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맹수의 사랑법-3화 (3/9)

3. pit-a-pat (1)

설레는 첫 데이트를 표현한 듯한 백사현의 달콤한 노래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컬러링도 참 사위민다웠다. 하지만 그 컬러링을 들으며 상대가 전화를 받길 기다리는 범지훈은 초조했다. 문병을 온 사위민에게서 번호를 다시 받은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범지훈은 허탈한 숨을 내쉬며 통화를 끝냈다. 새까만 배경 화면으로 돌아온 핸드폰을 바라보며 범지훈은 사위민에게 문자라도 보내기 위해 창을 눌렀다.

“지훈 씨.”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범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병원 복도에서 걸어오고 있는 이는 요즘 부쩍 범지훈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남자 간호사였다.

“안녕하세요, 어디 다녀오는 중이신가 봐요?”

겉옷을 걸치고 있는 범지훈을 보며 간호사가 생긋 웃었다. 꼭 다람쥐를 빼닮은 귀여운 상이었다. 사위민에게 보내려던 문자 창을 끄며 범지훈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깐 테라스에 다녀왔습니다.”

“아, 정말요? 요즘 바람이 서늘해져서 걱정이었는데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니 다행이에요. 오늘 날씨 괜찮죠?”

친절한 목소리에 범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이내 손에 들고 있던 따뜻한 캔 커피를 내밀었다. 거절하려는 범지훈에게 본인이 먹으려고 샀다가 배가 불러서 도저히 못 먹겠다며 받아 달라는 것에 범지훈도 어색한 감사 인사를 하며 받았다.

“오늘 식사는 맛있으셨어요?”

점심시간이 이제 막 지난 시간이라 간호사가 물었다. ‘네, 맛있었습니다.’ 대답하는 범지훈에 간호사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더 이상 할 얘기도 없는 것 같아 간호사에게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보인 범지훈이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지훈 씨.’ 다시 간호사가 범지훈을 붙잡았다.

“등에 타투 어디서 받으신 거예요? 저번에 보니까 되게 멋있던데.”

지난번 종합 검진을 받으며 상의를 탈의했었을 때, 범지훈의 등에 새겨진 거대한 호랑이 문신을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남자 간호사 앞이라 거리낌 없이 벗었던 걸 떠올리며 범지훈은 골똘히 생각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받았던 곳이라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문신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그냥 안 보이는 곳에 작게 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호랑이가 정교하게 정말 잘 그려져 있어서 해 주신 분이 실력 좋으실 것 같았거든요.”

“알아보고 찾게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아, 혹시 제 번호 아시나요?”

기회를 잡았다는 눈빛으로 간호사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넘겨받은 핸드폰에 번호를 꾹꾹 누르곤 돌려주니 간호사는 단번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범지훈의 주머니에 넣어진 핸드폰에서 작게 진동이 울렸다.

“번호 찍혀 있을 거예요. 찾으면 거기로 연락 한번 주세요!”

아까의 미소에 비해 간호사는 확연히 밝아진 얼굴이었다. 범지훈도 답하며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사현 씨 타투도 예쁘긴 하던데 저는 지훈 씨 타투가 좀 더 제 취향이긴 하더라고요.”

이어지는 말엔 핸드폰의 잠금을 풀던 범지훈이 멈칫했다.

“…누구 타투요?”

“네? 아, 백사현 씨 타투요. 그 왜, 지훈 씨도 보셨을지 모르겠는데 이쪽 등 아래 허리에 가까운 부분에 하얀 백사 타투를 하셨더라고요.”

직접 몸을 조금 돌려 등 부근을 톡톡 두드리는 간호사가 설명을 이어 갔다. ‘그것도 정교하고 되게 예쁘긴 했는데 제가 뱀 자체를 무서워해서. 하하’ 농담처럼 웃으며 덧붙이는 간호사에 범지훈은 침음처럼 중얼거렸다.

“보라색 꽃….”

“아! 맞아요. 되게 크고 예쁜 보라색 꽃을 품은 백사요! 지훈 씨도 보셨구나. 하긴 두 분 되게 친하시던데 못 보셨을 리가 없죠.”

‘지훈 씨, 혹시 그 보라색 꽃은 어떤 종인지 아세요? 꽃 자체는 되게 예뻐서 나중에 백사현 씨한테도 물어볼까 싶어요. 꽃만 하는 타투라면 저도….’ 하며 쫑알대는 간호사의 이야기는 더 이상 범지훈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간호사와는 어떻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는지 모르겠다. 손에서 느껴지는 요란한 진동에 정처 없이 병원 복도를 걷던 범지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화면에 떠오른 건 사위민이란 세 글자였다.

[대표님, 죄송해요. 팀 회의 중이라 전화를 무음으로 해 놔서 연락하신 걸 이제야 확인했어요.]

가장 먼저 사과의 말을 뱉는 사위민에게 범지훈은 죄송할 거 없습니다, 라는 일상적인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사위민 씨.”

[네, 대표님!]

“백사현… 씨 팬이라고 하셨죠?”

[그럼요! 진짜 팬이에요. 제가 우리 사현이라면 모르는 게 없을 정도죠, 이제!]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로 힘찬 대답을 하는 사위민이었지만 범지훈은 평소처럼 사위민이 귀엽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범지훈의 충격은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도무지 말이 안 되기도 해서 범지훈은 가장 이상했던 부분에 대해 물었다.

“9월 1일 날, 백사현 씨가 늦게까지 예능 촬영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Jbc의 ‘범행 현장’이요? 네, 맞아요! 근데 대표님이 그걸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아, 재방송 보셨구나. 그쵸?]

“…거기 촬영 시간이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라고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원래는 그렇긴 한데 9월 1일만은 아니었어요.]

“…네?”

되묻는 범지훈에 사위민의 목소리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다음 날인 9월 2일이 사현이 아버지 기일이었거든요. 스케줄이 하필 그렇게 잡혔는데 출연진과 제작진 측에서 배려해 줘서 촬영 시간을 엄청 앞당겼어요. 오후 3시 좀 넘어서요. 사현이 라이브 방송 끝나고 바로니까 기억해요. 그 시간쯤에 촬영 들어갔더라고요. 출연진분들 SNS에도 올라와 있는데 모르셨어요?]

***

인사라도 하고 가기 위해 한참을 범지훈을 기다리던 곽팔두는 도통 오지 않는 범지훈에 예비 신부와의 약속에 쫓겨 급하게 병실을 빠져나갔다. 범지훈이 돌아오면 잘 말해 주겠다는 백사현은 곽팔두가 나가곤 병실의 TV 채널을 하릴없이 돌리며 범지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형.”

그때 걸려 온 건 이준혁의 전화였다. 필요한 거 없느냐는 말에 백사현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4주 정도 휴가라고 생각하고 형도 나 그만 신경 쓰고 쉬어. 누나가 둘째도 가졌다면서? 이참에 누나 옆에 딱 붙어서 잘해 드리고.”

[야, 그래도 네가 입원을 했는데 내가 어떻게 그러냐? 됐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 지금 바로 갖다 줄 테니까. 먹고 싶은 건 없어?]

스피커 모드로 돌려놓고 범지훈의 빈 병실 침대 위로 핸드폰을 내려놓은 백사현은 시끄러운 TV를 껐다.

“괜찮다니까. 전 신경 쓰지 마시고요, 제발 누나한테만 신경 써 주세요. 준혁이 형. 누나 덕분에 못 먹어 본 과일들 나도 배불리 먹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만 끊는다.”

[야, 야 잠깐만! 안 그래도 혜수가 망고스틴 먹고 싶다고 해서 지금 사러 나왔는데 너도 그런 김에 필요한 것 좀 말해라. 아니면 네 몫의 망고스틴 사 가지고 문병 간다?]

자신이 맡은 연예인 하나는 끔찍하게 챙기는 이준혁을 누가 말릴까 싶어 백사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결국, 확답을 받아 낸 것에 이준혁은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럼 백화점 들렀다 바로 갈게. 나 한 1시간 뒤에 도….]

이준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실 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병실 문 앞에 선 범지훈을 발견하곤 백사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훈 씨.”

[뭐야? 지훈이 어디 갔다 왔어? 야! 범지훈! 너도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범지훈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겨 다가온 범지훈은 백사현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백사현 씨.”

사뭇 달라진 범지훈의 분위기에도 주눅이 든 기색 하나 없이 백사현은 멀뚱히 범지훈을 바라보았다. 끼익. 웬만해선 소리가 날 리 없는 1인 특실 침대가 소리를 냈다. 침대를 힘주어 짚은 범지훈 때문이었다. 앉아 있는 백사현의 가까이로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범지훈은 말했다.

“옷 좀 벗어 보겠습니까?”

그리고 핸드폰 속 이준혁은 그 말만 듣고 소리 없이 경악했다. 가만히 범지훈을 올려다보던 백사현이 입을 열었다.

“왜냐고는.”

말과 동시에 뻗어진 백사현의 손은 침대 위 핸드폰을 눌러 통화를 종료했다. ‘야! 너 딱 기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버리던 이준혁의 절규는 그렇게 끊어졌다.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요. 표정 보니까.”

백사현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범지훈은 굳어 버렸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기도 했다. 혹시나 했던 게 백사현의 한마디로 모두가 기정사실이라고 못 박고 있었다. 하지만 범지훈은 머릿속에 떠다니는 몇 가지의 의문들에 주저했다.

“저한테 궁금한 게 많나 봐요, 지훈 씨.”

‘어려워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전부 대답해 드릴게요.’ 이어지는 뒷말은 나긋했다. 침대를 짚은 범지훈의 손이 괜스레 시트를 쥐었다.

“…머리 색, 말입니다.”

9월 1일 예능 촬영에 들어갔던 백사현. 당시, 그는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는 자칫 검은색으로 보일 만치 짙었던 진갈색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예고편으로 확인한 사실이니 분명했다. 그런데 다음 날인 9월 2일 아침에 눈을 뜬 범지훈의 옆자리에 누워 있던 건 색소 옅은 갈색 머리의 뒤통수였다. 하루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머리 색이 그렇게 바뀔 수 있는 건지 범지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머리 색.”

그리고 백사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세팅되지 않은 차분한 은발 머리가 범지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루 정도만 머리 색을 바꿔 주는 헤어 제품들이 요즘 워낙 잘 나와요. 감으면 색이 꽤 빠져나가고.”

범지훈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머리 색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이미 눈치 빠르게 알아들은 백사현의 답은 시시할 정도로 간단했다. 범지훈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한 눈이었다. 배시시 백사현이 웃었다. 팬들을 귀여워할 때마다 나오던 미소였다. 이런 걸 범지훈이 알고 있는 게 웃기지만 사위민과 출퇴근길에 하도 백사현의 영상들을 보다 보니 표정만 보고도 이젠 유추할 수 있었다.

“그 예능에서 제가 맡았던 캐릭터가 교사여서요. 선생님이 백발을 하기에는 너무 튀잖아요.”

아. 범지훈은 이해했다. 예능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진 가상의 살인 사건을 다뤘다. 그때, 백사현이 맡았던 캐릭터는 담임 교사였다. 한 가지 의문은 풀렸지만, 또 다른 한 가지의 의문은 남았다.

[사현이가 타투를 했다고요?]

핸드폰 속 놀라는 사위민의 목소리에 범지훈은 당황했다. 백사현의 등에 한 문신이 혹시 어떤 건지 아느냐는 질문에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다. 팬이라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닌 건가? 연예인의 팬이 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기에 범지훈은 잘 몰랐다. 하지만 그것에 사위민은 이렇게 대답했다.

[말도 안 돼! 우리 사현이 노출 진짜 꺼리는 애예요! 지금까지 한 가장 큰 노출이 그… 저번에 제가 대표님께 보여 드렸잖아요, 그 화보 영상! 수트 입고 소파에 섹시하게 누워 있던 거.]

기억났다. 상의에 재킷 하나만 입고 있어서 벌어진 재킷 사이로 단단한 가슴골이 드러났었던 걸.

[제가 그 영상을 제일 좋아하는 이유가 그거였어요! 사현이 데뷔하고 지금까지 활동 중에 가장 큰 노출이었으니까요! 팬들 다 난리 났었다고요!]

목에 핏대라도 세울 것처럼 흥분한 사위민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아이돌이면 상의 탈의 정도야 기본일 줄 알았다. 범지훈은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이따금 보이던 방송에서 거의 헐벗었던 남자 아이돌들을 떠올렸다. 대부분 다 몸이 좋으니 벗어 댔던 거라 범지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운동 꽤 열심히 했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흥미를 잃고는 범지훈은 또 금세 채널을 돌려 버렸다. 몸이 좋은 아이돌들은 얼굴 또한 선이 굵은 미남 상들이 대부분이라 아무리 범지훈이 게이라지만 취향까지 저격하지는 못했었다. 다시 말하지만 범지훈의 취향은 선이 얇고 무해한 초식 동물 상이었다. 꼭 지금 눈앞에서 범지훈을 올려다보고 있는 새하얀 백사현처럼.

“어딜 봐요?”

저도 모르게 백사현의 가슴 쪽을 내려다보던 범지훈은 서둘러 시선을 들어 올렸다. 사위민이 가장 좋아한다는 그 영상 속, 백사현의 몸은 아주 조금 드러났다지만 범지훈이 보기에도 단단해 보였는데 역시 착각인가 싶었다. 이렇게 예쁜 얼굴에 그런 몸은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으니까.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사과를 뱉는 범지훈에 백사현은 침대에 팔을 걸치곤 느긋하게 턱을 괬다.

“…제가 벗으면 좋겠어요?”

이어지는 말엔 숙이고 있던 범지훈의 허리가 순식간에 펴졌다. ‘아니요, 아닙니다.’ 서둘러 대답하는 범지훈의 귓불이 붉어졌다. 주춤하며 백사현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난 범지훈에 분위기가 묘해지고 말았다. 아니, 백사현의 분위기가 묘해진 것 같았다.

“지훈 씨가 그랬잖아요. 옷 벗어 보라고.”

“그러긴 했는데, 아니요. 저, 그건….”

겉으로 티 나게 드러나진 않았지만 범지훈은 지금 무척 당황해하는 중이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범지훈은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타투, 확인해 보고 싶은 거죠?”

그 말에 범지훈이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망설임 하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백사현의 손이 환자복 상의 가장 윗단추를 풀었다.

“지훈 씨가 보고 싶다는데 벗을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훈 씨 앞에서 벗는 건데.”

평이한 어조로 말하며 가느다랗게 예쁜 손가락이 두 번째 단추까지 투둑 풀어 버리는데 범지훈은 굉장히 당황하고 말았다.

[사현이가 추위를 많이 타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노출 자체를 진짜 안 좋아해요. 오죽했으면 숙소에서 같이 살던 멤버들도 사현이 맨몸 본 적이 없다고 그랬는데. 우스갯소리로 다들 하는 말이 의사나 간호사 말고는 아무도 사현이 맨몸 못 봤을 거라고 그러잖아요. 사현이 어머니도 어릴 때 외엔 사현이 몸 못 보셨을걸요? 그만큼 자기 살 보이는 거 싫어하거든요.]

하필이면 왜 그때 사위민이 했던 말이 떠올라 가지곤.

“잠시만요.”

뻗어진 범지훈의 손이 백사현의 손을 붙잡았다. 이미 두 번째 단추를 푼 뒤라 쇄골 아래까지 훤히 드러난 백사현은 속 피부까지 투명할 만큼 하얬다. 시선이 갔던 것도 잠시, 질끈 눈을 감으며 범지훈은 백사현의 끌러진 단추를 다시 잠그려 했다.

“왜요? 지훈 씨가 보고 싶어 하니 벗겠다는데.”

“노출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실언했어요, 벗지 마세요.”

어쩐지 백사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린 것 같았지만, 단추를 잠그는 데 급급한 범지훈은 깨닫지 못했다. 실언은 무슨요, 벗어보라고 그랬잖아요. 지훈 씨가 벗으라는데 싫어도 얼마든지. 아닙니다. 제발, 제발 벗지 마세요. 실랑이하며 백사현이 범지훈의 손을 떼어 내면 또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단추를 잠그려는 범지훈에 작은 몸싸움이 일었다. 범지훈을 피해 움직이는 백사현과 눈을 감은 채로 어떻게든 백사현의 단추를 잠그려는 범지훈이 엉키면서 다리가 침대에 걸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우뚱 중심을 잃고 넘어가는 범지훈의 몸은 백사현까지 짓누르며 함께 엎어졌다. 풀썩. 푹신한 침대 매트리스가 두 남자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 냈다.

“…죄송합니다.”

쓰러진 것에 놀라 굳어 있던 범지훈이 사과와 함께 깔고 있던 백사현에게서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좋아해요.”

툭 뱉어진 말에 범지훈의 행동이 멈췄다. 시선은 침대에 누운 백사현을 향한 채였다.

“라고 저한테 그랬죠?”

“…네.”

“그게 어떤 식의 좋아한다는 거예요?”

이어지는 말에 범지훈은 눈을 깜빡였다. 어떤 식…?

“많잖아요. 부모가 자식을 좋아한다든지, 팬이 가수를 좋아한다든지.”

“팬이….”

“그것도 아니면.”

백사현의 손이 범지훈의 뺨을 감쌌다. 노래방에서의 일이 생각난 범지훈은 굳어 버렸다. 그사이 범지훈의 뺨을 쓸며 올라간 손은 그의 뒷목을 감았다. 뱀이 소리 없이 먹이를 감듯 빠르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끼익. 힘주어 침대를 짚는 백사현에 소리가 났다. 범지훈의 바로 코앞에서 멈춘 백사현의 숨결이 살갗을 간지럽혔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라든지.”

가깝다. 조금만 움직이면 부딪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찾았네요, 드디어.”

[내가 누군지 생각해 봐요, 그리고 날 찾아내.]

백사현의 말끝으로 누군가의 말이 겹쳐 들렸다. 아니, 모두 한 사람이 한 말이었다. 그날 밤의 몽롱한 정신으로 들었던 웃음기 섞인 낮은 음성. 그리고 지금,

[그러면 원하는 만큼 마음껏 안아 줄 테니까.]

“…하고 싶은데.”

웃음기 하나 없는 낮은 음성까지. 조금 틀어지는가 싶던 백사현의 고개가 한숨과 함께 아쉽게 떨어져 나갔다. …아쉽다고? 범지훈의 두 눈이 깜빡였다.

“참을게요. 지훈 씨는 지금 나랑 같은 마음 아니니까.”

작은 웃음을 흘리며 백사현이 말했다. 범지훈의 뒷목을 감았던 손 또한 느릿하게 떨어져 나가며 뺨을 쓸었다. 사뭇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같은 마음이 되면 그때 보여 줄게요.”

드르륵. 쾅. 큰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동시에 백사현이 말했다.

“내 몸이랑 백사도.”

“범지훈-!”

사자후와 같은 고함이 들렸고 쾅 소리와 함께 다시 문이 닫혔다. 범지훈은 그제야 뒤를 돌 수 있었다. 그리고 충격에 빠진 이준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네가 어떻게 사현이를…!”

양손을 꽈악 주먹 쥔 채 부들부들 떠는 이준혁은 흡사 애지중지 키운 딸내미를 홀랑 가로채 간 도둑놈을 마주한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범지훈은 백사현과 자신의 자세를 알아차렸다. 서둘러 떨어지려고 했지만 단번에 침대로 다가와 범지훈의 등을 내려치려는 이준혁이 더 빨랐다. 범지훈은 다가올 아픔을 대비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형 마음대로 때리지 마.”

탁. 이준혁의 손을 잡아채는 백사현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좋아하게 만들려고 내가 앞으로 엄청 애쓸 사람인데.”

“뭐? 널 좋아하지도 않는대?!”

그리고 이준혁은 정말 억장이 무너진 표정을 지었다.

***

능력 있는 매니저. 이준혁에게 따라붙던 기분 좋은 꼬리표였다. 맡은 연예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케어 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그는 소형 기획사에서 로드 매니저부터 시작했다. 이후 중형 기획사로 옮겨 가 매니저 팀장까지 올랐던 이준혁은 치프 매니저직까지 달았을 즈음, 대형 기획사 수 엔터테인먼트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기회주의자이자 철저한 자본주의자인 이준혁은 거액의 연봉을 부르는 수 엔터테인먼트에 싹싹한 성격을 이용하여 원래 몸담던 직장과 좋은 마무리를 짓고 회사를 옮겨 갔다.

거기서 처음으로 맡게 된 연예인은 아이돌 백사현이었다. 그룹인데 그룹 매니저도 아닌 백사현 혼자만 담당하라는 것에 의문을 가질 법도 하건만 이준혁은 금세 이해했다. 당시 백사현은 첫 솔로 활동이 끝난 후, 여기저기서 러브 콜들이 쏟아지던 때였다. 이준혁은 치프 자리도 걷어차고 수 엔터테인먼트에서 처음 시작한 매니저답게 솔로 활동이 막 끝난 백사현의 전담 매니저로서의 역할을 바쁘게 해냈다. 운전 등의 자잘한 로드 매니저 일부터 치프 매니저가 할 몫일 캐스팅 협상 및 출연료 협상까지. 오로지 백사현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백사현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백사현을 만나고 인사하게 되면서 이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 좋게 웃고 있기는 했지만, 어딘가 벽을 친다고 할까? 그러고 보니 백사현을 전담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주의 사항이 있었다. 연예인들이야 성격도 제각각이고 그중 까탈스러운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라 인수인계를 받을 때 미리 주의 사항 등을 들을 때가 많았다. 이준혁은 백사현이 그런 종류의 인간일 것이라 으레 생각했다. 줄줄이 흘러나올 주의 사항들을 기억하기 위해 핸드폰의 녹음기까지 틀었지만 듣게 된 주의 사항은 예상과는 달랐다. 굳이 필요하지 않다면 백사현을 함부로 만지지 말 것. 주의 사항은 그것 단 하나였다. 성별이 다르다면 당연히 주의해야 하지만 같은 남자끼리인데. 이준혁은 그 이상한 주의 사항에 얼빠졌다. ‘왜죠?’ 물어 오는 말에 수 엔터테인먼트 치프 매니저는 머리를 긁적였다. ‘친해지게 되면 사현이가 직접 말해 줄 거예요.’ 얼버무리듯 넘겼지만,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만나게 된 백사현은 친절하고 웃음 또한 많았지만 어려웠다. 아무래도 이준혁이 백사현보다는 연상인지라 짬에서 오는 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준혁은 백사현과 진심으로 가까워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예감했다.

이준혁은 맡은 연예인에 대한 케어도 잘했지만, 기본적인 매니저의 자질이 뛰어났다. 그러니 알려 준 주의 사항 또한 기가 막히게 잘 숙지했다. 결국, 백사현도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느껴지던 존댓말은 어느덧 친근한 반말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케줄이 끝난 백사현을 집으로 데려다주던 어느 새벽, 단둘뿐인 차 안에서 백사현은 주의 사항에 대한 이유를 알려 주었다.

[어릴 때, 유괴를 많이 당했었어.]

멋쩍은 듯 말하지만, 그 무거운 내용에 이준혁은 급하게 차를 세웠다. 뭐? 뒤를 돌아 되물어 보는 말에 백사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누가 날 건드리면 기분이 별로더라고.]

한번 당해도 큰 충격인 유괴를 ‘많이’라고 표현하는 데에 더해 가볍게까지 치부하는 백사현에 이준혁은 할 말이 없어졌다.

[몸 보여 주기 싫어하는 건 그럼….]

[그냥 내 성격이 그래. 아무튼, 계속 이유도 말 안 해 주고 형이 조심만 하는 건 그래서. 그것 때문에 얘기하는 거야.]

대화는 그렇게 끝났지만, 이준혁은 신경이 쓰였다. 결국 인터넷을 뒤져 찾아보는 건 1990년생인 백사현의 나이대에 벌어질 법한 수많은 유괴 사건 기사들이었다. 1990년대 남아 유괴, 남아 납치, 그리고 남아 유괴 성폭행까지. 충분히 그런 의심이 들 만큼 백사현은 남자치고는 예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익명의 피해자들을 담은 채 속속들이 뜨는 수많은 기사는 남아 유괴에 대해서는 다뤄도 남아 유괴 성폭행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당시 사회 통념상 다루기가 어려웠던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준혁은 그 후로 더 철저하게 주의 사항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백사현은 유치원 때부터 키즈 잡지 표지 모델을 시작으로 아역 배우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중학생이 되어 수 엔터테인먼트에 들어오기 전, 아역 배우였던 백사현을 검색해 봐도 유괴에 관해서는 나오는 기사가 단 한 줄도 없었다. 이준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전에 유괴를 많이 당했던 건가? 하기야 워낙 예쁘게 생겨서 혹시나 유괴라도 당할까 봐 연예계에 일부러 데뷔를 시켜 전국에 얼굴을 알렸다는 연예인 부모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긴 했다. 아기 때에도 지금 얼굴 어디 안 간다고 여전히 예쁘장했으니 몇 번 당한 유괴에 백사현의 어머니가 연예계에 데뷔를 시켰을지도 몰랐다. 이준혁은 그제야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든 이준혁에게 백사현은 아픈 손가락이자 내 새끼가 되었다.

***

범지훈은 이준혁이 중학생 때부터 보아 온 결과 센 외모랑은 다르게 순하디순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이준혁은 범지훈이 좋았다. 범지훈의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던 우정선이 잠깐 경계의 눈초리로 보긴 했지만 우정선과 친해지고 나니 이준혁이 범지훈과 친해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지훈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금방 알아차렸다. 충격이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범지훈의 외모라면 남자랑 있어도 꽤나 잘 어울렸다. 알게 되면 그 소심한 성격에 우릴 피할 게 분명하니까 범지훈에게는 티 내지 말라며 우정선이 하도 엄포를 놔 대서 이준혁도 대놓고 얘기한 적은 없었다. 다만, 사람 보는 눈이 더럽게 없는 범지훈이 딱 봐도 똥차들만 만나고 다니는 게 보기 딱할 뿐이었다. 이준혁은 제발 범지훈에게도 인생에 볕을 쬐어 줄 벤츠가 나타나길 바랐다. 성인이 된 범지훈이 타고 다니는 건 벤츠인데 왜 옆에 끼고 다니는 건 죄다 똥차들인 건지 이준혁은 그저 이해가 안 됐다.

[뭐?]

하마터면 숟가락을 놓칠 뻔한 이준혁이 되물었다. 식사를 마친 백사현은 아무렇지 않게 컵을 들어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혁은 믿기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기일에 뭐 했느냐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물었을 뿐이었는데 백사현은 아주 담담하게 술김에 남자랑 잤다고 답했다. 처음으로 알게 된 백사현의 성 지향성에 속으로 당황은 했지만, 저 예쁜 외모에 금방 납득은 됐다. 아버지 기일이면 혼자서 마음이 허하긴 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제 몸을 만지는 걸 좋아하지 않던 백사현에 의아함은 들었다. 애인 같은 사이는 괜찮은 건가? 했지만 올해 서른한 살 먹은 백사현은 지금까지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준혁은 맡았던 연예인들이 아닌 본인의 주변에서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일반인 게이 범지훈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물론 실명이나 직업을 거론하진 않았고 그런 지인이 있다며 넌지시 한 말이었다. 이준혁은 정도를 아는 사람이었다. 실제 게이인 연예인들을 맡기도 했었지만 절대 함부로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편견 갖지 않는다며 흘러간 이야기는 혼혈이라 안 그래도 분위기 있게 생겼는데 거기다 더해 조각처럼 잘생긴 외모를 갖고도 범지훈이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해 봤다는 이야기로 귀결됐다. 저번엔 차이고 와서 상심이 컸는지 술 좀 같이 마셔 달라는 부탁에 거절해서 미안했다는 이야기까지도 덧붙였는데 의외로 백사현은 이준혁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래서 그런 얼굴로 왜 제대로 된 연애를 못 해 봤는데?]

[그거야 매번 똥차….]

합 하고 이준혁은 입을 다물었다. 백사현의 말에 홀려 더 하다간 범지훈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직업은 물론 범지훈에게 회사를 물려준 아버지나 이국적으로 빼어난 미모를 물려준 어머니 이야기까지 꺼낼지도 몰랐다. 백사현은 이상할 만큼 말재주가 좋았다. 이준혁은 지금부터 경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인연을 못 만난 거지 뭐.]

[인연을 못 만난 거로 지금까지 연애 한번 제대로 못 해 봤다고?]

[그,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왜 이렇게 궁금해하고 그러냐.]

진땀을 흘리며 이준혁은 말을 돌리려고 했다. 이어지는 백사현의 말이 아니었으면 입을 다물기 위해 허겁지겁 남은 밥을 입 안에 퍼 넣었을지도 몰랐다.

[형이 얘기한 그 사람이 나랑 잔 사람 같아서.]

땡그랑. 결국 이준혁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너… 너랑 자, 잔 사람이 범지훈이라고…?]

[아, 이름이 범지훈이구나. 잘 어울린다.]

저도 모르게 실명까지 뱉어 버린 이준혁이 입을 틀어막았다. 눈치가 백 단인 백사현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런 이준혁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등에 호랑이 타투를 한 건가?]

씨발. 진짜 범지훈이 맞는 모양이었다. 이준혁은 당황했다.

[근데 왜 날 두고 혼자 먼저 갔을까. 일어나니까 아무도 없던데.]

[뭐?]

‘씨발, 범지훈 너 이 새끼…!’ 그리고 이준혁은 분노했다. 그건 백사현을 먹고 튀었다는 소리였다. 안 그래도 남이 만지는 걸 싫어하는 애인데. 이준혁은 문득 ‘강제’라는 글자까지 떠올렸다. 맹세코 범지훈이 그런 쓰레기일 줄은 몰랐다. 착한 놈이라고 지금까지 믿고 있었는데.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당장 전화를 걸려는 이준혁을 백사현은 말렸다. ‘화내지 마, 형.’

[지금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술 취해서 정신없을 애랑 그런 짓을 했으면 어?! 일어나면 씻겨 주고 꿀물 대령에 아침을 챙겨서 보내 줘도 모자랄 판에 예의 없이 상대를 버리고 도망이나 가?!]

[그러게. 새벽에 씻겨 주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꿀물도 아침도 안 챙겨 줬네.]

[범지훈, 이 새끼가 진짜!]

이준혁은 불을 뿜으며 당장에라도 범지훈을 잡으러 식당을 뛰쳐나갈 기세였다. 말린 건 백사현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 형 얘기만 듣고 생각났던 사람이라.]

등에 호랑이 타투가 있는 걸 알았는데 범지훈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지. 아무튼, 이준혁은 일단은 진정하기로 했다.

[얼굴 보면 알 것 같은데, 만날 방법 없을까?]

그리고 이어진 백사현의 말에 이준혁은 안 그래도 통화 창에 띄워 놓았던 범지훈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들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훈아, 바쁘냐?]

애써 평소보다 더 쾌활하게 말하며 이준혁은 말을 이었다. 백사현은 흥미롭게 통화에 귀를 기울였다.

[“왜?”]

[안 바쁘면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방금까지 한 식사는 이제부터 없는 거였다. 이준혁은 입으로는 웃는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일단은, 아직 모를 일이었다. 오래된 친구를 믿는 마음 반, 자신의 연예인을 건드렸다는 분노 반을 갖고 이준혁은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범지훈은 꼬여 냈다. 이준혁이 알고 있기로는 범지훈은 분명 순진한 놈이었으니까. 이상한 착오가 있었을 거다.

***

고깃집 특유의 숯불 향은 프라이빗 룸 안에도 옅게 배어 있었다. 이준혁은 사위민과 여사빈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 댔다. 백사현과 범지훈의 대화 방해를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모른 척해 줘, 형. 부탁할게.]

그런 이준혁의 귓가에다 흘러가듯 작게 속삭인 백사현은 이내 사르르 눈을 휘어 내렸다. 그 미소 하나에 사위민과 여사빈 그리고 범지훈의 시선이 닿았다. 하지만 백사현의 시선은 오로지 범지훈 하나에만 향해 있었다.

[지훈 씨는 저 알고 계시나요?]

백사현의 옆에서 이준혁은 그저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의자 아래로 감춘 손은 금방이라도 범지훈의 등을 때리고 싶다는 듯 세게 주먹 쥐어졌다. 내 새끼 억울해서라도 범지훈 너, 사현이 기억나게 해 주고 만다. 내가. 이준혁은 다짐하며 속으로 으득 이를 갈았다.

***

범지훈은 일단 이준혁에게 사과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준혁은 꽤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한참을 백사현을 바라보는가 싶다가 이내 눈을 부라리며 범지훈을 노려보는데 범지훈은 왜인지 저도 모르게 백사현에게서 떨어져 얌전히 무릎을 꿇게 됐다.

“난 너희 허락 못 해.”

이어지는 말엔 또 왜인지 범지훈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준혁아.”

“네가 무슨 말을 해도 허락 안 해 줘. 범지훈 너… 네가 진짜, 어떻게 사현이를 잊을 수가 있냐?”

끝내 울먹이는 친구에 범지훈은 겉으로는 그리 티가 안 나지만 굉장히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이준혁이 알고 있었던가? 잠깐 생각했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범지훈은 다급히 사과했다.

“내 잘못이야. 술을 많이 마셔서 필름이….”

“그래! 그놈의 술! 너도 그렇고 사현이도 그렇고 그 술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 아니야? 아니, 그것보다 주량도 센 놈이 어떻게 사현이는 다 기억하는 걸 지 혼자만 기억 못 해서….”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며 이준혁은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범지훈은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백사현에게도 시선을 돌리니 금세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백사현은 범지훈을 보며 눈썹을 찡그리곤 웃고 있었다. 퍽 곤란하단 표정이었다.

“잊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범지훈은 생각만 해 왔던 사과를 이제야 꺼낼 수 있었다. 백사현의 눈에 언뜻 놀라움이 번졌다.

“혼자 두고 말없이 가 버린 것도 사과하고 싶습니다.”

“음….”

백사현은 다시 곤란한 얼굴을 했다. 고민하는 듯 길게 말을 끄는가 싶더니 이준혁의 팔을 잡고 끌었다. ‘일단 나랑 나가서 얘기하자, 형.’ 안 나가겠다고 버티던 이준혁은 백사현의 힘에 못 이기는 척 병실을 나섰다. 어쩐지 백사현이 힘으로 버티는 이준혁을 손쉽게 질질 끌고 가는 모양새긴 했지만, 이준혁도 180이 훌쩍 넘는 장정인데 아마 못 이기는 척 따라가는 중일 터였다. 혼자만 남은 병실에서 범지훈만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5분 뒤,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 여겼지만, 너무나 금방 백사현이 돌아왔다. 얇은 병원복 위로는 어느새 못 보던 겉옷까지 걸친 채였다.

“우리 잠깐 옥상이라도 가서 바람 좀 쐴래요?”

손을 내밀며 해사하게 미소 짓는 백사현에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았다. 키만큼이나 길쭉하고 큰 범지훈의 손을 꼬옥 잡는 백사현의 손은 하얗고 작았다. ‘외투 챙겨야죠.’ 그대로 백사현을 따라나설 기세인 범지훈에게 말하며 백사현의 한 손은 이미 범지훈의 외투를 들었다. 둘 다 겉옷을 야무지게 걸쳐 입고는 병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연히 두 사람을 뒤따르려는 타이거는 범지훈이 제지한 뒤였다.

“다녀오십시오, 대표님! 형수님!”

멀어져 가는 백사현과 범지훈의 등 뒤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지만 범지훈은 애써 무시했다. 곽팔두에게 한소리를 했으면 그 밑에 애들에겐 팀장이 되어선 알아서 잘 알려 줘야지 또 그놈의 형수님 소리를 하니 언제 한번 다 같이 있을 때 호칭 정정에 대해 잔소리를 해야 할 듯싶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범지훈에게 백사현은 ‘뭐가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아까 전에….”

“형수님?”

“네. 제가 교육을 잘못시켰습니다. 다음부턴 더 이상 형수님 소리 나오지 않도록 단속하겠습니다.”

“난 좋은데.”

“…예?”

범지훈은 잠깐 삐걱거렸다. 꼭 고장 난 로봇처럼. 우뚝 걸음을 멈추곤 앞만 보던 시선은 녹슨 태엽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여 백사현에게로 옮겨 갔다. 계속 범지훈을 쳐다보며 걷고 있었는지 백사현과는 금방 눈이 마주쳤다. 범지훈처럼 함께 걸음을 멈춘 백사현은 아까부터 잡고 있던 범지훈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넣었다. 쉽게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깍지를 낀 모양새였다.

“저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이런 사이로 보이는 거잖아요. 난 좋은데.”

백사현의 눈이 휘어져 내렸다. 범지훈은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다시 걸음은 옮겼지만, 귓불에선 어느새 후끈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었는데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범지훈은 몰랐다.

“…지훈 씨는 제가 이러는 거 싫어요?”

이어지는 말엔 번개처럼 범지훈의 고개가 백사현을 향했다. ‘…싫지 않습니다.’ 뜸은 들였지만, 대답은 쉽게 나왔다. 범지훈의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뜸은 들였다. 백사현에게는 미안한 게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곽팔두나 여사빈 같은 덩치가 백사현처럼 굴었다면, 범지훈은 아무리 미안한 게 있어도 말없이 손을 뺐을지도 몰랐다. 덩치 큰 사내놈들끼리 손을 부여잡고 다니는 건 범지훈에겐 조금… 힘겨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제 손가락 사이로 알맞게 차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감촉이 범지훈은 왠지 마음에 들었다.

“지훈 씨는 나한테 죄송한 게 많은가 봐요.”

말하지 않아도 범지훈의 마음을 딱 꼬집어 묻는 백사현에 앞만 보던 범지훈은 고개만 끄덕였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서?”

“…백사현 씨 얼굴 기억 못 했던 것도 그랬고, 혼자 두고 도망…쳐 버린 것도 그렇고 술에 취해서 호텔에 혼자서 절 옮겨 주신 것도….”

하나하나 따지고 드니 미안한 게 한두 가지 정도가 아니었다. 사위민과는 긴 통화 끝에 그날, 고깃집에서 누가 취한 범지훈을 챙겨 갔는지에 대한 답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음… 어, 그게요. 대표님. 저어… 제가 그… 술을 많이 마셔서 속이 안 좋았는지 그… 얘기하다가 실수를 했는데….’ 주저하며 말하길 꺼리는 사위민에도 범지훈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백사현에 대해 물으면 술술 답이 나오면서 백사현까지 포함된 고깃집에서의 그날은 꽤 오랜 시간 시원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취한 절 누가 챙겨 갔는지가 궁금한 것뿐입니다.’ 결국, 그렇게 이야기하니 사위민은 금세 밝아진 목소리로 ‘사현이죠!’라고 외쳤다.

[제가 취해서 실수하고 아, 물론 사현이 옷엔 하나도 안 묻게 하려고 그 순간에도 얼른 고개 돌려서 했는데. 아, 저 진짜 최애 앞에서 제가… 아니 대표님한테 이런 말 하면 안 되지.]

도대체 무슨 실수를 한 건지, 백사현 씨랑 얘기하다가 토를 한 건가? 생각하던 범지훈은 이어질 사위민의 대답을 끈기 있게 기다렸다.

“사위민 씨가 알려 줬습니다. 백사현 씨가 그날, 취한 저를 챙겨 가셨다고요. 폐를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사위민은 토를 한 건지 뭔지 자꾸 실수를 했다고만 하고, 여사빈도 술에 취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든 정신없는 그 속에서 늘어진 범지훈을 등 뒤로 업고는 그러면 제가 지훈 씨 데리고 먼저 가 볼게요, 라는 말과 함께 백사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범지훈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여린 몸으로 어떻게 이런 덩치를 업을 수가 있다는 건지.

“…엘리베이터가 꽤 늦네요.”

도통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기다리던 백사현이 문득 말했다. 어차피 최상층 VIP 병동인지라 옥상까지도 한 계단만 올라가면 됐다. ‘조금 걸을까요?’ 상냥하게 건네는 제안에 범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들어선 적막한 비상계단에서 백사현은 나직하게 범지훈을 불렀다. ‘지훈 씨.’ 시선이 백사현을 향하는 순간, 범지훈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벽으로 밀치는 백사현엔 범지훈은 두 눈을 깜빡였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백사현의 등 뒤로는 두 사람이 들어온 비상계단의 문이 소리 없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그래서, 그게 그렇게 죄송했어요?”

범지훈의 앞을 가로막은 백사현이 물었다. 깍지를 낀 손은 움직일 수 없도록 벽에 짓눌러진 채였다. 넋이 나간 범지훈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하나도 아프진 않았지만 쉽게 빠져나갈 순 없는 이상한 힘이었다. 그렇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백사현의 손은 범지훈의 환자복 어깨 부분을 잡아 내렸다. 범지훈의 한쪽 쇄골 아래가 그대로 드러났다.

“…여긴 아직 남아 있네.”

어쩐지 기분 좋아진 목소리로 백사현이 말했다. 등 뒤는 딱딱한 벽, 앞에는 백사현이. 범지훈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저는 이런 거 남겼는데, 죄송할 건 지훈 씨보다 내가 더 죄송해야죠.”

백사현의 손이 자기 것을 만지듯이 범지훈의 맨살을 거리낌 없이 쓸었다. 그리고 범지훈은 깨달았다. 아직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희미한 붉은 자국을. 그러고 보니 이건 백사현이 직접 남긴 자국이었다.

“나한테 미안하다고 자꾸 거리를 두면, 그 거리.”

맨살을 쓸던 손이 범지훈의 목선을 타고 올라가 턱을, 그리고 귓불을 만지며 뺨을 감쌌다. 잡았을 땐 한없이 작다고 느꼈던 손이건만 의외로 범지훈의 한쪽 뺨은 물론 귀까지도 충분히 감쌌다.

“확 당겨 버리고 싶은데.”

백사현이 미소 지었다. 범지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위험했다. 본능적인 감이 그렇게 외쳤다. 마음만 먹으면 앞에 있는 백사현을 밀어내고 빠져나가는 것도 뺨을 감싼 손을 잡아 내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범지훈의 35년 동안에 축적된 데이터베이스는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거리 두려 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해요. 저는 지훈 씨가 절 좋아했으면 좋겠거든요.”

‘제가 많이 노력할게요.’ 새하얗게 웃음 짓는 예쁜 그 얼굴에 범지훈은 그만 넋이 나갔다. 원래부터 범지훈은 예쁜 것엔 그렇게 약했다.

***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겠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지 이틀간 백사현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범지훈이 백사현인 걸 알기 전에는 나름 거리랍시고 뒀던 것 같은데 지금은 대놓고 너무 바뀌었다. 지켜보던 곽팔두가 전보다 더 애정이 넘치는데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볼 정도였으니 분명했다. 범지훈의 병실에 붙어사는 건 그대로였지만, 백사현은 그전과는 뭔가 달랐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문병을 오는 곽팔두는 광대가 빵싯 올라간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어쩜 저렇게 스윗하시냐고 백사현을 향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달다고? 디저트도 아니고 사람을 보고 달다고 칭찬하는 곽팔두를 이상한 눈으로 보던 범지훈은 지훈 씨, 하고 부르는 백사현에 순식간에 풀어진 눈으로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이거 저번에 읽고 싶다고 했던 책 맞죠?”

백사현은 아까 병실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쇼핑백에서 책을 꺼냈다. 범지훈의 눈이 커졌다. 백사현이 출연했던 예능, ‘범죄 현장’의 작가와 PD가 모티브를 얻었다는 어느 추리 소설이었다. 그다지 아프지도 않은 몸으로 병원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 와 범지훈이 요즘 백사현과 함께 하는 건 주로 TV 시청이었다. 사위민과 통화했었을 때도 그렇고 백사현이 찍었다는 그 예능도 궁금해져서 유료 결제로 백사현 편 방송을 구매해 보기 시작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재밌어서 백사현이 출연하지 않은 편 수까지 이틀 만에 시즌 1~3를 몰아 보고 말았다. 백사현도 꽤 재미있는지 처음엔 범지훈의 손만 만지작대다 나중엔 집중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그것에 괜히 범지훈은 흐뭇해졌다. 나중엔 핸드폰으로 범죄 현장을 직접 검색해서 어떤 사건을 기반으로 다룬 건지 범지훈이 찾아볼 수준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어제, 레전드였던 귀신의 집 살인 사건 편을 보고 알아보니 저 추리 소설이 원작이었다는 것에 범지훈은 당장에 구매를 결정했다. 그러나 인기가 많은지 종이책은 이미 솔드 아웃에 남은 건 e북뿐이라는 것에 범지훈은 속으로 실망을 금치 못했다. 오래 보면 눈이 아픈 전자책보다는 범지훈은 직접 손으로 넘기는 맛이 좋은 종이책을 선호하는 아날로그 인간이었다.

“그걸 어떻게….”

그리고 범지훈은 감격했다. 표정으로 그렇게 티가 나진 않았지만 커진 눈이 알려 주고 있었다. 범지훈의 손에 책을 쥐여 주며 백사현은 미소 지었다.

“지훈 씨가 한 말인데 기억하고 있었죠.”

‘어…?’ 바로 그때, 범지훈의 옆에 서 있던 곽팔두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백사현 또한 평소와는 다른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한곳에 쏠렸다.

“…감사합니다. 이런 거 처음 받아 봅니다.”

뚫어져라 책을 바라보는가 싶던 범지훈의 고개가 백사현을 향했다. 살포시 접힌 범지훈의 눈매는 휘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 범지훈이 웃고 있었다.

***

범지훈에게 선물이란 주는 것이었지 받는 게 아니었다. 어쩌다 받았던 선물들도 어울릴 것 같다며 우정선에게서 받은 향수 선물이라거나 이준혁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은 양주 등이었다. 친한 주변 사람들이나 회사 사람들에게서 값비싼 선물 등을 받아 보긴 했지만, 애인 그러니까 연애를 전제로 만난다거나 사귀는 상대에게서 받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다 범지훈에게 요구하기 바빴으니까. 아, 예전에 범지훈을 좋아한다면서 쫓아다니던 남자에게서 마음이 담긴 선물이라며 받아 보긴 했었다.

직접 만들었다는 쿠키와 향초. 향초를 담은 선물 상자 안에서 3천 원이라고 적힌 구겨진 가격표가 발견되긴 했지만 범지훈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향초를 넣어 켜 놓으면 어울릴 캔들 워머에 대해 알아봤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평소 가지 않던 길로 돌아 집으로 가고 싶던 날이었다. 잘 가지 않던 길이니 가는 길에 못 보던 카페가 있다는 것도 우연히 발견하게 됐고 그 앞에서 묶음으로 쿠키를 세일해서 파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범지훈은 그 쿠키가 선물 받은 것과 똑같다는 것엔 조금 기분이 이상해지긴 했다.

애인들은 범지훈에게 선물을 주길 부담스러워했다. 이미 비싸고 좋은 물건들은 차고 넘치게 가지고 있는 범지훈이었기에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요리에 재능도 없고 손재주도 없어 정성이 담긴 뭔가를 만들 수도 없다는 애인들에게 범지훈은 늘 괜찮다고 말했었다. 애인들은 그럴 때마다 미안하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이내 애교 가득한 얼굴로 범지훈에게 선물 대신 뽀뽀라며 입맞춤을 하곤 했다. 그러면 범지훈은 그걸로 만족하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범지훈이 뭐가 필요할지 뭐를 갖고 싶어 하는지 세심하게 기억해 놨다가 선물한 사람은 백사현이 처음이란 소리였다. 받고 나니 깨달았다. 범지훈은 비싼 게 필요 없었다. 그냥 이런 게 좋았다. 딱딱한 하드커버의 소설 겉표지를 만지작대다 범지훈은 고개를 들어 백사현을 보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백사현 씨?”

어쩐지 아무 대답도 없는 백사현을 불렀다. 범지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질 않는 백사현을 보며 범지훈은 제가 뭔가 실수를 했나 싶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대표님….”

한번 오면 2, 30분은 있다 가는 곽팔두가 온 지 15분도 안 됐는데 갑자기 일어섰다. 범지훈은 당황해서 곽팔두를 바라봤다.

“조심해서 가세요, 팔두 씨. 배웅은 못 나가겠네요.”

“네, 괜찮습니다. 형수… 아니 사현 형님.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무슨 좋은 시간? 영문을 알 수 없는 범지훈의 시선이 조용히 밖으로 나가 병실 문을 닫아 버리는 곽팔두에서 백사현에게로 옮겨 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으면서 백사현은 이내 사르륵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지훈 씨. 나직하게 부르는 말에 범지훈도 네, 하며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예쁘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있어요?”

“백사현 씨가요?”

“아뇨, 지훈 씨가요.”

“예쁘다고 얘기해 본 적은 있습니다.”

지금 눈앞의 백사현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참 예쁩니다. 하지만 백사현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지훈 씨가 예쁘다고 하는 거 말고 다른 새끼… 아니 다른 사람이 지훈 씨한테 그렇게 얘기한 적 있었나 해서요.”

“…저한테 말입니까?”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아까 들었던 새끼라는 욕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범지훈은 티는 나지 않지만 속으로 굉장히 경악하며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도 없었구나.”

이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백사현이 결론지었다.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처음이 되겠네요.”

“네?”

고개를 숙이는 백사현이 침대에 앉아 있던 범지훈과 시선을 맞췄다. 늘 범지훈이 내려다보기만 하던 구도였는데 이렇게 백사현을 올려다보니 새로우면서도 여전히 예뻤다. 예쁜 사람은 어느 각도로 봐도 예쁘다는 말이 떠올랐다. 범지훈을 볼 때마다 거의 미소가 떠나지 않던 백사현은 지금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뻐요, 지훈 씨.”

범지훈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 하기엔 낯선 칭찬이어서였다. 그걸 부모님도 유치원 시절의 선생님도 아닌 백사현이 지금, 하고 있었다. 별로 재밌지는 않은 농담이라고 이야길 해야 하는데 범지훈은 백사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속 안이 긁고 싶을 만큼 가려워졌다.

“빨개졌네, 귀.”

나긋한 목소리처럼 느릿하게 뻗어진 손이 범지훈의 한쪽 귀를 쓸었다. 귀 끝을 쓸며 아래로 내려가 귓불을 만지던 손은 범지훈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앞으로 이런 말은 나만 하고 싶은데 나한테만 보여 주면 안 돼요?”

“…뭐를….”

“예쁘게 웃는 거.”

입술은 호선을 그리며 웃는데 백사현의 눈매는 가늘어졌다. 꼭 뱀같이. 턱을 쓸던 백사현의 엄지손가락은 범지훈의 아랫입술을 만지다 쉽게 떨어져 나갔다.

“농담이에요. 웃으니까 정말 예뻐요, 지훈 씨.”

담백한 어조로 말한 것과는 다르게 백사현은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가볍게 훑었다. 군침 도는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두고 인내라도 하는 듯이.

“한번 읽어 봐요.”

그리고 책에 눈짓하는데 그때서야 범지훈도 시선을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백사현의 혀끝에 신경이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범지훈은 어쩐지 목이 타는 느낌이 들었다.

***

범지훈의 대학 선배가 병문안을 왔다. 얼마 안 되는 사적인 인간관계이기에 범지훈도 반갑게 맞았다. 선배와의 대화에 백사현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준 후였다. ‘이따 다시 올게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병실 문을 닫는 백사현이었지만 범지훈은 닫히는 문 너머 사라지는 백사현의 모습이 아쉬워졌다. 그것도 모르고 대학 선배는 너 진짜 백사현이랑 친하구나, TV로도 봤는데 실제로 보니 더 잘생쁨하다 등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밝은 성격 하나는 여전했다. 나중엔 딸아이 사진을 보여 주는데 떠난 백사현에게만 신경이 집중되던 범지훈도 아이를 보며 넋이 나갔다. 올해 몇 살이라고요? 6살. 많이 컸지? 등등 아기가 태어나던 날과 돌잔치 외에는 본 지가 오래되었기에 범지훈도 그사이 이만큼이나 자란 아이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누아르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범지훈은 작고 귀여운 것을 꽤 좋아했다. 그건 비단 이상형뿐만이 아닌 동물과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말 나온 김에 나중에 우리 딸 좀 너한테 하루 맡길 수 있을까?”

“…저한테요?”

“응. 우리 딸이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맡겨 놓으면 아주 얌전해질 것 같아서.”

아이 한번 안아 본 적이 없는 사람한테 이렇게 덥석 자식을 맡겨도 되는 건가. 범지훈은 고민했지만, 아이 아빠가 된다는데 어떤가 싶어 휴일이면 가능할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얼굴이 환하게 펴진 선배는 몇 달 뒤면 결혼기념일인데 와이프랑 단둘이 데이트하기 전에 연락해야겠다며 룰루랄라였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하다(정확히는 범지훈보다 선배가 혼자 떠드는 게 9할이었지만) 선배가 이만 일어나야겠다며 갈 채비를 했다. 조금 더 있다 가라는 예의상의 말도 하지 않고 범지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보다는 백사현이 먼저였다.

선배가 가고 나서 15분이 지났음에도 백사현이 오질 않았다. ‘나 간다, 지훈아!’ 병실 문 앞에서 우렁차게 인사하는 선배 목소리를 들었을 것도 같은데 오지 않는 백사현에 침대에 앉아 있던 범지훈은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배 갔습니다.’ 톡톡톡 문자를 쓰다가 범지훈은 화면을 껐다. 생각해 보니 항상 백사현이 먼저 병실을 찾아왔지 범지훈이 먼저 간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예전 연애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당연하단 듯 백사현의 방문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에 범지훈은 작은 충격을 느꼈다. 결국, 병실 문을 열고 바깥을 살피는 범지훈에 문 옆에 서 있던 타이거 중 하나가 형수님을 찾느냐고 물었다.

“…응.”

“아, 형수님이라면 병실에 손님들 맞고 있을 겁니다.”

“손님?”

“네. 남자들이던데, 마스크랑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도 아주 잘생겼던데요?”

남자들…? 범지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백사현의 병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백사현은 항상 범지훈의 병실에 붙어살았으니까. 이준혁이야 백사현의 매니저이자 범지훈의 친구이기도 했으니 백사현이 없다 싶으면 거리낌 없이 범지훈의 병실로 찾아왔었다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그러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우선 범지훈은 자신의 병실 문 앞을 철통같이 지키는 타이거의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여기서 인상만 팍 쓴다면 조폭 영화 속 엑스트라로는 그만이었다. 범지훈은 결국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생각해 보니 백사현에 대한 배려가 정말 많이 없었다.

“형수님하고 아주 거리낌 없어 보이던데. 사현이 형 거리면서 엄청 다정하게 부르며 들어가던데요?”

“한번 확인은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대표님?”

부추기는 두 덩치들의 말에 꿈쩍할 범지훈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잘생긴 남자. 다정하게. 거리낌 없이. 그 단어들에 범지훈은 망설였다.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을 꼼질 거리다 범지훈은 백사현이 자신의 병실에 두고 간 과도에 생각이 미쳤다. 깨끗이 씻어 말려 놓았던 과도를 서둘러 들고 온 범지훈은 백사현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범지훈의 뒤에서 ‘어, 어… 저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하며 다급해하는 덩치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손님도 있다는데 백사현의 병실에 이렇게 말없이 불쑥 찾아가도 되나 싶은 긴장감에 범지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금세 도착한 병실 문 앞에서 긴장에 작은 한숨을 내쉬고 범지훈은 결심한 듯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은 손쉽게 열렸다.

“…사현이 형이 그러….”

확실히 VIP 병동이라 병실마다 방음은 정말 좋은지 문을 열자마자 시끄러운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막, 말을 꺼내던 남자의 시선이 문을 연 범지훈에게 닿았다. 남은 세 남자의 시선도 범지훈을 향했다. 덩치들의 말대로 정말 잘생긴 미남들이었다.

“…범지훈?”

그리고 범지훈을 알고 있기도 했다. 물론 범지훈 또한 남자들을 알았다. 병실에 있는 남자는 총 네 명. 백사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백사현의 병실 침대에 걸터앉거나 소파와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는 남자들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와, 진짜 범지훈 대표님이다!”

범지훈을 손가락질하며 놀란 눈으로 말하는 남자는 그룹 에스의 막내 보아였고, 남은 세 남자는 차례로 콘다, 모사, 맘바였다. 그리고 범지훈은 이 네 남자의 본명 또한 알았다. 사위민 덕분이었다.

[나이순으로 큰형인 사현이랑 둘째인 콘다, 셋째 모사, 넷째 맘바, 막내 보아 이렇게 있고요. 본명이 콘다는 곽복동, 모사는 김영희, 맘바는 박달수, 보아는 이루나 이렇게 돼요. 솔직히 팬들은 예명보다는 본명으로 잘 부르잖아요. 제 차애는 복동이거든요.]

출퇴근길마다 에스에 대한 틈새 강의를 해 주는 사위민 덕에 범지훈은 백사현과 일하는 동료 네 명의 얼굴과 예명은 물론, 본명들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

“예의 없이 사람한테 손가락질하면 안 되지, 루나야.”

의자에서 일어나 서둘러 이루나의 손가락을 접어 내리는 곽복동이 범지훈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범지훈 대표님이시죠? 사현이 형한테 얘기는 많이 들었….”

“형이 얘기해 준 게 아니고 기사에서 얘기해 준 거지. 사현이 형이 범지훈 대표님 얘기를 언제 많이 했어?”

“루나야.”

웃는 얼굴 그대로 이루나를 바라보는 곽복동에 이루나가 합, 입을 다물었다. 범지훈의 시야에서는 곽복동의 뒤통수밖에 보이지 않기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막내라서 아직 철이 없어요.”

하하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범지훈을 바라보는 곽복동이 순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이루나의 입을 인정사정없이 틀어막았다. 이루나는 소리도 못 내고 버둥거렸다. 다른 멤버들은 이 상황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소파에서 일어선 두 멤버 김영희와 박달수가 꾸벅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곽복동처럼 호감 상의 얼굴로 인사하는 김영희에 뒤이어 짧게 고개만 숙였다 들어 올리는 박달수는 빈말로도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미남은 미남인데, 그러니까 인상이 사나운 미남이라고 할까? 조폭 영화 속 잘생긴 남자 주인공이라고 하면 믿을 법한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낯익은 느낌을 줬다. 빤히 범지훈을 바라보는 박달수에 범지훈은 왜인지 모를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 왜! 내가 무슨 철이 없어?! 나 벌써 스물일곱 살이야, 형!”

그사이 곽복동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이루나가 걸터앉은 침대 위를 한 바퀴 구르며 곽복동에게서 거리를 두고 소리쳤다. ‘여기 병원이랬지, 조용히 안 해?’ 곽복동은 그런 이루나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안간힘이었다.

“좀 시끄럽죠? 원래 저 둘이 저래요.”

이루나와 곽복동에게 시선이 빼앗긴 범지훈을 향해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이는 김영희였다. 다섯 멤버 중 셋째라더니 중간에 끼어 둘째 형과 막내의 치고받는 것에 이미 익숙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범지훈이 대답했으나 아까부터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박달수에는 자꾸만 시선이 갔다.

“여기 앉으세요. 듣기로는 저희 사현이 형 구해 주셨다면서요? 정말 감사합니다.”

말을 거는 김영희를 바라봐야 하는데 아무 말 없이 뚫어져라 보기만 하는 박달수에게 시선이 가니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돌아가는 고개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 때문에 김영희가 권하는 자리에 서둘러 앉느라 손에서 과도가 떨어진 것도 뒤늦게 눈치챘다. 챙그랑. 하필 곽복동과 이루나도 잠깐 조용해진 틈에 크게 울린 쇳소리는 모두의 시선을 바닥에 향하게 했다.

“웬일로 조용하지.”

타이밍 좋게도 병실 한편에 있던 화장실의 문이 열리며 백사현이 나왔다. 멤버들을 향해 무심하게 툭 뱉던 얼굴은 곧장 범지훈을 발견하고 환하게 펴졌다.

“지훈 씨. 저 찾으러 왔….”

반갑게 범지훈을 부르던 목소리는 갑자기 달려드는 이루나에 의해 잦아들었다.

“사현이 혀엉!”

그대로 백사현의 허리를 안으며 엉겨 붙는 이루나가 외쳤다.

“대표님 질투가 너무 심해! 어떻게 칼까지 갖고 올 생각을 할 수가 있어? 그래도 우리가 사현이 형이랑 같은 그룹 멤버들인데! 나 너무 무서워.”

칭얼거리며 목덜미에 고개까지 파묻는 이루나에 백사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물론 범지훈은 보지 못했지만. 백사현의 미간이 아닌 그런 둘의 모습에서 범지훈은 도통 시선을 떼질 못했다. 강아지 상 미남과 청순한 미인의 조합은 누가 보기에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사위민이 알려 준 대로 백사현을 제외하곤 에스의 멤버 모두가 180은 넘는다더니 이루나와 백사현의 키 차이도 끌어안고 있으니 딱 보기 좋을 만큼이었다.

“…아, 제가 놓고 갔던 칼 가져다주러 왔구나. 그렇죠, 지훈 씨?”

그리고 빙긋 미소 짓는 백사현의 한마디가 싸해진 장내를 순식간에 종식시켰다. ‘뭐야, 그런 거였어?’ 겁먹은 얼굴은 어디로 갔냐는 듯 금세 사람 좋은 웃음을 터트리는 곽복동에 이어 김영희도 표정을 풀었다. 박달수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어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진짜야?’ 백사현을 끌어안고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되묻는 이루나는 범지훈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범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꼬리를 말며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말이다.

“진짜니까 이제 떨어져, 루나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백사현이 말했다. ‘싫어, 싫어! 범 대표님 너무 무서워.’ 그러거나 말거나 백사현의 어깨에 여전히 얼굴을 파묻으며 이루나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나 쟤 위험한데?”

작게 속삭이는 곽복동이었지만 범지훈 또한 분명히 들었다. 어쩐지 이루나를 바라보는 세 멤버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표정 변화가 아예 없던 박달수도 얼굴이 조금 굳을 정도였다.

“아악-!”

동시에 이루나가 비명을 질렀다.

“떨어지라는데 왜 안 떨어지지? 루나야.”

여전히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이루나의 머리를 쓰다듬기라도 한 것처럼 금세 손을 뗀 백사현이 말했다. 다만 이루나의 머리 한쪽이 누가 억세게 움켜쥐기라도 한 듯 헝클어져 있는 건 범지훈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백사현에게서 이미 떨어져 머리를 감싸 쥐곤 죽는소리를 내는 이루나를 주워 가듯 치우는 건 곽복동의 몫이었다. ‘그러게 사현이 형 성질 건드리지 말랬지? 이 정도로 끝낸 걸 다행인 줄 알아.’ 아파 죽어 하는 이루나의 등짝을 때리며 곽복동이 엄마처럼 혼냈다.

“사현이 형이 다른 사람과 스킨십을 별로 안 좋아해요. 대표님도 알고 계시죠?”

김영희가 말을 붙여 왔다. 그리고 그 말에 범지훈은 충격을 받았다.

“…스킨십을….”

“내가 왜 안 좋아해?”

범지훈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옆자리에 백사현이 바짝 붙어 앉으며 말했다. 어쩐지 김영희의 눈썹이 꿈틀댄 것 같았지만 찰나였다.

“안 좋아하는 건 맞지. 나랑 루나가 치근덕대면 형이 항상 떨어지라고 하잖아.”

“너랑 이루나가 보통 귀찮게 했어야지.”

대화를 주고받는 백사현과 김영희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지만, 착각일 게 분명했다. 범지훈의 신경은 틈 한 점 없이 바짝 붙어 앉은 제 옆의 백사현에게만 쏠렸다. 남는 자리도 많을 텐데 왜 이렇게 붙어 앉나 싶었지만 그게 싫은 건 아니라 범지훈은 손가락만 꼼질거렸다. ‘너무해, 범 대표님만 좋아하고!’ 멀리서 억울하게 외치는 이루나의 목소리와 조용히 하라는 곽복동의 말은 이젠 BGM으로 들릴 정도였다.

“지훈 씨도 왔으니까 이제 다들 가 봐. 시간도 됐는데.”

볼일 다 끝났다는 듯 미련 없는 백사현의 말은 범지훈이 들어도 섭섭할 정도였다. 같은 그룹 멤버들이 바쁜 와중에도 와 준 문병인데 이렇게 빨리 가도 되나 싶은 것과는 다르게 박달수는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안 가겠다고 버틸 줄 알았던 이루나도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채 곽복동의 손에 순순히 잡혀가고 마지막으로 김영희도 앉아 있던 자리에서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가 볼게, 형.”

말과는 다르게 문으로 향하지 않고 백사현의 앞에 선 김영희는 두 팔을 넓게 벌렸다.

“근데 가기 전에 잘 가라고 한번 안아 줘.”

범지훈이 실수로 칼을 떨어뜨렸을 때보다 심하게 병실 안은 얼어붙었다. ‘헐. 저 형 노빠꾸네.’ 중얼거리는 이루나의 목소리는 덤이었다. 끄응. 곽복동이 침음하는 소리도 함께 들렸다.

“스킨십 좋아한다며? 안아 달라니까.”

백사현이 안아 주기 전까지는 안 갈 생각인지 굳건히 버티고 서서 두 팔을 내리지 않는 김영희에 범지훈의 시선은 웃고 있는 김영희에서 백사현 쪽으로 옮겨졌다. 화가 나 있을 줄 알았던 백사현은 의외로 김영희를 올려다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좋아한다고는 안 했어. 영희야.”

“싫어하지 않는 거면 좋아하는 거지. 얼른 안아 줘, 나 형이 안아 줄 때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그럼 계속 그러고 있든지.”

툭 뱉어 내는 한마디와 함께 백사현은 미련 없이 범지훈의 손을 잡고 함께 일어섰다. ‘가요, 지훈 씨.’ 나긋하게 말하는 백사현은 그대로 김영희를 지나쳐 문 앞에 옹기종기 모인 세 멤버들을 향해 걸어갔다. 백사현의 뒤를 따라가며 당황한 범지훈의 시선은 김영희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웃고 있던 김영희의 얼굴은 서서히 그 미소가 사그라지고 있었다.

“사현이 형 너무 차가워.”

“영희가 선 넘은 거지. 안 그러던 녀석이 오늘따라 왜 그런데?”

속닥이는 이루나와 곽복동을 지나쳐 백사현이 먼저 병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열린 문밖에는 범지훈의 병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타이거들이 양옆으로 서 있었다. 백사현과 손을 잡고 있는 범지훈을 먼저 확인하곤 병실 안에 있는 남은 네 멤버들의 얼굴까지 빠르게 스캔한 타이거들은 왜인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고생 많으세요.”

타이거들에게 늘 하는 친절한 인사를 건네며 백사현이 웃었다. ‘감사합니다, 형수님!’ 우렁차게 외치는 타이거들을 보며 이루나가 두 멤버 형들에게 속삭였다. 범지훈의 귀에는 모두 다 들렸지만 말이다.

“사현이 형이 범지훈 대표님한테 제대로 코 꿰인 거 맞다니까. 잘못 들은 게 아니라 진짜 형수님이라잖아.”

그때서야 범지훈은 이루나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소유욕 장난 아닌 거 봐. 사현이 형 손도 저렇게 꼭 잡고 놓지도 않고.”

백사현이 잡고 놓지 않는 게 팩트였지만 범지훈은 어떻게 정정을 해 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간 병실에서 멤버들을 상대로 칼부림을 일으킬 뻔한 소유욕 짙은 대부업체 대표라는 오해가 더 심해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박달수의 시선은 범지훈을 따갑게 찔러 댔다.

“…내가 보기엔 반대인 것 같은데.”

무심하게 뱉어진 낮은 목소리에 범지훈은 고개를 돌렸다. 만나고 처음으로 듣게 된 낯선 목소리는 박달수의 것이었다. 생긴 것처럼 무척 낮은 저음을 가진 박달수는 범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이내 두 뺨이 발갛게 물들어 가는 박달수를 보며 범지훈은 왜인지 더욱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꼭 잃어버린 쌍둥이를 찾은 느낌이랑 비슷했다.

“이 형은 또 뭔 소리래?”

핀잔을 던지는 이루나가 박달수의 목에 어깨동무했다. ‘어? 볼은 또 왜 빨개진 거야? 형, 설마 날…!’ 박달수의 뺨을 가리키다 입까지 틀어막는 이루나의 얼굴을 박달수는 말없이 밀어냈다. 멤버들끼리 사이는 좋구나. 그런 그들을 보며 범지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웅,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범지훈을 원래의 병실에 데려다 놓고 멤버들의 배웅을 나가는 줄 알았던 백사현이 함께 병실 안에 들어온 채 그대로 문을 닫으려고 하자 범지훈은 당황했다. 범지훈이 그러든 말든 멤버들은 이미 익숙하게 몸을 돌려 가고 있었다. 아, 곽복동만 닫히는 문 틈새로 백사현에게 무어라 작게 속삭이고 가긴 했다. 깔끔하게 문을 닫은 백사현은 범지훈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니요. 저는 지훈 씨랑 병실에 있을 건데요?”

“그래도 여기까지 직장 동료들이 찾아왔는데….”

“아.”

깨달았다는 듯 작은 탄성을 뱉은 백사현이 빙긋 웃었다.

“작별 인사 할 시간도 없을걸요? 쟤네, 병원 밖으로 나가자마자 대기하던 매니저 형들이 바로 실어 갈 거거든요. 저야 나가면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사진만 실컷 찍힐 거고 병실에만 있는 게 안전하긴 해요.”

생각지도 못한 답에 범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백사현은 데뷔한 지 8년이 된 현재까지도 높은 주가를 달리고 있는 인기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다. 더군다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납치 사건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범지훈은 너무 비연예인의 입장으로만 바라봤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백사현이 병원에 입원한 이후, 마음 놓고 활보할 수 있었던 곳도 병실과 VIP 병동복도 그리고 옥상이 전부였다는 것도 떠올렸다. 범지훈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가끔 나갈 수 있는 병원의 야외 공용 테라스도 백사현은 가기 어렵다는 것에 범지훈은 입맛이 써졌다.

“…답답하진 않습니까?”

“음, 혼자 있었다면 답답했겠지만 지훈 씨랑 있으니까 전혀요? 오히려 시간이 너무 빨리 가던데요?”

가볍게 웃어 버리는 백사현을 보며 범지훈은 더 마음이 그랬다. 치료와 휴식이 필요한 병원에서조차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연예인의 삶이란 게 대체 뭔지 알고 싶기도 했다. 더 정확히는 백사현에 대해서 범지훈은 알고 싶어졌다.

“백사현 씨.”

“네, 지훈 씨.”

“아까 멤버 분들이 말씀하시던 스킨십을 싫어하신다는 거 말입니다.”

주제넘은 질문일까 주저하긴 했지만 범지훈은 용기를 내 물었다.

“…답하기 곤란하시다면 안 하셔도 됩니다.”

물론 뒷말은 당연히 붙었다. 백사현이 곤란하다면 굳이 캐물을 생각도 알아볼 마음도 범지훈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범지훈을 바라보는가 싶던 백사현은 너무도 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스킨십 별로 안 좋아하는 건 맞아요. 지훈 씨는 못 속이겠네요.”

웃음기 섞인 부드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하는 말과는 다르게 범지훈의 침대 가에 앉은 백사현의 손은 또 범지훈의 손을 가져와 만지작댔다. 스킨십을 싫어한다고 보기에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게 유일하게 안 싫을 때가 있어요. 그게 팬분들 앞이었거든요.”

그 말에 범지훈은 양심이 찔리기 시작했다. 기사들로는 열성 팬인 범지훈이 백사현을 구했다는 걸로 이미 여기저기 떠다니고 있었지만 범지훈은 기사 내용처럼 백사현의 열정적인 팬이 아니었다. 처음은 그저 친구가 담당하는 연예인이었고 그다음은 친해지고 싶은 사람, 그다음은 눈앞에서 납치를 당하는 모습을 봤으니 반드시 구해야겠다고 다짐한 사람이었다.

“저는….”

“근데 이젠 더 이상 유일하지가 않네요.”

“네?”

“팬분들 앞이 아니어도 스킨십이 싫지 않을 때가 또 생겼거든요.”

범지훈의 커다란 손을 만지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파고들어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범지훈은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제 가슴이 쿵쾅이는 걸 느꼈다.

“지훈 씨 앞이요.”

너무나 해사하게 백사현이 웃음 지었다. 범지훈의 귀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저 지훈 씨 진짜 많이 좋아하나 봐요.”

머리 위에서 김이 올라온다면 믿을 정도로 범지훈의 얼굴마저 새빨갛게 물들었다. 가쁜 숨이 터져 나올 듯 가슴은 크게 부풀다 가라앉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 범지훈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옆에서는 백사현의 웃음소리가 맑게 흘러나왔다.

***

취침 시간이었다. 병실마다 모두 소등은 되었지만 1인 병실만은 예외적으로 작은 전등 하나 정도는 켤 수 있었다. 하지만 범지훈도 쉬어야 한다며 백사현도 본인의 병실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병실에서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던 범지훈은 이내 침대 협탁 위로 올려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톡, 토톡. 톡. 자판을 두드려 검색한 건 백사현이란 이름 석 자였다. 이내 뜨는 가수 백사현의 프로필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읽어 내려가던 범지훈은 다른 포털 사이트로 들어가 다시 백사현에 대해서 검색했다. 어느 정도 가수 백사현에 대한 기본 정보는 알겠는데 사람 백사현의 성격이 어떤지, 멤버들을 대할 때는 어떤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이 있는지 그러니까 팬이라면 알 법한 정보들을 찾기에는 무언가 아쉬웠다. 몇 번 더 검색을 해 보던 범지훈은 목마른 정보에 주저하다가 사위민과 나눈 톡방으로 들어갔다.

[주무십니까, 사위민 씨?]

그렇게 보내 놓고는 범지훈은 늦은 시간에 연락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붙이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 다시 자판을 켰다.

[엇 대표님 웬일이세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보다 한발 빨리 사위민의 답장이 이어졌지만 말이다. 주저하던 범지훈은 신중하게 답을 보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네. 덕분에 몸은 괜찮습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렸습니다.]

[죄송할 게 뭐 있어요ㅎㅎ대표님 연락이야 언제든 환영인데요]

[몸이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그래서 궁금하신 게 뭔가요?:)]

답장이 정말 빨랐다. 범지훈의 답이 이어지고 체감상 5초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순식간에 연달아 뜨는 톡을 보며 범지훈은 작은 감탄을 뱉었다.

[연예인의 팬들이 주로 한다는 그 sns 말입니다.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그리고 범지훈의 물음에 한참이나 답은 없었다. 1분이 지나도 뜨지 않는 답에 범지훈은 뭔가 문제가 생겼나 싶어 다시 자판을 켰다. [답하시기 어려우시다면...] 다 적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연달아 뜨는 링크 주소들에 범지훈은 두 눈을 깜빡였다. 이내 사위민의 답장 또한 떴다.

[대ㅣ박ㅋㅋㅋㅌ지금 사현이가 궁금해서 ㄱ그런거조??대푯님 완전 빠지싱거 맞죠?ㅋㅌㅌㅋㅌㅋㅋ]

[잠시만요 링크 더 보내드릴ㄱ게요 제가 보내드린 링크 드러각보ㅅㅣ면]

[우리 사현이 정보들 알숭있거ㅓ든요ㅋㅋㅌㅌㅋㅌ입덕포인트들도 전북]

[전부 나와잇어오ㅛ]

그러고선 줄줄이 뜨는 건 파랑새의 링크들이었다. 범지훈은 우선 사위민이 가장 첫 번째로 보내 준 링크를 눌렀다.

[tweet: 백사현 노출 1도 안해도 몸 좋은 거 다 안다]

사진 사진

사진 사진

그리고 범지훈은 눈을 의심했다. 첫 번째 사진은 수영장에서 막 빠져나온 백사현의 전신 샷을 담고 있었다. 목 끝부터 발목까지 온몸을 꽁꽁 가린 검은 래쉬 가드에 반바지까지 겹쳐 입고 있어 보이는 살색이라곤 얼굴과 손, 발까지가 전부였음에도 물에 젖어 더욱 달라붙는 옷은 백사현의 몸 선을 더 잘 드러내 보였는데 어깨가 그러니까, 범지훈만 했다. 역삼각형으로 이뤄진 단단한 몸은 가슴과 들어간 허리 라인까지 꾸준히 운동한 몸 선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그다음 두 번째 사진은 공연을 마친 직후, 땀에 젖은 백사현의 풀 샷이었는데 쇄골까지 단추를 잠근 하늘하늘한 블랙 실크 셔츠에 새까만 레자 바지를 입고 있었다. 살색이라곤 아주 조금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몸에 달라붙은 옷들이 더 적나라하게 몸 선을 보여 주고 있어 범지훈은 민망함에 시선을 떼고 말았다. 아이돌들이 노출하는 거야 방송을 통해 몇 번 봤다지만 원래부터 노출을 아예 안 한다는 사람이 물이나 땀에 젖어 어쩔 수 없이 몸 선이 드러나는 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세네 번째 사진 또한 첫 번째, 두 번째와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살짝 젖은 흰색 셔츠를 입고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백사현의 화보와 가슴골을 드러낸 채 벨벳 소파에 누운 백사현까지. 범지훈은 이런 걸 공짜로 봐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tweet: 스킨쉽 질색하는 공주에게 달라붙은 두 왕자의 최후]

gif

다음은 움직이는 짤이었는데 이루나에게 끌어 안겨진 좋지 않은 표정의 백사현이 화면 속에 서 있었다. 그런 백사현에게 백 허그를 하며 강아지처럼 뒤통수에 열심히 뺨을 비비는 이루나와 그 모습을 보고 멀리서 슬금슬금 다가온 김영희가 앞에서 백사현을 함께 끌어안자마자 백사현의 이성이 끊긴 모양이었다. 폭발한 백사현이 김영희와 이루나에게 차례차례 머리를 휘둘러 박치기를 했다. 거하게 이마를 맞아 얼굴을 일그러뜨린 두 남자가 떨어져 나갔고 순간 범지훈은 풋 하고 터져 나온 웃음에 저도 모르게 놀라 헛기침을 했다.

[ㅋㅋㅋㅋㅋㅋ싫다는 형아 기어이 끌어안고 있는 울 사랑둥이 멈머 어쩜 좋아ㅠㅠㅠㅠㅠㅠ]

[그래도 ㅅㅎ이가 ㄹㄴ가 막내니까 진짜 오래 참는닼ㅋㅋㅋㅋㅇㅎ오니까 바로 응징하는 것봐]

[ㅋㅋㅋ큐ㅠㅠㅠㅠ귀여워ㅠㅠㅠㅠ루사는 찐이야]

[뭔 소리?영사가 찐이라구용ㅜㅜ]

[취좆ㄴㄴ그냥 사른 만세 울 ㅅㅎ이는 앳쓰의 하나뿐인 공주란 말이에요]

이어지는 답글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팬들이 부르는 백사현의 별명이 공주인 건 알 수 있었다. 왜 공주지? 잠깐 생각했으나 180이 넘는 덩치의 네 멤버들에게 둘러싸인 작고 예쁜 백사현의 모습에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 요즘 범사도 먹어ㅠㅠㅠㅠㅠㅠㅠ대존맛]

아래로 스크롤을 내리니 또 있는 답글엔 범지훈의 시선이 멈췄다. 범사?

[ㅅㅂ범사 알아 나 대가리 깬다 리디광공상 냉미남 대표님 얘기하는 거 맞지?]

[와 미친 ㄹㅇ 찐으로 벨소설에서 튀어나온 광공인 줄 그 대표님 직찍도 봄? 저번 사현이 솔로 쇼케에서 찍혔다잖아]

[야 미친;;;;일반인 사진 함부로 막 찍어도 됨?]

[그래서 삭제됐다던데ㅠㅠ올린 사람 계폭도 함 그래서 대표님 사진 본 사람들 얼마 안돼]

[쇼케 당첨된 사람들은 좋겠다ㅠㅠㅠㅠㅠ범 대표님 실제로 봤을거 아냐]

…리디광공상? 벨소설? 직찍? 계폭? 범지훈은 당황했다. 외계어처럼 섞여 있는 단어들의 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정리하자면, 백사현의 솔로 쇼케이스에 갔던 자신을 누군가 사진으로 찍어 잠깐 공개했다가 삭제가 된 것 같았다. 얼굴 찍힌 거야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범지훈은 연예인도 아닌 자신의 사진에 이렇게나 관심을 가지는 팬들의 반응이 못내 당황스러웠다.

까똑.

[아규ㅠㅠㅠㅠㅠㅠㅠ대표님 두 번째 링크 잘못 보냈어요ㅠㅠ밑에 답글들은 보지 말고 얼른 닫아주세요ㅠㅠㅠㅠㅠㅠ]

화면에 뜨는 사위민의 톡이 링크 주소가 아닌 답장이라는 것에 범지훈은 창을 닫았다. 그러자마자 누군가 범지훈의 병실 문을 두드렸다. 범지훈은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저예요. 지훈 씨, 잤어요?”

문을 열어 주는 범지훈의 눈앞에 서 있는 건 백사현이었다. 하지만 백사현이 이젠 익숙해진 환자복이 아닌 낯선 평상복을 입고 있다는 것에 범지훈은 눈길이 갔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범지훈과 시선을 맞추며 백사현은 말을 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미안해요. 제가 지금 외출할 생각인데 지훈 씨도 혹시 병원이 답답하면 같이 나가는 거 어떨까 싶어서요.”

“다른 환자분들 자는 데 방해 안 되게 전용 엘리베이터 타고 조용히 나가면 돼요. 1층에 저희가 나갈 문도 따로 열어 놨거든요. 아버지가 이 병원의 원장님이셔서 허락은 미리 받았어요.”

백사현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뒤에서 불쑥 고개를 내미는 곽복동에 범지훈은 흠칫했다. 다른 멤버들과 함께 갔을 줄 알았더니 지금 시간에 혼자서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가는 곽복동에 뒤이어 옆에서 고개를 내미는 건 교대한 새로운 타이거였다.

“이참에 나가서 형수님이랑 바람 좀 쐬고 오세요. 대표님이 퇴원하실 때 입고 나가실 정장, 잘 세탁해서 다려 놓은 거 옷장에 있습니다.”

이건 범지훈에게 함께 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날도 많이 서늘해져서 간절기용 코트도 같이 넣어 놨습니다, 대표님.”

반대쪽에서도 고개를 내밀며 보태는 다른 타이거의 한마디에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타이거들의 얼굴도 밝아졌지만, 그중 백사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진 것 같았다.

“그럼, 옷 갈아입고 만나요. 지훈 씨. 조금 이따 다시 데리러 올게요.”

예쁘게 눈을 휘는 백사현이 이내 병실 문을 닫았다. 혼자만 남은 병실에서 범지훈은 뻗었던 한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다 남자들뿐이라 보는 데에서 얼른 갈아입고 같이 움직여도 됐을 텐데 굳이 자리를 피해 주는 백사현이 범지훈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한 기분에 범지훈은 만족스럽게 커프스단추를 채웠다. 병원복도 폼이 넉넉해서 편하긴 했지만, 유니폼처럼 입던 정장은 다른 의미로 편안함을 줬다. 마지막으로 얇은 코트에도 팔을 끼워 넣으며 범지훈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백사현이 오기 전에 그가 있을 병실로 먼저 건너갈 생각이었다.

백사현의 병실에서 함께 기다리고 있던 곽복동은 범지훈이 들어오자마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을 벌리고 멍하니 범지훈을 바라보는 눈이 어쩐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범지훈은 부담스러움에 곽복동의 시선을 피했다.

“대표님 끝내주게 잘생기셨네!”

끝내 터져 나온 곽복동의 감탄에 범지훈은 아예 고개를 돌렸고 백사현이 ‘그렇지?’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만들 퇴근해 보라는 범지훈의 말에도 조금 더 있다가 가겠다는 타이거들이 범지훈 무리를 배웅했다. 다 함께 1층으로 내려가면 더 소란해질까 봐 백사현, 범지훈, 곽복동으로만 이루어진 무리는 타이거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조용하고 신속하게 병원을 빠져나왔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부쩍 서늘해진 가을 밤바람이 차갑게 세 사람을 맞았다. 그리고 범지훈은 병원 밖에 바로 주차되어 있는 흰색 스포츠카에 시선을 멈췄다. 어느새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쓴 백사현은 익숙하게 운전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구 차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지훈 씨, 타요.”

곽복동이야 이미 스포츠카 뒤에 주차되어 있던 밴의 조수석으로 잽싸게 탄 뒤였다. 매니저가 운전하고 있었는지 밴에는 금방 시동이 걸렸다. ‘형, 난 가 볼게! 대표님도 우리 형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창문을 내리고 소리치는 곽복동에 백사현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범지훈은 요즘 들어 좋은 시간 보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것 같다고 여겼다. 쿨하게 멀어져 가는 밴을 보며 범지훈은 얼이 빠졌다. 정말 곽복동은 백사현만 빼내는 게 목적인 모양이었다.

“복동이가 성격이 참 좋아요.”

조수석에 범지훈이 타자마자 미소 짓는 백사현이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인 것 같아 범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체에 범지훈은 운전하고 있는 백사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예쁜 사람은 운전하는 모습도 참 예뻤다.

“가 보고 싶은 곳 있어요? 지훈 씨.”

“아니요, 딱히 없습니다.”

바람을 쐬러 나온 거라지만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그것에 백사현은 고민하듯 톡톡 운전대를 두드리더니 영화를 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새로 개봉한 건데 장르가 범죄 수사물이라 하더라고요. 지훈 씨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범지훈은 당연히 오케이였다.

***

평범한 영화관을 생각하고 들어선 곳에서 범지훈은 당황했다. 이곳은 대관을 주로 하는 프라이빗 영화관이었다. 어쩐지 들어오는 곳마다 깔린 푹신한 카펫에 천장의 샹들리에까지 블랙과 골드로 꾸며진 내부 인테리어 또한 범지훈이 TV로 종종 보던 평범한 영화관과는 느낌이 다르다 싶었다. 범지훈 또한 마음에 들던 남자와 단둘만의 데이트를 위해 프라이빗 영화관을 예약하여 이용해 본 적이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예전에 이따금 이용했던 프라이빗 영화관과는 느낌이 달랐지만, 이곳은 분명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 이런 곳은 적어도 며칠 전에는 미리 예약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저희 에스가 알엔의 전속 모델이어서요. 이 영화관도 알엔 그룹 계열사라서 필요할 때마다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해 주세요.”

그런 범지훈의 의문을 백사현은 쉽게 설명했다. 알엔 그룹? 그곳이라면 아버지 범상철이 요즘 부쩍 친하게 지낸다는 분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그분의 직급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임원인 건 알고 있어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사현이 속한 그룹 에스가 알엔의 전속 모델인 건 또 처음 알았다. 묘한 인연이었다.

어찌 되었든 백사현 덕에 예약도 필요 없이 프라이빗 영화관 내부로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영화를 보며 뭔가를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하진 않아 범지훈은 음식을 따로 시키지 않았고 간단한 음료만 주문했다. 백사현 또한 마찬가지로 음료만 시키곤 신기해했는데 그것에 범지훈은 귀가 좀 빨개지긴 했다. ‘저도 그런데 우리 정말 잘 통하네요, 지훈 씨.’ 뒤이어지는 백사현의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다. 생각보다 긴 러닝 타임에도 범지훈은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영화의 모든 부분이 범지훈의 취향이기 때문이었다. 영화를 보며 이따금 자세를 바꾸느라 몸을 뒤척이던 범지훈의 손끝에 백사현의 손이 닿은 건 외엔 정말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물론 범지훈의 몸이 그때마다 목석처럼 굳어 가긴 했지만 말이다.

“영화 어땠어요, 지훈 씨?”

“재미있었습니다. 이걸 차용해서 범죄 현장의 소재로 써도 좋을 것 같아요.”

범지훈의 말이 오랜만에 길어졌다. 예능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데 남들이 듣기엔 뭔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는지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두 남자를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하던 영화관 직원들의 동공이 떨려 오는 것 같았다. 물론 신나서 이야기하는 범지훈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말이다. 범지훈은 영화관 데이트라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은 처음 알았다. 그전에 했던 데이트들이야 전부 상대 남자의 취향에 맞춘 거였고 범지훈은 자신은 영화 감상에 그렇게 큰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듯 범지훈의 취향대로 꼭 맞춘 코스라면 몇 번이라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물론 상대가 백사현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기분 좋은 생각을 이어가던 범지훈이 잠깐 걸음을 멈췄다.

데이트…? 너무 당연하게 데이트라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범지훈은 잠시 넋이 나갔다. 백사현 또한 그렇게 생각할는지 조심스레 시선을 던지는 범지훈의 눈에 깊게 캡 모자를 눌러쓴 백사현이 들어왔다. 깜깜한 밤에도 여전히 모자를 벗지 않고 있는 백사현은 챙으로 눈까지 가렸어도 그 미모가 여전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혹시나 주위에 백사현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주변을 대신 둘러보던 범지훈의 시야에 주차장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커플이 보였다. 심야 영화를 관람하러 오는 모양이었는지 대화를 주고받던 커플은 범지훈의 우려대로 이내 백사현 쪽을 관심 있게 보기 시작했다.

작게 속삭이는 커플의 대화 속에 ‘은발’이라는 말이 얼핏 들렸다. 백사현은 챙을 더 깊게 내렸다. ‘에스의 사현’이라는 말까지 들려오고 커플이 동시에 백사현을 바라보는 순간, 백사현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풀썩 씌워졌다. 동시에 은은하게 풍겨오는 낯익은 향에 시선을 들어 올린 백사현은 덮어쓴 게 어디서 본 적 있는 코트임을 눈치챘다.

왼쪽에서 들려오던 발걸음은 어느새, 백사현의 한쪽 어깨를 감싸며 오른쪽으로 옮겨 갔다. 코트 사이로 보이는 건 흰 셔츠를 입고 있는 범지훈이었다. 커플들의 시야에서 자신의 몸으로 백사현을 가린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범지훈이 한쪽 팔로 감싸던 백사현을 조금 더 자신 쪽으로 당겨 왔다. 범지훈의 코트를 뒤집어쓴 채로 백사현은 저항 없이 범지훈에게 안겨졌다. 저희끼리 조금 더 속삭이던 커플은 범지훈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빠르게 걸음을 옮겨 가 버렸다.

“…고마워요.”

차에 타자마자 뒤집어쓴 코트를 벗어 범지훈에게 건네주며 백사현이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한 손은 벌써 차 안의 히터를 틀고 있었다. ‘저한테 이거 벗어 준다고 춥진 않았어요?’ 걱정스레 묻는 백사현에게 범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백사현 씨가 사람들이 알아보는 걸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실례 아니에요. 지훈 씨 덕에 살았네요. 정말 고마워요.”

배시시 웃어 보이는 백사현은 범지훈이 코트를 갈무리할 때까지 출발하지 않고 기다리며 말을 이었다.

“납치 사건도 있었고 평소보다 더 관심이 많아질 때라 불편하긴 했었어요. 저희가 데뷔 초 때부터 다른 아이돌 그룹들보다 사생들도 특히 심한 편이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방송 촬영이나 무대 외의 사람들 관심은 부담스러워서요. 감사하게도 팬분들은 이해해 주셔서 일상생활에서 만나도 일부러 모른 척해 주시는데 팬이 아닌 다른 분들은 그걸 모르셔서 이런 일이 종종 있어요. 저 때문에 오히려 지훈 씨가 불편하진 않았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가는 백사현이 핸들을 이내 움직였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덕에 시트에 편히 등을 묻으며 범지훈은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은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이번 같은 일이 또 생긴다면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백사현 씨가 괜찮으시다면요.”

“…고마워요.”

그리고 한 박자 뒤늦은 백사현의 답이 이어졌다. 이후로는 침묵만이 이어져 범지훈은 괜히 백사현을 흘긋 바라보았다. 보호해 준다는 단어 선택이 조금 그랬나 싶었다. 백사현 또한 멀쩡한 성인 남자인데 아무래도 어린아이에게 할 법한 말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때문에 백사현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지만, 다행히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진 않았다. ‘음악 틀까요?’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문득 백사현이 물었다. 범지훈은 꽤 반갑게 대답했고 백사현은 새벽에 들으면 어울릴 법한 잔잔한 노래를 재생했다.

“시간이 늦어서 병원에 다시 돌아가기는 다른 사람들한테 폐가 될 것 같고 저희 집이 여기랑 가까워서 그쪽으로 갈 생각이거든요, 지훈 씨, 저희 집에서 하루 자고 가는 거 괜찮으세요?”

그러다 물어 오는 말에 범지훈은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병원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민폐일 것도 같았다. 그렇다고 범지훈이 우리 집으로 가겠다고 하기엔 백사현이 굳이 차를 끌고 범지훈을 데려다준 뒤에 다시 본인의 집으로 되돌아갈 것 같은데 그렇게 귀찮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또 백사현의 집으로 그대로 가자니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범지훈은 고민했다.

“…괜찮긴 합니다만, 저….”

“네, 말씀하세요.”

“…정장을 입고 자기엔 불편할 것 같습니다.”

범지훈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리고 동시에 범지훈은 당황했다. 왜 옷이 맞는 거지…? 백사현이 건네준 티셔츠도 트레이닝 바지도 작다는 느낌 없이 편하게 맞는 것에 범지훈은 의문을 가졌다. 분명히 체구가 다를 텐데. 이상한 일에 전신 거울에 본인의 모습을 몇 번이나 비춰 보며 범지훈은 고민했다. 거울 속 범지훈은 꼭 본인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바지도 기장만 짧을 뿐이지 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보면 원래 7부로 입는 바지인 줄 알 정도였다. …옷을 원래 크게 입는 건가? 결국 범지훈은 그렇게 결론짓기로 했다. 때맞춰 드레스 룸 밖에서 부르는 백사현의 목소리에 범지훈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까 영화관에서 마시기만 해서 지금쯤이면 출출할 것 같아서요. 간단하게 준비해 봤어요.”

대리석으로 된 아일랜드 식탁 위로 펼쳐진 건 안주로 먹기 좋은 치즈들이었다. 한입 크기로 예쁘게 잘려 모자람 없이 데코 된 그릇 위에는 다양한 모양의 치즈 외에도 여러 종류의 비스킷과 잼도 함께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잘린 멜론 위로 하몽까지 올려져 있는 것에 범지훈은 이게 간단한 건가 또 고민했다.

“지훈 씨 혹시 와인 좋아하나요? 같이 먹기 좋을 것 같아서요. 술이 별로면 무알콜 음료도 있는데….”

“와인 좋아합니다.”

백사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범지훈이 대답했다. 이런 안주에 와인을 빼고 먹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기분 좋은 풍미의 와인이 들어가니 범지훈의 기분 또한 좋아졌다. 연예계 생활이나 아이돌들의 생활 방식 등에 관한 이야기로 범지훈의 궁금증을 풀어 줬던 백사현은 이제 범지훈의 차례라는 듯 턱을 괴며 가늘게 눈을 떴다.

“지훈 씨는 연애해 본 적 많아요?”

마침 아이돌들의 연애에 관한 이야기가 끝났던 참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에 별 의심 없이 범지훈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백사현 씨는 연애해 본 적 많습니까?”

“많진 않아요. 다른 사람이 절 건드리는 게 별로라서. 만나도 금방 헤어지고 그랬거든요.”

“그러면… 상대도 동의합니까? 헤어지는 거에.”

“…그렇죠. 깊은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범지훈은 침묵했다. 가만히 백사현을 보다 이내 식탁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저도 깊은 사이가 아니었나 봅니다. 연애를 적게 해 본 건 아닌데 하나같이 오래 사귀진 못했거든요.”

백사현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서 ‘왜인지 물어봐도 돼요?’라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범지훈은 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은근하게 올라오는 취기는 딱 기분 좋을 만큼이었다.

“다들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또 저를 무서워했고요.”

“저는 지훈 씨가 무섭지 않은데요.”

“그래서 백사현 씨가 신기해요.”

나른해지는 느낌에 범지훈은 식탁 위로 세운 팔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가요? 전 그 사람들이 이상한 것 같은데.’ 대답하며 조금밖에 남지 않았던 범지훈의 잔에 백사현은 와인을 채워 주었다.

“그런데 지훈 씨. 이제 백사현 씨 말고 사현이라고 불러 주면 안 돼요?”

이어지는 말엔 범지훈의 시선이 들어 올려졌다. ‘우리 이제 꽤 친해진 것 같은데.’ 와인병을 내려놓고 가만히 범지훈을 바라보며 말을 잇는 백사현은 농담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범지훈은 고개를 바로 세웠다.

“그럼, 백사현 씨도 절 형이라고 불러야 할 텐데요.”

“네, 지훈이 형. 말도 편하게 하세요.”

“…그럼 진짜 편하게 하게 되는데.”

“그편이 훨씬 좋아요.”

당돌했다. 백사현이 네 살이나 어리다는 게 범지훈은 그제야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피식 범지훈의 입술 새로 웃음이 흘렀다. 그것에 백사현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형은 취하면 웃음이 많아지는 거 알아요?”

“…그런가.”

“네. 그리고 웃으면 되게 예뻐져요.”

“이상해, 너. 나한테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 한 명도 없었는데.”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그게 왜 이상해요?”

백사현이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범지훈은 그런 백사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를 무서워해야지 맞는데 겁도 안 내고 예쁘다질 않나, 다른 사람하고는 싫은 스킨십이 나하고는 괜찮다고 하고.”

“괜찮은데 그럼 어떡해요?”

“그럼, 이것도 괜찮아?”

갑작스레 뻗어진 범지훈의 손이 백사현의 손목을 쥐었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백사현은 여유롭게 웃었다.

“이 정도야 항상 하던 거….”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범지훈 탓에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범지훈의 손에 부지불식간에 손목이 당겨진 백사현의 고개가 들렸다. 백사현의 갈색 눈에 비친 건 다가오는 범지훈이었다. 그리고 둘의 입술은 틈 한 점 없이 맞물렸다.

큰 힘을 주지 않던 백사현의 입술 사이를 쉽게 가르고 들어선 혀는 부드러운 점막을 훑었다. 누구에게서 느껴지는지 모를 진한 와인 맛도 났다. 입술 안쪽부터 시작하여 조금 더 깊숙하게. 볼 안을 그리듯 훑던 혀는 백사현의 혀를 감았다가 부드럽게 쓸며 천천히 떨어졌다. 젖은 소리와 함께 맞닿았던 입술이 질척하게 떨어지며 범지훈은 나지막한 숨을 뱉었다. 백사현은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나 알고는 있을는지 천천히 눈을 뜨며 범지훈을 쳐다보았다. 쥐고 있던 백사현의 손목을 놓으며 범지훈은 얼굴마저 떨어뜨렸다.

“이래도 정말 괜찮다고?”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범지훈은 물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어둡게 빛났다. 그런 범지훈을 올려다보는 백사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무슨 의미로 한 거예요?”

생각보다 담담하게 백사현은 되물었다. 범지훈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마음 가는 대로 해 보라며. 그렇게 해 봤어.”

그리고 그때야 백사현의 눈이 커졌다. 범지훈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이겼어. 정말로 좋아하게 만들어 놨네.”

좋아한다, 안 한다. 서른다섯 살이나 먹고 본인의 마음을 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좋아해 달라고 이렇게 온몸으로 외치며 부딪쳐 오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범지훈의 눈매가 휘어졌다. 자꾸만 예쁘다고 하는데 그 앞에서 웃어 보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아니, 사실 백사현을 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현이 너랑 있으면 이런 것도 하고 싶고, 네가 없으면 보고 싶어져. 나 말고 다른 남자랑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질투가 나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좋아한다는 건데, 넌 어때?”

‘내가 좋아하는 거, 괜찮아?’ 동의를 구할 필요는 없었다. 평소보다 훨씬 길어지는 범지훈의 말을, 그 속에 담긴 명확한 감정을 귀로 들으면서도 멍하니 범지훈을 올려다보는 그 표정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혹시나 믿지 못할까 봐 범지훈은 확인 사살을 했다.

“내가 많이 좋아하게 됐어. 백사현, 널.”

“…형.”

항상 지훈 씨라고만 하다가 듣게 된 형 소리는 간지러울 정도였다. 백사현이 말을 놓으라고 하니 술기운에 쉽게 놓긴 했지만, 이 술기운이 가시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범지훈은 생각했다.

“지훈이 형.”

그런데 그냥 형보다는 이름까지 붙인 게 더 듣기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말해 줄래요?”

범지훈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걸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턱이 잡혀 숙여졌다. 눈앞에서 올려다보는 백사현과 시선을 맞추며 범지훈은 쉽게 대답했다.

“좋아해.”

“한 번만 더.”

“좋아해.”

“…취해서 하는 소리 아니죠?”

나를 뭐로 보고,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뱉을 수는 없었다. 백사현에게 하기에는 염치없는 말이었다. 확실히 필름이 끊긴 건 아닌데. 기분이 고조되고 좋기는 하지만 눈앞의 예쁜 백사현도 턱을 쥐고 있는 가느다란 손의 촉감도 취했다기엔 선명했다.

“뭐, 취해서 하는 말이라도 이젠 못 물려요. 내가 분명히 들었으니까.”

“나도 물릴 생각 없는데.”

“형은 진짜 술만 마시면,”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와는 다르게 이가 꽉 물렸다. 입만 웃으면 가짜 미소라고 하던데 눈만 웃는 건 뭐지? 범지훈은 그 와중에도 딴생각을 했다.

“…사람 미치게 하는데 뭐 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사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급하게 부딪쳐 오는 입술은 범지훈의 입을 베어 물었다. 꼭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느낌이었다. 좋은 느낌은 아니라 뒤로 물러나려는 범지훈의 뒤통수를 백사현의 손이 단단히 옭아매었다. 아래에서는 진한 와인 냄새가 훅 올라왔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어느새 와인 잔이 엎어진 모양이었다. 잠깐 시끄러운 파열음도 들린 것 같았는데 확실한지는 몰랐다. 어느새 식탁을 돌아와 몸을 밀착하며 입술을 부딪치는 백사현 때문이었다. 백사현에게 밀려 주춤 물러나는 범지훈의 다리에 넘어진 의자가 걸렸다. 쓰러지려는 범지훈의 허리를 휘감은 건 백사현이었다. 이 작은 체구에 이게 가능한 건지 커다란 덩치의 범지훈을 안고서도 무게에 못 이겨 함께 쓰러지는 게 아닌 범지훈을 천천히 바닥에 눕히며 그 위로 올라타는 백사현은 입술을 떼지 않았다. 등 뒤로 푹신한 카펫이 깔린 바닥이 부딪쳐 오며 범지훈은 숨이 막힌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까… 흐.’ 겨우 어깨를 밀어 틈을 벌릴라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통에 범지훈은 호흡이 딸렸다. 백사현의 어깨를 잡고 있던 범지훈의 손이 결국 옷을 그러쥐었다. 무슨 힘이…! 차마 뱉지 못한 소리는 목 안에서 먹혔다. 범지훈의 입 안을 꽉 채우고 휘젓는 백사현 때문이었다. 점막을 미끄러지듯 그리던 혀는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급하게 혀를 엉겨 왔다. 갑작스럽지만 한 단계 한 단계씩 차근차근 이어지던 범지훈의 키스와는 결이 달랐다. 간신히 버티던 고삐가 순식간에 끊어져 버린 듯 백사현은 막무가내였다. 그러면서도 절실해서 범지훈은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조금씩 숨이 가빠지는 범지훈에 정신없이 맛보던 백사현이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잠깐 입술을 떼었다. 두 입술 사이로 끈적하게 늘어지던 타액은 다시 범지훈의 입술을 급히 삼키며 사라졌다.

내려가는 손은 범지훈의 티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키스로 정신이 없는 범지훈의 허리를 쓸며 옆구리를 타고 올라간 손은 단단한 범지훈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범지훈의 온몸이 움찔거렸다.

“사현아, 잠… 윽.”

겨우 입술을 떨어뜨리고 말을 잇기가 무섭게 백사현은 범지훈의 목을 베어 물었다. 뱀한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따끔하면서도 화끈한 열감이 느껴졌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범지훈의 입술 새로 한숨 같은 숨이 터져 나왔다.

쵹. 베어 문 자리에 확인이라도 하듯 가볍게 입을 맞추는 백사현의 눈이 반짝였다. 자신의 위로 올라타고 있는 예쁜 미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범지훈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제대로 걸린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웃어요?”

“…이러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 먹힐 것 같아서.”

농담처럼 한 말인데 뚫어져라 바라보던 백사현이 빙긋 웃었다.

“형은 참 감이 좋아요.”

‘안 그래도 그럴 예정이었거든요.’ 뒤이어지는 말은 범지훈의 모골까지 송연하게 만들었다. 백사현 때문에 가슴까지 말려 올라간 옷 아래 나름대로 하얀 범지훈의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대체 어떻게 보이는 살마다 그렇게 잇자국과 멍 자국을 내놓나 했더니 정신이 있는 채로 하니까 알 수 있었다. 어깻죽지를 깨무는 백사현의 뒤통수를 감싸 쥔 채 범지훈은 떼어 낼 생각도 못 하고 넋이 나갔다. 아프긴 아픈데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자국을 내어 놓고 혀로 뭉근하게 살결을 쓰는데 등허리를 타고 찌르르 올라오는 소름엔 범지훈은 충격을 받았다. 상대에게 쾌감을 줬으면 줬지 받은 적은 없었는데 이게 대체 뭔가 싶었다.

완전히 말려 올라간 상의는 범지훈이 팔만 빼내면 머리 위로 손쉽게 벗어낼 정도로 이젠 있으나 마나 했다. 가느다랗고 작은 손이 드러난 범지훈의 단단한 몸을 만지는데 느낌이 더 묘했다. 이후에 범지훈의 허리 밑으로까지 손을 넣어 호랑이 문신이 있을 부근까지 어루만지던 손이 바지로 닿은 것도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범지훈마저 곧장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범지훈에게 다시 입을 맞추려 하는 백사현의 손은 바지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사현아!”

앞으로 움직이던 바지 속의 손이 불시에 잡힌 건 갑자기였다. 바지째로 백사현의 손을 잡은 채 범지훈은 떨리는 눈으로 백사현을 올려 보았다.

“우리, 여기…까지만 하면 안 될까?”

그리고 고개를 든 백사현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차갑게 굳었다.

“…네?”

이미 바지가 불룩할 만큼 세워 놓고는 그만하자니, 백사현도 이게 대체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을 거다.

***

“…그렇구나.”

커다란 쿠션을 품에 안은 채로 백사현이 말했다. 식탁을 뒤로하고 각자 멀찍이 떨어져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였다. 범지훈은 빨개진 귀로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니까, 한창 분위기 좋을 때에 범지훈이 백사현을 멈추게 한 건 이유가 있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도망가서 나도 그럴까 봐 무섭다는 거네요.”

“…미안해. 트라우마가 있었나 봐.”

“이해해요.”

백사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범지훈은 차마 고개를 들어 백사현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이유로 초를 쳤다는 것에 범지훈은 백사현에게 한없이 미안하기만 했다. 범호 캐피탈의 전화 상담원 아방수. 그러니까 이유는 그 사람 때문이었다.

최근 범지훈의 고백을 거절한 그 남자. 이미 연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치고는 지나칠 만큼 범지훈을 무서워했던 남자였다. 사실, 아직도 범지훈은 아방수가 왜 그렇게나 무서워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토끼 같은 아방수에게 적극 구애하던 예전의 범지훈이 당시 아방수에게 쏟은 정성은 말로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범지훈만 보면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던 아방수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범지훈은 노련하게 아주 살짝 열린 그 마음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고민이 있어 보이는 아방수와 함께 술을 마시며, 범지훈은 사석에서 아방수에게 말도 놓기로 했고 아방수는 훌쩍이며 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지금은 현 남자 친구가 된 전 불알친구에 대한 고민들을 말이다. 범지훈은 맹세코 그날의 고민이 그저 친구가 아니라 남자 친구가 될 친구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절대로 진지하게 조언해 주지 않았을 거다.

아무튼 문제는 그렇게 술을 마시고 범지훈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로, 아방수는 완전히 필름이 끊겨서 둘은 호텔로 향했다. 신발을 벗지도 않고 급하게 입을 맞추며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온 둘은 그제야 옷도 벗기 시작했는데 아방수는 순진한 얼굴과는 다르게 범지훈의 바지 버클을 제 손으로 직접 풀어헤치며 지퍼까지 내렸다. 그리고 속옷 속에서 퉁 튀어나온 것에는 모든 행동이 멈추고 한참을 범지훈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수 씨?’ 의아한 범지훈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범지훈은 그게 지금까지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너무하네요, 그 사람도. 형 걸 보고는 못 할 것 같다며 도망을 갔다니요.”

범지훈의 어깨가 더 움츠려졌다. 백사현에게 자세한 전후 사정을 설명하진 않았고, 그저 전에 만났던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다는 식으로 두루뭉술 설명했지만 백사현은 꽤나 열이 받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너무 커서 못할 것 같다며 도망을 가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범지훈은 쿠션으로 가리고 있는 자신의 아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걸 아방수와 같은 카테고리의 작고 예쁜 백사현이 봤다가는 어떻게 나올지 솔직히 가늠되지 않았다.

“…근데, 지훈이 형.”

작게 한숨을 내쉰 백사현이 쿠션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나는구나.”

“뭐가?”

“우리 처음 만났… 음, 아니에요. 나도 폐쇄 공포증이 있으니까 그 트라우마 충분히 이해해요.”

말을 하다 돌린 백사현이 쿠션을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형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게요. 굳이 오늘 안 해도 돼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근데 나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그대로 걸어가려는 백사현이 품에서 쿠션을 놓지 않는 것에 범지훈은 시선이 향했다. 보여 주기 부끄러울 수도 있겠구나 싶어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안함은 여전해서 범지훈은 백사현을 불렀다.

“네?”

“괜찮으면 내가 만져 주며 뺄 수는 있는데, 그걸로 될까?”

그 순간, 조금 긴 정적이 흘렀다.

“…지훈이 형.”

시선을 맞추는 범지훈에게 더할 나위 없이 예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백사현이 말했다.

“그럼 큰일 나요. 형이나 나나.”

이쪽 욕실을 쓰면 된다고 알려 준 백사현 덕에 범지훈은 쉽게 뒤처리를 할 수 있었다. 문밖에 예쁘기 그지없는 백사현을 두고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현타가 왔지만, 속옷을 내리며 범지훈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길 정말 잘했다. 이걸 백사현이 봤다면 도망은 안 가더라도 굉장히 부담스러워했을지도 몰랐다.

전 애인들은 좋아했었다지만, 백사현처럼 하얗고 순한 느낌의 미인은 또 달랐다. 범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좋아하는 사람과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걱정마저 들었다.

백사현이 건네준 칫솔과 새로 꺼내 준 다른 옷으로 양치까지 하고 한 번 더 샤워를 한 후 범지훈은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원래는 뒤처리 후, 양치만 하려고 했는데 역시 한 번 더 샤워를 한 게 나은 선택이었다. 새로 꺼내 준 옷 사이 새 속옷까지 끼어 있는 것엔 범지훈의 귀가 조금 발갛게 달아오르긴 했다. 안 그래도 입고 있던 속옷이 조금 젖어 곤란한 참이었다.

처음 꺼내 준 옷은 흰 반팔 티에, 기장이 짧은 검은 트레이닝 바지였는데 두 번째 옷은 위아래로 긴 검은 옷이었다. 범지훈에게도 맞을 정도로 박시한 후드 티와 발목 아래로 내려오는 긴 트레이닝 바지까지. 범지훈은 이걸 입은 백사현을 떠올렸다. 분명히 옷에 푹 파묻힌 느낌으로 지나치게 크고 길 것 같은데 이게 대체 누구 옷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어느새 작은 질투심이 범지훈의 마음 한쪽에 불쑥 솟아올랐다.

그러다 생각은 와인을 먹고 난 뒤 치우지도 않은 식탁들에 닿았다. 서둘러 다이닝 룸으로 건너갔지만, 한발 빠르게 백사현은 정리를 마친 뒤였다. 깨끗이 씻은 잔을 마지막으로 찬장에 넣어두던 백사현이 범지훈을 발견했다.

“다 씻었어요?”

드라이기로 말렸다지만 아직 물기가 남은 범지훈의 머리카락을 보며 백사현이 물었다.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되게 잘 어울리네요, 형.”

백사현의 시선이 옷에 가 있는 걸 확인한 범지훈은 소매를 들어 올렸다. 크게 입어서 그런지 범지훈의 손등까지 가릴 만큼 커다란 후드 티는 평소 범지훈이 입던 스타일은 아니었다. 쑥스러움에 소매만 만지작거리던 범지훈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자연스레 물었다.

“그런데 이 옷, 누구 거지?”

“아. 길이 괜찮죠? 전에 집들이했었을 때, 멤버들이 놀러 와서 자고 갔었는데 그때 놓고 갔어요.”

“아까 내가 입었던 옷도 멤버들 건가 봐. 이루나 씨 건가?”

이루나 정도라면 그 정도 길이도 얼추 맞을 것 같고 옷 크기도 적당할 것 같아 물은 말이었다.

“아뇨, 제 옷이에요.”

하지만 이어지는 답엔 범지훈은 멍하니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헐렁한 잠옷을 입고 있는 백사현은 가녀려 보이면 보였지 범지훈에게 맞았던 옷을 입을 만한 체구는 아니었다.

“가지고 있던 것 중에 제일 긴 바지로 꺼냈는데도 역시 형한테는 좀 짧았죠?”

길이가 문제가 아니라… 범지훈은 그때야 백사현의 몸을 자세히 훑었다. ‘백사현 노출 1도 안해도 몸 좋은 거 다 안다.’ 문득 사위민이 보낸 링크에서 봤던 글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범지훈은 그런 걸 봤음에도 백사현이 저보다 작으니 체구 또한 당연히 작고 여릴 거라고 여태껏 단정 짓고 있었다. 폐쇄 공포증이 있다는 걸 처음 알고 백사현을 안정시키려 품에 안았을 때에도 품 안에 다 차지 못하는 넓은 어깨라고 생각했으면서 그걸 금세 잊었다.

범지훈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때야 떠오른 건 백사현의 뒷모습이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과 투명할 만큼 흰 피부를 가진 백사현. 등 아래에 똬리를 튼 뱀 문신을 새긴 채 반라로 누워 있던 뒷모습. 여사빈과 착각을 할 만도 했다. 범지훈과 별로 체격 차이가 나지 않는 여사빈과 착각을 할 수 있을 만큼 백사현은 넓은 어깨와 탄탄한 등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지훈이 형?”

백사현의 부름에 범지훈은 정신을 차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물어 오는 말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짧게 대꾸했지만 범지훈은 새롭게 느껴지는 백사현이 조금은 어색해졌다.

“졸리지 않아요? 그만 자도 돼요.”

하지만 예쁘게 웃어 보이는 얼굴엔 범지훈의 심장이 사르르 녹았다. 어색은 둘째 치고 저절로 끌어 올려지려는 입꼬리를 수습하느라 범지훈은 무진 애를 써야 했다.

***

미동 한 점 없이 죽은 듯 누워 있는 남자는 살아 있다는 걸 알려 주듯 가슴만 규칙적으로 들썩였다. 깊게 잠들어 있는 범지훈의 옆자리에 누운 채 백사현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까부터 범지훈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던 백사현의 손가락은 이내 머리카락에 가려진 범지훈의 이마를 지나 코끝, 입술에 다다라서야 멈췄다.

“…형.”

부르는 목소리에도 대답 없는 범지훈에 백사현의 손가락이 범지훈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쓸었다.

“내 옆에서 이렇게 마음 놓고 자면 어떡해요? 위험하게.”

간지러웠는지 잠깐 얼굴을 찌푸리다 다시 잠에 빠진 범지훈을 보며 백사현은 작게 웃었다. 귀여워. 범지훈이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를 혼잣말을 속살거리며 백사현은 옷 소매에 반쯤 가려진 범지훈의 손을 가져왔다. 일부러 범지훈에게 살색이 덜 보이도록 긴 옷을 찾아 입혔는데도 소매로 보이는 범지훈의 하얀 살색이 백사현을 자극했다. 또 잇자국을 남기는 대신 손가락 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걸로 백사현은 간신히 합의했다. 그러면서 내밀어진 혀는 범지훈의 손가락을 핥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포근한 바디 워시 향이 살갗을 통해 느껴졌다. 자신과 같은 냄새가 나는 것에 백사현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지금 옆자리에 함께 누워 있는 이가 머릿속으로 어떤 난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잠든 범지훈은 알고 있을까 의문이었다. 너무 끈적하고 짙은 생각이라 혹시라도 범지훈이 알면 기겁을 하며 도망갈지도 몰랐다. 백사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럼 당장 잡아 와 도망칠 생각도 못 하게 묶어 두고 나만 아는 곳에 가둬 놔야 하나. 생각했지만 범지훈이 싫어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우는 것도 예쁘지만 웃는 게 더 예쁘니까. 조심스럽게 범지훈의 손을 내려놓고 이불을 더 올려 덮어 주며 백사현은 인내하기로 했다. 백사현의 손 아래에서 짙은 청록색의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범지훈이 처음 눈을 뜨며 발견한 이불의 색과 똑같은 색채였다. 심술궂은 백사현은 범지훈과 처음으로 잤던 그 침대에서 또 아무렇지 않게 범지훈을 재우며 소리 없이 웃었다.

***

백사현에게 주변 사람이란 카테고리는 ‘접촉이 가능한 사람’과 ‘그 외 사람들’로 나뉘었다. 물론 그 외 사람들 속에서도 또 나뉘긴 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큰 카테고리로는 백사현에게 접촉이 가능한 사람과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 접촉이 가능한 사람으로는 모친이 있었고 팬이 있었다. 그러니까 백사현에게 소중한 사람도 가족인 모친과 팬뿐이었다. 그 외에는 소중한지는 모르겠고 필요했다.

그 외 사람들에게는 백사현은 먼저 접촉을 하면 했지 자신을 만지려 하면 기분부터 나빠졌다. 오래 알고 지낸 매니저 중에서는 그것에 섭섭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멤버들은 아예 적응이 돼서 이젠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개중엔 짓궂은 성미의 멤버들도 있어 부득불 접촉하려 했다. 그럼 백사현은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그만큼 남과의 접촉은 꺼려졌다. 사정을 알 리 없는 방송국 사람들이나 일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동료 연예인, 스태프들과의 접촉은 백사현이 인내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니만큼 아무런 악감정은 없었지만, 그때마다 더러워지는 기분을 어쩔 수는 없었다. 백사현은 그것을 노래 연습으로 풀곤 했다. 실력은 자연히 더 늘어 갔고 팬들은 기뻐했다. 하지만 채 풀리지 않는 것도 있었다.

연애를 할 생각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도 없고 팬들의 사랑만으로도 충족되었다. 사실,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감정놀음이 꽤 귀찮은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몸만 맞대는 건 달랐다. 백사현과 몸을 맞대는 사람들은 전부 하룻밤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족속들이었다. 그러니 백사현에게 감정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손을 묶고 하는 색다른 플레이도 꽤나 좋아했다. 그러니 더더욱 백사현은 연애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그럴 때, 범지훈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이었다.

그러니까, 그 날은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백사현은 이날만 되면 평소보다 더 예민해졌다. 물론 겉으로 전혀 드러내질 않기에 예민한지 어떤지는 백사현 외엔 아무도 몰랐다. 의외로 비즈니스적으로 철저한 백사현은 동료 연예인이나 방송사 제작진들에겐 미담이 넘치는 연예인이었다. 다들 좋게 보니 백사현 아버지의 기일이란 소식에 녹화 시간을 조정하는 배려까지 해 주어서 백사현은 이번 연도도 아버지의 기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예쁘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백사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부러 남들의 눈에 띄어도 쉬쉬하도록 게이들이 이용한다는 와인 바를 찾았지만, 옆자리의 남자는 조용히 해 줄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백사현은 이럴 줄 알았으면 바 테이블이 아닌 개인석에 앉을 걸 후회했다.

[진짜 예뻐.]

지금 자리를 옮길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마저 털어 넣고 백사현은 자리를 옮기기 전, 헛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들었다.

[와, 진짜 미인이다.]

백사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깜짝 놀란 남자의 눈이 커졌다. 누아르 영화 속 잘생긴 악역 배우 느낌의 날카로운 미남은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는 솔직함을 얼굴에 담았다. 예쁜 걸 봐서 기분이 좋았는지 표정 또한 확연히 풀어져 있었다. 그것이 백사현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남자의 얼굴이 백사현의 취향과도 맞아떨어졌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백사현은 남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 알아?]

먼저 말을 툭툭 까 대는데 백사현 또한 말이 짧아지는 거야 당연했다. 멍하니 바라보는 남자와 시선을 맞추며 백사현은 팬들이 죽고 못 산다는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언제 봤다고 말을 까, 씨발.]

팬들이 부르는 백사현의 별명은 베이글남, 공주 등등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암암리에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백표독. 백사현의 성씨를 딴 표독스러운 성깔을 의미하는 것 같겠지만 아니었다. 흰 백(白)+표독함. 하얀 표독함이라는 뜻으로 하얗게 웃는 얼굴로 입으로는 사나운 독설을 뱉어서였다. 내 팬들에게는 다정하지만 멤버들 및 남에게는 백표독 기질이 나오는 백사현을 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너그럽게 넘겼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1년 중 백사현이 가장 예민해지는 날이었다. 백사현의 예쁜 얼굴과 그렇지 못한 말에 남자는 잘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백사현은 여전히 예쁘게 웃으며 남자가 반응하길 기다렸다. 남자의 얼굴이 취향인 건 이 때문이었다. 이 정도 이야기하면 이렇게 생긴 놈들은 대개 얼굴값을 한다고 화를 내거나 무게를 잡기 일쑤였다. 그것은 자신보다 작아 보이는 몸집에 예쁜 얼굴을 가진 백사현이 만만하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럼 백사현은 이런 남자들을 짓밟는 걸 즐겼다. 말로든, 몸으로든.

하지만 남자는 백사현이 예상하는 범주를 벗어난 행동을 했다.

[…죄송합니다.]

그대로 백사현에게 정중하게 고개까지 숙여 보이는데 답지 않게 당황한 건 백사현이었다. 평정을 잃어 웃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얼굴이 예뻐서 혼잣말한 건데 반말로 들렸던 모양입니다. 반말할 생각은 절대 없었으니 기분 상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남자의 어투는 이상했다. 처음엔 본인의 행동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 같았는데, 마지막 말은 꼭 백사현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이상한 말투에 백사현의 표정 또한 이상해졌다.

[…내가 예뻐?]

이쯤에서 그만두고 남자 옆을 피해 자리를 옮겨도 됐을 텐데 백사현은 다시 물었다. 여전히 반말인 건 그냥 백사현의 고집이었다.

[네, 예뻐요. 진짜 제 취향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꽤 솔직했다. 백사현은 남자 쪽을 보며 테이블에 걸친 팔에 턱을 괴었다. 흘긋 본 남자의 와인 잔 옆으로는 비어 가는 와인병이 있었다. 병이 비면 직원이 바로바로 치워가기에 남자가 얼마나 마셨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백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취한 건가? 제정신인가? 목도 얼굴도 그다지 빨갛다고 느껴지지 않는 남자의 하얀 살갗을 찬찬히 훑어 가던 백사현의 눈에 남자의 귀가 들어왔다. 취했네.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남자의 귀는 아주 새빨갰다. 백사현의 입술이 비죽 치켜 올라갔다.

[나 같은 얼굴 좋아하는구나. 그쪽 애인도 그렇겠네.]

[…애인 없습니다.]

이게 웬 떡이지. 백사현의 눈이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저 정도 얼굴에 걸치고 있는 옷이나 손목의 시계나 명품이 아닌 게 없어서 애인이든 장난감이든 한둘쯤은 옆에 꿰고 있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남자는 백사현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딱 잘라서 애인이 없다고 할 필요까진 없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백사현은 앞에선 신사인 척 뒤로는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었던 뱀 같은 놈들도 몇 번 겪은 적이 있었다. 남자가 그런 부류인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왜 애인이 없는데, 그 얼굴에?]

백사현의 물음에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남은 와인병을 혼자 기울여 잔을 채운 뒤 한 번에 들이켰다. 분명히 향 좋은 와인인데 남자는 꼭 독한 양주를 들이켠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이 얼굴이 무섭다고 피합니다.]

백사현은 남자가 한 말을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무섭다고?]

[네.]

[호불호 갈릴 것 같긴 한데 무섭진 않은데? 잘생겼으면 모를까.]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얼굴이 불호인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백사현은 턱을 쓸었다.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며 무서운 점을 찾으려 해도 무섭지가 않으니 찾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죽은 고양이 같은 느낌이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는 검은 고양이. 툭툭 건드리면 꼬리 끝만 살짝씩 움직이며 기운 없이 반응하는 남자는 꼭 그런 고양이 같았다.

처음엔 악당 같은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알 만했다. 울적해하는 남자는 공격성이라곤 전혀 없었다.

[칵테일 좋아해?]

남자에게 물어보면서도 곧장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르는 백사현의 머릿속에는 남자랑 꼭 어울릴법한 몇 개의 칵테일이 떠올랐다. 백사현은 남자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러니 술을 사는 대신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오늘로서 차인 지 열여섯 번째입니다.]

길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핵심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는 사람 보는 눈이 없는 호구 얼빠였다. 얼마나 대단한 미인들이어서 좋아하게 되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를 찬 열여섯 명의 미인이 남자의 얼굴을 무섭다고 한 건 아마 핑계였을 거다. 첫인상은 그럴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잠깐 만나 얘기를 해 봐도 말랑해 빠진 게 빤히 보이는데 계속 무서울 리가 없었다. 백사현은 한심한 것을 보는 얼굴을 했다. 얼빠에다 호구에다 눈치도 없는 것 같고. 백사현은 속내와 전혀 다른 남자의 겉껍질이 아까워졌다.

훌쩍. 코를 먹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흥미가 떨어진 얼굴로 비어 가는 칵테일 잔만 만지던 백사현의 시선이 빠르게 남자를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였지만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게 뭔지는 백사현이 눈으로 보고 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울어?]

[…안, 웁니다.]

이미 젖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해 봤자였다. 백사현의 손이 제 것이라도 만지는 양 당연하게 남자의 턱을 쥐고 자신 쪽으로 돌려놨다. 그사이 이미 떨어지고 있는 눈물은 턱에 고여 백사현의 손까지 적시고 있었다.

[생각보다… 볼 만하네.]

꽤 오래 남자의 얼굴을 감상하다 백사현은 툭 내뱉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가벼운 어투와는 다르게 남자의 젖은 뺨을 훔치는 손가락은 꽤 다정했다. 한 잔 더 마실래? 남자에게 물어보는 것과 동시에 백사현은 또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블랙 러시안. 남자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칵테일이었다. 그리고 도수 또한 높아 금세 훅 가게 하는 걸로도 적당했다.

***

풀썩. 침대 위로 남자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백사현은 그리 힘들지도 않으면서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사실 팔다리가 길어 데려오는데 좀 걸리적거리긴 했다. 그렇다고 자를 수도 없고. 농담처럼 생각하던 백사현은 남자를 여기로 데려온 게 과연 잘한 일인가 또 고민했다.

아버지의 기일이라 예민함도 최고치였고,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나니 운전도 하고 싶지 않았고 대리를 부르기도 싫었다. 그래서 혼자서 술을 마시러 간 곳 또한 집이랑 꽤 가까운 곳이었다. 그 때문에 차도 가져오지 않았고 근처에는 위생 상태가 어떨지 모를 모텔들뿐이니 생각나는 건 자신의 집이었다. 그 가까운 거리를 택시를 부르기도 애매해서 완전히 뻗은 남자를 덜컥 업고 왔는데 막상 데려오니 백사현은 갈등을 했다. 지금까지 하룻밤 상대를 집으로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콘돔이 있었던가?’ 생각하던 백사현은 남자를 침대에 버려 둔 채 집을 뒤졌다. 다행히 며칠 전, 호텔에 갈 때 입었던 외투 주머니에서 쓰다 남은 콘돔 박스를 발견했다. 콘돔을 박스째로 들고 다시 돌아온 침실에서 남자는 어느새 소리도 없이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채로 세상 조용하게 잠든 남자를 보며 백사현은 남자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자? 일어나 봐. 이대로 자려고?]

[……]

[…진짜 자네.]

결국 어이없이 말을 끝맺으며 백사현은 한참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손 묶을 필요는 없어서 편하겠다.]

작게 속삭이던 백사현이 이내 남자가 누운 침대 위로 무릎을 세워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남자에게서 같이 자자는 이야기를 들었던가 생각했지만 잠시였다.

귀찮은 애무 같은 건 생략했다. 백사현은 우선 천장을 보고 누운 남자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곤 남자의 등 뒤로 앉아 힘없이 늘어지는 몸을 품에 안았다. 이런 자세가 만지기엔 편해서였다. 버클을 푼 남자의 바지를 속옷과 동시에 대충 내린 백사현은 축 늘어져 있던 성기를 쥐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그랬지만 손아귀에 잡히는 남자의 크기는 생각 외였다. 백사현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겉껍질 하나는 정말이지 완벽한 남자였다. 성격까지 겉이랑 똑같았으면 무너뜨리는 맛이 있었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백사현은 제 작은 손아귀에 넘칠 만큼 차는 성기를 쥐고 훑었다. 같은 것을 달고 있기에 어딜 만지면 세우고 어딜 건드리면 흥분을 할지는 백사현도 잘 알고 있었다. 반응이 없던 남자도 슬슬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으응. 작게 앓는 소리를 흘리는 남자가 몸을 꿈틀거렸다. 반쯤 일어선 성기를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올리는 백사현에 조금씩 크기가 키워졌다. 선단에는 어느덧 맑은 액체가 맺히다가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가… 흐.]

그러고 있으니 아무리 술에 떡이 되어도 느낌이 오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완전히 깨어나기 전에 허리가 먼저 움찔했다. 남자의 등이 제 가슴과 배에 맞닿아진 백사현이야 그 느낌이 더 선명했다. 백사현의 새하얀 손에 질척한 정액이 쏟아졌다. 꽤 오랫동안 혼자 자위도 하지 않은 건지 남자의 정액은 농도가 짙었다.

[어디, 여기…]

술에 완전히 절어진 남자는 초점을 잃은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인이 뭐 때문에 깨어났는지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젖은 손을 남자의 성기 아래로 더 내리며 백사현은 바보 같은 남자의 어깨를 깨물었다. 온몸을 흠칫한 남자가 뒤를 돌아 백사현을 확인한 것과 아무렇게나 벌려진 다리 사이 깊숙한 곳으로 백사현의 손이 미끄러진 건 동시였다. 전기가 흐른 것처럼 파드닥하던 남자가 순식간에 백사현을 밀치곤 침대 끝으로 도망갔다.

[…아야.]

사실 별로 아프지도 않았지만 백사현은 엄살을 부렸다. 남자에게 밀쳐진 어깨를 움켜잡으며 아픈 체를 하니 순진해 빠진 남자는 머뭇거렸다. ‘괜찮….’ 말을 이으며 백사현에게 손을 뻗으려던 남자가 걸리적대는 아래에 그제야 시선을 내렸다. 백사현에겐 짧았지만, 남자에겐 긴 정적이 일었다. 일어나 보니 바지랑 속옷이 한꺼번에 내려간 채 성기를 드러내 놓고 있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터였다.

[그거…]

백사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서둘러 바지를 끌어 올리려던 남자가 중심을 잃고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나는 것에 미간을 찌푸린 백사현은 제가 더 아픈 얼굴을 했다. 바닥이 대리석이었으니 아마 어마어마하게 아플 터였다.

[괜찮아?]

침대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백사현의 눈에 어느새 대충 바지를 끌어 올리고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백사현과 눈이 마주치고 흠칫한 남자는 앉은 채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도망가네.]

강 건너 불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린 백사현이 비틀거리며 침실을 뛰어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숨바꼭질이라도 하잔 건가? 제멋대로 그렇게 해석한 백사현은 속으로 10초 정도를 센 뒤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쓸데없이 넓은 집이라 현관을 찾는데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방금까지 했던 생각을 백사현은 철회했다. 귀신같이 찾아낸 현관문을 멀거니 보며 서 있던 남자는 다가오는 기척에 뒤를 돌았고 백사현을 발견했다. 당황으로 얼룩진 남자의 표정을 보며 백사현은 기분이 찝찝해졌다. 누가 보면 강간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상대의 동의 없이 멋대로 한 발을 빼게 한 주제에 백사현은 뻔뻔하게 생각했다. 구멍에도 손가락 끝만 살짝 들어갔는데. 아쉽게 입맛을 다신 백사현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예쁜 미소를 지었다.

[왜 하다 말고 도망가?]

[…네?]

남자는 멍청할 만큼 얼빠진 얼굴을 했다. 그것도 생각보다 귀여워서 백사현은 더욱 예쁘게 웃었다.

[아까 좋았잖아. 너도 하자고 해 놓고서는 왜 도망가는 건데?]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능숙하게 뱉어 내는 백사현의 거짓말에 남자는 속았다. 아마도 남자는 그 잠깐 사이에 본인의 필름이 끊겼다고 생각할 터였다. ‘이리 와.’ 여전히 예쁜 웃음을 거두지 않으며 백사현은 손을 뻗었다. ‘마저 해야지.’ 나긋하게 속삭이는 말에도 남자는 갈등하는 얼굴이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대로 놓치나 싶어 백사현 또한 조금씩 초조해지려는 찰나였다.

[…죄송합니다.]

뜬금없이 들려오는 사과에 백사현의 미소가 사라졌다.

[제가… 술기운에 실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실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보며 백사현은 헛웃음을 뱉었다. 뭘 어떤 식으로 생각하면 피의자와 피해자가 완전히 뒤바뀐 걸로 착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백사현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면 가만히 있어. 내가 아직 식은 게 아니라서.]

착한 아이처럼 가만히 있어 주는 남자의 입술에 백사현은 방해 없이 다가가 입을 맞췄다.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무에게나 막 입 맞추진 않았는데.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남자의 입술을 머금은 백사현의 고개가 더 깊숙이 들어왔다. 스르르 내려가는 백사현의 손이 남자의 셔츠 단추를 끌렀다. 문득 이 남자의 이름이 알고 싶어졌다.

달래기 위한 시늉으로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은 생각보다 백사현을 몰입하게 했다. 여린 점막 곳곳에 거침없이 문질러지는 혀는 남자가 되레 백사현을 붙잡게 하였다. 등 뒤를 가로막은 서늘한 현관문과 자신의 앞에서 밀착해 오는 백사현 사이에서 남자가 붙잡을 거라곤 백사현뿐이었으니 백사현의 하얀 팔목을 남자는 구명줄처럼 힘주어 쥐었다. 그럼에도 감겨 오는 혀는 멈추지 않아서 끝내 남자는 백사현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힘에 그제야 못 이긴 척 떨어진 백사현은 상기된 얼굴을 남자에게서 떼어 냈다.

백사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는 숨을 헐떡였다. 얼마나 숨을 참은 건지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 눈물까지 고여 있는 게 보였다. 키스가 처음인가. 왜 숨을 못 쉬지? 백사현은 의아해졌다. 자신이 숨 쉴 틈도 없이 남자를 몰아붙인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의문은 잠깐, 백사현은 갈증을 느꼈다. 다시 남자에게로 얼굴을 가져갔으나 백사현을 밀어내며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싫어?]

그리고 상처받은 얼굴로 백사현은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 연기였다.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예쁜 눈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남자에게 못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니요, 싫지 않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던 남자는 단칼에 대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긴 했지만, 호흡이 가빠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피해? 나는 계속하고 싶은데.]

순진무구한 척 백사현이 두 눈을 깜빡였다. 그것에 남자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백사현은 초조해졌다.

[…안, 믿겨서요.]

[응?]

[그쪽처럼 예쁜 사람이 저한테 이러는 게… 솔직히, 안 믿깁니다.]

끝내 시선을 내리깔며 작게 말을 끝맺는데 백사현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숨을 못 쉬어 얼굴이 빨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귀가 점점 더 붉어졌다. 그때서야 백사현은 남자가 부끄럼을 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를 깨달으니 여러 가지가 더 눈에 들어왔다. 먼저 백사현의 팔목을 아직까지 쥐고 있는 남자. 남자의 커다란 손 때문인지 그 손아귀에 알맞게 들어오는 덕에 대비하여 훨씬 가녀려 보이는 자신의 하얀 팔을 백사현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언제부터 자신을 만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불쾌해하며 떼어 내야 정상인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불쾌한가? 잠깐 생각은 했지만, 생각만큼 불쾌하지도 않았다. 왜 기분이 더럽지가 않지? 의문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가 먼저 접촉을 했다는 그 사실보다 백사현은 남자의 얼굴에 서둘러 시선을 주었다. 지금은 이딴 팔보다 남자가 더 급했다.

[지금부터 믿으면 돼. 난 너한테 계속 이러고 싶거든.]

빠르게 대답을 쏟아 내며 백사현은 다시 남자에게 얼굴을 가져갔다. 이번엔 백사현의 어깨를 잡고 남자가 멈춰 세웠다. ‘왜?’ 상냥하게 물어보면서도 백사현은 갈증이 이는 것 같았다. 혀는 자꾸만 입술을 핥았다.

[근데… 숨은, 쉴 수 있게 부탁드립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는 생각보다 밀고 당기기를 잘했다. 일단 백사현을 안달 내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보통이 아니었다. 백사현은 인정했다. 그러니까 빨리.

[노력은 해 볼게. 입 벌려 볼래?]

입이나 벌리고 하게 해 줬으면 했다.

< 맹수의 사랑법 > 2권에서 계속

[우리깜디] 맹수의 사랑법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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