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epiphany (1)
“…뭐야?”
여사빈의 낯에 껄끄럽다는 감정이 번졌다. 퇴근 후, PS 엔터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보게 된 사람이 우정선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기 흡연 구역 아닌데.”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화단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담배 연기를 뱉는 우정선의 발밑엔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지 이미 수북한 꽁초들이 쌓여 있었다. 저 녀석, 담배도 피웠던가? 잠깐 생각하던 여사빈은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곤 우정선에게로 다가갔다.
“야, 여기 흡연 구역 아니라고. 뭔 놈의 담배를 이렇게 펴?”
바로 앞까지 가서 걸음을 멈춘 뒤에야 우정선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어쩐지 멍해 보이는 얼굴에 시선을 던지며 여사빈의 미간이 구겨졌다.
“나라라도 잃었냐? 표정이 왜 그따위야.”
“…그러게. 내 표정이 왜 이러지.”
하하. 한 박자 늦게 우정선은 힘없이 웃었다. 정말 힘이 없어 보여 날카롭게 쏘아붙이려던 여사빈의 입이 다물어질 정도였다.
“…남의 회사에서 왜 이러고 있는데? 그나저나 이 꽁초는 네가 다 치워라.”
툭툭. 괜스레 앞에 쌓인 꽁초 더미를 발끝으로 건드리며 여사빈은 말했다.
“너한테 사과하러 왔는데, 퇴근을 이제야 해서. 계속 기다렸거든.”
아직 다 피지 못한 담배를 바닥에 짓이겨 꺼 버리곤 우정선은 이내 화단 턱에 앉아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사과? 그 단어에 여사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응, 지난번에 막걸릿집에선 미안했어.”
“뭐?”
여사빈의 얼굴에 당황이 서렸다. 지난번 그 일이 있고 나서 거짓말처럼 우정선에게선 별다른 연락이 오지 않아 혼자 마음을 놓고 안심하던 차였다. 술에 취해 기억하지 못하든 기억하고 있든 간에 연락이 없는 걸 보니 우정선도 껄끄러워하기는 피차일반인 듯하고 여사빈은 차라리 평생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찾아와서는 사과를 한다니.
“그땐 내가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알긴 아네.”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를 하러 찾아온 사람을 매몰차게 내치지는 못해서 여사빈은 여전히 불편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이런 속마음 털어놓을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취했대도 그런 추태를 보이고 내가 면목이 없다. 사과도 더 빨리했어야 했는데 고민한다고 내가….”
“됐어. 사과는 받을게.”
‘그래, 고마워.’ 답지 않게 우정선은 힘없이 중얼댔다. 우정선의 말을 잘라 버리고 성의 없이 답했던 여사빈은 그런 우정선의 표정을 살폈다. 신경 쓰이게 버림받은 똥개 같은 얼굴이나 해 대고.
“먼저 가. 난 이거 치우고 갈게.”
그런 얼굴로 이내 바닥에 쪼그려 주섬주섬 꽁초를 줍는 우정선의 행태에 여사빈은 이마를 짚었다. 그냥 한 소리인데 그걸 또 불쌍해 보이게 줍고 앉아 있으니 여사빈은 왠지 짜증이 솟았다.
“그냥 놔둬. 청소해 주는 사람들이 알아서 치우니까.”
“환경미화원분들 번거롭게 왜? 내 잘못인데 내가 치워야지. 깨끗이 치우고 갈게. 먼저 가.”
“내버려 두라니까. 환경미화원이 아니고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여기까지 치워.”
“그래도 내가 치울게. 먼저 가라.”
“씹, 짜증 나게.”
여사빈의 입술 사이로 험한 말이 흘렀다. 다시 한번 더 머리를 헝클어뜨린 여사빈은 무릎을 굽혔다.
“…뭐해?”
놀란 우정선의 얼굴이 그제야 여사빈을 마주했다. 설마하니 같이 꽁초를 주워 줄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본 우정선의 표정 중에선 가장 생기 있는 반응이라 나쁘진 않았다. 잠시 우정선을 바라보던 여사빈은 고개를 숙여 꽁초 줍기를 이어 갔다.
“내가 이 바닥에서 피도 눈물도 없다는 소리 꽤 들었는데 그래도 불쌍한 거 보면 그냥은 못 지나치겠거든.”
“…내가 불쌍해 보여?”
“어, 존나게.”
우정선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보단 힘 있는 웃음이었다. 차라리 이게 더 듣기가 좋을 정도였다.
“입이 험하네, 명색이 이사님이.”
“이제 알았냐? 얼굴이랑 다르게 성격도 험해.”
“와, 자신감 봐. 그래, 너 잘생겼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우정선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훨씬 낫네. 여사빈의 찡그려졌던 미간도 어느새인가 편편해져 있었다.
“그럼, 기왕 불쌍해 보이는 김에 나한테 시간 한번 적선해 주면 안 돼?”
“술 마시잔 거면 시간 안 돼.”
‘널 또 어떻게 감당하라고.’ 중얼대는 여사빈의 뒷말에 우정선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래.”
“여기 앞 편의점에서 맥주 한두 캔 정도면 가능하고.”
그 전에 우리 손 좀 씻고 가던지. 꽁초에 더러워진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여사빈은 말했다. 그나저나 참 큰일이었다. 이렇게 동정심이 넘쳐서야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지 스스로가 걱정도 됐다. 금세 똥강아지 같은 표정이 돼서 시무룩해진 우정선을 보며 편의점 얘기는 왜 또 튀어나왔는지. 그래도 다행인 건 편의점 맥주 한두 캔에 여사빈도 우정선도 취할 리는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우정선 이놈은 왜 자꾸 나한테 와서 신세 한탄을 하는 거야. 동병상련의 입장이기에 이해는 간다지만 범지훈의 이야기는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았다. 보지도 듣지도 않으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으니까.
“…너, 편의점 되게 익숙하구나.”
그리고 우정선보다 앞장서 들어온 편의점에서 여사빈은 익숙한 듯 수입 맥주 코너로 가서 쏙쏙 맥주들을 집어냈다. 그다음으론 마른안주로 좋을 법한 봉지 과자들도 야무지게 몇 개 챙긴 뒤 계산하려는 우정선도 막아 내고 ‘불쌍해 보이는 김에 사는 것까지 내가 할게.’라는 한마디로 조용히 시켰다.
다행히 그리 춥지 않은 날씨에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은 뒤에야 우정선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여사빈을 보며 말했다.
“고깃집은 많이 안 가봐도 내가 편의점 이용은 자주 하거든.”
여상하게 대답하며 여사빈은 맥주 한 캔을 땄다. 호기심에 몇 번 사서 마셔 보니 편의점 맥주도 꽤 매력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의외긴 하네.”
“왜? 부잣집 도련님들은 편의점도 이용 안 하는 줄 알았어? 너, 그거 은근히 편견이다.”
“편견은 아니야. 지훈이도 편의점 자주 이용하거든.”
“…그래?”
역시 우정선과 이야기할 때 범지훈이란 주제는 항상 따라붙는 것 같았다. 왜인지 속이 쓰라려 오고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아 여사빈은 턱을 괴며 괜히 시선을 돌렸다. 좋아한다는 게 이런 감정인 줄 알았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 이젠 후회도 밀려들었다.
그걸 보고 우정선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좀 봐줘라. 너 말고는 이런 얘기 할 사람 진짜 없거든.”
“친구 없어?”
“있는데, 너랑 한 얘기를 나눌 만큼의 사이는 못 돼.”
“…꼭 우리가 엄청 친한 것처럼 말하네.”
“이 정도면 친구라고 부를 만큼은 되지 않을까? 나 이래 보여도 오늘 너 찾아오기까지 진짜 고민 많이 했거든.”
‘그렇겠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여사빈은 맥주를 홀짝였다. 하기야 술에 꼴아서 친구라고 부를 만큼의 사이인 인간한테 입술 박치기를 한 건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긴 했다. 여사빈도 그 일 이후로 내내 우정선의 얼굴이 아른거렸으니까. 오죽했으면 우정선을 잊으려고 어머니의 침실 앞까지 기웃거렸다. 그 덕에 좋은 정보를 얻긴 했지만.
“내가 어디 가서 그런 추태를 부린 적이 없는데, 너는 진짜 편했는지 속 얘기가 줄줄이 나오더라. 아무리 그래도 너한테 그러면 안 됐는데, 민폐만 끼치고.”
“그렇지.”
“한 번도 부린 적 없는 추태를 부리니까 좀 쪽이 팔려서 연락도 못 하고 얼굴도 못 보겠더라고.”
“그래, 보통 추태는 아니었지.”
“제일 쪽팔린 게 지훈이가 똥차 같은 애인들 만났던 걸 차라리 다행이라는 식으로 얘기했었던 게….”
고개를 끄덕이려던 여사빈이 멈칫했다.
“그게 제일 쪽팔리다고?”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애인들 때문에 고생했던 지훈이 봐서 그러면은….”
“야, 우정선.”
여사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설마설마했더니.
“너… 그때 필름 끊겼었어?”
그 말에 우정선은 퍽 당황한 눈치였다. 그 표정만으로도 눈치챌 수 있었다. 여사빈은 종잇조각처럼 얼굴을 구겼다.
“미안, 혹시 내가 필름 끊기고 또 무슨 실수를….”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테이블 위로 올려둔 여사빈의 핸드폰이 진동을 토했기 때문이었다. 입을 다무는 우정선에 뒤이어 여사빈은 전화를 받았다. 독사파였다.
“어.”
[도련님, 지시하셨던 일 말입니다. 나용선 피디 프로그램 출연 예정자와 물망에 올랐던 사람들 방금 조사 자료 보내 드렸습니다.]
“응, 고생했어.”
[그런데 조사하다가 의외의 인물을 발견했는데 이게 도련님께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우정선 쪽을 흘끔 바라보며 여사빈은 말해 보라고 답했다. 솔직히 도움이든 뭐든 지금은 우정선 쪽에 더 신경이 쓰였다. 남은 그 입술 박치기 하나로 충격에 잠도 설쳤는데 본인은 속 편하게 지냈다 이거지? 여사빈은 화가 나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백서경 말입니다. 도련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 유명한 여배우요. 아니, 세상에 그 백서경한테 장성한 아들이 있다지 뭡니까? 심지어 그 아들이 도련님 소속사에 그 아이돌? 그 친구들 같은 유명 아이돌 멤버라고 합니다. 야, 뭐냐. 아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
곁에 있던 아랫사람에게 물어보는지 핸드폰 속에서 잠깐의 소란이 뒤이었지만 여사빈은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굳이 이름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나용선의 프로그램에서 1순위 섭외 연예인으로 꼽히는 사람, 여사빈의 피스톨과 비슷한 급의 탑 아이돌이라면,
[에스! 에스의 백사현이라던데요?]
백사현 하나뿐이었으니까. 여사빈의 숨이 막혀 왔다.
***
“…그러니까, 네 말의 요점은 뱀 친구의 고민을 호랑이 친구가 어떻게 해야 해결해 줄 수 있느냐는 거지?”
[맞아.]
핸드폰 너머 단박에 이해한 친구가 뿌듯한지 낮은 저음은 조금 고조되어 있었다. 하아. 범지훈에게는 들리지 않게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우정선은 미간만 문질렀다. 누가 봐도 백사현에 범지훈의 이야기인데 전래 동화식으로 바꿔 묻는다고 못 알아챌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짝사랑이긴 하지만 본인을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연애 고민을 하고 싶은 건지. 물론 범지훈이 알 리가 없겠지만 이럴 때 보면 범지훈은 참 잔인했다. 마피아와 조폭 집안의 아들이 맞긴 한 것 같았다.
“호랑이가 고민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해도 뱀이 얘기해 주기 싫어한다며?”
[싫어하진 않고 말해 주기 곤란해하는 거야.]
“그거나, 그거나. 뱀이 알려 줄 마음이 안 드나 보지. 아니면, 호랑이랑 뱀이 그렇게까지 안 친하거나.”
심술이 나서인지 대답이 조금 불퉁해지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범지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안 친하진 않아.]
이내 들려온 대답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것이 못내 거슬려 우정선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정 알고 싶으면 뱀 모르게 호랑이가 알아보면 되는 거 아닌가?”
대체 백사현에게 무슨 고민이 있다는 건지. 행동은 평소와 같지만, 이따금 뭔가를 생각하거나 멍해질 때가 잦다는 말에 우정선에게도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싶은데 뱀이 싫어할까 봐.]
“그럼 얘기해 줄 때까지 기다려 봐. 이제 겨우 이틀째라며?”
핸드폰 너머 우정선의 답에 범지훈은 톡톡 운전대를 두드렸다. 역시 그것밖에 답이 없구나. 하긴 우정선의 말대로 백사현이 그런 모습을 보인지는 고작 이틀째였다. 내가 너무 유난을 떨어 사현이를 곤란하게 한 건가. 범지훈은 생각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혼자 해결을 할 수 있을 수도 있고 범지훈에게 어느 날 문득 그 고민에 대해 털어놓을지도 몰랐다.
그러다 우뚝 범지훈의 손가락이 멈췄다. 우정선의 대답이 묘하게 범지훈에게 하는 듯해서였다. 기분 탓인가? 가볍게 생각한 범지훈의 시선이 길가에 있는 카페를 향했다. 따뜻한 차 내부와는 다르게 부쩍 서늘해진 바깥 날씨는 따뜻한 커피 한잔을 생각나게 했다. 좋아하는 에스프레소가 떠오른 범지훈이 차를 카페 앞에서 멈춘 것도 당연했다.
오늘, 범지훈은 오래간만에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 출장을 나왔다. 말만 거창하게 지방 출장이지 당일치기 출장이었다. 출장보다는 외근이 더 맞는 말일까? 동행하려는 우정선을 떼어 놓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중요한 거래처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범호 캐피탈 지방 지사를 방문하여 경영상 어려움이나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범지훈의 직속 비서라지만 우정선은 본사의 비서 팀장이기도 해서 의외로 일이 많았다. 굳이 바쁜 우정선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는 않아 범지훈은 손사래를 쳤다. 종종 이런 적이 있기에 우정선도 더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어차피 우리 집에 방문하는 건데. 범지훈은 비서나 기사를 줄줄이 대동하는 것도 귀찮았다. 서울과 그리 멀지도 않은 지역이고 드라이브나 할 겸 범지훈은 직접 자차를 끌고 방문하여 현재는 생각보다 빨리 볼일을 마친 뒤였다.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전화를 받은 우정선도 급할 건 없었다. 범지훈의 고민 상담은 물론 본인의 사적인 이야기도 꺼내 놓고 있었으니까.
[그럼 나도 뭐 좀 물어보자.]
“응.”
[이거 내 얘기는 아니고 친구 얘기인데.]
100% 본인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범지훈은 내색하지 않았다.
[친구가 요즘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하고 어제도 만났었거든. 그런데 만날 때에도 평소랑 똑같이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부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랑 통화한 후에 고장 난 사람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멍했다던데 뭐 때문일까?]
“회사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그런 줄 알고 친구가 물어봤다는데 대답도 안 하고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가 버렸대.]
아주 큰 문제였다. 자그마치 30년 동안 범지훈 껌딱지로만 살았던 우정선이 신경 쓰는 사람이라니.
고자인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우정선은 연애에 관해선 지나치게 담백했다. 여태껏 누군가와 만나거나 알콩달콩 연애하는 꼴은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그러니 범지훈도 친구 된 도리로서 안 그래도 없는 인맥 박박 긁어 소개를 시켜 줄까 보다 못해 물어본 적도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시큰둥한 우정선에 범지훈이 더 심각해져 이준혁과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여자도 됐다고 하고 설마 싶어 은근히 물어본 남자도 모두 싫다고 하니 뭐가 문제인지 원인 파악조차 불가능했다.
그런 우정선이 신경 쓰인다는 사람이라니. 분명 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대일 게 틀림없었다. 그 우정선이 먼저 좋아한다는 걸 보니 능력도 있고 예쁜 사람일 건 분명했고. 그런 사람에게 고민거리가 생겼다는 건 큰일이었다. 성별은 잘 모르겠지만, 미래의 우정선의 짝이 될지도 모를 누군가를 떠올리며 범지훈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일단 약속을 몇 번 더 잡아서 그 사람이랑 자주 만나 봐. 그럼 그분도 고민에 대해 털어놔 주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려나?]
우정선과 통화를 이어 가며 범지훈은 카페의 카운터에 도착하자마자 포스기 앞에 붙은 메뉴판 중 에스프레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제 이런 개인 카페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이용 가능했다. 단 음료나 디저트 등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런 종류들을 파는 카페를 굳이 찾아가진 않아 이용법을 헤맸던 지난날들은 범지훈에겐 이젠 완전한 옛일이었다.
아방수 및 지난날의 남자들 덕분에 수월하게 계산까지 마친 범지훈은 진동 벨을 건네주는 아르바이트생에 고개를 꾸벅였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 친구 집에 시계를 놓고 갔는데 그걸 전해 줄 겸 약속 잡으면 이상해 보이진 않겠지?]
“전혀. 그런데 왜 시계를 놓고 가?”
[아, 그 사람이 우리 집… 아니, 친구 집에서 자고 갔었거든.]
범지훈은 컬쳐 쇼크를 받았다. 물론 사귄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서로 좋아 하룻밤을 보내는 거야 있을 수 있다고 치지만 그게 우정선이라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어… 그래. 이상해 보이지는 않아.”
당장이라도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 내며 범지훈의 머릿속에는 우정선의 곁에 서 있을 작고 가냘픈 외형을 가졌지만, 능력 좋고 똑 부러질 누군가가 떠올랐다. 너무 잘 어울리겠는데? 저도 모르게 입가가 슬슬 풀어지려는 것에 손으로 가리며 범지훈은 우정선이 쏟아 낼 연애사에 더욱 흥미가 생겼다.
그때였다. 통화에 집중하던 범지훈의 테이블 위로 조각 케이크 한 접시가 내려앉았다. 자연스레 범지훈의 시선도 케이크를 내려놓는 손의 주인을 향해 올라갔다.
“시킨 적 없는….”
“오랜만이야, 형.”
어깨에 가방을 멘 채 빙긋 웃어 보이던 남자가 허락도 받지 않고 범지훈의 맞은편 자리에 마음대로 몸을 앉혔다.
[여보세요? 지훈아?]
“여기서 이렇게 보니까 반갑다. 이건 서비스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먹어. 마침 퇴근 시간이라 더 반갑네.”
뻔히 통화를 하고 있던 범지훈을 보면서도 거리낄 것 없이 입을 여는 남자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잠시 남자를 보던 범지훈의 시선이 자신은 좋아하지 않는 다디단 케이크에 닿았다.
[범지훈?]
“미안한데, 정선아. 이따 다시 전화 줘도 될까. 일이 좀 생겨서.”
“흐응. 우 비서님이랑은 아직도 같이 일하나 봐?”
범지훈의 통화가 끊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물었다. 마치 우정선에 대해 꿰고 있다는 표정으로 남자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뜨였다. 그것이 못내 불편해져 범지훈은 말을 돌렸다.
“…여기서 일하는 건가?”
“응, 내 직장. 이래 봬도 정직원이야. 매니저 일을 하고 있거든. 운명인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우연히 형이랑 만나게 되고.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는데 섭섭하게 인사도 안 해 줄 거야?”
근 1년 만에 보는 눈앞의 남자는 여전했다. 겉모습도 그 성격도 변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이문진."
“정 없게 이문진이 뭐야, 예전처럼 문진이라고 불러 주라. 형.”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남자는 목소리는 물론, 누가 보더라도 사랑스러운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짙게 쌍꺼풀이 져 동그랗게 큰 눈도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도 작은 콧방울도 무언가를 바르지 않아도 항상 붉은빛을 띠었던 통통한 입술도 여전히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외모였다. 딱 하나 달라진 거라면 꼭 밀크 초콜릿을 녹여 만든 듯하던 특유의 머리카락 색은 못 보던 사이 달콤한 솜사탕 같은 핑크빛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저 목소리와 통통 튀는 성격도 좋아했었는데 범지훈은 이제 별 감흥이 없었다. 당연히 우정선의 연애사를 상상하며 풀어졌던 범지훈의 입매도 어느덧 평소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닌 것 같다만.”
“우와. 엄청 섭섭하네. 물론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 좋았었는데 이러기야?”
한때는 그랬다. 정말 한때였지만. 마지막으로 헤어졌었던 전 애인, 이문진을 보며 범지훈의 표정이 더 굳어 버렸다.
“…회사 임원이랑 배 맞추다 걸린 게 좋았던 건가?”
약 1년 전, 범지훈과 이문진이 헤어진 이유는 단순하고도 명확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신뢰 파괴. 이문진이 사귀던 범지훈을 두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워서였다. 거기다 그 바람의 상대가 본인과는 30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아버지뻘의 중년 사내였다.
거기까지였다면 차라리 범지훈도 헤어지고는 깨끗하게 잊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는 그 중년의 사내가 범지훈의 회사인 범호 캐피탈의 고위 임원진 중 하나였다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그 임원에게는 30년을 넘게 함께 산 아내도, 장성한 자식들도 뻔히 있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임원은 회의실 책상에서 이문진에게 허릿짓을 하며 헉헉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책상에 엎드려 흔들리던 이문진의 흥미 잃은 표정이 문을 열고 선 범지훈에게 닿았고 그때의 이문진의 얼굴은 아직도 범지훈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마치 애인을 위한 서프라이즈 장난을 계획하다 실수로 걸린 듯 가볍기 그지없는 얼굴.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냥 배시시 웃어 보이던 사랑스러운 그 얼굴을 보며 범지훈은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이 떨려 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아니고. 그래서 미안하니까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거잖아. 착한 형은 절대 먼저 그런 얘기 못 할 거니까.”
여전히 그때의 그 표정으로 배시시 웃어 보이며 이문진의 손이 범지훈에게로 뻗어졌다. 탁. 순식간에 그 손을 쳐 내며 범지훈은 겉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사는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형이 이렇게 달라진 이유, 혹시 백사현 때문인가?”
그러다 들려오는 그 이름에는 범지훈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이 이문진의 직장이든 뭐든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눈치 보지 않았던 범지훈은 그 이름에 카페를 눈으로 훑었다. 손님이 많진 않았지만, 잔잔히 흐르는 음악 소리 외엔 조용한 카페 내부에서 테이블마다 띄엄띄엄 앉아 있는 손님들이 귀를 기울인다면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대화였다.
결국, 범지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낮게 짓씹는 범지훈의 눈에 새파란 분노가 일었다. 본인보다 작은 것들에 한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범지훈이었지만 눈앞의 이문진에게는 예외가 되었다. 백사현을 들먹였기 때문이었다.
“나 형이랑 다시 잘해 보고 싶어.”
처음으로 이문진이 범지훈을 웃겼다. 전 애인에게 거리낌 없는 비웃음을 흘리며 범지훈의 웃음기 없는 시선이 이문진을 향했다.
“그동안 여러 남자 만나며 생각해 봤는데 역시 형만 한 남자는 없는 것 같아. 솔직히 그렇게 형이랑 헤어지고 나서 걸레 창놈이라는 소문이 돌 줄 알았거든? 근데 조용하더라.”
반짝반짝 빛나는 이문진의 시선이 범지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형 혼자만 안고 숨긴 거지? 곽팔팔인가? 곽 무슨 이상한 아저씨가 죽이려고 찾아온다거나 하다못해 우 비서님한테서라도 욕설 전화가 올 줄 알았는데 아무 연락 안 온 거 보니까 그 사람들한테도 비밀로 하고 숨긴 것 같은데. 그치?”
무감각한 범지훈의 눈에 이미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 백사현을 들먹이길래 무슨 이야기를 늘어놓나 했더니 시간 낭비만 했다. 그게 저를 위한 거라고 착각을 하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한번 시선을 주다 범지훈은 고개를 돌렸다. 이런 사람과 연애를 했었던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까워졌다.
“그런 얘기라면….”
“그래서 이렇게 착한 형을 내가 구해 주기로 했어.”
“…뭐?”
범지훈은 할 말을 잃은 얼굴을 했다. 대체 그런 똥차들을 왜 만나느냐는 여사빈의 물음이 순간 떠올랐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사귀면 어떻겠냐는 이준혁의 불편한 얼굴도 마른세수만 하던 우정선도 차례차례 떠올랐다.
[대표님은 심미안도 그렇고 성격도 능력도 진짜 다 좋은데 인성 보는 눈이 너~어무 없습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곽팔두가 거리낌 없이 손가락질을 하며 했던 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났다. 하하. 결국, 범지훈은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제 보니 틀린 말 하나 없었다.
그런 범지훈의 웃는 얼굴을 아까부터 묘하게 바라보던 이문진은 빙긋 웃어 보였다.
“…진짜 더 탐나는 남자가 됐네, 지훈이 형.”
“헛소리 말고 꺼져. 이문진.”
“앙칼진 것도 마음에 든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범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미련 없이 자리를 떴을 터였다.
“백사현 소속사가 수 엔터테인먼트 맞지?”
“뭐?”
“난 운이 정말 좋은 것 같아. 형이랑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형이 제 발로 찾아와 주고 말이야. 진짜 운명 맞나?”
“이문진.”
“내가 배우를 꿈꿨던 건 알지? 나름 이름난 중소 기획사에서 데뷔도 눈앞에 두고 있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없어져 버렸어. 오디션도, 합격하고 배역에다 대본집까지 모두 받은 뒤였었는데. 왜일까?”
그건 알고 있었다. 배우 지망생이던 이문진을. 예쁜 외모 덕에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꽤 이름난 중소 기획사에서도 관심을 보였었고, 혼자 배역을 따내기 위한 오디션을 봤었는데 반응이 좋았다며 쉴 새 없이 종알댔던 것도 기억났으니까.
“수 엔터테인먼트. 그 대형 기획사에서 입김을 넣었거든. 곧 데뷔를 앞둔 그 하찮은 배우 지망생,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하라고.”
“…뭐?”
“너무 억울하니까 나도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알아보고 수에도 찾아가 사정을 했었거든. 그러니까 돌아온 답이 뭔 줄 알아?”
웃는 입과는 다르게 범지훈을 향한 이문진의 눈빛은 서늘했다. 마치 아까의 범지훈처럼. 하지만 범지훈이랑은 다르게 이문진이 악감정을 느끼고 있는 이는 다른 이였다.
“본인 회사 연예인의 심기를 거슬렀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굉장히 무례한 짓을 저질러서 그 귀한 분의 기분이 완전히 수틀렸다고. 그래서 대체 그 귀한 분이 누군지 알려라도 달라니까 그건 어렵겠다며. 하하. 진짜 어이가 없으니까 사람이 웃음만 나오더라.”
“…….”
“형도 표정 보니까 뭔가 느끼는 게 있나 봐. 그래서 내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엉덩이 대 줘가며 겨우 알아냈는데 그게 누구였는 줄 알아?”
느릿하게 들어 올려진 범지훈의 손이 눈을 덮었다.
“백사현 그 새끼였어.”
악의가 가득한 이문진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이문진의 성격이 어떻든지 간에 배우라는 꿈 하나만큼은 그에게 진심이었다. 잠깐 만났던 범지훈도 알 수 있을 만큼이나. 오죽했으면 아버지뻘의 범호 캐피탈 임원에게도 손을 댈 정도였으니까.
든든한 스폰서가 되어 달라고. 범호 캐피탈의 횡령을 중년의 사내에게 속삭이며 대신 몸을 주었던 이문진은 사귀던 범지훈에겐 그런 요구조차 한 번 꺼낸 적이 없었다.
무른 성정의 범지훈이 거절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험한 말로 좆 돼도 범지훈보다는 차라리 아무 상관 없는 늙은 영감이 낫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나랑 아무 관계도 없던 백사현의 심기를 내가 거스를만한 게 뭐가 있나 혼자 생각해 봤는데, 연결 고리가 딱 하나 나오더라고.”
그때서야 꾸욱 감겨져 있던 범지훈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범지훈.”
이문진의 그 한마디가 테이블 위로 툭 내려앉았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조금도 가볍지 않은 말이었다.
“언론에는 팬심으로 만난 친한 형, 동생 사이라고 둘러댔지만, 그거 아니잖아. 그렇지?”
의문문이었지만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 결론을 내린 목소리였다.
“아무리 내가 형하고 좋지 않게 헤어졌다고 해도 이건 아니지 않아?”
시야를 가린 손을 내린 건 떨려 오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형은 나 봐서라도 그런 새끼랑은 만나면 안 돼.”
그때서야 범지훈은 울 것처럼 구겨진 얼굴을 간신히 펴 보려고 노력하는 이문진을 볼 수 있었다.
***
[백사현 씨?]
평소였다면 낯선 번호는 절대 받지 않겠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핸드폰 속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백사현의 시선이 하릴없이 창밖을 향했다. 운전석에 앉은 이준혁의 귀가 이쪽을 향해 쫑긋하는 게 안 봐도 그려졌다.
“네.”
[안녕하세요? Tvm 나용선 피디입니다.]
회사의 귀띔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과 괴리가 느껴질 만큼 백사현은 표정 없는 얼굴을 했다. 회사를 통해 작가들이 몇 번 연락을 취하더니 보다 못한 나용선 피디가 백사현의 직통 번호를 요구하며 직접 나선 모양이었다. 회사야 그런 나용선의 부탁을 가장한 요구를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했으니 다음은 백사현이 감당할 몫이었다.
본인 때문에 나용선의 요구를 듣고 쩔쩔맸을 치프 매니저의 얼굴이 눈에 그려지는 듯해 백사현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동안 생각해 보겠다는 걸로 며칠 시간을 끌었지만, 이것도 오늘로 마지막일 듯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백사현 씨가 필요합니다.]
“굳이 제가 아니어도 실력이 뛰어난 다른 가수 선후배님들도 많을 텐데요.”
그 말엔 이준혁의 뒷모습이 움찔움찔했다. 당장에라도 백사현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아무리 8년 차 탑 티어 인기 아이돌이라지만 방송계에서 몇십 년을 구르다, 한 방송사를 대표하는 간판 피디라는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에게 하기는 어려운 대답이었다. 굳이 위치가 아니더라도 피디의 나이를 생각해 봐도 백사현의 대답은 한참 예의가 없었다.
[백사현 씨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호통이 돌아오진 않았다.
[주환이 형 노래를 그렇게 잘 소화한 사람, 여주환 본인 말고는 백사현 씨가 저한테는 처음이었거든요.]
그 말엔 백사현의 말문이 막혔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백사현은 어렵게 한 마디를 뱉었다.
“…여주환 선배님과 친하셨나 보네요.”
[오래전부터 팬이었습니다. 백사현 씨를 보자마자 이 프로그램을 기획할 정도로요. 그래서 백사현 씨가 정말 필요합니다.]
“팬…이요.”
팬. 그 말엔 백사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가족, 그리고 범지훈을 제외한다면 백사현을 가장 흔들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가수 여주환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네요.”
[팬으로서는 어느 정도로요. 하지만 저는 가수가 아니니까 가수로서 백사현 씨가 느끼는 여주환은 어떤지도 궁금하네요. 그걸 방송으로 담아내 보고 싶습니다. 백사현 씨와는 여주환에 대한 많은 얘기를 나눠 봤으면 좋겠어요.]
“피디님.”
[네.]
“…혹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한 걸음 백사현이 다가왔다. 그걸 핸드폰 속 상대방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저 시간 정말 많습니다.’ 잽싸게 대답하는 피디에 백사현은 통화를 한 이래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오늘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
아직 돌아오지 않은 범지훈의 귀가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갑작스레 뜨인 눈에 캄캄한 방 안의 모습을 담으며 백사현은 누워 있던 몸을 움직였다.
“…지훈이 형?”
그러다 자신의 침대 가에 걸터앉아 있는 범지훈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뒤를 도는 범지훈의 어렴풋한 형체에 백사현은 의아한 눈으로 미소 지었다.
“불도 안 켜고 왜 그러고 있어요? 이제 온 거예요?”
“…응.”
단답을 하는 범지훈에 백사현의 눈썹이 조금 치켜 올라갔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도통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오늘의 범지훈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무슨 일 있어요, 형? 요즘 계속 기운 없어 보였는데.”
걱정과 다정함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며 백사현은 범지훈의 손을 잡았다. 그 말대로 요 며칠 범지훈은 평소답지 않았다. 지방 지사에 다녀온 뒤부터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도 아무것도 아니라고만 대답하니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평소였다면 백사현을 마주 잡아 주었을 손에 지금은 아무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맥없이 백사현에게 손이 잡힌 채 범지훈은 조금 시선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아, 형. 저 며칠 동안 생각했던 고민 이제 완전히 해결됐어요. 별로 안 내키던 방송에서 섭외 연락이 왔었거든요. 제작진들이 거물이라 어떻게 해야 좋게 거절하나 고민이었는데 오늘 피디님 만나고 와서 잘 해결됐어요. 그냥 출연하기로요.”
그동안 더 자세히 캐묻지도 못하고 옆에서 고민이 무엇인지 함께 걱정해 준 범지훈의 모습들이 생생히 떠오르는 듯해 백사현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그득했다. 이게 뭐라고 고민을 털어놓질 못했나 싶기도 했지만, 털어놓으면 그 고민을 함께 안을 범지훈이 눈에 선해서도 일부러 얘기하지 못했다.
“그냥 처음부터 피디님을 만나 뵐 걸 그랬나 봐요. 사실은 제가 확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마음이 편해요.”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는 백사현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쯤이면 그랬느냐며 부드럽게 맞장구를 치고 가만히 눈을 마주쳐 줄 범지훈이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제 제 고민은 해결됐으니까 형 고민에 대해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요즘 범지훈의 골머리를 썩게 했을 그게 대체 무엇인지, 백사현은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제 고민은 얘기해 주지 않았으면서 범지훈의 고민은 듣고 싶어 한다는 게 모순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백사현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물론 범지훈이 얘기해 주기 어려워한다면 더 이상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도 뒤로 몰래 알아보겠지만, 되도록이면 당사자에게서 백사현은 직접 듣고 싶었다. 다행히 범지훈도 더 이상 숨길 생각은 없는지 조금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사현아.”
“네.”
“너… 이문진이라는 사람, 혹시 알고 있어?”
“그게 누군데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처음 들어 본다는 듯 백사현은 되물었다. 백사현에게 잡힌 범지훈의 손끝이 움찔한 것도 그때였다.
“…모른다고?”
“네, 그 사람이 대체….”
“나는 거짓말을 싫어해, 사현아.”
후우. 낮은 한숨이 범지훈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런 대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백사현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 일부러 불도 켜지 않았건만. 백사현에게 잡힌 손을 빼내며 범지훈은 다시 말했다.
“이문진. 배우 지망생. 내 전 애인이었던 녀석, 정말 몰라?”
“아.”
그리고 그때야 백사현에게서 작은 탄성이 흘렀다. 범지훈은 불을 켜지 않은 게 옳았던 것인지 아닌지 이제는 구별할 수가 없어졌다.
“…그 사람, 혹시 만났어요?”
마치 이문진이라는 이름만으로는 누군지 기억도 전혀 안 났다는 듯한 태도라서, 만났냐고 물어보는 목소리에 어쩐지 성가심이 가득한 것 같아서 범지훈은 그런 백사현이 낯설어졌다.
“만났냐고 물어보는 거야, 지금?”
“네.”
불을 켜지 않아 다행이었다. 실제로 어둠 속에서 백사현의 미간은 구겨져 버렸으니까. 덕분에 범지훈에게 이런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나저나 그 성가신 새끼, 서울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중얼대며 백사현은 다시 범지훈의 손을 잡았다.
“형,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니에요, 과장된….”
“거짓말 싫어한다고 말했잖아.”
백사현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과 함께 손아귀에선 범지훈의 손이 거칠게 빠져나갔다. 백사현은 멍해지고 말았다. 범지훈이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화를 냈다.
“…형?”
“이런 거 물어보는 것도 널 의심하는 것 같아서 따로 알아봤었어. 이문진 말대로 네가 정말 그 녀석을 배역에서 떨어뜨리고 소속사에서도 쫓겨나게 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 그런데….”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는 범지훈의 형체가 보였다.
“수 엔터테인먼트 관계자와 만나고 난 직후에 감독이 이문진이 맡은 배역을 수 엔터 소속 다른 배우한테 넘겼던 정황이 있었어.”
“…….”
“그리고 수 엔터 관계자가 이문진의 소속사 대표하고도 따로 만났더라. 넌 이게 뭘 의미한다고 생각해?”
미칠 것 같았다. 범지훈은 속에서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간신히 억눌렀다. 카페에서 범지훈을 올려다보며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던 이문진에게 자신은 뭐라고 했던가.
[증거도 없이 그딴 걸 믿으라고?]
뻗어진 손은 이문진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그 모습에 주변의 테이블에서 놀란 손님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실이야. 그 새끼, 완전 씨발 새끼라고. 나도 성격 좋은 건 아니라지만 그 새끼는 더 악독해. 형이 싫어할 법한 짓만 해 대는 비열한 새끼란 말이야.]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범지훈의 험악한 모습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문진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것에 멱살을 쥔 범지훈의 손등에 핏줄만 더 불거져갔다.
[형 지금 이러는 거 그 새끼랑 있으면서 닮아 가는 거 아니야?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제발, 더 이상해지기 전에 그 새끼랑 헤어져. 나랑 다시 잘 안 돼도 좋아. 나 착한 형 옆에 그런 새끼 있는 거 더는 못 보겠어.]
팍. 내던지듯 멱살을 놓으며 범지훈은 허리를 폈다. 범지훈의 흉흉한 분위기와 외모에 말리려 달려 나왔지만, 겁에 질려 멀찌감치서 보고 있던 남녀 아르바이트생과 수군대던 손님들의 말소리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사실이 아니면 그땐 죽인다, 이문진.]
그 말엔 모두의 숨이 멈췄다. 옷에 졸려진 목을 매만지던 이문진의 얼굴빛도 조금 희게 질렸다. 화가 난 범지훈은 이를 드러낸 맹수 그 자체였다.
“나는 네가 왜 이문진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어. 이문진과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었던 건가?”
차라리 그러길 바랐다. 고작 범지훈 하나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게 믿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그 이유 때문이었다면, 이런 짓은 아니었다. 범법 행위는 아니라지만, 상식적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힘 있고 배경이 있다고 자신보다 없고 약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건 범지훈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짓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종종 보아 왔고 그런 사람들에게 당하던 약한 사람들을 직접 도와준 적도 있기에 더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라지만 이건-
“이미 다 알고 왔으면서,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거예요?”
그리고 처음 들어 보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둠 속, 백사현일 것이 분명한 형체를 바라보며 범지훈의 눈이 조금 커졌다.
“내가 이문진에게 사과라도 하길 바라는 거예요?”
“백사현.”
말을 놓고 난 후로는 단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던 백사현 이름 석 자는 이상하게 냉정한 느낌이었다. 연인 사이에서 부르기에는 너무 할 만큼이나. 뱉어낸 범지훈 스스로도 본인의 목소리에 놀라 멈칫할 정도였다.
“…우리, 여기서 더 얘기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백사현이 말했다.
“미안한데 나가 줘요, 지금 형이랑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역시 불을 켰어야 했을까.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서로가 대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게 더 골을 깊게 만든 것 같아 범지훈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그날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 맹수의 사랑법 > 3권에서 계속
[우리깜디] 맹수의 사랑법 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