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맹수의 사랑법-4화 (4/9)

3. pit-a-pat (2)

로맨스 영화를 보면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한 두 남녀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급하게 입술을 맞대며 서로의 옷을 하나둘씩 벗기곤 침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초대로 영화 시사회에 종종 얼굴을 비쳤던 백사현은 뻔한 그 장면들을 보며 지루함을 느꼈다. 클리셰적이기도 했지만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저렇게 온몸을 더듬게 내버려 둔다고? 뭐가 좋아서 입술을 빨며 떼질 않는 거지? 아주 뜯어 먹겠네. 이해가 가지 않으니 몰입도 되지 않았고 백사현도 별로 몰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그 뻔한 장면들을 지금 백사현이 하고 있었다. 남자의 뒤통수를 붙잡은 백사현과 남자의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 백사현은 한 손으로 단추를 모두 푼 남자의 셔츠를 벗기기 시작했다. 찢어져도 상관없다는 듯 그것을 성가신 듯이 벗겨 떨어뜨리곤 엉성하게 채워져 있던 남자의 하의 버클까지 풀어 헤쳤다. 그 모든 게 물 흐르듯 이어지는데도 남자는 백사현과 입을 맞추기에만 급급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지퍼는 닫히지도 않은 상태였으니 그 사이로 손을 넣은 백사현은 속옷째 남자의 것을 쥐었다.

백사현의 입 안에서 당황한 남자의 신음이 엉켜 들었다. 백사현의 손이 축축한 천에 감싸인 성기의 선단을 스쳤다. 예상 못 했는지 남자의 허리가 움찔했다.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백사현의 눈매가 만족스러운 듯 반달로 휘어졌다. 아까 한번 빼 놨음에도 남자의 성기는 반쯤 일어서 있었다. 이유는 아마도 백사현 때문일 터였다. 사실, 남자 때문에 백사현 또한 아래에 열기가 몰렸다. 남자에게서 아쉽게 얼굴을 떼어 내고 백사현은 웃었다.

[나만 안달 내는 것 같아. 내 옷도 벗겨 줘.]

머뭇거리던 ‘남자는 그래도 됩니까…?’라며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껏 나쁜 짓은 모두 백사현이 했는데 꼭 백사현이 피해자라도 되는 듯이 남자의 태도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그에 백사현도 콩알만큼 있던 양심이 찔리기는 했다. ‘그럼.’ 부드럽게 대답하며 백사현은 남자에게 조금 더 몸을 밀착했다.

[더 거칠어도 상관없어.]

생각보다 능숙하게 백사현의 옷을 풀어 헤치는 남자에 백사현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생리적인 거부감이 느껴져야 정상이었는데 옷을 벗기는 내내 살갗에 닿는 남자의 체온에도 불쾌함이 들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손을 묶고 하는 색다른 플레이는 어떠냐며 세 치 혀로 상대를 꼬여 내어 입맛대로 했겠지만 별로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거칠게 해도 상관없다는 아량을 베풀었는데도 남자의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말아 올린 백사현의 상의를 완전히 벗겨 내고 바지의 버클에 손을 댔다가 머뭇한 남자는 이내 백사현과 눈을 맞췄다.

[…나머지는 침대에서 마저 하면 어떻습니까?]

남자는 끝까지 신사다웠다. 침대에 다다라서야 백사현을 먼저 부드럽게 눕히곤 바지를 마저 내리던 남자는 드러난 것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했다. 속옷에 가려져 있었지만, 존재감을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침대에 한쪽 무릎만 올라간 채 굳어 버린 남자에 백사현은 몸을 일으켜 남자의 양 뺨을 잡았다. 그리고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새 부리로 모이를 쪼듯이 쪽쪽쪽 사랑스럽게. 남자는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백사현은 남자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뒤집어 눕혀 버렸다. 킹사이즈보다 조금 더 큰 침대에 맥없이 쓰러진 남자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흐트러졌다. 백사현은 그것조차 마음에 들었다. 허벅지에서 걸리적대는 바지를 벗어 휙 던져 버리며 백사현은 남자의 위로 올라탔다.

[이름이 뭐야?]

[…네?]

꼭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흐리멍덩해진 남자의 눈이 백사현을 올려다보았다. 이름. 다시 재촉하는 백사현은 고개를 숙여 남자의 목덜미를 씹었다. 아. 짧게 신음하는 남자의 반응이 한 박자 느렸다.

[그쪽은 이름이….]

질문에 답은 하지 않고 되묻는 남자에 고개를 든 백사현은 잠깐 얼이 빠졌다가 짧게 웃었다. 나름 인기 연예인인데 못 알아본다니. 더 열심히 활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백사현.]

[…백, 사현.]

따라 중얼거리는 남자의 시선이 백사현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내 얼굴이 취향이라고 했었나? 다시 고개를 숙여 백사현은 남자에게 입 맞췄다. 잠시 잊었던 갈증이 다시 느껴졌다. 남자의 온몸 곳곳을 씹어 먹으면 이 갈증이 나아질까?

흐읏. 짧은 신음이 머리 위에서 터졌다. 단단한 가슴에 이를 박으며 백사현은 남자의 성기를 쥔 손을 움직였다. 남자는 백사현이 주는 자극들에 무너져 애꿎은 시트만 구겨 쥐었다. 끝내는 참지 못하고 다른 한 손이 백사현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결 좋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커다란 손아귀에서 사정없이 흐트러졌다. 와중에도 말랑한 성정은 어디 가지 않아서 세게 당기지도 않아 백사현은 남자의 흰 살갗 위에서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팽팽하게 솟아 있던 성기 끝에서 끝내 왈칵 정액이 쏟아졌다. 남자의 성기를 움켜쥔 백사현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우윳빛 정액이 흘러내렸다. 남자가 가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젖은 이마에 까만 머리카락들이 달라붙어 퍽 예뻐 보이기도 했다.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며 백사현은 예쁘게 미소 지었다.

[미안, 집에 러브젤 같은 게 없어.]

늘어져 있던 남자는 그 말에 놀라 백사현을 올려 보았다.

[그래서 이걸 러브젤 대용으로 삼아 볼까 하는데.]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질척한 액체에 시선을 던지며 백사현의 눈매가 휘어졌다. 덥석 백사현의 손목을 움켜쥔 건 남자였다. ‘안 됩니다.’ 남자의 말치고는 단호하게 뱉어지는 거부에 백사현의 눈에 의문이 들어찼다.

[배앓이, 할 겁니다.]

[…아. 내가 그럴까 봐 걱정해 주는 거야?]

주어가 없으니 헷갈릴 만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에 백사현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해 주니까 기분 되게 좋다. 백사현이 뭐 때문에 웃는지 모르는 남자는 여전히 백사현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깨끗하게 긁어 처리해 주지 않으면 속에 남아서 아플 거예요.]

[그럼 깨끗하게 뒤처리만 하면 되는 거잖아?]

백사현의 논리에 남자는 반박하지 못했다. 입술만 달싹이며 할 말을 고르는 남자에 백사현은 살풋 눈을 휘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나 대신 배앓이 해 줄래?]

찔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갔다. 번들거리는 젖은 손가락을 세 개째 삼킨 입구가 움찔 조여들었다. 손가락 잘리겠네. 힘 풀어, 응? 다정한 어투를 가장한 채 남자를 달래며 백사현은 침대에 얼굴만 파묻고 있는 남자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덮인 귀 끝은 이미 빨갛게 익어 있었다. 별 기대 없이 그냥 해 본 소리에 정말 그렇게 순순히 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물론 아니라고 해도 어떻게든 꼬여 냈겠지만, 백사현이 배앓이를 하는 것보다 남자는 이게 훨씬 나은 모양이었다. 착한 건지 바보인 건지. 그런데 그 점이 너무 귀여워서 백사현은 커다란 호랑이가 자리 잡은 남자의 등에 키스했다. 허리부터 천천히 위로 입술을 옮기며 어떨 때에는 잇자국을 내기도 했다. 그사이에도 남자의 좁은 내부에서 착실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내벽 곳곳을 눌렀다. 바르르 떨리는 남자의 어깨에 입술을 붙이며 백사현의 손가락이 어느 한 곳에 닿은 순간 남자의 온몸이 소스라치듯 움직였다.

한 번 더 꾹 눌러 보는 것에 시트를 움켜쥔 남자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흣. 끝내 침대에 파묻혀 억눌린 신음이 흘렀다. 흠칫흠칫 허리를 떠는 남자에 손을 내린 백사현이 침대에 짓눌린 채로도 뻣뻣해진 남자의 성기를 찾았다. 흐윽. 결국 남자는 팔목으로 지탱하며 허리를 세웠다. 바들바들 떠는 뒷모습이 지금 어떤지 알고는 있을는지. 무릎을 세운 남자의 다리 사이로 뻣뻣해지기 시작하는 성기가 덜렁이는 게 보였다. 부러 꾹꾹 내부의 그곳만을 집중적으로 누르는 백사현의 두 눈이 어둡게 번들거렸다. 사실, 백사현의 인내심도 한계점에 다다라 있었다.

[못 참겠어, 미안.]

짧은 사과와 함께 내부를 지독하게 눌러 대던 손가락들이 빠져나갔다. 그때야 남자는 조금이나마 몸에 힘을 빼고 천천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방금 백사현이 뭐라고 한 건지는 남자에겐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해가 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하얀 두 손이 남자의 엉덩이를 잡아 양쪽으로 한껏 벌렸다. 서늘한 공기가 새빨간 속살 사이로 새어 들어 가는 것에 남자가 반응할 새도 없이 단단한 무언가가 처박혔다. 처박혔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조여드는 안도 안이었지만 남자는 엄청난 굵기에 헉하며 숨을 멈췄다. 벌어진 남자의 입 사이로는 이내 꺽꺽대는 소리만 작게 흘러나왔다.

[힘 빼 봐, 착하지.]

그런 남자를 달래며 백사현이 남자의 귀 뒤쪽에 키스했지만 남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고개를 떨어뜨리고 끝내 무너지려는 남자의 배에 손을 얹어 받치며 백사현은 남자의 귀를 간지럽게 깨물었다. 여유롭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백사현도 사실 그리 여유롭진 않았다. 하얀 이마 위로는 식은땀이 점점이 번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뒤를 쓰지 않았는지 아직 완전히 들어가지도 않았건만, 조여드는 좁은 입구가 금방이라도 백사현을 잘라먹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남자의 몸에서 힘을 빼게 하려고 백사현은 흉포하게 밀고 들어가려는 아래와는 다르게 남자의 귀부터 목덜미, 어깨까지 한 곳도 빠짐없이 부드럽게 입술을 내렸다. 사실 남자의 살 내음이 마음에 든 것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백사현은 남자의 살갗에서 도통 입술을 떼고 싶질 않았다.

하지만 그런 여유도 잠깐, 정말 한계였다. 아까부터 단단해져 있던 아래는 아우성치고 있었고 백사현은 결국 자세를 바꾸기 위해 남자의 배를 감싼 손을 당겨 왔다. 키도 몸집도 웬만큼 운동을 꾸준히 한 것 같은 남자였지만 너무나 손쉽게 남자는 백사현의 손길에 딸려 왔다. 그러니 침대에 앉은 백사현의 허벅지 위로 남자의 몸이 앉혀진 것도 손쉬웠다. 백사현의 가슴에 등을 기댄 남자의 고개가 젖혀졌다. 자세가 바뀐 탓에 무게에 눌려 더 깊숙이 백사현의 성기가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찌, 찢어… 흐으….]

[안 찢어져, 그렇게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일단 힘 풀어 볼래?]

다정하게 속삭이며 백사현은 남자의 어깨뼈에 입 맞췄다. 땀으로 끈적해진 살끼리 달라붙어도 전혀 불쾌하지 않으니 신기한 일이었다.

[기분 좋아질 거야.]

거짓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처음으로 백사현은 상대가 먼저 좋아하길 바랐다. 어떻게 하면 남자가 최대한 아프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도 했다. 그리고 젤을 미리 갖춰 두지 않은 과거의 자신에게 원망까지 했다. 우선 백사현은 남자를 잡고 있던 팔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제 두 다리에 걸쳐진 남자의 다리를 더 넓게 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사현이 힘을 빼며 아주 서서히 무게에 눌린 남자의 안으로 백사현의 힘줄이 돋은 성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 너무, 커… 큰…헉…!’ 헐떡이는 남자의 안으로 힘겹게 들어가는 성기가 결국 뿌리 끝까지 엉덩이 사이로 삼켜졌다. 그리고 남자는 내부에 찬 묵직한 존재감에 얼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뻗어진 손은 움직이지 말라는 듯 백사현의 팔을 힘껏 붙잡았다. 커다란 손아귀에 꽉 쥐어진 흰 팔목이 아플 법한데도 백사현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귀엽다.]

그저 남자의 목덜미에 입 맞출 뿐이었다. 너무 귀여워. 타액에 젖은 남자의 살갗 위로 백사현의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의 배를 감싼 백사현의 팔에 아까보다 남자의 아랫배가 부푼 게 느껴졌다. 이 안에 자신의 것이 완벽히 들어 있었다. 잔뜩 수축하는 내부의 느낌도 좋았지만, 그게 훨씬 더 백사현은 만족스러웠다.

[…아까, 부터 느낀 거지만.]

후으, 흐윽. 어디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누가 내는 소리인지 판별하는 건 지금의 범지훈에겐 불가능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몸에 범지훈은 술기운에 뿌옇게 흐려진 머리로도 기분이 상당히 좋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쩍쩍. 땀에 젖은 살갗이 꼭 떡을 찧듯이 철썩 달라붙었다가 떨어져 나갔다. 눈앞에서 함께 흔들리는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보던 범지훈은 뿌연 시야를 깜빡였다. 그러자마자 눈가를 타고 무언가가 흘렀다.

[우는 게 후우, 정말… 예뻐.]

눈물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선명히 보이는 남자에 범지훈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예쁘다고, 누가? 자신에게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으니 범지훈은 의문이 들었다. 그저 눈앞, 남자의 얼굴만 하나하나 자세하게 들어왔다. 예쁘다는 소리는 저보다 저 남자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하얗고 색소도 연하고… 그냥 모든 게 예쁜 남자였다. 하얀 피부가 상기되어 사과처럼 발그레하게 익은 뺨도 예뻤고 범지훈과 눈을 맞추며 사르르 휘어져 내리는 눈꼬리도 예뻤다. 작은 콧대도 아니, 얼굴도 지나치게 작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범지훈의 주먹만 할 것 같았다. 남자의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에까지 시선이 머무른 범지훈은 두 손을 뻗어 남자의 작은 얼굴을 쥐었다.

[예쁘다….]

혼잣말을 중얼댄 범지훈은 남자의 얼굴을 당겨 와 그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남자는 기꺼이 범지훈의 키스에 응했다. 끝내 범지훈의 신음이 남자의 입 안에서 삼켜졌다. 뻣뻣하게 솟아 있던 범지훈의 성기에서 희뿌연 액이 터져 나왔다. 이젠 점성이라고 할 것도 없는 물 같은 농도였다. 남자와 맞닿아진 범지훈의 아랫도리는 얼마나 쏟아 냈는지 희뿌연 액들로 잔뜩 더러워져 있었다. 물론 남자의 배 또한 범지훈의 것이 튀어 더러워져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름 불러 봐. 아까 계속 불러 줬잖아.]

긴 입맞춤을 끝내고 아쉽게 입술을 떼어 낸 남자가 속삭였다. 탈력이 짙어진 얼굴로 범지훈은 멍하니 대답했다.

[백…사현.]

[응.]

[사현… 백사현….]

[성 빼고 이름만.]

[…사현이.]

[착해라.]

범지훈의 안에서 빠져나온 백사현은 가득 들어차 늘어진 콘돔을 벗겨 내곤 침대 밑으로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럼, 우리 한 번만 더 할까?]

여상히 입을 열며 백사현의 이는 벌써 콘돔 포장지의 끄트머리를 물고 있었다. 그 예쁜 얼굴에 홀린 범지훈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범지훈은 취하면 원래 거절을 못 했다. 멀쩡한 정신일 때도 미인들에게 맥을 못 췄는데 취하면 더했다. 그러니까, 완벽한 예스맨이 된 범지훈은 죽여 달라며 욱신대는 하반신의 통증에도 벌써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막 콘돔을 새로 씌운 백사현이 이젠 익숙해진 범지훈의 내부 안으로 성기를 반쯤 넣었을 땐, 범지훈은 이미 정신을 잃은 뒤였다. 아직도 단단한 아래가 느껴졌지만 잠든 범지훈을 끌어안고 백사현은 한숨을 쉬었다. 심하게 몰아붙인 감이 없잖아 있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바깥은 이미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달라붙어 헝클어진 범지훈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백사현은 모난 곳 없이 예쁜 이마에 아쉬운 입맞춤을 했다.

약속대로 깨끗한 뒤처리를 해 주기 위해 백사현은 늘어진 범지훈을 조심스레 추슬러 안았다. 지금까지 하룻밤 상대를 이렇게 대하고 씻겨 주려고까지 한 건 백사현에게 이 남자가 난생처음이었다. 일단 깨어나면 이름부터 제대로 물어볼까? 즐거운 생각을 이어 가며 발걸음을 딛는 백사현의 입가가 사뭇 부드럽게 풀어졌다.

***

해가 중천에 뜬 낮이 되고서야 정신이 든 백사현은 잠에 취한 채 옆자리를 더듬었다. 생각대로라면 이쯤에 단단하고 따뜻한 살결이 잡혀야 하는데 만져지는 건 서늘한 침대 시트뿐이었다. 서늘…? 그 기묘한 위화감에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린 백사현은 텅 빈 옆자리를 눈에 담았다.

[…뭐야…?]

얼빠진 소리가 백사현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잠기운이 가신 백사현은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있다 사라졌다는 걸 알려 주듯 구겨져 있는 침대 시트가 있었고 옷가지들 또한 사라져 있었다. 백사현의 옷은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지만 다른 이의 것이 없었다.

하… 실소가 섞인 한숨이 백사현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린 백사현은 이내 얼굴을 문질렀다. 먹튀는 지금껏 백사현이 자주 하던 전문 분야였다. 그런데 그걸 그대로 되돌려받으니 상당히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름도 모르는데.]

남자의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아는 것 하나 없었다. 열여섯 명의 미인들에게 차인 불쌍한 귀염둥이. 백사현이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게 전부였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등 뒤에 커다란 호랑이 타투가 있는 것도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벗겨 보지 않는 한 확인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얼굴을 덮은 손이 내려가며 백사현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찾아야지. 백사현의 승부욕을 자극한 상대는 오랜만이었다. 본인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고 백사현을 먹고 튀어 버린 남자에 대한 화도 화였지만, 백사현은 이만큼이나 몸이 잘 맞았던 남자도 처음이었다.

꼭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들어맞는 것처럼 정확하게 들어맞았던 그 남자를 떠올리며 백사현의 눈매가 휘어졌다. 일단, 만나면 그 예쁜 입부터 틀어막을까. 뱀처럼 아랫입술을 핥으며 백사현은 생각했다. 그가 필름이 끊겨 전부 잊어버렸을 거라는 걸 그때의 백사현은 전혀 알지 못한 채였다.

***

오랜만에 깊게 잠이 든 것 같았다. 얼마나 달게 잤던지 늘 깨어나던 기상 시간대가 훨씬 지났다는 걸 범지훈은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병원 생활을 하며 나태해진 게 큰 원인인 것 같기도 했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핸드폰을 집어 든 범지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역시나 늦은 아침이었다. 서둘러 병원에 안 들어가 봐도 되는지 잠깐 생각했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곧장 시선은 옆자리에 누운 이에게 빼앗겼다. 백사현 말이다.

다른 방도 있을 텐데 왜 여기서 자고 있지? 라는 의문은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자는 그 흰 얼굴을 보자마자 잊어버렸다. 범지훈은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푹신한 베개에 뺨을 묻고 평화롭게 잠든 백사현은 잠이 든 모습도 예뻤다. 아기같이 자네.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범지훈은 뒤늦게 민망해졌다. 아무리 예쁘다지만 31살의 성인 남자보고 아기 같다니. 하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많이 봐줘도 20대 초반, 아니 고등학생으로도 보이는 백사현은 정말 앳돼 보였다. 젖살처럼 말랑한 저 뺨 때문인가, 잡티도 없는 피부에 솜털까지 있어서인가. 속눈썹이 기네. 범지훈의 흘러가는 의식은 어느덧 백사현 관찰로 이어졌다.

몇 번을 봐도 예쁜 생김새였다. 외모가 뛰어난 남자들에게 잘생겼다는 말을 주로 쓰는 만큼 남자인 백사현도 잘생겼다는 말이 보통이겠지만, 예쁘다는 수식어가 왜인지 백사현과는 더 잘 어울렸다. 부드러운 선을 가진 얼굴도 그랬고 특유의 투명하고 하얀 피부는 톡 하고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연약함도 있었다. 그래서 범지훈이 백사현을 자꾸만 여리게 생각하는 것도 있을 터였다. 하얀 피부에, 피부처럼 흰빛을 띠는 은빛 머리카락은 약으로 만든 인공적인 것임에도 이질감 없이 백사현과 너무 잘 어울렸다. 백발도 잘 어울렸었는데 은발도 잘 어울리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범지훈의 시야에 백사현의 앞머리가 흘러내려 눈꺼풀을 찌르는 게 보였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살며시 머리카락을 넘겨 주니 그 잠깐의 기척에도 백사현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다. 으응. 작은 소리로 칭얼대며 꾸물꾸물 베개에 더 깊이 얼굴을 묻는데 범지훈은 서둘러 이를 악물었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해서였다. 귀엽다. 동시에 자연스레 든 생각이었다.

단잠을 자는 백사현을 깨울 생각은 없어 범지훈은 소리 죽여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백사현은 여전히 깨지 않았다.

커튼을 치지 않은 침실의 통유리 창 너머로 쨍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침대까지 닿지 않는 햇살은 잠을 자는데 방해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고층 창 아래로는 바쁘게 움직이는 서울의 차들과 한강 뷰가 그대로 보일 터였다. 범지훈의 집에서도 익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창밖이 아닌 이 집 안이. 날이 밝으니 더 확연히 느껴지는 기묘한 익숙함에 범지훈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짙은 청록색. 범지훈의 한쪽 다리를 덮은 이불의 색이 잊을래도 잊을 수가 없는 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침실 또한 낯익었다. 천천히 걸음을 딛는 범지훈의 시야에 처음 와 본 건 분명히 아닌 백사현의 집 안 풍경이 들어왔다. 여기에 문이 있는 것도, 이 복도에서 오른쪽 코너로 돌아가면 현관문이 보이는 것도. 긴 복도를 돌아가니 곧장 보이는 현관문에 범지훈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괜스레 쓸어 보았다. 음. 헝클어진 머리카락처럼 범지훈의 마음도 꽤 복잡해졌다. 그 때문인지 담배 또한 고파 왔다.

후우. 담배 연기를 뱉는 거지만 꼭 한숨을 뱉는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재를 재떨이에 턴 범지훈은 다시 담배를 물었다.

“바람이 차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범지훈의 어깨 위로 담요가 둘러졌다. 곧장 범지훈의 옆에 서는 이의 기척에 범지훈은 서둘러 담배를 비벼 껐다.

“…백사현 씨”

“말 놓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또 잊었나 보네.”

빙긋 웃는 백사현을 보며 범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기억합… 아니, 기억해.’ 정정했지만 계속 존대를 하던 게 입에 붙어 완전한 반말을 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확실히 술기운이 있었을 때와 맨정신은 또 달랐다.

“다행이네요, 형.”

그리고 맨정신에 듣게 된 형 소리는 굉장히 간지러웠다. 어제의 일이 떠올라 괜히 어깨의 담요를 여며 보는 범지훈의 귀가 뜨끈해졌다.

“…재떨이가 있길래 피웠는데, 내 집도 아닌데 피워도 되는지 모르겠다. 미안해.”

범지훈은 화제를 돌렸다. 테라스 바닥에 붙어 있는 붙박이형 스탠드 재떨이를 흘긋 눈짓하며 범지훈이 말했다. 백사현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미안하긴요, 나도 담배 피운 적 있어서 괜찮아요.”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직업이 가수인 만큼 또 목소리 톤 자체가 워낙 부드러워 그런 건 아예 안 할 줄 알았다. 아파트를 지으며 테라스마다 기본 옵션으로 있는 재떨이라고 생각했건만 장식용이 아닌 집주인인 백사현 또한 유용하게 썼던 모양이었다. 놀란 눈의 범지훈을 빤히 보던 백사현이 픽 웃으며 난간 아래 풍경으로 시선을 내렸다.

“오히려 어디 안 가고 있어 줘서 고마워요.”

“…뭐?”

“자고 일어났는데 형이 없길래 나 두고 간 줄 알았어요.”

범지훈은 죄책감을 느꼈다. 백사현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은 백사현처럼 난간 아래로 향했다.

“미안하단 말은 그만. 형한테 이제 그건 안 듣고 싶어요.”

한발 빠르게 입을 여는 백사현에 범지훈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럼 뭐가 좋을까 잠깐 생각하던 범지훈은 백사현의 어깨에 걸쳐진 카디건 한쪽이 조금 내려와 있는 것에 손을 뻗었다. 백사현의 시선이 움직인 건 당연했다. 부드럽게 옷을 끌어 완전히 어깨를 덮어 주며 범지훈은 말했다.

“그럼 어릴 때 얘기는? 네 말대로 바람이 찬데 일단 안에 들어가자.”

“음… 안에 들어가는 건 좋은데.”

미소 짓는 백사현은 웃고 있지만 조금 복잡한 얼굴이었다.

“나보다는 형이 더 제 어릴 때 얘기를 들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네요.”

병문안을 왔던 이준혁이 백사현에 대해 얘기하며 하던 말이 눈치가 빠르다는 거였다. 범지훈도 이젠 이준혁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백사현은 지나치게 감이 좋았고 눈치도 빨랐다. 카디건을 향해 범지훈이 손을 뻗기도 전에 먼저 눈을 돌려 범지훈을 확인하던 백사현. 그 눈에 적의라곤 단 한 톨도 없었지만, 누가 자신을 만지는지 예민하게 반응하고 확인하는 건 습관적인 것 같았다. 만약 손을 뻗는 이가 범지훈이 아니었다면 백사현의 눈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었을지는 범지훈도 조금은 예상이 될 것 같았다. 대체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는 걸까? 묻고 싶은 게 당연했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으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 억지로 들을 생각은 없어.”

“…형이 그렇게 말하면 얘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백사현은 마음 약한 얼굴을 했다. 저것도 범지훈 한정일 터였다. 이준혁에게도 같은 멤버들에게도 한 번도 지은 적 없을 것 같은 표정으로 백사현은 범지훈의 손을 잡고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따뜻한 커피를 내려 범지훈의 앞에 두고 자신의 앞에도 둔 뒤에야 자리에 앉은 백사현은 그래도 조금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사현아.”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커피만 바라보던 백사현도 그때야 고개를 들었다.

“형제 있어?”

범지훈의 물음에 백사현은 무슨 뜻인지 감을 못 잡은 것 같았다. 두 눈만 깜빡이던 백사현은 입을 열었다.

“혼자 자랐어요.”

“나는 누나가 있어.”

“…처음 알았네요.”

그리고 백사현은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범지훈에 대해서라면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다는 얼굴이었다.

“왜? 외동인 줄 알았어?”

“네. 형이 대표로 아버지 회사도 이만큼 이끌어 키웠고 임원진 중에서도 친인척은 없는 것 같아서요.”

“준혁이가 얘기를 많이 해 줬나 보네.”

“…뭐, 그렇죠.”

한 텀 느리게 백사현이 대답했다. 대답하면서도 왜인지 시선은 먼 곳을 향했다. 범지훈은 그런 백사현이 귀여워 작게 웃었다. 이준혁뿐만이 아닌 혼자서도 자신에 대해 꽤 많은 자료 조사를 한 듯싶었다. 현재 하는 일이 회사 경영인 기업인이니만큼 인터넷에 검색하면 쉽게 나오는 게 본인의 회사에 대한 기사였다. 범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백사현이 궁금해서 했던 일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누나랑 내가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 10살 넘게.”

“형이 막내였구나. 누나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데요?”

“…할아버님… 사업을 물려받아 하고 있어.”

그 대답을 하는데 범지훈은 잠깐 뜸을 들였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진 않겠지만, 외할아버지가 마피아라는 말은 되도록 먼저 밝히고 싶지 않았다. 범지훈은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두 손을 맞잡았다. 가족들이 백사현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상상만 해도 조금 끔찍해지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면 어머니 쪽이요?”

“응, 러시아에서.”

어떤 사업인지 그래도 백사현이 물어본다면 범지훈은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답들도 생각했는데 백사현은 다른 걸 물었다.

“누나는 어떤 분이세요?”

“…어?”

“피를 나눈 혈육이 있으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요.”

외동으로 컸다면 그럴 것 같았다. 누나라. 범지훈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 벌써 성인이 되었던 누나는 범지훈이 생각해도 범상치는 않았다.

“음. 예쁘고, 똑똑하고, 냉정할 때는 냉정한데 내 사람한테는 잘해 주는?”

“…되게 완벽한데요? 그런데 동생이 보통 누나한테 예쁘다고는 잘 안 하지 않아요? 주변 보니까 그렇던데.”

농담처럼 웃어 보이는 백사현이었지만 범지훈은 깊게 생각했다.

“예쁘긴 해. 장난으로라도 누나한텐 못생겼다고 못 하겠어.”

범지훈은 진지해졌다. 누나에 대한 무서움 때문인 것인지 정말 말도 안 되게 예뻐서 빈말로도 못생겼다고 못 할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사현은 범지훈의 얼굴을 보며 납득했다. 아무래도 후자일 확률이 더 높은 것 같았다.

“저는….”

범지훈이 먼저 가족 이야기를 꺼내니 백사현도 이야기를 하기 자연스러워졌다.

“어릴 땐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어머니가 많이 바쁘셨을 때라서.”

“어머니가 많이 바쁘셨다면….”

“네, 저희 어머니가-”

삐빅. 백사현이 말을 잇는 것과 동시에 잠금이 풀린 현관문에서 소리가 났다. 잠금장치가 해제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니 범지훈은 현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배우라는 일을 하시거든요.”

현관의 중문마저 열리고 집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은 슬랙스를 입은 여자의 발이었다.

“…병원에 없다더니 역시 집에 있었구나.”

자리에서 일어선 백사현과 범지훈을 발견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전체적으로 인상이 날카로웠지만 백사현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중년 여자였다. 게다가 엄청난 미인이었다. 범지훈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분은 백사현의 친모가 분명했다.

“옆에 계신 분은….”

백사현의 옆에 서 있는 범지훈을 발견하곤 여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범지훈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입을 여는 걸 잊었다. 가늘게 눈을 뜨는 것도 백사현과 닮아서였지만, 우선은 그녀가 범지훈도 알고 있을 만큼 유명인이라서였다.

백서경. 대한민국에서 여자 배우들을 통틀어서도, 모든 배우를 통틀어서도 최초로 해외 진출까지 한 전설적인 배우. 연예계에 문외한인데다 영화도 자주 보지 않던 범지훈까지도 그녀가 출연한 히트작들은 꿰고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유명한 배우였으니까. 아버지인 범상철은 한 때 그녀의 영화 필름들까지 모을 정도로 열성 팬이었다. 그걸 알게 된 어머니에 집안이 한번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하기야 러시아에서 배우 일을 하던 어머니의 출연작도 전부 외우지 못하던 아버지였으니 어쩌면 어머니로선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후에 화해한 부모님이 나란히 앉아 백서경의 출연작들을 함께 봤었을 때는 어머니도 끝내 눈물을 글썽이며 백서경의 연기력에 대한 찬사를 쏟아 낼 정도였다. 그녀가 얼마나 재능 있는 배우인지는 증명할 수 있었다.

“우리 아들이랑 사귀는 사이?”

너무도 평이한 어조로 백서경이 물었다. 범지훈은 처음엔 그녀가 친구 사이냐고 물어본 줄 알았다. 하지만 사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서서히 깨달아 가며 두 눈은 커다랗게 벌어졌다. 어느덧 범지훈의 얼굴엔 경악이 떠올랐다.

“응, 사귀기로 했어.”

범지훈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옆에서 먼저 명쾌한 대답이 들렸다. 동그랗게 커진 범지훈의 눈은 대답을 한 사람을 향해 움직였다. 백사현이었다.

“좋아한다고 고백도 받았고 나도 되게 좋아하는데 사귀는 거지. 맞죠? 형.”

활짝 미소 지으며 범지훈과 금세 눈을 맞추는데 범지훈은 입술만 달싹였다. 나도 되게 좋아하는데. 나도 되게 좋아하는데. 나도 되게… 백사현의 그 말에만 온 신경이 쏠려서였다. 범지훈은 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귀가 또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이는데 또 뒤늦게 백사현의 어머니 생각이 났다. 범지훈이 서둘러 고개를 들어 올리기도 전에,

“…풉.”

바람 빠진 소리가 먼저 들렸다. 놀란 범지훈의 눈에 웃고 있는 백서경이 보였다. 큭큭 작게 웃던 백서경은 이내 배를 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시끄럽다기보단 듣기 좋은 경쾌한 웃음소리가 집 안에 가득 찼다.

“미안…푸흐, 미안해요, 너무 귀여워서. 아. 눈물까지 나네, 어떡하지.”

눈물이 맺힌 눈가를 닦으며 백서경이 간신히 웃음을 참고 말했다. 넋 나가 있던 범지훈도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하긴 백사현이 지나치게 귀엽긴 했다. 그건 범지훈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아들은 어디서 저렇게 귀여운 사람을 데리고 왔데?”

이어지는 말엔 범지훈은 두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가리키는 대상은 아무리 봐도 자신이었다.

“…큰일이네.”

그러자 백사현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범지훈의 시선이 그제야 백사현을 향했다.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백사현은 백서경에게 되물었다.

“어머니 눈에도 귀여워 보여?”

“푸흡.”

백사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서경은 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작게 중얼대는 백사현의 말에 범지훈은 그냥 두 모자를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내 눈에만 귀여워야 하는데.”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범지훈은 두 모자의 취향을 따라가기에는 벅찰 것 같다고 느꼈다.

간신히 웃음을 그친 백서경이 자리에 앉고 나서 백사현과 범지훈도 자리에 앉았다. 백사현하고만 있었을 때와는 다르게 범지훈은 꼿꼿이 허리를 편 채 주먹 쥔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렸다. 일명 여자 친구 부모님을 마주해서 긴장한 남자 친구의 자세였다.

“편하게 있어요, 그렇게 어려워할 거 없으니까. 사현이 남자 친구분?”

“범지훈이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어머님.”

“어머님?”

그러자 백서경은 입을 가리고 소녀처럼 웃었다. 웨이브 진 긴 흑발 머리가 백서경이 웃을 때마다 어깨에서 함께 흔들렸다. 범지훈은 더욱 긴장한 얼굴로 몸을 고쳐 앉았다.

“듣기 너무 좋다. 그럼 말 편하게 해도 될까, 지훈이라고?”

나이가 어떻게 되느니, 하는 일은 무엇이니, 라거나 조금 더 심각하게는 남자들끼리의 연애인데 잘할 수 있겠느냐는 염려가 이어질 줄 알았는데 백서경은 그저 반달처럼 눈을 휘며 물었다.

“아침은 먹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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