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epiphany (2)
달그락. 수저에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의미 없이 들렸다. TV도 켜지 않아 쥐 죽은 듯 적막한 부엌에서 범지훈은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원래였다면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로 방에서 비척비척 걸어 나온 백사현이 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을 터였다. 들어가서 더 자도 된다고 했지만, 백사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요지부동이었다. 범지훈과 동거를 시작한 처음 며칠간만 늦잠을 잤지 백사현은 자신보다 이르게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 범지훈의 아침 식사 자리에는 늘 같이 있으려 했다. 그러고는 범지훈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벼운 음료를 함께 홀짝이곤 했다. 아예 아침 자체를 먹지 않음에도 그랬다. 그러니 지금도 머그 컵을 든 백사현이 맞은편에 앉아 있어야 하건만 범지훈의 기척 외엔 집안은 지나칠 만큼 조용했다.
결국 수저를 내려놓은 범지훈은 풀떼기뿐인 식사임에도 절반이 넘게 남기고 말았다. 예전에는 늘 이렇게 혼자 식사를 해도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이제 혼자 하는 식사는 지나치게 맛이 없어졌다. 잠시 침묵하던 범지훈의 시선은 식탁 위에 올려진 쪽지에 닿았다. 백사현의 방문 앞에 보란 듯이 붙여져 있던 쪽지.
[컴백준비 때문에 며칠 집에 못 들어와요. 새벽부터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나가요.]
부드러운 선의 예쁜 외모와는 잘 매치가 되지 않는 백사현의 특유의 날카로운 필기체.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에서 떼어 와 식탁까지 가져오고 말았다.
확실히 멤버인 김영희가 입대하기 전 에스의 단체 컴백이 한 번 있다고 듣기는 했었다. 솔로 활동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연이어 잡힌 컴백 스케줄에 범지훈은 제 연인의 건강이 염려되긴 했지만 8년 차 프로 아이돌 짬밥은 어디 가지 않았다. 백사현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스케줄을 위한 몸 관리에 들어갔다. 원래도 달고 살던 물을 더 자주 마시고 이미 완성된 실력임에도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러 틈만 나면 나갔다 들어왔다.
그에 범지훈은 집안에 방음 부스를 설치할까도 고민했다. 그것에 백사현이 이미 제집에 설치되어 있다고 손사래를 쳐서 결국은 생각에서만 그칠 수밖에 없었다. 범지훈은 그때 꽤 아쉬워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너무 완벽한 핑곗거리에 범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피하기보단 차라리 부딪쳐 오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연하의 연인은 제게 상처를 주길 누구보다 꺼리는 모양이었다. 뭐, 그런 사람에게 화가 나 멋대로 부딪쳐 상처를 준 범지훈도 남 말할 처지는 되지 못했다.
***
[조금 더 부드럽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속삭이듯이 그렇게 해 보라니까, 사현아?]
녹음실 내로 조언을 해 주는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개를 끄덕인 백사현이 다시 마이크에 입술을 붙이고 노래를 이어 갔으나 프로듀서는 결국 MR을 꺼 버리고는 마이크를 통해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사현이는 오늘 여기까지만 하고, 달수랑 루나 들어와서 랩 파트 마저 하자.]
“…저 형, 아무리 봐도 싸운 것 같은데?”
프로듀서의 뒤에 앉아 유리창 너머 녹음 준비에 한창이었던 백사현을 훔쳐보며 이루나가 속삭였다. 마찬가지로 빤히 백사현을 관찰하던 박달수도 동감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랑 싸워?”
“누구긴 누구야, 범지훈이겠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곽복동이 물어 오자마자 무심한 듯 시크하게 김영희가 대꾸했다. 헤드셋을 끼고 작업에 열중하는 프로듀서를 흘끔 바라본 이루나가 김영희의 옆구리를 톡 쳤다. 짜증 가득한 눈으로 이루나를 보던 김영희가 투덜거렸다.
“안 들려. 나도 광고할 생각 없고.”
“어쩐지. 계속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 형이 오늘따라 찬바람만 불었던 게.”
“사랑싸움한 거지.”
곽복동이 입을 틀어막고 놀라는 것에 뒤이어 이루나가 덧붙였다. 유리창 너머 헤드셋을 머리에서 벗겨 낸 백사현이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는 것에 빤히 시선을 주던 박달수가 말했다.
“잘못은 저 형이 먼저 한 것 같고.”
“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왜 우리 형이 잘못해?”
“달수 너 누구 편이야? 멤버인데 사현이 형 편을 들어야지.”
“잘못을 해도 절대 안 들킬 형인데 어떻게 싸워?”
차례로 루나, 복동, 영희의 대꾸가 이어졌다. 특히 마지막 영희의 대답에 모든 멤버가 동의한다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곽복동만이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지만, 어쨌든 멤버들은 뱀처럼 교활한 저 인간이라면 잘못을 저질러도 절대 일을 허투루 처리하지 않을 테니 들키지도 않았을 거고 싸움이 일어날 일도 애초에 없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무튼, 둘이 대체 뭐 때문에 싸운 건지….”
“누가 싸워?”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모두의 숨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네 멤버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본 곳엔 역시나 녹음실에서 방금 나온 백사현이 서 있었다.
“으응…?”
“누가 싸웠냐고.”
눈치 빠른 백사현을 속이느니 귀신을 속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냥 쳐다보는 시선인데도 어쩐지 살기가 느껴지는 듯해 멤버들의 손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 내 동생 알지? 동생이 남자 친구랑 싸웠대서 멤버들에게 같은 남자 입장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물어보느라고, 형.”
그리고 구세주처럼 곽복동이 입을 열었다. 무해한 웃음을 입가에 걸고 태평하게 받아치는 곽복동에 놀란 세 멤버의 시선이 닿았고 백사현은.
“그래? 아무튼 달수랑 루나 안 들어가?”
비어 있는 녹음실 안을 눈짓하며 아무렇지 않게 반응했다. ‘어, 어! 가야지!’ 후다닥 이루나가 대꾸하며 박달수의 손을 잡고 일어섰고 백사현을 지나쳐 문이 열린 녹음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러나 이어지는 말엔 거짓말처럼 모두의 움직임이 멈췄다.
“너희는 초등학교 4학년 연애사에도 원래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해 주나 봐?”
예쁜 얼굴에 꼭 어울릴 법한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백사현이 되물었다. 그러니 아직도 금실이 좋은 부모님 덕분에 거의 딸뻘의 늦둥이 여동생을 가지게 된 곽복동이나 남은 세 멤버나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며 식은땀만 비 오듯이 흘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백사현을 속이느니 차라리 귀신을 속이는 게 더 가능성이 있었다.
***
“그러고 보니 여주환 씨는 미혼이라고 대부분 알고 있지 않나요?”
한 작가의 이야기에 프로그램 기획안을 검토 중이던 회의실 내 모두의 시선이 들어 올려졌다. 그건 마찬가지로 기획안을 보던 백사현이나 그의 매니저인 이준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Tvm의 한 대회의실. 나용선 피디의 부름에 백사현은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와 전반적인 흐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고정 출연자로서 의견을 나누기 위해 이곳에 도착했다. 백사현처럼 다른 고정 출연자들도 얼추 정해진 듯 보였고 고정 출연자들 또한 제작진과 1:1로 회의를 거칠 모양인 듯했다. 어쨌든 이준혁 외엔 제작진들밖에 없는 공간에서 기획안을 들여다보던 백사현은 고정 출연자라는 대목에서 출연자들의 이름을 읽어 내려가려던 시선을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현 씨가 축가로 불렀던 <아름다운 당신에게>라는 노래는 꼭 옆에 있어 준 연인에게 마음을 고백하러 가는 것 같단 말이에요. 가사부터가 그렇잖아요? ‘갈게요. 아름다운 당신에게.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할게요. 아름다운 당신이.’ 이 부분이 특히 그런데, 이게 90년에 발매된 노래란 거죠.”
“그렇죠. 근데 그게 왜요?”
나용선 피디 대신 다른 피디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혼인 신고도 하기 전에 비밀리에 낳은 친아들인 여사빈 씨가 86년생인데 아내분에게 바치는 노래라기엔 발매 시기가 너무 늦잖아요? 아들이 태어나고도 4년 후에 낸 노래인데.”
“그럴 수도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여주환 씨가 그 전에 이렇게 직접적인 사랑 노래를 낸 적이 없어요. 밤하늘이나 시냇물같이 예쁜 무언가에 빗대서 사랑 노래는 불렀지만, 이건 너무할 만큼 직접적이잖아요. ‘당신’이라는 청자도 직접적으로 등장하고요. 이 노래를 마지막으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도 하셨고. 저는 여기에 뭔가 있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기획안에도 제가 따로 이 부분 추가해 놨는데….”
작가가 회의실 벽면의 스크린에 떠 있던 기획안을 내리며 열심히 설명을 이어 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곳에 박혔고 백사현 또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이 노래만큼은 도전자들이 아닌 사현 씨가 직접 무대를 꾸미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우연의 일치지만, 사현 씨 생일이랑 노래 발매일도 똑같거든요.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고요.”
2월 4일. 보통의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 끝나고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라고들 알고 있겠지만, 1990년도인 이날은 <아름다운 당신에게>가 처음 세상에 선보여졌으며 백사현이라는 사람이 법적으로 출생 신고를 마친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출연자분들은 몰라도 저희 <여.주.환>에 사현 씨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출연자시거든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작가가 말하는 여.주.환. <‘여’러분의 ‘주’홍빛 ‘환’상>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명이었다. 처음의 가제는 <아름다운 당신에게>였던 것 같은데 공식 명칭이 이걸로 결정이 난 모양이었다. 우선은 짧은 회차로 단기 방송될 프로그램이지만, 프로그램명도 여주환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만큼 아티스트인 여주환에 대한 모든 것을 확실히 조명할 예정이라고 했다.
“물론 사현 씨의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면 되세요. 이건 저희 측 생각이고 같은 가수로서 어떤 게 더 나을지에 대한 건 전적으로 사현 씨 의견을 존중할 겁니다. 그때 만나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오로지 백사현 씨 하나만 보고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니까요.”
내내 듣고만 있던 나용선 피디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기획안을 읽어 내려가는 백사현 때문이었다. 출연이 확실히 결정된 만큼 번복하지는 않겠지만 백사현을 섭외하기 위해 팀 내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던 걸 생각하면 제작진들의 불안한 시선이 백사현만을 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는 좋습니다, 피디님. <아름다운 당신에게>도 작가님 말씀대로 제가 무대를 꾸미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그러면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내용을 더 추가하면 어떨까 의견을 내고 싶은데요.”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기획안에서 시선을 들어 올린 백사현에 조금 경직되어 있던 회의실 공기도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렇게 회의는 좋은 분위기로 무르익어 갔다.
모두의 의견이 합의점을 찾고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불투명한 회의실 문 너머 한 인영이 멈춰 섰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하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것도 당연했다.
“아, 이사님!”
반갑게 맞이하는 작가의 목소리에 문을 연 이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아직 회의 중이셨나 봐요.”
“아니에요, 이제 다 끝났습니다. 시간 맞춰 잘 오셨어요. 아, 사현 씨는 오늘 처음 뵙죠? 이분은….”
“여사빈 이사님이시죠? 뵌 적 있습니다.”
그리고 문 앞에 선 여사빈을 바라보던 백사현 또한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머? 어디서요?’ 깜짝 놀라 되물어 보는 작가의 말에 대답은 이준혁이 대신했다. ‘진짜 이것도 인연이네요~!’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들로 시끌시끌한 가운데 여사빈의 시선은 꽤 오래 백사현을 향해 머물렀다.
물론 그건 백사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획안 속 고정 출연자 목록에는 백사현이란 이름 아래 여사빈이란 이름 또한 분명히 적혀 있었으니까. 대형 기획사 PS 엔터테인먼트 소속이자 백사현의 그룹 에스와 투 탑인 보이 그룹 피스톨을 키워 세상에 선보인 프로듀서 여사빈.
에스와는 2년의 데뷔 차이가 났지만 에스가 3집 타이틀곡으로 한창 승승장구를 할 무렵, 피스톨은 데뷔 곡으로 이미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었다. 물론 에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떤 앨범을 내도 타이틀 곡과 컨셉을 기가 막히게 잘 뽑는다는 게 피스톨이라는 그룹의 가장 큰 이점이었다. 그 덕에 에스보다 짧은 연차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에스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게 된 피스톨은 1군 아이돌이라고 하면 에스와 함께 언제나 손꼽히는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잠시간 여사빈과 시선을 마주하던 백사현이 제작진들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차를 가져오기 위해 이준혁이 앞장서 빠져나가고 뒤를 이어 백사현이 여사빈을 지나쳐 가는 순간이었다.
탁. 부지불식간에 백사현의 손목이 붙잡혔다.
“왜 그러시죠?”
눈매를 접어 내라며 백사현이 물었다. 여사빈 또한 친절을 가장한 미소를 지었다.
“백사현 씨께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는데 이렇게 만난 김에 오늘 시간 괜찮으실까 해서요.”
“어떡하죠?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오늘은 스케줄이 풀이라 어렵겠네요.”
제안과 거절은 물 흐르듯 이어졌다. 그때까지 손목을 놓지 않고 있던 여사빈의 손을 얼핏 부드럽게 백사현이 밀어낸 것과 동시였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여사빈에게 마저 인사를 마치고 백사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사현이 너 표정이 왜 그래?”
주차장에 도착해 밴에 올라탄 백사현의 얼굴을 보며 이준혁은 당황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형, 혹시 담배 있어?”
“며칠 전에 영희가 맡겼던 담배가 있긴 한데, 설마 너 담배 펴?”
“짜증 나면 한 번씩 펴. 김영희도 가끔 쓸모 있을 데가 있네. 하나만 줄 수 있어?”
사람이 북적북적한 1층 흡연 부스 외에도 Tvm 본사 건물 옥상에도 흡연 구역이 있다는 반가운 소리를 들었다. 이준혁을 떼어 놓고 번거롭게 고층 옥상까지 홀로 올라왔던 백사현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옥상의 탁 트인 풍경에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서늘하지만 또 시원하기도 한 미풍에 검게 염색한 앞머리가 살랑이는 걸 느끼며 백사현은 아무도 없는 흡연 공간임에도 난간 가까이에 다가갔다.
“…담배 피우는 줄 몰랐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 건 그때였다.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백사현이 한숨처럼 연기를 흩날렸다.
“말 놓으라고 한 적도 없는데.”
짧은 상대의 말처럼 백사현의 말꼬리도 똑같이 짧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사현의 옆자리에 멈춰 선 남자는 지포 라이터를 꺼내 똑같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가까이 붙지 말지.”
“너 되게 싸가지 없구나. 범지훈도 이런 성격 알아?”
웃음기 서린 여사빈의 말에 백사현은 대답 대신 담배를 마저 빨아들였다. 아까와 비교하면 현저히 짧아진 꽁초를 이내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짓이겨 버린 백사현이 미련 없이 뒤를 도는 것과 여사빈의 손이 뻗어진 것도 동시였다.
아까와는 다르게 더러운 것이라도 피하듯 여사빈의 손을 피한 백사현의 사나운 시선이 여사빈을 향했다.
“넌 허락도 없이 사람 건드려 대는 걸 좋아하나 봐?”
“하.”
여사빈에게서 헛웃음이 흘러나온 것도 그때였다. 그때쯤엔 가면을 쓰고 있기라도 하듯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던 여사빈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너라니.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형?”
백사현을 바라보던 여사빈의 눈이 일순 커졌다.
“형이라고?”
“너….”
“네가 왜 내 형이야?”
이런 반응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아니, 예상조차 못 했다. 당혹스러움에 여사빈은 반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났다. 형이라는 말에 자존심을 세워 신경질을 낸다거나 하다못해 당황하는 등의 일반적인 반응들을 예상했었다.
저렇듯 절절 끓는 분노를 간신히 씹어 삼킨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이복동생. 여사빈에겐 처음부터 탐탁지 않은 단어였다. 아버지의 외모와 직업 등을 생각한다면 다른 여자가 있을 거라고 어릴 때부터 어렴풋하게 예상은 해 왔었다. 친구들에겐 대부분 당연한 듯이 있던 아버지의 존재가 여사빈에겐 평생토록 부재였으니까. 어린 생각에도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들이 여사빈에겐 먼 나라 일이 아니었다. 주인공들은 여사빈처럼 처음부터 부모 중 하나가 없거나 존재를 몰랐으니까. 여사빈의 머리가 커졌을 무렵부터 아버지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어머니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는 여사빈이 태어나던 날까지의 이야기도 꺼내 놓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지만 중간중간 어머니의 목이 메는 걸 눈치 못 챌 만큼 여사빈은 둔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앞에서는 부러 둔한 척을 했다.
‘아버지’란 단어는 그 뒤로 어머니와 여사빈에겐 암묵적인 금기어가 되었다. 아니, 할아버지를 포함해 집안 전체에서 그 이름은 거의 금기어가 되었다.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아버지의 이름을 그 누구 하나 입에 올리지 않았으니까. ‘여주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그래도 혈육이 뭐라고 얼굴 한번 실제로 본 적 없음에도 그리움은 속에서 켜켜이 쌓여 갔다. 하지만 세월이란 모진 비바람에 제멋대로 깎이고 굳어져 처음의 모양을 유추하긴 어려웠다.
이복동생이 있다는 걸 어릴 적에 알게 되었다면 지금이랑은 느끼는 바가 달랐을까? 서른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놓여 이미 세상의 온갖 때와 더러움을 묻혀 놓고 나니 이복동생이라는 단어는 더는 달갑지 않았다. 이복동생도 그 동생을 낳은 여자도 그들은 그냥저냥 살아오다 로또라도 맞은 듯 벼락 행운을 마주하고 환희하고 있을 누군가들이었다. 머릿속엔 독사파가 소유한 토지와 집, 자산들과 PS 엔터테인먼트라는 거대 회사를 보며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 침을 질질 흘리고 기다리는 추접스러운 여자와 아이가 있었다. 여사빈의 인상이 굳어졌다.
백서경. 그 이름을 들었을 때에도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매체에서 자주 떠들어 대던 탑 연예인과 동명이인인가 보네. 그렇게 생각했다. 그 여자가 정말 탑 배우 백서경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제서야 여사빈은 만성 수면 장애가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사빈에겐 사랑하는 어머니였지만, 어머니 아니, ‘금송화’라는 사람으로 놓고 보자면 ‘백서경’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지는 싸움이었다.
시아버지에게도 수면 장애를 극구 숨기려 하고 본인 방의 위치와 방음에 그토록 신경 쓰며 여사빈뿐만이 아닌 집안 식구 그 누구에게도 어머니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대단한 백서경이 낳은 자식이 백사현이었다. 여주환의 아들도, 백서경의 아들도 아닌 그냥 가수 백사현. 그 누구의 후광도 없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그 자리에 우뚝 선 백사현.
집안의 도움으로 또, 아무것도 없던 맨땅에 기반을 다져 엔터테인먼트를 운영 중이던 고모에게 숟가락을 얹은 여사빈과는 출발부터가 달랐다. 동생임에도 불쑥 치솟는 열등감에 여사빈은 입술을 씹었다.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백서경과 백사현은 여사빈의 자리에서 떨어질 콩고물에 침을 질질 흘리기에는 이미 가진 것들이 많았고 그건 충분하다 못 해 차고 넘쳤다.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여사빈이 결심한 건 그 때문이었다.
대외적으로 드러난 여주환의 유일한 친자식이라는 그 얄팍한 끈. 지금까지 독사파 쪽에 연락 한번, 모습 한번 드러내지 않았던 백서경과 백사현 모자라면 독사파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몰랐을 수도 있었다. 만약 알고 있었더라도 어쩌면 가진 게 많기에 굳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걸 수도 있었고. 그러나 후자는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다. 어쨌든 간에 여사빈은 피가 섞인 이복동생의 존재가 달갑진 않아도 궁금하긴 했다. 이렇게나 예의가 없을 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욱하는 마음 반, 속을 떠볼 생각 반으로 던진 한마디는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네가… 네가 왜, 내 형이냐고…!”
조금씩 커지는 목소리는 끝내 절규하듯 매듭지어졌다. 눈물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어마어마한 분노에 눈가가 붉어진 백사현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한 발자국 뒤로 더 물러나기도 전에 여사빈은 부지불식간에 멱살이 잡혔다.
“나한테 형 노릇을 바래…?!”
‘감히?’ 백사현은 그 단어를 뒤에 덧붙였다. 감히. 멱살이 잡힌 여사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감히라니. 백사현은 제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지 못했다. 아무리 자신을 가진 걸 몰랐다지만 어머니를 두고 다른 여자를 만난 아버지. 뒤늦게서야 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백사현. 불륜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사빈의 분노가 터진 것도 그때쯤이었다.
퍽. 분노에 쥐어진 주먹은 백사현의 복부를 가격했다. 얼굴을 치지 않은 건 백사현의 직업이 연예인이라는 가느다란 이성 때문이었다. 폭력을 썼다는 약간의 죄책감은 뒤따라왔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빠악. 백사현의 주먹이 곧장 여사빈의 얼굴을 쳤기 때문이었다. 큰 타격음과 함께 돌아간 고개로 여사빈은 피 맛이 느껴지는 걸 깨달았다.
“…하, 하.”
뒤로 휘청인 몸과 함께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퉤. 입안에 고인 비릿한 피 맛을 그대로 뱉어낸 여사빈은 입술 끝을 매만졌다. 쓰라려 오는 게 기분이 더러워졌다.
“개새끼가.”
낮은 읊조림과 함께 고개를 들어 올린 여사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작정하고 휘두른 주먹은 백사현을 향했다. 보자마자 피하려는 백사현의 배에 그 순간 다리를 꽂아 넣은 건 의도대로였다. 주먹도 아니고 성인 남성의 다리에 배가 차인 백사현의 허리가 숙여졌다. 쿨럭. 묵직한 기침과 함께 백사현은 도통 허리를 펴지 못했다.
그런 백사현의 멱살을 잡고 반반한 낯짝에 주먹을 꽂으려던 여사빈이 윽 소리와 함께 코를 감싸 쥐며 주춤했다. 순식간에 머리로 얼굴을 들이박은 백사현 때문이었다. 비릿한 피가 콧속까지 느껴지며 여사빈의 손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똑같이 주고받았는데 피는 여사빈만 봤다. 그것에 여사빈의 눈이 완전히 돌았다.
“씨발.”
하지만 그건 욕을 짓씹는 백사현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분노에 완전히 맛이 간 눈으로 여사빈을 노려보는 백사현과 여사빈의 손이 얽혔다. 큰 소리를 내며 두 남자가 바닥에 쓰러지고 주먹이 몇 차례나 오고 갔다. 더 이상의 절도도 순서도 없는 말 그대로 개싸움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옥상의 문이 열리며 담배를 피우기 위해 고개를 내민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둘 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주먹다짐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날 Tvm 방송국 내엔 유명 아이돌 가수 백사현과 대형 기획사인 PS 엔터 이사 여사빈의 싸움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에 대해 추측들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고 갔다.
그 소란처럼 이준혁을 통해 범지훈 또한 연락을 받았다. 연락을 받자마자 하던 업무도 내팽개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범지훈을 말리기 위해 우정선은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이준혁을 통해 듣게 된 백사현의 싸움 상대에 본인이 먼저 차 키를 챙기고 앞장섰다.
***
“…사빈이가 그 아이와?”
노을빛이 비쳐 들어오는 고즈넉한 방 안에서 정갈하게 난을 닦던 노인의 손이 멈칫했다. 독사파의 머리이자 여사빈의 친할아버지인 여재룡이었다. 노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독사파의 수족은 조금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빈이 놈, 치료받고 나면 바로 집으로 오게 하거라. 곧장 내 방으로 건너오게 해.”
“네.”
쯧쯔. 혀를 차는 여재룡의 주름진 이마가 더욱 구겨졌다. 한심한 녀석. 중얼대는 목소리에는 못마땅함도 가득했다.
“이 일은 송화가 모르게 비밀에 부치도록 하고.”
뒤이어지는 말엔 수족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을 할 때엔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이건 여재룡만의 제 며늘아기에 대한 배려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노인의 형형한 눈동자가 이내 수족을 향했다.
“서경이에게는 연락 넣어 자리 한번 만들자고 해라.”
여재룡과 이야기가 끝난 후, 방을 빠져나온 수족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뒤돌아 갔다. 그런 수족의 앞을 누군가가 가로막은 건 그때였다.
“할아버지가 뭐라셔?”
“…작은 도련님.”
그 호칭엔 앞을 가로막았던 남자의 미간이 알게 모르게 구겨졌다가 금세 펴졌다. 누구는 ‘도련님’이고 누구는 ‘작은’도련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남자는 옛날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거기다 여사빈과 동갑이기도 한 남자는 고작 6개월의 생일 차이로 여사빈을 꼭 형이라 불러야 하냐며 어릴 적부터 고까워했다.
“걱정 마. 어디 가서 얘기 안 해. 그리고 안에서 하는 얘기 다 들리더라.”
더 자세히 묻고 싶어서. 뒷말을 잇는 남자가 미소 지었다. 마찬가지로 독사의 품에서 자란 남자는 뱀처럼 교활했다. 자신이 들어오며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아 얘기가 새어 나갔나 싶어 혼자 찔끔한 수족은 닫힌 여재룡의 방문을 흘끔거리다 남자가 물어 오는 말에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아, 작은외숙모랑 자리를 마련하시려는 거구나. 외숙모가 아시면 속 좀 상하시겠네.”
작은외숙모.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된 백서경의 존재를 남자는 그렇게 정리했다. 거기에 더해 여사빈의 어머니인 금송화를 염려하는 척 재미있어했다.
“그런데 작은외숙모 아들 이름이 뭐라고?”
“그게….”
“왜~. 처음으로 알게 된 내 사촌이라는데 이름 정도는 알아 둬도 되잖아. 응?”
“…백사현 도련님입니다.”
“백사현? 여사현이 아니라? 설마, 엄마 성을 따른 거야?”
“네.”
얘기를 마치고 꾸벅 인사를 한 수족이 멀어져 간 뒤 혼자 남아 있던 남자 또한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남자의 입가엔 어느새 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든 남자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사혁아. 뭐 해? 누구긴? 나지, 사윤이 형.”
이사윤. 남자는 여사빈의 고모가 낳은 첫째 아들이자 여사빈의 사촌이었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좋으니까 우리 사혁이 싸가지없는 것도 너그럽게 이해해 줄게.”
여전히 웃는 낯을 지우지 않으며 버릇없는 제 유일한 남동생 이사혁에게 이사윤은 말을 이었다.
“꽤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는데, 조만간 우리랑 비슷한 처지의 사촌이 하나 더 생길 것 같아서.”
이사윤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같은 나이지만 고작 6개월이라는 생일 차이로 서열이 밀려나고, 아들의 자식이 아닌 딸의 자식이라 성씨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누구에게 모든 걸 물려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오늘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생긴 또 다른 사촌의 존재가 이사윤으로서는 달가울 리가 없었다.
“지 엄마 성을 따랐나 봐. 백씨라던데. 재밌지 않아?”
그런데 이제 보니 여사빈과 비슷한 게 아닌 자신들과 꽤 닮은 사촌이었다. 이사윤은 새로 생긴 제 사촌이 지금은 꽤나 기꺼워졌다.
“언제 우리끼리 자리 마련해야지. 사혁이 너도 시간 좀 내 봐.”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집어넣는 이사윤에게서 여전히 미소는 떠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웃는 그의 미소는 지금 보니 꼭 뱀과 닮아 있었다.
***
여섯 살. 그 나이는 사현의 인생에서 가장 가파른 굴곡이었다. 그래서 어느 나이보다도 기억에 남았고 선명했다. ‘그 사건’을 겪고 난 후, 할머니와 크게 사이가 틀어진 모친이 사현의 양육에 자신의 모든 걸 온전히 쏟아붓기로 마음먹었기도 한 때였다.
아동 심리 상담소, 심리 치료, 심리 상담 등등. 모친이 사현의 손을 잡고 좋다는 곳을 찾아 치료하러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모친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텅 비어 있던 사현의 눈에 조금이나마 빛이 들어오고 희미하지만 사현은 몸짓으로 의사 표현을 이따금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현의 함묵증 (*말을 할 수 있음에도 심리적인 이유로 특정한 장소, 조건이나 상황에서 말을 하지 않거나 극히 제한된 단어만을 사용하는 증상) 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모친은 기다려 주었다. 절대 다그치거나 사현의 앞에서 힘든 내색 한번 보이지 않고 언제나 사현을 향해 다정히 웃어 보였다. 그럼 사현은 그런 모친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그것만으로도 모친은 더욱 환히 웃었다.
그런데 내색을 하지 않더라도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날은 볕이 유난히도 잘 들던 기분 좋은 오후였다. 낮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사현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모친의 목소리를 들었다.
[…꼭 갚겠습니다. 오랜만에 연락해 또 이런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평소의 쾌활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바닥을 기는 듯 어두워진 모친의 음성. 처음 들어 보는 그 목소리에 졸음이 가득하던 사현의 눈이 점차 말똥해지기 시작했다.
[…네, 사현이는 나아지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정도로요. 회장님 덕분입니다. 저번에 보내 주신 사현이 치료비도 요긴하게 썼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훌쩍. 코를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깜빡깜빡 눈을 감았다가 뜨며 천장에 붙은 야광 별 스티커를 멍하니 바라보던 사현은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회장님 아니면 누가 저한테 익명으로 돈을 보내나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울고 있었다. 사현에게는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제가 꼭, 갚겠습니다. 여태 도움 주신 것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자까지 쳐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갚겠습니다.]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지만 우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는 태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 당장 이자를 갚기는 어려운데, 원하시는 게 따로 있으신지요?]
[…….]
[사현이가 점심 먹고 1시쯤이면 항상 낮잠을 자서 한 시간 정도 후에 일어나는데 그 시간 사이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아직 아이 상태도 그렇고 저 외의 낯선 사람을 함부로 만나게 하긴 조심스러워서요. 회장님도… 몰래 보고 가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몇 번 더 이야기를 나누다 통화를 끝낸 모친이 방으로 들어올 때쯤 사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쩐지 지금은 깨어나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였다. 여전히 볕이 잘 드는 기분 좋은 오후에 사현은 눈을 떴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친의 목소리에 다른 낯선 목소리가 섞여 들려와 사현은 감기던 눈을 다시 뜰 수밖에 없었다.
[고생이 많겠구나.]
[…아닙니다.]
[안 그래도 힘들 너한테 싫은 소리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제라도 양육비 정도는 받아 보는 게 어떻겠느냐? 매번 이 늙은이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도 얼마나 어려운지 다 안다. 주환이 그 한심한 놈이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십 원 한 장 주지 않았겠지만 그게 아니잖으냐. 여자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어떻게 키우려고.]
[염려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주환 씨 그렇게 되고 사현이는 온전히 제 자식으로만 키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더 이상 회장님 댁에 폐를 끼칠 수도 없고 빌려주신 돈은 나중에 제가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쯧쯧. 아들놈이고 또 하나 더 있는 며느리고 어찌 다들 이리 똥고집인지.]
[…며느님이랑 손주분은 잘 있나요?]
그 말에는 잠깐 침묵이 일었다.
[그래, 내 며느리랑 손주는 송화랑 사빈이 하나뿐이지.]
[네. 회장님께서 하신 말씀 저도 계속 지킬 생각입니다.]
[…인제 와서 후회가 되는구나. 그때 너에게 그리 모질게 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회장님으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는걸요. 저도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모두에게도 훨씬 나았던 것 같습니다.]
다시 침묵이 이어져 사현은 이불 속에 들어가 있던 손가락을 괜스레 꼼질거렸다. 이제 그만 일어난 척을 해야 할까?
[사현이가 내 손주라고 알리진 못해도 내 핏줄이란 사실은 잊지 않을 거다. 서경이 네 아이라도 내 아들놈의 아이기도 해. 그 아이가 살면서 다시 어려움에 부딪친다면 이 못난 할애비도 있다고 얘기는 해 줬으면 하는구나. 내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되는 법이니.]
전부 다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 편. 내 할아버지. 사현은 그날 처음으로 할머니와 엄마 외에도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엄마 닮아 연기도 잘하는 줄 알았더니 노래도 잘하는구나.]
유괴는 할머니와 모친이 번갈아 가며 옆에 끼고 다녀도 시시각각 사현을 위협했다. 경찰을 부른 적도 마음을 졸인 적도 여러 번, 결국 최후의 방법은 대놓고 세상에 사현을 알리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예쁜 사현의 외모에 모친을 통해 키즈 모델을 시켜 볼 마음은 없느냐 아역 배우를 해도 좋겠다, 등등의 별의별 제의가 쏟아지던 때였다. 결국, 주변 사람들의 바람대로 키즈 모델로 데뷔를 한 사현은 물 흐르듯 아역 배우로까지 진출했다.
사현의 곁에는 이제 모친과 할머니 외에도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 스태프 등의 많은 사람이 붙게 되었다. 얼굴이 알려지니 자연히 유괴의 위협도 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또래 아이들치고는 나쁘지 않은 연기로 첫 아역 데뷔를 무사히 마친 뒤의 사현은 특유의 예쁜 마스크로 여기저기서 러브 콜들이 잔뜩 쏟아졌다.
연기는 점점 더 물이 올랐고 사현은 승승장구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성인이 되어도 배우로 활동하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와중, 모친보다 더 자주 사현의 옆에 붙어 다녔던 할머니는 사현에게 또 다른 길을 알려 주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뭐든 잘할꼬? 우리 강아지는 가수가 돼도 대성하겠어.]
가수. 할머니의 앞에서 별생각 없이 흥얼거린 노래 하나로 사현은 그 직업에 처음으로 흥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가수의 길은 배우인 모친의 도움으로 편히 갔었던 이 자리와는 결이 달랐다.
아역 배우라는 원래의 타이틀이 가지고 있는 힘은 꽤나 커서 누구든 사현을 눈여겨보게 하긴 했지만, 가수는 어디까지나 실력이었다. 뭐, 사현 정도의 스펙이라면 그룹의 비주얼 멤버 등으로도 얼마든지 뽑힐 수 있었지만 사현은 욕심이라는 게 생겼다. 그룹의 메인 보컬이라는 자리에. 사현은 처음으로 죽어라 노력했다. 목에서 피 맛이 나기도 했고, 성대 결절이 오기 직전까지 와서 연습실에서 혼자 울기도 했다.
하지만 노력은 드디어 빛을 발했다. 우수한 연습생들 몇을 불러 기획사 팀장이 데뷔 조라고 얘기했었을 때에 사현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잠깐이었다.
할머니가 쓰러졌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사현이 중학교 교복을 입게 되고 새 교복 특유의 뻣뻣한 질감도 채 빠지지 않았을 때였다. 할머니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고 의사는 뇌사 상태라고 침통하게 이야기했다. 그때 두 번째로 사현은 모친의 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 사현에게 불행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데뷔가 무산된 것이었다. 그때쯤의 사현은 마음이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식물인간이 된 할머니의 곁에 붙어 힘없이 시들은 모친에게 차마 속내를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른스럽다기엔 사현은 아직은 어렸다. 내 편이 너무도 고플 나이였다.
그때, 왜 하필이면 그 생각이 났는지. 내 편이라고 했던 남자. 내 할아버지.
안 그래도 힘들어하는 모친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기는 조심스러웠다. 어렸던 그때에 모친과 할아버지의 대화를 훔쳐 들었어도 두 사람의 사이가 마냥 가깝지 않다는 건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사현은 모친의 핸드폰을 몰래 뒤졌다. 할아버지, 시아버지, 시아버님. 전화번호부에 들어가 여러 이름을 꾹꾹 눌러 검색해 보아도 원하는 번호는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사현이 마지막으로 검색한 건 ‘회장님’이란 글자였다. 하지만 여전히 번호는 없었다.
한숨을 내쉰 사현은 혹시나 싶어 별 기대 없이 문자함으로 들어갔다. 번호조차도 없는데 문자라고 있을 리가 없었다. 자판을 꾹꾹 누르며 문자함을 아래로 설렁설렁 내려 보던 순간이었다.
[회장님의 번호가 바뀌….]
한 문자에 떠오른 제목에 사현의 눈이 빛났다. 사현은 곧장 문자를 눌러 들어갔다.
[회장님의 번호가 바뀌어 문자 드립니다. 저장 부탁합니다.
독사 엔터테인먼트 회장 여재룡 HP. 011-XXX-XXXX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XX동 XXX-XX번지]
문자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려던 사현은 멈칫했다. 처음으로 보게 되는 할아버지인데 전화보다는 직접 만나는 게 아무래도 더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사현은 마음을 굳혔다. 게다가 이제 중학생이 된 사현이 혼자 가지 못할 거리도 아니었다.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는지. 아니, 애초에 서울에 있어야 어울릴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 자체가 경기도에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곳이 할아버지가 실제로 거주하는 집일 줄은 사현은 도착할 때까지 알지 못했다. 드라마 촬영 때에나 주로 보던 넓은 정원을 가진 전원주택들이 즐비한 부유한 동네 앞에 멈춰 서서 사현은 꽤 얼빠져 있었다.
탁탁. 땅을 박차고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뒤를 돌아보는 사현과 엇갈려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옅은 밤색 머리를 휘날리며 달리는 남학생의 등 뒤로는 책가방이 연신 흔들렸다.
[아싸, 할아버지…! 저 전교 1등이요!]
쏜살같이 코너를 꺾어 들어가자마자 소리치는 남학생의 쾌활한 목소리에 뒤이어,
[어이구, 우리 손주가 왔구나. 그런데 1등이라고? 전교에서?]
기억에는 없는 밝은 노인의 음성이 이어졌다. 우뚝. 사현의 걸음이 멈춘 것도 그때였다.
[인석아, 정원 손질한다고 이 할애비 손이 엉망이다. 그만 엉켜.]
[그치만 좋아 죽겠는데요? 할아버지. 저 1등 하면 사 주시기로 한 거 안 잊으셨죠?]
[그럼. 누구 부탁인데.]
노인의 목소리는 어딘지 낯익었다. 하지만 동시에 낯설기도 했다. 그날, 자신의 모친과 대화하던 노인은 저런 밝은 목소리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우리 사빈이 부탁을 할애비가 잊었을까 봐?]
어딘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 대화 속에 섞여 들었을 때엔 사현은 확신을 가지고 코너를 돌았다. 그때야 알았다. 모친이 아버지라며 언젠가 사현에게 보여 주었던 사진 속 얼굴이 만약 나이가 든다면 저렇게 변할 수도 있겠구나 싶을 만큼 무섭도록 닮은 얼굴. 멀리서 봐도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걸 사현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덩치를 가져 안겼다기보단 노인을 끌어안다시피 한 교복의 남학생 또한 보였다.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음 짓던 노인이 고개를 드는 순간, 사현은 저도 모르게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저 광경에 자신이 끼어든다면 왜인지 모르게 저 평화가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 우리 손주가 방학을 맞겠구나. 네 아버지 생일도 다가올 거고.]
사현의 두 손에 쥔 교복 바지가 제멋대로 구겨졌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서 있던 사현은 ‘아버지’라는 그 단어에 고개를 들었다. 본능적이었다. 그저 사빈이라는 남자아이의 아버지라는데 왜 사현의 가슴이 조여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현의 아버지 또한 실제로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옷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까. 아주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린 사현이 염색 한번 한 적 없는 제 머리카락을 만졌다. 옅은 밤색. 태어날 때부터 가진 사현 본연의 색이었다. 짙은 갈색보다 색이 연하고 확실히 눈에 튀는 색. 새까만 밤하늘을 닮은 모친의 머리카락 색과는 확실히 달랐다. 모친은 그런 사현을 보며 어떻게 제 아빠랑 머리카락 색이 이렇게 똑같냐며 웃고는 했다. 사현도 사진으로만 보던 아버지 외에는 자신과 똑같은 머리카락 색을 가진 사람을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저 사빈이란 남자아이만 빼고는.
[선물은 선물대로 사 주고 이번엔 가족끼리 해외여행이나 갈까? 네 엄마랑 할애비랑 우리 사빈이랑 셋이서.]
[헐, 완전 좋아요. 할아버지.]
[주환이 놈, 올 생일은 해외에서 맞겠구나.]
툭. 머리카락만 만지작대던 사현의 손이 힘을 잃고 떨어진 건 그때였다. 그건 사현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사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가는 것도 당연했다. 어린 나이에도 아니, 어리다지만 사현은 사리 분별은 분명히 할 줄 알 만큼 현명했다. 내 형이구나. 그리고 금방 결론이 내려졌다. 엄마가 다르고 아빠가 같다는 것 또한.
[그런데 할아버지, 계속 묻고 싶었는데 왜 저희는 아버지 기일이 아니라 생일을 챙기는 거예요?]
[…그게 궁금했니?]
그리고 아까에 비해 조금은 침통해진 목소리로 노인이 되물었다. ‘어… 아니요. 얘기 안 해 주셔도 돼요.’ 이내 당혹스러움이 밴 사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중충한 기일보다는 생일 챙기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이 할애비가 그렇게 정했다. 애비보다 먼저 세상을 뜬 못난 자식 놈인데 기일은 챙겨서 무엇하겠어.]
아까의 침통한 목소리는 거짓말인 양 노인은 장난기를 섞어 과장스러울 만큼 밝게 대답했다. 사현의 가슴이 조금 더 죄어든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우중충한 기일을 모친은 단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늘 사현과 챙겼다.
하. 숨쉬기가 조금 어려워 사현은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꾸욱 주먹을 움켜쥐고는 사현은 몸을 돌렸다.
[그런데, 사빈아.]
괜히 왔다. 정말로 괜히 온 모양이었다.
[혹시, 네게 동생이 있다면 어떨 것 같으냐?]
[네? 동생이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이 가득한 되물음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정적에는 사현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설마… 아니죠? 할아버지? 아, 완전 싫어요. 생각만 해도 머리 아파요.]
끔찍하다는 게 목소리만으로도 역력히 드러나서 사현은 그때서야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멀어지는 등 뒤로 고모는 좋지만, 동생이 또 생기는 건 등의 투덜거림이 언뜻 들려온 것 같았다. 그러나 사현의 뇌까지 닿기엔 무리였다. 쿵쿵쿵. 대신 다른 소리가 시끄럽게 머리를 꽉 채웠다. 쿵쿵쿵. 지금 들려오는 이게 바닥을 박차고 달리는 사현의 발소리인지 귓가에 시끄럽게 울려 대는 심장 소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를 곳을 쉬지도 않고 한참 달리다 우뚝 자리에 멈춰 선 사현은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욱.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았다.
***
모친에게 사실을 숨기는 건 어렸을 때부터 사현의 전문 분야였다. 모친을 속이는 이유는 역시나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그렇듯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사현은 스스로가 불륜으로 인해 생긴 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따금 끈적하고 검은 무언가가 사현의 기분을 제멋대로 집어삼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토기가 올라올 것 같아 사현은 입을 틀어막았다.
모친을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지만, 자신은 모친과 부친 사이의 더러운 부산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도 이복형도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더러운 찌꺼기. 그 생각은 고등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끔찍할 만큼 사현을 집어삼켰다.
[네가 아역 배우 출신이면 다야?]
사현의 어깨를 기분 나쁘게 밀어내며 남자아이는 비릿하게 웃었다. 사현을 둘러싸고 있는 세 명의 남자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하나같이 그랬다. 소속사 건물 뒤편,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좁은 골목으로 사현을 몰아넣은 연습생 선배들은 이따금 사현에게 화풀이를 했다.
때리면 흔적이 남고 저희들에게 마이너스인 걸 잘 알기에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진 않았다. 하지만 나이는 어리면서 자신들보다 우수하고 소속사 직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현에게 그들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보다 우수한 연습생들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이들이 사현에게만 유독 이러는 이유야 있었다.
[아, 씨발. 또 좆같은 눈으로 쳐다보네. 야, 좆같으면 좆같다고 말을 해, 차라리.]
[그딴 눈으로 쳐다보면 우리가 쫄겠냐? 기분만 더럽지.]
[이 새끼, 우리 무시하는 거 맞다니까. 데뷔 조에도 못 들어가고 몇 년째 여기서 썩고 있는 게 네 눈에는 그렇게 한심해 보이냐?]
우수한 연습생들마다 툭툭 시비를 걸고 다니는 게 이들의 특기긴 했지만, 다른 연습생들은 그냥 모르는 척 헤헤 웃으며 넘어가는 걸 사현은 그렇지 못했다. 그 예쁜 얼굴을 싸하게 굳히고 그들을 쳐다보는 건 기본에, 한번은 일부러 사현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그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기도 했다. 그래, 사실 사현의 성깔이 좋지 않다는 건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인성이 아닌 성격이 문제였고 먼저 시비를 걸며 싸우려 하지 않는 이상은 의외로 누구와도 웬만큼 어울려 줘서 사현을 싫어하는 연습생은 열등감에 똘똘 뭉친 이들이 유일했다. 물론 이들을 좋아하는 연습생들 또한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더 짙은 패배감을 맛보며 애꿎은 화살을 사현에게로 돌렸다. 사현이 자신들을 대놓고 무시하니 후배 연습생들이 자신들을 더 우습게 본다며 사현을 불러내어 비꼬고 면박을 주었다. 기분이 한층 더 더러울 때엔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으로 사현의 어깨를 밀쳐 내거나 지금처럼,
[뭘 꼴아보냐고, 새끼야.]
사현의 하얗고 매끈한 이마를 기분 나쁘게 손가락으로 툭툭 밀어 댔다. 맥없이 그 손가락에 밀려 뒤로 물러나는가 싶던 머리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한심한 새끼들.]
이내 툭 하고 뱉어 내는 한마디엔 비웃음이 가득 걸려 있던 세 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열등감에 찌들어서 나이 어린 애한테 이러니까 한심하다고 했는데 왜?]
‘다시 말해 줘?’ 그들을 볼 때마다 늘 표정 없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던 사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들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표정이 생겼다. 잔뜩 꼬여 비틀린 웃음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사현이 아버지의 기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면 사현이 예민해지는 건 이젠 통과 의례나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이런 날에 맞춰 시비를 건 그들도, 예민함의 최고치를 찍어 평소였다면 그냥 넘겼을 것을 일을 복잡하게 꼰 사현도 오늘만큼은 운이 나빴다.
발끈한 그들 중 하나가 사현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친 것도 당연했다. ‘너 씨발, 뭐라고 했냐?’ 사현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대며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남자아이에도 사현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그냥 가수고 꿈이고 다 때려치우고 이들을 죽어라 패면 이 더러운 기분이 좀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충동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순간이었다.
저벅.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작은 소리는 지나치게 잘 들렸다. 조용해진 골목길로 막 들어선 남자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다 사현과 무리를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던 남자의 고개가 들어 올려져 그제야 사현 쪽을 바라봤으니 말이다.
동시에 사현의 눈이 커졌다.
[아, 씨발.]
찔끔한 남자아이가 조용히 욕을 짓씹으며 쥐고 있던 사현의 멱살을 놓았다. 그럼에도 사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기 사람 안 온다며?]
[원래 안 오는데.]
옆에서 속닥이는 3인방의 대화가 멀게 느껴졌다. 사현은 저와 빤히 눈을 마주쳐 오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당연했다. 시간이 지나서인지 교복 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을 한 남자는 키가 더 커지고 덩치도 조금 더 커져 이젠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만은 그대로였으니까. 남자는 사현의 배다른 형인 사빈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있었을까? 정적을 깨고 벨 소리가 울렸다. 담뱃갑을 손에 쥔 사빈은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자연스레 전화를 받았다.
[…왜?]
상대방과 통화를 하며 사빈은 눈을 굴려 사현을 쳐다보았다.
[어. 뭐, 금방 가. 근처야. 응. 이따 봐.]
그리고 이어지는 말과 함께 통화는 싱겁게 끝이 났다.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은 사빈이 담뱃갑 또한 함께 넣으며 사현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캡 모자를 쓰고 있는 탓에 챙 아래로 그늘이 져서 사빈의 눈빛을 읽어 내기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날 알아봤나? 이야기로만 듣던 이복동생의 한심한 작태에 화가 났을까? 여러 생각들이 그 짧은 순간 사현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잠시 사현을 바라보던 사빈은 찔끔하는 3인방의 얼굴을 기억하기라도 하듯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다.
[…가네?]
그리고 남자아이가 얼빠지게 중얼댔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현도 눈이 있으니 알 수 있었다. 언제 폭력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을 두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사빈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아 골목을 빠져나갔다.
하,하. 그리고 사현의 입술 새로 작은 실소가 터졌다. 실소는 조금씩 커져 웃음이 됐다. 사현을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3인방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없이 사현은 계속 웃었다. 그러고는 욕설을 뱉었다.
[아, 씨발.]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진 몸이 바닥에 볼품없이 쪼그려졌다. 그대로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사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상한 사현의 분위기에 눈치를 보던 3인방이 툭툭 사현을 건드려 대도 말이다.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당하고 있대도 도와줄 터였다. 상대는 갑작스러운 어른의 등장에 눈치를 살피며 겁에 질린 세 명의 남자아이들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분명, 보고도 도와주지 않았다.
…알아봤구나. 이로써 확실해졌다. 형에게 사현은 동생이 아닌 그저 더러운 애정의 부산물이자 찌꺼기일 뿐이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말라비틀어진 눈은 버석하기만 했다.
***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아이들이 가장 하고 싶던 것이라야 당연히 합법적인 음주가 1순위일 터였다. 사현도 여느 스무 살들과 다를 건 없었다. 하지만 아이돌 연습생 신분이라는 게 발목을 잡아 주위의 시선에는 여전히 민감해야 했다. 주변 인간관계도 그러했고 쓸데없는 시비나 싸움 등에 말려들어도 곤란했다.
그래서 사현은 유독 친하게 지냈던 연습생들끼리 뭉쳐 날을 잡아 소소하게 술집 대신 연습실에서 술병을 깠다. 즐거운 기억이었고 사현도 기분 좋게 취해 자주 보여 주지 않던 웃음도 한껏 지었다. 그때에는 마음 한구석에 내내 남아 있던 형이란 그림자도 완전히 잊었다. 하지만 자리를 파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다시 그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모친의 얼굴을 보자마자 더 해졌다.
[세상에, 아들. 이제 성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술을 이렇게나 마셨어?]
책망과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로 모친은 취해 비틀대는 사현을 부축하며 방으로 옮겨 주었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사현이 팔을 들어 제 두 눈을 가린 것도 그때였다.
[엄마.]
문득 불러오는 목소리에 침대 가에 앉아 사현을 내려다보던 모친은 ‘왜?’ 라며 여상히 대답했다.
[…난, 태어나면 안 되는 사람인 걸까?]
[뭐?]
모친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사현은 두 눈을 가린 팔을 괜스레 꼼질댔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술기운의 힘을 빌려 생각 없이 하는 말이었다. 원래였으면 절대 이런 말 같은 거 하지 않는데 취했으니까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묻는 말일 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현아?]
[…누가… 날, 싫어하는 것 같아. 내가, 내가 태어나서 그런 걸까?]
[누가 그래?]
[그냥, 누가… 내가 진짜 싫은가 봐. 자기 엄마가 있는데도, 아빠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내가 태어나서 그래서… 그렇게, 싫은가 봐.]
[…왜 울고 그래, 우리 아들.]
그 말과 함께 두 눈을 덮어 누르고 있던 팔이 치워졌다. 눈두덩이를 누르고 있던 탓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줄 알았더니 어느새 눈물이 잔뜩 고여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사현의 팔을 잡은 채 모친은 그런 아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사빈, 그 애가 그렇게 이야기해?]
그렇게 묻는 모친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사빈’이란 존재를 충분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함과 착잡함, 안타까움과 분노들이 뒤섞인 얼굴로 모친은 울고 있는 아들의 눈가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그 애, 안 그런 줄 알았더니 정말 못됐구나. 우리 소중한 아들한테 그런 말이나 하고. 제 엄마가 대체 뭘 가르친 거라니?]
남을 험담하는 모친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현의 붉어진 눈동자가 그런 모친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화가 난 듯 굳어진 표정의 모친은 잠깐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엄마?’ 사현의 말에 모친의 시선이 와 닿았다. 결심이 선 얼굴로 그녀가 입을 연 것도 그때였다.
[…사현이 너는 네 아빠가 가장 처음으로 알고 사랑한 자식이야.]
가장 ‘처음으로 알고’ 사랑했다. 묘한 말이었다. 사현의 표정을 보며 모친은 쓰게 웃었다.
[여사빈, 그 애가 태어난 것조차 네 아빠는 전혀 몰랐어. 그 사람이 사랑한 건 엄마였고 첫 자식도 사현이 너 하나뿐이었어. 엄마도 네 아빠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지. 그 애의 존재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잠시 생각하던 모친은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한 가요 프로그램에서였다. 당시 MC를 맡았던 모친과 출연 가수였던 부친이 서로 좋은 감정으로 이어지게 되었을 무렵, 사귀자고 먼저 고백을 해 온 부친. 여기까지는 사현도 자주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연애를 하다 조금 이르게 사현이 생겼고 부친은 그 사실을 알자마자 망설임 없이 청혼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 뒤의 내용은 사현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사현이 네가 태어날 때까지만 더 네 아빠는 소속사에 매여 있기로 했어. 당장 나가기엔 상황이 좋지 못했으니까. 그 소속사 사람들이 보통 무서운 게 아니었거든. 엄마도 혹시나 네 아빠가 도망치다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우리 사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참아 달라고 네 아빠를 설득했지. 그때쯤이면 계약도 종료될 테니까.]
현직 깡패들이 운영하던 소속사이기에 분위기는 더 살벌했다. 그곳의 깡패들은 실력 있던 여주환을 영입할 때엔 심장이라도 떼어 줄 것처럼 달게 굴었으면서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 순간 안면 몰수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혼인 신고조차 하지 못한 건 그 깡패들에게 혹시나 백서경과 배 속 아이의 존재를 들킬까 봐서 였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기에 여주환은 정말 싫었지만, 아버지 여재룡을 떠올렸다. 그토록 증오해 인연까지 끊은 부친을 떠올린 건 오로지 백서경과 아이 때문이었다. 여주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친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고 그곳을 찾았다. 그리고 연락도 없이 찾은 그 집 앞에서 여주환은 자신의 선배였던 금송화와 그녀를 빼닮은 아이를 처음 보게 되었다. 금송화를 닮았다지만 여주환은 한눈에 제 아들임을 알아차렸다.
결국, 부친을 만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금송화와 아이 모르게 여주환은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그 이후, 여주환은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토록 좋아하던 노래에 집중도 하지 못하고 공연을 해도 연이어 실수하니 소속사 사람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는 빈도도 늘어났다. 지켜보다 못한 백서경이 여주환에게 물었다.
[그때, 알게 된 거야. 사빈이와 사빈이 엄마의 존재를.]
여주환은 미안하다며 울었다. 우유부단한 자신이 원망스럽다고 했다. 우리 서로 아무 일 없었던 거라고 딱 잘라 말하던 금송화에게 더 묻지도 못하고 그대로 묻어 버린 그때의 자신을 죽이고 싶다고 했다. 그런 사람에게 백서경 또한 아무런 원망도 퍼부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도 단단히 미쳐 있었지, 네 아빠한테. 그렇게 아이처럼 엉엉 우는데 뺨 한 대 치지도 못하고 눈물을 닦아 줬으니까.]
하지만 이미 일어난 균열은 결국, 무언가를 망가뜨리기 마련이었다. 여주환은 그 시기에 이미 정신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던 상황인 모양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소속사 때문이었고, 금송화 때문에도, 금송화와의 아이 때문에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백서경 때문에도, 백서경과의 아이 때문에도 그랬다. 그 사실을 백서경은 너무 늦게 알고 말았다.
계약 만료 기간이 다가오던 그때에 소속사 사람들은 염치없게도 재계약을 입에 올렸다. 순진하고 강단 없는 여주환을 이미 제멋대로 굴리는데 도가 튼 사람들은 이번 재계약도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유독 말을 안 들으며 까다롭게 구는 여주환을 소속사 창고에 가둬 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 새벽녘, 소속사에 주차되어 있던 오토바이를 끌고 여주환이 도망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뒤늦게 남아 있던 사람들 몇이 뒤를 쫓았지만 그 때문에 더 속도를 올리던 여주환이 눈앞에서 차에 치여 버리는 큰 사고가 나고 말았다.
[그 당시 네 아빠가 도망쳤던 방향이 할아버지 댁이었어. 생각엔 아마 도와 달라고 말하러 갔던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모친은 끝내 고개를 숙였다. 후우, 낮은 한숨도 모친에게서 흘렀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지. 조금만 더, 나한테 기대고 의지하지. 그때 처음으로 원망이 생기더라. 네 아빠, 그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내가 어떤 증거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언론사 관계자들이랑 무엇 하러 그렇게 친하게 지냈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 주면 우리 결혼식도 올리고 혼인 신고도 하자며 티끌 없이 새하얗게 웃던 소년 같은 남자였다. 백서경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했다. 금송화와 아이 때문에 백서경에게 미안해서 더 기대지도 의지하지도 못해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다 간 그 남자를 원망하면서도 사랑했다. 그래서 사현을 낳을 결심을 더 단단히 했다. 강해지고 힘이 생겨서 아이만큼은 그때 지키지 못했던 그 남자의 몫까지 제대로 지키고 싶었다.
[엄마도 아빠도 사현이 너를 첫 번째로 가장 사랑하고 그래서 태어난 귀한 존재야. 네가 생겼다는 걸 알자마자 네 아빠 표정이 어땠는 줄 아니? 진짜 아이처럼 좋아하더라. 엄마는 네가 태어나지 않아 이 세상에 없는 건 이제 상상도 할 수가 없어.]
모친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지만, 사현은 눈물까지 멎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사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제대로 물어보지 못한 게 모친은 조금 마음에 걸렸다.
***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응급실에 계속 있을 수는 없기에 결국 병실을 잡았다. 생각보다 여사빈과의 몸싸움은 타격이 컸다. 몸 곳곳이 통증을 호소하는 건 둘째 치고 얼굴이 성한 곳이 없었다. 이준혁은 백사현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깊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당장 있을 스케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산더미처럼 쌓인 얼굴이었다.
백사현도 잘한 건 없기에 입을 다물었다. 회사와 통화를 이어 가던 이준혁이 마른세수를 하며 병실을 뜬 지도 한참 됐다. 때문에 혼자 남은 병실에서 백사현은 핸드폰만 만지작댔다. 아까부터 걸려 오던 멤버들이나 회사 사람들의 전화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 받아도 할 말이란 게 있을 리 없었다.
여사빈과의 관계를 설명할 것도 아니고. 백사현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앞이 깜깜했다. 다행인 건 백사현의 소속사도 그렇고 여사빈의 소속사도 사람들의 입막음에 한창인 모양인지 이렇다 할 기사 하나 뜨지 않았다. 그 몸싸움을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에 Tvm 본사 전체에 소문이 퍼진 지는 오래일 테고 그 많은 사람의 입막음을 하기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대단하긴 했다.
[지훈이 형]
그러나저러나 이 이름이 떠 있는 화면을 아까부터 몇 번이고 쳐다보고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떼었다 하길 얼마간 백사현은 결국 화면을 누르지 못했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지듯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백사현은 꾹꾹 미간을 눌렀다. 역시 더 참아야 했나 싶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만은 대책 없이 제대로 사고를 쳤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참아. 그 상황을 다시 상상만 해도 백사현의 이가 갈렸다.
[너라니.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지?]
씨발. 욕이 튀어나왔다. 31여 년을 남처럼 아니 남보다 못한 사이로 지내 왔으면서 갑자기 알은체를 해 오는 게 무슨 속셈인가 싶었다. 범지훈을 만나러 갔던 고깃집에서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으면서. 물론 나쁘지 않아 장단을 맞춰 줬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염치도 없게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이게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바로 머리에 와 닿지 않아 곱씹었다. ‘형이라고? 형?’
그러자마자 머리를 익히기라도 할 것처럼 훅하고 치밀어 오르는 건 분노였다. 이제 와서 왜 형 취급을 바라는 거지? 무슨 염치로? 감히?
다 가진 주제에. 아버지 모르게 태어나 지금까지 호의호식하며 잘 지낸 주제에.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하나뿐인 자식으로 다들 인정하는 주제에. 이제 와서 왜 형 취급을 바라는 욕심을 부리지, 왜?
여주환의 친아들이란 타이틀도, 할아버지도, 아버지의 생일까지도 다 가졌으면서.
분노로 눈앞이 까맣게 변할 정도였다. 여주환의 아들이 아닌 백서경의 아들로 사는 백사현이 가진 거라고는 아버지가 사랑한 첫 자식이란 것과 어머니에게 남긴 노래, 기일뿐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것에 만족하고 백사현으로 살 생각이었다. 여씨 집안이라면 이젠 신물이 날 정도였으니까. 엮이기조차 싫으니 구태여 원망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 내 편은 어머니 하나면 족했으니까.
그러다 백사현은 멈칫했다. 아, 이거 설마.
“…열등감인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어 본 조그만 중얼거림은 마음 어딘가에 콱 박혀 들었다. 어릴 적, 기억도 안 나는 연습생 아이들에게 열등감에 찌들었다며 비웃었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백사현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아주 우스워졌다.
“…사현아!”
병실의 문이 벌컥 열어젖혀진 건 그때였다. 다급히 들어서는 남자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그 순간, 백사현은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너 얼굴이….”
표정 변화가 그렇게 크지 않던 남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잔뜩 구겨졌다. 저에게 전 애인 일에 대한 것을 추궁했던 그날 밤 어둠 속에서의 얼굴도 저랬을까? 상상하던 백사현의 입매가 조금 비틀려졌다.
“…준혁이 형이 말해 줬나 봐요. 전 괜찮아요. 금방 퇴원도 할 거라 오래 있을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형도 바쁠 텐데 이만 들어….”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한달음에 다가온 남자의 두 손이 백사현의 얼굴을 감쌌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져 버릴 것을 만지는 것처럼 염려가 가득 담긴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남자의 따뜻한 체온은 금세 백사현의 뺨에도 옮겨졌다.
“이게 뭐야, 여사빈 그 새끼가 한 짓이야?”
백사현의 눈이 커진 것도 동시였다.
“씹새끼, 죽여 버린다.”
금세 표정이 바뀐 남자가 얼굴이 일그러뜨렸다. 백사현을 향했을 때엔 마냥 부드럽고 걱정 가득하던 시선은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야차처럼 변했다.
“그 새끼, 이 병원으로 같이 왔지? 지금 어디 있어? 씨발, 대가리를 뽑아 버린다.”
큭. 웃음이 터진 건 그때였다. 놀란 시선이 백사현을 향했다. 어깨가 조금씩 떨려 오며 백사현은 결국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대가리를 뽑는다니.
“…사현아?”
그런 말 쓴 적 한 번도 없었으면서. 그런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는데도 멈추지 못하고 백사현은 눈물이 맺힐 정도로 한참을 웃었다. 그런데 백사현이 한참을 웃어 대니 멍하니 보던 남자 또한 결국 따라 미소 짓고 말았다.
“지훈이 형.”
한참을 다 웃고 나서야 그 이름을 불렀다. 범지훈은 대답 대신 백사현과 지그시 눈을 마주쳐 왔다. 그런 점도 참 범지훈다웠다.
“저 아파요.”
“어디가?”
부드럽게 지었던 미소는 어디로 갔냐는 듯 범지훈은 금세 시퍼렇게 눈을 빛내며 백사현을 살폈다. 기다렸다는 듯 백사현은 아까부터 통증을 호소하던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랑 여기도 그렇고 이쪽도요. 그리고 등도 아픈데 쓸렸나 봐요.’
다급한 손길로 옷까지 들춰 올리는데 백사현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사실, 막을 생각 자체도 없었다.
“여사빈 이 개새끼가.”
그리고 범지훈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등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꽤 상처가 크긴 한 것 같았다. 이건 여사빈이 그랬다기보다는 바닥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 쓸린 상처일 텐데 백사현은 일부러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화끈대며 쓰라려 오는 등에 계속 시선을 주는 범지훈은 여전히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걸 보며 문득 떠오르는 것에 백사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고 보니 보여 줬구나.
[같은 마음이 되면 그때 보여 줄게요.]
지금도 그때와 비슷한 병실 안이기도 했다. 그때는 범지훈이 허둥대며 옷을 잠그기 바빴는데.
[내 몸이랑 백사도.]
지금은 마치 제 것을 만지듯 당연하게 옷을 들추며 상처를 보고 자기가 다친 것처럼 분노했다. 백사현의 입술이 끌어 올려졌다. 여기, 이곳에 내 편이 하나 더 있었다.
“여기도 얼른 치료하자, 사현아. 일부러 안 보여 줬지? 내가 약 받아다 발라 줄게.”
아이돌 가수인데도 노출을 꺼린다는, 남들이 보기엔 까다롭기 그지없을 이 성향을 당연한 듯 배려하며 범지훈은 말했다. 이내 뻗어진 손은 뺨을 타고 흐르는 백사현의 눈물을 부드럽게 훔쳐 주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은 여파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
“…할아버지가?”
“네.”
목례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여사빈은 퍽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쯤이면 할아버지의 귀에도 이 소동이 전해질 것을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 반응하실 줄은 예상 밖이었다.
“아.”
그러다 여사빈은 불현듯 깨달았다. 설마 하니.
“할아버지도… 아셔? 백사현을?”
많은 게 함축된 물음이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숨기려 하셔도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는 게 할아버지였고 할아버지의 능력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일찍이 이 사실을 알아내셨을지도 몰랐다.
그 말에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사빈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도 당연했다. 어쩐지 여사빈 선에서 잘 마무리할 수 있는 일에 굳이 호출까지 하는 할아버지의 반응이 과하다 싶었다.
“할아버지께는,”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커튼이 젖혀졌다. 그것에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여사빈의 시선에 언뜻 놀라움이 스쳤다.
“…알겠으니 곧 뵙겠다고 전해 드려.”
“네, 도련님.”
목례를 마친 남자가 눈치 있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젖혀진 커튼을 잡고 있는 탓에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간 정장의 남자를 따라 시선이 움직이던 우정선도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귀찮은 낯으로 우정선에게 말을 거는 여사빈 때문이었다. 응급실 침대 개수가 한두 개도 아닌데 곧바로 여사빈이 있던 침대 커튼을 젖혀 댄 걸 보니 이미 알고 왔다는 게 분명했다.
차륵. 그 말에 다시 커튼을 치며 다가온 우정선이 여사빈을 내려다보았다.
“…독사파 도련님이 겨우 아이돌 하나에 이렇게까지 터졌을 줄은 몰랐는데.”
“시비 걸러 왔으면 꺼져.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거든.”
별로일 뿐만 아니라 아주 더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백사현을 찾아가 원하는 만큼 두드려 패고 싶었지만, 비서는커녕, 운전사나 그런 것도 전부 귀찮다며 늘 혼자 다니는 여사빈이 이번에도 차를 끌고 Tvm까지 혼자 오는 통에 백사현과 몸싸움을 하고 난 뒤 피를 뚝뚝 흘리며 정신이 없는 여사빈을 병원으로 데려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나용선 측에서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며 호의를 담아 제안했지만, 단호히 거절한 게 여사빈이었다. 이깟 몸싸움에 병원까지 가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차 운전도 혼자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오기를 부리며 부축해 주겠다는 만류도 거절하고 휴지로 피를 틀어막은 채 주차장까지는 어떻게 내려왔는데 순간 핑 도는 머리에 여사빈은 벽을 잡고 간신히 버티고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발견한 게 하필이면 백사현의 매니저였다.
어차피 병원에 가는 거 같이 타고 가라며 매니저가 간절히 사정하는데 여사빈은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끝내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함께 치고받고 싸워도 코피 때문에 피범벅인 여사빈의 몰골이 백사현보다는 심각해 보여서이었을 것이다.
당연한 듯이 밴의 뒷좌석에 타고 있는 백사현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여사빈은 매니저의 옆자리인 조수석에 탔다. 그 뒤로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차 내부에는 싸한 침묵만 감돌았다. 병원에서 내린 뒤에도 백사현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은 건 도착하면서도 백사현뿐만이 아닌 여사빈도 챙기며 전전긍긍하던 매니저의 얼굴을 봐서였다.
그런 여사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빤히 시선을 주던 우정선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백사현하고는 왜 그렇게 싸운 거야?”
“알 거 없잖아.”
“애도 아니고, 지훈이랑 사귀는 게 부럽다고 손까지 나가는 건 우리 나이엔 아니지 않아?”
“뭐?”
동시에 여사빈의 얼굴이 흉흉하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했냐, 너 지금?”
“뭘? 내가 틀린 말 했어? 준혁이… 그러니까, 백사현 매니저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난 네가 무슨 중고등학생 남자앤 줄 알았어. 하는 짓이 하도 혈기 왕성하길래.”
여사빈의 얼굴만큼은 아니지만 우정선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당연히 여사빈을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한심함도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면 함부로 입 놀리지 마.”
“너나 제발 함부로 행동하지 마라, 좀. 뒷일 생각도 않고 네가 이렇게 사고나 치고 다닐 줄은 몰랐다, 나도.”
“야, 우정선.”
으르릉. 꼭 짐승이 그로울링을 하듯 우정선의 이름을 짓씹는 여사빈의 눈빛이 흉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정선은 여전히 한심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여사빈의 터진 얼굴 이곳저곳을 향했다.
얼마나 다친 것인지 커다란 거즈가 뺨 한쪽을 전부 덮고 있음에도 검붉게 든 멍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도 눈두덩이 한쪽이 조금 부어 있는 것도 채 닦지 못한 핏자국이 굳은 채로 목이나 턱 이곳저곳에 묻어 있는 것도 영 신경이 쓰였다. 하필이면 옷도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탓에 핏자국은 더 눈에 띄었다.
마지막으로 입술 끝에 뭉쳐 있는 피딱지에는 우정선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입을 벌릴 때마다 통증이 느껴질 게 뻔히 보일 만큼 상처는 꽤나 심했다.
“곧 촬영도 있다는 놈이 얼굴이 그러니까 걱정돼서 그래.”
그러다 우정선의 한마디에는 맹수가 꼬리를 말 듯 조금은 유순해진 낯으로 여사빈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알았는데, 내가 촬영 들어가는 줄.”
“모를 수가 없지. 인터넷 기사다 SNS다 나용선 피디 신규 프로그램에 대해 그렇게 떠들던데. 아버지에 대해 다룬다며?”
“…어.”
“네 아버지고 네 아버지의 음악이라는데 동종 업계에 종사하는 아들을 안 부르겠어? 그냥 눈치로 맞춘 거지.”
“그래….”
작게 대답하는가 싶던 여사빈이 이내 중얼거렸다. ‘…아들이지, 내가.’
“아들이라는 놈이 프로그램 론칭도 하기 전에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면 되겠어?”
그제야 여사빈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서른다섯 살이면 네가 벌인 일 수습이야 알아서 하겠지만, 아무리 질투가 난대도 앞뒤 생각 안 하고 다시는 그러지 마.”
여전히 한심한 표정의 우정선이었지만 그런 우정선을 올려다보는 여사빈은 더 이상 아까 같은 적의를 드러내 보이진 않았다. 그 대신 조금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질투라고?”
“그래, 질투.”
하하. 그제서야 여사빈은 작은 옷음을 흘렸다. 아까보다는 풀어진 듯한 분위기의 여사빈에 우정선도 구겼던 미간을 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엔 두 눈이 커다래지고 말았다.
“질투는 맞는데, 범지훈에 대한 마음은 이제 완전히 접었어.”
“뭐…?”
“음, 정확히는 접을 수밖에 없는 거네. 계속 좋아하게 되면 복잡해지게 되거든, 우리 관계가.”
뭐가 복잡해진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보다 마음을 그렇게 쉽게 접었다는 것에 우정선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몇십 년을 질질 끌었던 마음인데 그게 대체 어떻게….
“왜? 너도 접을 수 있게 도와줘?”
그걸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여사빈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꼭 흉계를 꾸미기 일보 직전인 듯한 얼굴에 우정선은 약간의 기대와 불안감을 갖고 물었다.
“뭐… 어떻게 하는 건데, 그거.”
“그보다 하나 묻자. 우정선 너 그때 막걸릿집에서 정말 필름 끊겼었어?”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어.”
“그렇단 말이지?”
“그…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다면 미안하다. 다음부터 다시는 그런….”
“아냐, 됐어. 사과할 필요 없어.”
여사빈은 의외로 쿨하게 손을 휘저었다. 어딘지 불안한 얼굴로 조심스레 사과하던 우정선이 되레 놀랄 정도였다.
“사과는 됐고 일단 가까이 와 봐.”
대신 손가락을 들어 우정선을 향해 까딱였다. 그것에 우정선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꿍꿍이 가득한 표정을 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여사빈은 그때의 일을 빌미로 저를 괴롭힐 생각에 사과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으로써는 뱀 같은 새끼라며 범지훈이 예전부터 그렇게 이를 갈아 대던 것에 우정선도 조금은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침대에 앉아 손가락만 까딱이고 있는 여사빈의 모습은 말 그대로 먹잇감을 눈앞에 둔 한 마리의 뱀 같았으니까.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우정선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퍼스널 스페이스의 범위에 들어왔음에도 손가락을 까딱이는 걸 멈추지 않는 여사빈에는 의문을 품으며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더.”
이어지는 말엔 의문 가득한 얼굴로 더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우정선도 불편할 정도로 서로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말을 하면 숨결이 느껴질 만큼이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여사빈의 손이 우정선의 뒷목을 감아 당기는 것과 동시에 비스듬히 틀어진 고개가 그대로 우정선을 향해 부딪쳐 왔다. 순간적으로 우정선의 숨도 멈췄다.
“…어때? 이 정도면 범지훈 생각 아예 안 나지?”
얼굴을 떼어 낸 여사빈은 씨익 웃어 보였다. ‘나도 이걸로 도움 많이 받았거든.’ 뒤이어 말이 이어졌다. 툭툭. 우정선의 뒷목을 가볍게 두드리며 손도 풀어낸 여사빈은 엄지손가락으로 쓰라려 오는 입술을 조금 쓸어 보다가 우정선을 피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난 집에서 호출이 와서 이만 가 볼게.”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우정선이 대답을 하든 말든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툭. 인사였는지 우정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떼어 낸 여사빈이 커튼을 젖혀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도 우정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래도 나 걱정해 줘서 고맙다.”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귓가에 속삭인 한마디는 여전히 귀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뒤늦게 소름이 돋는 귀를 감싸며 우정선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무슨.”
우정선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가만히 이야기만 듣고 있던 남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내 권태롭던 눈빛엔 다른 감정도 섞여 들었다.
“고작 그런 얘기를 하려고 부른 거구나.”
“뭐…?”
그 말에 발끈한 건 이사혁이었다. 그런 동생의 무릎을 잡아 앉히며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이사윤은 다시 다디단 말들을 쏟아 내었다.
“그러지 말고 생각해 봐. 나도 사촌 형으로서 안타까워서 그래.”
“아, 뭘 또 어렵게 설득해? 저 새끼 말하는 태도를 좀 봐.”
그런 형에게 투덜댄 건 이사혁이었다. 여전히 이사혁의 무릎에 얹은 손을 떼지 않으며 이사윤은 어렵게 자리를 마련하여 생에 처음으로 마주 보게 된 사촌 동생에게 뱀 같은 혀를 놀렸다.
“솔직히 그 자리 사현이 네 것이잖아. 알아보니까 혼인 신고도 할아버지가 외삼촌 도장 파서 멋대로 한 거던데. 그럼 외삼촌도 여사빈의 존재를 아예 몰랐단 소리 아니야? 이거 너랑 외숙모가 소송도 제기할 수 있을 거라고 봐. 뭣하면 유능한 변호사도 소개해 줄게.”
“그래. 우리가 도와준다고 할 때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네까짓 게 튕기긴 뭘 튕겨?”
“사혁아, 그만.”
그 옆에서 초를 치는 동생에 이사윤의 나긋한 경고가 들렸다. 이사윤을 흘끔 쳐다본 이사혁의 표정이 구겨지며 이내 입도 다물어졌다.
“사혁이 말은 신경 쓰지 마. 원래 뜻이랑 다르게 말을 좀 거칠게 해. 그나저나 외삼촌 없이 외숙모와 둘이서 지내며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았겠어? 이제 다 돌려받고 원래 네 자리로 돌아가야지.”
“…원래 내 자리?”
“그래, 여사현으로 살아가야지 않겠어?”
“거래를 하고 싶으면.”
의아하게 바라보는 두 쌍의 눈동자에 나른하게 다리를 꼬는 백사현의 모습이 담겼다. 남자치고는 선이 곱고 무척이나 예쁜 생김새였지만, 여기저기 훈장처럼 울긋불긋한 멍과 흉이 져 있어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감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 스크래치가 난 것 같은 종류의 안타까움이었지 약자처럼 보여 드는 동정은 아니었다.
약자처럼 보이지 않다니. 그게 저 여유로운 표정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여유를 가지고 있어서인지는 지금으로선 분간이 가지 않았다.
“거래 상대에 관한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해야 하는 법인데.”
“뭐?”
“상대의 패가 탐이 나서 거래를 하든 빼앗기 위해 속여 처먹든 나에 대해서는 알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말이야.”
“이게 아까부터 봐줬더니 형들한테 반말을 해 대네?”
결국 참지 못하고 이사혁이 다시 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럼에도 백사현의 여유는 그대로였다. 마냥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던 이사윤의 미소가 사그라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너, 설마 우리 집안이랑….”
“엮이는 것조차 싫다는 거지.”
이사윤의 말을 받아 대답하며 백사현이 되레 미소 지었다.
“여사빈이랑 무슨 좆같은 일이 있든 네들 집안일은 네들 선에서 알아서 해. 아무리 능력이 없대도 그렇지 가만히 있던 남 끌어들이려 하면 그 남이 곤란하잖아.”
화사하게까지 보이는 미소였다. ‘너 씨발, 뭐라고 했냐?’ 이사혁의 표정이 일그러진 건 당연했고 이사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이복동생이라지만 여사빈이랑 이렇게 닮았을 줄을 몰랐는데.”
짧은 침묵을 지키던 이사윤은 그렇게 한마디를 뱉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형에 이를 드러내던 이사혁도 흘끔 이사윤을 올려다보다 욕을 짓씹고는 자리에서 따라 일어섰다.
인사도 없이 두 형제가 떠났지만 백사현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누구를 닮아?”
작게 중얼거리는 백사현의 얼굴은 미소가 언제 있었냐는 양 잔뜩 구겨져 버렸다. 알고 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사윤의 마지막 한마디는 백사현의 신경을 날카롭게 벼리게 하기 충분했다.
하. 낮은 한숨을 뱉으며 백사현은 마른세수를 했다. 사촌 형제들이 만나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자리를 허락한 게 이제야 후회가 됐다. 뭐, 이제 와서 형제들의 정이라도 나누고 싶었던 건가. 이젠 실소도 나오지 않았다. …뭘 기대한 거지?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백사현이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31여 년을 멀쩡히 존재하던 동생을 지금까지 투명 인간 취급한 이복형이나 사촌 동생을 통해 콩고물을 뜯어낼 생각을 하는 사촌 형들이나 누가 더 나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사촌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한 가지는 그 대단한 할아버지나 여사빈이 사촌들에게까지 백사현이란 존재를 꼭꼭 숨겨 왔다는 것이다.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피도 눈물도 없다고 해야 할지.
“…내 편은 무슨.”
힘없이 중얼거리며 백사현의 고개가 더 깊이 떨구어졌다. 이제 와 맞은 부위들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
어린아이들의 장난 같은 투닥거림도 아니고 성인 남자들이 이를 갈고 제대로 치고받은 몸싸움이었기에 몇 주 입원이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백사현은 미련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걸 택했다. 범지훈이 이준혁과 함께 입원을 권해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러운 태도로 거절하는 백사현에게 강제할 수는 없었다. 뒤늦게 응급실 침대를 차지하고 있을 여사빈도 찾았지만, 여사빈 또한 병원을 빠져나간 지 오래라고 했다. 눈치가 빠른 건지 운이 좋은 건지 여사빈이 없는 병원 안에서 범지훈은 괜스레 주먹만 말아쥐었다 폈다.
그 후, 왜인지 얼빠져 보이는 우정선을 데리고 범지훈은 우선 회사로 돌아갔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분명 퇴원한 백사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범지훈은 퇴근 전, 백사현에게 저녁으로 뭐가 먹고 싶냐는 연락을 넣었다.
더 이상 냉전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이문진 사건에 대해 뒤로 따로 알아보지 않고 백사현에게 곧장 물었어야 했나 후회도 됐다. 하지만 그러면 백사현의 입에서 나올 거짓말이 더 마음이 아플 것 같기도 했다. 연애란 게 진짜 어렵구나. 범지훈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하기야 30여 년을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었던 생판 남이었다. 좋아한다는 감정 하나로 연인이라는 관계로 묶였다지만 사고방식이 다른 각자의 인격체이기에 아무리 사이가 좋대도 어떻게든 한 번 이상은 부딪칠 수밖에 없기도 했다.
그게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범지훈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대화를 해야 했고 범지훈은 지금이 적기라고 느꼈다.
[미안해요 형 일이 있어서 오늘은 저녁 같이 못 먹어요]
[이따 퇴근할 때쯤에 전화할게요]
백사현에게서 온 답장에 화면을 보던 범지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지금 말고도 기회는 앞으로도 많았다.
그런데, 생각만큼 많지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백사현이 범지훈의 집이 아닌 본인의 집에서 치료에 전념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을 때부터였다. 어쩐지 퇴근 후, 집에 도착해도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다 싶었다. 불이 꺼진 캄캄한 집 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둘러보며 범지훈은 핸드폰 너머로 입을 여는 백사현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안 그래도 바쁜데 형,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제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도 오래 비워진 상태라 정리할 것도 있고요.]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왜 거기로 갔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쉬는 동안만 한 집에서 같이 살자는 제안에 대한 유효가 끝났다고 백사현이 먼저 말해 버릴까 범지훈은 덜컥 겁도 났다. 그래서 백사현과 통화를 하면서도 이문진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전화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또 어떤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기에 직접 만나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해야 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백사현이 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길 꺼려 했다. 따로 살아도 틈틈이 만나는 건 똑같았다. 두 사람은 식사도 같이 했고 서로의 집을 오가기도 했다. 하지만 ‘사현아, 그 때 그 일 말인데.’라며 범지훈이 서두만 꺼내도 백사현은 미묘하게 표정을 굳혔다.
꽈악 힘주어 수저를 쥐고 있는 백사현의 흰 손에 잠깐 시선을 두었던 범지훈은 ‘이 반찬 입에 맞아?’라며 대화를 먼저 돌렸다. 분노에 힘을 주는 게 아닌 긴장에 힘을 주고 있다는 게 범지훈의 눈에 뻔히 보여서였다.
그래, 어차피 원래대로 돌아왔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범지훈은 소중한 제 연인을 겨우 이문진 하나 때문에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일상은 그렇게 흘러갔다. 얼굴을 다친 백사현은 대대적인 그룹 컴백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다행히 활동 공백기를 가진 상태였다. 얼굴이 드러나야만 하는 광고와 잡지 지면 촬영 등의 소소한 스케줄은 여럿 있었지만 발 빠른 대처로 날짜는 연기되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여.주.환>은 백사현 뿐만이 아닌 여사빈의 부상 때문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그러나 이미 정해진 녹화 날을 변경하기는 어려웠기에 프로그램 측은 백사현과 여사빈은 히든카드라며 추후에 등장시키는 걸로 구성을 변경했다. 그 덕에 이준혁은 눈에 띄게 홀쭉해진 얼굴로 안심해 댔다. 범지훈으로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범호 캐피탈을 운영하는 대표 범지훈은 어느 기업가의 파티 초대를 받았다. 알엔 그룹이었다. 여기에서 왜 나를…? ‘알엔그룹 창립 80주년 기념 파티’라고 적혀진 귀빈용 초대장을 들여다보며 범지훈은 영문을 몰랐다. 초대장을 직접 전달해 준 우정선도 마찬가지였다.
‘친분 있는 거 아니었어?’ 물어 오는 말에 ‘아니, 아버지라면 몰라도 나는 전혀.’라며 범지훈은 얼떨떨해했다. 혹시나 아버지에게 가야 할 초대장이 잘못 온 건가 싶어 수신인을 살펴도 금박으로 새겨진 ‘범지훈’이라는 세 글자는 또렷했다.
결국 범지훈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 범상철에게 전화를 걸었고, 범상철은 자신도 초대장을 받긴 했지만 그날 중요한 일정이 있어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답했다. 이로써 이건 범지훈에게 온 게 명확해졌다. 지켜보던 우정선도 한마디를 얹었다.
“회장님 대신해서 아들인 너라도 오라고 보낸 거 아니야?”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알엔 그룹 관계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귀빈용 초대장을 두 개나 만들면서까지 이렇듯 신경을 써 주는 걸로 보아 낮은 직급의 임원은 아닌 모양이었다. 결국, 그런 이의 초대를 두 번이나 거절할 수는 없어 범지훈은 창립 기념 파티가 있는 날의 일정을 조절하기로 했다.
***
거대한 파티 홀은 넓이도 어마어마했지만 층고 또한 말도 안 되게 높았다. 탁 트인 파티 홀을 비춰 주는 섬세한 장식의 금빛 샹들리에의 밝은 불빛 아래 모여 있는 이들은 알엔 그룹 창립 기념 파티에 참석한 소수의 귀빈이었다. 소수라는 말이 어울리는 숫자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리거나 흘러내리도록 스타일링한 여자들은 물 흐르듯 흘러내리는 드레스 자락을 추스르며 움직였고 남자들은 행커치프를 왼쪽 가슴에 꽂은 격식 있는 수트 차림으로 파트너인 여자들을 에스코트하거나 샴페인을 홀짝였다. 그 옛날 중세 시대 귀족들의 호화로운 무도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이런 장면일 것 같았고 또 한편으로는 명망 높은 영화제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도 했다.
범호 캐피탈의 비서직을 맡으며 이러한 기업 파티 등에 동행한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알엔 그룹 같은 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굴지의 대기업 창립 기념 파티는 처음이었다. 당연히 지금껏 본 타 기업 파티들과 비교해도 몇 배는 더 찬란하고 화려했다.
하지만 능숙한 비서답게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우정선은 초대장을 확인하자마자 안내하는 직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시선은 자신보다 조금 앞서 걷는 넓은 등을 향했다.
범지훈. 이 화려한 곳과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깔끔하게 가르마를 타서 단 한 올의 잔머리도 없이 넘긴 머리카락 아래 짙은 눈썹과 뚜렷한 티 존, 그 그늘에 가려진 날카로운 눈매까지. 머리카락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감흥 없이 파티장 안을 훑는 것도 범지훈다웠다.
맞춤 쓰리피스 수트가 범지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단단하면서도 날씬한 근육의 느낌을 유려하게 드러내는 것도 먼지 한 톨 허락하지 않는 반질한 구두코를 거침없이 내딛는 것도 꼭 초대받은 손님이라기보단 이 파티를 연 주인 같은 여유로움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우정선은 생각했다. 내가 이런 점을 좋아했는데, 하고. 성별을 떠나 저 애티튜드를 그 누가 동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었다. 범지훈은 모든 흑백 누아르 영화 속, 주인공을 유일하게 상대하는 악역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런 범지훈을 발견한 홀 안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꽂히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저희끼리 귓속말을 속닥이는 사람들의 입 모양은 미남 배우 내지는 어느 기업가 사람이냐고 묻고 있었다.
“대표님?”
그러다 들려오는 발랄한 목소리에 범지훈을 관찰하던 시선들이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당연히 범지훈과 우정선도 고개를 돌렸다.
“와, 진짜 와 주셨구나. 감사해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살풋 눈매를 휘어 내리며 반갑게 입을 여는데 우정선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건 곁에 서 있는 범지훈도 마찬가지였다. 우정선이 바로 알아챌 만큼 동요를 보이는 범지훈의 눈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초대받은 손님이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주최자스러웠으니까. 꼭 범지훈에게 초대장을 직접 보내온 사람처럼 입을 열며 그는 범지훈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이루나 씨.”
그래, 그 이름이었다. 백사현의 그룹 에스의 막내 멤버인 남자.
이루나를 바라보는 범지훈의 눈이 혼란스러운 것처럼 우정선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 줄 알았던 남자가 왜 알엔 그룹의 창립 파티에 있는지도. 분명 유명 연예인이라는 자격으로 단순히 초대를 받은 게 아닌 건 지나가는 똥개조차도 알 수 있었다.
그 느낌대로 이루나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가까이 있던 귀빈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루나가 다가올 때부터 흥미를 띠고 있던 시선들은 범지훈 또한 이루나를 알고 있자 먹잇감을 발견한 승냥이 떼처럼 변했다.
그것에 기민하게 반응하고는 범지훈과 이루나 사이를 가르듯 끼어드는 건 당연히 비서인 우정선의 몫이었다.
“안녕하세요? 초대장 보내 주신 것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발신인에 따로 이름이 없던데 직접 만나 말씀 주실 예정이었군요.”
당연히 초면인 이루나였지만, 원래부터 알고 있는 듯 우정선의 태도는 천연덕스러웠다. 그리고 그 말은 이루나의 초대를 받기는 했지만, 초대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했다. 이루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적당히 거리를 둔다. 영리한 방법이었다.
이루나 또한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반갑게 미소 짓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리곤 눈동자만 조금 굴려 티 나지 않게 주변을 훑어보고는 이내 아까와는 다른 질감의 미소를 덧씌웠다.
“깜짝 이벤트라서요. 힌트로 RN이라고 적어 놨었는데 전혀 모르셨나 봐요. 하긴 저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겠어요?”
초대장을 포장하고 있던 봉투에 발신인 RN이라고 적혀 있긴 했다. 하지만 알엔 그룹을 떠올렸지 그 말대로 아이돌 이루나를 떠올리진 못했다. 그만큼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이루나는 충격이었고 뜬금없었다.
“많이 놀라셨죠? 지난번에 저희 사현이 형 구해 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개인적으로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려 이렇게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알엔 그룹가의 막내 이루나입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뒤이어진 말에 우정선의 눈이 커졌다. 아, 소문의 그. 그리고 바로 그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함께한 조강지처와 이혼한 알엔 그룹 회장이 어린 아내를 새로 맞았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공공연했다. 그 사이에서 아들 하나도 봤다고 하더니 그게 이루나였을 줄은 전혀 몰랐지만. 그제야 우정선은 범지훈과 이루나가 아는 사이인 것 같자 일순 사납게 변했던 주위 시선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이루나의 위로는 형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형들은 알엔 그룹 회장이 조강지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이었다. 그러니 형들과 이루나의 나이 차이는 꽤나 컸다. 나이 차가 큰 만큼 장성한 형들은 지금은 후계자로서 자리매김하거나 알엔 그룹에서 큼직한 계열사들을 맡아 경영하고 있기도 했다.
당연히 이곳에 모인 귀빈들의 대부분도 알엔 그룹이나 그 아들들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알다시피 기업가의 승계 싸움은 그 옛날,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칼부림을 일으켰던 왕족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루나 또한 형들에게서나 형들의 사람들에게서 견제를 받는 게 당연했지만, 견제는 받기에는 이루나의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대외적으로 알엔 그룹과 관련된 일 자체를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니 외부에도 노출되지 않았고, 정보에 발 빨라야 할 비서인 우정선 또한 그 막내아들의 정체를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여하튼 이루나의 정체도 정체였지만, 이루나의 그 말에 그제야 날 선 시선이 조금은 누그러진 사람들을 느끼며 우정선은 재벌가 아들도 참 못 해 먹을 짓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활발하게 아이돌 활동을 하는 이루나는 이젠 알엔 그룹과는 혈연으로만 얽혔다 뿐이지 경영권 상으로는 아예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도 여전히 이런 식의 피곤한 견제를 받는 모양이었다.
“대표님이랑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저희 자리 옮길까요?”
이어지는 이루나의 물음에 범지훈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경영과는 전혀 연이 없다지만 그 알엔 그룹가의 막내 아드님과 가까운 사이로 보이는 범지훈에 대한 궁금증에 아까보다 더 많은 시선이 이곳을 주목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리고 범지훈은 범호 캐피탈과는 연관 없는 이러한 쓸데없는 주목을 좋아하진 않았다.
“우와아, 살겠다.”
파티 홀 근처에 딸린 응접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이루나는 숨통이 트이는지 목을 죄고 있던 답답한 나비넥타이도 조금 끌어 내렸다.
비서인 우정선까지 셋이 들어간다면 혹시나 회사 관련으로 얘기를 나눈다는 둥 어떠한 오해를 살지 몰라 우정선은 그동안 도움 될 인맥이나 만들어 놓겠다며 눈치 있게 빠져 버렸다. 최종적으로는 둘만 있게 된 공간에서 범지훈은 소파에 앉아 그런 이루나를 관찰했다.
“…대표님, 진짜 여기 주인 같아요. 이거 저희 아버지 건물인데도.”
그 말에 범지훈은 어떠한 표정 변화 없이 침묵을 지켰다. 사실은 어떤 답변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랬다.
“저한테 뭐 안 물어봐요?”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에는 그제야 이루나의 턱 언저리를 보던 시선이 제대로 눈을 마주쳐 왔다.
“별로 궁금한 건 없습니다. 그러는 이루나 씨야말로 저랑 얘기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요?”
푸핫. 그 말과 동시에 이루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는지 모르니 범지훈은 눈썹만 까딱이며 이루나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대표님은 진짜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른 것 같아요. 알면 알수록 재밌는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어어,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자면 저 이거 비웃은 거 아니에요. 재밌다는 것도 칭찬이었어요. 어, 건방지게 느껴지셨다면….”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엔 웃음기 가득하던 표정이 멈칫했다.
“아, 진짜.”
중얼거리는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도 일순간이었다.
“…집에서도 제일 어리고 에스에서도 제일 어려서 열린 사고를 가진 줄 알았는데, 저 사실은 편견 덩어리였나 봐요. 대표님 겉모습만 보고 되게 고압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아니시네요.”
‘사현이 형이 이래서 좋아하게 된 거구나.’ 뒤잇는 말엔 범지훈의 입술 끝이 조금 꿈틀했지만 찰나였다. 눈썹을 축 늘어뜨리던 이루나가 다시 밝은 낯을 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사실 이런 식으로 회사 이름 휘두르는 거 안 좋아하는데도 회사 이름으로 대표님 불러 자리 마련한 이유가 있었거든요.”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그, 달수 형이랑은 언제 그렇게 친해지게 되신 거예요?”
“…네?”
“저 이렇게 보여도 질투 엄청나거든요? 저희 사현이 형 뺏어 간 것도 모자라 달수 형까지 꼬시는 대표님이랑 이참에 제대로 담판 짓고 싶어서 마련한 자리인데, 방금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루나가 입을 열면 열수록 범지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진지한 얼굴의 이루나는 정말 진심인 것 같았다.
“달수 형이랑은 저번에 식사까지 같이 하셨다는데 저랑도 꼭 식사해요. 저 대표님이랑 진짜 친해지고 싶어졌어요.”
범지훈의 두 눈이 멍하니 깜빡였다. ‘식사하실 거예요? 안 하실 거예요?’ 어쩐지 협박성이 느껴지는 물음에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는데 참 해맑았다. 범지훈은 그제야 이루나가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리다는 걸 기억해 냈다.
“그런데 사현이 형이랑은 뭐 때문에 싸우신 거예요?”
돌려 묻지도 않고 곧장 직구로 꽂는 것은 아직 적응이 필요할 것 같았지만. 범지훈은 왜 이루나가 알엔 그룹의 힘을 빌려서라도 자신과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하긴 백사현의 친동생도 아니고 그저 같은 그룹의 멤버이자 동생이라는 자격으로는 별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 한은 친하지도 않은 범지훈과 둘만의 자리를 만들 수도 없을 테고 이런 질문을 할 수조차 없을 터였다.
하지만 범지훈은 권력에 휘둘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건 제가 이루나 씨에게 답하기는 곤란한 질문이네요. 차라리 사현이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러십니까?”
“어, 음… 사현이 형은, 그… 제가 곤란해서요.”
그러자 또 한 번 범지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까의 밝고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냐는 듯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하는 것엔 의아해지기도 했다. 꼭 백사현에게 약점이라도 잡혀 있거나 잔뜩 겁을 집어먹은 사람의 그것 같기도 했다.
그 판이한 태도의 원인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지만 범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하지 않는데 물어보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그래도요, 우리 사현이 형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요! 아닐 거예요… 어, 어마도…?”
그러면서도 백사현의 편을 든다기엔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이너스가 되어 갔다. 그런 범지훈의 표정을 알아챈 이루나가 그제야 입을 다물며 슬쩍 눈치를 봤다.
“그… 저희 형이 먼저 잘못한 건 맞죠?”
“…….”
“…맞구나.”
범지훈은 정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알아챈 듯 이루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이루나는 달수 형이 얘기할 땐 안 믿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는 둥, 역시 백사현이라는 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루나 씨.”
그리고 참고 참던 범지훈은 입을 열었다.
“왜 ‘우리’ 사현이 형입니까?”
“네?”
“달수 씨는 그냥 달수 형인데, 왜 사현이만 ‘저희’나 ‘우리’가 붙는지 궁금해서요.”
“…어, 음.”
저기, 대표님. 그리고 이루나가 비장하게 말했다.
“저희… 아니, 사현이 형 진짜 사랑하시는군요. 이거 질투 맞죠?”
범지훈은 입을 가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이루나의 입술 새로 웃음이 흐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긴 그 형이 내 사람한테는 진짜 잘하죠. 완전 빠질 수밖에 없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에스의 리더가 복동이 형이긴 한데 사현이 형도 제2의 리더인 거?”
곽복동이 다정하고 온화한 리더라면 백사현은 엄하면서도 차가운 리더였다. 이루나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무섭기도 한데 진짜 좋아하거든요, 사현이 형. 저뿐만이 아니고 저희 멤버들 전부가 그럴걸요?”
엄하고 차갑다. 범지훈의 앞에서는 봄볕처럼 따스하고 간지러운 태도를 보였던 이라서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였다. 하지만 동시에 알고 싶기도 했다. 범지훈은 모르지만 같은 그룹 멤버들은 잘 아는 백사현의 다른 모습을.
“이루나 씨는… 어떤 계기로 사현이를 좋아하게 된 겁니까?”
자연스레 물어 오는 질문은 이루나의 눈빛에 불길이 넘실거리게 했다. 안 물어봤으면 오히려 섭섭할 뻔했다는 듯한 태도로 이루나는 본격적으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어졌다.
***
이루나는 형들이 많았지만, 형제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막내 역할은 아니었다. 그래서 편안해야 할 집안에서도 눈치를 봤고 이따금 가족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잘 비치지 않는 큰형이나 둘째 형까지 집안에 모일 때에는 숨조차 막혔다.
그래도 이루나는 사랑받기 위해 애썼다. 형들과 닮은 점을 자신의 얼굴에서 찾거나 정장을 빼입은 멋진 형들의 모습을 동경하는 걸 어릴 적부터 해 왔던 소년답게 그런 형들에게 예쁨도 받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루나는 항상 형들에게 사랑이 고팠다.
형들은 이루나의 부모님 앞에서는 늘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부모님만 없으면 얼음장처럼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이루나를 괴롭히진 않았지만, 관심조차도 주지 않았다.
형제애라는 걸 이루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배웠다. 실재하지 않는 허상 같은 느낌은 늘 이루나를 목마르게 했다. 값진 물건, 귀하고 맛있는 음식, 높은 위치. 모든 걸 다 가진 도련님이 딱 하나 부족한 게 그것이기에 이루나는 더 갈망했다.
그래서 형들을 부지런히 따라 했다. 공부든 운동이든 특출난 재능이든 무엇 하나든 뛰어나게 잘 해내면 우수한 형들이 제게 눈길 한 자락 주지 않을까 싶어 했지만 돌아오는 건 형들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잠도 안 자고 공부한다던데 몸 상하겠다. 쉬엄쉬엄하지 그래? 대학은 생각해 봤어? 그래도 SKY는 너한테 너무 허들이 높으니까 그보다 낮은 곳부터 알아봐. 처음으로 받은 관심에 이루나는 뛸 듯이 기뻤다. 알고 보니 젬병인 운동 실력에도 무릎이 까지도록 연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루나는 형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싶었다.
육상 하다 다리 부러졌다며? 운동은 영 아닌 것 같은데 아버지 더 걱정시키지 말고 그만두는 건 어때? 그것에 그림을 시작했지만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진 못했다. 네 실력에 미대는 그렇네. 미대에 들어가도 사람들이 널 뭐라고 생각하겠어? 우리 회사 배경 때문에 들어왔다고 오해할지 모르잖아. 회사 이미지 실추되는 것도 순식간이야. 나중에 네가 알엔 갤러리를 운영한다고 쳐도 이것보다는 실력이 더 나아야지. 이루나는 그걸 관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견제라고 불렀다.
형들의 관심에 파릇파릇 피어나는가 싶던 얼굴이 서서히 죽어 간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 시기쯤 아이돌을 꿈꾼 건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 마음 때문이었다. 사실 꿈꿨다기보다는 휩쓸렸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기획사에서 반반한 외모의 이루나에게 길거리 캐스팅 제의를 했던 것이다. 어차피 아무 생각 없이 살기로 한 이루나였기에 뭐든 상관이야 없었다. 그 자리에서 기획사로 끌려가 속전속결로 연기 테스트, 노래 테스트, 마지막으로 춤 테스트까지 시켜 보고서야 기획사 사람들은 연습생으로서의 최종 합격을 통보했다.
…수 엔터테인먼트? 거기에서 너를? 하루 만에 합격이라고? 그런데, 네가 알엔가 사람인 거 밝히진 않았지? 음. 뭐, 그럼 나쁘진 않네. 계속해 봐. 연예인도 재미있겠다. 너랑 잘 어울려. 사기를 떨어뜨리려 애쓰거나 그만두기를 종용하거나 아예 안 될 거란 전제도 내지 않고 오히려 응원하는 형들의 모습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루나가 연습생 생활을 결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루나가 키가 큰데도 이렇게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는 건 장점이야. 그런데 힘은 조금 부족해 보여서 그건 보완해 보도록 하자. 형이 앞으로 계속 도와줄게.]
[너나 나나 노래 실력은 비슷하니까 둘 다 서브 보컬 포지션 맡겠다. 근데 둘 중에 누구 하나 갑자기 실력이 더 좋아지거나 뒤처지면 곤란하니까 앞으로는 같이 연습할까?]
[딕션이 좋아. 나랑 조금만 연습하면 랩 파트도 맡을 수 있겠어.]
그런 이루나에게 ‘진짜’ 형들이 생긴 것도 연습생 생활 덕분이었다. 데뷔 조라는 이름으로 한 그룹으로 묶인 사람들은 모두 이루나보다 형이었다. 그룹의 막내라는 자리를 맡게 된 것보다 기꺼웠던 건 막내인 이루나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왔던 데뷔 조 형들이었다. 단 한 명, 맏형 백사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백사현은 이루나가 연습생으로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어려운 사람이었다. 친화력 하나만큼은 모두에게 인정받던 이루나도 백사현에게는 쉬이 다가가지 못했다. 집안에서 형들의 눈치를 보며 길러 온 감은 백사현이 아무에게나 쉽게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란 걸 대번에 알리고 있었다.
데뷔 조로 함께 묶일 때에도 백사현에게 쭈뼛대던 이루나의 태도는 여전했다.
[데뷔 조 들어가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왜 저렇게 나대고 다니냐?]
그러나 백사현 말고는 아무런 문제없이 탄탄대로가 펼쳐지는 줄 알았던 이루나에게도 걸림돌은 굴러들어 왔다. 이루나를 시기 질투하던 연습생 무리였다. 정확히는 이루나보다 일찍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던 이루나의 동갑내기들이었다.
[그딴 새끼 뭐 예쁘다고. 데뷔 조에 넣어? 실력은 좆도 없구만. 춤 선 봐 줄 만하면 다냐? 다들 눈 삔 거 아니야?]
[야, 씨발. 혹시 걔 돈 쓴 거 아니야? 보니까 집에 돈은 많아 보였잖아. 같은 연생 신분이면서 쏘는 것도 잘하고 입는 옷이나 가방이나 명품이고.]
[아, 존나 싫어. 예전부터 재수 없긴 했어.]
연습실 문밖에서 그 모든 험담을 들으며 이루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악의를 담은 날 선 말들 하나하나는 귓속에 머릿속에 심장 속에 콱콱 박혀 들어갔다.
[거기서 뭐 해?]
그때, 백사현이 말을 걸어 왔다.
[연습하러 온 거 아니야? 왜 안 들어가고 여기….]
조곤조곤 말을 걸던 백사현은 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웃음소리에 말을 멈췄다.
[개웃겨. 씨발. 네 말이 맞아. 이루나 그 새끼 면상 봐 봐. 잘생긴 거 아니라니까? 그딴 새끼가 무슨 길캐야?]
[코는 했다는 거에 내 전 재산 건다. 그렇게 높은데 자연은 무슨. 아, 대가리가 꽃밭이니까 자연은 맞나?]
[야, 미친 새끼야. 존나 웃겨.]
낄낄대며 웃음을 터트리는 걸 백사현은 말없이 듣기만 했다. 이루나의 얼굴이 발갛게 익어 간 것도 그때였다. 하필이면 이걸 백사현에게 들키다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그 백사현이라 이루나는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백사현 특유의 그 서늘한 얼굴이 찌푸려지며 너 바보야? 이런 걸 왜 듣고만 있어? 라며 자신에게 따져 물을 것만 같았다.
하긴 그러고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루나의 형들 또한 종종 그런 식으로 이루나를 타박했으니 백사현이라고 별반 다르지….
[형, 뭐… 뭐 해요?]
덥석. 백사현의 손목을 붙잡고 이루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백사현은 제 손목을 있는 힘껏 꽈악 움켜쥔 이루나의 두 손을 잠깐 내려다보다 눈을 마주쳐 왔다.
[들어가서 족치려고 하는데, 왜?]
[…네?]
여전히 연습실 문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로 백사현은 닫힌 문 너머를 눈짓했다.
[저 새끼들, 저딴 소리 못하게 밟아 놔야지.]
[혀, 형. 포, 폭력은….]
[안 해. 그럼 우리 데뷔 차질 생기잖아.]
[그… 그럼…?]
[그냥, 말로 밟는 거지. 다시는 이런 소리 나불대지 못하게. 잘근잘근.]
‘잘근잘근’이라는 말을 듣는 이루나의 뒷목이 저도 모르게 선뜩해졌다. 이루나가 손목을 쥐고 있든 말든 문고리를 돌리려는 백사현에는 이루나는 잡고 있던 손목을 세게 당겨 올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도 안 돼요! 저 쪽팔린단 말이에요.]
마치 혼자서 해결 못 해 쪼르르 형에게 달려가 일러바친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이루나가 얼마나 당겼는지 한쪽 어깨의 옷이 끌어 내려져 그대로 맨살이 드러난 백사현은 그런 이루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다른 식으로 해결하길 원해?]
[네에….]
끄덕끄덕 바로 고개를 주억이며 이루나는 울먹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콱 조여드는 가슴께에 정신이 팔려 눈물을 내보내는 것조차 잊은 모양이었는지 이제야 눈가에 열이 오르며 시큰해졌다. 울지 않으려 눈에 잔뜩 힘을 줘 봤지만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이루나의 팔을 그리고 발치 또한 적셨다.
휴. 그리고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오자 이루나의 어깨가 괜스레 움츠려졌다. 이대로 손을 뿌리치고 너 알아서 하라며 가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백사현이기에 이루나는 대비했다.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밀어지는 건 주머니에 처박아 둔 걸로 보이는 주름이 잔뜩 생긴 여행용 티슈였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이루나가 얼빠진 얼굴을 한 것도 그때였다.
[닦아.]
[…가, 감사합니다.]
[잘생긴 얼굴 붓겠다.]
[네…?]
[너 잘생긴 거 사실이니까 데뷔해도 얼굴에 뭐 안 해도 돼. 그러다 상한다.]
난생처음으로 이루나는 같은 남자를 향해 심장이 뛰었다. 이른바 이루나의 ‘두근두근 우리 형아 리스트’가 만들어지게 된 첫 계기였다.
***
“…그때부터 사현이 형은 제 마음속으로 들어와 ‘우리 형’이 됐어요. 얼굴은 천사처럼 예쁘게 생겼으면서 그렇게 악독하고 멋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 악독하다니. 진짜 사현이 형이랑 너무 잘 어울리는 단어 같아요, 대표님.”
어쩐지 사위민 같은 얼굴로 백사현을 떠올리며 이루나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 범지훈은 여전히 입가만 매만지고 있었다.
“뭐, 그래서 그 뒤가 더 있는데요. 제가 이 형을 존경하면서도 무서워하게 된 게 이 형이 글쎄 그동안 저 험담하고 다닌 연습생들 대화를 전부 녹음했지 뭐예요? 근데 그 새끼들도 멍청한 게 저 하나만 험담한 게 아니라 다른 연습생들이랑 저희 가르쳐 주신 트레이너 쌤들이나 팀장님, 직원분들까지 정도가 심하게 인신공격식으로 욕을 하고 다닌 거예요. 그렇다고 어디 자기들만 아는 장소에 숨어서 욕한 것도 아니야. 연습실이나 회사 복도나 화장실에서나 대놓고 그러는데 녹음기 들고 쫓아다니기만 하면 되더라고요. 아, 제가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거야 사현이 형이랑 같이 녹음해 댄 게 저였으니까요.”
헤헤, 쑥스러운 듯 웃으며 이루나가 뒷머리를 긁적이는데 웃음은 해맑았지만 하는 말은 전혀 해맑지는 못했다.
“그런데 막상 녹음해도 저희가 당사자도 아니고 남 욕한 걸 어디다 쓰나 싶었거든요? 저는 기껏 해 봐야 걔네들한테 녹음본 들려주고 앞으로 조용히 살라는 협박용으로 쓰나 했더니 제가 땅 위에서 뛰고 있었으면 사현이 형은 제 위에서 날고 있더라고요.”
어느 정도의 증거 자료가 갖춰진 그날, 이루나에게서 모든 녹음본을 백사현이 수거해 간 후 늦은 밤, 수 엔터테인먼트 연습생들이 가입돼 있던 인터넷 카페에 익명으로 게시글이 하나 올라왔다.
그리고 그 게시글은 짧은 시간 내 베스트 글로까지 올라갔다. 제목은 ‘폭로’ 내용은 동영상 파일 하나와 녹음 파일 여러 개였다. 동영상 파일 속에는 거리낌 없이 남의 험담을 하며 낄낄대는 연습생 몇 명의 얼굴이 분명히 찍혀 있었고, 녹음 파일에는 동영상에 나왔던 연습생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녹음돼 온갖 인신공격성 발언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 인터넷 카페에는 연습생들과 회사 관계자들뿐만이 아닌 연습생들의 개인 팬들까지 가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폭로’ 글은 연습생들과 회사 관계자만 확인이 가능한 카테고리로 골라져 올라왔고 개인 팬들까지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회사는 발칵 뒤집어졌다. 험담의 피해자들은 도를 넘는 말들에 격분해 했고 개인적으로 명예 훼손으로 고소까지도 알아보았다. 가해자인 연습생들은 당연히 회사를 퇴사해 버렸고 그들의 부모들은 회사를 찾아와 피해자들에게 연신 굽실거렸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본 게 사현이 형이에요.”
“…이루나 씨. 익명으로 글을 올려도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볼 수 있었을 텐데, 사현이에게 다른 피해는-”
“당연히 없었죠. 사현이 형이 멋있으면서도 무서운 게 그거였어요.”
[내가 누구인지 밝혀질 시 전체 공개 카테고리로 바꿔 올립니다.]
‘폭로’ 게시 글의 가장 아랫부분에 경고처럼 쓰인 한 줄. 아니, 경고가 맞았다. 회사 관계자들뿐만이 아닌 개인 팬이라는 이름의 일반인들에게도 알려 너희의 인생 자체를 망가뜨려 버리겠다는 악의가 가득 담긴 경고. 그것에 ‘폭로’ 글을 올린 게시자의 신상은 파헤쳐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거 말고도 우리 에스가 데뷔 초였을 당시에 잘 나갔던 다른 아이돌 그룹 하나가 저희 엄청 무시하고 면박 준 적도 있었는데 그것도….”
저도 모르게 입을 열던 이루나가 합 하고 다물어 버렸다. 인상을 찡그리며 지그시 눈을 감는가 싶더니 슬쩍 시선만 들어 올리며 이루나는 말했다.
“…더 이상은 얘기 안 할래요. 사현이 형이 독하다고 험담하는 것 같아요. 대표님께는 우리 형 점수 높여 주려고 했던 말인데요.”
끄응, 소리와 함께 입까지 막아 버리는 이루나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한 것 같았다.
“그래도 사현이 형 좋은 사람이에요, 대표님. 내 사람이랑 아닌 사람에 대한 태도가 분명해서 그렇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해요.”
“…네?”
이루나의 두 눈이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하며 얼떨떨해하는 이루나에게 범지훈은 짧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이미 답을 정해 두고 대답을 하라며 강요를 한 식이었다. 설령 정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혹은, 정당한 이유가 없었더라도 연인에게 그러한 태도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은 이유야 아무래도 좋았다. 이기적이더라도 지금 범지훈에게 소중한 건 전 애인 이문진이 아닌 현재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백사현이었으니까. 이렇듯 주변에서 싸웠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만큼이나 백사현은 속앓이를 한 모양이었다. 분명 자신보다 더한 속앓이를 했을 것 같아 범지훈은 마음이 좋지 못했다.
“정정해야겠습니다. 이루나 씨. 아무래도 제가 먼저 오해할 수 있게 말을 한 것 같아요.”
“…대표님.”
“싸우게 된 이유는 제 잘못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이루나의 시선이 범지훈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대표님… 그렇게 웃으실 줄도 아시네요.”
‘이래서 사현이 형이 좋아하는구나.’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더 이루나는 입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