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맹수의 사랑법-5화 (5/9)

4. auspicious

범지훈은 여전히 놀라움이 가라앉지 않은 눈으로 백사현과 백서경 모자를 지켜봤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서는 내내 백사현을 타박하는 백서경이나 몰랐다며 시무룩해진 백사현이나 범지훈 눈에는 생소했기 때문이었다.

“지훈이가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 네가 아침 잘 안 먹는다고 손님까지 안 먹여?”

그건 아닌데. 범지훈도 모닝커피와 함께 가볍게 아침을 때우는 타입이라 여태껏 배가 고픈지도 몰랐다. 일어나고 몇 시간 동안은 그다지 입맛이 없기도 해서 오히려 따뜻한 커피를 내어 준 백사현이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범지훈이 ‘…아닙니다.’라며 소심하게 의견을 내 봐도 넓은 엘리베이터 안은 백서경의 목소리가 훨씬 더 컸다. 고의가 아니었지만 범지훈의 의견은 묵살당했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늘 안 나오셔서 사 먹을 생각이었어. 어머니 닮아서 내가 요리를 그렇게 잘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어제 백사현이 차린 건 있는 걸 꺼내서 세팅한 거긴 했다. 잼과 하몽을 직접 만든 게 아닌 이상 끓이고 익혀 간을 맞추는 요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머니를 닮아서 요리를 잘 못 하는구나. 범지훈은 알게 된 백사현의 새로운 사실을 머릿속에 추가했다. 요리를 못 한다면 자신이 하면 되는 거였으니 흠이랄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백사현이 귀여워 끌어 올려지려는 입꼬리를 내리기 위해 범지훈은 슬픈 생각을 하며 애를 써야 했다.

“너는 애가 참. 그럼 있는 빵이나 시리얼이라도 내왔어야지. 급한 요기라도 일단 하고 데리고 나가서 먹든 시켜 먹든 하게.”

“…그게 있었구나. 나가서 같이 먹을 생각은 했는데, 요기할 건 생각을 못 했네.”

“자랑이다, 녀석아!”

결국 타박의 끝은 여느 어머니들처럼 등짝 때리기였다. 등을 향해 자연스레 손이 올라가는 백서경에 백사현은 다가올 아픔을 상상했는지 눈을 찡그렸다.

“어머님.”

그리고 그런 백서경을 나직하게 부른 건 범지훈이었다. 백서경의 휘둘러진 손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잡아챈 채 범지훈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려 애썼다. 무섭게 보이지만 않으면 다행이란 생각으로 최대한 순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범지훈은 사실을 알렸다.

“저도 원래 아침을 잘 챙겨 먹는 편은 아닙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모닝커피에 드레싱도 안 뿌린 풀때기로 간단히 아침을 때우는데 잘(:거하게) 챙겨 먹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럼 아침은 아무것도 안 먹니?”

“간단하게 때우는 편입니다.”

“어떤 걸로?”

“…샐러드 같은 걸 주로 먹습니다.”

흘러가듯 가볍게 한 대답이었는데 범지훈의 입맛에 맞춰 그대로 브런치 카페에 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 짧은 시간 내에 예약까지 마쳤는지 계단을 밟고 올라온 2층엔 사람이라곤 직원들뿐이었다. 1층은 브런치를 먹기 위한 몇몇 손님들이 자리해 있었는데 2층에 손님이라곤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하긴 했다.

마침 예약석이라는 팻말을 치우며 2층에서 가장 넓은 테이블로 모자와 범지훈을 안내하는 직원에 범지훈은 설마가 확신이 된 걸 느꼈다. 어쩐지 백사현의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뒷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백서경에 그저 바쁘신가 싶었다.

“얘기했던 대로 주시겠어요? 일행들이 아직 식전이라 많이 배고플 것 같아서.”

“네.”

그리고 백서경은 익숙하게 주문했다. 곧이어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애피타이저가 금방 나왔다. 식전 빵과 스투키치니였다. 단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만큼 단것도 쉽게 물려 많이 먹진 못하는데 스투키치니는 입맛을 돋울 애피타이저로 범지훈도 꽤 좋아하는 거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코스로 준비해 봤단다. 여기 셰프가 솜씨가 좋아서 자주 오는 곳이거든.”

확실히 그랬다. 큰 솜씨를 요하지 않는 스투키치니인데도 입맛이 확 돌았다. 단맛보다 상큼함이 더 느껴지는 맛에 범지훈의 눈이 커졌다. 이어서 나온 건 펌킨 수프와 리코타 치즈가 올려진 샐러드였다. 치즈 아래 특이한 색의 드레싱이 뿌려져 있는 걸 보며 범지훈은 설마 싶었다. 한 입 맛보니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어머님, 혹시 여기 셰프가 몬트 슈베르트 호텔 출신이신가요?”

“어머. 지훈이는 맛만 보고도 아니? 맞아. 몬트 슈베르트의 헤드 셰프를 했던 분이야. 셰프 데 블랑 출신이신.”

“그럼 맞네요. 이 드레싱 소스를 제가 좋아했습니다. 몬트 슈베르트에서만 맛볼 수 있는 거라 자주 갔었는데 언제부턴가 맛이 달라져서요.”

“세상에. 이 소스 맛을 알다니. 지훈이 너 나랑 입맛이 똑같구나.”

백서경은 너무 좋아했다. 셰프의 이야기로 말문을 트니 대화를 나누는 것도 순조로웠다. 알고 보니 백서경도 범지훈과 정말 비슷한 입맛을 가지고 있었다. 백사현은 대화가 잘 통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며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은 얼굴을 했다.

“우리 아들은 입맛도 애기 같아서는. 이걸 맛보고는 맛이 심심하다지 뭐니? 달고 짠 것만 맛인 줄 알고. 쟤랑 같이 밥 한번 먹으려면 식당 찾는 데만 하루 종일이라니까?”

“어머니, 그 아들 옆에 있는데.”

“어? 옆에 있었니? 미안, 몰랐네.”

범지훈은 결국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유쾌하신 분이었다. 저런 분의 자식이니 백사현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범지훈의 웃는 얼굴에 두 모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귀엽기만 한 줄 알았더니 예쁘기도 하구나, 지훈이는.”

이어지는 말엔 범지훈의 웃음이 그쳤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범지훈에게 백서경은 은은하게 웃어 보였다.

“매니저도, 멤버도 아닌데 사현이가 처음으로 집에 데려와 좋아한다고까지 한 사람이라 궁금했거든. 어떤 사람인가 했더니 우리 사현이가 빠질 만해.”

‘나도 빠질 것 같지 뭐니?’ 뒤잇는 말엔 백사현이 바로 대꾸했다.

“나만 빠지면 충분해.”

“쟤가 저래.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드는 게 생기면 혼자서만 독차지하려고 하고. 한번은 내가 쟤한테 인형을 사 줬었는데 그걸 사 준 엄마한테 한 번을 안 안겨 주고….”

“어머니.”

아들 앞에서 앞담 하니까 좋냐며 백사현의 투덜거림에 백서경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어 보였다. 사이좋은 모자의 모습에 범지훈도 어느새 긴장이 풀린 것 같았다. 그래서 속으로만 계속 궁금해했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응?”

“제가, 사현이랑 사귀는 사이인 거 말입니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지.”

백서경이 백사현처럼 빙긋 웃음 지었다. 부드러운 선의 백사현과는 다른 날카로운 인상인데도 엄마라서인지 범지훈이 봐도 너무 똑 닮은 미소였다.

“그런 걸 떡하니 달고 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니?”

톡톡 본인의 목을 두드리며 백서경의 눈매가 휘어졌다. 무슨 소리인지 잠깐 생각하던 범지훈은 서둘러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걱정하지 마, 지훈아. 나랑 주문 받던 직원 말고는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그래서 2층도 전부 비워 뒀잖니.”

본 사람이 어떻게 아무도 없는 게 될 수 있는지, 이미 본 사람이 여럿인데. 범지훈은 차마 뱉을 수 없는 말에 애꿎은 입술만 달싹였다. 백사현은 이미 범지훈의 시선을 피해 먼 곳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현이 쟤가 원래 그래. 한번 마음에 들면 자기 것이라고 곳곳에 이름을 써서 꼭 표시를 해 대지 뭐니? 꼭 지금 지훈이처럼.”

목을 감싸 쥔 범지훈의 손바닥 아래에 숨겨져 있는 건 이름 같은 게 아니었다. 백사현이 어젯밤 입으로 직접 낸 자국이었다. 귀뿐만이 아닌 범지훈의 얼굴마저 결국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래서 귀엽다니까, 지훈이가.”

그리고 백서경은 웃음을 터트렸다.

메인 디시는 틸라피아를 구운 스테이크였다. 틸라피아 특유의 냄새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아 최상급의 고기를 썼다는 것도 셰프가 얼마나 신경 써서 구웠는지도 알 수 있었다. 곁들인 소스는 로메스코였는데 끼얹는 방식이 아니라 접시 가에 플레이팅 되어 있어 다이어트를 하거나 심심하게 먹는 사람에게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니 범지훈의 입맛에도 그만이겠지만, 문제는 목덜미의 흔적 탓에 맛있는 음식을 두고도 신경이 쓰여 제대로 못 먹는 범지훈에 있었다.

애피타이저 접시를 치우고 메인 디시를 놓는 직원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목을 감싸 쥔 채 창밖만 보는 범지훈에 백서경은 핸드백을 뒤적였다.

“지훈아.”

내밀어지는 건 반창고였다. ‘감사합니다.’ 반갑게 받아 들고 범지훈은 급하게 포장을 뜯었지만 생각해 보니 혼자서는 보고 붙일 수가 없었다.

“잠시, 화장실 좀….”

“내가 붙여 줄게요.”

그러자 범지훈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사현이 반창고를 가져갔다. ‘가까이 와 볼래요?’ 속삭이는 말에 조금 더 백사현에게 붙기는 했지만 범지훈은 도통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흐뭇한 얼굴로 두 남자를 지켜보는 백서경 때문이었다. 애인의 어머니 앞에서 이래도 되는지 생각했지만 백서경의 표정이 워낙 좋아 보여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남아 있을 줄 몰랐어요, 미안해요. 형.”

시무룩한 백사현의 속삭임에는 갈 곳 없던 곤란한 감정마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아니야, 괜찮아.’ 백사현에게 마찬가지로 작게 속살거리며 범지훈은 입매를 굳히기 위해 애썼다. 아까부터 자꾸만 헤벌쭉 입이 벌어지려고 해서 큰일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능구렁이 같다니까.”

지켜보던 백서경이 말했다. 붙여진 반창고를 신경 쓰느라 범지훈은 주의 깊게 듣지 못한 말이었다. 범지훈 대신 백사현이 제 어머니를 보며 눈짓했다. 어머나. 백서경은 장난스레 웃었다. 범지훈이 두 모자 쪽으로 신경을 돌렸을 때에는 모자의 눈빛 교환은 이미 발 빠르게 끝난 뒤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식사가 이어졌다.

메인 디시의 접시를 비우고 디저트들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쯤, 범지훈은 화장실에 가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볼일도 있어서였지만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비친 거울 속 목덜미가 신경 쓰이기도 해서였다. 붙여진 반창고 외에 다행히 더 이상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핸드 타월에 손을 닦고 화장실을 빠져나온 범지훈은 모자가 기다리고 있을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우뚝 걸음이 멈춰 섰다.

“…흉터 남는 건 아니라지?”

“응, 별일 아니야. 나보단 형이 더 깊게 베였지.”

“미안하고 고맙네, 지훈이한테. 계속 잠잠하더니 왜 또 이런 일이 생겨선.”

한숨을 내쉬는 백서경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다.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백사현의 다쳤을 한쪽 팔을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만지던 백서경은 지금은 아프지 않냐고 또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다니까. 걱정 그만하셔도 되세요, 어머니.”

장난스레 대꾸하는 백사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범지훈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국외와 국내를 오가며 수많은 히트작을 찍은 탑 배우라고는 하지만,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은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다.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론 얼마나 백사현의 걱정을 했을지 안 봐도 상상이 됐다. 범지훈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먼저 발견한 백서경이 백사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을 자연스레 떼어 내며 범지훈을 맞았다.

***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빠져나오자 백서경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해외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바로 온 거라며 이만 들어가 쉬어야겠다고 작별을 고하는 백서경에 범지훈은 아쉬워졌다. 하지만 커플 사이에 계속 끼어 있을 자신은 없다고 웃는 백서경에는 단념하고 보내 드릴 수밖에 없었다. 알아서 가겠다는 백서경이었지만 그건 양보할 수 없어 두 남자 모두 고집을 부렸다. 한국에 있을 때 주로 머문다는 백서경의 아파트 문 앞까지 그녀를 데려다주고 작별 인사를 마친 백사현과 범지훈은 차를 돌렸다.

“어머님이 오늘 입국하신 거야?”

“네. 듣기로는 어제까지 촬영이 있었다 하시더라고요. 요즘 해외에서 차기작 촬영 중이라 바쁘세요.”

“그래서 사현이 네가 입원했던 날에 병원에 바로 못 오신 거구나. 어머님이 배우 백서경 님이실 줄 몰랐어.”

“형한테는 미리 얘기해 놓는 건데. 대중들에게 제 가족 관계는 밝히질 않았거든요.”

왜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범지훈이 알고 있는 백사현이라면 자신 때문에 어머니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싫었을 거고 탑 아이돌이 되기 전, 어머니의 후광을 받아 관심을 얻는 것도 부담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백사현의 노래 실력이었다면 언젠가는 정상에 섰을 게 틀림없었다. 쇼케이스에서 직접 보았던 무대 위에서의 백사현을 범지훈은 떠올렸다.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던 백사현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이제 병원에 가는 거지?”

가는 동안 백사현의 노래를 틀어 들을 생각으로 던진 질문이었건만, 백사현은 고개를 저었다.

“형 집이 어딘지 주소 불러 주세요. 아니면 따로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병원에 안 가?”

“네, 그냥 퇴원하려고요. 어머니랑 복동이 아버지랑 얘기하셨거든요.”

범지훈의 얼굴 위로 물음표들이 떠올랐다. 복동이 아버지라면, 병원장이시라는 그?

“아, 저희 어머니랑 복동이 아버지랑 친한 친구 사이세요. 원래 같았으면 저희 소속사 법무 팀도 그렇고, 형 변호사님도 그렇고 더 입원하길 바라지만 그게 보통 쉬운 건 아니잖아요?”

그건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이라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래 입원할 만큼 심하게 다친 중증 환자도 아니고 꽤 멀쩡한 몸으로 며칠간이나 입원해 있는 것도 고역이긴 했다. 게다가 아무리 눈속임이라지만 VIP 병동 환자랍시고 의료진들이 검진도 어쩜 그렇게 꼬박꼬박 자주 오던지. 범지훈은 간호사 한 분이면 충분히 끝날 것 같은 꿰맨 손바닥 상처의 드레싱에 교수다 의사들이다 간호사들이다 그렇게나 많이 붙은 건 처음이었다. 그 여러 사람에게 이젠 별로 아프지도 않은 다친 손바닥을 내보이며 범지훈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건 아마 백사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저씨랑 잘 얘기해서 퇴원 수속 밟기로 했어요. 의사 왕진으로 재택 치료로 돌린다고. 진단서도 제대로 끊어 놔서 구속된 그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엄벌은 진행될 거고요. 물론 형도 저처럼 퇴원하게 될 건데, 괜찮죠?”

물론이었다. 범지훈이야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백사현 혼자 그렇게 퇴원을 했다면 범지훈은 홀로 남은 병실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 갔을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백사현이 함께 있어서 그 지루한 병실 생활을 이어 갈 수 있었지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 게 틀림없었다.

“물론 당분간 활동은 저는 여전히 못 하지만, 형은 평소처럼 지내도 괜찮을 거예요.”

그 말엔 범지훈이 멈칫했다. 활동이라 함은 음원 공개나 솔로 컴백 등의 연예계 활동일 게 분명했다.

“얼마 동안 못 하는데?”

“글쎄요. 아마 앞으로 한 2, 3주 정도는 더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평이하게 대답하는 백사현이었지만, 범지훈은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보여지는 게 직업이니만큼 사건 이후 아픈 척하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맞기는 했지만, 자신은 되면서 백사현은 여전히 숨죽여 지내야 한다는 게 걸렸다. 장소가 병원에서 집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답답하게 갇혀 있는 기분이 드는 건 똑같을 텐데.

“저는 괜찮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요, 형.”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백사현이 말했다. 뻗어진 손은 범지훈의 손을 잡아 왔다.

“좋은 점도 있죠. 시간이 남는 만큼 형한테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근사한 말을 하는데 로맨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었다면 벌써 가슴이 뛰며 얼굴이 빨개질 게 틀림없었다. 물론 여기가 로맨스 드라마 속도 아니고 키 187cm의 장정인 범지훈이 여주인공도 아니었지만 사실, 설레긴 했다. 게다가 저런 대사는 원래는 범지훈의 전유물이었다. 범지훈과 손을 잡은 채 한쪽 손으로만 핸들을 움직이는 백사현을 눈에 담으며 범지훈은 어쩐지 뒤바뀐 듯한 대사와 위치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콩콩 뛰는 심장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범지훈은 반대편 창으로 시선을 돌리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창틀에 걸친 팔을 들어 얼굴은 이미 가린 채였다. 기분 되게 좋네. 속으로 생각하는 범지훈의 귓불이 발갛게 익어 있었다.

“…그럼, 그동안에 우리 집에 있을래?”

끼익. 차가 갑작스레 급정거를 했다. 신호 때문에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놀란 범지훈의 시선이 백사현을 향했다.

“네…?”

그리고 얼빠진 표정의 백사현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집에 남는 게 방이라, 계속 같이 있으면 서로 만나러 오는 시간도 들지 않을 거 아니야?”

“…….”

“아. 혹시 불편하면….”

“아니요, 좋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꽤나 다급한 대답이 흘렀다. 혹시나 불편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근데, 형.”

“응?”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아니예요.”

말을 하다 만 백사현이 바뀐 신호에 차를 출발시켰다. 범지훈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사현이 네가 처음이야.”

백사현의 몸이 움찔했다.

“집에 누가 오면 신경 쓸 게 많아서 굳이 오라는 말은 안 하거든.”

“그럼, 저는….”

운전에만 집중하는 듯 앞만 보는 백사현이었지만 이쪽에 온 신경에 쏠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범지훈은 생각했던 걸 그대로 뱉었다.

“너야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르잖아.”

“형.”

“응?”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백사현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범지훈도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어쩐지 백사현의 하얀 뺨이 발그레 익어 있는 것 같았다.

***

범지훈 대표가 출근했다. 정말 오랜만의 출근에 범지훈을 발견한 사람들 모두가 귀신을 보기라도 한 것 같은 눈으로 시선을 모았다.

며칠간 언론에서 연일 화제였던 아이돌 가수 백사현 납치 사건은 범호 캐피탈 내부에서도 뜨거운 이슈였다. 그건 백사현 때문도 있었지만 납치된 백사현을 구하기 위해 뒤를 쫓았다는 범지훈 대표 때문이 컸다. 범지훈의 용감한 무용담은 회사 사람들의 입에도 연신 오르내렸다. 게다가 그 크고 튼튼해 보이던 대표님이 납치범과의 사투 끝에 백사현처럼 크게 다쳐 병원 신세를 졌다는 것엔 모두가 놀랐다. 대부분 직원들은 알게 모르게 범지훈에 대한 걱정들을 했다.

다행히 그 걱정이 무색하게 완쾌되었는지 출근한 범지훈 대표는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다만, 와이셔츠 칼라 위로 살구색 밴드를 붙이고 있는 것엔 납치범에게 목이라도 그이신 거 아니냐는 추측들이 오고 갔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 무쇠 같던 호랑이 대표님이 병원 신세까지 질 리가 없었다. 직원들이 자신을 어떤 취급 하며 무슨 이야기를 속닥이고 있나 알고는 있는지 범지훈은 유니폼과도 같은 검은 정장을 빼입고 옷이랑 똑같은 색의 핸드폰을 든 채 뚫어져라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 안녕하세요? 대표님.”

결국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패기로운 어린 신입 하나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 있던 범지훈에게 말을 걸었다. 직원들은 삽시간에 숨을 멈추고 두 사람을 지켜봤다.

“…네. 안녕하세요?”

낯선 여자가 말을 걸었다는 것에 의아했는지 핸드폰에서 시선을 뗀 범지훈이 자신보다 한참은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기사로 봤는데, 다치셔서 입원 중이시라고 들었어요. 몸은 이제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그 말엔 주변 직원들에게서 먼저 히익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누구냐고 묻는 것에 불과했지만 무표정한 얼굴의 범지훈이 신입을 내려다보는 것(키 차이가 나서 어쩔 수 없다지만)만으로도 충분히 고압적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패기 가득했던 신입 사원을 향했고 신입도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저, 저는 그… 이번에 마케팅부에 새로 드, 들어온 김민지라고 합니다.”

“마케팅부라면, 신입 사원이신가요?”

직원들은 이젠 동정의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신입은 울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겨우겨우 대답했다. 이제 저 호랑이 범 대표가 고작 신입 사원의 패기를 어떻게 판단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분명 저 잘생긴 얼굴 가득 불쾌함을 띠고는….

“제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 새 사원분들이 몇 들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얼굴을 뵙지 못해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요. 걱정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입 사원 김민지의 눈이 커졌다. 바닥만 내려다보던 시선은 그제야 범지훈을 올려다보았다. 때맞춰 상층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범지훈은 신입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럼 고생하세요.”

“네, 네에….”

군더더기 없는 몸짓으로 탑승한 범지훈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신입은 그 문 앞에서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미쳤다.”

범 대표님과 대화를 나눈 패기의 신입은 그렇게 입을 틀어막으며 한 마디를 뱉었다.

“분명 눈웃음쳤어.”

회사라는 자각을 하지 않았다면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쌍욕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사회 초년생으로 첫 시작을 한 이 회사에 굉장한 애사심을 가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

범지훈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첫 번째 이유로는 집에 백사현이 들어왔다는 것에 있었고, 두 번째로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백사현의 얼굴을 보고 출근했다는 것에 있었고,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론 사위민에게 들었던 대로 새로 들어왔다는 인상 좋은 신입 중 한 명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빠져 먹었던 세 번째 이유로는 이제 일어난 건지 백사현에게서 온 톡 때문이었다.

[형 언제 출근했어요?]

[자느라 몰랐어요]

[이모티콘]

톡을 확인하자마자 끌어 올려지려는 입꼬리를 자제하느라 범지훈은 꽤 애를 써야 했다. 다른 직원들도 보고 있는데 핸드폰을 보며 정신 나간 것처럼 해죽해죽 웃고 있는 대표는 곤란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서둘러 답장을 보내는 범지훈의 표정은 이미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이모티콘도 꼭 자기처럼 하얗고 말랑말랑한 강아지가 바닥에 떡처럼 늘어진 채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걸 보냈는데 어쩜 이렇게 귀여운지. 범지훈은 입을 틀어막고는 그제야 전송을 눌렀다.

[좀 전에. 졸리면 더 자.]

[으응 아니에요 다 잤어요]

[이모티콘]

[아침은 먹고 갔어요?]

범지훈이 답을 보내자마자 숫자 1이 사라지며 연달아 칼답이 왔다. 이번 이모티콘은 이부자리에서 막 일어난 강아지가 눈을 비비는 거였다. 귀여워. 범지훈은 참을 수 없는 감정에 화면에서 가까스로 눈을 들어 허공을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CCTV가 있는데 발을 구르거나 공중에 주먹질하며 생쇼를 하는 대표의 모습이 찍히면 곤란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는 부러 근엄하게 표정을 굳힌 범지훈이 걸음을 옮겼지만, 마음은 이미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집에 가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생각보다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했다.

“이게 누구야? 범지훈 대표님 아닌가?”

그러다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는 범지훈의 얼굴이 정말 자연스럽게 굳었다. 시선을 돌린 곳에 서 있는 건 역시나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남자였다.

“…김정학 상무님.”

“멀쩡히 걸어오는 거 보니까, 몸은 이제 괜찮나 보네. 한 몇 주는 더 입원해 계셔야 한다더니.”

엄연히 직급이 더 높은 대표에게 당연하게 말을 잘라먹으며 실실 웃는 남자는 범상철이 범호 캐피탈을 설립할 때 함께 일했던 원년 멤버이자, 어린 범지훈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임원진 중 한 명이었다. 범상철과도 겨우 몇 살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김정학은 다른 임원진과 마찬가지로 새파랗게 어린 범지훈이 대표직을 맡는다고 할 때부터 눈을 부릅뜨고 반대했던 이였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금방 털고 일어났습니다.”

태연하게 범지훈이 답했다. 다른 임원도 아니고 하필 김정학이라는 것에 껄끄럽긴 했으나 그걸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는 하이에나 같은 남자였다. 남이 가진 먹이를 언제 빼앗을 수 있을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교활한 짐승처럼 언제 범지훈의 허점을 알아채고 그것을 물어뜯을지 몰랐다.

“범 회장님을 닮아서 그런가, 체력 하난 끝내주는구먼.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야, 응?”

“칭찬 감사합니다. 다른 점도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범호 캐피탈도 그래서 잘 이끌어 가는 모양입니다.”

“…그렇구만.”

한 방 먹은 얼굴로 김정학이 말했다.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로 아버지의 힘을 빌려 그 자리에 있다고 비꼴 용도로 한 말이었겠지만, 자신의 말에 자신이 당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웃고는 있지만 구겨진 미간은 범지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며칠 더 쉬지 그랬나? 안 그래도 웬 계집애 같은 딴따라 하나를 구한답시고 대표씩이나 돼서 직접 뒤를 쫓다 다쳤다던데. 그 딴따라 팬이랬나, 대표님이?”

범지훈의 눈썹이 꿈틀했다. 이번엔 김정학이 선을 넘었다.

“딴따라라니. 언제 적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상무님.”

하지만 범지훈은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웃어 보였다. 부하 직원들이 보고 다들 기겁했다는 특유의 웃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건 속마음을 그대로 반영한 웃음이기도 했다.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린 미소에 김정학도 기분이 상했는지 예의상 머금던 웃음이 사라졌다.

“그런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임원으로서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계집애 같다는 말도 시대에 한참은 뒤떨어진 성차별적 구닥다리 발언인 건 알고 계십니까?”

“뭐? 구닥다리?”

“생각해 보니 상무님이 하실 말씀들 누가 녹음이라도 해서 뿌린다면 회사 이미지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고대 유물 전시관에 누군가는 녹음 파일을 기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되게 어디, 좀 전에 하신 말씀들 다시 읊어 보시죠.”

분한 얼굴로 김정학은 입을 다물었다. 심술이 덕지덕지 낀 추하게 늙은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범지훈은 조소했다.

“범지훈 대표.”

그대로 김정학을 지나쳐 가는 범지훈을 김정학이 불러 세웠다. 예의상 멈춰선 범지훈은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왜 그러시죠?”

“신세대답게 그래서 성별 상관없이 남자도 예뻐해 주는 모양인데, 한때의 감정이길 바라네.”

범지훈은 그제야 뒤를 돌아 김정학을 바라보았다.

“자네 누나도 그 나이까지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데, 범가를 이을 자식 한둘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회장님 내외께서도 걱정이 많으시겠어. 장성한 아들, 딸이 아직도 멀쩡한 제 짝 하나씩 곁에 끼고 있지 않다는 거에.”

‘멀쩡한’이라는 것에 악센트를 주며 김정학이 미소 지었다. 이번엔 범지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 없는 노친네였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까?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으려던 범지훈이었지만 머릿속에서 순간적으로 불쑥 충동이 솟았다.

***

출근할 때만 해도 좋았던 범지훈의 기분은 퇴근 때에는 완전히 바닥을 쳤다. 범지훈의 컴백을 기뻐하는 사위민이나 곽팔두의 환영도 받았지만, 범지훈은 도통 기쁘게 웃을 수가 없었다. 납치 사건 전만 해도 신경 쓰일 만큼 까칠한 태도를 보이던 우정선이 납치 사건 이후부턴 평소처럼 범지훈을 대하는데도 그랬다.

되레 무슨 일 있느냐며 우정선이 범지훈에게 되물을 정도였다. 일은 무슨. 그렇게 넘어갔지만 우정선은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웬일로 발 빠르게 퇴근 준비를 먼저 마친 우정선이 대표실을 찾았다.

“같이 저녁 겸 술이나 할래?”

단둘만 있는 대표실에서는 이제 완전히 말을 놓기로 한 모양이었다. 범지훈도 그것에 대해선 별 상관이 없었다. 아무튼, 고맙게 제안하는 우정선이었지만, 범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누구? 여사빈 이사?”

그 말엔 책상에 머리를 박다시피 숙이고 있던 범지훈의 고개가 번뜩 쳐들렸다.

“뭐라고?”

우정선은 되레 범지훈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여사빈 이사. 네가 연락한 거 아니야? 너 퇴근할 시간쯤에 맞춰서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데?”

“…지금?”

“응.”

범지훈이 병원 신세를 질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오늘 오랜만에 출근하니까 맞춰서 회사를 찾아온 게 약속을 잡은 게 아니면 뭐겠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약속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정선은 당황해하는 범지훈의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약속 아니었어?”

“사위민 씨한테서 퇴근 시간 듣고 찾아왔나 봐. 둘이 친하거든.”

범지훈이 한숨 섞인 대답을 하며 이마를 매만졌다. 우정선도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싫어하던 여사빈과 약속까지 잡을 정도면 뭔가 약점을 잡혀도 단단히 잡혔겠다 싶어 친구 된 도리로서 함께 따라가 줄 생각이었는데 이건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쩔 거야?”

되묻는 우정선에 범지훈은 고민했다. 여사빈에게는 고마운 것도 있었고 빚진 것도 많았다.

“…정선아.”

“난 네가 그렇게 부르면 불안해지더라.”

우정선은 마뜩잖은 눈으로 범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범지훈은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넌 내 소중한 친구지?”

“…그래, 친구기는 한데 소중한지는 모르겠네. 그 소중한 친구한테 지금부터 네가 어떤 부탁을 할지 좀 겁나거든.”

척하면 척이라고 역시나 범지훈의 30년 지기 친구다웠다. 범지훈은 미안함과 다정함이 모두 담긴 얼굴로 부탁했다.

“별건 아니고 내 친구들끼리 서로 소개 좀 시켜 주려고.”

“뭐?”

“여사빈 쟤도 이제 내 친구거든. 내 친구인 정선이 너랑 내 친구인 여사빈이랑 둘이 친해지면 서로서로 또 친구도 되고 좋을 것 같은데.”

우정선은 이젠 어이가 없어진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범지훈은 말을 이었다.

“나 대신 네가 나가서 오늘만 쟤 좀 데리고 놀아 줘. 부탁할게.”

“야, 범지훈!”

우정선이 황당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대놓고 철판을 깐 범지훈은 부탁을 철회할 생각 따윈 쥐꼬리만큼도 없어 보였다.

***

결국, 우정선은 범지훈의 부탁에 못 이겨 사약을 받으러 가는 죄인처럼 힘겹게 회사 로비를 나섰다. 저 멀리 흡연 부스 옆에 서 있는 여사빈이 보였고, 우정선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론 여사빈을 보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바쁘게 생각했다. 일단 ‘안녕하세요’부터? 아니면 ‘여사빈 씨’? 그것도 아님 타 회사라도 이사 직급이니 이사님으로 불러야 하나? 마찬가지로 여사빈 또한 다가오는 우정선을 알아채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선은.

“여사빈 이사니….”

“우정성?”

우정… 뭐?

“얘기는 들었는데 너 진짜 범지훈이랑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구나. 오랜만이다, 정성아.”

반갑게 웃어 보이는 여사빈이었지만 우정선은 웃지 않았다. 처음엔 여사빈의 발음이 안 좋은가 했더니 두 번째 말에서야 알 수 있었다. 여사빈은 우정선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범지훈은 같이 안 나왔어? 오늘 출근했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고등학교를 3년이나 같이 다녔는데. 우정선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앙숙처럼 지냈던 그 범지훈의 옆에 늘 붙어 다닌 친구가 자신이었는데,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게 이젠 대단해 보이기도 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여사빈과 고2와 고3을 같은 교실에서 보냈다. 그러니까 고1을 제외한 고등학교 내내 같은 반이었다는 소리였다. 그걸 여사빈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글쎄. 대표실엔 아무도 없던데.”

“뭐? 벌써 퇴근한 거야? 말도 안 돼.”

여사빈은 하늘이 무너진 얼굴을 했다. ‘혹시 늦을까 봐 퇴근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어떻게….’라며 혼잣말을 중얼대는 여사빈은 자신도 반말했던 것처럼 우정선의 반말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인사를 할지 고민했던 게 헛수고가 된 것 같아 우정선은 허탈해졌다.

“지훈이 기다렸던 거야?”

“어. 지금쯤이면 퇴근하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훈이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오늘 좀 일찍 퇴근했을 거야.”

“뭐? 어디가? 어떻게 안 좋길래?”

그건 나도 모르지. 방금 지어낸 거짓말인데. 여사빈에겐 대놓고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중얼대며 우정선은 시무룩해졌던 아까와는 다르게 범지훈의 컨디션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진 여사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잘 몰라. 지훈이가 자기 아프다고 자세히 설명할 성격은 아니잖아.”

“…그건 그래.”

또 금세 수긍하는 여사빈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우정선의 눈은 이채를 띠었다.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며 붙잡아 놔야 하나 고민했는데 의외로 해답은 금방 나왔다.

“저녁은, 지훈이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린 모양이네?”

“어? 어, 뭐….”

“괜찮으면 나랑 먹을래? 나도 먹기 전이라.”

그리고 우정선은 범지훈의 부탁을 생각보다 쉽게 들어줄 수 있게 됐다. 그냥 보내지 말고 꼭 데리고 같이 놀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범지훈은 식사도 같이 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덧붙였었다.

“지훈이 기사 네가 손써 줬다면서?”

가까운 거리라 굳이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는 길에 우정선은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걷는 내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여사빈 때문이기도 했다.

“어, 뭐.”

“깔끔하더라. 우리가 어떤 식으로 대응하기도 전에 네 선에서 빨리 처리해 줘서 편했어. 고맙다.”

“…범지훈 때문에 그런 건데, 고맙긴 뭘.”

백사현 납치 사건의 피해자로 묶여 기사에 오르내리던 범지훈. 그 때문인지 쓸데없는 루머들이 붙기 시작한 시점에 맞춰 재빠르게 내 준 반박 기사는 확실히 도움이 됐다. 우정선과 범호 캐피탈 측이 알아차리고 손을 쓰려 생각도 하기 전에 말이다. ‘범지훈 때문’이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는 여사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언뜻 우정선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그리고 지금, 범지훈의 부탁대로 맛집으로 소문난 삼겹살집에 여사빈을 데리고 오는 데 성공한 우정선은 자신의 처지가 문득 서글퍼졌다. 어쩌다가 친하지도 않고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고등학교 동창이랑 저녁까지 같이 하게 된 건지. 물론 범지훈의 부탁 때문이었지만, 그 범지훈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지금 같은 상황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여기 꽤 맛집이야. 원래 이 시간이면 사람들로 미어터지는데 오늘은 그나마 없는 편이네.”

그래도 범지훈 대표의 유능한 비서답게 우정선은 기왕 들어주는 부탁 제대로 들어줄 생각으로 여사빈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우정선의 말대로 오늘은 그나마 손님이 없는 편은 맞았다. 곳곳에 빈 테이블도 보이고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음 데시벨도 덜했다. 하지만 여사빈은 아니었는지 한 사람도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낡은 테이블과 고기 연기에 누렇게 찌든 벽지, 큰 소리로 떠드는 손님들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찜찜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 여사빈을 못 본 척하며 우정선은 다가오는 알바생에게 익숙하게 주문을 넣었다.

“잘 나가는 걸로 우선 시켰어. 먹어 보고 다른 거 또 먹고 싶으면 얘기해.”

알바생이 떠나가고 오래 써서 찌그러진 스뎅 물컵에 물을 따르며 우정선은 여상히 말했다. 우정선이 건네는 물컵을 엉거주춤 받아 들며 여사빈은 아까부터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귀하게 자란 도련님은 이런 곳은 처음이겠지. 그런 여사빈을 향해 우정선이 픽 비웃음을 흘렸다.

일부러였다. 그 여사빈을 이곳에 데려온 건. 우정선에게 여사빈을 부탁하며 범지훈은 좋은 곳에서 식사하라며 자신의 블랙카드를 내밀었었다. 그걸 거절한 게 우정선이었다. 범지훈에게 카드를 받는 게 내키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프라이빗하고 조용한 곳으로 가서 저 여사빈과 정적 속에 둘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설마하니 여사빈이 진짜 귀한 집 도련님처럼 이런 서민 음식점에 처음 와 본 태를 풀풀 낼 줄은 몰라 예상 밖이긴 했지만, 그건 그것대로 흥미롭긴 했다. 하긴 범지훈이나 여사빈이나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온 도련님들답게 서민 음식을 자주 접해 보진 않았을 터였다. 범지훈도 자신이 어릴 적부터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분식집 떡볶이다 프랜차이즈 햄버거다 동네 중국집 짜장면이다 경험해 본 것이지 아니었다면 여사빈과 같은 태도를 보였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주변에 서민 친구도 없었나? 우정선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서민이라고 칭하는 게 그렇긴 했지만, 그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우정선은 입을 열었다.

“이런 고깃집에 처음 와 봐?”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여사빈이 화들짝 놀라 그제야 우정선을 바라보았다.

“…고깃집에 와 본 적은 있어.”

변명이라도 하듯 대꾸하지만 조금 전 본인의 태도를 자각했는지 여사빈은 꽤 민망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눈치는 있네. 그런 여사빈을 아까보다는 후하게 평하며 우정선은 ‘어떤 고깃집?’ 하며 조금은 짓궂게 캐물었다.

“그… 대학 후배 부모님이 하시는 고깃집.”

“으음.”

우정선은 미적지근하게 대답했다. 그 대학 후배도 비슷한 금수저인 건 안 봐도 뻔했다. 여기보다 훨씬 격이 높은 고깃집이구나. 여사빈의 말속 숨겨진 뜻도 자연스레 추려 냈다.

“친구들이랑 이런 곳 와 본 적은 없어?”

“…어.”

여사빈은 이젠 우정선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곳이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니 아까처럼 두루뭉술하게 둘러댈 수도 없어서인지 여사빈은 진땀을 빼기 시작했다.

“난 대학생 때부터 지훈이랑 이런 곳 자주 왔었는데.”

그 말에 그제야 여사빈이 시선을 맞춰 왔다. 난 너보다 지훈이랑 이만큼 친하다며 으스대는 것 같았지만, 딱히 할 말도 없었으니 이런 주제로 이어 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여기보다 훨씬 더 작고 오래된 치킨집도 우리가 단골이었어. 지훈이가 실연당하고 소맥 말다가 필름 끊긴 적도 여러 번이었고. 걔 필름 끊기면 어떤지 알아?”

아니, 사실은 이만큼 친하다며 으스대는 게 맞았다. 우정선은 여사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을 잘못 알고 있는 것에도 그렇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서였다.

“…둘이 친한가 보네.”

그리고 여사빈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며 먼저 나온 소주병의 뚜껑을 땄다. 여사빈에게서 병을 빼앗아 간 우정선은 여사빈의 잔에 소주를 부어 주었다. 같이 마시려는 사람이 있는데 자작은 안 될 일이었다.

“친하지. 지훈이랑 나랑 다섯 살 때부터 알고 지냈는데.”

“그렇게나 오래?”

뜻밖의 이야기에 놀란 여사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정선은 뒤늦게 나온 삼겹살을 달궈진 불판 위로 옮겼다.

“응, 우리 엄마가 지훈이 집 입주 가사 도우미를 하셨을 때부터였으니까.”

그 말에 여사빈은 술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멈췄다.

그러니까, 우정선이 다섯 살이 되던 해는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자신을 데리고 집을 나온 모친이 범지훈의 집에 들어갔던 해이기도 했다. 그곳에 자신과 동갑내기였던 주인집 도련님이 있었던 것은 우정선에게는 행운이기도 했었다. 범지훈의 부모가 아들의 동갑 친구라며 우정선을 예쁘게 보고 제 아들에게 주려고 했던 과자나 장난감 등을 나눠 주기도 했었으니까. 그때 우정선은 범지훈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예쁨만 받고 자라 귀한 태가 물씬 났던, 어린 나이임에도 예쁘다기보단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잘생겼던 도련님. 하지만 성정은 말랑하고 따뜻한 도련님. 모친도 그런 범지훈을 아들처럼 어여뻐했다. 하기야 우정선이 보기에도 예쁨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가정부에게 아줌마라고 부를 법한데도 꼬박꼬박 이모라며 존댓말을 하던 아이였으니까.

이모도 이거 드셔 보세요, 엄청 맛있어요! 이모는 저녁 진지 드셨어요? 저는 정선이처럼 이모가 이만큼 좋아요! 등등 차가운 분위기의 외모와는 다르게 그렇게나 살갑게 구는데 무장 해제 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모친이 무장 해제가 된 것처럼 우정선 또한 범지훈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서로 얼마나 마음이 맞았던지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다녀서 우정선은 범지훈과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기까지 이르렀다. 범지훈 집의 재력 정도라면 사립 초등학교에 다녀도 됐었지만 범지훈의 부모님은 마음 맞는 친구와의 학교생활이 더 중요하다며 양보했다. 그 후, 초등학교를 졸업해서는 같은 중학교를, 중학교 이후엔 고등학교를, 그 뒤엔 노력하여 같은 대학교까지.

“전교에서 1, 2등을 하던 녀석이 가는 대학교인데 같이 간다고 그땐 진짜 죽을 뻔했지.”

예전 일을 추억하며 우정선은 작게 웃어 보였다. 정말 고등학생 때는 나 죽었다 하며 자는 시간도 줄이고 공부에만 매달렸었다. 범지훈은 대체 어떤 식으로 공부하는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머리가 좋은 건지 보기엔 쉬엄쉬엄 공부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나 성적이 잘 나와서 항상 신기해했었다.

결국 인간 승리라고 범지훈이 한국 최고의 명문대에 수월하게 합격 통보를 받은 날, 우정선 또한 수월하진 않았지만 입학할 수 있었다. 전공마저 같은 걸 고르지 않은 건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는 범지훈에게 도움이 될 생각으로 한 선택이었다. 당연하게 경영학을 전공하게 된 범지훈을 돕기 위해 우정선이 택한 건 경제학이었다. 범호 캐피탈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고 싶다는 범지훈의 옆에서 우정선 또한 힘이 되고 싶었다. 범지훈의 아버지는 이런 우정선의 생각을 일찍부터 알고 기특해하며 그의 학비 전액을 지원했다. 제 아들은 툭하면 장학금을 받아 오니 돈이 남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우정성 넌 왜 그렇게까지 범지훈이랑 같이 다니려고 했는데?”

이야기를 듣던 여사빈이 물었다. 하긴 보통 사람들은 이해가 가지 않을 터였다. 사는 세계가 다른 부잣집 도련님과 가정부 아들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친구로 지낸다는 것도 그럴 테고, 자존심도 세우지 않고 주는 지원도 넙죽넙죽 받아 대는 거 하며 여사빈으로서는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의외로 우정선은 쉽게 대답했다.

“여사빈 너랑 같은 이유 때문에.”

“무슨 소리야?”

여사빈은 이해 가지 않는 얼굴로 우정선이 따라 주는 소주를 받았다. 그리고 입가로 가져갔을 때였다.

“너 지훈이 좋아하잖아.”

“푸훕.”

컥, 콜록콜록. 술을 뿜은 여사빈은 격하게 기침을 했다. 술 일부분을 잘못 삼킨 건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한참을 기침하는 여사빈에 우정선은 휴지를 뽑아 건넸다.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내가 중학생 때 딱 너 같았거든. 그때쯤에 나도 내 마음을 자각하기 시작했으니까.”

턱을 괸 채 여사빈을 바라보며 우정선은 담담하게 말했다.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범지훈의 옆에 붙어 다닌 것도 고등학생 때 기를 쓰고 잠도 줄여 가며 죽어라 입시 공부를 한 것도 같은 대학에 입학한 것도 전부 다.

“아, 지훈이 아버지께 학비 지원받은 건 아직도 찜찜해. 그깟 자존심 때문은 아니고 제 아들에게 도움이 될 줄 알았던 놈 마음이 이렇게 새까만 걸 지훈이 아버지는 전혀 모르셨을 테니까.”

우정선이 여사빈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나처럼 너도 마음이 새까말 거 아니야?“

“너….”

겨우 기침을 멈춘 여사빈은 고개를 들었다.

“너, 지금도 범지훈 좋아해?”

“역시 눈치가 빠르네.”

그리고 우정선은 대답과 함께 미소 지어 보였다. 동족 혐오였다. 여사빈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그런데 범지훈은 너나 나 같은 타입은 취향이 아닐 거야. 그것 때문에 나도 꽤 오래 숨죽이고 지냈거든.”

범지훈에게 느끼는 감정부터, 가지고 있는 외모까지. 자신과 지독할 만큼 닮은 여사빈을 우정선은 웃는 입과는 다르게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걸 우정성 네가 어떻게 알아? 취향인지 아닌지는 부딪쳐 봐야 아는 거지.”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여사빈.”

이쯤에서 정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우정선은 발끈하는 여사빈을 향해 말했다.

“내 이름, 우정성이 아니고 우정선이거든. 네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범지훈의 옆에 늘 붙어 다니던 놈 이름 정도는 외워 두지?”

격한 기침을 하고 난 후라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어 젖어 있는 여사빈의 눈이 당황을 띠었다. 어쩐지 우정선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저 눈이 일그러지면 더 보기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문득 그런 생각도 들 정도였다.

***

“…사현아?”

도착한 집 안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우정선이 여사빈을 데리고 가자마자 서둘러 회사를 빠져나와 집으로 달려온 건데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집 안에 범지훈은 의아해졌다. 잠깐 어디 나갔나? 핸드폰을 꺼내 든 범지훈은 우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시사철 빼놓지 않고 냉장고에 우정선이 식재료는 꽉꽉 채워 놓은 덕에 따로 장을 볼 필요는 없었다. 시켜 먹거나 나가서 사 먹는 것도 좋았지만 범지훈은 백사현에게 직접 요리를 해 주고 싶었다. 그러니까, 집밥 말이다.

백사현에겐 집에서 저녁을 해 먹자고 미리 얘기해 둔 뒤였다. 요리를 해 주겠다는 범지훈의 말에 백사현은 퇴근 후라 피곤할 텐데 그래도 괜찮으냐는 염려를 했다. 그래도 범지훈의 요리라는 것에 기쁜 태는 도통 숨기지 못했다. 그게 참 웃음을 나오게 했다.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끌어 올려진 입꼬리에 괜스레 입술을 매만졌다. 연애란 게 이렇게 좋았던가. 대표실에 자신밖에 없다는 게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착한 부엌에서 범지훈은 걸음을 멈췄다. 조리대 위에 올려져 있는 건 여러 개의 그릇들이었다. 깔끔하게 손질된 식재료들이 담긴 그릇과 접시들. 먹고 싶은 걸 생각해 두라고 했더니 식재료 손질로 얘기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조리 시간은 훨씬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된장찌개에 넣으면 좋을 채소들에 이건 볶음밥용인가? 잘게 다져진 채소들을 보며 범지훈은 생각했다. 어쨌든 부엌에 온 원래의 목적인 냉장고의 문을 열며 범지훈은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지잉지잉. 하지만 진동은 곧장 식탁 위에서 들렸다. 덩그러니 놓인 백사현의 핸드폰을 확인한 범지훈은 통화 종료를 눌렀다. 잠깐 화장실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그제야 제대로 냉장고 안을 보게 된 범지훈은 손질된 낙지와 불고기용 소고기가 있는 것에 시선을 던졌다. 흠, 된장찌개에다 낙지 불고기를 할까? 잘게 다져진 채소는 계란말이용으로 쓰면 좋겠는데. 계란까지 확인한 범지훈은 냉장고 한 칸에 언제나처럼 일렬로 정렬되어 있던 에비앙을 꺼내 뚜껑을 땄다. 시원한 물을 달게 들이켜던 범지훈의 귓가에 이쪽으로 다가오는 슬리퍼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형, 왔어요?”

듣기만 해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물을 마시던 그대로 시선을 돌린 범지훈의 시야에 백사현이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에 수건을 덮어쓴 채였다. 범지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르르 눈꼬리를 휘어 내리는 백사현을 보며 범지훈은.

“푸훕.”

물을 뿜었다. 그리곤 사레가 걸려 거친 기침을 토해 냈다.

“괜찮아요?”

“오지 마.”

놀란 백사현이 한 걸음 다가오려던 순간, 범지훈은 손을 뻗어 막았다. 순순히 걸음을 멈춰 준 백사현에 마음 놓고 기침을 마친 범지훈은 그대로 고개를 들었고 백사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바지, 큼. 바지를 안… 입었네?”

“네. 급하게 짐을 챙겨 온다고 잠옷으로 입을 만한 옷을 깜박했어요. 그래서 좀 빌렸는데 괜찮아요, 형?

“어… 어어.”

“바지는 길이가 안 맞아서 못 입었어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백사현이었지만 범지훈은 아무렇지가 않았다. 범지훈이 편하게 입던 박스 티. 범지훈에게도 꽤 큰 편이라 백사현이 입어도 헐렁한 것은 기장까지도 길어 범지훈이 입으면 엉덩이까지 가려 주는 게 백사현에게는 허벅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게다가 하얀 맨다리. 그것 하나만으로 어쩐지 가빠지는 호흡에 최대한 백사현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범지훈은 조리대 쪽으로 몸을 틀었다.

“옷도 안 갈아입고 바로 요리하려고요?”

그러자 범지훈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며 백사현이 물었다. 부산스레 싱크대 찬장을 열었다 닫았다 안에 든 빈 그릇들만 뒤적이는 범지훈에게 바짝 붙어 선 백사현의 가슴이 범지훈의 등에 닿을 정도였다. 그 순간 찬장에 손을 올렸던 범지훈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손… 손, 씻어야겠어.”

의연한 척 말을 하지만 당황한 게 그대로 티가 나는 목소리로 범지훈은 서둘러 몸을 돌려 화장실로 걸었다. 거의 경보에 가까운 빠른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혼자 남은 부엌에서 백사현은 멀어져 가는 범지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맛있어요, 형.”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떠먹어 본 백사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범지훈은 식탁에 앉은 뒤에야 보이지 않게 된 백사현의 맨다리에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맛있다니 다행이네. 사현이 네가 재료 손질을 미리 해 둔 덕분에 쉽게 만들었어.”

“정말요? 제가 요리를 해 놓으면 좋은데 도저히 간을 못 맞추겠더라고요. 그걸로라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에요.”

헤헤 미소 지으며 한입 가득 밥을 퍼서 와앙 문 백사현의 뺨이 빵빵해졌다. 귀여워. 범지훈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흐뭇해졌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소리는 눈앞의 백사현을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생각난 얼굴로 범지훈이 꺼내 놓은 건 딸기 우유 빛깔의 카드였다. 범지훈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커다란 카드는 귀퉁이에 앙증맞은 하얀 리본까지 달려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범지훈의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그건 청첩장이었으니까.

“다음 주에 결혼이라더라.”

“주어가 빠졌는데요, 형.”

빙긋 웃어 보이는 백사현이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꼭 형이 결혼하는 것 같아서요.’ 이어진 뒷말엔 더 놀란 범지훈이 재빨리 덧붙였다.

“곽팔두 말이야.”

“팔두 씨가요?”

금세 환하게 표정이 펴진 백사현이 건네받은 청첩장을 펼쳤다. 입체 카드였는지 펼치자마자 신부와 신랑 캐릭터가 불쑥 솟아오른 것에 범지훈의 시선이 꽂혔다.

“응, 오늘 회사에서 나눠 주더라고. 그건 네 거야. 전해 달라더라.”

“잘됐네요. 안 그래도 형 통해서 뭘 보낸다고 연락 왔던데 그게 이거였구나.”

“참석 가능해? 팔두야 너 못 온다고 해도 이해하는데….”

“가야죠. 누구 결혼식인데요.”

생각보다 더 백사현과 곽팔두가 친해진 것 같았다. 범지훈의 시선이 그런 백사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왜요, 형?”

“조금… 질투가 나서.”

“…네?”

멍한 표정의 백사현이 되물었다. 범지훈은 대답 대신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곧 유부남이 될 부하 직원이랑 애인이 친하다고 질투를 하는 스스로가 조금 한심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얼빠져 있던 백사현은 잠시 뒤 범지훈처럼 식사를 시작했지만, 신경이 쓰인 범지훈은 백사현을 흘끔 바라보았다. 백사현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

뱀의 입 속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민 느낌이었다. 범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내 발로 무덤을 팠다고. 식사를 마치고 뒷정리는 다 함께 했지만 범지훈은 도통 정리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수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서야 조금 정신을 차렸지만, 범지훈처럼 쪼그려 앉아 함께 수저를 주우려는 백사현엔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흰 다리가 자꾸만 눈길을 사로잡아 죽을 맛이었다. 아니, 사실은 백사현이 고개를 숙이며 헐렁한 옷 사이로 설핏 드러난 가슴팍에도 눈이 가서 범지훈은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상상을 했다.

자신이 이렇게나 본능에 충실한 짐승인지는 처음 알았다. 연애 공백기가 오래되었을 때에도 나름 혼자서 잘 참고 살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꽤 어려웠다. 역시 백사현에게 집으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하지 말았어야 하나 싶다가도 또 집에 없는 백사현에는 후회할 것 같았다. 결국, 범지훈은 백사현을 그냥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설거지를 하겠다는 백사현과는 내가 하겠다느니 하며 아웅다웅할 수도 없었다.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버린 범지훈은 다급히 방문을 닫고 그 문에 기댄 채 가쁜 숨을 터트렸다. 정말로 위험했다.

[형~]

하지만 방문 너머로 불러 오는 백사현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심심한데 설거지할 동안만이라도 옆에 있어 주면 안 돼요?]

저 부탁을 거절할 도리는 범지훈에게 없었다. 백사현이 설거지를 할 동안 멀리 떨어진 거실 소파에 앉아 있기로 합의를 본 범지훈은 TV에만 죽어라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머리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고개만 돌리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백사현이 있었다. 다리를 드러낸 채 앞치마까지 매고 있는 백사현이. 레이스나 프릴이 달린 것도 아니고 범지훈도 종종 이용하는 밋밋한 검은 앞치마일 뿐이었지만 백사현이 입고 있으니 느낌이 달랐다. 범지훈은 이러다 정말 제 뺨이라도 쳐야 할 것 같았다. 방을 따로 쓴다는 게 지금으로선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내일은 사현이가 입을 반바지라도 대량으로 사 와야겠다. 그렇게 다짐하는 범지훈은 결국 제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그래도 하나 다행인 건 백사현 때문에 범지훈은 본인이 무슨 고민을 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김정학 상무를 만나고 곽팔두에게 청첩장을 받으며 하향 곡선을 그렸던 기분은 백사현에 의해 상승 곡선을 그렸다. 물론 상승 곡선을 그린 건 정확히는 기분보다는 욕망 쪽이었다.

***

범지훈은 요즘 하루하루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살고 있었다. 물론 살얼음판 밑에 도사리고 있는 건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살얼음판 같은 얇은 이성이 깨지면 한 마리의 맹수가 될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상황이란 거였다. 애인과의 동거가 이런 거였나? 어릴 적 가족들과 살았던 것 외엔 지금까지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살을 부대끼고 산 적이 없었으니 범지훈은 당황스러웠다.

평일은 출근을 하니 이른 아침과 저녁 외엔 백사현을 오랜 시간 볼일이 없었다. 하지만 동거 후 맞이하게 된 첫 주말은 이야기가 달랐다. 백사현이 아침잠이 많은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범지훈이 아침마다 출근할 때에도 백사현은 여전히 꿈나라였으니까. 그 자는 얼굴을 보고 출근하는 게 범지훈에게는 낙이 되었지만, 그것도 오래는 하지 못했다. 잠옷을 깜빡했다는 백사현의 홈 웨어가 범지훈의 무채색 박스 티로 바뀐 후부터 범지훈이 자는 백사현을 보려고 방문을 열면 이불 밖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는 맨다리들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범지훈은 뜨거워지는 귀에 서둘러 방문을 닫았고 회사에서는 불쑥불쑥 백사현의 다리가 생각났다. 다리 페티시가 있나? 라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날, 길이에 구애받지 않는 반바지를 대량으로 사서 퇴근했지만 반바지를 입은 백사현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사건은 벌어졌다. 그날도 출근 전, 고민하다 백사현의 방문을 살짝 열었던 범지훈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이불 밖으로 몸을 반쯤 내놓은 채 말려진 이불을 끌어안고 자는 백사현 때문이었다. 다리 하나가 전부 나와서 이불 위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데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쪽에 시선이 갔다. 몸에 붙는 드로즈 속옷에 감싸인 백사현의 엉덩이에까지 말이다.

헉. 결국 숨을 들이켠 범지훈은 큰 소리를 내며 방문을 닫고 말았다. 백사현은 잘 때 속옷 외엔 아래에 아무것도 입고 자지 않는 모양이었다. 범지훈은 그날 출근해서는 우정선에게 얼굴이 온통 빨간데 열이 있느냐는 걱정을 들었다. 그리고 온종일 백사현의 엉덩이가 머릿속을 떠나가질 않았다.

아, 우정선은 요즘 부쩍 여사빈과 친해진 것 같았다. 먼젓번엔 회사에서 여사빈과 통화를 하는 것도 우연히 들었다. ‘여사빈 너 우리 집에 시계 놓고 갔더라.’라는 말로 시작한 우정선은 여사빈과 통화를 하며 꽤 즐거운 듯 보였다. 웬일로 정말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으니까. 여사빈이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정선에게 마음 맞는 친구가 생긴 것 같아 범지훈은 뿌듯해졌다. 그런데, 여사빈이 우정선의 집에서 자고 가기라도 한 건가? 그 정도까지 친해질 줄은 예상 밖이었다.

여하튼 문제는 둘의 첫 주말부터 시작됐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칼같이 떠진 눈에 기상한 범지훈은 백사현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보통 오전 10~11시쯤 백사현이 일어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 일찍 일어난 탓에 백사현을 기다리며 범지훈은 심심해졌다. 주말도 운동이나 요리 등으로 알차게 보내던 범지훈이었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의 주말과 같이 사는 사람이 있을 때의 주말은 다른 법이었다. 게다가 백사현과의 첫 주말인 만큼 설레기도 했다.

범지훈은 시간이 남아도는 만큼 차를 타고 백사현과 조금 먼 곳으로 드라이브라도 갈까, 아니면 외식을 할까 즐거운 고민을 이어 갔다. 10시 반이 되었을 무렵엔 범지훈이 못 참고 백사현의 방문 앞을 기웃거렸다. 들어가서 깨울까 조금 더 기다릴까 고민을 하던 범지훈은 결국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이불도 덮지 않고 대자로 뻗어 잠든 침대 위의 백사현 때문이었다. 커다랗게 뜨인 범지훈의 시선이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백사현의 얼굴에서부터 천천히 내려갔다. 자느라 티가 말려 올라가 드러난 백사현의 새하얀 배부터 모양 예쁜 배꼽 그리고 그 아래 속옷 하나만 입고 있는 하반신까지. 주춤하며 범지훈은 뒷걸음질을 쳤다. 살에 달라붙는 드로즈라 하반신의 윤곽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결국, 입을 틀어막은 범지훈은 백사현을 깨우지도 못하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백사현의 방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아무 방에나 들어가 허둥지둥 문을 닫아건 범지훈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미 두 귀는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숙인 목덜미 또한 귀랑 별반 색이 다르지 않았다.

“…미치겠군.”

범지훈은 깨달았다. 이제 백사현이라면 뭐든 좋은 지경이라는 걸. 범지훈의 취향인 순둥하고 예쁜 얼굴과는 다르게 성난 짐승처럼 단단한 몸도, 복근이 진 배도, 속옷에 감싸인 그곳도. 분명 범지훈만 했다. 아니, 오히려 범지훈보다 크다면 컸지 빈말로도 작다고는 도저히 할 수가 없는 크기였다. 성난 짐승이란 건 그런 크기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범지훈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 백사현에게 자신의 크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더 이상 못 하겠다고 했으니. 범지훈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

백사현과 첫 주말을 보내고 범지훈의 생각은 더욱 깊어갔다. 함께 사는 연인들이라면 모두 할 법한 일상적이고 달달한 주말을 보냈지만, 백사현과 함께 있으면서도 범지훈은 자주 딴생각을 했다. 함께 사는 연인들이라면 꼭 할 법한 한 가지는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범지훈도 조금씩 애가 다는 느낌이었다. 범지훈의 커다란 박스 티와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백사현만 봐도 범지훈은 이젠 귀가 발갛게 익었다. 박스 티가 기장이 길긴 했는지 반바지를 입어도 바지의 절반을 덮어서 입으나 마나 한 것 같기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긴 바지를 사다 줄 것을. 백사현이 흰 다리를 드러내는 것도 똑같았고 어쩌다 티가 내려와 한쪽 어깨를 조금 드러내는 것엔 범지훈은 숨을 멈췄다. 백사현은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인데 모든 게 다 유혹으로 다가왔다.

이러나저러나 시간은 흘러 곽팔두의 결혼식은 다가왔다. 아끼는 사람의 결혼식이었으니 범지훈도 신경 써서 준비를 했다.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던 검은 정장과 와이셔츠 대신 가벼운 면 티를 입은 범지훈이 선택한 건 옅은 회색빛의 캐주얼 수트였다. 백사현은 검은 폴라 티를 받쳐 입은 후 베이지색 수트를 걸쳤다. 연예인은 연예인인 것인지 수트 하나로 이미지가 바뀌는 느낌이었다. 고등학생 같아 보이던 백사현도 오늘만큼은 20대로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식장은 꼭 야외 같은 느낌이 나는 실내 예식장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생화처럼 섬세한 조화와 인조 넝쿨과 풀 등으로 자연적인 느낌을 내더니 들어온 내부는 천장이 커다란 유리 돔으로 되어 있었다. 하늘도 오늘이 결혼식인 걸 축하라도 하듯 푸른빛을 선명히 드러내며 따뜻한 햇볕을 내리쬐고 있었다.

“대표님, 사현 형님!”

곽팔두는 멀리서만 봐도 오늘의 주인공 중 하나인 신랑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다가오는 범지훈과 백사현을 발견하고 반갑게 외치는 곽팔두의 표정이 싱글벙글했다. 예식장 내의 사람들의 시선도 너나 할 것 없이 이쪽을 향해 모였다.

“결혼 축하한다.”

“축하해요, 팔두 씨.”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 범호 사람들도 아까 와서 지금 안에 들어가 있어요.”

훈훈한 인사를 주고받는 세 사람을 보며 하객들이 저희끼리 속닥였다. 신랑한테 저렇게 잘생긴 지인이 있었나? 대표님이라는데? 뭐야, 둘 다 연예인 아니었어? 저 사람은 백사현 같은데. 어쩐지 주인공이어야 할 신랑보다는 두 하객에게 더 관심이 집중된 느낌이었다. 그걸 눈치 못 챌 범지훈이 아니기에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사현 형님께도 진짜 감사드려요.”

하지만 백사현에게 따로 감사 인사를 하는 곽팔두에 조금 지체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렇게 감사한지 궁금해진 범지훈이 식장으로 들어가며 백사현에게 물었다. 축의금 외에 범지훈처럼 따로 결혼 선물이라도 챙겨 준 건가 싶었다.

“그것도 있긴 한데, 또 다른 선물도 있어서요.”

“그게 뭔데?”

“이따 알려 줄게요.”

빙긋 웃으며 백사현이 말했다. 궁금했지만 범지훈은 기다리기로 했다. 안에는 먼저 도착한 회사 사람들이 있었다. 타이거들과 다른 부서의 몇몇 사람들이었다. 조금 있다가는 우정선 또한 도착했다. 많은 하객에 북적이던 식장은 예식 시간이 가까워져 오자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찾아 앉으며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자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양가 부모석에 앉아 있던 예비부부의 어머니들이었다. 그녀들은 촛불 점화를 시작했다.

[신랑, 신부 입장!]

그리고 본격적인 예식이 시작되었다. 새하얀 스포트라이트가 버진 로드의 초입에 선 신부와 신랑을 밝혔다. 크림색 웨딩드레스를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신부와 누가 봐도 긴장한 얼굴의 곽팔두가 사이좋게 팔짱을 낀 채 대리석으로 된 버진 로드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례는 생략되었다. 서로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 준 부부가 가볍게 입을 맞추며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이어지는 건 이제 부부가 된 연인이 어떤 식으로 첫 인연을 맺고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시간들을 정성스레 편집한 영상이었다. 커다란 스크린 속 연인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감상하던 범지훈의 옆에서 백사현이 일어선 건 그때였다.

“잠깐 다녀올게요, 형.”

작게 속삭이는 백사현에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화장실이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백사현이 떠나고도 영상은 계속 이어졌다.

[곽팔두. 너 내 신랑 하자, 나랑 결혼하자고!]

녹음을 했는지 새까만 화면과 함께 우렁차게 프러포즈를 하는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조, 좋아요. 누나.’ 하는 수줍은 곽팔두의 대답이 들렸고 하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영상이 끝날 때까지도 백사현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상을 본다고 암전되었던 식장에 다시 불이 켜지는 대신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불빛은 단상 위로 올라와 진행을 시작하는 진행자를 비췄다.

“자, 이제 다음 순서죠? 신랑 곽팔두 님의 친구분이 준비한 축가인데요. 여러분도 잘 아시는 아주 유명한 분이세요.”

그 말에 하객석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영상을 감상하느라 앉아 있던 신부와 신랑이 자리에서 일어서 어느 한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얀 그랜드 피아노 바로 앞, 비어 있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공간에 지금은 누군가 서 있었다. 진행자를 비추던 불빛은 어느새 꺼지고 스포트라이트는 그 한 사람을 비추기 시작했다.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가수 백사현 씨의 축가입니다, 여주환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환호성이 터졌다. 하객들이 놀란 것처럼 하객 속에 섞인 범지훈 또한 놀란 얼굴을 했다. 이따 알려 준다던 그 선물의 정체가 설마하니 노래였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반주로 들려왔다.

***

“어, 이사님. 시계가 바뀌셨네요?”

눈치코치 없던 직원도 뒤늦게서야 알아볼 정도로 손목의 시계는 꽤 트레이드마크였던 모양이었다. 여사빈은 침음을 삼켰다. 그래. 다 알고 있으니 그만 좀 물어봤으면 했다. 마음에 들었던 시계라 항상 차고 다녔었는데 없어지고 나니 손목이 허전하여 새로운 시계를 차기 시작했지만, 시계가 바뀐 후 만나는 사람마다 저놈의 시계 이야기를 하니 여사빈은 이젠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시계를 다시 찾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버린 셈 칠 작정이었으니까.

[여사빈 너 우리 집에 시계 놓고 갔더라.]

우정선과 삼겹살집에서의 저녁 이후, 다음 날이 되자마자 바로 걸려 온 전화였다. 받을 생각도 없었는데 아니, 우정선의 번호인 줄 미리 알았다면 아예 받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하는 일이 일이니만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대도 일단 받고 봤었던 여사빈은 받자마자 들려온 목소리가 우정선이라는 것에 후회하고 말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시계를 놓고 갔다고?]

[기억 안 나? 어쩐지 어제 많이 마시는 것 같더라니.]

놀란 척하며 우정선이 물었다. 여사빈은 태연하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기억나지. 너무 잘 기억하고 있으니 문제였다. 차라리 필름이라도 끊기면 나았을 것을.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건데? 범지훈한테 물어본 거야?]

결국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여사빈은 입을 열었다. 서로 번호 교환은 한 기억이 없으니 충분히 물어볼 만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우정선의 답은 뻔뻔할 지경이었다.

[아니? 너 자는 사이에 네 지갑 뒤져서 명함 빼 갔는데?]

[…미쳤어, 너?]

‘그거 절도인 거 알아, 몰라?’ 어이없는 여사빈의 물음에도 우정선은 얼굴에 몇 겹의 철판을 씌운 양 당당했다.

[생각해 보니까 서로 명함 교환도 안 한 것 같아서. 고등학생 때는 그런 거 필요 없대도 지금은 사회인이니까 명함 교환은 했어야지. 아, 네 지갑에도 내 명함 꽂아 놨다. 확인해 봤어?]

[뭐?]

놀란 여사빈이 서둘러 지갑을 꺼내 펼쳤다. 뒤적인 가죽 반지갑 안, 빽빽한 지폐들 속에 보이지도 않게 끼워져 있는 건 낯선 명함 하나였다. [범호 캐피탈 대표실 직속 비서 팀장 우정선] 이라고 적혀 있는 하얀 명함을 보며 여사빈은 할 말을 잃었다.

[지갑에 나보다 더 든 게 많더라? 이럴 줄 알았으면 고깃집에서부터 네 지갑을 뒤졌어야 했는데. 괜히 내 걸로 결제했네.]

[너 좀… 약간, 또라이 같아.]

그리고 우정선은 여사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장대소를 했다. 얼마나 크게 웃음을 터트리던지 질린 얼굴이 된 여사빈이 핸드폰을 귀에서 조금 떼어 낼 정도였다.

[왜? 나 이 정도는 받을 자격 있잖아. 어제 네가 한 일들 기억 안 나?]

겨우겨우 웃음을 그친 우정선이 물어 오는 말엔 여사빈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어제라면, 우정선과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셨던 그때였다.

우정성이 아니라 우정선이라고…? 여태껏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데서 오는 당황스러움에 잠깐 침묵을 지켰지만 여사빈은 곧장 사과했다. 그리곤 소주잔을 한 번에 비웠다. 사과는 사과고 자신이 범지훈의 취향이 아니라는 데에서 느껴진 답답함 때문이었다. 우정선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까 고등학생 때부터 범지훈과 접점이 있던 남자들은 모두 다 여사빈이나 우정선 같은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까 하나같이 작고 부드럽고 가녀린 미소년 타입의 남자들뿐이었다.

그에 반해 자신이나 우정선이나 일단 신장부터가 180대였다. 비록 우정선이 몇 cm 더 작긴 했지만 180대는 분명 180대였다. 게다가 소년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외모였다. 어느새인가 여사빈은 우정선을 자세히 관찰하게 됐다. 솔직히 우정선도 얼굴로는 빠지지 않는 편이었다. 잘생긴 아이돌과 배우 등의 연예인들을 자주 보고 사는 여사빈이기에 외모로는 빈말은 못 했다. 게다가 우정선 또한 고등학생 시절 사대천왕 중 하나였다.

여사빈과 우정선, 범지훈이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는 이모티콘을 남발하던 이상한 인터넷 소설들이 갓 유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애들 사이에서는 미남 사대천왕이라는 별명도 암암리에 돌았다. 원래는 삼대천왕이었던 것 같은데 고2로 올라가며 어느새인가 사대천왕이 됐다. 아무튼, 그 미남 중 하나가 우정선이었다. 냉미남 옆의 온미남이라며 좋아하던 이들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했다. 범지훈의 범접할 수 없는 조각 같은 잘생김의 그늘에 가려져서 그렇지 우정선도 여사빈이 보기에는 한국적인 미남 축에 속했다. 진하지 않은 얇은 쌍꺼풀에 오뚝한 콧대와 모양 예쁜 콧방울, 그리고 적당히 도톰한 입술까지. 최근에 모 유명 드라마의 서브 남주로 출연해 주가가 올라가고 있는 남배우 중에 저런 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사업가가 되어 우정선의 외모를 유심히 보게 된 여사빈에 우정선은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봐?’ 툭 뱉는 말엔 ‘아니, 너 꽤 잘생겼다 싶어서.’라고 여상히 답하는 여사빈을 우정선이 놀라 빤히 쳐다봤다.

[사대천왕 할 만하네.]

그렇게 결론 내리곤 왜 자신은 범지훈의 취향이 아닌가에 속상해져 여사빈이 술을 비우니 우정선은 되레 이렇게 말했다.

[뭐라는 거야? 사대천왕은 너잖아.]

그 말에 깜짝 놀란 건 여사빈이었다. 나?

[어, 너. 여자애들이 그러는 거 들었어. 너랑 하나는 또 누구였지? 우리 옆 중학교 애였나?]

[…맞아. 옆 학교 중학생.]

그제야 여사빈은 깨달았다. 남녀공학이니만큼 교내 커플들도 종종 생겼고 이성끼리는 수줍을 때가 많아 여자애들은 미남 사대천왕이라며 저희끼리 떠들어 댔음에도 당사자에게는 들리지도 않게 얘기조차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 당사자인 우정선은 본인이 사대천왕인 걸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건 여사빈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고등학교도 아니고 뜬금없이 옆 중학교 애가 사대천왕 중 하나인 건 둘 다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실제로 같은 동창인 세 남자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중학교도 함께 운영하고 있었는데, 실물로 본 적은 없었지만, 소문으로 듣기에는 그 중학생 남자아이가 아역 배우 출신이라고 했던 것 같았다. 그러면 미남이란 건 안 봐도 뻔할 뻔 자였다.

[그 애랑 너랑 나랑이면 하나는 그럼 누군데?]

[누구긴 누구겠어? 범지훈이지. 범지훈이랑 매일 붙어 다니니까 너도 몰랐나 보네.]

[지훈이랑… 내가…?]

[어. 네가. 범지훈 옆에 붙어살다시피 하니까 외모에 대한 감이 죽은 모양인데 너도 꽤 생겼어. 엔터 이사인 내가 보장해. 이래 봬도 내 직업이 원석 캐내고 가꾸기잖아. 그런데 너,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도 어떻게 범지훈을 좋아한다는 걸 오랫동안 감쪽같이 속일 수 있던 건데?]

뜻밖에 우정선과는 이야기가 술술 이어졌다. 여사빈의 입담이 원래 좋은 것도 있었지만 무뚝뚝한 범지훈과는 다르게 우정선은 말수가 적당한 편이었고 둘 사이에 범지훈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대화가 더 잘 됐다.

동병상련이라고 여사빈은 우정선과 대화를 하며 비어 가는 술병들이 하나둘 늘어 가는 것도 몰랐다. 우정선 또한 취기가 올라와 뺨이 달아올라 있었고 자리를 파할 때가 돼서는 여사빈은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잠까지 슬슬 오니 바닥에 누우려는 여사빈을 추스르며 우정선은 계산까지 마치고 택시를 불렀다. 택시 안에서 깜빡 잠이 들어 버린 탓에 중간에 여사빈의 기억이 없어진 것도 당연했다.

깨어난 건 깜깜한 방 안에서였다. 여기가 어딘지도 확인 못 하고 갑작스레 올라온 토기에 여사빈은 입을 틀어막았다. 서둘러 침대를 벗어나려던 여사빈은 무언가를 밟았다. 윽. 낮은 신음이 발아래에서 들린 것과 동시였다.

[…뭐야, 나는 왜 밟아?]

잠기운과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우정선의 물음에도 여사빈에게 사과할 정신 따윈 없었다.

[토할 것 같… 욱.]

[뭐…? 안 돼! 야, 참아. 여사….]

그렇게 남의 집 남의 방 안 남의 침대 아래에다 3콤보로 여사빈은 먹은 걸 게워 냈다. 침대 위에다 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게워 내는 걸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은 우정선의 손 위에도 잔해들이 남을 정도였으니 그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시원하게 토를 한 뒤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어 더러운 바닥 위로 쓰러지려는 걸 받아 준 게 우정선이었다. 더러워지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여사빈을 겨우 안아 들어 추스르며 쌍욕을 하는 우정선에게 여사빈이 한 말은 오줌 마렵다는 거였다. 취중이라서 그게 가능했지 조금이라도 정신이 들었다면 여사빈은 절대 그런 말 따윈 입에 올리지도 않았고 남의 집과 남의 손 위에도 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계는 아마 그때 화장실에서 볼일을 해결하고 손을 씻으며 세면대 위 선반에 풀어 두고는 챙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손을 씻고는 화장실 바닥에 다시 드러누우려는 여사빈을 발견한 게 우정선이었다. 졸려서 비몽사몽 하는 여사빈의 입가를 욕을 하며 닦아 주고 옷에 튄 토사물은 없나 살핀 뒤에야 질질 끌어 침대로 옮긴 우정선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여사빈은 또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온갖 진상이란 진상은 다 부리고 다음 날, 뒤처리에 다크서클이 코끝까지 내려와 달게 자는 우정선을 팽개치고 여사빈은 어젯밤의 모든 기억을 선명히 하고 있는 채로 도망을 가 버렸다. 그럴 수 있는 건 다시는 안 볼 생각인 사이라서 가능한 짓이었다. 물론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어서 여사빈은 보이는 빈 종이에 [신세 져서 미안하다.]라는 한마디를 휘갈겨 쓰고 우정선의 가슴 위로 올려놓긴 했다.

[미안하다며? 그렇게 써 놨더라? 하긴 양심이 있으면 미안해야지. 안 그래?]

여사빈은 할 말이 없었다. 간신히 입을 열어 원하는 게 있냐는 물음만 했다. 그리고 우정선은 뜻밖에 비싼 곳에서 밥 한번 사라는 담백한 대답을 했다. 그 대답을 들으며 여사빈은 어쩐지 범지훈이 생각이 났다. 동시에 만나 달라며 질척여 댔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땐 범지훈을 좋아하기 전이었던지라 범지훈이 싫어하는 태를 내는 걸 전화 너머로 그대로 들으면서도 그게 너무 재밌어 숨죽여 웃었었다. 하지만 범지훈 같은 꼴이 되고 나니 여사빈은 역지사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통화를 끝내자마자 여사빈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우정선의 번호를 차단하는 거였다. 신세를 갚는다고 해도 쪽팔려서 차마 우정선의 얼굴을 맨정신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여사빈은 우정선을 만나지 않고 신세를 갚기로 했다. 그건 바로 범호 캐피탈 대표실 직속 비서 팀장인 우정선 앞으로 선물들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래. 오히려 잘 됐다. 그렇게 난리를 쳤는데 이 정도도 하지 않고 입을 닦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던 참이었다. 그러고서 며칠이 지났다.

우정선이 선물들을 받고 만족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연락이 없는 걸로 봐선 그렇게 끝이 난 모양이었다. 바뀐 시계가 채워진 어색한 손목을 돌리던 여사빈은 연습실로 내려갔다. 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건 모여 앉은 여러 명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여사빈이 가장 아끼면서 가장 애정을 가지고 있는 PS 엔터테인먼트의 간판 아이돌 그룹이자 여사빈의 첫 론칭 보이 그룹이었다.

[-갈게요. 아름다운 당신에게.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할게요. 아름다운 당신이.]

그런데 어딘지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여사빈의 시선은 옹기종기 모인 남자들의 중심에서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멤버를 향했다. 정확히는 그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신경이 쏠렸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어?”

“어? 형! 오셨어요?”

여사빈의 물음에 그제야 온 걸 눈치챈 남자들이 하나둘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리던 연습생 시절부터 봐 왔으니 회사의 이사라지만 여사빈과는 형 동생 하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형도 혹시 보셨어요? 지금 너튜브 인기 급상승 영상 1위예요.”

“헐, 대박. 형들. 이제 확인했는데 실검도 떴어.”

“미쳤다. 역시 에스네. 백사현 선배 대박.”

너도나도 떠드는 소리 속 백사현이란 세 글자에 여사빈은 집중했다. 옮겨지는 걸음은 노래가 흘러나오는 태블릿 PC를 향했다.

“그 사람이 왜?”

“아, 그게 저희 지금 백사현 선배 축가 영상 보는 중이거든요.”

“…축가?”

그리고 보게 된 화면 속엔 누군가의 결혼식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백사현의 전신 샷이 담겨 있었다. 일반인이 멀리서 찍은 건지 그렇게 선명하진 않은 화질로 이따금 흔들리기도 하는 영상이었지만 백사현인 건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노랫소리 또한 분명했다.

[말하고 싶어요. 아름다운 당신에게.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와, 진짜 잘 부른다. 저 부드러운 고음 어떡하냐.”

“좀 조용히 해 봐. 사현 선배 노래 안 들리잖아.”

쑥덕이는 남자들 속에서 여사빈은 영상에만 눈을 고정했다. 분명했다. 백사현이 부르는 노래는 여사빈에겐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진짜 좋네. 야, 근데 이거 노래 제목이 뭐라고?”

“아까 여기 사회자가 그랬잖아. 여주환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라고.”

“…어? 근데 여주환이면 형 아버지 성함 아니에요?”

“맞네! 형네 아버지! 예전에 가수 하셨댔잖아요.”

“미쳤다. 찾아보니까 이거 1990년에 낸 노래인데 지금 음원 사이트 100위에 진입해서 올라오는 중인데?”

백사현 파워를 외치며 흥분해서 떠드는 남자들이었지만 여사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당신에게. 그건 돌아가신 아버지가 만든 노래의 제목이었다. 여사빈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무정한 아버지의 생에 마지막 곡. 태어나서 지금껏 얼굴 한번 실제로 본 적 없지만 그래도 아버지라고 여사빈은 그의 목소리가 담긴 모든 노래들을 알고 있었고 이따금 듣기도 했다.

그런데 이걸 지금에 와서야 다른 가수를 통해 다시 듣게 되니 뭐라고 할까. 여사빈은 어쩐지 마음 한쪽이 저릿해지는 느낌이었다.

백사현이라는 이름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싱어송라이터의 마지막 곡은 발매된 지 30여 년이라는 세월 만에 음원 사이트 상위권까지 진입하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만들어 낸 백사현의 축가 영상은 동영상 플랫폼의 인기 급상승 순위에서 며칠째 내려가지 않았고, ‘아름다운 당신에게’는 각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가뿐히 기록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시작으로 음원 사이트 100위권에 조금씩 진입하기 시작하는 건 여주환의 이름으로 불린 다른 곡들이었다. 양산형 음악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은 새롭게 불어오는 레트로 음악의 바람에 반가워했다. 게다가 백사현의 목소리로 부르지 않더라도 여주환의 원래 목소리 자체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10대~50대까지 세대 공감 뮤직 차트에는 ‘아름다운 당신에게’ 외에도 여주환의 노래들이 어느새 하나 이상씩 실렸다. 남녀 가릴 것이 없었다. 연예계는 백사현이 부른 ‘아름다운 당신에게’라는 노래에 주목하며 그다음으로 곡을 직접 쓰고 부른 ‘여주환’이라는 죽은 싱어송라이터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 인생과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안타까운 사연까지. 연예계는 그것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빛을 보지 못했던 싱어송라이터 여주환의 모든 흔적을 좇았다. 그 흔적을 좇다 보니 나오는 건 그의 가족이었다. PS 엔터테인먼트 이사 여사빈. 여주환의 피를 이은 유일한 자식이었다.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벌써 며칠째 PS 엔터테인먼트 전화기는 불이 났다. 이젠 여사빈의 개인 핸드폰까지 울려 대서 여사빈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연예계 기자들이 끈질길 줄은 알았지만, 소속 연예인도 아니고 그 당사자가 되어 보니 여간 골치가 아픈 게 아니었다. 게다가 오늘은 방송국에서까지 연락이 닿았다.

실제로 거절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 여사빈은 아버지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태어나 지금껏 얼굴 한번 실물로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인데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있다고 해도 입을 열 생각 따윈 없었다. 무심한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여사빈의 존재를 몰랐다. 알았다면 가족을 이렇게 내버려 둘 리가 없을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끝까지 알리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다고 했지만, 여사빈의 분노는 아버지를 향했다. 상대의 진심을 귀찮게 여기던 자신의 망할 성격도 아버지를 닮아서 이 모양인 것 같았다. 어머니의 집착 또한 아버지에 의해 비롯된 것이기에 여사빈은 그냥 모든 게 아버지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그래도 아버지라는 게 뭔지 그게 그렇게 궁금해서 그의 얼굴과 노래를 찾아보고 듣는 자신에 가끔 어이가 없기도 했다. 지금도 방송국 전화를 거절하자마자 멈췄던 아버지의 무대 영상을 다시 재생한 여사빈은 헛웃음을 뱉었다. 핸드폰 화면 위로 재생된 동영상은 80년도에 찍어 화질이 엉망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아버지의 얼굴만큼은 선명했다.

즐거워 보이네요, 아버지. 속으로 중얼대는 여사빈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유약한 도련님 같은 분위기의 아버지는 지금 보기에도 흠잡을 곳 없는 미남이었다. 예전에는 샌님이나 기생오라비 등의 별명으로 불릴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게 미남이란 소리였다. 아무튼, 아버지는 여사빈이 보기에도 즐거워 보였다. 음악이 그렇게나 좋은지 스탠드 마이크에 입술을 붙여 노래하는 아버지의 눈매가 끝내는 둥글게 휘어졌다. 여사빈은 그걸 못마땅해하면서도 영상을 끄진 못했다.

어머니를 쏙 빼닮은 여사빈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아예 찾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꼭 햇볕 한번 못 쬐어 본 사람처럼 지나치게 새하얀 아버지의 피부와 특유의 색소 옅은 눈동자와 머리카락 색. 여사빈은 그걸 닮았다. 햇볕 아래에서 피부를 억지로 태우려고 해도 빨갛게 일어나기만 하지 어머니처럼은 타지 않던 것도, 어머니의 짙은 갈색 눈과는 다르게 옅은 갈색 눈도, 어머니의 짙은 갈색 머리와는 다르게 옅은 밤색 머리도 말이다.

그런 여사빈을 어머니는 가끔 가만히 보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어느 순간의 어떤 때를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사빈은 그럴 때마다 시선을 피했다. 생전 하지도 않던 염색 결심을 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갑자기 든 충동에 찾아간 샵에서는 지금 머리 색이 너무 예쁜데 굳이 짙은 색으로 덮어야 하냐며 오히려 더 옅게 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건넸다. 아버지의 흔적 중 하나를 어떻게든 지울 수 있다면 여사빈은 뭐든 상관없었다.

영상을 재생하던 중 전화가 걸려 온 건 그때였다. 또 방송국이거나 기자일 줄 알고 시선을 옮긴 여사빈은 숨을 멈췄다. 범지훈. 그 세 글자가 화면에 떠 있었다.

“어.”

잠시 숨을 고르고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컨디션이 안 좋다더니 이제 괜찮은 건가? 그때 약속한 대로 밥을 사려고 그러나?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나 긴장할 만큼 범지훈을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의문과 함께 여사빈의 생각이 이어졌다.

[범지훈이라니까 바로 받네.]

그리고 이어진 상대방의 목소리에 여사빈의 생각은 멈췄다.

“…우정선?”

[응, 난데.]

조심스레 꺼내 본 혹시에 우정선이 답했다. 여사빈은 하늘 위로 끌어 올려지던 기분이 바닥으로 처박히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다.

“네가 왜 범지훈 핸드폰으로 전화해?”

[안 그럼 네가 안 받을 것 같아서. 내 건 차단했더라?]

여사빈은 할 말이 없었다. 왜인지 우정선도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에 여사빈이 당황하길 잠깐, 우정선은 금세 말을 이었다.

[…지훈이 회의 들어간 동안에 내가 핸드폰 잠깐 맡아 두고 있어서 연락해 봤어.]

“범지훈은 폰에 잠금도 안 해 놓는대? 아니면 비서한테는 아무런 숨기는 게 없나?”

[그런가 봐.]

“…뭐?”

[나한테는 숨기는 게 없어서 그런가 봐.]

뭐야. 여사빈의 눈이 깜빡였다. 어쩐지 우정선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별건 아니고 오늘 시간 돼? 술 한잔만 하자.]

뭐랄까. 꼭 젖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

그래서 나왔다. 바나 호프집 같은 곳에서 볼 줄 알았는데 우정선이 오라고 한 곳은 막걸릿집이었다. 덕분에 참 다양한 곳을 가 보는 것 같아 여사빈은 낡아 빠진 막걸릿집 간판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여기는 몇 년의 전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사빈은 이런 곳은 또 처음이었다.

들어간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간판과는 다르게 새로 리모델링을 했는지 조선 시대 주막을 비슷하게 재현한 내부는 자리마다 창호지로 만들어진 파티션으로 나뉘어 있었고 방처럼 되어 있는 곳도 있었다. 제일 끝 방으로 오면 된다고 2시간 전에 우정선이 미리 문자를 보내 온 덕에 여사빈은 헤맬 필요도 없이 좁은 복도의 끝을 향해 걸어갔다.

“일이 있어서 좀 늦었는….”

창호지로 된 방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여사빈의 말이 멈췄다.

“왔어~?”

그러고는 좌식 테이블 위에 엎드리다시피 한 우정선이 여사빈을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 댔다. 테이블 위에는 막걸리를 담았던 걸로 보이는 노란 양은 주전자들이 이미 한가득 쌓여 있었다. 심지어 어떤 것은 바닥을 굴러다니기도 했다.

“너… 언제부터 와서 마시고 있었냐?”

조심스레 꺼내 본 질문에 우정선은 느릿하게 손가락을 펼쳤다.

“으음… 한 2시간 전?”

“미친놈아.”

결국, 여사빈은 이마를 짚었다. 저번에 추태를 부린 값을 오늘은 우정선을 챙기며 되돌려받는 건가 싶기도 했다. 처음 얘기하던 약속 시각보다 3시간 늦은 시각으로 잡긴 했지만, 설마 혼자서 2시간이나 일찍 와 미리 마시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찌 되었든 맛이 가기 일보 직전인 우정선을 불안하게 흘끔 바라본 여사빈은 방문을 닫고 자리에 앉았다. 그 와중에도 우정선은 주전자를 들어 잔에 붓고 있었다.

“그만 마셔.”

보다 못해 주전자를 붙잡았지만 우정선은 막무가내였다. 여사빈도 생각보다 센 우정선의 힘에 당황했다. 취한 사람을 이길 순 없다고 했지만, 삼겹살집에서 고주망태가 됐던 여사빈을 손쉽게 들어 부축하던 우정선을 생각하면 이건 충분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존심의 문제기도 했다. 저보다 조그만 우정선에게 힘으로 밀리기까지 하니 여사빈도 어느새 이를 악물며 주전자를 내려놓는 데 힘을 쏟았다.

“야…!”

그러다 결국 주전자가 우정선 쪽으로 휘청이며 안에 든 막걸리가 쏟아졌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놀란 여사빈이 소리쳤다.

“미친놈이. 그냥 내려놓으면 되지. 쓸데없이 고집은 왜 부려?”

우정선을 타박하며 여사빈은 테이블에 있던 휴지 곽에서 휴지를 북북 뽑아냈다. 그리곤 휴지 뭉텅이를 들고 우정선 쪽으로 돌아가 그의 바지에 쏟아진 술을 닦아 냈다.

“너… 근데 아까부터 왜 나한테 욕해~?”

“욕은 우정선 너도 했잖아. 다리나 들어 봐.”

“언제~?”

“그때. 삼겹살 먹고 너희 집에서 내가 토했을 때.”

“…기억하네?”

다 내 업보다 생각하고 여사빈은 우정선의 바지를 닦아 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래도 남이 토한 걸 치우는 것보단 낫겠지. 술이 깨면 우정선이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피차 못 볼 꼴 보인 거 여사빈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기억한다. 근데 술은 왜 이렇게 퍼마셨는데?”

“으음… 속상해서.”

“뭐가 속상해서?”

“범지훈한테 남자 생겼거든.”

그 말엔 여사빈도 손도 멈췄다. 우정선의 시선은 그런 여사빈의 얼굴에 따갑게 내리꽂혔다.

“…남자, 누구?”

“백사현.”

들어 올려진 여사빈의 시선이 멍하니 우정선을 향했다. 백사현이라면, 범지훈이 제 몸 아끼지 않고 납치범을 쫓아 구해 낸 사람이었다. 게다가 예뻤다. 범지훈의 취향대로 작고 하얗고 부드러운 선의 예쁜 남자였다.

“…회사 사람 결혼식에 가서 봤어. 백사현이랑 손까지 잡더라, 범지훈이.”

담담하게 뱉는 우정선의 말에 여사빈은 시선을 떨어뜨렸다.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가슴 안쪽이 뭔가 이상했다.

“내가… 비서니까, 범지훈 전 애인들 많이 봤거든? 하나같이 다들 오래 못 갈 것 같은 이상한 새끼들뿐이라서 사귀어도 괜찮았었는데.”

막걸리에 젖은 휴지 뭉텅이가 여사빈의 손 아래에서 질척였다.

“이번엔, 그게 아닌 것 같아서.”

한마디 한마디 우정선의 말이 이어질수록 여사빈의 가슴 안쪽도 더 이상해졌다. …이렇게나 좋아했다고? 여사빈 스스로도 자신의 상태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만 더 빨리 좋아할걸. 이젠 그런 후회까지 불쑥 들었다. 조금만 더 빨리 범지훈을 좋아할걸. 조금만 더 빨리. 백사현과 범지훈이 만나기 전에 더 빨리.

그때서야 여사빈은 깨달았다. 자신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범지훈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작은 한숨이 여사빈의 입술 새로 나왔다. 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시선이 들어 올려진 건 순전히 우정선 때문이었다. 여사빈의 양 뺨을 붙잡고 제 쪽으로 돌려세운 우정선은 빤히 여사빈을 바라보았다.

“너… 왜 예전의 나 같은 얼굴이야?”

그리고 그렇게 물었다.

“나 같은 얼굴 하지 마. 그거 힘들어.”

우정선은 술에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랑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고 있던 여사빈도 헛웃음을 흘릴 정도였다.

“…뭐라는 거야? 너 같은 얼굴이 뭔데?”

“울 것 같은 얼굴.”

“안 울어. 내가 나이가 몇인데 울어. 손부터 치워.”

“난 우는데. 오늘도 울었어.”

그 말에 문득 떠오르는 건 범지훈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던 오늘 낮의 우정선이었다. 얼굴을 붙잡은 우정선의 손을 치워 내려던 여사빈의 손길이 멈췄다.

“범지훈 옆에 있으면 많이 울게 돼. 그 새끼 진짜 나쁜 새끼다?”

“…그럼 옆에 있지 말지 그랬어.”

“그러게. 그냥 그 새끼 옆에 있지 말고 확 다른 사람이나 만나 버릴걸.”

“지금이라도 그러든가.”

툭 뱉어 버리며 여사빈은 그제야 우정선의 손목을 붙잡았다. 취한 사람이랑 이게 뭐 하는 건지. 여사빈은 허탈해졌다. 안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데 우정선이나 데려다주고 이젠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사람 누구?”

“일단 손 좀 놓고. 주변에 많을 거 아니야. 원래 사랑은 사람으로 잊는댔어.”

사랑이라니. 그동안 많은 사람을 울렸던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낯부끄러운 단어였지만 지금만큼은 여사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좋아하는 게 발전하면 사랑인 거지. 이건 정확히는 사랑이 되기 전의 감정이었다.

그나저나 술만 마시면 장사가 되나, 왜 이렇게 힘이 센지 얼굴을 붙잡은 손을 떼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주변에 없는데.”

“미친놈이. 이거나 놓으라니까.”

“아, 하나 있다.”

손목을 붙잡고 떼어 내려 안간힘을 쓰는 여사빈을 보며 우정선이 말했다. 여사빈의 이마가 슬슬 구겨져 가는 것과 동시였다.

“야, 손 치우….”

소리치려는 여사빈의 코에 막걸리 냄새가 훅 풍겨 왔다. 벌어진 입 사이로 막걸리 맛도 났다. 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았건만 느껴지는 막걸리 맛에 여사빈의 눈이 커졌다.

스르르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넘어간 우정선이 여사빈의 어깨에 풀썩 얼굴을 기댔다. 이내 들려오는 건 술에 취해 잠이 든 조금은 가쁜 숨소리였다. 그리고 여사빈은 그 상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방금 그거.

“이 미…친.”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며 여사빈이 중얼댔다.

“놈, 아….”

술버릇이 이따위면 이따위라고 멀쩡했을 때 미리 알려 주던가. 여사빈의 눈이 충격에 사정없이 떨려 왔다. 입맞춤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입술과 입술 간의 접촉이었다. 취한 우정선은 가벼운 뽀뽀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여사빈에겐 그저 입술 간의 접촉 사고였다. 하지만 문제는 입을 벌려 말하려는 통에 하필 혀에 우정선의 입술이 닿았다는 거였다.

자의도 아닌 타의로 고등학교 동창의 입술을 핥았다는 것에 여사빈은 한동안 꼼짝할 수가 없었다.

***

집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피곤함에 작은 한숨을 내쉬며 백사현은 조용히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난번 주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주말은 백사현에게 없었다. 토요일에 있었던 곽팔두의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곧장 들어간 스케줄은 생각보다 더 빡빡했다.

우선은 조금 더 완성도 있는 솔로 무대를 선보이고 싶어 대대적인 안무 수정이 있었고, 다음 주에 새로 방영될 스타 작가의 새 드라마 OST 녹음을 했다. 그다음으로는 비행기로 곧장 밀라노까지 날아가 화보 촬영까지 마치고 오늘 막 귀국한 참이었다. 다쳤다는 핑계로 몇 주를 미뤄 뒀던 스케줄이라 더 이상의 미루기는 곤란했다. 납치 사건도 그랬고 결혼식장에서 부른 축가로 인해 떠들썩해지기도 했던 터라 백사현의 활동 재개 소식에 섭외 전화가 빗발쳐 덩달아 매니저인 이준혁도 더 바빠졌다. 그렇게 정신이 없다 보니 범지훈과 헤어지고 거의 며칠 만에 제대로 얼굴을 보는 셈이었다.

백사현은 닫혀 있는 범지훈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지금 시각이면 잠들어 있을 게 뻔했기에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가 결국 떼어 냈다. 피곤할 텐데 괜히 깨우고 싶진 않았다. 영상 통화로도 연락은 자주 했기에 범지훈도 최근 부쩍 바빠진 건 잘 알고 있었다. 회사 내 대대적인 인사이동이라고 했던가. 대표이니만큼 신경 쓸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회의다 뭐다 골머리를 앓는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이제 본격적으로 본업에 뛰어들어 집중해야 할 때라 쉬는 동안만 한 집에서 같이 살잔 제안의 유효 기간은 끝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서로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백사현은 아예 이준혁에게 제집을 내놓으면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꺼냈다. 사실 범지훈의 집에서 가장 나가고 싶지 않은 건 백사현이었다.

여하튼 아쉽게 백사현은 걸음을 옮겨 이젠 완전히 익숙해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닫힌 방문을 열고 캄캄한 방 안에 들어온 백사현은 복도에 켜 놓은 은은한 등에 의지하여 옷을 벗었다. 바로 화장실로 갈 거라 딱히 불을 켤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속에 받쳐 입은 하나 남은 상의도 머리 위로 벗어 올려 침대에 던지려던 백사현은 옷을 든 손을 우뚝 멈췄다. 어둠 속, 침대에 불룩 솟은 형체가 있었다.

“…형?”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형체는 범지훈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불편한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 그대로 백사현의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는 범지훈이 보였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옷도 못 갈아입고 곤히 잠들어 있는 범지훈을 내려다보며 백사현은 두 눈을 깜빡였다. 형이 왜 여기서 자고 있지? 일단 침대 가에 몸을 앉히며 백사현은 범지훈의 어깨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형, 지훈이 형.”

편하게 돌아눕던지 하다못해 불편해 보이는 저 옷이라도 갈아입고 자면 좋을 텐데. 방을 잘못 찾아왔나 생각도 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으응.”

어찌 되었든 깨긴 했는지 피곤이 가득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원래였다면 말끔하게 넘겼을 새까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는 걸 보며 백사현의 손이 범지훈의 이마에 성가시게 흘러내려 가 있던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많이 피곤했나 봐요. 불편할 텐데 왜 여기서 자고 있었어요?”

“…나서.”

“네?”

잠긴 목소리로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데 너무 희미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백사현은 범지훈의 얼굴로 귀를 가져갔다.

“…냄새가 나서….”

“냄새요?”

“사현이 냄새가 나서…. 좋아… 잠깐만, 있으려다가….”

웅얼대며 대답하던 목소리가 결국 말을 끝맺지 못하고 멈췄다. 이내 조용한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오는 것에 백사현은 고개를 들었다.

“…미치겠네.”

중얼대는 백사현의 목소리에 웃음이 서렸다. 그러니까, 내가 없어서 내 냄새라도 나는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거야? 입술 가를 매만지는 백사현의 입꼬리가 이미 숨길 수 없을 만큼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쩌려고 그래요. 자꾸 그러면 나 참기 힘든데.”

잠든 범지훈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살대는 백사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스케줄이 바쁘긴 한 건지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는 백사현에 범지훈도 요즘 통 기운이 없었다. 영상 통화가 아닌 실물 백사현을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기에 범지훈의 낙은 짬나는 시간마다 백사현의 영상을 돌려 보는 것이었다. 무대 위의 가수 백사현, 예능 속 연예인 백사현, 리얼리티 속 인간적인 백사현, 개인 SNS 라이브 영상 속 친근한 백사현, 백사현의 유튜브 영상까지. 오죽하면 범지훈이 이미 본 백사현의 영상을 세는 것보다 이젠 안 봤던 영상의 개수를 세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그렇게 백사현 없이 범지훈은 기운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게 겉으로도 티가 났는지 직원들은 범 대표님 댁에 무슨 우환이라도 생겼느냐며 저희끼리 쑥덕였다. 그리고 우 비서님도 이상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기운이 빠져 시무룩한 호랑이 꼴을 한 범지훈 대표님의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우정선 비서 팀장도 이상해졌다. 일 처리야 늘 빠릿빠릿하고 철두철미하기에 일에 관해서는 실수가 없는데 뭐랄까,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해질 때가 종종 있고 혼자 있을 때는 이따금 머리를 쥐어뜯거나 벽에 쿵쿵 이마를 찧기도 했다. 우정선 비서 팀장이 그러는 꼴을 목격한 회사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에 대표님이나 비서님이나 두 사람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겼냐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러던 중, 범지훈에게 연락이 왔다. 화면에 뜬 낯선 핸드폰 번호에 누구인지 잠시 생각에 잠기던 범지훈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놀라움을 띤 눈이 커졌다.

“어머님?”

[응, 지훈아. 지금 바쁘니?]

백사현의 어머니, 백서경이었다. 지난번 셋이서 함께 식사한 후, 범지훈은 백서경에게 작별 인사와 함께 조심스레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헤어질 때까지 범지훈의 나이나 직업에 관해선 일절 묻지 않은 백서경이기에 먼저 선수를 친 것이었다.

사실, 진지하게 만날 생각인 애인의 어머니 되는 분에게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명함을 내미는 범지훈의 손은 조금 떨렸다. 여태껏 일궈 온 회사가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주위의 시선에 민감해야 할 연예인 아들이 만난다는 사람이 대부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엔 범지훈은 명함을 건네면서도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백서경은 명함을 건네받고는 ‘어머, 여기 꽤 큰 기업체 아니니? 그런데 그 나이에 벌써 대표님이라고? 멋있다. 지훈이다워.’ 같은 말만 할 뿐이었다.

“아니요, 통화 괜찮습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백사현이라면 밀라노에서 지금 화보 촬영을 하는 중이라 한국에는 없었고 어머니인 백서경도 그걸 모르진 않을 터였다. 범지훈은 괜찮다면 백사현 대신이라도 백서경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일은 무슨. 그냥, 내가 지훈이랑 둘이서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혹시 괜찮으면 나한테 시간 내 줄 수 있을까?]

***

백서경과 저녁 약속을 잡고 통화를 끝낸 후, 범지훈은 고민에 빠졌다. 백사현도 없이 단둘이 할 말이라는 게 뭔지 별의별 상상이 범지훈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설상가상 백사현이 없이 보낸 저번 주말, 혼자서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된 주말 드라마가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했다. 재벌가 아들이자 본부장인 남주인공과 비밀 사내 연애를 하다 들킨 평범한 집안의 여주인공에게 남주의 어머니가 찾아와 돈 봉투를 내미는 장면이었다. 우리 아들이랑 헤어져 줬으면 좋겠구나. 우아한 태도였지만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연기하던 어머니 역할의 중년 배우 얼굴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그러니 퇴근 후, 약속 장소로 향하는 그 순간까지도 범지훈은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도착한 그녀의 집 앞에서 범지훈은 심호흡을 하곤 초인종을 눌렀다.

“지훈이 왔니? 얼른 들어와.”

하지만 문이 열리며 고개를 내미는 백서경의 표정은 밝았다. 그녀의 안내에 집 안으로 발을 들이며 범지훈은 조금 긴장을 풀었다. 바쁜데 괜히 오라고 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고 사과하는 그녀에게는 범지훈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혀 바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거, 약소하지만 준비해 봤습니다. 집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 그냥 오지, 미안하게. 선물 받을 생각으로 집으로 부른 게 아닌데. 미안하고 고마워서 어떡하니.”

좋아하는 사람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지난번 식사도 사 주시고 편히 대해 주신 게 고마워 이번엔 점수를 제대로 따고 싶었다. 그러니 백서경이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지 범지훈은 철저한 자료 조사를 했다. 직업이 연예인이신 게 또 얼마나 다행이던지. 범지훈은 인터넷에 검색하니 줄줄 뜨는 백서경의 취향과 좋아하는 것들에 두 눈을 반짝였었다. 그러다 고민 끝에 선택한 건 이거였다.

“어머, 여기 내가 좋아하는 곳인데.”

“좋아하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선물 세트는 전날에 미리 주문해야 되는 거 아니었니? 오늘 만나기로 약속 잡았는데 어떻게 준비한 거야?”

차를 좋아하는 백서경이 차에 곁들여 먹는 용도로 자주 가서 산다는 수제 화과자 전문점. 백화점에도 입점해 있는 등 유명한 곳이었지만 선물 세트로 받으려면 적어도 하루 전엔 예약 주문을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범지훈은 의지의 남자였다. 그리고 한 회사의 대표라는 지위와 능력 또한 있었다. 경호 단체 타이거는 그런 범지훈의 훌륭한 수족 역할을 해냈다. (*참고로 타이거의 팀장인 곽팔두는 신혼여행 때문에 장기 휴가 중이었다.)

“어머님을 위해서인데 이것도 준비 못 할까 봐요.”

차로만 4시간 반이 넘게 걸리는 경주의 본점(*왕복이면 9시간이었으나, 차 외에도 현대 문명의 발전 덕에 교통수단은 다양하게 많았다.)까지 타이거들을 보내 받아 왔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급히 둘러댄 말이었지만 어쩐지 백서경은 감동한 얼굴이었다.

“나는 지훈이가 우리 사현이 남자 친구라 참 다행인 것 같아.”

범지훈에겐 최고의 칭찬이었다. 어찌 되었든 백서경의 안내에 부엌으로 향한 범지훈은 식탁 다리가 부러져라 차려 놓은 음식들에 놀랐다. 분명 요리를 못 하신다고 들은 것 같았는데 저녁 식사 약속임에도 집으로 초대해서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내가 한 건 아니고, 한 번씩 오셔서 집안 살림을 해 주시는 아주머니가 음식도 맡아 하시거든.”

‘직접 요리는 그분이 다 하시고 나는 옆에서 재료 손질만 했어.’ 민망한 얼굴로 백서경이 뒷말을 이었다. 그것에 간을 못 맞춰 차마 요리는 손을 못 대고 재료 손질만 해 놓았던 백사현이 떠오른 건 당연했다. 모전자전이라고 둘이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한 걸 범지훈은 간신히 참았다.

식사는 하나같이 정말 맛있었다. 뒷정리와 설거지까지 도우려는 걸 집에 온 손님에게 일을 시키는 게 말이 되냐며 백서경이 펄쩍 뛰는 통에 범지훈은 꼼짝없이 앉아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 아주머니 출근하시면 나랑 둘이 하면 되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범지훈의 앞에 다과상을 내려놓으며 백서경이 덧붙였다. 다양한 음식들 때문에 혼자서 하기엔 너무 많은 양의 설거지가 나와 신경 쓰던 범지훈을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다.

“지훈이한테 제대로 된 집밥도 먹이고 싶었고 하고 싶은 얘기도 있어서 불렀어.”

범지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을 잇던 백서경은 잠시 주저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사현이한테는 이야기 들었니? 그 애의 폐쇄 공포증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

직접 우린 따뜻한 차에서 올라오는 향이 좋았다. 백서경의 이야기를 들으며 찻잔에 입을 대려던 범지훈이 멈칫했다. 그런 범지훈을 보며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백서경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지훈이한테도 말하지 않았구나. 내 아들이지만 참, 대단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범지훈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굳었다. 폐쇄 공포증이라니. 범지훈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봤던 백사현의 모습이었었지만, 그땐 타의에 의해 강제로 묶인 채 갇혀서였지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심약한 다른 사람이었더래도 그때의 백사현의 상황과 같았다면 겁에 질려 없던 폐쇄 공포증이 생겼을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외엔 사방이 막힌 공연장에서도 백사현은 태연하게 공연을 했었고 닫힌 대기실이나 방, 집에서도 멀쩡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심한 쪽은 허락한 사람 외의 타인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노출을 많이 꺼리는 쪽이었지. 그러니 백서경의 반응이 범지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 사현이 그 애, 혼자서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거든.”

백서경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지하고 기댔으면 좋겠는데. 어린 게 벌써 철이 들어서는. 내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나도 그 이야기는 우리 엄마… 그러니까, 사현이한테는 외할머니가 되지. 내 사정 때문에 엄마가 그때 어린 사현이를 맡아 키워 주셨어. 그것 때문에 엄마를 통해서 들었거든.”

그러면서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25년 전, 고작 여섯 살의 어린 백사현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이었다.

[공금] ㅅㅋㅌㄲ 뉴톢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