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sugarcoat
사현의 나이 만 3세 때의 일이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그간 사현의 짧은 생은 다사다난했다.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외모 때문이었을까. 어린아이답게 젖살이 가득한 하얀 얼굴에 어울리는 그 말간 웃음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보호자가 되어야 할 부모가 옆에 있지 않아서였을까. 무엇이 만만하게 보이고 탐이 났는지 사현을 유괴하려는 못된 어른들의 시도는 번번이 이어졌다.
정도가 약하게는 할머니와 둘이서 나들이를 나와 방긋방긋 웃던 그 어린아이를 할머니가 잠깐 한눈을 판 틈을 타서 포대기째로 들고 가려던 여자부터 이제 아장아장 걸어 다니려는 사현을 옆구리에 끼고 달아나려던 중년 남자까지. 정말 사소했던 것은 국민학생(당시의 초등학생) 아이가 놀이터에서 사현과 함께 놀다 사현 같은 동생을 가지고 싶다는 이유로 사현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려던 게 있었다. 그게 사소했을 정도였으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는 얘기해 봤자 입이 아플 정도였다.
그리고 사현의 나이 만 3세가 되었을 때, 벌어진 큰 사건이 있었다. 그간 빈번했던 유괴 시도는 할머니가 일찍이 발견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그 자리에서 제지할 수 있었지만, 이번 사건은 한나절 정도나 사현의 행방이 묘연했던, 지금까지와는 정도가 다른 심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처음은 낮 동안 유치원을 다니던 사현의 하원 때였다.
일이 벌어지려니 아귀가 어쩜 이렇게 맞아떨어지는지, 원래였다면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야 했으나 그날따라 감기 기운이 있었던 할머니는 빨리 낫기 위해 잘 먹지도 않던 감기약을 털어 넣었고 약 기운에 취해 낮잠을 자다 그만 사현의 하원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유치원에 뛰어갔지만 사현은 없었다.
[사현이 고모가 아까 데려갔는데 연락 못 받으셨어요? 할머님.]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순간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고모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사현의 친부 가족들과는 사현이 태어날 때부터 지금껏 연락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원래부터 사현의 친부를 탐탁지 않아 했던 할머니는 얼굴도 모르는 고모라는 여자에 그 길로 온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지며 사현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사현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가 버린 할머니가 결국엔 경찰서로 발걸음을 옮겼지만, 날이 저물고 깜깜한 밤이 되어도 연락은커녕 사현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바쁘게 일을 하고 있을 딸에게는 차마 알리지도 못하고 혼자서 가슴을 퍽퍽 치며 마음 앓이를 하던 할머니가 저녁도 한술 뜨지 못하고 전화기만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전화벨이 울렸다.
[백사현 군 보호자 되십니까? 웬 국민학생 남자애가 백사현 군을 서로 데리고 왔는데 와 보시겠습니까?]
‘아이고, 사현아!’ 전화를 끊자마자 단번에 달려간 할머니가 본 것은 경찰서의 딱딱한 나무 의자에 누워 곤히 자는 손자의 모습이었다. 경찰이 덮어 줬을 투박한 성인 외투를 이불 삼아 세상모르게 잠이 든 어린 손자를 보며 할머니는 눈물을 보였다. 사현을 데려다줬다는 남자아이에 대해서는 물어볼 정신도 없었다.
잠이 든 사현이 깨지 않게 조심히 업어 집으로 데려오고 다음 날, 사현이 깨어나자마자 할머니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 들려준 아이의 이야기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그래서 아빠 보러 가자는 말에 얼굴도 모르는 아줌마를 덥석 따라갔다고?]
[네에… 고모가 같이 가면 아빠 볼 수 있다고 해써요.]
[고모는 무슨 놈의 고모야. 모르는 나쁜 아줌마지!]
[그치만… 쩌기 미용실 이모도 이모고 문방구 이모도 이모인데… 고모는 왜 안 돼요?]
[아이고.]
머리를 감싸 쥐는 할머니를 보며 잘못한 걸 알긴 아는지 사현은 푸욱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 아줌마를 어떤 형아가 막아 줬다고?]
[응! 멋찐 형아. 동화책 왕자님 같았어요!]
금세 또 얼굴이 펴져서는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형에 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데 어린아이 특유의 짧은 팔을 휘적이며 어찌나 열심히 설명을 해 주던지 지켜보던 할머니도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쨌든 또래에 비해 똘똘했던 사현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집이랑 계속 멀어져 가는 낯선 여자에 그 여자의 손을 잡고 같이 걸음을 걸었던 사현도 몇 번을 멈춰 서며 망설였던 모양이었다. 그것에 참을성이 없어진 여자가 어린 사현에게 강압적으로 굴었고 놀라 울음을 터트린 아이를 보고는.
[그 형아가 보곤 도와줬다는 거지?]
[응! 형아 엄청 머시써! 아줌마가 엄마라고 거짓말했는데 형아가 엄마면 사현이 이름도 아냐고 물어봤어요!]
[…똑똑한 아이네. 그 형아는 이름이 어떻게 된다니?]
[음…으음… 이름이, 범… 버미운?]
[박미윤?]
[으응, 아니. 버미운!]
[범…]
[미운!]
또래에 비해 똘똘하다고 해도 네 살 정도의 어린아이기에 이름을 잊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남자애 이름이 정말 미윤인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어른 되면 미운이 형아랑 겨론할 거에요!]
[형아가 왕자님 같다면서? 우리 손주도 왕자인데 왕자는 왕자끼리 결혼 못 하는데?]
[그, 그럼 공주 할래요.]
[뭐?]
[사현이가 공주님하고 미운이 형아가 왕자님 하면 돼요!]
뭔가 이상해진 것 같았지만 어찌 되었든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손주를 찾았기에 할머니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겼다. 후에 사현을 발견했다고 연락 준 경찰서로 찾아가 그 남자아이에 대해 물어봤지만, 잠이 든 사현을 업고 와서 조심스레 내려놓자마자 가 버리는 바람에 이름도 물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애가 벌써부터 이목구비도 또렷하고 잘생긴 게 외모가 진짜 특이하더라고요? 머리도 눈도 까만데 그 노란 머리에 파란 눈 가진 사람들? 그쪽 나라 얼굴도 보이고.]
흘러가듯 경찰이 해 준 이야기 정도만 들을 수 있었다.
딸아이에게는 물론 자세히 얘기해 줄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을 나가 밤늦게 녹초가 되어 들어오는 서경에게 네 아들이 제대로 유괴를 당할 뻔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건, 사현도 마찬가지였다.
[할무니. 엄마한테는 비밀하면 안 돼요?]
[왜?]
[…엄마가 슬퍼해서요. 아빠 보러 갔다는 거 엄마가 알면 슬퍼요.]
고작 네 살이면서 철이 들어도 너무 빨리 들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는 일찍부터 제 아빠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족이라고는 여태껏 엄마와 할머니뿐인 것도 너무 잘 알았기에 어쩌면 거짓말일지라도 따라가고 싶을 만큼 아빠가 많이 궁금했을지도 몰랐다. 그걸 듣는 할머니도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때야 할머니는 마음을 굳혔다.
[사현아, 너 이 할미 따라 시골로 가지 않으련?]
서경이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라 서경의 집에서 함께 살며 사현을 돌보고 있었던 할머니는 더 이상 이 험한 도시에 때 묻지 않은 예쁜 손주를 놔둘 수가 없었다.
[시골?]
[응, 할머니가 원래 살던 집이야.]
똘망똘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묻는 손주에게 할머니는 작게 웃어 보였다. 이미 마음의 결정은 한 뒤였고 딸을 설득할 자신도 있었다.
[좋아요. 할무니 집도 보구 시퍼.]
사현의 동의까지 구한 뒤에야 할머니는 온 동네가 서로를 잘 알고 있고 푸근한 인심도 있는 시골로 손주를 데려갈 수 있었다. 이곳이라면 더 이상 도시에서 같은 나쁜 짓을 겪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
[할무니. 할무니.]
사현이 시골로 내려오고 몇 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밭을 매러 나갈 채비를 하던 할머니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사현이 보챘다.
[왜? 할미 지금 바쁜데.]
[할무니, 저기 밖에 멈머이가 누워서 자고 이써요.]
[날이 좋으니 낮잠이라도 자나 보지. 사현아, 할머니가 지금….]
[근데 자는데 눈을 뜨고 자요. 흔들었는데 몸이 차갑고 딱딱해써요.]
[뭐?]
아이가 알려 주는 곳으로 가 본 할머니는 멈칫하고 말았다. 사현의 말대로 미동도 없이 길 한가운데에 누워 있던 개는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벌어진 개의 입에서 질질 흘러나오는 거품에 할머니는 인상을 찡그렸고 옆에 선 사현의 눈을 가렸다.
[저런 건 보는 거 아니야. 할미가 치울 테니까 얼른 방에 들어가 있어.]
[저게 뭔데요? 멈머이 자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어디서 쥐약이 든 음식이라도 주워 먹은 모양이네. 쯧쯔. 불쌍한 것.]
[쥐약?]
잠시 생각하던 할머니는 일단 사현을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옆집 이웃에게 알리고 개의 사체를 함께 들어다 묻었다. 옮기는 내내 거품을 질질 떨어뜨리는 사체를 보며 마음도 좋지 않았지만, 개가 먹을 정도로 조심성 없이 약을 친 누군가에게도 화가 났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는 손을 씻고는 바로 사현을 불러 앉혀 설명했다. 혹시나라도 조심성 없는 누군가 때문에 어린 손주가 쥐약을 접하면 큰일이기에 한 설명이었다.
[이게 쥐약이라는 거야. 색깔이 파랗지?]
[응! 예뻐요.]
겁도 없이 손을 뻗는 사현의 손을 탁 때리며 할머니는 엄하게 말했다.
[함부로 만지는 거 아니야. 위험해. 아까 죽은 강아지 봤지? 이거 먹고 저렇게 된 거야.]
[네?]
[이런 거 잘못 만지거나 먹으면 아까 그 강아지처럼 다시는 못 일어나. 그럼 영영 엄마도 못 보고 할미도 못 보는 거야. 그러니까 사현이 넌 이런 거 만질 생각도 말고 입에 넣지도 말아.]
무섭게 설명하는 할머니에 사현의 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 고개를 끄덕이는 손자를 보며 할머니는 조금 안심했다.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겁을 주는 게 그랬지만, 차라리 겁을 먹고 조심하는 게 사고가 일어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에 후회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사현이 시골로 내려온 지 몇 달이 지나도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아이의 신변에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니 할머니의 긴장도 점점 풀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을 때보단 사현을 눈여겨보는 게 덜해졌고 또래 시골 아이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신나게 뛰어가 노는 사현에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쯤부터 동네에는 큰 가십거리가 하나 생겼다. 이름도 어려운 먼 어느 나라에서 이 외진 시골로 시집을 왔던 외국인 새댁 이야기였다. 시골 총각에게 시집을 와서 아들도 하나 낳고 알콩달콩 잘 사는 줄 알았는데 몇 년도 채 되지 않아 그 새댁이 아들만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는 거였다. 그것에 동네에 소문이 돌아 혼자 다니는 그 남자를 보며 모두가 수군대기 시작했다. 부인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길래 그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시집온 여자가 집을 나갈 정도냐며 뒤에서 손가락질도 해 댔다.
그 뒤, 남자는 부쩍 외출을 자제하기 시작했고 이따금 술에 잔뜩 취해 욕을 하며 동네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여자들이나 어린아이들만 보면 시비를 걸기도 했다. 너 같은 년은 죽어야 한다는 둥 네 엄마 따라간 너도 똑같은 새끼라는 둥. 동네 여자들과 아이들이 봉변을 당하기 시작하니 남자는 동네 사람들과의 마찰도 잦아졌다.
그리고 그 사건은 사현이 시골로 온 지 1년이 좀 넘었던 날, 사현의 나이 여섯 살로 접어들었을 때 벌어졌다.
도망간 새댁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 뙤약볕 아래에서 긴 시간 일을 하던 시골 마을 사람들과 피부색부터 차이가 났다. 유달리 새하얀 피부에 머리카락 색 또한 아주 연한 갈색을 띠고 있어 시골 여자들 사이에서도 새댁은 연일 화젯거리였었다. 그 여자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사현이 보이면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한마디씩을 얹었다.
[사현이도 남자애치고는 살이 참 하얘. 머리 색도 연하고. 그 새댁이 낳은 아들이 엄마를 쏙 빼닮았으면 사현이같이 크겠는데?]
얼핏 지나가듯 했던 예전의 그 말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사현에게 날아올 줄은 그 말을 하던 사람들도 할머니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
여섯 살이 막 되었을 무렵의 사현은 아이다운 순수함이 남아 있었다. 또래보다 영특하긴 했지만, 그건 순수함이 배경으로 깔린 영특함이었다. 사현이 그동안 숱한 유괴를 겪어 봤어도 그 순수함을 잃지 않은 건 주위 사람들의 도움 덕택이기도 했다. 유괴되는 아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은 정의로운 사람들이나 보호자인 할머니, 그리고 위험할 때 도움의 손을 내밀어 준 국민학생 형까지.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순수함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물론 동네끼리 서로 잘 아는 시골에 오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꼬마야, 아저씨 좀 도와줄 수 있니?]
그러니 낯선 남자가 건네는 도와 달라는 손길도 선뜻 잡았는지도 몰랐다. 밭으로 나간 할머니가 올 때까지 길가에 쪼그려 앉아 기다리며 돌멩이와 나뭇잎 등으로 작은 소꿉놀이를 만들고 있던 아이는 흙이 묻은 손을 털고는 남자의 뒤를 의심 없이 따랐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러서 남자의 온화했던 표정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뒤를 따라온 그 작은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는 기절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는 버둥거렸지만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숨이 막혀 축 늘어진 아이를 남자는 본인의 낡아 빠진 봉고 트럭의 짐칸에 망설임 없이 던져 넣었다. 그러곤 파란 방수포를 아이의 몸 위로 곧장 덮어 버리고는 급하게 운전석에 타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게 시골 마을에서 그 시각 마지막으로 목격된 사현의 모습이었다.
***
한 달. 사현이 행방불명이 된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속은 타들어 갔다. 속을 헤집어 보면 숯검정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한 달쯤이 되어서야 할머니는 사현의 엄마에게 연락할 결심을 했다. 듣기로는 어느 무인도에 촬영을 갔다고 하던데 두 달 정도를 더 찍는다고 한 것 같았다. 여태껏 촬영에 열중하고 있었을 딸에게 차마 사실을 알릴 수가 없어 숨겨 왔던 할머니는 한 달이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사현은 사랑하는 손주였지만, 할머니에겐 손주보다는 제 배 아파 낳은 딸이 더 중한 법이었다. 게다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난 아이였다. 포대기에 쌓인 갓난애를 안고 집으로 들어오던 그날의 딸의 모습은 여태 선연했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는 물음에 딸은 죽었다고 힘없이 대답했었다. 할머니가 손주인 사현에게 정을 붙이기까지는 그 뒤로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 기간도 한 달까지가 끝이었다. 수화기를 든 할머니는 영화 제작사의 번호를 기억하며 다이얼을 향해 힘없이 손을 뻗었다.
[아이고…! 포천댁! 포천댁 거기 없는가?!]
다이얼을 채 돌리기도 전에 이장 집의 대문 밖으로 할머니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현이! 포천댁 손주 사현이 찾았다니까! 병원으로 얼른 가 봐!]
전화를 빌리기 위해 마침 찾아간 이장 집이라 이장 내외의 차를 얻어 타고 읍내의 병원으로 달려간 할머니는 다행히 살아 있는 손주를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살이 빠져 핼쑥하게 팬 볼을 한 채 초췌한 눈을 한 손주는 빈말로도 멀쩡해 보이진 않았다.
‘사현아, 할미 알아보겠니? 응…?’ 조심스럽게 손주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꼬옥 움켜잡았지만 사현은 흠칫하며 몸을 웅크렸다. 떨리는 시선은 갈 곳을 잃고 부산스레 움직였고 할머니에게 잡힌 두 손을 빼내려 작은 손가락을 꼼질했다.
[사현아, 사현아. 왜 이래? 응? 할미야. 할미라니까?]
[포천댁, 애가 지금 정신이 없잖어! 보채지 말고 쉬게 내버려 두세. 응?]
곁에 있던 이장 내외가 할머니를 진정시키고 병실에서 데리고 나왔을 때에는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에게 사건의 정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꼬박 보름이 넘는 시간을 시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
경찰들의 들려준 이야기는 생각보다 참담했다. 사현을 납치한 남자는 그가 맞았다. 외국인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도망쳐 혼자 남았다는 남자.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아들과 분위기가 꼭 빼닮은 사현을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납치했다.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는 떨어진 피의자 명의의 땅에 지은 비닐하우스, 그 옆에 있던 창고를 개조한 집에 그동안 아이를 감금해 뒀던 모양입니다.]
[창…고요?]
***
[아저씨… 저, 저 그만 집에 보내 주세요. 할머니가 걱정해요. 아저씨….]
[시끄러워! 여기가 너희 집이라니까! 아빠한테 자꾸 징징대면 맞을 줄 알아!]
버럭 소리치는 남자에 움츠러든 사현의 눈동자가 떨렸다. 핏발 선 눈으로 사현을 노려보던 남자는 소주병을 다시 입에 대었다. 남자의 목구멍 너머 꼴꼴꼴 넘어가는 액체를 불안하게 흘끔 바라보며 사현은 최대한 구석에 붙어 두 다리를 끌어안고 웅크렸다.
아빠도 아니면서 자꾸 아빠라고 하니 이상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따라가서 이렇게 된 건지 조그만 머릿속으로 사현은 온갖 생각과 후회를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절대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도 함부로 믿지도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남자는 술을 마셨을 때와 마시지 않을 때가 확연히 달랐다. 알코올 중독. 남자는 그런 병명으로 불릴 것 같았다. 맨정신일 때 남자는 오히려 사현의 눈치를 봤다. 미안하다. 잠든 사현을 내려다보며 그렇게도 중얼거렸다.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만큼은 귀신같이 알아채던 사현은 사실 깨어나 있었지만, 남자가 무서워 눈을 감고 잠든 척을 했다. 배우인 어머니의 그 피가 어디 가지 않는다고 사현은 잠든 연기만큼은 어른인 할머니도 속일 수 있을 만큼 능숙했다.
그럼 남자는 잠든 척을 한 사현을 한참을 내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늦은 밤, 풀벌레가 우는 소리 사이로 남자의 흐느낌이 간간이 들려오기도 했다. 사현은 그것을 들으며 덮고 있던 낡은 이불을 꼬옥 움켜쥐었다. 미안하면 집으로 돌려보내 주면 될 텐데 왜 울고만 있는지. 남자에 대한 불만과 공포, 두려움이 사현의 마음속에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갔다.
물론 그동안 이곳을 나가기 위해 사현이 노력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창문을 열려고도 해 봤고 남자가 자리를 비울 때엔 창문을 깨 보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여섯 살짜리 아이의 손에 창문이 깨질 리는 만무했다. 창문이 깨질 만큼 무거운 건 사현이 아예 들지조차 못했고 현관문 쪽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의자를 밟고 올라가도 사현의 키에는 닿지 않을 만큼 높은 문 위쪽에 손수 잠금장치를 설치한 남자 때문에 철로 된 현관문은 사현에게 견고한 감옥 창살과도 같았다.
일주일이 넘었을 무렵엔 술에 취한 남자에게 참다못한 사현이 소리쳤다. ‘집으로 보내 주세요, 이거 나쁜 짓이에요, 아저씨!’ 화는 냈어도 그동안 손은 올리지 않았던 남자는 사현의 외침에 눈이 돌아가 그날 처음으로 사현의 뺨을 쳤다. 술에 잔뜩 취해 큰 힘은 들어가지 않아 다행히 뺨이 부어오른 것에 그쳤지만, 반동으로 넘어진 사현을 내려다보던 남자도, 남자를 멍하니 올라다보는 사현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뒤로 사현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말조차도 걸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사현의 흰 뺨은 손자국대로 푸르스름한 멍이 들었다.
며칠 뒤, 남자는 여러 채소들을 넣어 색이 예쁜 볶음밥을 만들었다. 사현의 식사는 항상 남자가 담당했기에 어떨 때는 사 오기도 맨정신일 때는 재료들을 사서 직접 요리를 해 주기도 했다. 남자의 요리 솜씨는 퍽 괜찮아서 사현은 남자가 해 준 음식들을 먹을 때만큼 표정이 조금 풀리기도 했다.
[…먹어.]
하지만 남자에게 뺨을 맞은 이후, 사현의 표정은 늘 냉랭했다. 남자도 그것을 알고 있어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사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볶음밥 그릇을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볶음밥을 먹기 위해 숟가락을 들어 올린 사현은 멈칫했다. 조심스레 숟가락을 볶음밥 속에 밀어 넣고 뒤적이니 보이는 건 색색의 예쁜 볶음밥 속 섞여 있는 새파란 가루였다. 알록달록 예쁜 볶음밥이라 평소였다면 아무 생각 없이 먹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떠오른 건 혀를 내민 채 죽어 있던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이런 거 잘못 만지거나 먹으면 아까 그 강아지처럼 다시는 못 일어나. 그럼 영영 엄마도 못 보고 할미도 못 보는 거야.’ 동시에 떠오른 건 평소와 다르게 엄한 눈으로 으름장을 놓던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화들짝 놀라 눈이 커진 사현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덜그럭. 떨어진 숟가락과 동시에 볶음밥 또한 튀어 올랐다. 밥알에 섞인 파란색 가루 알갱이 또한 누런 비닐 장판 위로 흩어졌다.
떨려 오는 사현의 눈이 황망히 방 안을 훑었다. 남자는 자신을 죽일 생각이었다. 심지어 술에 취하지 않은 맨정신임에도 말이다.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었던 사현의 작은 머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이걸 먹고 죽지 않는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자신을 해칠 남자가 어린 사현의 눈에도 선연했다.
그러다 사현의 눈에 들어온 건 낡아 빠져 더러운 싱크대 위에 올려진 반쯤 남은 주방 세제였다. 서둘러 주방 세제 쪽으로 뛰어간 사현은 발돋움을 해서 겨우 세제를 손에 쥐었다. 곁에 있던 시커먼 수세미 또한 집어 들었다. 쭈욱 세제를 수세미 위로 거침없이 짜낸 사현의 작은 손이 조물조물 수세미를 만져 흰 거품을 만들어 냈다.
수세미에서 뚝뚝 흐르는 거품을 망설이며 바라보던 사현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입을 벌렸다. 이내 사현의 조그만 입 속으로 끔찍한 맛의 세제 거품이 후두둑 떨어졌다.
쨍그랑- 그릇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에 집 밖에서 서성이던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뛰어 들어왔다. 그러자마자 보인 건 장판 위 쓰러져 있는 사현의 작은 몸이었다. 그 옆에 쏟아진 볶음밥과 깨져 있는 그릇에까지 시선을 옮긴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미안하다, 혼자 죽기는 너무… 외로워서.]
혼잣말인지 쓰러진 사현에게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걸음을 옮긴 남자는 입에서 거품이 흐른 채 눈을 감고 있는 사현의 몸을 바로 눕혔다.
그리고 딸깍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통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사르르 가루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꺽…! 꺼헉…컥…끄윽…!]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버둥거림이 멈췄다. 얇디얇은 바닥을 통해 남자가 발광할 때마다 쿵쿵 울렸던 진동 또한 멎었다. 그제야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뜬 사현은 조용해진 주변을 느끼며 앞만 바라보았다. 뿌옇게 흐려졌던 시야는 물기가 눈가를 흐르며 이내 깨끗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사현은 옆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더러운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
[여섯 살짜리 꼬마 애가 어떻게든 나가 보려고 애를 쓴 것 같은데 피의자가 죽을 생각으로 들어오면서도 버릇처럼 문단속을 단단히 한 모양이더라고요. 경찰이 도착했었을 때는 문을 부순 뒤에야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보름이 지나 있어서 시신은 이미 부패가 진행된 상태였고요. 그 좁은 방에 부패되어 가는 시신이랑 여섯 살짜리 아이가 보름이 넘게 함께 있었다면 아이도 지금 멀쩡한 정신은 아닐 겁니다. 솔직히 성인이 겪었어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기 힘든 일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주저앉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이장 내외가 정신이 나간 사현과 할머니를 돌봤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는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사현은 여전히 정신이 빠져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대거나 이따금 발작하는 아이를 보며 그 당시의 시골 노인이 심리 치료 등의 전문적인 치료법을 생각해 낼 리도 만무했다.
동아줄을 잡는다는 심정으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생각해 낸 방법은 남자의 망령이 붙은 손주를 위한 굿을 하는 것이었다. 용하다는 점쟁이를 물어물어 찾아간 할머니는 넋이 나간 여섯 살짜리 남자아이를 화려한 제사상 앞에 앉혔다.
둥두둥둥둥둥- 무속인을 따라 북과 장구를 치며 박자를 맞추는 사람들과 성대한 마을 굿에 몰려든 동네 사람들 속에서 사현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챙챙. 양손에 든 칼날을 부딪친 무속인은 할머니에게 굿비를 받은 만큼은 해내고 갈 심산인 모양이었다.
이내 사현의 옅은 갈색 머리 위로 굵은 소금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그 따가운 소금을 맞으면서도 사현은 눈도 감을 생각을 못 하고 넋을 놓았다. 색색의 천을 사현의 머리 위로 씌우기도 하는 등 굿을 하는 무속인들이 할 법한 모든 행동을 마친 무속인이 들고 있던 칼을 사현의 어깨에 대려는 순간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벼락같은 외침이 굿판을 뒤흔들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과 마지막으로 시퍼렇게 뜨인 무속인의 시선까지 향한 곳에 새액새액 거친 숨을 들이 내쉬는 사현의 엄마 백서경이 서 있었다.
[내 아들한테, 이게…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이냐고! 개새끼들아…!!!]
백서경은 온몸으로 울분을 터트리듯 소리치고 있었다.
무속인과 잠시 눈이 마주치는가 싶던 백서경의 시선은 곧장 사현을 향했다. 반짝이는 무속인의 칼날 아래 방어할 것 하나 없이 그대로 드러난 아들을 보며 백서경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지나쳐 사현에게로 달려갔다. 말릴 틈도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와락. 사현을 보호하듯 품 안 깊숙이 끌어안은 백서경은 바로 앞에서 날붙이를 들고 있는 무속인을 두려움 한 점 없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자리한 건 두려움이 아닌 분명한 살기였다.
[…꺼져. 당장 우리 사현이 앞에서 사라져.]
그러고는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보는 딸의 모습에 경악한 얼굴의 할머니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꺼지라고. 안 들려?]
그 기세에도 움직일 생각을 않는 무속인이나 백서경이나 분위기가 팽팽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다.
[…호랑이 같구나.]
아무 말 없이 백서경을 내려다보던 무속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제 아들 지키겠다고 화를 내는 기색이 꼭 호랑이 같아.]
[꺼지라고 했어.]
[이런 어미 곁에 꼭 붙어 있으면 그나마 큰 화는 면하겠어.]
그 말엔 백서경의 입이 다물어졌다. 여전히 사현을 끌어안은 두 팔을 풀지 않은 채 무속인을 시퍼렇게 노려보는 백서경에 무속인은 져 준다는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네 아들, 뱀이야. 사람 홀려 죽이는 뱀.]
[닥쳐!]
무속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리치는 백서경의 손이 사현의 귀를 막았다. 으드득 이를 가는 백서경은 품 안의 사현만 아니었다면 무속인에게 달려들어 주먹이라도 휘두르고 싶은 얼굴이었다.
[부정해 봤자 업보가 많은 팔자인 건 변하지 않아. 그러게 전생을 왜 그리 살아서는.]
쯧쯔 혀를 차는 무속인의 눈빛엔 한심함과 동정이 섞여 있었다.
[사정은 딱하다만, 남의 목숨 잡아먹은 걸 지금 생에서 되돌려받는 거지. 사내들만 꼬이게 계집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팔자도 꼬여 하필 사내놈으로 태어났으니 모든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겠구나.]
[…그 입, 찢어발기기 전에 닥쳐.]
[서경아!]
결국 듣다 못한 할머니가 딸을 말리기 위해 소리쳤다. 그러나 할머니를 말린 건 무속인이었다. 할머니 쪽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조용히 시킨 무속인은 백서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예 없진 않아.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네 아들에게 가시를 세우게 해. 아니지, 뱀은 독니를 드러내는 게 더 어울리겠구나. 그럼 욕심을 가지고 다가온 인간들을 어느 정도는 거를 수 있겠지.]
백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사현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꼭꼭 싸고 다니고 숨겨. 사람들 앞에 함부로 보여 주….]
[너.]
무속인의 말을 자르며 백서경은 입을 열었다.
[우리 사현이 덕분에 아직 멀쩡히 지껄일 수 있는 줄 알아.]
백서경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무속인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번들거리는 백서경의 눈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아무리 용한 무당이라지만 코앞의 제 팔자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꼭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무속인을 조용히 시키고 뒤를 돌아 걸어가는 백서경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 속에는 백서경의 품에 안겨 있는 사현도 있었다. 엄마의 익숙한 품에서 긴장이 풀렸는지 완전히 늘어진 채 잠이 들어 버린 작은 아이. 그 작은 아이의 감긴 눈가에 맺혀 있는 건 분명 눈물이었다.
***
[…아가.]
사현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주는 거친 피부의 다정한 손. 나지막하게 사현을 부르는 목소리는 퍽 듣기 좋았지만 달게 자던 잠을 방해받은 사현의 이맛살은 찌푸려졌다.
[많이 고됐던 모양이구나.]
그런 사현을 이해한다는 듯 목소리엔 이내 가벼운 웃음기가 어렸다.
[그래도 내 이야기는 잘 들어 주렴. 지금처럼 눈을 감고 들어도 좋아. 기억하기만 한다면.]
신기했다. 어른들도 깜빡 속을 만큼 자는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힌 사현임에도 이 사람은 사현의 귀가 활짝 열려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조곤조곤 들려오는 목소리는 퍽 듣기 좋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꽤 나이가 든 사람 같기도 했다. 사현은 제 할머니를 떠올렸다. 하지만 할머니라기엔 목소리가 더 탁하고 거칠었다. 할머니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든 노인. 왠지 머리도 온통 새하얗게 세서는 긴 머리를 곱게 쪽진 낯선 할머니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네 엄마가 울고 있단다. 물론 네 잘못은 아니야. 너도 서경이도 참 안쓰러운 아이들이지.]
사현의 엄마를 얘기할 때엔 어쩐지 더욱 애정이 담긴 듯한 목소리가 된 노인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애정 어린 손길로 눈을 감고 있는 사현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러니 호랑이를 가까이 두거라.]
…호랑이?
[반푼이는 아닌지 그 못된 것의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서경이는 진짜 호랑이가 아니란다. 아가의 평생의 짝이 될 호랑이. 그 사람이라면 분명 아가와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호랑이가 짝이 된다니. 사현도 어리지만, 그 말이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유치원에서도 선생님들이 늘 정해 주던 짝꿍은 분명 사람이었다. 호랑이는 사람이 아닌데, 절대로 사현의 짝은 될 수 없었다.
[아직은 잘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지.]
그런 사현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는 건지 노인의 목소리에 더 진한 웃음이 서렸다.
[하지만 먼 훗날엔 이해하게 될 거란다. 너는 그때 호랑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어. 그리고-]
***
긴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백사현은 낯익은 방 안을 시야에 담으며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여섯 살 때로 돌아가는 꿈을 꾸게 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간만에 입에 댄 술이 문제인 모양이었다. 범지훈과 함께 마셨던 와인 한두 잔 외엔 최근엔 술은 냄새조차도 맡은 적이 없었고 백사현은 안 그래도 그렇게까지 술을 즐기진 않았다. 원래 백사현에게 술이란 힘들 때 힘든 걸 잊기 위해 마시는 치료 약 같은 존재였다. 물론 그때, 범지훈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마셨던 와인만큼은 예외였지만.
컴백 기념이라며 너도나도 건네는 술을 거절하기가 그랬다. 원래였다면 주당도 아닌 터라 적당히 조절하며 기분 좋을 정도로만 마시고 그치는데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레 연기된 컴백 일정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걱정시켰다. 백사현은 제 잘못은 아니었지만 미안함을 느끼고 있기는 했다. 물론 함께 고생한 사람들이었기에 그건 더했다.
그렇게 건네주는 술을 받아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깜빡 잠도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대체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백사현은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천장에서 비추는 조명등이 퍽 눈부시기도 했다.
“…깼어?”
갑작스레 들려오는 낮은 저음에 평소라면 곧장 경계했어야 할 백사현의 눈매가 더 풀어져 내렸다. 도르륵 눈을 굴린 곳에는 막 방으로 들어오는 범지훈이 서 있었다.
“혀엉….”
그리고 백사현은 제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어떠한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는 두 눈만 열심히 깜빡이는 범지훈을 향해 몸을 돌려 누운 백사현은 흐느적 손을 뻗었다. 그 와중에 느려진 손의 움직임이 신경질 나기도 했다. 빨리 닿아야 하는데.
“깨니까아… 형이 있네에….”
푸흐흐. 이내 백사현의 입술 사이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인 모양이었다.
“좋다아….”
그 말엔 범지훈의 귓가가 붉어졌다.
“무슨 큼, 술을 이렇게 마신 거야? 준혁이가 너 주량 그렇게 세지 않다던데.”
“으응… 사람들이 권해서어… 원래는 안 그러는데 오늘만, 딱 오늘만 받아 마셨어요오… 많이 마셔서 형, 화났어요…?”
결국 더 다가오지 못한 범지훈은 자리에 멈춰 서서 턱만 매만졌다. 그 와중에도 백사현을 향한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까 일, 기억해?”
“우응…?”
범지훈의 손이 끝내 주먹 쥐어지고 말았다.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사현이 너….”
입을 떼려던 범지훈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는 취하지 마. 아니, 취해도 내 앞에서만 취해.”
순둥한 범지훈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퍽 단호한 말이었다. 백사현도 취했지만, 의외였는지 잔뜩 풀어졌던 눈이 조금 커졌다. 하지만 범지훈도 이렇게밖에 얘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취하니까 지나치게 귀여워, 너.”
농담인 듯했지만, 농담은 아닌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범지훈은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눈으로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지후니 혀엉…!]
그러니까, 시작은 아직까지도 밀라노에 있는 줄 알았던 백사현이 사실 귀국했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까지의 과정은 더 기가 막혔다. 사위민에게서 오늘 저녁에 사현이 솔로 곡 공개와 라이브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연락이 와서였다.
잔뜩 들뜬 목소리로 기대된다며 종알대는 사위민의 말을 자르며 범지훈은 되물었다. ‘사현이… 한국 들어왔어?’ 애인의 스케줄을 애인 본인에게도 친구인 매니저에게도 아니고 팬인 사위민에게서 들었을 때 범지훈은 할 말을 잃었다. 언제 귀국했냐고 되물으니 오히려 사위민이 이상해했다. 그때야 범지훈은 백사현이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귀국했음을 깨달았다.
그 뒤는 생각보다 큰 배신감이었다. 누구는 실제로 얼굴을 보고 싶어 애가 달을 지경이었는데 누구는 한국에 들어와 놓고서는 얘기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계속 스케줄을 뛰고 있었다.
심지어 범지훈의 연락마저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 그렇다고 지금 있는 곳이 밀라노라든지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든지 같은 말을 직접적으로 입에 담지 않았지만, 스태프들과 함께 있다는 백사현의 말에 범지훈은 아직도 밀라노에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줄 알았다. 어쩐지 백사현이 영상 통화를 하기 꺼린다 싶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은 범지훈을 더욱 깊은 땅굴로 파고 들어가게 했다.
그동안 백사현의 사소한 행동들을 되짚어 보며 나에게 질렸나 싫증이 난 건가 같은 이런저런 생각들까지 이른 범지훈은 결국은 ‘권태기’라는 단어까지 떠올렸다. 충격에 자연히 몸은 비틀거렸다.
결국, 범지훈은 초췌해진 눈으로 백사현의 솔로 컴백 기념 라이브를 할 시간까지 기다려서는 시청을 시작했다. 초췌해진 이유야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보게 된 라이브 영상 속 백사현은 생각과는 다르게 퍽 편안해 보였다. 아마도 이미 마음 정리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것에 범지훈은 시야가 조금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
[…이상형이요?]
그러다 어느 팬이 보낸 Q&A 질문에는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는 깜빡여졌다.
[음, 있긴 한데.]
이어지는 이야기에는 범지훈의 얼굴이 화면에 박혀 들어가기라도 하듯 바싹 가까워졌다. 설마 새로운 사람이 생긴 거라든가 같은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딱딱한 화면 속에서 빙긋 웃어 보이는 백사현은 입을 열었다.
[듬직한 사람이요.]
그 말엔 범지훈의 생각이 멈췄다.
[저를 품 안에 끌어안고 다독여 줄 수 있는 그런 듬직하고 멋진 사람이 이상형이에요.]
그 순간, 백사현의 라이브 채팅 창이 미친 듯한 속도로 움직이며 수많은 댓글이 폭발하기 시작했지만 범지훈의 시선은 오로지 백사현 그에게만 박혀 버렸다.
라이브 영상이 끝나고 나서도 범지훈은 꽤 긴 생각에 빠졌다. 문득 정신이 든 것은 핸드폰이 진동을 토해 냈을 무렵이었다. 범지훈은 핸드폰에 찍힌 ‘이준혁’이란 이름에 곧장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이준혁이 이야기한 식당이었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는 백사현의 모습만큼은 너무 잘 알아볼 수 있다. 취기가 올라왔는지 하얀 두 뺨이 발그레하게 물든 백사현은 눈을 감고 있는 모습도 그림 같았다.
다가오는 범지훈에 때맞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모습도 곧장 범지훈을 바라보며 시선을 맞추는 모습도 참 예뻤다. 그 와중에도 범지훈은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참 중증이라고 여겼다.
[어? 우리 형이다. 지후니 혀엉…!]
하지만 범지훈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팔을 휘휘 흔드는 백사현은 예상 밖이었다. 혹시나 범지훈이 자신을 보지 못하기라도 할까 열심히도 불러 대는데 범지훈은 다가가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백사현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너도나도 범지훈을 향했던 이유도 있었지만, 백사현의 저렇게 해맑은 웃음은 처음이라 범지훈이 넋을 놓기도 해서였다.
[와, 잘생기셨다. 사현이 형 아는 분?]
[대박 미남. 신인 배우신가? 누구셔?]
너도나도 질문을 쏟아 내는 사람들에 범지훈을 향한 시선을 여전히 떼지 않으며 백사현은 툭 대답을 뱉어 냈다.
[응, 내 이상형.]
그 말에 가장 경악한 건 그 자리에 있던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경악하든 말든 백사현은 다가오지 않는 범지훈에 몇 번 더 부르다 직접 몸을 움직였다. 취하긴 확실히 취했는지 비틀대는 백사현에 범지훈은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어어? 사현아…!]
그때,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우려처럼 백사현이 기우뚱 넘어갔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잡아 주는 손길이 이어졌다. 범지훈이었다. 백사현의 허리에 자연스레 감긴 팔에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저마다 동그랗게 커졌다.
더 놀랍게도 백사현은 범지훈의 품이 편안한지 얼굴까지 폭 묻었다. 범지훈의 등까지 꾸물꾸물 끌어안는 백사현의 두 팔에 이준혁만 얼굴빛이 새파래졌다가도 새하얘졌다.
[백사현을… 만졌어….]
그리고 잠깐의 정적 속에서 놀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렀다. 뒤를 이어 대박. 안 믿겨. 등 사람들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그때야 범지훈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백사현과 꽤나 가까운 사이들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과의 접촉을 꺼리는 백사현의 성향을 알 리가 없었다.
[보고 싶었어요오….]
그 와중에 품속에서 꼬물거리는 백사현의 중얼거림에는 범지훈의 입가가 제멋대로 풀어질 뻔했다.
[와, 사현 오빠 취하면 누가 총대 메고 부축할지 고민했는데 그런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일행들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범지훈의 시선이 움직였다. 새파랗게 염색한 머리를 포니테일로 예쁘게 올려 묶은 여자였다. 범지훈과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눈을 휘어 보이는데 백사현이 봤다면 대번에 표정이 굳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준혁은 확신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사현이랑 함께 일하는 댄스 팀 사람들이에요. 사현이 저번 1집 앨범에도 참여했는데 아실지 모르겠어요.]
그 속에서 댄스 팀의 리더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가 앞으로 나와 범지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품 안의 백사현을 추스르며 범지훈도 여자와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손잡지 마요.]
도중에 범지훈의 팔목을 붙잡는 백사현에 악수는 시도에 그쳤지만 말이다. 놀란 여자의 시선도 범지훈의 시선도 품 안의 백사현을 향했다. 그리고 범지훈은 저를 올려다보며 심통이 가득한 표정으로 삐죽 입을 내미는 백사현에 눈앞이 살짝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형이랑… 같이 집에 갈래요오… 어지러워어….]
범지훈의 허리를 두 팔로 꼬옥 끌어안으며 웅얼대는 백사현의 조그만 머리통을 보며 범지훈은 코트 소매 속으로 꽉 쥔 제 주먹을 감췄다. 백사현의 팬들이 가끔 한다는 방 안의 벽을 부수다 우리 집 원룸 됐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범지훈은 지금 기분이라면 대리석으로 된 자신의 집 벽도 충분히 허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현이가 그쪽 분을 진짜 좋아하나 봐요. 얘 이런 모습 처음 봐.]
의미심장한 뜻이 섞인 단발머리 여자의 놀란 목소리에는 범지훈은 헛기침만 뱉었다. 우리 사이를 눈치챈 모양이구나. 경악하는 이준혁의 반응으로 보아선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자의 표정에는 다행히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사실 아까 전부터 깊숙이 파고 들어갔던 머릿속 땅굴에서도 범지훈은 이미 빠져나와 땅굴의 입구까지 흙으로 탄탄하게 막은 뒤였다. 물론 권태기라는 단어 또한 기억 속에서 깔끔히 삭제됐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준혁에게 간단한 눈인사만 한 뒤, 백사현만 데리고 집으로는 돌아왔는데 완전히 늘어져 잠든 백사현을 침대에 눕히면서도 범지훈은 고민했다. 그렇다면 귀국한 사실은 왜 말하지 않은 걸까? 하고.
하지만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저… 귀여워요오?”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말했는데도 듣던 백사현은 푸흐흐 웃었다. 그린 것처럼 예쁘던 평소의 웃음도 아니고 경계심이라곤 전혀 없이 한껏 풀어져 아무렇게나 웃는 건데도 지나칠 정도로 예쁘니 범지훈은 백사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확 가둬 버리고 싶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저 자신을 범지훈은 너무 잘 알았다. 그러기에는 백사현이 너무 소중해서, 그리고 제 순해 빠진 천성도 지금은 조금 짜증이 났다. 그렇게 사소한 것에서 심통이 나기 시작하니 온갖 짜증이 밀려와 결국 뿔이 난 범지훈은 조금은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응, 너무 귀여워서 어디다 묶어 놓을까 싶어. 귀국한 사실도 숨기고 내 옆에 안 있으려고 하니까.”
“우응…? 숨기고 시퍼서 숨긴 거 아닌데에….”
“그럼 왜 숨겼어? 너한테도 아니고 다른 사람한테 네가 귀국했다는 얘길 듣는데 내가 얼마나…!”
저도 모르게 소리가 커지려는 것에 범지훈은 꾸욱 입을 다물었다. 취해서 정신이 없을 애인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미아내요…, 혀엉…. 근데 나 너무 참아서어….”
뭐?
“형 자는 모습 보니까아… 너무 꼴려서어 못 참겠는거예요오….”
범지훈의 생각이 잠깐 정지했다. 천사 같은 얼굴로 헤헤 웃으며 하는 말이 얼굴과는 통 어울리지 않아서 범지훈은 멍하니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너무’ 뒤의 말을 혹시 잘못 들은 건가 싶을 정도였다. 아니면 ‘꼴리다’라는 단어에 다른 뜻이 있다거나.
“나 없는 새에 왜 내 침대에서 잤어요오~?”
그 말엔 그제야 범지훈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빤히 바라보는 백사현의 시선을 피하며 범지훈의 얼굴은 이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 언제 온 거야? 나 자는 새에 왔다 갔어?”
“응, 새벽에에 왔는데에 형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자나요오….”
꿈인 줄 알았더니 꿈이 아닌 모양이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자는 제게 말을 거는 백사현을 만나는 건가 했더니 그게 현실이었단 사실에 범지훈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왜 나 안 보구 바닥만 봐요오….”
그러다 불쑥 뻗어지는 하얀 손에 손이 잡혔다. 깨닫기도 전에 훅 당겨져서 범지훈은 중심을 잡기 위해 침대를 짚었다.
“…이렇게 보니까아 혀엉 진짜 진짜 잘생겼다아.”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자신의 위를 덮은 범지훈을 올려다보는 백사현의 눈매가 휘어져 내렸다.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상황은 위험했다.
“근데 혀엉 표정이… 나 같다아.”
“뭐…?”
“우응, 형 취해서 내가 우리 집에 데리고 왔었을 때에 꼭 지금 혀엉 얼굴이라앙 똑같았을 거 가타요오.”
히히 해맑은 웃음을 흘리는 백사현이 서늘한 침대 시트에 뺨을 비비적댔다. 얼굴은 강아지면서 하는 행동은 꼭 고양이 같기도 했다.
“나쁜 짓 할 것 같은 얼굴인데에~?”
“…취한 사람한테 그런 짓 안 해.”
“근데, 난 했는데에?”
“그건….”
그날 일에 관해서는 통째로 기억이 사라졌으니 범지훈은 무슨 얘길 할 수가 없었다. 나쁜 짓이라고 해 봐야 지금 이 상태의 백사현을 묶어 가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 자신보다야 덜할 것 같았다.
“생각만 하지 말고 해도 돼요오, 나쁘고 야한 짓.”
백사현의 두 팔이 범지훈의 목을 감았다. 사르르 지어 보이는 미소가 아이스크림에 시럽을 잔뜩 끼얹은 듯 달았다. 단것을 즐기지 않음에도 맛보고 싶을 만큼이나.
“아니, 해 주면 안돼요오?”
머릿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던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러기 전에 범지훈은 자신의 목을 감은 백사현의 팔을 풀었다. 풀기 어려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쉽게 팔을 내린 백사현은 멍한 얼굴로 두 눈만 깜빡였다.
“둘 다 멀쩡한 정신일 때, 그때 하자. 나쁘고 야한 짓.”
고개를 내린 범지훈의 입술이 백사현의 이마에 닿았다 금세 떨어졌다. 애정이 담뿍 담긴 입맞춤이었다. 물론 이마가 아닌 입술에 해 줘도 되고 더 길게 해 줘도 좋았지만 그렇게 하면 범지훈은 본인도 참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물론 백사현의 말대로 지금 이대로 하는 것도 나쁜 건 아니지만, 첫 잠자리를 취해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은 채로 치른 게 범지훈은 아직도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그건 상대인 백사현에게도 실례인 행동이었다.
두 번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취하지 않고 멀쩡한 정신으로 상대를 한껏 기억하며 만지고 느끼고 싶었다.
그나저나 오래 참았다니, 범지훈은 백사현에게 미안해지고 말았다. 무슨 섹스 공포증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제 애인을 참게 내버려 두었다는 게 너무 미안해서 범지훈은 잠깐 고민했다.
“…아니면, 빨아 줄까?”
그 말엔 백사현이 순식간에 술기운이 가신 듯한 눈으로 범지훈을 올려다보았다. 아까의 범지훈처럼 생각이 정지한 듯한 표정이었다.
“…형, 방금 어… 뭐라고….”
한참을 멍해 있던 백사현이 되물었다.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고. 아니, 그게 그러니까, 제 말은요….”
답지 않게 백사현이 횡설수설했다. 커다랗게 뜨인 눈을 깜빡이다가 또 입을 달싹이는 백사현을 보며 범지훈은 티 나지 않게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귀엽다. 아까부터 우렁차게 외치던 마음의 소리였다. 능숙한 듯 보이다가도 이럴 때는 연하 티가 나니 범지훈은 그런 백사현이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싫지 않으면 하면 되지,”
그리고 태연한 목소리로 범지훈의 한 손이 백사현의 바지 버클을 끌렀다. 장난처럼 시작했는데 버클 사이 백사현의 아래 윤곽이 슬쩍 보이니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장난이 진심이 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저… 일단, 씻고 오면 안 돼요?”
“안 씻었어?”
바디 워시 향이 아직도 살에서 풍기는데 씻고 온다는 거짓말로 도망이라도 갈 것 같은 백사현에 범지훈의 눈매가 저도 모르게 조금 사나워졌다.
“춤 연습하고 씻긴 했는데, 그래도 술도 마셨고 다시 한번 더….”
“아냐, 괜찮아. 냄새 좋아.”
범지훈의 코끝이 백사현의 손목 안쪽에 닿았다. 한 손아귀에 백사현의 손을 쥐고 소매 사이로 드러나는 하얀 살갗에 범지훈은 조금 더 가까이 코를 가져갔다. 취한 백사현이 제게 안겼을 때부터 풍기던 기분 좋은 향이었다. 베이비 파우더? 코튼?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한 향이었다. 마냥 단 게 아니라 더 마음에 드는.
“좋다. 냄새.”
씻을 때마다 항상 같은 제품을 쓰는 모양인지 이젠 완전히 살냄새로 밴 모양이었다. 백사현에게서 맡았던 향의 정체를 이젠 알 것 같아 범지훈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풀어졌다.
“…형?”
깜짝 놀란 백사현의 목소리에도 손목 안쪽, 파란 핏줄이 돋은 부분을 혀로 덧그리던 범지훈은 이를 드러냈다. 호랑이가 제 새끼의 목덜미를 무는 것처럼 가볍게 물었지만 백사현의 손끝은 움찔거렸다.
범지훈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 백사현의 손목에 남은 건 깊게 팬 잇자국이었다. 그날 밤, 백사현이 취한 범지훈에게 남긴 것과 닮기도 했다.
“이런 기분이었나? 왜 네가 자국에 집착했었는지 알겠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범지훈은 말했다. 엄지손가락은 가장 연약한 손목 안쪽 살을 만족스럽다는 듯 쓸어내렸다. 제 것에 남기는 흔적은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도 물진 않아, 여기는.”
그러면서 물 흐르듯 내려간 손은 백사현의 아래를 덮었다. 장난이 담긴 여유로움을 그리던 범지훈의 미소가 조금 일그러진 것도 그때였다. 의문이 든 눈으로 그 윤곽을 다시 한번 더듬더듬 짚어 나가던 범지훈은 결국은 바지 속으로까지 손을 넣었다.
“…형, 빨아 주는 게 아니고 만져 주는 거였어요?”
참기 어려운 듯 조금 이맛살을 찌푸린 백사현이 범지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살갗에 달라붙은 드로즈 아래 윤곽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만져 내려가던 범지훈이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백사현의 드로즈 속으로까지 손을 넣은 것도 그때였다. 결국, 백사현이 범지훈의 손목을 잡고 말았다.
“계속 가면 멈추기 어려워요, 저.”
마지막 경고처럼 백사현이 낮게 속삭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평범한 성인 남자들에 비해 커다란 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범지훈은 제 손안에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크기를 느끼며 두 눈을 깜빡였다. 멀리서 보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 실제 손아귀에 쥐고 만지는 것은 괴리가 상당히 컸다.
이걸, 넣었다고…? 동시에 불현듯 떠오른 건 백사현과의 첫날밤이었다. 그리고 화끈거리며 아팠던 그 부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걸음을 옮기기도 힘들었던 하반신과 내내 장기라도 뽑혀 나간 것처럼 허했던 안쪽에 범지훈의 입술도 그날 그곳처럼 서서히 벌어졌다.
“…멈추기 어렵다고 말했는데.”
범지훈의 손목을 쥔 새하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올린 백사현이 끝내 범지훈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계속 만지는 건 무슨 뜻이에요, 형?”
취중에 한껏 풀어져 아무렇게나 지었던 웃음이 아닌 평소처럼 그린 듯이 예쁜 미소였다. 그 속에 아주 조금의 원망이 어려 있기는 했지만 그것보단.
“…읏.”
놀란 범지훈의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고 동시에 옅은 신음을 흘린 백사현이 범지훈의 팔에 이마를 기댔다. ‘아파요, 형…’ 작게 중얼대는 말에는 서둘러 힘을 푼 범지훈이 백사현의 아래에 시선을 주었다.
“미안해, 사현아. 많이 아파?”
“손…이라도 빼고 말해 주지, 계속 잡고 있는 건 왜 그런 거예요?”
투정을 부리듯 입을 연 백사현은 말과는 달리 제 아래에서 범지훈의 손을 잡아 빼지는 않았다. 대신 기대고 있던 범지훈의 팔에 머리를 비비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조금만 부드럽게, 하려던 거 계속해 주든가요. 그럼.”
뾰로통한 표정 속의 약간의 나른함과 기대, 그리고 발그레한 사과처럼 상기된 두 뺨으로 범지훈을 올려다보는데 범지훈은 깨달았다. 아무리 흉기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대도 얼굴이 취향이면 뭐든 다 사랑스럽고 예뻐 보인다는 것을. 게다가 백사현이었다. 범지훈의 취향과 완벽히 일치하는 아니, 이젠 백사현 자체가 범지훈의 취향이 된 것 같았다.
드로즈 속에서 퉁 튀어 오른 것은 약간 일어서서 더욱 커진 느낌이었다. 잠시 내려다보다 끄트머리부터 조심스레 입에 물어 보았는데 범지훈은 생각만큼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머리 위로 따갑게 내리꽂히는 백사현의 시선을 느끼며 범지훈은 조금씩 백사현을 머금기 시작했다. 입 안이 빠듯할 만큼 머금고 나서야 범지훈은 조심스레 코로 숨을 들이 내쉴 수 있었다. 금방이라도 턱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끝까지 해낸 건 시선을 들자마자 마주친 백사현의 얼굴 때문이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범지훈을 내려다보지만 아까보다 상기된 뺨이, 범지훈의 어깨에 얹은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도 눈빛 속 드글드글 끓는 열기도 모를 만큼 범지훈은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그러니 혀로 입 안의 꽉 찬 살을 쓸어 보는 모험도 할 수 있었다. 흠칫하는 백사현에 범지훈의 눈매가 조금 휘어졌다. 아무리 엄청난 크기를 가졌대도 연하는 연하였다. 범지훈보다 경험도 없을 것이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표정과 몸짓은 범지훈의 가학심을 건드리기도 했다.
솔직히 남의 것을 빨아 주기까지 한 건 범지훈도 백사현이 난생처음이었지만, 이전의 경험들을 떠올리며 범지훈은 이가 살에 닿지 않게 조심하며 혀를 굴려 보았다. 고개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삼키기도 하고 최대한 백사현이 만족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오히려 턱이 아플 정도로 크기만 자꾸 커지는 것 같아 결국 범지훈의 입술을 타고 흐르던 타액이 시트 위로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흥분이 절정에 달하면 응당 나와야 할 그 무엇도 분출하지 않으니 의문이 든 범지훈은 다시 백사현을 올려다보았다.
“…왜요, 지훈이 형?”
아까와 똑같이 상기된 뺨에 이젠 미소까지 짓는 백사현이었지만 범지훈은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까보다 여유를 찾았으면 찾았지 절정에는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을.
“버거우면 뱉어도 돼요. 형 아픈 게 저는 더 싫어요.”
결국 그런 말까지 꺼내는데 범지훈은 자존심이 조각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곤 이렇게 입 안에서 오물댄다고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훈이 형?”
백사현의 성기를 천천히 뱉어 낸 범지훈은 얼얼한 턱을 매만지다 입술 아래로 흐르는 타액을 훔쳐 냈다. 범지훈이 하는 것을 보며 의아하게 불러 오는 백사현에 범지훈은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어떻게 하면 쌀 수 있지?”
시청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 같은 맥락의 톤으로 범지훈은 물었다.
“네?”
“사현이 너, 어떻게 하면 가게 할 수 있냐고.”
“…글쎄요, 근데 괜찮아요. 아까도 좋았어요.”
“아니, 안 괜찮아. 진짜 좋은 거 아니잖아.”
애매모호한 미소를 짓는 백사현에 범지훈은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닌 생각보다 큰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연인 관계에서 속궁합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이렇게는 안 될 일이었다.
“아니에요, 좋았어요. 저는 그만 화장실에 가서-”
“앉아.”
뻗어진 범지훈의 손이 백사현을 붙잡았다. 꼼짝없이 잡혀 다시 앉혀진 백사현이 멀뚱멀뚱 바라보는 걸 마주하며 범지훈은 어두워진 표정만큼이나 머릿속도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백사현과의 잠자리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처음을 범지훈이 A부터 Z까지 기억하지 못하니 이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설마하니 술에 취한 자신이 백사현을 잡고 늘어져 저 혼자만 좋았던 섹스를 한 건 아닌지 범지훈은 문득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오로지 범지훈만을 위한 봉사. 범지훈만의 섹스 머신, 인간 딜도.
그것에 범지훈은 마른세수를 했다. 자꾸만 한숨이 푹푹 나오고 백사현을 똑바로 바라볼 낯도 없어졌다.
“…넣어 볼래?”
그리고 한참 뒤에 뱉어진 물음에 백사현은 멍해졌다. 범지훈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넣자. 저번처럼 우리 끝까지 가 보자고.”
결국 백사현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고 말았다.
“…형, 근데 둘 다 제정신일 때 하자고….”
“제정신이야. 너도 이미 술 다 깼잖아, 사현아.”
백사현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건 부정의 말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침묵을 지키던 백사현이 아무 말 없이 일어섰다. 화장실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이번에 굳이 잡지 않고 보고 있었더니 백사현은 침대 옆 협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열린 협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거.”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러브젤과 콘돔 박스였다. 여긴 범지훈의 집이었지만, 이곳은 백사현의 방이기도 하고 백사현이 자신의 방 협탁 서랍에 무얼 넣어 두든 본인의 자유기는 했다. 하지만 저런 걸 언제 사서 넣어 둔 것인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저건 백사현 혼자서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연인인 범지훈과 함께 써 봐야 할 게 분명한 물건이었다. 범지훈은 저걸 혼자 사서 넣어 뒀을 백사현의 생각을 알 것 같아 입매만 문질렀다.
범지훈 혼자만 애가 달아 끙끙대는 줄 알았더니 범지훈이나 백사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부딪쳐 볼 것을 무엇 때문에 참았나 범지훈은 허탈해지기도 했다. 아방수에게서 받은 크기에 대한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는지, 취향을 저격하는 예쁜 얼굴과는 매치가 되지 않는 백사현의 단단한 몸 때문이었는지, 자신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은 아랫도리의 크기 때문이었는지 누가 넣느냐의 문제 때문이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쩌면 백사현을 지나치게 배려했다는 이유가 가장 큰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떠오르니 엮어진 사탕처럼 줄줄이 떠오르는 건 동거를 시작하면서 맨다리를 드러내는 등 노출에 대한 빈도가 잦아진 백사현이었다.
“…무슨 생각해요?”
그러다 범지훈의 양 뺨이 잡혀 돌아갔다. 범지훈과 지그시 시선을 마주치는 백사현을 범지훈은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혹시, 너… 바지 안 입고 돌아다닌 것도….”
“이제 알았어요?”
배시시 백사현이 미소 지었다.
“일부러 그랬는데. 형이 나한테 꼴려서 먼저 세우고 안달 나게 하려고.”
마냥 순수하고 예쁜 얼굴로 속된 말들을 입에 담으니 범지훈은 뭐랄까, 아랫배에 조금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 범지훈을 알고는 있을는지 백사현의 고개가 틀어지며 입술이 닿았다. 서로의 입이 열리며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끝까지 가자는 말, 무르기 없기에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범지훈은 제 입술을 핥았다. 방금 전까지 백사현을 한껏 머금었던 입술에서는 백사현에게서 나는 향이 옮겨져 나는 것 같았다. 범지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백사현을 씹어 삼키고 싶은 충동이 솟는 걸 느꼈다. 이제 무르는 건 범지훈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먼저 얘기 안 했어?”
일분일초가 아까웠지만, 다시 입을 맞추려 달려드는 백사현의 입술을 잠시 손으로 덮어 막으며 범지훈은 되물었다. 콘돔에 러브젤도 사서 넣어 두었으면서, 바지도 안 입고 범지훈 한번 제대로 돌게 만들어 보려고 작정했으면서 먼저 하자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던 백사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말에 백사현은 입술을 덮은 범지훈의 손을 잡아 내렸다.
“형이 끝까지 가자고 안 했으니까요.”
“뭐?”
“끝까지 가자는 말, 먼저 할 때까지 계속 기다렸어요.”
“…대체 왜?”
범지훈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이상해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시선을 내리깐 백사현이 작게 입을 열었다.
“…좋으니까요.”
“응?”
“형이 너무 좋아졌으니까, 싫어할 짓 하고 싶지 않았어요.”
“싫어할 짓이라니? 그게 뭔데?”
“끝까지 가는 거요.”
다시 이야기가 도돌이표가 되는 것 같았다.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된 범지훈은 백사현을 살폈다. 꼭 주인에게 혼나기 직전의 강아지 같은 얼굴로 침대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범지훈은 결국 백사현의 뺨을 감싸며 고개를 들게 했다.
“그게 왜 싫어할 짓인데?”
“…나쁜 짓 했다고 아까 그랬잖아요. 저, 취한 형 데리고 와서.”
잠시 말을 멈춘 백사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백사현의 입술 사이로 검지 손가락을 물리는 범지훈에 백사현의 시선이 그제야 범지훈을 향했다.
“입술 상처 나. 예쁜 곳인데.”
“…강간하려고 했어요.”
예쁘다는 범지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사현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장난스레 백사현의 입술을 만지던 범지훈의 손길이 멈췄다. 마치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곧장 이해를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 표정에 결국 백사현은 시선을 피했다.
‘미안해요, 형.’ 이어지는 사과에 범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끝내, 두서없는 백사현의 이야기가 먼저 이어졌다.
“형을 제대로 알기 전이라서, 제가 아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일 줄 알고 함부로 굴었어요. 일부러 더 술을 먹여서 형 취하게 만들고 멋대로 우리 집으로 데려와 멋대로 시작했어요. 형이 먼저 하자고 하지도 않았는데요.”
“…….”
“저… 진짜 나쁜 새끼예요, 형.”
작은 한숨을 쉰 백사현은 먼저 얼굴을 뒤로 물려 범지훈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범지훈의 손길에 닿았던 것도 미안한 듯 백사현은 끝내 죄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떨구었다.
“정말… 미안해요.”
“…나도 미안한데, 사현아.”
연이은 사과에 그때서야 생각에 잠겨 있던 범지훈이 입을 떼었다. 미안하다니. 지금 범지훈의 입에서 나오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에 백사현의 불안한 시선이 와 닿았다.
“그날 일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어서 나도 괜찮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네.”
고심 끝에 범지훈이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밖에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기억 자체가 없는데 용서한다느니 용서하지 못한다느니 얘기를 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없는데 사죄하는 것도 범지훈에게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중요한 화제는 그게 아니었다. 범지훈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멀뚱멀뚱 바라보는 백사현에게 조금은 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한 말은 무슨 의미지? 그런 부류의 인간들?”
“…제 얼굴만 보고 만만하게 생각하던 놈들인데, 미안해요. 형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만만하다면…, 함부로 굴었어, 너한테?”
“…네?”
“어떤 식으로 함부로 굴었는데? 싫다는 너한테 추근댄 거야, 그 새끼들?”
백사현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백사현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범지훈은 낮게 중얼댔다.
“이 개새끼들이….”
그리고 범지훈은 백사현의 앞에서 처음으로 욕설을 뱉었다. 살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마디로 범지훈은 대단히 빡친 얼굴이었다.
풀 죽어 있던 백사현이 얼빠져선 멀뚱멀뚱 바라볼 만큼이나 말이다.
***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요.”
걱정스러운 백사현의 말에도 범지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백사현의 말대로 무리기는 했다. 범지훈은 침음을 뱉었다. 한번 해 봤기에 몸이 기억하고 있을 거고 두 번째는 더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었다.
조금 더 몸을 뒤척이며 범지훈은 러브젤로 젖은 끝을 맞추려 애를 썼다. 허벅지 근육은 이미 잘게 떨려 올 정도였다.
누운 백사현의 걱정 가득한 시선이 범지훈의 얼굴에 닿았다. 백사현의 위에 무릎을 세우고 선 범지훈은 꺼떡이는 성기 끝에 자신의 둔덕 사이를 맞추며 조금씩 몸무게를 실었다. 걱정하는 태도와는 다르게 백사현의 성기는 어째 점점 더 크기를 키우는 것 같았다. 그러니 들어가는 입구도 빠듯했다.
강간을 했다며 풀 죽어 있는 백사현을 호기롭게 먼저 눕히고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큰소리를 친 것치곤 범지훈은 지금 속으로 꽤나 당황하는 중이었다. 백사현이 보는 앞에서 손가락을 세 개나 넣어 혼자 풀만큼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손가락을 전부 넣어 더 풀었어야 했나 싶기도 했다. 일반적인 남자들에 비해 큰 손과 그만큼 굵은 손가락을 가진 범지훈이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싶었는데, 배 속을 채우기 시작하는 압박감은 손가락 다섯 개로도 부족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손가락으로 안을 풀며 잔뜩 밀어 넣어졌던 러브젤의 질척한 촉감이 성기에 뿌린 러브젤과 만나 찔꺽대는 소리가 컸다.
헉. 결국, 밭은 숨이 범지훈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렀다. 백사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범지훈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이 차오른 양쪽 둔덕을 꽈악 움켜쥔 것과 동시였다.
“도와줄게요.”
낮게 속닥이는 밲사현의 얼굴엔 웃음기는 없었다. 그게 더 겁이 나서 범지훈의 동공이 흔들렸다. 도와주면 좋겠다는 마음과 괜찮다는 마음이 범지훈의 머릿속에서 거세게 충돌했다.
“응? 지훈이 형.”
은근한 목소리로 예쁜 얼굴이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것엔 범지훈은 약해지고 말았다. 때맞춰 손안 가득 범지훈의 양 둔덕을 움켜쥐었던 백사현이 양쪽을 활짝 벌렸다. 서늘한 바람이 붉어진 속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것에 범지훈의 허리가 잘게 떨려 왔다. 저도 모르게 끄덕끄덕 범지훈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말을 하는 것도 지금은 버겁기 그지없었다. 입을 열었다간 이상한 쇳소리만 흘러나올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리고 백사현은 범지훈의 허벅지를 잡고 그대로 주저앉히게 했다. 간신히 버티고 선 범지훈의 몸이 백사현에게 내려앉음과 동시에 반쯤 들어가 있던 성기가 퍽 소리를 내며 뿌리 끝까지 안으로 박혀 들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범지훈의 입이 벌어졌다. 꺼떡이며 서 있던 범지훈의 성기 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쏟아져 백사현의 하얀 배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점성이라곤 전혀 없는 물 같은 액체에 배 위를 쓸어 본 백사현은 제 손가락에 묻은 액체를 바라보다 범지훈을 올려 보았다.
“힉.”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온 것에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은 범지훈의 눈가는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이미 다 커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안에서 갑자기 더 커지는 느낌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쌌네요.”
나지막한 말과 함께 백사현의 손이 범지훈의 성기 끝을 건드렸다.
“진짜 흥분했나 보다, 형. 제 배 위에 가득 싸 버렸는데 보여요?”
움찔움찔 제멋대로 떨려 오는 허리로 범지훈의 시선이 힘겹게 백사현의 배를 향했다. 탄탄한 흰 배 위로 쏟아진 물 같은 액체는 어느새 백사현의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려 침대 시트도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 색깔이 투명한 빛을 띠지 않았으면 소변이라고 이야기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많이 싸기는 했다.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범지훈의 얼굴에 더욱 열이 몰렸다.
“이런 거 좋아하나 봐요, 보자마자 형 안이 되게 오물대고 있어요. 저한테 싸면 더 기분이 좋은 거예요?”
천사 같은 얼굴로 천박한 말들을 쏟아 내는데 범지훈은 왜인지 수그러지는가 싶던 성기가 꺼덕이며 다시 발기하는 걸 느꼈다. 백사현의 가느다란 손가락도 범지훈의 성기를 매만지며 이따금 손톱이 성기 끝을 가볍게 긁기도 했다.
“형이 좋으면 나한테 더 싸도 돼요. 근데 그러면 되게 진하게 배겠다. 형 냄새.”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완전히 뻣뻣해진 범지훈의 성기의 끝에서 맑은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범지훈의 성기 끝을 막으며 백사현은 미소 지었다.
“근데 또 형만 가면 저는 어떡해요?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흐으… 사현…아.”
지금은 뭐든 다 자극이었다. 백사현의 목소리도, 백사현의 하얀 배 위로 잔뜩 흐르는 범지훈의 맑은 쿠퍼액도, 성기를 감싼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도.
“그렇게 이름 부르면 나도 못 참겠잖아요. 그러니까 조금만 힘내서, 응? 다시 일어나 볼래요?”
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게 속살대는 목소리에 범지훈은 달달 떨리는 허벅지에 힘을 주어 백사현의 말대로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찔꺽대는 소리와 함께 범지훈의 내부에 품고 있던 성기가 스르르 바깥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주름진 안쪽을 통해 선연히 느껴졌다.
겨우겨우 성기의 끝을 남기고 거의 몸을 일으켰을 때 범지훈의 성기를 조금 힘주어 잡는 악력이 느껴졌다. 헉.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린 범지훈이 무너지며 안쪽으로 다시 성기가 박혀 들었다. 장정인 범지훈의 몸무게까지 얹어지니 무리 없이 거세게 박힌 것에 범지훈의 고개가 젖혀졌다.
“미안해요, 형. 못 참겠어.”
백사현의 인내심도 거기까지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범지훈의 뒤통수를 감싸 침대에 바로 눕힌 백사현의 시선이 번들거렸다.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탄탄한 맨가슴에 바짝 솟은 붉은 돌기 두 쌍이 백사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곳에 지체 없이 입술을 내리며 백사현은 범지훈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하얀 어깨 위로 얹었다.
“…형, 지훈이 형.”
범지훈을 부를 때마다 빠져나가는가 싶던 성기가 뿌리 끝까지 퍽 하고 박혀 들었다. 백사현에게 박힐 때마다 위쪽으로 몸이 조금씩 밀려 올라가는 범지훈의 두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과 함께 힘 빠진 신음이 마구 흘러나왔다. 백사현도 그렇지만 범지훈의 온몸도 붉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가도, 입술도, 뺨도, 귀도, 러시아인의 피가 섞여 남자치곤 하얗던 피부도 전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결국 침대 밖으로까지 범지훈의 머리통이 밀려 나간 것에 백사현은 범지훈의 목뒤를 감싸며 아래로 당겨 왔다. 그 탓에 다시 한번 깊게 박혀 들어가는 성기에 범지훈은 결국 흐느꼈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잘생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후드득 눈물을 쏟아 내는 것에 백사현은 행동을 멈췄다.
“…그만해?”
어느새인가 백사현은 말을 툭 잘라먹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 힘든 범지훈에게 반말이나 존댓말을 구분할 여력 따윈 없었다. 원초적인 본능만 남은 범지훈은 감질나던 곳에 끝만 닿아 있던 성기를 빼내려는 백사현의 목덜미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계, 흐…계속…윽. 계속. 거기.”
눈물 젖은 얼굴을 어깨에 파묻고 칭얼대듯 속살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백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왜에… 계속, 커지… 흐… 커지지?”
다만, 의문 섞인 범지훈의 물음과 함께 범지훈의 허리가 번쩍 들려 천장을 향해 올라갔다.
“확실히 사람 미치게 하는데 뭐 있어요.”
범지훈의 하반신을 들어 올린 주범인 백사현이 범지훈을 내려다보며 짙게 미소 지었다. 단순히 기쁘고 즐겁다는 걸 표현했다기보단, 진심이 담기지 않은 그린 듯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웃고 있는 백사현의 두 눈이 본인 스스로도 감당 못 할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건 분명한 진심이었다.
“그래서 못 놔주겠네.”
어느새 새로운 콘돔으로 갈아 끼운 백사현이 벌어진 다리 사이 빨갛게 물들어 뻐끔대는 범지훈의 안으로 성기의 끝을 맞췄다.
“미안.”
깊숙이 박히는 것에 범지훈의 몸이 떨려 왔다.
“…범지훈.”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남자의 이름 세 글자를 드디어 입에 담으며 백사현의 눈매가 만족스레 휘어져 내렸다. 밤은 여전히 길었고 백사현은 여전히 이 남자에게 갈증이 일었다.
***
서서히 달아나는 잠기운에 범지훈은 눈을 떴다. 아니, 분명 떴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떠지지가 않았다. 묵직한 눈꺼풀에 눈을 깜빡이던 범지훈은 눈두덩이를 만지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흠칫했다. 겨우 팔 하나를 들어 올린 것뿐이었는데 욱신거리는 근육통이 장난이 아니었다. 꼭 밤새 혹독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깼어요?”
그러다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엔 범지훈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백사현이었다. 범지훈의 옆에 몸을 누인 채 사르르 눈을 휘어 내리던 백사현은 제 두 손에 꼬옥 쥐고 있던 범지훈의 손에 쪽하고 입을 맞췄다.
“많이 피곤했나 봐요.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어요, 형.”
그러게. 왜 이렇게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고 피곤한 건지. 백사현의 말을 물 흐르듯 들으며 범지훈은 멍한 시야를 깜빡였다.
그사이 범지훈의 손바닥에 고양이처럼 뺨을 비비는 백사현을 보며 범지훈의 입꼬리도 살살 올라가고 말았다. 귀여워. 습관처럼 생각하며 백사현의 하얀 살갗을 매만지던 범지훈이 몸을 조금 뒤척였을 때였다.
“읏.”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렀다. 범지훈은 믿어지지 않는 느낌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직도 많이 아파요? 조금 더 마사지해 줄까요?”
놀란 백사현의 물음에도 범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생경한 고통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예 처음 겪어 봤다기엔 익숙한 것 같기도 한 고통이었다. 그러자마자 머릿속에 차례대로 떠오르는 건 백사현과 첫 잠자리를 하고 난 후 허둥지둥 도망쳤던 그때의 기억이었다.
어떻게 이 몸으로 그땐 그렇게 도망을 칠 수 있었던 건지, 범지훈은 다시 생각해도 신기했다. 지금도 그렇게 도망쳐 보라고 한다면 흉내도 내지 못할 터였다.
“미안해요, 지훈이 형. 내가 조절했어야 했는데.”
“…아니야. 나도 좋다고 했는데 뭘.”
금세 기죽은 강아지 상이 되어 낑낑대는 백사현에 범지훈은 부드럽게 그 뺨을 매만졌다. 잠깐 밀려왔던 후회는 백사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 녹듯 사라졌다.
“사현아.”
한참을 백사현을 바라보며 그 뺨을 쓸고 가느다란 턱선을 만지던 범지훈은 문득 백사현을 불렀다. 곧장 대답해 오는 백사현을 지그시 바라보며 범지훈은 내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어머니 댁에 초대를 받아서 갔다가 네 트라우마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들었어.”
백서경에게서 백사현의 어릴 적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범지훈이 했던 생각은 이야기의 당사자인 백사현에게 전하자는 거였다. 백사현에게서 무슨 대단한 대답을 듣고자 함이 아닌 그저 이야기의 당사자이니까 범지훈은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시지만 본인인 너한테서 들은 게 아니어서 허락을 구하고 싶었거든. 이걸 내가 기억하고 있어도 될지.”
“…형은.”
그리고 두 눈이 조금 커지는가 싶었던 백사현은 이내 작은 웃음을 흘렸다.
“진짜 다정한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반했나 봐.”
제 뺨을 덮은 범지훈의 손을 조금 끌어 내려 백사현은 그 따끈한 손바닥 위로 입술을 내렸다.
“다정하고 배려심 있고, 그래서 형이 더 좋아지나 봐요.”
쪽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입술에 범지훈은 가슴이 간질거렸다. 잘생겼다, 몸이 좋다, 돈이 많다 등의 보이는 외형이 아닌 속 알맹이에 대한 칭찬은 처음인 것 같았다.
“당연히 기억해도 돼요. 형이 기억해 준다면 더 좋아요. 사실은 내가 먼저 얘기하려고 했는데 어려웠거든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불쌍하게 보이고 싶지도 않고 너무 별거 아닌 것처럼 얘기하기엔 그렇게 별거 아닌 이야기는 아니고.”
“얘기하고 싶어지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얘기해 주면 돼. 어렵게 생각하진 말고.”
“그래요?”
“응.”
“형.”
“응.”
“사랑해요.”
순간적으로 범지훈은 대답하는 걸 잊고 말았다.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진심은 범지훈으로선 너무 오랜만에 들어 보는 종류였다. 간질거리던 가슴은 이내 속 안이 배배 꼬여 가는 것처럼 변했다. 범지훈은 슬그머니 백사현의 시선을 피했다. 귀 끝에 어느새 화끈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좋아한다는 말도 범지훈을 제멋대로 설레게 했는데 사랑이라는 단어는 범지훈의 가슴을 무너뜨리는 듯했다. 무너뜨린다는 게 나쁜 의미가 아닌 당연히 좋은 의미였지만, 또 부끄럽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서른다섯 살이나 먹고 이런 말 하나에 부끄러워한다고 어이없어할지도 몰랐다. 뭐, 그래도 범지훈은 아무래도 좋았다. 원래부터가 이런 말 하나에 놀라 하고 부끄러워하고 좋아했다.
“…그래.”
하지만 또 문제가 너무 부끄러우니까 똑같이 맞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고백은 많이 해 왔다지만 대답이 돌아온 적은 현저히 적었었다. 물론 상대가 먼저 고백을 건넨 적도 굉장히 적었지만, 똑같이 맞대답을 했던 적도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도 얘기할 거 있어요.”
다행히 백사현은 범지훈의 맞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저 사실 뱀띠에요.”
“…뭐?”
뜻밖의 이야기에 범지훈은 멍해졌다.
“89년 12월 31일에 태어났는데 89년생으로 등록하기엔 나이 한 살을 그냥 먹는 거라 억울하다며 어머니가 90년생으로 출생 신고하셨거든요. 저도 그냥 90년생들이랑 똑같이 학교에 다녔었어요.”
“…처음 알았어.”
범지훈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렇죠? 주변 사람들도 모르는 고급 정보거든요, 이거.”
씨익 웃음 짓는 백사현의 얼굴이 천진난만했다. 나이가 어떻든 연하는 연하라서 귀여움은 한결같았다. 아니지, 백사현이라면 연상이라도 귀여울 것 같았다.
“난 범띠야.”
“당연히 알아요.”
“나도 출생 연도가 달랐으면 어쩌려고?”
“형은 왜인지 호랑이띠가 아닐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게 뭐야.”
“그냥, 뭔가 느낌이 그래요.”
범지훈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이 나누는 도란도란한 이야기가 체온에 데워진 이불 속처럼 방 안을 데웠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슬슬 허기도 느껴지니 그건 범지훈뿐만이 아니었는지 백사현도 입을 열었다.
“아, 저 형이랑 먹으려고 요리해 봤는데 배 안 고파요? 밥 먹어요, 우리.”
“요리를 했어?”
“네, 형 자는 동안에 해 봤는데 일단은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니면 가져다줄까요?”
“아냐, 괜찮아. 가 보자.”
그리고 그날, 백사현의 요리를 한입 맛본 범지훈은 그대로 식탁에서 일어서 죽은 요리에 심폐 소생술을 실시했다. 범지훈이 움직이기만 해도 죄인이 된 얼굴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백사현에게 범지훈이 한 이야기는 요리는 반드시 내가 맡을 테니 앞으로는 계속 재료 손질만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고춧가루를 풀어 넣은 그저 단순한 콩나물국이었건만 깊은 맛은 하나도 없이 소금 통을 들이부은 것처럼 짠맛만 왜 이렇게 나는 건지는 범지훈에겐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백사현이 어머니인 백서경의 음식 솜씨를 그대로 닮았다면 가사 도우미에게 요리를 맡긴다는 백서경의 선택은 진심으로 탁월한 것이었다.
***
[퇴사한 기념으로 시간도 오래 지났으니 목격담 하나 풀겠음ㅋㅋㅋ내가 모 프라이빗 영화관에서 계약직으로 일했었을 때 이야기임ㅋㅋㅋㅋ
프라이빗 영화관하면 딱 들어도 삐까뻔쩍한 곳 떠오르잖음? 가격도 ㅈㄴ 비싸고ㅋㅋㅋㅋ나도 여기서 일했긴 했지만 내 돈 내고 간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아무튼 비싸고 좋은 곳이라 연예인들도 종종 방문하긴 함ㅋㅋㅋㅋㅋ그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연예인이 있어서 이렇게 얘기해볼까 함
지금도 유명한 인기 아이돌 그룹 멤버인데...바로바로! 에스의 사현임ㅋㅋㅋㅋ당연히 목적이야 영화보러 왔을거고 나는 그 때 내가 전담으로 일했던 시간대라 운좋게도 사현을 가까이에서 직접 응대했었음(개이득) 같이 온 일행도 하나 있었었는데 여자는 아니고 남자였음 (여자였으면 이 얘기 꺼내는 순간부터 나 고소당할 각오해야 함ㅋㅋㅋㅋㅋ)
근데 그 남자분이 키도 굉장히 크시고 엄청 잘생기셨음. 일반인 아우라는 절대 아니고 찐 배우 같은 느낌? 친분있는 남자 연예인들끼리 데이트하러 온 것 같았음(왜 데이트라고 했냐면 뒤에 나옴) 두 분 다 너무 젠틀하고 직원들 한 명 한 명에게도 매너 있었는데 눈호강 제대로 했음 그땐 돈 벌려고 일한 게 아니고 찐으로 즐겁게 일했었음ㅎㅎ
근데 그 둘의 분위기가 뭔가 묘했음 브로맨스? 같은 느낌? 나는 남자끼리도 핑크빛 분위기 제대로 내는 거 처음 봄ㅋㅋㅋㅋ근데 둘이 되게 친해보였는데 사현은 지훈씨라고 엄청 격식차리면서 부르고 그 지훈씨는 백사현씨라고 부르던데 나도 으른이지만 뭔가 더 으른의 연애를 보는 느낌이었음ㅋㅋㅋㅋ그렇게 두 분 가시고 지훈씨에 대해 아무리 찾아봐도 연예인 중엔 없었음ㅠㅠ
기사뉴스까지 검색하니까 그때서야 나오던데 미친ㅋㅋㅋㅋㅋ나는 당연히 배우나 연예인인 줄 알았더니 지난 번 엄청 화제됐던 사현 납치사건의 백마탄 왕자님ㅠㅠㅋㅋㅋㅋ범호 캐피탈 대표님이셨음ㅋㅋㅋㅋ대표님이라니까 나는 철형이나 덕철이 이런 종류의 이름인 줄 알았더니 지훈씨라니ㅠㅠㅠㅠㅠㅠ얼굴에 치이고 이름에 치이고ㅜㅜㅜㅜ나이도 생각보다 훨씬 어려보였음 앞머리 내렸어서 그랬나? 사현이랑 나이차도 안 나 보이고ㅠㅠㅠㅠ존잘남ㅠㅠ사현이랑 덩치차이도 미쳤음ㅋㅋㅋㅋㅋ키스하기 딱 좋은 키차이ㅠㅠㅠㅠ그러니까 대표님 풀네임 너무 알고 싶더라ㅠㅠ연예인이셨다면 바로 입덕했을 듯ㅠ기사로 보니까 ㅂ모씨던데 박지훈일까? 배지훈? 봉지훈?ㅠㅠㅠ누구 풀네임도 알려주실 분??]
└ ejrgn1: 범지훈 아님? ‘범’호 캐피탈이잖아ㅋㅋㅋㅋㅋ
└ 머그ri: 야 진짜 개단순하게 생각하네ㅋㅋㅋㅋㅋ범씨 일리가 있겠음?? 나 살면서 범씨 한번도 못봄
└ 글쓴이: 맞아 나도 범씨는 아닌 것 같아서ㅠㅠ그래서 정확한 풀네임이 뭔지 여기에 물어봤던 거야
└ 민징징: 범씨 맞아 범지훈 대표님 풀네임임
└ 글쓴이: 헐 진짜 범씨였어?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어느 순간,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흔한 연예인 목격담 하나가 베스트 글까지 오르면서 인터넷 여기저기에 빠른 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목격담에 달린 댓글들까지 화제가 되었고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은 누가 뭐래도 글의 주인공인 범지훈이었다.
가장 먼저 불씨를 지폈던 목격담 작성자는 정말로 영화관 직원으로 일했다는 당시의 직원 카드와 백사현의 본명으로 예약된 영화관 사이트 캡처본으로 인증까지 마친 뒤라 신빙성은 더했다. 하지만 가장 큰 포인트는 작성자가 적은 범지훈의 외모 묘사였다.
뒤이어 백사현의 솔로 쇼케이스에서 팬들에 의해 찍혔다는 사진 얘기까지 돌아 누군가가 범지훈의 사진을 찾아오기에 이르렀고 그 사진에 대한 반응은 과히 폭발적이었다. 젊은 여성층과 에스의 팬덤 사이에서 범지훈은 단시간에 유명 인사가 되고 말았다. 그건 잘생긴 외모와 매너에 더해 백사현과의 케미 덕분일 확률이 컸다. 그러니 일반인임에도 준연예인급에 이르는 인기를 얻게 되었고 각 커뮤니티마다 범지훈의 개인 SNS를 찾는 문의 글이 종종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SNS에, SNS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러서는 범지훈의 인터넷 팬 카페까지 개설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가입 회원 수가 증가하는 팬 카페의 존재 여부를 당사자인 범지훈은 전혀 몰랐다.
아니, 팬카페 존재 여부는 물론이고 본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회사 전화로 종종 걸려 오는 어느 방송 프로그램의 무슨 작가다, 라는 섭외 전화들에 그저 약간의 의문을 품을 뿐이었다.
분명 납치범으로부터 백사현을 구했던 그 사건으로 섭외하는 것이리라 생각한 범지훈은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잊을 만하면 걸려 오는 전화에 요즘은 부쩍 그 주기도 잦아져 더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아이돌 그룹 에스의 팬덤 내부에서는 팬덤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아니, 아이돌이라는 전체 세계관에 한 획을 그을 대형 팬픽이 탄생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
“헐, 대박. 이것 봐 봐.”
옆에서 들려오는 오버 섞인 감탄사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백사현의 손가락은 분주하게 핸드폰만 두드릴 뿐이었다. 범지훈에게서 온 톡에 답장을 하기 위한 재빠른 손놀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는 자꾸만 백사현을 귀찮게 했다.
“형, 이것 좀 보라니까.”
전송을 누른 뒤에야 백사현은 귀찮음이 조금 묻은 얼굴로 시선을 던졌다. 범지훈 덕분에 끌어 올려졌던 입꼬리는 내려가 버린 지 오래였다. 솔로 활동을 이어 가는 백사현의 밴에는 오늘 웬일로 에스의 멤버이자 막내인 활동명 보아, 본명 이루나가 탔다. 그룹의 귀여움을 담당하는 막둥이었지만 지금으로선 애석하게도 백사현에게 그렇게 귀염둥이는 아니었다.
어쨌든 이루나 또한 개인 스케줄이 끝나고 가는 길이 같아 백사현의 밴을 함께 얻어 타게 됐다. 오랜만에 보는 매니저인 이준혁과 반가운 인사를 마치고 핸드폰을 보는 줄 알았던 이루나는 뭘 발견했는지 백사현에게 무언가를 보여 주지 못해 아까부터 안달이었다.
‘한번 좀 봐 줘라, 사현아.’ 운전을 하던 이준혁의 재촉 때문에도 마지못해 이루나의 핸드폰을 받아 들며 백사현은 기대 없는 시선을 화면에 고정했다.
“…이게 뭐야?”
그러고는 얼떨떨한 눈으로 다시 이루나를 바라보았다.
“대박이지? 나 팬픽 하나에 리트윗 수가 1만 넘은 거 처음 봐. 심지어 이제 10편까지밖에 연재 안 된 건데. 하트 수는 지금 2만이다?”
흥분한 얼굴의 이루나가 덧붙였다. ‘역시 에스 안 죽었네.’부터 ‘우리 미모 어쩌면 좋냐.’까지, 멤버들끼리 붙여 놔도 뭐가 되니까 팬들도 팬픽을 만들고 이게 또 유명해지나 봐. 재료가 좋으니까 공급도 가능하고 수요도… 등등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자화자찬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백사현은 트윗의 글을 집중해서 읽었다.
“사범…이 뭐지?”
“잉? 사범? 그거 우리 커플링명 아닌데?”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그제야 이루나도 백사현이 보던 화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데뷔 때부터 알페스니 커플링이니 등에 지대한 관심이 있던 이루나는 에스의 멤버들 중 유일하게 팬들이 부르는 알페스 커플링명을 줄줄 꿰고 있었다. 에스의 대표적인 메이저 커플링으로는 루동(이루나X곽복동), 영사(김영희X백사현), 달백(박달수X백사현) 등이 있었는데 이루나는 루동이 최고라고 늘 호언장담했지만 글쎄, 에스의 커플링을 대표하는 건 거의 영사와 달백이었다. 그러니까 사른(백사현 오른쪽)이 메이저 오브 메이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음지에서 활동하는 팬들은 형을 공주님이라고 부르던데 알고 있냐며 히죽대는 이루나를 백사현이 무시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백사현도 현재 진행형으로 범지훈이라는 남자와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고 있거니와 예전부터 남자를 만나 왔으니 알페스에 극도의 거부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굳이 팬픽이나 알페스성 팬아트를 찾아보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그런 쪽으론 아예 관심이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건 생각이랑은 전혀 달랐다.
“사범이 설마… 형이랑 범 대표님이야? 심지어 대표님이 깔려?!”
“뭐, 뭐?!”
이루나의 한 톤 높아진 목소리에 백사현과 마찬가지로 알페스에 별 관심 없던 이준혁 또한 운전하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두 남자의 호들갑에도 백사현만 태연한 얼굴로 트윗 속 팬픽 링크를 눌렀고 링크는 곧장 개인 연재 사이트로 연결됐다. 그리고 주르륵 떠오르는 글자들의 향연에 백사현은 어느새 입도 다문 채 정독을 시작했다. 팬픽을 단순히 팬들의 취미 활동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소설 작품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는 말이 왜 나왔나 했더니 백사현은 첫 줄을 읽자마자 곧장 이해했다. 읽기 편한 담백한 문체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묘사는 팬의 단순한 취미 활동 수준인지 작가가 쓰는 소설인지도 분간하기 어렵게 했다.
“미쳤네. 이분 그림도 같이 그리나 봐. 팬픽 속에 삽화 들어간 거 처음 봐. 심지어 존잘님이네?”
옆에서 중얼대는 이루나의 말은 이미 백사현에 귀에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문단 사이사이 직접 그린 건지 그림 작가가 따로 있는 건지 삽화도 끼어 있었는데 장문의 글과 함께 있음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고퀄리티 그림이었다. 게다가 그림 작가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는다면, 이상할 정도로 수준 높은 그림은 누구인지도 바로 분간할 수 있을 만큼 특징을 정확히 짚어 냈다. 이루나는 연신 입을 틀어막기에 바빴고 백사현의 눈동자는 부지런히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이준혁만 운전을 하느라 직접 보질 못하고 있으니 연신 ‘뭔데 무슨 내용인데?’라며 묻기에 바빴다.
“오졌다. 이분 실제로 본업이 이런 쪽 아니야? 글이랑 그림으로 먹고 사시는 분! 준혁이 형. 대박이야, 이거. 나도 잠깐 봤는데 되게 빠져들어.”
“무슨 내용이길래 그러는데? 근데 진짜 사현이랑 지훈이가 커플이라고?”
“아, 맞아. 그러고 보니 형이랑 범 대표님이랑 실친이지? 와, 형은 진짜 감상이 남다르겠다.”
“그래서 무슨 내용인데? 재밌어? 사현이 쟤 엄청 재밌게 보는데, 저 녀석 드라마든 영화든 뭐 하나 끈덕지게 본 적 드물지 않아?”
자신을 두고 하는 말에도 시선 한번 주지 않는 백사현을 백미러를 통해 흘긋거리며 이준혁은 놀란 듯했다. 웬만큼 재밌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콘텐츠들은 끈기 있게 본 적이 손에 꼽았던 백사현이기에 이준혁의 놀라움은 더 했다.
“이 형도 진짜 재밌긴 한가 봐. 이거 내용은… 조직물인데?”
“…뭐?”
“보자, 사현이 형은 백사파? 거기 조직 후계자로 나오고 대표님은 범호파 두목으로 나오는데? 오~ 느와르네.”
휘이 휘파람을 부는 이루나에도 이준혁은 별 대답이 없었다. 범호파라는 대목에서는 어쩐지 안색도 나빠진 것 같았다.
“야, 이거 영화로 만들어도 되겠다. 백사파랑 범호파랑 라이벌 관계인가 봐? 둘 다 무슨 원수지간 급으로 사이가 나쁜데? 어? 범 대표님이 사현이 형을 납치하라고 명령하네? 근데 어떻게 사범이지? 보통 이러면 범사 아니야?”
“…루나야.”
“응?”
“그 작가 이름이 어떻게 되냐?”
“민징징? 그런 닉네임인데?”
“…모르는 사람인데.”
“응?”
혼잣말을 중얼대는 이준혁에 이루나가 되물었지만, 이준혁은 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침묵이 내려앉은 차 안에 이루나만 어리둥절한 얼굴로 운전하는 이준혁의 뒷모습을 한번, 팬픽에 빠진 백사현을 한번 번갈아 바라보았다.
“링크 나한테 보내 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내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이루나에게 돌려주며 백사현이 덧붙였다. ‘진짜 재밌나 보다, 형?’ 이루나도 놀란 얼굴로 받아 들며 알겠다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이루나가 한번 봐 보라며 들이밀어도 몇 번 훑다 돌려주기 바빴던 백사현이었는데 이번은 그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으니 이루나로서도 놀랄 노 자였을 터였다.
***
[모사르트 전시회 공지 왜 안 떠? 나만 이상한가?]
평화로운 SNS에 올라온 한 팬의 트윗이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듯 파문을 일으켰다. 덩달아 리트윗 수와 인용 리트윗 수도 증가하며 팬들도 너도나도 한마디씩을 보태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뜨는 게 정상인데…?]
[아니 근데 입금받은 뒤로 모사르트 아예 트윗을 안 올려;;;걔 사담계도 조용해 사담계에서 원래 말 존나 많은데]
[씨발 먹튀 아님??]
[그 홈마가? 걔 돈도 많지 않아?]
팬들의 의문은 의심으로 그리고 확신으로 변하기까지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사르트’. 에스의 멤버 모사, 본명 김영희라는 멤버의 홈마스터(*연예인의 스케줄을 따라다니며 연예인의 사진이나 영상을 찍는 사람)는 그 네임드도 남달랐다. 에스의 각 멤버별로 대표 홈마들을 하나씩 꼽아 보라고 한다면 김영희의 대표 홈마는 모사르트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여태껏 개최한 김영희 영상회나 사진 전시회의 수도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였고 해마다 홈마가 직접 찍은 김영희의 사진이 들어간 시즌 그리팅과 굿즈들까지 모사르트의 이름으로 입금을 받아 직접 제작한 횟수만 해도 수십 번이었다.
에스의 데뷔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오래된 홈마 중의 하나기도 했던 모사르트는 에스의 인기가 오를수록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의 인지도도 따라서 올라갔다. 그러니 현재 모사르트의 계정을 팔로우 중인 팔로워 숫자가 80만 명 이상을 달성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홈마가 늘 하던 전시회 입금을 받은 뒤로 갑자기 잠적했다면, 전시회 비용을 이미 선입금한 팬들로서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모사르트 시발 존나 쎄하더라니 걔 사담계에서 ㅇㅎ만 존나 편애하고 이뻐했잖아 개인팬이었는데 완전]
[맞아 나도 그거 좀 쎄하긴 했어요 선도 진짜 간당간당하게 지키고 악개같은 느낌도 들던데?ㅠ]
[그 년 ㅅㅎ이 미워했잖아 ㅇㅎ빼고 타멤에게는 관심도 없던 년이 이상하게 사담계에서는 ㅅㅎ이 조롱하는 뉘앙스에 ㅅㅎ이한테만 존나 쎄하게 굴었어]
그러다 보니 모사르트의 사담 계정을 알고 있고 팔로우 중인 팬들도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논란이라는 불씨에 기름을 들이부은 격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백사현을 최애로 두고 있는 팬 측에서도 난리가 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팬덤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할 때쯤,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에스의 멤버들은 여느 때처럼 일상이 된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다섯 명의 완전체가 모여 함께 스케줄을 뛰는 날이었다.
이름하여 ‘블랙 스네이크: 마피아를 찾아라!’라는 에스의 자체 콘텐츠 예능 촬영 스케줄이었다. 룰은 일반적인 마피아 게임과 같았고 그룹 에스의 세계관에 걸맞게 마피아를 블랙 스네이크로 경찰과 의사, 무고한 시민 등을 화이트 스네이크라고 부르는 방식으로 촬영하는 예능이었다.
오늘 이루나와 백사현이 함께 온 목적지인 스튜디오도 바로 이 예능을 촬영하기 위함이었다.
어찌 되었든 순조롭게 촬영을 끝마치고 화장을 지우거나 쉬기 위해 에스의 멤버들은 대기실에 모였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대기실로 들어온 백사현의 표정은 아까부터 좋지 못했다. 촬영을 하는 내내 거슬리던 문제 때문이었다. 프로답게 카메라가 돌아갔을 때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촬영이 완전히 끝난 지금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얼굴로 백사현은 멤버들을 향해 다가갔다.
“얘기 좀 해.”
박달수에게 가벼운 농담을 건네며 앉아 있던 김영희의 앞에 멈춰서 백사현이 입을 열었다. 박달수는 물론 김영희도 그런 백사현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음. 죄송합니다. 잠깐만 나가 계셔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에 눈치 빠른 리더 곽복동이 일어서서 대기실 안에 남아 있던 스태프들에게 먼저 양해를 구했다. ‘멤버들끼리 사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라는 말을 덧붙이며 미안해하는 곽복동에 스태프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둘 빠져나갔다.
멤버들밖에 남지 않게 되자 분위기는 더욱 얼어붙었다. ‘저 형 저럴 줄 알았다니까.’ 김영희를 흘끔 바라보며 이루나는 괜히 제게 불똥이 튈세라 곽복동의 뒤로 몸을 숨겼다. 박달수도 두 형의 눈치를 살피다 이루나와 곽복동 쪽으로 슬슬 앉아 있던 의자를 끌며 물러났다.
“…왜?”
“일부러 그래?”
‘뭐라고?’ 되물어 보는 말과는 다르게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김영희의 표정은 태연했다. 얼핏 뻔뻔해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로 백사현을 올려다보는 김영희에 결국 백사현의 미간이 구겨지고 말았다.
“계속 말했지. 난 스킨십 안 좋아한다고. 그런데 왜 자꾸 건드리는 거야?”
“내가 뭘 건드린다고.”
“촬영 때부터 만져 댔잖아. 평소라면 그렇게 치대지도 않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러는 건데? 내가 배려해 달라고 데뷔 전부터 얘기했을 텐데. 강아지한테도 이렇게까지 얘기하면 알아들을 정도일 거야.”
‘사현이 형 워딩이 엄청 센데?’ 지켜보던 곽복동이 이루나와 박달수에게 소곤댔다. 그만큼 화가 난 백사현을 알기에 지켜만 보는 세 멤버의 가슴도 조마조마했다. 백사현은 물론 김영희하고도 지금껏 동고동락하며 지내 왔기 때문에 둘을 잘 아는 세 멤버는 성격 더러운 백사현이 아무리 화가 난대도 동생에게까지 손을 댈 정도는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김영희도 성격이 뭐 같은 걸 알아서 잘못하면 그 선을 훌쩍 넘어 버릴까 봐 세 멤버는 혹여나 몸싸움이 일어날 기미라도 보이면 달려들어 뜯어말리기 위해 의자에서 연신 움찔움찔했다.
“…데뷔한 지 8년에다, 연습생 생활까지 합하면 거의 10년인데 형은 내가 그렇게 싫어?”
“뭐?”
그러다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지는 대화에 세 멤버들의 표정도 백사현처럼 아연실색해지고 말았다. 오직 김영희만 울컥하는 얼굴로 백사현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원수라도 그 정도 알고 지냈으면 정이라도 들 거야. 도대체 스킨십이 왜 그렇게 싫은 건데?”
“…성격이라고 그랬잖아. 나도 내가 이상한 거 아니까 이해해 달라고 말 안 했어?”
결국 김빠진 얼굴로 백사현도 한 박자 뒤늦은 대답을 했다.
“그리고 너 안 싫어해. 그냥 내가 스킨십을 안 좋아할 뿐이니까 서로 배려하면서….”
“난 스킨십 좋아해!”
갑작스레 커진 김영희의 목소리에 괜히 박달수가 깜짝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사현은 피곤한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어린아이도 알아듣기 쉽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도 상대방이 싫으면 배려해 주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초등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잖아. 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되는데, 난.”
“…좋아하니까.”
“뭐?”
중얼대는 김영희에 백사현이 되물었다. 세 멤버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김영희를 향했다.
“백사현 널 좋아하니까 너랑 하는 스킨십도 좋아하는 거라고, 내가!”
차마 백사현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뱉어낸 고백에 백사현보다 더 충격을 받은 건 세 멤버였다. 우당탕. 의자가 넘어갈 정도로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김영희가 백사현을 밀치고 대기실 밖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걸 바라보며 이루나는 한 마디를 뱉었다.
“미쳤네….”
그야말로 팬픽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사현은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를 납치하도록 지시한 장본인이니만큼 바짝 가시를 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남자치고는 워낙 선이 곱고 예쁘장하게 생긴 사현은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벌인 남자들의 대부분은 사현에게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거나 품거나 품기 시작했다. 이 남자라고 별반 다를 것 같진 않았다.
-…미안하다.
분명, 사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흥미를 느끼고 그다음 순서로는 당연히 흑심을….
-놀랐을 텐데, 아저씨가 사정이 있어서 어린 너한테 몹쓸 짓을 했어.
…사과를 하는 사람은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사현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묶였던 곳은 괜찮아? 세게 묶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거친 일을 했던 사람들이라 걱정이네. 주치의 불러 줄게.
-됐어요.
퉁명스레 대답하고 나서야 사현은 후회했다. 주치의는 정말 필요 없었지만 침대까지 뻔히 있는 방 안에 눈앞의 저 남자와 자신, 단둘만이 있는 이 상황을 피해야 했는데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고 말았다. 사람을 경계하는 길고양이처럼 다시 사나운 눈빛이 된 사현은 침대의 끝 쪽으로 천천히 몸을 물렸다. 앉아 있는 곳이 침대라는 것도 굉장히 신경이 쓰였고 지금이라도 침대 밖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저 남자에게 그런 눈치를 채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까 겁을 먹었다거나 하는 그런….
-잠깐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야.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이미 눈치를 챈 남자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또다시 사과하는 남자에 사현의 표정이 일그러질 틈은 없었다.
-여긴 네가 쓸 방이니까 앞으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물론 그렇게 편하지는 않겠지만 되도록 편하게 지낼 수 있게 신경 쓸게. 그리고…
잠깐 머뭇대던 남자는 결심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럴 생각 없으니 너무 겁먹지 않으면 좋겠다. 고등학생에게 손댈 만큼 생각 없는 어른은 아니니까.
사현은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액면가는 그랬지만 군대도 현역으로 다녀온 어엿한 성인 남자였다. 겁을 먹었다는 포인트에 울컥해야 하는지 어린 나이로 보는 것에 울컥해야 하는지 울컥하기는 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포인트를 잡지 못한 사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남자는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뒤를 돌아 걸어 나갔다.
-저기요.
그런 남자를 잡은 건 사현이었다.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사현을 돌아보는 남자에게 사현은 물었다.
-그쪽 이름이 뭔데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가 이곳을 탈출했을 때 다시 되갚아 주기 위한 앙심이 20, 호기심이 80. 그러니까, 순전히 호기심으로 물었다. 지금껏 백사파의 후계자로 베일에 싸여 있으면서 또 어떻게 알아내는 것인지 납치를 당하거나 당할 뻔한 게 셀 수 없었지만 이런 사람은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사현은 호기심이 생겼다.
-범지훈.
그리고 남자의 대답엔 사현의 눈이 커졌다. 그건 요즘 사현의 할아버지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이자 골칫거리인 남자의 이름이었다. 범호파의 새로운 수장이 된 남자.
-…범지훈.
-아저씨라고 부르면 돼. 필요한 게 있다면 날 불러도 좋고 다른 사람에게 시켜도 좋아. 사현아.
-…….
-미안. 친한 것처럼 이름 불렀네.
사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또 혼자서 지레 사과를 하는 남자, 아니 지훈의 표정이 퍽 어색해졌다. 사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지훈은 ‘그만 가 볼게.’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제야 방을 빠져나갔다.
탁. 가볍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혼자만 남게 된 방 안에서 사현은 두 눈만 깜빡였다. 납치범이 나갔으니 긴장이 풀리거나 힘이 빠지는 등 납치당한 피해자로서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들보다 먼저 든 생각 때문이었다
-…냄새.
좋다. 긴장감에 아까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냄새가 훅하고 사현의 코 속을 파고들었다. 지훈이 나가고 난 뒤에도 은은하게 남은 잔향은 상당히 사현의 취향이었다. 사현은 문득 범지훈이란 저 남자가 알고 싶어졌다.
-까지 읽었던 백사현은 코끝에 감도는 익숙한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냄새의 주인공인 범지훈은 어느새 소파 뒤로 다가와 백사현이 보던 화면을 함께 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방금. 오는 소리도 못 듣고 뭘 재밌게 보는 거 같길래 나도 눈이 갔는데, 사현이 너랑 내 이름이 보이는 것 같은데.”
“아, 팬픽이에요.”
팬픽? 의아한 얼굴로 범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푸스스 백사현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렀다.
“잠깐만 이리 가까이 와 볼래요, 형?”
팔랑팔랑 손짓하는 백사현에 범지훈의 고개가 따라서 숙여졌다. 덕분에 더 짙게 맡아지는 범지훈 특유의 청량한 향이 백사현의 코 속을 파고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범지훈의 목덜미와 툭 불거진 울대, 그리고 조각처럼 날렵한 턱선까지 시선이 닿았던 백사현은 범지훈의 흰 뺨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와 함께 금세 떨어지는 입술엔 얼빠진 범지훈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잘 다녀왔냐는 인사예요. 이거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바로 못 알아챘어요.”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웃음 짓는 백사현의 눈매도 따라서 휘어졌다. 깜빡깜빡 두 눈을 감았다 뜨는 범지훈의 손이 천천히 입 맞췄던 뺨을 감쌌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귀 끝과 함께 범지훈은 숙였던 허리를 순식간에 폈다.
“…어,어.”
“한번 볼래요? 나랑 형이랑 주인공으로 두고 쓴 팬픽인데 재밌더라고요. 우리를 아는 사람이 쓰는 것처럼 실제랑도 꽤 비슷해요.”
범지훈의 손에 들고 있던 패드를 넘겨주며 백사현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형 오는 줄도 모르고 보고 있었더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나 좀 씻고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멀어지는 백사현의 뒷모습을 보며 범지훈은 여전히 넋 나간 표정이었다.
…허. 그리고 뒤늦게서야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날것 같은 애정은 처음이라서, 게다가 그 애정을 퍼부어 주는 상대가 백사현이라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받으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았다. 범지훈은 백사현이라면 여전히 설레고 좋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까.
***
“계속 보고 있었어요?”
지척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범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활짝 열린 방문을 통해 어느새 들어온 백사현이 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던 범지훈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응, 이거 재밌어서.’ 등의 대답을 하려 했던 범지훈의 말문도 동시에 막히고 말았다.
“어디까지 봤는데요?”
패드의 화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백사현에 따라서 특유의 포근한 향이 더욱 진하게 밀려들어 왔다. 그것도 그거였지만, 젖은 백사현의 머리카락에서부터 천천히 내려가는 범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백사현의 상반신 때문이었다. 살 비비며 함께 잔 적이야 벌써 두 번째이긴 했지만, 첫 번째는 필름이 끊겨 기억도 나지 않았고 두 번째는 일어나 보니 이미 옷을 입은 백사현이 옆에 누워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잠든 범지훈을 씻기고 마사지까지 해 준 후 따뜻하게 옷을 입혀 놓았다며 자랑이라도 하듯 종알종알하던 얼굴은 아직도 선연했다. 마지막엔 요리해 놓았다며 이야기를 하는데 누가 보아도 귀엽기 그지없는 자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이준혁이었나? 누구한테 꼭 얘기해 달라는 식으로 말을 덧붙였던 것 같은데 백사현이 끓여 놓은 콩나물국을 한입 먹어 보고는 기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나저나 범지훈은 나 보란 듯이 눈앞에 펼쳐진 살색에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노출, 싫어한다는데, 라는 의문은 패드 화면을 읽어 내리던 눈동자가 범지훈에게 닿고서야 풀렸다.
“맞아요, 지금 형 꼬시는 거.”
사르르 눈꼬리가 휘어져 내리는데 범지훈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선이 예쁜 어깨와 단단한 가슴, 탄탄하게 굴곡이 진 배까지. 이미 전부 본 몸인데도 새삼스레 범지훈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바지에 감싸인 백사현의 하반신 쪽에 한번 눈길이 갔다가 혼자 깜짝 놀라 올려다보는 범지훈과 시선을 마주치며 백사현의 입매도 호선을 그렸다.
“어딜 봐요?”
커다랗게 뜨인 눈을 깜빡이는 범지훈을 내려다보며 백사현은 푸슬푸슬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병실에서 범지훈에게 정체를 들키던 그 순간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내가 벗으면 좋겠어요?”
홀린 듯 끄덕이려던 범지훈이 번뜩 정신을 차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일 출근이라서, 무리하면 힘들어. 사현아.”
그 목소리엔 이미 아쉬움이 가득해서 백사현이 아쉬워할 틈이라곤 없었다. ‘알겠어요.’ 그래도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대꾸하며 백사현의 손은 범지훈의 어깨를 밀어 침대에 바로 눕혔다.
“그럼 키스까지는 괜찮잖아요?”
빙긋 웃음 지으며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린 백사현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 탓에 범지훈의 손에서 패드가 떨어져 나갔다. 패드의 화면은 납치당한 백사현이 자신을 납치한 범지훈에게 먼저 키스를 하는 장면을 비추고 있었다. 꼭 지금의 백사현과 범지훈처럼, 침대에 쓰러진 범지훈의 위로 올라탄 백사현까지도 보고 그리기라도 한 것처럼 같았다.
***
불안한 얼굴로 손에 든 잔만 매만지며 앉아 있던 박달수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인기척에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낮은 저음이 건네는 인사에 범지훈은 맞인사를 건넸다. 지난번, 백사현의 병문안을 왔던 박달수를 보고 이번이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범지훈은 왜인지 모르게 박달수가 기꺼웠다.
게다가 이준혁을 통해 먼저 만남을 제안한 것도 박달수였다. 말수도 적고 낯을 많이 가리나 했던 사람이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니 범지훈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응했다. 범지훈의 시간을 많이 뺏고 싶지 않다며 범지훈의 회사에서 만남을 제안한 박달수는 약속 시각보다 10분 더 일찍 와서는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커피를 가져다준 비서에게는 일찍 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따로 부탁한 모양이었지만, 박달수가 온 순간부터 범지훈에게 소식은 이미 알려진 뒤였다. 5분 더 일찍 들어가려 했던 범지훈도 생각한 시간보다 더 일찍 박달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회의실 앞에 당도했다.
“저한테 할 얘기가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 바쁘신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게, 대표님이 사현이 형과 사귀는 사이라는 건 형한테 들어 이미 알고 있는데 그래서 저라도 전해 드려야 할 이야기 같아서 만나자고 부탁드렸습니다.”
주저하는 얼굴로 박달수는 괜스레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보기에는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 같았는데 사안이 꽤 급하긴 한 모양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충격을 받은 상태라서 얘기할 정신이 아닐 것 같고 형 남자 친구인 대표님께 저라도 전해 드리고 싶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부드럽게도 느껴지는 범지훈의 어조에 박달수는 굳은 결심을 한 얼굴로 그제야 범지훈과 시선을 맞췄다.
“저희 팀 멤버가 사현이 형한테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 평이한 목소리에 박달수가 놀란 눈을 했다. 그러다 그 말의 뜻을 깨닫고는 커진 눈이 더욱 커다랗게 뜨였다.
“…아세요?”
“네, 사현이가 이미 얘기해 줬습니다. 그리고 그 멤버라는 친구에게 본인은 그런 감정으로는 전혀 생각도 해 본 적 없으니까 제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더군요. 그 친구 때문에 괜히 무슨 오해라도 생길까 봐 미리 얘기해 두는 거랍니다.”
그 말에 박달수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단호하네요.”
그동안의 고민이 무색해졌다는 허탈감과 8년 동안 동고동락한 멤버의 마음을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단칼에 자른 백사현의 냉정함이 퍽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런 일에는 단호해야 맞는 거라더군요. 사현이가 알아서 그 친구는 정리한다고 얘기하긴 했습니다.”
“…형을 많이 믿으시는군요.”
“그렇죠. 사현이가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니까요.”
“저도 사현이 형이랑 연습생 기간까지 합하면 10년이 훨씬 넘게 알아 왔거든요. 그런데 처음입니다.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저희한테 먼저 밝혀 온 적도, 아무리 멤버라지만 오해의 소지도 없게 칼같이 잘라 내는 것도 처음 보는 모습이에요. 그 형, 원래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그런 사람이거든요.”
말을 이어 가던 박달수가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덧붙였다.
“욕하는 게 아니고….”
“저를 위해서 해 주는 말이죠?”
알고 있다는 듯 범지훈의 눈빛이 퍽 온화했다. 35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인 범지훈의 데이터베이스는 눈앞의 박달수가 자신과 같은 동류라는 걸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 고작 한 번 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준다는 게 쉽지 않을 터였다.
“저희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거나, 사현이를 좋아하지 않는 이상은 보통은 저한테 이런 이야기 해 줄 리가 없거든요.”
“갈라놓을 마음 없습니다. 사현이 형을 좋아하지도… 아니, 멤버 형으로는 좋아하긴 하는데 이성 아니, 동성 아니, 그….”
진담 섞인 농담으로 넌지시 건넨 범지훈의 말에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해 횡설수설하던 박달수가 결국 입을 다문 채 푸욱 고개를 숙였다. 목 끝부터 서서히 익어 가는 얼굴빛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알기가 쉬운 사람이라니. 이러면 더 놀리고 싶어지는데.
잠깐 생각하던 범지훈은 그제야 깨달은 얼굴을 했다. 사현이가 그래서 나한테 이러는 건가.
“점심시간 때인데 식사는 하고 오셨습니까?”
귀여운 동생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범지훈은 물었다. 박달수와는 사적으로 더 친해지고 싶기도 했다.
“저는 식사 전인데,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더 자세한 이야기 했으면 좋겠어서 말입니다.”
주저하던 박달수도 범지훈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니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달수는 신기했다. 그러니 앞장서 가는 범지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균보다 더 큰 키를 가지고 있는 박달수보다도 시야가 조금 더 높은 범지훈.
겉으로 보기엔 장난이 아닌 위압감을 가진 무서운 (그러면서도 잘생긴) 외형이었지만, 박달수는 알 수 있었다. 겉모습만 그럴 뿐이지 저 범지훈이라는 사람의 속이 얼마나 말랑한지도.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는 건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범지훈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저 겉모습 때문에 본의 아닌 오해들을 받아왔을 터이다. 물론 박달수도 범지훈처럼 그런 오해를 종종 받아온 동류이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겉모습으로만 남을 판단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동지애도 솟아올랐다.
그러니 박달수는 더 걱정이었다. 저 범지훈이 어떻게 해서 백사현이라는 무시무시한 남자와 사귀게 됐는지에 대한 걱정.
백사현에게 특별히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백사현을 형이자 멤버로 믿고 따르며 인간적으로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박달수는 그래, 백사현이 무서웠다. 분명 저보다 작고 무해한 외모를 가졌지만, 백사현에게서는 어딘지 모를 선뜩한 분위기가 풍겼다. 동물적인 감각? 이런 느낌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지만 박달수는 직감적으로 백사현에게 꼬리를 말아야 한다는 걸 느꼈다. 나이로도 당연히 그래야 했고 박달수의 성품 자체가 사람을 함부로 깔아뭉개지 않았지만 백사현은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그건 박달수뿐만이 아닌 다른 멤버들도 느낀 모양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치대며 친근하게 굴던 이루나도 처음 백사현을 만났을 때에는 몸을 사릴 정도였다. 지금이야 연습생 기간이다, 같은 그룹 멤버이다 하도 부대끼다 보니 편해지고 친해졌지만 백사현은 초반엔 그런 이미지였다.
잘못 느낀 건가? 하고 생각했었을 때엔 사건들이 터졌었다. 시작은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악플이었다. 백사현에게 유독 집요하게 악플을 달다 결국엔 치밀한 루머까지 생성해 내며 백사현을 실검에도 오르내리게 하였던 어느 악플러가 있었다. 백사현도 처음에 여느 악플러라고 무시했지만, 루머 생성이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결국, 그 악플러의 IP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고소를 하게 되었는데 밝혀진 악플러는 알고 보니 40대의 남자였다. 그는 변변한 직장도 없이 늙은 부모님의 집에서 함께 산다고 했다. 그 후, 백발이 성성한 노년의 부부가 소속사를 찾아와 백사현의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아들의 잘못을 빌었지만 백사현은 표정 없이 그런 부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물론 악플러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관절도 약할 늙은 부부가 무릎을 꿇고 있는데도 손을 잡고 일으켜 줄 생각도 입바른 말 한마디도 건넬 생각을 하지 않는 백사현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악플러는 결국 검찰에 송치되었다. 그 외에도 여러 일이 많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있다면 그게 바로 백사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이에게는 조금의 자비도 일말의 인정조차도 없었다. 백사현과 부대낀 지 10여 년의 시간이 지나니 박달수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날, 무릎을 꿇었던 늙은 부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게 백사현에겐 솜털만큼의 인정이었다는 걸. 그 인정조차도 없었다면 부부를 소속사 안으로 아예 들이지도 않고 추운 길바닥에 그대로 서 있게 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알게 되었다.
그런 얼음장 같은 사람이 멤버들에게 먼저 고백을 해 올 줄은 몰랐다. 방송용 웃음이나 비웃음이 주였던 백사현이 팬들에게만 보이던 꾸밈없는 미소를 지으며 처음으로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그때부터 김영희의 표정이 어두워졌었다는 걸 일찍이 눈치챘어야 했었다.
그러나저러나 신기한 일이었다. 백사현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그리고 범지훈을 만나고는 걱정부터 됐다. 대체 왜 그 백사현이랑…? 범지훈에게 대놓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사람 보는 눈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거냐고.
“…대표님.”
“네?”
“사현이 형한테 얘기는 언제 들은 건가요?”
대신 그나마 묻기 쉬운 걸 질문했다. 범지훈도 바로 이해했는지 곧장 답이 들려왔다.
“이틀 전이었는데, 제가 퇴근하고….”
일을 열던 범지훈이 멈칫하더니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랬나?’ 혼잣말처럼 중얼대는 목소리에는 박달수의 고개가 갸웃했다.
“…얘기해 줬습니다.”
뭔가 많은 게 함축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박달수는 굳이 묻지 않았다. 김영희에게 고백받은 당일 바로 애인에게 이야기할 정도라면 김영희에게는 일말의 마음조차도 쓰고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멤버의 정이 뭐라고 김영희가 조금은 짠했지만, 또 백사현답기도 했다. 어쩐지 도망치듯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김영희를 보면서도 백사현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다 싶었다.
박달수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범지훈도 여우 같은 제 애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강아지 같은 외모에 고양이 같은 구석이 있다 싶었더니 또 이런 여우 같은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쩐지 갑작스러운 볼 뽀뽀에다 웃통도 벗으며 요망하게 군다 싶더라니 범지훈에게 키스를 하고는 그런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할 줄은 몰랐다. 고백을 받았다니.
박달수 덕분에 그때의 기억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르니 범지훈은 입매만 매만졌다. 그래도 여우 같은 백사현이 밉기는커녕 여전히 좋았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형밖에 없어요.]
범지훈과 분명히 눈을 맞추며 뱉었던 말은 여전히 생생했다.
“앉아 계세요, 책상만 정리하고 바로-”
“대표님, 에스에 대해서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
대표실 한편에 놓인 소파를 눈짓하며 책상 위 서류철들을 한데 모으던 범지훈과 소파 쪽으로 다가가던 박달수의 시선이 문을 향했다. 기세 좋게 대표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소리치던 사위민의 시선도 두 남자를 향했다.
“달수…?”
에스의 팬이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박달수를 보자마자 맘바라는 활동명이 아닌 본명부터 튀어나왔다. 얼빠진 세 남자의 시선이 서로를 멍하게 바라보길 잠깐, 이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위민이 입을 틀어막으며 튀어나올 뻔한 비명을 삼켰다.
그… 올팬이랬던가? 범지훈은 그런 사위민을 보며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애도 차애도 아니면서 저렇게 좋아할 줄이야. 사위민은 진정으로 에스의 올팬이 맞았다.
“대표님, 제가 정말 여기 끼어도 될지….”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 반, 기쁨 반이 섞인 상기된 얼굴로 저렇게 얘기해 봤자였다. 범지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박달수도 호기심이 섞인 얼굴로 아까부터 사위민을 관찰 중이었다. 아무래도 남자 아이돌 그룹이라서인지 자신을 좋아하는 남팬이 꽤 신기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달수 씨도 동의했고 아무래도 둘보다는 셋이면 더 좋으니까요.”
지난번, 여사빈과 함께 가기 위해 예약을 해 놓았다가 결국엔 못 간 라이언 다이닝 룸의 런치 메뉴를 기다리며 범지훈이 대답했다. 사위민도 말은 그렇게 할 뿐이지 이미 야무지게 냅킨을 펼쳐 식사할 준비를 마친 뒤였다.
그 귀여운 행태에 박달수는 아랫입술을 꼬옥 물었고 범지훈은 이미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확실히 둘보다는 셋이 낫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박달수와 친해지고 싶다는 건 정말이었지만, 말수가 많아 보이지 않는 박달수와 마찬가지로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데 서투른 범지훈 둘이 식사를 같이 해 보았자 화제를 옮겨 가면 곧장 대화가 끊기거나 침묵이 이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내 백사현이나 에스의 얘기를 할 수는… 해도 되는 건가? 범지훈이 고민을 이어 가는 동안 사위민은 그새 박달수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고 있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메뉴가 있냐, 혹시 가리는 게 있냐, 내가 알기로는 뭐뭐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로 아는데 그것 외에 더 있는지 궁금하다, 등등 박달수도 얼떨떨해하며 대답해 주고 있었다. 개중엔 이걸 어떻게 아냐는 듯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되물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대표님이랑은 친한 사이신가요?”
“네?”
“대표실인데 자기 집처럼 문을 막 열고 들어오셔서요.”
때맞춰 애피타이저 접시를 들고 다가온 직원이 그 말에 흠칫하더니 박달수를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범지훈이 보기에는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는 순수한 궁금증으로 한 질문이었지만 직원이 느끼기엔 아닌 모양이었다. 사위민은 그런 박달수쯤이야 완벽히 파악하고 있는지 당황해하기는커녕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유, 대표님이랑 아무리 친해도 자기 집처럼 그럴 수는 없죠. 대표실 앞에 비서 팀장님이 늘 지키고 계시는데 요즘 들어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으면서 바쁘신 것 같더라고요.”
“오늘도 그러고 있습니까?”
그것에 범지훈도 자못 심각해져 대화에 끼었다. 요즘 들어 우정선이 이상하다고 확실히 느끼던 참이었다.
“네, 오늘도 그러셨는데… 그런데 대표님. 왜 이렇게 제 연락을 안 받으셨어요?”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사위민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범지훈을 바라보았다. 범지훈도 아까의 직원처럼 당황한 낯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락했습니까…?”
“네, 그것도 여러 번이나요. 생각해 보니 그것 때문에 제가 대표실에 갑자기 쳐들어간 건데!”
사뭇 억울하다는 듯 사위민이 씩씩댔다. 그래 보았자 쪼그만 강아지가 앙앙 짖는 듯한 기세였지만 핸드폰을 꺼내 들어 부재중 전화들을 확인한 범지훈은 정중히 사과했다. 대표실에서 만나기엔 보는 눈이 많아 박달수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외진 회의실에서 약속을 잡았던 참이었다. 박달수와의 만남에 마음이 급해 깜빡하고 대표실에 핸드폰을 두고 가 버렸는데 그사이 사위민에게서 여러 통 연락이 왔던 모양이었다.
“아까 에스에 대해서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신 것 같았는데요.”
그사이 박달수가 입을 열었다. 그도 아까부터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 에스가 저희 그룹 에스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확실히 대표님 통해 사현이 형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보다 당사자인 에스 멤버에게 바로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게 지금 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난 얘기인데요.”
이어지는 사위민의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
퍽. 벽에 밀쳐진 탓에 큰 소리가 울렸다. 그사이, 옴짝달싹 못 하도록 가둘 셈인지 벽을 짚은 손의 주인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접촉 좋아하지 않는다고 계속 말했는데.”
벽에 밀쳐진 당사자인 백사현이 그제야 한마디를 뱉었다. 제게 가까이 다가와 내려다보는 김영희를 동요 없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좋아질 때까지 해 보려고. 나 안 싫다면서?”
웃음기 섞인 김영희의 대답이 들렸다. 백사현의 다리 사이로 제 다리를 솜씨 좋게 끼워 넣으며 김영희는 잘못하면 코끝이 부딪칠 만큼 가까이 얼굴을 붙여 왔다. 그럼에도 뒤로 피하거나 움찔하는 기색 없이 백사현의 무감정한 시선은 김영희와 얽혔다.
“며칠 동안 기다렸는데 아무 대답이 없더라, 형?”
“뭐가?”
“…고백 말이야. 까먹기라도 한 거야?”
“아, 그런 게 있었던가.”
뭐? 황당한 목소리로 김영희가 되물었다.
“고백같지가 않아서. 하도 일방적이라 날 감정 쓰레기통 취급한 줄 알았는데.”
“내가 왜 형을 쓰레기통 취급해?!”
결국 김영희의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그것에 백사현의 검지 손가락이 김영희를 이마를 짚어 주욱 밀어냈다.
“귀 아프니까 가까이에서 소리치지 마.”
“형은 진짜 싸가지가 없는 것 같아. 그런 면도 좋아하지만.”
김영희의 그 말에 내내 동요 없던 백사현이 처음으로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백사현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난 너 안 좋아해. 김영희.”
“생각도 오래 안 해 보고?”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고백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아직도 대답을 안 해 주냐며 사람을 벽으로 밀치고 재촉하는 김영희가 뱉기엔 양심 없는 말이었다. 김영희도 그건 알았는지 잠깐 입을 다물었다.
“…범지훈은 되면서 왜 나는 안 되는데?”
그러다 결국 볼멘소리로 물었다. 백사현은 참았던 한숨을 또 내쉬고 말았다.
“전부 얘기하려면 한두 시간 안엔 안 끝날 텐데, 시간 많아?”
“형…!”
“난 시간 없는데. 잠깐 만나서 얘기나 하자더니 사람을 벽에 밀쳐 성추행이나 해 대고. 어쩌잔 걸까, 김영희는?”
어쩜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말만 하는지. 하는 말마다 배배 꼬아 대는 백사현에 김영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물론 부끄러워서가 아닌 화가 나서였다.
“잊었나 본데, 여기 우리 집이야. 그것도 나 혼자만 사는.”
씹어뱉듯 김영희가 입을 열었다. 김영희를 쳐다볼 생각도 않고 아예 시선을 돌려 버린 백사현이 다시 김영희를 바라보았다. 백사현의 턱을 억세게 잡아 들어 올린 손길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형 말대로 성추행을 하든 뭘 하든 아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최후의 발악처럼 뱉어 낸 한마디를 끝으로 김영희의 고개가 움직였다. 목표는 김영희의 손길 탓에 강제로 벌어진 백사현의 입술이었다.
“윽…!”
끊어질 듯 가느다란 비명이 들렸다. 더는 소리도 토해 내지 못하고 김영희는 자신의 정강이를 감싸 쥐며 잔뜩 몸을 말았다.
“정도껏 해야지, 영희야.”
웅크리고 앉은 김영희를 내려다보며 백사현이 조소했다. 김영희의 한쪽 정강이를 걷어찬 다리를 내리며 백사현은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두 손을 꽂았다.
“선을 넘으면 어떡해? 동생이라고 손 안 대고 있었더니 내가 만만했나 봐.”
퍽. 다른 쪽 발이 부지불식간에 김영희의 어깨를 걷어찼다.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김영희가 쓰러지자마자 울대에 발을 올린 백사현이 고개를 숙였다.
“네가 날 형 취급을 안 해 주는데 그럼 내가 동생 취급을 해 줄 이유가 없겠네, 안 그래?”
“끄윽-”
목구멍을 짓눌러 틀어막고 있는 탓에 제대로 말도 뱉지 못하는 김영희의 떨리는 동공이 백사현을 담았다. 아까와는 반대로 이젠 김영희를 내리깔아 보는 백사현의 두 눈이 예쁘게 깜빡였다.
“그래도 얼굴은 안 건드릴게. 영희는 우리 에스의 멤버잖아.”
빙긋 휘어지는 입술로 해사하게 속삭이는 백사현은 꼭 천사 같았다. 은발의 머리카락 덕분에 더 신비로워 보이는 분위기로 백사현은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잘생긴 얼굴 감싸면서 몸 좀 말아 볼래?”
웃는 입과는 다르게 웃음기 하나 없는 눈은 어쩐지 번들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
“그동안 이런 짓 하던 개새끼들이 꽤 많았거든? 혼내 주려고 좆으로 엉덩이를 쑤셔 친 적은 있어도 발로 차 본 적은 오랜만이라 기분이 새롭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쥐 죽은 듯 적막한 실내를 울렸다. 찰칵. 담배 끝에 불을 붙였던 싸구려 기름 라이터를 던지듯 내려놓으며 백사현의 눈매가 끝내 휘어졌다. 한껏 머금었던 연기는 입술을 달싹이면서 흩어지듯 새어 나갔다. 남의 집인데다 화장실이나 베란다도 아닌 거실 한가운데였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좆질로 쳐주기엔 이미 내가 임자가 있어서. 너도 알지?”
“…콜록.”
마른기침을 뱉어 내는 입술은 이미 침과 빈 위액이 흘러 지저분해진 지 오래였다. 바닥에 쓰러져 겨우 눈만 들어 올려 보는 김영희는 겉보기엔 옷과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것 외엔 멀쩡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김영희도 직접 손을 댄 백사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실내라서 신발을 안 신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마침 오늘 구두를 신고 왔는데 구둣발로 찼으면 더 아팠을 거 아니야?”
새액. 새액. 탁한 숨을 들이 내쉬는 김영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백사현을 올려다보는 눈동자에 서린 건 명백한 공포였다. 그런 김영희를 내려다보던 백사현이 조금 헝클어진 제 은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목 관리해야 하는데 영희 때문에 씨발, 화가 나니까 끊으려던 담배를 또 물게 되잖아. 지훈이 형이랑 있을 때는 생각 안 났는데.”
“…….”
“…신기하지 않아? 형도 흡연자라 담배 냄새가 날 때가 있는데 그런데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
‘얘기하니까 또 보고 싶어지네.’ 혼잣말처럼 중얼대며 백사현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끝까지 피지 못한 담배는 그대로 탁자에 짓이겨 꺼 버렸다. 곧이어 들려오는 기본 연결음에 얼마 안 가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응, 사현아.]
스피커 모드 덕에 대놓고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범지훈이었다. 커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김영희에게 백사현은 검지 손가락을 세워 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닥치라는 뜻이었다.
“…점심 먹었어요, 형?”
[지금 먹는 중이야. 사현이 넌? 혹시 아직 안 먹었어? 같이 먹으려고 전화한 거야?]
“으응, 아니요. 저도 먹으려고요. 영희랑 만나 먹을 생각이었어요.”
[…김영희 씨? 그럼, 지금 같이 있는 건가?]
“그렇긴 한데, 형 목소리만 듣고 싶어서 잠깐 다른 곳으로 나왔어요. 편하게 얘기해도 돼요.”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다 다시 범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위민 씨도 팬이니까 잘 알고 있어서 어쩌다 얘기 듣게 됐는데, 홈마라고는 알고 있지?]
“네. 대포 카메라로 저희 사진 찍어 주시는 팬이잖아요.”
[그 홈마가, 그때 남자 친구랑 같이 사현이 널… 납치했던 그 여자라더라. 홈 이름이 모사르트라던데. 김영희 씨 대표 홈마라고.]
백사현은 침묵했다.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기에 김영희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른 것과 동시였다.
[네가 가장 먼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사위민 씨 말로는 지금 팬들 사이에서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더라. 물론 김영희 씨 잘못은 하나도 없지만, 팬들 여론이… 김영희 씨에게 안 좋게 돌아가는 것 같아.]
염려가 가득한 다정한 저음은 백사현뿐만이 아닌 같은 멤버인 김영희 또한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에 백사현이 입술이 비틀어지는 건 김영희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걱정 말아요, 형. 나도 영희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 얘기 하려고 오늘 만난 것도 있어요. 네, 제가 영희랑 잘 상의해서 결정할게요.”
스피커 모드를 꺼 버리고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가며 백사현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 덕에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범지훈의 목소리에 김영희의 표정에 불안이 서렸다.
“그런데 지금 위민 씨랑 둘이서만 점심 먹는 거예요? 아, 달수랑도 같이? 응, 좋네요. 셋이서 더 친하게 지내면 좋죠.”
다정하게 몇 마디의 대화를 더 이어 가던 백사현이 집에서 보자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끝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직접 핸드폰을 가져와 확인하지도 못하는 김영희의 시선은 애처롭게 백사현만을 향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지난번, 납치 사건으로 인해 예정되어 있던 솔로 활동을 미루면서까지 병원 신세를 졌던 백사현과 그런 백사현을 쫓다 함께 다쳤던 범지훈의 이야기는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가라앉질 않았다. 하기야 그 에스였다. 에스 중에서도 가장 인기 멤버였던 백사현이기에 그의 납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납치를 한 범인이 모사르트였다고?
“결국엔 지훈이 형도 알게 됐네. 아, 그러고 보니 친했지? 영희 너랑 모사르트.”
“형, 그게 대체….”
잔뜩 쉰 목소리로 김영희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까는 공포로 가득했던 눈이 지금은 경악과 불안도 섞여 있었다. 데뷔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오래된 홈마. 에스라고 처음부터 인기를 얻었던 건 아니었다. 데뷔 초에는 길거리 공연이나 지방 행사, 심지어 고등학교 강당에도 서 본 적이 있던 에스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대기업으로 치는 대형 기획사 수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오점 그룹이라는 평까지 받았을 정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야심 차게 준비한 데뷔 앨범은 저조한 판매 기록을 남기며 시원하게 말아먹었고 다음으로 낸 미니 앨범은 사람들이 발매됐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때 힘이 되어 주었던 게 많지 않은 수의 데뷔 팬들이었다. 그중 모사르트는 그 적은 팬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홈마였기에 김영희와는 개인적인 친분까지 생길 정도였다. 세상에서 네가 가장 멋지다며 엄지를 추켜세우던 모사르트는 데뷔부터 지금까지 늘 김영희가 우선이었다. 에스가 조금씩 인기를 얻기 시작하고 3집 타이틀곡이 대박을 터트리며 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을 즈음엔 예전만큼 자주 연락하진 못했지만, 김영희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아 있는 팬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 모사르트가 설마.
“네가 이해한 그대로야, 그렇게 아끼던 팬이 네 앞길에 방해된다며 날 데려다 죽이려고 했거든.”
“…….”
“어쩔까? 아까 지훈이 형 말대로 모사르트 때문에 네 여론이 지금 되게 안 좋아. 단순히 악플이나 루머도 아니고 살인 의도가 있던 범죄인데. 우리 팬분들은 모사르트의 범죄 동기에 대해 이미 다 아는 눈치던데.”
톡톡. 탁자를 두드리는 백사현이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서늘한 시선으로 김영희를 바라보았다.
“그 얘기도 해 줄 겸 너희 집으로 온 건데 사람 말은 들을 생각도 없이 강제로 입이나 맞추려 하고. 내가 화가 날 수밖에 없잖아, 영희야.”
“…미안해.”
그 말에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이 멈췄다.
“미안해, 형. 몰랐어. 죽일 생각으로 형을 납치했을 줄 몰랐어. 그게… 그게, 나 때문에 벌어진 줄, 콜록…!”
마른 목소리에 결국 기침이 섞였다. 한숨을 내쉰 백사현은 걸음을 옮겼다. 멤버이기에 집에 놀러 온 적은 종종 있었다. 제집처럼 익숙하게 부엌을 찾아 들어가 정수기에서 물을 따른 백사현이 여전히 쓰러져 있는 김영희에게 다가갔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김영희의 팔이 꺾이며 비틀거렸다. 가벼운 짐이라도 들 듯 가뿐하게 그런 김영희의 어깨를 잡아챈 백사현이 손수 김영희의 입가에 물컵을 가져다 댔다.
“다들 너한테도 얘기 안 해 줬구나.”
힘겹지만 또 갈증에 목마른 사람처럼 꼴깍꼴깍 달게 물을 받아 마시는 김영희를 내려다보며 백사현은 말했다. 멤버들이나 매니저가 귀띔이라도 해 준 줄 알았더니 김영희가 받을 충격 때문인지 끝끝내 숨긴 모양이었다.
“미안해, 형.”
물을 다 마시자마자 백사현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김영희가 다시 사과했다. 백사현에게 마구잡이로 구타당했을 때에도 무서워하긴 했어도 고집스레 울지만은 않았던 김영희의 눈가가 끝내 붉어졌다.
“미안해. 나는, 나는… 범지훈 씨 때문에 마음이 급해져서… 나는, 흑. 형, 좋아한다는 거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근데 형이, 윽.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막… 흐윽. 나도 부족한 거 없다고. 윽. 생각, 생각했는데….”
“너 부족한 거 많아. 배려 없지, 생각 없지, 눈치 없지.”
“그게, 그게 지금 할 소리야아…?”
결국 김영희가 울면서 말했다. 화를 내는 것 같은데 우는 탓에 칭얼대는 것처럼 들려 백사현의 미간이 불쾌함에 조금 찌푸려지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어깨를 감싸 안은 팔도 확 놓아 버리고 싶은데 심하게 때린 감이 있어 참았다. 게다가 차마 백사현을 잡지 못하고 옷자락만 붙잡고 있는 손이 시선에 걸리기도 했다.
“직접 얘기해 주지 않으면 생각 없고 눈치 없는 너는 지금처럼 계속 네 멋대로 행동할 것 같네.”
백사현에게서 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철없는 멤버 하나 때문에 10년은 늙는 기분이었다. 나이로는 가장 막내인 이루나가 차라리 지금은 더 어른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까지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품 안의 김영희를 벽에 기대 앉혀 주며 백사현은 그제야 후련하게 김영희에게서 손을 뗄 수 있었다.
“내가 여섯 살 때 일이야.”
그러곤 범지훈에게조차도 말하기 꺼려 했던 탓에 백서경이 말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트라우마를 꺼내 놓기로 했다. 이건 멤버들도 항상 붙어 다니는 매니저인 이준혁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중학생 때까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계속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 나 때문에 엄마가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는 걸 내가 바라지 않았거든.”
영화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모친. 연기를 할 때엔 더욱 생기가 넘치는 모친을 백사현은 어릴 때부터 보아 왔다. 백사현은 화면 속에서 빛나는 모친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게 된 아들의 양육에만 신경을 쓰기 위해 백서경은 연기 활동 자체를 그만두려고 했다. 물론 백사현이 바라는 일은 아니었다. 할머니 또한 바라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딸이 만나 주지 않아도 집으로 찾아와 사죄했던 할머니를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정신이 돌아온 백사현이었다. 할머니는 그날 백사현을 끌어안고 연신 미안하다며 오열했다.
“할머니 손에 자라면서 익힌 거야.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남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도, 몸을 드러내질 않는 것도.”
습관은 버릇이 됐고 성격이 됐다.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그런 일을 겪고 트라우마를 안게 되면 사람을 경계하고 날이 설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그걸 남에게 그대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 또한 가르쳤다. 그건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용한 가르침이었다.
“그게 다야.”
남 일을 말하는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백사현은 이야기를 끝맺었다. 하지만 김영희는 아니었다. 충격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숙인 김영희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 기다려 주던 백사현은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떡할까, 지금의 문제는.”
김영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백사현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지금의 상황을 좋게 해결하고 싶었다. 김영희와의 껄끄러워진 관계 또한 그러했고 모사르트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미안하게 생각하면 내 방법대로 해결할래?”
여전히 답을 하지 못하는 김영희에게 백사현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피해자인 백사현에게도 가해자면서 또, 자의는 없었으나 가해자의 동기가 된 김영희에게도 나아가 그룹에도 큰 타격을 주지 않을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
생각보다 귀가가 늦어졌다. 잠금이 풀린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려 열며 범지훈의 시선이 환히 밝혀진 집 안을 훑었다. 먼저 돌아온 모양이었다.
조금 늦는다는 게 이렇게나 늦었을 줄은. 전화로 얘기했던 시간보다 더 늦어지니 너무 미안해서 급하게 구두를 벗어 던진 범지훈은 백사현의 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사현아, 정선이랑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져….”
많이 기다렸느냐는 말은 끝내 잇지 못했다. 문을 여니 방안에는 뒤돌아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익숙한 은발이 아닌 새까만 흑발이라서 범지훈은 하마터면 누구시냐고 물어볼 뻔했다. 익숙한 어깨선과 늘씬한 등, 허리가 제가 아는 백사현이라서 그때야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금방 씻고 나온 건지 백사현은 허리에 커다란 수건 하나만 감고 있었다.
그 덕에 백사현이 움직일 때마다 살갗을 따라 꿈틀거리는 뱀이 더 선명히 보였다. 그전에도 얼핏얼핏 보긴 했지만 이렇게 자세히 관찰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하얀 뱀이 똬리를 틀어 보랏빛 꽃을 품고 있는 형태는 타투 중에서도 흔한 느낌은 아니라 자꾸만 시선이 갔다. 무슨 뜻이 있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범지훈 본인도 스무 살이 되어 호기롭게 받은 등 뒤의 호랑이 타투에 별 뜻을 두지 않았다. 굳이 뜻을 붙이자면 회사의 이름을 따랐다고 해야 할까? 그때는 어릴 때라 등 뒤에 커다란 타투를 하나씩 새긴 아저씨들을 동경하던 때였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무의식적으로 백사현의 타투에 손이 갔다. 그러나 손끝이 닿기도 전에 뒤를 돌아보는 백사현이 더 빨랐다.
“언제 왔어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백사현이 되물었다. 양 귀에 끼우고 있던 무선 이어폰을 빼낸 백사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도 내려놓았다. 이준혁과 스케줄에 대해 통화를 하는 것 같더라니 이제야 끝낸 모양이었다.
“염색했어?”
“네, 깜짝 놀라게 해 주려 했는데 형 오는 줄도 몰랐네요.”
멋쩍게 웃는 백사현에게 범지훈은 깜짝 놀랐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뻗어진 손은 백사현의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손끝에 감겨오는 감촉은 퍽 부드러웠다.
“잘 어울린다, 예뻐.”
진심이 담기니 낯부끄러운 말도 잘만 나왔다. 은발도 백사현의 새하얀 피부에 신비롭게 어울렸지만, 흑발은 생각지도 못한 느낌을 주었다.
“…진짜 예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얘기 했는데 또 해 주네요.”
백사현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이 퍽 예뻤다. 숙인 범지훈의 고개가 백사현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쪽 소리가 순간 적막해진 방 안을 울렸다.
고개를 들어 올린 범지훈의 눈에 얼빠진 백사현의 표정이 들어왔다. 그것에 입술이 끌어 올려지던 범지훈의 표정이 순간 굳고 말았다.
“이게 뭐지?”
흉흉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백사현의 턱을 잡아 돌리는 손길은 사뭇 조심스러웠다. 백사현의 턱 아래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푸르스름한 멍이 있었다. 누군가 억세게 잡아 쥐기라도 한 것처럼 꼭 손자국 모양으로 난 멍이었다.
“누가 이랬어?”
낮은 음성에 분노가 어렸다. 그것에 백사현의 눈이 새삼스럽게 범지훈을 올려다보았다.
“형.”
“응.”
화가 나 있는 와중에도 백사현의 부름에 착실히 대답하는 범지훈의 무서운 시선이 턱 부근에만 머물렀다. 차마 멍 자국엔 손을 대지 못하고 그 부근만 깃털처럼 조심스럽게 쓰는 손길에 백사현이 범지훈의 손을 잡았다.
“나 때문에 화내는 게 왜 이렇게 좋죠?”
그 말에 범지훈의 손길이 멈췄다.
“진짜 좋은데요? 형, 화난 모습도 섹시해요.”
빤히 올려다보는 백사현의 눈이 반짝반짝했다. 겁 하나 내지 않는 모습에 본인이 화를 냈던가 싶어 아차 했던 범지훈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풀렸다. 하지만 이건 이거고 범지훈은 다시 물었다.
“누가 이런 거야?”
“김영희요.”
“…뭐?”
“사람을 벽으로 밀치고 턱도 세게 잡아 쥐는데 너무 아팠어요.”
눈꼬리가 추욱 처지며 울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백사현은 연약해 보였다. 김영희라는 말에 생각이 멈춘 듯한 범지훈도 백사현의 자세한 설명에 종래엔 주먹을 움켜쥐었다.
‘김영희, 지금 어딨지?’ 김영희 ‘씨’도 붙이지 않고 물어 오는 음성은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게 빤히 보였다. 지금 집에 없을 거라며 백사현이 말리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태세였다. ‘그럼 지금 어디 있는 건데?’ 물어 오는 말에 백사현은 잠깐 눈을 깜빡이다,
“…병원이라도 가지 않았을까요?”
라며 자신 없이 답했다. ‘병원은 왜?’ ‘음,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아서요.’ 백사현의 말에 범지훈은 결국 발걸음을 완전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혹시 지금 김영희 걱정하는 거예요?”
“아니, 그놈을 내가 왜.”
얼마나 미웠던지 에스의 멤버인데도 놈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뱉고 나서야 범지훈도 멈칫했지만 백사현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걱정하지 마요, 걔 되게 나빠요. 형.”
결국 백사현을 앉혀 더 멍든 곳은 없나 얼굴 곳곳을 살피고 더 이상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범지훈은 김영희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 있었다. 백사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 김영희가 그저 철없는 반항을 했다고 답했다. 형을 우습게 알고 잠시 기어올랐을 뿐이라고.
“아무리 그래도 형한테,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이러면 안 되지.”
“…알고 있었어요?”
백사현의 눈이 커졌다. 고백한 사람이 멤버라고만 했을 뿐이지 김영희라고 찍어 이야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범지훈이 김영희를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컸고 같은 그룹 멤버로서 일말의 배려 때문이었다.
고백을 직접 하기까지의 그 마음도 분명 가볍지는 않았을 거니까, 백사현도 그 정도의 배려는 할 줄 알았다. 그 배려를 김영희는 전혀 하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응, 처음 봤을 때부터 눈치채고는 있었어. 김영희가 사현이 널 좋아한다는 것쯤은.”
“…….”
“원래 좋아하는 게 같으면 더 잘 알아보는 법이거든.”
평이한 어조로 툭 뱉어 내는 말이 날아 들어와 꽂혔다. 직격탄이었다. 백사현의 얼굴에 열꽃이 피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사랑해요.”
시도 때도 없이 사랑한다고 하면 너무 가볍게 느껴질까 봐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뱉어 내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벅찼다. 큰일이었다. 범지훈을 생각보다 너무 좋아했다.
범지훈의 대답을 기다릴 틈은 없었다. 불시에 뻗어진 백사현의 두 팔이 범지훈의 등을 끌어 당겨 왔다. 아무 망설임 없이 안기는 단단한 몸은 퍽 기꺼웠다. 부드럽게 허리와 등에 감겨 오는 범지훈의 팔도 백사현은 말도 안 되게 좋았다.
“형, 나 조금 섰어요.”
그리고 백사현은 범지훈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골적인 단어에 품 안의 범지훈이 움찔했다. 하지만 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번엔 정말이었다.
***
김영희는 돌연 입대를 선언했다. 나이도 나이고 늦어도 내년에는 반드시 가야 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군 입대 소식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도배되다시피 한 에스의 모 멤버 개인 홈마의 백사현 납치 사건은 인터넷 기사로도 올라오며 소속사가 막을 새도 없이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에스의 인기 멤버 백사현이 피해자인 소식이기도 한 만큼 에스의 팬덤 엔들은 단단히 뿔이 나 있었다. 팬덤은 아예 멤버 모사의 개인 팬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팬들은 김영희를 제외한 4인 지지를 하겠다며 선언하기도 했다.
김영희의 안티 계정들도 수가 늘어갔다. 그러던 와중, 김영희의 군 입대 선언은 팬덤을 또 한 번 술렁이게 했다. 때맞춰 백사현의 자필 편지도 공식 홈에 올라왔다. 백사현의 개인 SNS들에도 뒤늦게 올라온 건 당연했다.
[소중한 멤버에게 피해가 갈까 소속사와 상의해서 스토커라는 이름으로 바꿔 가해자를 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좋아하는 팬 여러분들을 속여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이상 죄 없는 멤버에게 피해가 가는 걸 원하지는 않습니다. 멤버가 충격을 받을까 지금까지 숨겨 왔으나 현재 사실을 알게 된 멤버는 본인의 잘못이라며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자책 중이라 제 마음도 아픕니다. 저는 멤버도 에스도 엔도 너무 소중하고 늘 사랑하고 있습니다.]
백사현 특유의 날카로운 느낌의 필기체로 한 자 한 자 직접 적어 더욱 마음이 담긴 편지였다. 축약하자면 이러한 내용이었지만 얼마나 길게 풀어 썼던지 편지는 2페이지나 되었다. 그리고 그 정성 가득한 자필 편지는 팬덤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솔직히 모사, 김영희에게 무슨 죄가 있냐는 흐름이 번져 나갔다. 그에 백사현보다 며칠 늦게 김영희의 자필 편지가 공식 홈에만 올라왔다.
사현이 형에게 미안해서 도저히 얼굴을 볼 면목이 없을 정도다. 예정보다 조금 더 빨리 입대를 하게 된 이유는 나라를 위해서 살며 납치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을 사현이 형에게도 나에게도 서로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한번 백사현에게 사과했고 팬들에게도 사과했다. 그 절절한 말에 팬덤은 눈물바다가 됐다. 백사현의 편에 서서 그래도 김영희에게 무슨 죄가 있겠냐며 숙덕이던 엔들도 아이고 내 새끼를 외치며 김영희의 군 입대를 말렸다.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괜스레 백사현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김영희의 개인 팬덤들도, 개인 팬덤들을 배척하며 김영희를 괜스레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던 대다수의 팬덤들도 백사현과 김영희의 참 우정에 소중한 우리 새끼라며 연신 외쳤다. 에스의 팬덤 자체가 견고해진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개인 팬들이 늘어 가는 현재의 아이돌판에서 에스는 되레 올팬들이 대량 유입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올팬 속에는 원래는 개인 팬이었던 팬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나, 이 형 좀 무서워지려고 그래.”
순식간에 태세 전환을 하는 팬덤 내의 분위기를 읽어 내려가며 이루나가 중얼거렸다. 백사현처럼 여러 SNS로 팬들과 자주 소통을 하던 이루나였기에 다른 멤버들에 비해 팬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빨랐다.
“그럴 땐 무섭다가 아니라 현명하다고 해야지, 루나야.”
듣고 있던 곽복동이 정정했지만 박달수는 다른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곽복동과 이루나의 말대로 백사현은 똑똑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우리 회사 사고 대응 팀보다 이 형이 더 머리가 좋은 것 같아. 아니, 혼자서 어떻게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낼 수가 있지? 심지어 팬들 반응도 미리 다 파악했어.”
이루나가 손톱 끝을 물었다.
“대체 김영희는 무슨 생각으로 이 형을 좋아한다고 했던 거래? 이렇게 무서운 형인 걸 지금까지 눈치를 전혀 못 챈 거야?”
“형한테 김영희가 뭐야? 형이라고 해야지.”
“아니, 복동이 형!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와. 나 이 형이랑 같은 그룹 멤버라 너무 다행인 것 같아. 달수 형은 안 그래?”
대답 대신 박달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루나의 말에 100% 동감했다. 적이 아니라 아군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김영희랑 똑같이 백사현에게 치대도 백사현이 이루나에게만은 더 너그러웠던 것엔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막내라서가 아닌 이루나는 감이 좋았고 눈치가 빨랐다. 즉, 장난으로 포장할 수 있는 백사현의 인내심을 간당간당하게 넘기면서까지만 치댔고 절대로 그 선만은 넘지 않았다.
편해지고 친해졌다고 해도 이루나는 정도만큼은 지켰다. 김영희는 그러지 못한 것 같지만. 김영희의 집에 백사현이 다녀가고 나서 김영희가 매니저 형이랑 병원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진한 곽복동이야 영희가 어디 아프냐며 걱정하는 게 다였지만, 박달수는 저도 모르게 이루나와 시선이 마주치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싶었는데 김영희가 그 선을 한참 넘은 모양이었다. 백사현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사고 치지 말고 에스만 잘 유지하자.”
“동감.”
“뭐야? 누가 사고라도 친대?”
좀체 입을 열지 않는 박달수가 다짐했다. 동의하는 이루나에 뒤이어 영문 모르는 표정의 곽복동이 되물었다. 박달수와 이루나는 수박 겉 핥기 식으로만 백사현을 파악하고 있는 곽복동이 순간 부러워졌다. 백사현이 일방적으로 김영희를 구타했을 거란 사실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얼굴이었다.
성격이 너무 좋고 순진한 것도 곽복동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그러니 모든 멤버들과 조화가 가능한 리더 역할을 하는 거겠지만. 그 백사현도 곽복동의 말만큼은 순순히 따르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다 박달수과 이루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역시 진정한 권력자는 폭군이 아닌 성군이었나 싶은 생각들을 하는 표정이었다.
***
김영희의 군 입대 예고 이후, 음지에서는 상장 폐지 되어 가던 영사(김영희X백사현) 커플링이 이른바 떡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떡상을 했대도 미친 듯이 주가가 오르는 사범(백사현X범지훈) 커플링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치 에스의 3집 타이틀곡이 대박을 쳐서 에스를 최고의 인기 아이돌 그룹이라는 자리에 올려놓은 것처럼 사범은 승승장구했다. 사범을 파는 신예 팬픽 작가 민징징 덕분이었다.
메이저 자리를 지키던 범사는 어느덧 마이너 취급을 당했다. 에스판에서 대부분 메이저 자리를 유지 중이던 사른러(백사현 수 지지자)들은 커지기 시작하는 사왼판(백사현 공 지지판)에 기웃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사범은 심하게 흥했다. 비연예인인 범지훈의 성격을 민징징 작가가 쓴 팬픽 내용대로 아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민징징 작가가 실제로 범지훈을 알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리까지도 했다.
“민지 씨.”
“…네, 네! 대리님!”
방금 전까지 들여다보던 핸드폰을 서둘러 내려놓은 김민지는 저를 부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사 시기에 얼마의 차이는 있었지만, 자신처럼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현재 대리로 초고속 승진한 이였다. 물론 경력직 신입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지만 김민지는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하루빨리 눈앞의 저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사실 그는 김민지의 현재 롤 모델이기도 했다.
무려 범지훈과 사석에서 만나서 저번엔 점심까지 같이한 사이였으니까.
“사위민 대리님이 부르셔서 잠깐 좀 가 볼게요.”
옆자리 인턴에게 귀띔하며 김민지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범지훈과 한 짧은 대화만으로는 부족했다. 마케팅부 사원 김민지는 에스의 열혈 팬이자 범호 캐피탈 대표인 범지훈의 열혈 팬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음지에서는 민징징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님이었다.
지잉-
김민지가 떠난 자리에는 그녀의 핸드폰만이 남아 짧은 진동을 토해 냈다. 잠금 화면 위로는 알람이 떠올라 있었다. 파랑새에서 누군가가 쓴 새로운 트윗이었다.
[얘들아 대박사건;;;Tvm에서 나용선 피디가 새로운 음악 프로그램 론칭하는데 포맷이 여주환이래 그 사현이가 축가 불러서 엄청 유명해진 싱어송라이터님ㅠㅠㅠㅠㅠㅠㅠㅠ그래서 출연 연예인 1순위로 무조건 백사현 생각한다잖아ㅠㅠㅠㅠㅠㅠㅠ아 미친 우리 사현이 고정 예능 생기나봐ㅠㅠㅠㅠㅠㅠㅠㅠ원래 예능 잘 안 나갔는데 음악 프로그램이니까 메보인 울 사현이 나갈 확률 99.9999999%라구ㅠㅠㅠㅠㅠㅠ]
“안 나가.”
“야, 사현아!”
치프 매니저의 절규 같은 비명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백사현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준혁은 한숨만 내쉬었고 홍보 팀장은 머리를 싸맸다.
“대체 왜? 이유가 뭔데? 자그마치 나용선 피디야! 그 Tvm의 간판 피디 나용선이라고! 너 나용선 피디 예능들 다 재밌게 봤잖아? 좋다며! 근데 왜 안 나간다는데?”
“…그냥 나가기 싫어, 형.”
“아니, 그러니까 왜! 뭐 납득할 만한 이유라도 말해 줘야 우리도 나용선 측이랑 좋게 얘기를 하든 끝내든 뭘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백사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사현에게만큼은 항상 지는 듯하던 치프 매니저도 이번만큼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홍보 팀장은 아예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영희 입대하기 전 마지막 단체 앨범 홍보도 해야 하잖아. 너랑 복동이야 연습생 때 일찍 군대를 갔다 왔다지만, 영희부턴 아니잖아. 에스의 군백기라니까? 안 그래도 한 살씩들 터울이라 영희 군 제대도 하기 전에 달수랑 루나도 줄줄이 다녀와야 하는데 그럼 공백기가 얼마나 커지는데! 너, 에스에 진심이라면서? 나용선 피디가 자기 연예인이면 또 얼마나 챙겨 주는지 알잖아, 너도.”
지켜보던 이준혁도 애가 달았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굴러들어 왔는데 왜 출연이 싫다는 건지. 나용선 피디라면 방송계에선 내로라하는 스타 피디인데다 히트 프로그램 제조기로 정평이 난 이였다. 그렇다고 나용선 측과 서로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닐 텐데, 아니 사이가 나빴다면 아예 나용선 측에서 섭외가 들어오지도 않을 터였다. 치프 매니저처럼 이준혁 또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포맷이 마음에 안 들어.”
“뭐?”
“여주환을 조명한다는 거, 그게 싫다고. 내가 왜 거길 나가야 하는데.”
“…너 여주환 싫어했냐? 근데 싫다는 놈이 그 사람 노래는 왜 불렀는데?”
그 말엔 백사현은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그런 백사현의 태도에 치프 매니저를 비롯해 이준혁과 홍보 팀장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너까지 이러면 안 돼, 사현아. 나용선 측도 지금 얼마나 난리인데. 여주환 친아들인 PS 엔터 이사 여사빈도 섭외가 안 돼서 발을 구른다잖아. 여주환을 조명한다는데 그 친아들이 안 나오는 게 말이 되냐? 그것도 쌩 일반인도 아니고 엔터 업계에 몸 담그는 사람이? 피스톨(PS 엔터테인먼트 간판 남자 아이돌 그룹)도 데뷔시킨 프로듀서잖아, 그 사람.”
그럼에도 대답이 없는 백사현에 두 손을 든 건 치프 매니저였다. 홍보 팀장은 이미 설득을 포기한 상태였고 유일한 희망인 치프 매니저도 저렇게 나오니 이준혁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에 범지훈을 떠올렸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딱 이번만 사현이 좀 설득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나 싶었다.
“…생각할 시간 좀 줘.”
적막 속에서 갑작스레 뱉어진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백사현을 향했다. 백사현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어쩐지 괴로운 듯한 얼굴이었다.
***
“아악…!”
“사모님!”
이른 새벽녘의 비명에 옆방에서 자던 사용인이 튀어나왔다. 서둘러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용인의 뒷모습에 집으로 들어오던 여사빈의 시선이 닿았다.
만성 수면 장애를 가지고 있는 어머니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내로라하는 의사들에게 처방을 받고 잠에 좋다는 모든 방법을 써도 그랬다. 어머니는 주로 선잠을 잤고 새벽녘에 눈을 뜰 때도 종종 있었다. 악몽을 꾸는지 이따금 자면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런 어머니를 케어 하기 위해 어머니의 옆방은 사용인들이 차지했다. 평소에도 어머니를 밀착 케어 하던 사용인들 몇은 돌아가며 그렇게 어머니의 옆방에서 보초를 서다시피 했다.
어머니가 원하지 않아 악몽을 꾸고 일어난 어머니의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녀는 그렇게 악몽에서 일어나고 나면 옅은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약을 챙기던 사용인을 불러 물어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용인이 들고 있는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 등을 보며 여사빈은 입맛이 써졌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이유인지, 정신없는 사용인이 채 닫지 못해 빠끔히 열린 어머니의 방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젠 만성적이 되어 사용인이 급히 뛰어나가는 소리가 들리든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든 남의 일인 양 여느 때처럼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여사빈은 요즘 들어 자꾸 떠오르는 누군가 때문에 몰입을 할 수 있는 다른 사건이 필요했다. 어머니에게 너무 무심했나 싶은 생각 또한 때맞춰 들었다. 효자는 아니었지만 여사빈이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 발걸음은 자연스레 어머니의 방문을 향했다.
“…그 새끼가 왜 거길, 거길 나와. 왜…!”
“사모님, 진정하세요. 꿈이에요. 꿈!”
“백서경의 새끼가 왜 주환 씨의 프로그램에 나오냐고…!”
“사모님! 그런 일 없어요. 무슨 프로그램이요? 아니에요. 그런 거 없어요,”
이런 일이 익숙한지 방문 너머 사용인은 정신이 나간 어머니의 말을 흘려들으며 무조건 아니라고 꿈일 뿐이라며 달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여사빈은 아니었다.
“백서경…! 백서경, 그 년! 내 껀데, 내 주환 씨를 뺏어간 년!”
발악을 하며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가 되뇌는 백서경이란 이름. 그 이름의 주인이 당시 여사빈을 배 속에 가지고 있던 어머니를 무너뜨린 여자인 모양이었다.
여사빈이 그 여자가 누구냐며 아무리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았던 어머니는 혼자서 그 앙금을 내내 품고 있던 모양이었다. 무의식중에 악몽으로까지 꾸며 지르는 어머니의 외침은 얼핏 처절할 정도였다. 이 외침을 아무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아 그동안 어머니는 본인의 침실만큼은 집 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으로 두고 방음까지 완벽하게 했던 모양이었다.
어머니와 지금껏 함께 살며 여사빈조차도 처음 들어 본 이름이었으니까. 백서경. …어딘지 낯익기도 했다. 매체에서 종종 들어 본 이름 같은데.
“백서경도…! 그 년의 새끼도! 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다! 내가, 내가 그 사람의 여자야. 나랑 사빈이가 그 사람의 가족이라고!”
“네, 네. 맞아요. 사모님이랑 도련님만 가족이죠. 누가 또 가족이에요? 백서경 씨는 이미 죽었다고 하셨잖아요. 진정하세요, 사모님!”
죽었다고? 여사빈에게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랬다면 이미 여사빈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겠지. 어머니가 사용인에게 거짓말을 했든, 그저 어머니를 진정시키기 위해 사용인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어머니가 절규하듯 뱉어 낸 단어들은 하나둘 여사빈의 머릿속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백서경, 백서경의 자식, 주환 씨의 프로그램?
그러자마자 떠오른 건 얼마 전 방송국에서 걸려 온 작가의 섭외 전화였다. 그게 나용선 피디의 새로운 프로그램이라고 했던가? 여주환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한다며 입에 발린 말들로 설득하던 작가의 말을 정중하게 자르며 단호하게 거절을 한 기억이 있었다.
“…밤늦게 미안한데 지시할 게 있어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든 여사빈이 전화를 건 곳은 독사파 쪽이었다. 엔터 업계의 일도 사실 그리 깨끗하진 않았다. 로비는 물론, 심하면 협박을 해야 할 때도 종종 있었다. 아버지 때가 생각나 폭력은 쓰지 않으려 애쓰지만 여사빈은 PS 엔터테인먼트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본인이 가진 힘쯤이야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법에 어긋나더라도,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엔터 사업을 하며 독사파의 손을 빌린 적이야 있었지만, 엔터 일 외의 여사빈의 개인적인 이유로 손을 빌린 건 단연코 오늘이 처음이었다.
“나용선 피디가 신규 론칭한다는 여주환 관련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람들 신상이랑 가족 정보가 필요해. 출연 예정이든 물망에 오르든 상관없이 싹 다 조사해 줘. 가족 정보는 되도록 부모 위주로 자세하게.”
무엇이 됐든 알아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용건을 끝내고 통화를 마친 여사빈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달빛도 별빛도 한 점 없는 어둑한 밤하늘을 눈에 담으며 여사빈의 시선도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골치 아파졌네.”
배다른 형제라는 게 생길지도 몰랐다. 형제애 같은 낭만적인 것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제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면 그 싹은 잘라 내는 게 옳았다. 넘보지도 못하게 아예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하나.
독사의 품에서 자라 와 똑같이 독을 품게 된 뱀은 위협적으로 눈을 빛냈다.
***
“많이 바뀌었다, 너.”
이준혁의 말에 손안에서 만년필을 돌리던 범지훈의 시선이 와 닿았다. ‘뭐가?’ 물어 오는 질문에는 이준혁이 되레 고민했다.
“음. 뭔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데, 분위기가….”
“대표님.”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우정선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어느새 대표실로 들어온 우정선의 손에는 커피 잔들이 들려 있었다. 그제야 범지훈도 펜을 놓고 서류철이 쌓여 있던 책상에서 일어서 이준혁이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갔다.
“야, 정선아. 얘 분위기 뭔가 달라지지 않았냐?”
어차피 셋밖에 없기도 하겠다, 커피를 받은 이준혁은 편하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범지훈의 회사에 오니 범지훈은 물론 우정선까지 두 명의 친구를 한꺼번에 보게 돼서 반갑던 차였다. 마침 이 근처에서 백사현의 스케줄이 있기도 해서 백사현도 기다릴 겸 이준혁은 범지훈의 회사에 찾아온 선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 근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는 무슨 중요한 얘기라도 하나 했더니 그 얘기 중이었어?”
음,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다고 이준혁은 다시 생각했다. 쌀쌀맞게 얘기할 때는 언제고 우정선도 어느새인가 집중해서 범지훈을 바라봤다.
“바뀌긴 했지. 좀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나만 그렇게 느낀 거 아니지?”
“…뭐가 달라졌다고.”
쑥스러운 듯 답하는 범지훈에는 이준혁은 물론 우정선의 눈도 커졌다.
“범지훈이 지금 우리 말에 맞장구를 쳤지?”
“응,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와,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보다.”
이준혁의 오버 섞인 말에도 핀잔은커녕 우정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범지훈은 많이 달라졌다.
“사랑의 힘인가?”
“뭐?”
“아니, 지훈이 너 우리 사현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되고 나서 뭐랄까. 아! 여유로워졌어. 그래, 그 말이 딱이다.”
여유로워졌다. 그 단어에 범지훈의 눈이 커졌다.
“예전엔 무표정으로만 있어도 살벌한 기운 팍팍 풍기던 놈이 작게나마 입꼬리도 이렇게 올라가고 사람 말에 대답도 잘하고 분위기도 유해지고. 오, 이게 바로 트루 러브인가?”
“뭐라는 거야.”
핀잔 섞인 범지훈의 말에도 이준혁은 본인의 말에 본인이 감탄한 듯 무아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처럼 우리 사현이도 유해지긴 했네. 뭔가 전보다 벽이 더 얇아진 느낌이거든. 사랑받아서 그런가?”
사랑받는다, 라. 그 단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어, 어? 봐 봐. 지금도 입술 끝이 올라간 거. 야, 나는 지훈이 네가 이렇게 잘 웃을 수 있는 놈인 줄도 지금에서야 알았잖아. 평소에도 그렇게 웃고 다니지 그랬냐? 훨씬 보기 좋네.”
“내가 언제 웃었다고.”
머쓱한지 턱을 만지는 척 입술을 가리는 범지훈이었지만 이미 티는 다 난 뒤였다. 장난을 치는 이준혁과 대꾸하는 범지훈의 대화 속에서 입을 열지 않는 건 우정선 뿐이었다. 범지훈의 얼굴에 시선을 던지는 우정선의 입꼬리가 아무도 모르게 비틀린 것도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