 경호원에게 안겨 있는 백사현 쪽으로 다가갔다.
“억…!”
그리고 남자는 오늘로 벌써 두 번째 비명을 질렀다. 외마디의 짧은 비명이라 복도 끝까지 들리지도 않아 큰일은 아니었다. 남자는 개인 경호원으로 생각했던 범지훈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밧줄에 묶여 있다고 생각한 백사현에게 뒷목을 맞고 기절해 버렸다. 남자의 뒷목을 친 손날을 슬그머니 내리며 백사현은 얼굴을 가리는 시늉만 하던 천을 끌어 내렸다. 로프는 겉보기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헐겁게 둘러진 채였다. 조금만 움직이니 금방 풀려 버리는 발목의 로프까지 치우며 백사현은 범지훈의 허벅지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범지훈은 경이로운 눈으로 사람을 쉽게 기절시키는데 능숙한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범지훈이 익힌 실전 몸싸움은 사람을 기절시킬 정도로 팰 수는 있어도 단숨에 기절시키기엔 어려워서 고민이 되던 차였다. 남자든 여자든 한 명 정도는 무슨 일인가 싶어 무조건 올 텐데 범지훈은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여자를 때릴 수도 없고 남자 (*물론 남자는 범지훈보다 작아도 충분히 맞을 짓을 했다.) 를 기절할 만큼 패고 있자니 여자가 알아채고 도망이라도 치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범지훈의 고민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자신한테 맡겨 달라는 백사현에게 이런 기술이 있을 줄은 범지훈은 꿈에도 몰랐다.
“…운동을 조금 배웠어요.”
그리고 백사현은 별거 아니란 듯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범지훈은 정확히 어떤 운동을 배웠는지까지 묻고 싶었다. 이런 유용한 기술이라면 그 여사빈도 충분히….
“갈까요, 지훈 씨?”
손을 잡아당기는 백사현에 쓸데없는 놈의 생각을 지우고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서는 백사현에 따라 일어나며 범지훈은 환하게 불이 켜진 복도로 함께 걸음을 떼었다. 그 와중에 백사현은 범지훈과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꽉 잡힌 손을 잠깐 내려다보던 범지훈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하 노래방은 생각보다 넓고 복잡했다. 가장 구석 쪽에 박혀 있던 창고를 빠져나와 출입구로 가기까지도 한참 시간이 걸렸다. 두 사람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조심히 움직였다. 처음엔 사람의 기척이라고 생각했건만 걸음을 옮길수록 TV 소리인 게 확연히 느껴지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에 도착했었을 때엔 둘은 안도했다. 텅 비어 있는 카운터에 덩그러니 놓인 TV가 의미 없는 음악 방송을 띄우고 있었다. TV에서 나오는 아이돌들의 노랫소리 외엔 노래방 내에 백사현과 범지훈을 제외한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들리지 않았다.
“그 여자는 여기 없는 모양입니다.”
범지훈의 말에 백사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핸드폰이 없어 정확히 지금이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날도 완전히 저문 걸 보아 하니 늦은 밤인 모양이었다. 지금 시각이라면 여자도 이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남자 혼자 TV를 보며 이곳을 지키고 있던 것 같았다. 조금 더 마음 편히 걸음을 옮긴 두 사람은 카운터를 지나 출입구 앞에 멈춰 선 후에야 할 말을 잃었다. 나갈 길이 막혀 있었다. 노래방이라고 적힌 밀고 당기는 유리문은 온데간데없이 방범 셔터가 내려와 쇠 자물쇠로까지 단단히 채워져 있는 것을 보며 범지훈은 철두철미한 남자의 뒷수습에 혀를 내둘렀다. 기절한 순간까지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하다니. 우선은 옆에 있는 카운터부터 뒤져 자물쇠 열쇠가 있는지 찾아봐야 했다. 백사현 또한 마찬가지 생각인지 곧바로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범지훈 또한 백사현을 따라 움직였다.
“지훈 씨.”
카운터의 모든 곳을 탈탈 털다시피 뒤졌는데도 열쇠 비슷한 거라곤 보이지 않았다. 백사현의 부름에 뒤졌던 서랍을 다시 열어 보던 범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
“뭐가 말입니까?”
“굳이 왜 저기… 아닙니다.”
셔터가 내려진 곳을 가리키려 했던 건지 그쪽을 바라보던 백사현이 손을 움직이려다 내렸다. 아무래도 기절한 남자한테 열쇠가 있는 것 같다고 창고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단 백사현의 다음 말엔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돌아온 창고에서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쓰러져 있는 남자를 두 사람은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열쇠 꾸러미조차 나온 게 없었다. 카운터에 흔히 있을 법한 가게 전화기도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핸드폰 또한 없어서 품에 핸드폰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남자에겐 핸드폰조차 없었다. 범지훈은 남자에게서 손을 떼며 일어섰고 백사현은 남자의 팬티 속까지 뒤져 볼 생각으로 다시 꼼꼼히 보았다.
“아무래도 여긴 없….”
노래방의 불이 꺼진 건 그때였다. 밖에서 은은히 들리던 TV 소리 또한 멎었다. 백사현과 범지훈의 시선이 동시에 천장을 향했다. 정전인가? 싶었지만 하필 이 타이밍에 정전이 된다는 게 조금 이상했다.
“카운터에 비상용 손전등이 있는지 가 보면….”
“지훈 씨.”
백사현이 범지훈을 멈춰 세웠다.
“열쇠를 찾으면 얘기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는데,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느꼈던 게 있어요.”
그리고 백사현은 말했다. 범지훈의 뒷목에 작은 소름이 돋았다. 정전까지 되니 탈출물이 공포물로 장르 변경을 한 것 같았다.
“아까 잠긴 출입구, 뭔가 이상한 점이 있지 않았나요?”
“이상한 점… 말입니까?”
“보통은 방범용으로 바깥쪽에 셔터가 있는 게 기본이잖아요. 그런데 그게 안쪽에 있는 거라면.”
백사현의 말을 듣고 나서야 범지훈의 눈이 커졌다. 왜 그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보통은 셔터가 바깥쪽에 있는 게 일반적이었다. 밖으로 나온 뒤 가게로 들어가는 유리문을 먼저 잠그고 셔터를 내리며 이중으로 잠그는 용도였으니까. 그런데 바깥도 아니고 안쪽으로 잠글 수 있는 셔터라면.
“안쪽에서 잠글 수 있다면, 저 출입구 말고도 빠져나갈 비상구가 또 있다는 소리군요.”
하긴 비상구가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특히나 지하일 경우엔 화재 시 대피할 비상구 하나씩은 필수였다.
“네, 비상구를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열쇠가 없으니 문을 부숴야 하겠지만 셔터를 부수는 것보다는 나을….”
백사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지훈의 시선이 움직였다. 창고 문과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백사현의 뒤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범지훈의 손이 빠르게 백사현을 당겨 왔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백사현을 무언가 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칼입니다. 조심하세요.”
다급하게 속삭인 범지훈이 품 안에 당겨 온 백사현을 안았다. 정전되는 것과 동시에 잠시 놓았던 백사현의 손을 다시 잡고 있었던 게 천운이었다. 칼이라고 단정 짓자마자 떠오른 건 정신을 잃은 백사현의 목에 칼을 들이대던 여자였다. 남자는 저기 그대로 기절해 있고 백사현과 범지훈 외에 이곳에 있을 사람이라면, 그 여자밖에 없었다. 동맥에 갖다 대지 않는 한 커터 칼로 사람을 곧장 해칠 수는 없겠지만 지독하게도 백사현만을 노리는 여자의 고약한 행태에 범지훈은 인상이 써질 정도였다. 또다시 여자가 백사현을 노릴까 백사현의 팔을 당겨 재빨리 제 뒤로 숨긴 범지훈이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연예인의 몸에 상처가 나게 할 수는 없었다. 가벼운 상처쯤이야 범지훈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또다시 칼에 반사된 빛이 보인다면 깊게 베이는 걸 각오하고서라도 여자를 잡아 멈추게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무언가가 반짝였다. 범지훈은 그곳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었다.
“아…!”
“…백사현 씨!”
놀란 범지훈이 소리쳤다. 범지훈이 손을 뻗기 전에 뒤에서 손을 뻗은 백사현이 빨랐다. 짧은 비명은 여자 쪽에서 났다. 칼을 쳐 버린 백사현 때문이었다. 불행히도 칼을 놓친 건 아닌지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두 남자와의 무력 다툼은 이길 승산이 없다고 여겼는지 창고를 빠져나가 도망치는 여자의 달음박질 소리가 들렸다.
범지훈은 서둘러 백사현을 살폈다. 툭. 투둑. 조용한 가운데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범지훈은 깨달았다. 한쪽 팔을 감싸 쥐고 있는 백사현의 손에서 떨어지는 건 피였다. 비릿한 냄새가 범지훈에게도 훅 끼쳤다. 이건 단순히 커터 칼로는 날 수 없는 양의 피 냄새였다.
범지훈은 제대로 화가 났다. 그러니까, 그는 오랜만에 이성을 잃었다. 자신보다 작은 여자란 생각은 이미 사라졌다. 도대체 백사현에게 왜 이러는 건지 정당한 이유라도 알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범지훈은 백사현을 두고 여자가 달려간 소리를 쫓아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자가 도망갈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어둠에 잠긴 노래방 안은 범지훈도 그렇고 여자가 뛰기에도 맞지 않았다. 범지훈이 벽에 부딪쳐 가며 앞으로 나아간 것처럼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키가 큰 범지훈이 긴 다리를 뻗어 달리기 시작하니 뜀박질 소리는 금방 따라잡았다. 문제는 범지훈을 쫓아 뒤에서 따라 달리기 시작한 백사현이었다. ‘지훈 씨, 잠시만요!’ 범지훈을 말리려고 입을 열던 백사현은 우뚝 멈춰 선 범지훈의 발소리에 따라 멈췄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범지훈의 손이 보호라도 하듯 백사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씨발…! 그, 그러게 처음부터 안 나댔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가 주춤 앞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칼을 겨누고 있을 모습이 머리에 그려졌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두 남자에게 쫒기던 여자는 지금 제대로 궁지에 몰린 모양이었다. 대체 왜 백사현에게 이렇게까지 원한을 가졌는지 이유를 그제야 들을 수 있게 된 것에 범지훈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백사현 너! 네가, 네가 뭔데 그… 그렇게 인기가 많아?!”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헛소리에 범지훈은 잠깐 생각이란 걸 멈췄다.
“우리 모사! 모사가 가져야 할 인기인데 네, 네가 다 뺏어 가고 있잖아! 잘생긴 것도 아닌 주제에…!”
살‘모사’. 나이순으로는 셋째인 아이돌 그룹 에스의 멤버. 조각 같은 얼굴의 비주얼 멤버라고 사위민에게 들었었다. 범지훈은 그제야 헛웃음을 뱉었다.
[악개 정말 싫어요. 다 같은 에스 멤버들인데 누구는 좋아하면서 누구는 혐오할 만큼 싫어하는 게,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럴 거면 아예 좋아하지도 말지. 반갑지도 않은데.]
악성 개인 팬. 줄여서 악개. 인터넷에서 난리를 친다는 사위민의 설명은 틀린 모양이었다. 여기 눈앞엔 인터넷뿐만이 아닌 현실로도 난리를 치는 정신 나간 팬이 있었다. 범지훈은 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식의 범죄를 저지를 수가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감금죄부터 시작해 상해죄에다 지금은 흉기를 들이밀며 위협하기까지. 한두 개가 아닌 범죄에 범지훈은 속으로 형량을 계산해 보았다. 합의를 해 주지 않으면 징역은 확정이었다.
“경호원은 꺼져…! 나 저 새끼 얼굴 칼로 긋기 전까지 못 물러나!”
소리치는 여자가 범지훈을 향해 달려든 건 순식간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는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그 순간, 범지훈의 몸이 뒤로 당겨지고 앞으로 나서는 건 또 백사현이었다. 범지훈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푹.
둔탁하게 무언가를 세게 박아 넣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를 악문 범지훈의 턱이 저도 모르게 떨려 왔다. 아까보다 더 심한 피 냄새가 코를 마비시킬 듯 쏟아졌다. 투두둑. 묽은 액체는 점점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큭.”
낮은 신음과 동시에 챙강 소리를 내며 칼이 떨어졌다. 커터 칼이라기엔 좀 더 묵직한 소리인 걸로 보아 과도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끔찍하게 아플 리가 없었다.
“씨발.”
처음으로 백사현의 욕을 들었다. 범지훈은 와중에 욕하는 백사현의 목소리가 꽤 섹시하다고 느꼈다. 힘이 풀린 다리에 범지훈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감싸 쥔 범지훈의 손목 아래로 손에서는 비처럼 후두둑 쉼 없이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저를 뒤로 당긴 백사현이 또 나서기 전, 범지훈은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손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어른거리는 날붙이를 향해서. 생각을 했을 때에는 범지훈의 손이 칼의 날 부분을 한 손으로 꽈악 움켜쥐고 빼앗은 뒤였다. 아까의 백사현처럼 날붙이를 옆으로 쳐서 떨어뜨리는 게 아닌 범지훈처럼 날을 그대로 잡아 당겨 와서 빼앗을 줄은 몰랐던 터라 여자는 너무 쉽게 칼을 빼앗겼다.
바닥에 떨어진 칼을 혹시나 줍기라도 할까 그 짧은 사이 백사현의 발이 보이지도 않을 어둠 속 날붙이를 여자의 반대편 방향으로 밀어냈다.
“너….”
가라앉은 백사현의 목소리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여자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여자 쪽으로 걸어가는 백사현의 발걸음과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백사현 씨!”
왜인지 모르겠지만 백사현은 아까의 범지훈처럼 굉장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손을 뻗어 말려 보려다가 너무 아파서 범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동맥도 아닌데 칼에 조금 깊게 베여 봤자 무슨 큰일이 나겠나 싶어 안이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문구용 커터 칼도 아니고 진짜 칼이었다. 백사현이 베이는 걸 봤었다지만 범지훈은 그게 이렇게 아플 줄은 상상도 못했다. 범지훈은 누아르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조폭인 아버지와 마피아 손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나름 귀하게 다뤄지던 예쁜 자식이었다. 그렇기에 직접적으로 실제 칼을 맞을 일 또한 드물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제대로 된 칼에 찔려 본 건 거의 처음이란 소리였다.
그나저나 범지훈은 아픔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앞을 살폈다. 아무리 아프고 화가 나도 폭력이 나쁘다는 건 알았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법의 철퇴가 아닌, 남의 집 예쁜 자식(*백사현)이 또 다른 남의 집 예쁜 자식이었을 인간(*지금은 인간 같지도 않은 여자지만)을 마음대로 해하는 건 용납 못 했다. 간단한 제압만 한다면 모르겠지만, 여기까지 느껴질 정도의 스산한 느낌으로 보아 백사현은 범지훈이 말릴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섰을 정도로 대단히 빡이 돌았다. 어떡하지. 범지훈은 당황했다.
“백사현 씨, 저 괜찮습니다. 칼도 치웠잖아요. 그러니까, 이리 오세요.”
“싫어요.”
이성을 잃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거로 생각했는데 백사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범지훈의 마음에는 전혀 들지 않는 답이었지만. 길디긴 노래방 복도를 저벅저벅 가로질러 걷는 백사현의 발걸음이 섬뜩했다. ‘오, 오지마…! 오지 말라고!’ 비명을 질러 대는 여자에 범지훈은 머리가 아파졌다.
“백사현 씨.”
“싫다고 했습니다.”
“저 아픕니다.”
그 말에 거짓말처럼 백사현의 발걸음 소리가 멎었다. 범지훈도 이게 먹힐 줄은 몰라 잠깐 놀랐다.
“…금방 처리하고 병원에 데려갈게요.”
“저, 진짜 아픕니다. 정말 너무 아파요.”
“얼마 안 걸려요.”
“백사현 씨!”
다시 걸어가는 백사현의 발걸음에 여자는 끝내 비명을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범지훈은 말려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별의별 이야기들이 뇌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범지훈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좋아합니다! 그래서 구했어요!”
효과는 직방이었다. 백사현이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백사현의 고개가 범지훈 쪽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방금, 뭐라고?”
“제가 백사현 씨 진심으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이 나간 거예요. 제가 마음대로 벌인 일이니까 저 때문에 그렇게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열성 팬이라면 백사현을 위해 이 정도쯤은 하지 않을까 범지훈은 막연히 생각했다. 말이 길어지는 범지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백사현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멀리서 여자의 흐느낌이 공포 영화 BGM처럼 스산하게 들렸다. 여자는 다행히 여기서 가장 먼 방으로 안전하게 피신한 것 같았다.
“…좋아한다고?”
그런데 이번에 범지훈이 위험할 것 같았다. 스산한 기운 그대로 범지훈을 향해 한 걸음씩 백사현이 다가오는데 범지훈은 왠지 모르게 오한을 느꼈다. 소름이 뒷목을 타고 오소소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역시 사위민처럼 귀여운 생김새도 아니고 시커멓고 커다란 남자가 좋아한다고 하는 게 기분 나쁘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백사현이 범지훈의 앞에 멈춰 섰다. 뚝뚝. 쉼 없이 떨어지는 핏소리가 백사현에게서 나는 건지 범지훈에게서 나는 건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느리게 뻗어지는 백사현의 손이 범지훈의 뺨을 감쌌다. 범지훈은 흠칫했다.
“듣기 좋으니까 이번은 넘어갈게요.”
어쩐지 어둠 속 백사현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훈 씨 몸 어딘가에라도 칼이 박혔다면 말이에요.“
범지훈의 시선이 백사현의 윤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사람 죽었어.”
사람인데, 어쩐지 뱀 같기도 했다. 뱀 앞의 먹이가 된 느낌. 범지훈은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콰앙- 귀가 멍할 만큼 커다란 소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연달아서 들려오는 소리에 무언가가 처참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단단한 알루미늄 셔터가 있었던 쪽이었다. 그리고 웅성거리며 사람들의 말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왔다. 백사현의 뒤로는 라이트가 비춰졌다. 그늘이 졌지만 그때야 범지훈은 백사현의 얼굴을 한결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런 백사현은 범지훈이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표정을 그 예쁜 얼굴 위로 그리고 있었다.
“대표님…!!”
범지훈을 발견하자마자 찢어질 듯 소리치는 우렁찬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장 선두에 선 남자는 산만한 덩치에 꼭 곰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넥타이도 매지 않은 헝클어진 정장 차림의 남자는 범지훈을 발견하곤 울부짖듯 소리쳤다.
“대표님 저기 계신다! 얼른 모셔라, 이 새끼들아…!”
그들은 범호 캐피탈의 경호 단체 ‘타이거(tiger)(*네이밍은 범지훈의 작품이 아닌 경호 단체가 합의하에 직접 붙였다.)’였다. 가장 선두에 선 경호 단체의 팀장, 곽팔두는 몇 시간 동안 찾아 헤매던 대표님이 무사하시다는 안도감에 범지훈의 옆으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뒤늦게서야 알아차렸다.
곽팔두와 경호 팀의 서늘해진 시선은 범지훈에게서 범지훈의 앞에 있는 백사현에게로 옮겨졌다. 백사현의 발밑으로 피범벅이 된 식칼이 떨어져 있다는 것까지 확인한 경호 팀의 눈이 회까닥 돌아가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 새끼 잡아…!!!”
우렁찬 곽팔두의 명령이 떨어지자 정장 차림의 덩치들은 좁은 노래방 복도를 앞다투어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백사현이었다.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범지훈은 백사현을 보호하기 위해 아픈 줄도 모르고 서둘러 손을 뻗어 그의 뒷머리를 감싸 당겼다. 폭 소리가 날 만큼 또 범지훈에게 끌어안긴 백사현이 두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범지훈은 외쳤다.
“건드리지 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거짓말처럼 덩치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피범벅이 된 손으로도 백사현을 단단히 품에 안은 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는 범지훈은 덩치들이 오해하기에 한 점의 부족함이 없었다.
***
여자는 생각한 대로 에스의 멤버 모사의 악성 개인 팬이 맞았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비뚤어진 사랑은 이렇듯 좋지 않은 결말을 낳았다. 끔찍한 범죄를 행동으로 옮긴 여자는 범죄에 가담한 남자와 함께 구속되었다. 그리고 에스의 소속사는 멤버인 백사현과 모사 모두에게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백사현의 악질적인 스토커와 그의 남자 친구가 함께 벌인 납치극이란 걸로 기사를 싣기로 합의를 봤다. 대형 소속사이긴 하지만 대박 건인 이번 이슈에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소속사는 일단 기사가 터지는 걸 막아 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정도였다.
그리고 합의된 기사가 나가자 연예계뿐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가 크게 들썩였다. 안 그래도 이름만 들으면 아는 탑 아이돌 그룹 에스였는데 그 에스의 멤버 중 하나인 백사현의 납치 소식에 팬들은 물론 사람들 모두가 웅성거렸다. 한동안 국내의 뜨거운 감자는 에스의 백사현에 관한 소식들이었다. 자연스레 백사현의 현재 몸 상태는 어떨지 모두의 관심도 기울어졌다. 그러니 백사현이 입원한 병원 또한 숨어드는 기자들로 시끄러웠다. 소속사는 백사현의 절대 안정을 위해 1인실을 골랐지만, 병실에 백사현이 붙어 있던 적은 현재 손에 꼽을 정도였다. 백사현이 살다시피 하는 곳은 자신의 병실이 아닌 바로 옆, 범지훈의 병실이었으니까.
“지훈 씨, 이거 먹어 볼래요?”
아. 입을 벌리는 시늉을 하는 백사현에 범지훈은 따라 입을 벌렸다. 이내 입 안으로 쏙 들어오는 건 한입 크기로 먹기 좋게 잘린 큼직한 샤인머스캣 한 알이었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씹는 범지훈의 혀끝으로 망고 향이 살풋 나는 시원한 포도 맛이 퍼졌다.
“…혼자서 먹을 수 있습니다.”
“안 돼요. 손을 그렇게 다쳐서. 물 들어가면 안 된다면서요?”
그건 그런데. 차마 하지 못하는 뒷말은 다시 입 안으로 포도알을 넣어 주는 백사현에 의해 다물어졌다. 범지훈의 민망함은 지금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조금의 선처도 없이 납치범들에게 최대한 무거운 형량을 주겠다는 소속사의 결심 어린 권유에 팔 한쪽밖에 다친 곳이 없는 백사현이 전치 4주의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야 이해가 간다지만, 범지훈은 왜 자신까지 이렇게 드러누워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손에 깁스라도 한 듯 두꺼운 붕대를 감고 있던 범지훈은 다친 손 외엔 건강하기 그지없는 쌩쌩한 몸 상태에 검진을 위해 의료진이 병실에 들를 때마다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퇴원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범지훈의 기업 변호사는 이미 백사현의 소속사 법무 팀과 이야기를 끝내 놓고 대표님도 적어도 몇 주는 입원해 계셔야 한다는 통보를 한 지 오래였다. 거기다 한술 더 떠 아버지 범상철 또한 입원하며 당분간 몸을 잘 추스르라는 이야기를 건넸고 가장 문제인 건.
“대표님, 저 왔습…!”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범지훈의 병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곽팔두가 멈칫했다. 시선은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은 범지훈과 침대 가에 앉아 범지훈이 먹을 포도를 손수 자르고 있던 백사현에게 닿았다.
“아, 형수니… 아, 아니 사현 형님도 안녕하십니까?”
곽팔두는 백사현에게 깍듯하게 90도 인사를 건넸다. 범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제발 말조심하라니까. 주의를 시켰지만 곽팔두는 처음 백사현을 본 날 이후로 틈만 나면 형수님 소리를 해 댔다. 백사현은 호칭 정정에 대한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겁한 범지훈의 한소리에 사현 형님(*놀랍게도 액면가 마흔 살인 곽팔두는 백사현보다 훨씬 어렸다.)이라고 바꿔 부른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아니, 대표님! 지금 무슨 손으로 침대를 짚으신 겁니까?!”
곽팔두의 포효에 범지훈의 귀가 먹먹해졌다. 그러니까, 퇴원하기가 어려운 가장 큰 문제는 곽팔두였다. 범지훈이 무슨 유리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친 손을 조금만 움직여도 저렇게 난리 법석을 떨어 대니 그 앞에서 범지훈은 퇴원의 티읕 자도 꺼내기가 어려웠다. 혹시나 187cm의 거구 범지훈이 누군가에게 또 납치라도 당할까 범지훈의 병실 문 앞은 경호 팀 타이거가 번갈아 가며 24시간 상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경찰도 아닌 타이거가 먼저 범지훈을 찾아 노래방까지 온 건지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에 답해 준 사연은 이랬다. 납치된 백사현을 범지훈이 뒤따라간 후, 연락이 두절된 범지훈에 가장 먼저 이준혁이 사라진 백사현과 범지훈의 실종 신고를 경찰에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종된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고 둘 다 멀쩡한 성인 남자들이라 신고 접수가 속 시원히 되지 않았다. 접수가 더디니 핸드폰을 통한 위치 추적 또한 어려웠고 생각에 잠기던 이준혁은 우정선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정선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범호 캐피탈의 타이거를 풀었다. 타이거들은 돈을 떼먹고 달아난 채무자들을 뒤쫓던 과거의 경험들을 십분 살려 범지훈이 몇천 억을 떼어먹고 튄 채무자처럼 죽기 살기로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물론 범지훈이 강탈해 가듯 몰고 가 버린 사위민의 SUV의 도움도 톡톡했다. 그리고 이 상가 건물에서 유일하게 영업 중이던 당구장에 범지훈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물어본 결과 답이 나온 것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범지훈은 박수를 칠 뻔했다. 빌려준 돈을 받아먹기 위한 아버지의 집착이 낳은 교육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토록 유용하게 써먹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사람 찾기에 도가 튼 뛰어난 인재인 타이거들에도 단점은 있었다. 그건 현장직을 뛰었던 이들답게 각양각색으로 험악한 외모들이었다. 덕분에 환자들 사이에선 최상층 특실 병실엔 현직 조폭 두목이 입원해 있다느니, 옆 병실 미소년이 그 조폭의 남자 애인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퍼져 있었다. 아직 그 사실을 범지훈만 모르고 있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담배 피우러 나간다고 그랬다.”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툭 뱉으며 범지훈은 말과는 다르게 다친 손을 얼른 침대에서 떼어 냈다. 경호 팀 타이거의 팀장 곽팔두가 대표인 범지훈에게 이렇게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것도 그리 오래되진 않아, 범지훈은 기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범지훈의 말 한마디에 죽는시늉도 하며 각이 잡혀 있던 예전의 곽팔두가 조금은 그립기도 했다. 그때, 회식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생각했지만 말만 대표님이지 진짜 친형처럼 자신을 따르는 곽팔두가 동생처럼 귀여운 건 사실이라 범지훈은 회식을 하고 인사불성이 되었던 그때의 곽팔두를 챙기길 잘했다고 여겼다.
여하튼 부쩍 서늘해진 가을 날씨에 얇은 병원복 위로 걸칠 겉옷을 찾는 범지훈에게 곽팔두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같이….”
“됐다. 넌 여기 앉아서 과일 먹어. 백사현 씨가 가져온 건데 맛있더라.”
“네, 팔두 씨. 앉아서 같이 먹어요. 선물 받은 과일들인데 너무 많아서 나눠 먹으려 들고 왔어요.”
‘그, 그럼 그럴까요? 형수… 아니 사현 형님.’ 곰 같은 외모랑 어울리지 않게 해맑게 웃으며 백사현의 옆에 후다닥 앉는 곽팔두에 범지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이렇게 곽팔두를 떼어 냈으니 따라붙으려는 경호 팀도 제지하고 마음 편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분명 1인실인데 범지훈은 병원에 입원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적이 손에 꼽았다. 백사현 때문도 그랬지만(*백사현은 이젠 완벽 적응이 돼서 병실에 찾아오지 않으면 범지훈이 되레 아쉬울 정도였다.)정확히는 그러니까, 취침 시간 전까지 사람들이 범지훈의 병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고 보면 됐다. 먼젓번에는 이준혁과 우정선이 함께, 그 전에는 회사 사람들이, 어제는 사위민이 문병을 다녀갔었다.
마침 병실에 또 함께 있던 범지훈과 백사현을 보자마자 사위민은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곽팔두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범지훈과 사위민 그리고 백사현을 번갈아 봤었다. 끝내는 사위민을 경계 어린 눈으로 지켜보긴 하던데 왜 그랬는지 아직도 범지훈은 이유를 잘 몰랐다. 다행히 범지훈은 물론 백사현의 두 손까지 조심스레 맞잡고 사위민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꼭 낫길 바란다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아서 곽팔두는 다시 안심한 얼굴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곽팔두의 표정을 흘긋 바라보며 범지훈은 저 녀석이 왜 저러나 싶었다.
어찌 되었든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 범지훈은 흡연이 가능한 병원 야외 테라스로 느긋하게 나왔다. 이제 앞으로 문병 올 사람들이 또 누가 있을는지 하나하나 생각해 보던 범지훈은 버릇처럼 장초를 꺼내 입에 물며 지포 라이터를 찾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기.”
찰칵.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열린 지포 라이터가 작은 불꽃을 피워 올렸다. ‘S.B’라는 이니셜이 각인된 은색 라이터였다. 저도 모르게 담배 끝을 가져가 불을 붙인 범지훈은 그제야 제게 라이터를 내민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되게 오랜만이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남자는 웃었다. 그리고 범지훈은 하마터면 방금 불을 붙인 장초를 떨어뜨릴 뻔했다.
“블랙 러시안이네. 국내에선 구하긴 까다로울 텐데 많이 사 놓았나 봐.”
범지훈의 모양 예쁜 입술에 그림처럼 어우러지게 물린 검은 몸체의 담배. 남자는 그것에 눈길을 주며 말을 이었다.
“너랑 잘 어울린다.”
범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하염없이 타들어 가는 담배를 빨아들일 생각도 못 한 채였다.
“그렇지, 지훈아?”
남자, 여사빈이 다시 한번 더 웃었다. 여사빈의 얼굴을 보며, 범지훈은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저녁 약속을 떠올렸다. 동시에 여사빈에게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납치범에게 핸드폰을 뺏긴 이후로 영영 잃어버려 아예 연락할 방도조차 없었다. 여사빈의 번호는 그 핸드폰에만 저장되어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이언 다이닝 룸 예약은 내가 취소했어. 빨리 취소 안 하면 셰프한테도 미안하니까.”
이어지는 여사빈의 말에 범지훈은 어떤 말을 해야 적절할지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약속 펑크에다 바람맞은 당사자가 직접 식당 예약 취소까지 했다니. 범지훈은 지금이야말로 여사빈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타이밍이란 걸 알았다. 그러니까 미….
“손은 어쩌다 이런 건데?”
범지훈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여사빈이 먼저 말했다. 뻗어진 손은 범지훈의 붕대에 감긴 손 대신 손목을 쥐었다. 배려가 담긴 가벼운 힘이었다. 범지훈은 조금 놀란 얼굴로 여사빈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일이 생겨서.”
“납치당한 일?”
“…그걸 어떻게 알지?”
“연예계 소식인데 내가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럼 그 기사가 맞는 거구나.”
뒷말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는 여사빈에 범지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기사?
“아무리 해도 너랑 연락은 안 되지. 이거 보고 혹시나 싶어서 찾아와 봤어. 나도 소속사 운영을 하다 보니 친분 있는 연예부 기자들도 여럿 알고 있어서. 그 기자들이 이 병원에 백사현이랑 같이 네가 입원해 있다고 하더라고.”
설명과 함께 여사빈이 내민 건 핸드폰이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건 오늘 자로 올라온 어마어마한 조회 수를 기록한 연예면 기사였다.
[에스의 사현, 구하려다 함께 납치된 이는 범호 캐피탈 대표 ㅂ모씨!]
“연예면뿐만이 아니고 경제면도 난리야. 너랑 백사현이 무슨 사이일지 추측하는 기사들이 아까부터 계속 뜨던데.”
여사빈의 핸드폰을 가로채듯 빼앗아 가며 범지훈은 화면을 노려보았다. ‘소속사 관계자가 말한 바로는 두 사람은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된 의형제 같은 사이’라는 정상적인 문구도 있었지만 ‘연예계 관계자에 따르면 스폰서로서의 가능성 또한 있다.’라는 말도 안 되는 문구 또한 존재했다.
“…걱정 마, 성관계로서의 스폰서 외에도 다른 건 많으니까. 남자끼리라 그런 건 다들 생각 못 할 거야.”
옆에서 여사빈이 위로랍시고 했지만 범지훈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성관계를 위한 스폰이든 그냥 스폰이든 범지훈은 그럴듯한 기업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본질은 제3금융 대부업체란 걸 알고 있었다. 비즈니스적인 것이라도 이런 곳과 백사현이 관련 있다는 것은 백사현의 이미지에도 타격이 갈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이번 납치 사건으로 6시 공개라던 음원도 공개하지 못하고 퇴원 이후로 미뤘다던데. 범지훈은 침음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여사빈 외에도 미안할 사람이 하나 더 생기고 말았다.
***
곽팔두는 다친 팔로도 유려하고 조신하게 칼질을 하는 백사현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백사현은 곽팔두가 먹기 좋도록 주먹만 한 포도송이를 한입 크기로 잘라 주고 백화점에서나 팔 법한 본 적 없는 희한한 수입 과일들을 꺼내어 토막토막 잘라 내었다. 곽팔두가 직접 한다고 해도 만류하면서 말이다. 곽팔두의 표정은 조금씩 흐뭇해지기 시작했다. 대표님의 신붓감 아니, 신랑감으로 그만이었다. 범지훈이 말은 안 했지만 곽팔두도 알고 있었다. 범지훈의 취향이 어떤지 정도는.
그리고 그 취향들이 하나같이 범지훈을 무서워한다는 것도 곽팔두는 다 알고 있었다. 우리 대표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 범지훈이 좋아하는 남자만 아니었다면 우리 대표님이 어디가 어떠냐고 곽팔두는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찾아가 무섭게 따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지훈이 아예 연애를 못 해 본 건 아니었다. 범지훈의 취향을 저격하는 무해하기 그지없는 초식 동물은 아니었지만, 여우 같은 남자들은 의외로 범지훈을 좋아했다. 일찍이 범지훈의 말랑한 성정을 꿰뚫어 보고는 여우를 쏙 빼닮은 고 얍삽한 남자들은 범지훈에게 찰싹 붙어 옆자리를 차지하고는 했다. 곽팔두가 알고 있기로는 가장 최근(이라지만, 반년도 훨씬 넘었다.)에는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채로 웬 남자와 잠자리를 가진 대표님이 결국 책임지겠다며 그 남자와 사귀게 되었는데, 아주 상전이 따로 없었다.
이거 사 달라 저거 사 달라, 여기로 데려가 달라, 거기로 데려다 달라, 한 회사의 대표씩이나 돼서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었던 범지훈은 자는 시간을 쪼개서 그렇게 그 남자의 운전기사와 수행 비서를 자처하곤 했다. 일에 치여 범지훈이 도저히 남자의 요구를 들어줄 시간이 없을 때에는 보다 못한 비서 우정선이나 곽팔두가 나서서 범지훈 대신 남자의 뒤처리를 해 주기도 했다. 범지훈은 그럴 때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곽팔두는 범지훈이 안쓰럽기만 했다. 이렇듯 여우 같은 남자들은 범지훈의 간이고 쓸개고 전부 빼 가며 사귀는 사람에게 항상 최선을 다하는 범지훈을 이용하곤 했다.
범지훈에게 함부로 대하니 곽팔두에게도 마찬가지였었다. 곽팔두가 마치 제 몸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거 들어 달라느니 저거 먹고 싶으니 사 오라느니 만약 여기 있는 게 백사현이 아닌 그때 그놈이었다면 벌써 곽팔두가 칼을 든 채 과일을 돌돌 돌려 깎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깎다가 빡친 곽팔두가 끝내 참지 못하고 과일이 아닌 남자의 머리털을 돌돌 돌려 깎았을 테지만. 뭐든 칼을 든 사람에겐 함부로 덤비면 안 됐다.
여하튼 이런 지경이었으니 그런 백사현을 보며 곽팔두의 눈이 하트 모양이 된 건 당연했다. 백사현에게 호감이 팍팍 느껴지니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꺼내 놓고 싶어지기도 했다. 어느새, 곽팔두는 백사현에게 얼마 전 상견례까지 치른 여자 친구이자 예비 신부의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백사현은 과일을 자르는 중간마다 곽팔두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주며 집중하며 듣는 듯했다.
“…그래서 결국 누나한테 프러포즈를 받았지 뭡니까. 저 진짜 그렇게 박력 있는 여자는 처음이었습니다. 너무 멋있어요.”
“아, 정말요?”
벽 치기를 당한 채 ‘너 내 신랑 하자.’라며 박력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흘러가던 곽팔두는 얼굴을 붉히며 뺨을 감쌌다. 부끄러움에 커다란 덩치를 잔뜩 웅크리곤 어쩔 줄 몰라 하는 곽팔두를 백사현은 기계적인 미소를 머금고 바라봤다.
“요즘엔 연하남이 대세긴 한가 봅니다. 형수… 아니 사현 형님도 저희 대표님보다 네 살 어리시던데 맞죠?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는데 너무 잘 됐습니다.”
이어지는 말엔 기계적인 미소는 간데없이 백사현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런가요?’ 물어 오는 백사현에게 곽팔두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님 짝으로 딱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백사현의 예쁜 얼굴 위로 진실된 미소가 번졌다.
“정말 세상에 사현 형님 같은 남자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대표님이 그런 여우 같은 새끼들 때문에 마음고생 안 하셔도 됐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죠?”
“아, 대표님이 말씀 안 하셨구나. 하긴 대표님께서 그런 걸 말씀하실 분이 아니긴 합니다. 그러니까, 대표님이 지금까지 만났던 놈들이….”
곽팔두는 본격적으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처음엔 범지훈을 좋아한다며 죽자 사자 쫓아다니던 여우부터 사귀기 시작하더니 안면이 싹 바뀌는 여우와 범지훈과 사귀던 도중 다른 놈과 바람이 나 버린 여우, 범지훈이 자신의 소유라도 된 것처럼 소유욕을 심하게 드러내던 여우, 그리고 최근이자 마지막이었던.
“술에 취해 필름 끊긴 대표님을 옳다구나 하고 날름 낚아채 먹어 버린 여우 새끼도 있었다니까요?”
곽팔두와 함께 과일을 집어 먹으며 분노를 드러내던 백사현이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린 채 계속 기침을 뱉는 백사현에 곽팔두는 물이라도 떠다 드릴까 걱정하며 물었다. 백사현은 입을 틀어막은 채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과일을 잘못 삼켰는지 백사현이 진정이 되고 나서야 곽팔두는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러면서 책임을 지라면서 뻔뻔하게 요구한 후에 대표님이랑 교제를 시작했는데, 그 자식은 완전히 상전 마마였어요. 대표님이 그 새끼랑 사귀면서 현대판 노비 영화 한 편을 찍으셨다면 말 다 한 거 아닙니까? 대표님 밑에 있는 저희야 아주 무수리 취급이었다니까요? 근데 그런 것도 대표님의 현 애인이었을 때니까 어떻게든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제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그 부분이었습니다.”
모터라도 달린 양 신들린 듯 입을 털던 곽팔두가 앗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기다리다 못한 백사현이 되물을 정도였다.
“어떤 부분이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신을 차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꾹 다무는데 백사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얘기해 주시기 어려운 부분인가요? 지훈 씨에 관해서라면 저는 뭐든 알고 싶은데요.”
“뭐, 든지요?”
“네. 그래야 지훈 씨가 뭘 싫어하고 제가 어떤 걸 특히 조심해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더 가까워질 사이인데.”
“더 가까워질 사이라면?”
“아시잖아요. 저, 지훈 씨 덕분에 이렇게 목숨도 구했는데요.”
사르르 눈매를 휘며 웃는데 그걸로 모든 대답이 될 정도였다. 예쁘긴 진짜 예쁘구나. 그런 백사현의 미소를 보며 곽팔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긴 우리 대표님이 남의 인성은 잘 못 봐도 심미안 하나는 확실하지.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백사현이 범지훈과 연애를 목적으로 진지하게 알아 가기 시작하는 단계라면 이런 이야기들도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사실, 저희 대표님이 밤일을 좀 잘하십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백사현의 두 눈이 커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자식이 대표님과 하룻밤을 보내고는 그거에 반해서 책임져 달란 말까지 꺼냈겠지요. 요망한 새끼. 아무튼, 그 새끼는 대표님에 대한 배려가 조금도 없는 놈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충격적이었다.
“언제 어느 때고 장소 불문 대표님한테 덤벼들었으니까요. 그 새끼는 그러니까, 대표님을 소위 말하자면 자기 딜도로 쓰는 미친놈이었습니다.”
콱. 그 순간, 단단한 코코넛 위로 두부처럼 손쉽게 과도가 박혔다. 과도의 손잡이 부분을 움켜쥔 백사현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곽팔두에게 되물었다.
“딜도요?”
“…예? 아… 네. 그래서 대표님이 많이 곤란해하셨습니다. 대표님은 저희에게 그 새끼를 아주 친한 친구라고만 소개한 상태였었거든요. 본인이 게이라는 걸 대놓고 얘기하지 않으시던 대표님이지만 티가 다 나서… 아무튼, 제가 운전하고 있는 데서도 뒷자리에 앉아선 대표님께 입을 맞춰 대면서 옷을 벗기려고 안달이었습니다. 백미러로 제 눈치를 살피며 그 새끼한테 그만하라고 부탁하는 대표님 때문에 못 본 척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그걸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곽팔두는 바로 차에서 내렸지만 범지훈과 여우는 오랫동안 차에서 내리지 않았었다. 이따금 차가 덜컹이며 차 밖으로 여우의 것일 게 분명한 천박한 교성이 흘러나와서 곽팔두는 그때야 차에서 멀리 떨어져 주변에 누가 오는 사람이 없나 감시를 하기도 했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말랑해지는 편이니까요, 범지훈은.”
“네?”
방금 범지훈이라고…? 멀뚱멀뚱하게 바라보는 곽팔두에게 백사현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지금 그 여우 같은 개새끼는 어디서 뭐 하고 있나요?”
***
범지훈은 미간을 문질렀다. 눈앞엔 샷 하나를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여사빈이 앉아 있었다. 기사를 확인하곤 서둘러 병실로 돌아가려는 범지훈을 붙잡고 나한테 미안하지 않으냐고 여사빈은 되물었다. 미안한 건 사실이라 범지훈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범지훈은 병원 내 카페로 여사빈을 데려와 마주 보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빨리 기사를 수습해야 하는데. 초조함에 자꾸만 카페 출입구를 흘끔 바라보며 좌불안석인 범지훈에 가만히 지켜만 보던 여사빈은 말했다.
“…이미 친한 기자들한테 부탁해서 반박 기사 좀 내 달라고 했어. 백사현의 열성 팬인 범 모씨 정도라고 하면 되나?”
그 말에 범지훈의 시선이 여사빈에게 제대로 닿았다. 여사빈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까 봐 주네.”
“이미 추측성 기사들이 나간 후인데 반박 기사들로 진정이 되는 건가?”
“응, 전부가 거짓말도 아니고 진실을 살짝 섞으면 그럴듯해지니까.”
범지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여사빈은 어깨를 으쓱이며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형세가 뒤집혔다. 아까까지만 해도 의자에 바짝 붙어 금방이라도 나가고 싶다는 듯이 출입구 쪽으로 몸을 틀었던 범지훈이었는데 지금은 테이블에 바싹 붙어 앉은 채 여사빈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말이지?”
“간단해. 백사현의 열성 팬인 범지훈 대표라는 거짓말에 백사현 매니저인 네 친구의 소개로 만나게 됐다는 진실을 섞는 거지.”
여사빈의 정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병원까지 알아서 찾아오고 납치 사건의 경위에 대해 묻지도 않는 걸 보아하니 대부분을 알고 있는 듯했다. 곰곰이 여사빈의 말을 곱씹어 보던 범지훈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설마.
“그저 팬인 네 직업이 그럴 뿐이지, 솔직히 인맥도 능력이야. 매니저 친구 통해서 좋아하던 연예인 만나 친해지는 게 어디가 어때서? 이성끼리도 아니고 은근히 차별 심한 대한민국에서 성별이 같다는 장점은 이럴 때 쓰기 괜찮거든.”
여사빈의 뒤에서 후광이 비쳐 보이는 착각까지 들었다. 어느새 범지훈은 얌전히 두 손을 모은 채 전지전능하신 여사빈 님을 바라보았다. 죽도록 싫은 녀석이지만,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됐다. 거기다 차별 심한 대한민국이라니, 동병상련의 동지애까지 느껴졌다. 범지훈은 지금이야말로 여사빈에게 인사를 해야 할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그러니까 미안하고 고마….
“나한테 고맙지?”
범지훈이 먼저 입을 열기 전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여사빈이 물었다.
“고마우면 밥 사. 저번에 사 준다고 네 입으로 그랬어. 지훈아.”
고마워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치며 당당히 요구하는 여사빈의 행태가 범지훈은 얄미워졌다. 전지전능하신 여사빈 님은 개뿔. 큰 실언을 했다. 범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사 준다고 얘기를 한 기억은 있었다. 새벽에 찍힌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온몸의 피가 다 빠질 것 같았던 범지훈은 여사빈과 급하게 저녁 식사 약속을 잡으며 사 준다고까지 직접 말했다.
“그래, 사 줄게. 그럼 볼일은 끝난 건가? 먼저 일어난다.”
“잠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범지훈을 여사빈이 막았다. 왜 이렇게 급할까? 능글맞은 미소를 덧그리는 여사빈에 범지훈은 괜스레 심기가 뒤틀렸다.
“연락처도 모르는데 서로 어떻게 약속은 잡으려고. 핸드폰 줘.”
틀린 말은 하나 없어서 우정선이 엊그제 새로 개통해 준 핸드폰을 여사빈에게 건네며 범지훈은 두 핸드폰에 야무지게 번호를 저장시키는 여사빈을 지켜봤다. 그나저나 저 여사빈이 진짜 그 뱀 문신이 맞을까? 범지훈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고깃집에서의 식사 이후, 필름이 끊기면서부터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진 건지 알고 싶어졌다.
“이제 연락 잘 받고. 이번엔 큰일 겪어서 이해한다지만 또 이유 없이 연락 끊기면 나 되게 섭섭할 것 같은데.”
“…우리가 애인 사이는 아니다만. 일단, 노력해 보도록 하지.”
여사빈이 꼭 연락에 소홀한 애인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은 뉘앙스로 얘기하는 것 같아, 범지훈은 불만을 표시하려다 말았다. 날짜 카운트 문자는 고의로 무시한 게 맞지만, 약속 당일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던 건 명백한 범지훈의 잘못이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이번은 참자. 범지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분고분해지려 노력했다.
“애인 사이는 아니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아닐 텐데.”
이어지는 말엔 범지훈의 고개가 자동으로 들어 올려졌다. 의미심장한 표정의 여사빈은 범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날 새벽에 나랑 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아?”
***
여사빈은 원체 집착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연애를 해도 가볍게, 호감이 생겨도 가벼운 마음으로. 단 한 번도 관계가 깊어진 적도 질척해진 적도 없었다. 아, 여사빈의 마음이 그렇다는 소리였다. 여사빈과 사귀며 귀찮을 만큼 깊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야 많았다. 여사빈은 사귀는 상대이니만큼 예의는 지켰다. 다만, 상대가 본인의 정도를 넘어섰다고 느끼면 빙글빙글 웃던 그 얼굴이 차갑게 식으며 관계 또한 차갑게 잘라 냈다. 여사빈에게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단숨에 뒤바뀐 관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엉엉 울 때가 많았다.
여사빈이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여자아이는 여사빈의 뺨을 내리치며 울었다. 너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여자 만나 보라며 저주처럼도 퍼부었다. 여사빈은 발갛게 부은 뺨을 감싸며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웃어 보였다. 그건 상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기 충분한 미소였다. 여사빈은 본인의 웃는 얼굴이 남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지 기가 막히게 잘 알아서 그 웃는 얼굴을 때와 장소에 따라 제 마음대로 이용하곤 했다. 어떨 때는 호감을 사기 위해서, 또 어떨 때는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내기 위해서. 이 웃음은 후자의 이유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는 숨이 넘어가게 꺽꺽 울었다.
여사빈은 어머니의 외모를 꼭 빼닮았다. 그래서 예쁘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다. 이차 성징이 오고부터는 잘생겼다는 칭찬이 주였지만 아주 가끔 예쁘장하는 소리도 듣긴 했다. 여사빈의 어머니는 배우였다. 유명하진 않았고 드라마 좀 좋아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알음알음 아는 드라마에 조연 정도로 간간이 얼굴을 비치는 배우였다. 그런 어머니가 가수였던 아버지와 만나게 된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원래 꿈은 가수였으니까. 80년대 대학 가요제에 나와 수상한 경력까지 있는 어머니는 노래 실력 하나는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가수보다는 배우로서의 기회가 먼저 찾아온 게 문제였다. 분위기 있게 아름다운 어머니의 외모는 무대 위에서 노래나 부르는 급 낮은 딴따라보다는 탤런트가 더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음악 동료로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게 친한 선후배 사이로까지 발전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단순히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지 본인을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도 갖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술을 빌미로 갖게 된 하룻밤 동안의 아버지와 나누었던 사랑은 여사빈을 생기게 했다. 여사빈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어머니는 임신하게 된 것을 아버지에게 숨겼다. 그리고 여사빈이 태어날 예정일 한 달 전,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병원까지 동행해 달라고 할 생각으로 찾아간 아버지의 집 앞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키스를 하던 여자를 보았다. 그때, 어머니는 한번 무너져 내렸던 것 같다.
결국 그녀는 그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얘기했었던 그의 본가를 혼자 찾아갔다. 독사파. 조직의 이름은 그것이라고 했다. 인연을 끊고 나간 아들의 손주를 임신하고 있다며 찾아온 여자를 달갑게 볼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버지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조직폭력배 집안에서 그녀는 악착같이 버텼다. 그리고 외모는 자신의 판박이였지만 행동거지나 성격이 아버지와 꼭 닮았던 여사빈을 낳고서야 숨통을 틔웠다.
여사빈을 귀여워하는 독사파 사람들과 이제야 자신에게 며느리 대접을 해 주는 집안에 어머니는 여사빈이 인생 전부가 되었다. 미련 없이 배우 일도 그만두고 그녀는 여사빈의 육아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리고 여사빈이 네 살이 되었을 즈음,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인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의 사망 전후로 여사빈에 대한 어머니의 집착은 더해 갔다. 어떤 사람들은 끔찍한 아들 사랑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으나 여사빈에게는 끔찍한 집착이었다. 그렇게 집착이란 감정은 여사빈에게서 떼어 내고 싶은 무언가가 되었다.
여자아이의 저주 이후 여사빈은 보란 듯이 남자만 만나고 다녔다. 연하, 동갑, 연상. 여사빈이 가리는 것은 없었다. 중학생 때는 고등학생 형을 만나기도 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같은 반 남자아이들을 눈여겨보곤 했다. 그때 가장 처음으로 여사빈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범지훈이었다.
***
저 또한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었으나, 꽤 특이한 성씨라고 생각했다. 호랑이? 범이라니 그 맹수가 떠올랐다. 이름도 특이하고 외모도 특이한 아이. 여사빈이 범지훈에게 가진 생각은 그게 다였다. 어머니가 러시아 사람이래, 혼혈이야? 어쩐지 되게 잘생겼더라, 분위기 있어, 여사빈의 주위에서 속닥이는 아이들에 묻지 않아도 범지훈의 정보가 머릿속에 흘러들어 왔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네, 라는 감상이었다.
두 번째로 범지훈을 주의 깊게 본 것은 범지훈이 자신처럼 남자를 만나고 다닌다는 거였다. 우선정? 우정성? 아무튼, 그런 이름을 가진 남자아이가 점심시간에 학교가 떠나가라 범지훈 보지 못 했느냐고 찾아다니고 있을 때, 여사빈은 범지훈을 발견했다. 빈 음악실 안에서 범지훈은 누구인지도 모를 어떤 남자아이랑 키스하고 있었다.
닳아 없어질 듯이 입술을 비비던 두 사람은 범지훈이 남자아이를 겨우 떼어 내며 그 행위를 멈췄다. 입을 틀어막은 채 놀란 눈으로 남자아이를 보는 범지훈은 가쁘게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선배, 지금…]
[좋아해, 지훈아!]
범지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백이 이어졌다. 혹시나 했었는데 기정사실이라는 것에 여사빈은 헛웃음을 뱉었다. 저 커다란 덩치로 저렇게 조그만 남자아이 하나 못 당해 내서 입술을 내어 주고 있었던 게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너 처음 입학했을 때부터 좋아했어! 나, 나랑 사…사귀면 안 돼…?]
지랄. 여사빈은 조소했다. 저 남자아이는 암암리에 유명했다. 조금만 잘생겼다 싶으면 성적 취향이 어떻든 냅다 건드리고 보는 창놈이라고. 여사빈 또한 한번 저 남자아이의 찝쩍임을 당해 본 적 있기에 더 잘 알았다. 가벼운 만남을 좋아하긴 했지만, 저런 여우의 손에 놀아나는 건 사양이었다. 그리고 제일 골 때리는 건.
[…네, 그래요.]
여사빈은 기겁하며 음악실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살짝 열린 문 틈새로 들려온 건 분명 범지훈의 대답이었다. 뭐야, 저거? 등신인가? 아무리 봐도 귀가 잘못된 게 아니면 범지훈은 승낙한 게 분명했다. 하긴, 저딴 표정으로 거절의 말을 뱉을 리는 없었다. 귓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떨구는 범지훈에 여사빈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생긴 것도 그렇고 호랑이인 줄 알았더니 등신 호구가 따로 없었다. 여사빈은 남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는 인간이 아니었지만 얼굴값 못 하는 등신 호구가 너무 불쌍해서 이번 한 번만 도와주기로 했다.
[선배님, 혹시 오늘 시간 되세요?]
혼자서 하교하던 남자아이에게 다가간 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왜?’ 이미 자신을 거하게 찬 적이 있는 여사빈이기에 기대 반 경계 반의 얼굴로 물어 오는 여우에게 여사빈은 영화 티켓을 흔들어 보였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같이 볼 사람이 없어서요. 저랑 같이 봐 주시면 안 돼요?]
고기를 던져 놓고 잡아, 잡수라고 하는데 거절할 여우는 세상에 없었다. 냉큼 먹이를 무는 여우에 여사빈은 미소 지었다. 등신 호구, 너는 진짜 나한테 엎드려 절해야 한다.
그런데 등신 호구는 생각보다 더 등신이고 더 호구였다. 범지훈에게서 떼어 낸 여우를 몇 번 데리고 놀다 뻥 차 버린 후 이제 한숨 좀 돌리려는데 그사이 범지훈은 또 다른 여우에게 낚이고 있었다. 아, 쟤는 완전 여우라기에는 좀 애매하긴 한데. 무해한 척 사근사근 웃으며 자기 잇속은 다 챙기는 얌체 같은 놈이긴 한데 남자관계가 복잡한 건 아니고 어쩐다. 고민하는 여사빈의 눈에 범지훈이 그 여우의 따까리 노릇까지 하는 게 보였다. 매점 셔틀은 기본이었고 필기 셔틀에 심지어 등·하굣길 가방 셔틀까지 자처하는 저 등신 호구에 여사빈은 이마를 짚었다. 쟤를 어떻게 해야 되냐?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니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여사빈은 범지훈의 서늘한 눈초리를 밥 먹듯이 받았다. 1학년만 같은 반이었고 2, 3학년은 아예 다른 반이었는데도 범지훈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여사빈만 발견하면 눈을 부라렸다. 솔직히 여사빈은 억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범지훈을 찾아가 너 남자 보는 눈 존나 없다며 하나하나 따지고 들며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렇게 놔두었더니, 허.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근 15년 만에 만나는 건데도 아직도 눈을 부라렸다. 그러니 여사빈 또한 시선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사위민은 믿지 않겠지만 정말 우연이었다. 여사빈 또한 사위민이 귀엽고 성격도 괜찮아서 예전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저를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나름 애쓰던 상대였는데 범지훈이 사위민에게 꽂혀 있을 줄은 예상 밖이었다. 예전에 저 등신 호구를 도와주긴 했다지만 호감을 느낀 상대까지 양보할 정도로 여사빈이 부처는 아니라서 이번엔 정말 제대로 경쟁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조금 유치해지고 말았지만, 그래. 인정한다. 주량 싸움은 나이 서른다섯 살을 먹고 하기엔 낯부끄러운 행동이었다. 고등학생 때 알고 지낸 게 전부라 범지훈의 주량이 어떨지를 몰라서 사실 조금 얕잡아 본 것도 있었다. 턱을 괴고 있던 범지훈의 고개가 휘떡 넘어가고 나서야 여사빈은 승리를 예감했다. 하지만 이미 여사빈도 너무 들이부은 후였다.
쿵.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여사빈은 그대로 기절 잠에 빠졌다. 여사빈은 취하면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게 술버릇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위민에다 사위민의 이모라서 여사빈이 깨어났을 때에는 이미 익숙한 방 안이었다. 취해도 큰 진상을 안 부리고 그 자리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자는 게 여사빈의 술버릇인 걸 다 알고 있어 술에 취해 잠들면 다들 익숙하다는 듯 여사빈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뭐 데려다준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택시에 태워 기사에게 주소를 불러 준 뒤 보내거나, 차를 가지고 왔다면 대리 기사를 호출해도 됐고 술을 안 마셨다면 직접 운전해 여사빈의 집으로 가기만 하면 됐다.
그럼 여사빈의 어머니가 우락부락한 덩치의 남자들과 함께 바로 달려 나와 잠든 여사빈을 데려갔으니까. 걱정 섞인 타박을 늘어놓으면서도 늘어진 아들을 부축하는 손길은 대학생 때나 30대가 넘은 지금이나 늘 사랑이 가득해서 여사빈의 지인들은 너희 어머니는 천사라며 찬사를 늘어놓곤 했다. 항상 아들에게 지극정성에다 결혼하라는 잔소리도 안 해, 이 나이쯤 되면 독립하라고도 권유할 법한데 그런 것도 없다면서 감탄을 하는 지인들에게 여사빈은 그저 웃기만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내 결혼 바라시진 않을 텐데. 대놓고 할 수 없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여사빈의 할아버지는 슬슬 결혼해서 어여쁜 손주도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고모의 자식들 그러니까, 여사빈에게는 사촌이 되는 애들이 이미 전부 결혼을 하고 세 명, 네 명씩 다산을 한 뒤라 그리 큰 압박은 없었다. 여사빈에게 다행일 일은 아니고 어머니에게 다행한 일일까?
하여튼 여사빈은 익숙한 방에서 눈을 뜬 것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 몇 시 정도 됐지? 머리맡을 뒤적이니 금세 잡히는 핸드폰에 여사빈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2시 48분. 무척 이르게도 아니고 심하게 늦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새벽 시간이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얼굴에 쏟아지는 핸드폰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시간을 확인한 것도 잠시, 여사빈은 자신과 대작을 했던 범지훈에게 생각이 미쳤다. …그 등신호구, 집에는 잘 갔나? 회사 대표라는 범지훈의 집을 출근한 지 이틀밖에 안 된 신입인 사위민이 알고 있을 리는 없고, 매니저라는 범지훈의 친구에게 생각이 미쳤다가 그 친구도 아내 때문에 일찍 가 버린 걸 떠올렸다.
그럼 걔를 누가 데려갔지? 생각이 거기까지 가니 여사빈은 남은 술기운도 확 가시는 것 같았다. 백사현도 인기 아이돌이니만큼 스케줄이 있다며 혼자 갔을 것 같은데 설마 사위민의 집에서 자나 싶어 여사빈은 바로 사위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새벽에 실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호랑이한테 혼자 사는 사위민을 날름 맡기는 건 여사빈 사전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차하면 바로 튀어 나가 범지훈을 데리고 올 생각으로 눈에 힘을 주고 있는데 한참 신호음이 울리다가 사위민이 전화를 받았다.
“…선배…?”
방금까지 자고 있었는지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였다. 여사빈은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속은 괜찮은지 사위민의 안부를 묻고는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범지훈 어떻게 됐어?”
그것에 사위민은 대답이 없었다. ‘위민아?’ 되묻는 여사빈에게도 사위민은 ‘음… 어…’ 등의 말로 뜸을 들였다. 설마, 얘네 둘 지금 같이 자는 건가? 이 생각이 드니 여사빈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선배, 그게-”
그리고 들려오는 대답엔 여사빈의 맥이 풀렸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어진 사위민의 설명은 이랬다.
***
모든 설명을 들은 여사빈은 사위민에게서 범지훈의 번호를 받아 냈다. 고깃집에서 여사빈이 잠깐 화장실을 간 틈에 사위민과 백사현에게 본인의 명함을 뿌렸다는 범지훈은 제대로 약아빠진 놈이었다. 나한테는 번호조차 알려 주기 싫다 이거지? 이를 갈며 여사빈은 전화를 걸었다. 전화 때문에 새벽에 잠 좀 설쳐 보라는 엿 먹임의 의도가 다분한 행위는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서야 상대가 전화를 받으며 시시하게 끝났다.
“…범지훈?”
아무런 답도 하지 않는 상대에 여사빈은 번호가 잘못됐나 싶어서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냈다. 밝아지는 화면 속에 있는 건 아무리 봐도 사위민이 문자로 넣어 준 번호가 맞았다.
[…렸어.]
“뭐?”
다시 귀에 가져가니 앞의 말을 놓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태 술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늘어졌지만 분명 범지훈의 목소리였다.
“너 맞지, 범지훈? 집엔 잘 들어갔어?”
[가 버렸어, 그 사람.]
“뭐라는 거야? 아직도 취했어?”
그 말엔 범지훈은 침묵을 지켰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얘 취하면 어떤지 사위민에게 미리 귀띔이라도 받을 걸 그랬다. 여사빈은 침묵이 길어지는 범지훈에 그냥 전화를 끊어야 하나 생각했다.
[내가 잘해 줄 수 있는데. 왜 내 마음에 들면 다 가 버리는 거지.]
“어?”
[아방수 씨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래. 좋아하는데… 내가 싫은가…?]
여사빈은 귀를 의심했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는데 분명했다. 핸드폰 너머 범지훈의 목소리는 축축했다. 훌쩍. 코를 삼키는 소리엔 여사빈의 눈이 커졌다. 얘… 울어?
“…네, 네가 어디가 어때서?”
[내가… 무, 서운가 봐. 부담…스러울 수도 있…어.]
혼자서 물어보고 혼자서 대답하는 범지훈은 소리 죽여 울었다. 소리를 죽인다고는 하지만 선명히 들려오는 작은 흐느낌엔 여사빈은 이마만 문질렀다. 아니, 그러니까 울 줄은 몰랐다. 그 범지훈이 울 만큼이나 상처를 받았을 줄도 몰랐다. 그 정도 외모면 좋다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 같은데.
“야, 범지훈. 괜찮아. 세상에 남자는 많아.”
[근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 들은 날 안 좋아… 좋아하잖아…]
여사빈은 얘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머리를 굴렸다. 그 외모에 그 능력을 갖추고도 본인을 안 좋아한다고 이렇게 땅굴을 파고 있을 줄 몰랐다. 결국, 여사빈은 범지훈 달래기 프로젝트에 돌입하며 이런저런 방안들을 꺼냈다. 좀 밝게 웃어 보라던지, 조금 더 상냥하게 굴라던지, 좋아한다고 대놓고 고백하라던지.
[무서워해.]
“뭐?”
[내 웃는 얼굴을… 사람들이, 무서워해.]
상냥하게 대했는데 왜인지 겁을 먹고 슬금슬금 피한다든지, 좋아한다고 진지하게 고백했는데 당황한 얼굴로 생각할 시간을 달라다가 피한다든지. 모든 결론은 무서워하다 피한다는 것이었다. 기껏 생각해서 이런저런 방안들을 내놓았던 여사빈은 허탈해졌다. 그리고 범지훈은 더 땅굴을 팠다. 아까보다 더 목소리는 푹 젖어 들어 있었다.
[다들 날 무서워해…]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어.”
한숨을 내쉬며 생각 없이 조언한 말에 범지훈이 되물었다. 그때야 여사빈은 고등학교 3년 내내 범지훈이 만난 똥차들을 예로 들며 설명할 수 있었다. 미남들과의 섹스에만 환장하던 창놈 똥차, 좋아한다는 사람을 교묘히 이용해 먹던 얌체 똥차,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 범지훈이 고백했다는 것에 사귀고 있던 남자 친구와 범지훈을 놓고 저울질해 보던 똥차, 너무 잘생겨서 옆에 있으면 오징어로 보일 것 같아 범지훈이 부담스럽다는 똥차까지.
[그랬다고…?]
“그래. 너 아무 문제 없어. 그냥 네가 사람 보는 눈이… 많이 없는 거야.”
더럽게 없다는 말을 많이 없다는 말로 간신히 순화했다. 여기서 더 심하게 말했다간 범지훈이 대성통곡이라도 할 것 같아서였다.
[근데, 너 누구야…?]
여사빈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통화한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대뜸 울었다니. ‘얘 대체 뭐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여사빈.”
[사빈이?]
“…그래, 3년 내내 네 똥차들 대신 치워 주던 여사빈.”
[고마워…. 사빈아.]
훌쩍이는 범지훈의 목소리를 들으며 핸드폰을 쥔 여사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고마워. 사빈아….]
뭐야, 이 등신 호구. 대체 뭔데? 여사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어, 그래. 나밖에 없지?”
[응. 너랑 정선이랑 준혁이밖에 없어.]
“걔네는 또 누군데?”
[내 친구들.]
볼멘소리로 툭 내뱉었던 여사빈의 눈이 대답을 듣고는 다시 반짝였다.
“친구…? 그럼 나도 네 친구야?”
슬금슬금 여사빈의 입꼬리가 끌어 올려졌다.
[응. 사빈이도 내 친구야.]
여사빈은 깨달았다. 범지훈은 취하면 사람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등신 호구는 맞는데, 등신 호구면서 귀엽기는 쓸데없이 너무 귀여워졌다.
***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지. 그렇게 잘 얘기하다가 갑자기 전화가 끊기길래 다시 걸었더니 안 받더라고.”
여사빈은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로 올리며 협상이라도 하듯 범지훈을 바라보았다.
“결론은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아니지. 친구라고 네 입으로….”
말을 하다 여사빈은 멈칫했다. 여사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기엔 범지훈의 표정이 생각보다 심상치 않았다.
“…범지훈?”
부르는 소리에도 곧장 반응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사빈과 눈을 맞추는 범지훈에 여사빈은 눈만 깜빡였다.
“그게, 여사빈 네가 아니었다고?”
범지훈이 이야기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사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민은?”
“뭐?”
“사위민이 내 번호를 알려 줄 때 뭐라고 안 했던 건가?”
“음… 하긴 했는데 얘기해 주면 위민이가 곤란해할 것 같은데.”
여사빈은 눈썹을 찡그렸다. 하도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사위민에 입은 다물어 준다지만, 자신에게는 이렇게 다 털어놓고 범지훈에게만 숨겨 달라는 게 여사빈은 솔직히 마뜩잖았다. 이건 꼭 사위민이 나보다는 범지훈을….
“그럼 내가 직접 물어보지.”
미련 없이 범지훈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가져가는 것과 동시였다.
“고맙다. 여사빈.”
그 한마디를 뱉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카페를 빠져나가는 범지훈을 보며 여사빈은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맙다, 라. 맨정신으로 듣게 된 인사는 생각보다 더 간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