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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혼설 (43)화 (43/138)

43화

“대관절 어찌할 셈이오!”

버럭 언성을 높이며 들어오는 노인.

“내 종주를 믿고 맡겼거늘. 유랑술사를 이용하긴커녕 빌미만 주지 않았소! 이러다 우리 치부가 알려지기라도 하는 날엔···.”

“허허, 치부라니. 혜선공께서도 수치인 줄은 아는가 보구려.”

“무어라 하셨소?!”

혜선공이 불같이 화를 내는데도 하 종주는 무덤덤하였다.

“아해들에게 가문의 문양을 숨기라 하셨다지요? 떳떳하다면 어찌 그런 명을 내리셨겠소이까.”

지그시 눈을 감는 종주의 작태에 혜선공이 연치도 잊고 방방 뛰는 추태를 보일 뻔하였다. 다행히도 그 전에 종주가 도로 눈을 떴다.

“오는군.”

반들반들한 지팡이 손잡이를 어루만지며 그가 중얼거렸다.

“엉덩이 무겁기로는 강암의 바위산 못지않은 위인들께서 기어이 예까지 걸음 하시다니. 참으로 놀랍군.”

혜선공의 뒤를 이어 새로운 면면이 들어섰다. 솟대의 나무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더니 그들의 어깨 위로 하나씩 내려앉았다. 예서 벌어진 일을 모두 지켜보고는 서둘러 걸음 한 그들은 운해 하씨 대종회의 일원이었다.

하얀 백발에 수염을 길게 기르고 뒷짐을 진 그들은 하나같이 세월의 풍파를 거쳐 엄숙한 풍모를 지녔으나, 개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인물이 있었다. 남여에 앉은 노인. 내실까지 가마를 타고 들어왔음에도 썩 놀랍지 않을 만큼 주름지고 뼈가 삭아 푹 고꾸라질 것 같은 형상이었다.

“허허. 어르신께서도 친히 납시다니. 이 사람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나 봅니다.”

“그래, 이번은 종주께서 실수하시었소.”

“어르신께서 이날을 얼마나 학수고대해 왔는지 자네도 알지 않나.”

대종회의 연세 지긋한 노인들마저 어르신이라 부르는 자. 전 종주는 남여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끓는 듯한 음성으로 낮게 뇌까렸다.

“종주··· 약조를 잊은 겐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르신.”

시종들이 남여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전 종주는 사람이 녹아내린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은 몰골임에도 그 안에 탁한 시선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하 종주가 지팡이를 놓고 늦게나마 예를 표했다.

“인간의 육을 벗고 신령이 되어 일족을 영영 세세 지켜 주시리라는 그 희생적인 각오를 어찌 잊을 수 있겠나이까.”

하 종주는 극진히 예를 표했으나, 그렇기에 오히려 반어적으로 느껴졌다. 육신을 벗고 신령이 되겠다니.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따로 없잖은가. 심지어 그리 말한 자가 운해 하씨의 전 종주임을 안다면, 노망이라도 드셨냐며 빈축을 살 터였다.

하나 놀랍게도 예 모인 대종회의 일원들은 전 종주의 뜻을 진심으로 받들었다.

“그렇소. 어르신께서 사후 안식을 마다하고 우리 하씨를 위해 새로운 용이 되어 주시겠다 하셨거늘.”

“다 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이리저리 물어뜯기는 중에도 하 종주는 불편한 내색 없이 상황을 주도했다.

“글쎄올시다. 정녕 다 된 밥이었는가는 두고 봐야지 않겠소.”

종주가 눈짓하자 반보 뒤에서 머물던 방위대장이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를 가져왔다. 덮개를 열자 그 안에서 검은 뱀이 쉭쉭 대며 머리를 내밀었다.

“이것이 우리가 생포하려던 이무기 사령의 실체올시다. 이리 작은놈을 제물로 쓴다 한들 어르신께서 용으로 거듭날 턱이 있나. 모다 부질없는 짓이외다. 청현수의 이무기는 씨가 말랐으니 앞으로 이 땅에 새로운 용은 날 수 없을 겝니다.”

“다 아는 사실을 새삼 되짚을 필요는 없소!”

혜선공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한들 가만있을 수는 없잖나. 물의 군주께서 진노를 가라앉히길 마냥 기다린 지 벌써 이백 년이오.”

“동해 용께서 그간 북방의 혹한이 다환의 바다에 미치지 않도록 힘써 오셨으나 한계에 다다른 게지.”

오대세가가 타 가문과 차별되는 이유. 그들이 가진 특권의식의 근거.

이들의 시조는 후손을 위해 개인이 아닌 집단 자격으로 언약을 맺었다. 보통 술사들이 합이 맞는 신령과 연을 맺는 반면, 오대세가는 약속된 가문에 소속됨으로써 언약을 갈음한 것이다.

날 때부터 이미 술사로서 자격요건을 충족시킨 이들. 덕분에 여타 술사들이 적합한 신령을 만나 언약을 맺기까지 숱한 난행을 겪을 때 세가의 일원은 시행착오를 생략했다. 남보다 앞선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셈이다.

덕분에 수월하게 입지를 다질 수 있었으나, 모든 일에는 장단이 있기 마련. 근 몇 년 새 운해 하씨는 치명적인 문제에 봉착하였다.

“날이 갈수록 용의 축복이 줄었다지만, 올해는 특히 심각합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 중 권능을 물려받은 아이가 절반도 채 되질 않아요.”

세가와 연을 맺은 신령 중 유일하게 동해 용만이 물과 얼음의 군주 휘하에 속했다. 물의 군주는 혹한의 대제라 불리며 머나먼 이북을 동토로 전락시킨 잔혹한 이였다.

대지의 군주 다화련이 다스리는 이곳, 다환에는 비교적 영향이 미미하나 그뿐. 세상 모든 물의 신령은 태초의 수원이자 왕 중의 왕 되는 군주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혹한의 영지인 이북 동토와 인접한 동해의 용은 크게 영향받는 축에 속했다. 부동해(不凍海)를 유지하고자 힘을 소진한 탓에 한낱 인간에게 빌려줄 영력이 남아나질 않은 것이다.

여러 가문에서 제각기 다양한 신령과 연을 맺은 술사 집단, 영화단과는 달랐다. 일족 모두가 한 신령과 약조하였으니 해당 신령에게 문제가 생기자 가문의 근간이 송두리째 흔들려 버렸다.

“우리에겐 새로운 용이 필요합니다. 아니, 반드시 용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이 상황을 타개할 수만 있다면···.”

“유랑술사.”

저마다 걱정과 우려를 표하는 가운데. 전 종주가 입을 열었다.

“유랑술사. 그자는 인간인가?”

그 물음이 내포한 저의를 깨달은 자들이 경악했다.

“어, 어르신. 아무리 그래도 사대귀인을 제물로 쓰기는······.”

“운해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이무기는 지금껏 잘만 제물로 바쳐 왔으면서. 하등 관계없는 유랑술사는 안 된다는 겐가?”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짓눌렀다. 끔찍한 공백 속에서 하 종주가 한 발 나섰다.

“어르신. 유랑술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이백 년 넘게 살 수 없네. 심지어 그자는 늙지도 않았더랬지.”

“역사에 길이 남은 뛰어난 술사 중에는 일반적인 수명의 한계를 넘어선 자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래 봤자 한 세기를 조금 넘겼을 뿐이오.”

“다른 사대귀인. 영화단주와 만물점주도 유랑술사와 비슷한,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을 살아 왔습니다.”

“그들은 마땅한 내력을 지녔지. 한데 유랑술사는 어떤가? 누구 그치의 내력을 아는 자가 있나?”

전 종주와 현 종주 간에 치열한 논박이 이어지고. 전 종주가 끝을 맺었다.

“참으로 이상하군. 종주, 자네는 누구보다 우리 가문을 위해 헌신할 사명을 가졌을 터인데. 어찌하여 외부자를 두둔하는 겐가?”

“두둔이 아니라 신중하자는 겁니다. 유랑술사가 사람이라면, 우리는 무고한 자를 살인하는 게 됩니다. 심지어 이백여 년간 선행을 베풀어 온 의인을 말입니다.”

“종주의 뜻이 정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 보게나.”

전 종주가 무거운 눈꺼풀을 축 늘어뜨리고 가늘어진 눈을 홉떴다.

“그자가 진정 인간인지.”

하 종주가 거짓부렁을 입에 올리고 유랑술사가 지적하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왔을 때. 소영과 재효는 맞서 싸울 의지를 불태웠다.

한데 정작 당사자인 유랑술사가 순순히 따랐다. 양손에 나무 수갑인 추(杻)를 채우고 초도의 자물쇠로 잠가 닫기까지 하는데도.

“하하. 갇혔네요.”

철컥, 방문까지 초도의 자물쇠를 달아 이중으로 갇혔다. 재효가 참지 못하고 울컥했다.

“대선배는 지금 웃음이 나와요?”

방안을 빙글빙글 맴돌며 재효가 열분을 토했다.

“추는 사형을 범한 죄인한테나 채우는 거잖아! 대선배가 뭘 어찌했다고 이런 취급인데?!”

“아마 죄인 취급보다는 술법 사용을 막으려는 의도로···.”

“제가 그걸 몰라서 물었겠어요?! 화 안 나요? 억울하지도 않냐구요!”

“음. 딱히?”

당사자는 그다지 화도 안 나고 억울하지도 않다는데. 정작 제 속이 터질 것 같아 가슴을 쿵쿵 치던 재효가 으아악! 하고 목청을 자랑했다.

“이놈의 방구석. 당장 나가 버릴 거야!”

당당하게 선언한 재효가 너른 창문을 향해 뛰어들었으나 도로 튕겨 나갔다. 투명한 벽에 부딪힌 재효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구르는 동안 소영은 창가로 다가갔다. 재효가 들이받은 허공에 수면처럼 파문이 일었다.

창밖 풍경은 푸르른 바다였다.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보니 파도가 철썩이며 벽면에 부딪혔다. 샛길조차 없이 동해와 인접한 건물은 창문을 통한 탈출을 꿈도 못 꾸게끔 했다.

“어째서 우릴 가뒀는지 모르겠다. 거짓말을 들켜서?”

재효가 벽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이무기가 마을을 습격했다는 건 확실히 거짓말 같더라. 종주씩이나 돼서는 피해받은 마을 하나 제대로 못 대고.”

혹이 난 이마를 문지르는 재효 곁으로 소영이 다가갔다. 재효가 무릎걸음으로 비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왜 거짓말했을까?”

“선배님 때문이겠지. 하 가문의 술사들이 습격당한다는데도 반응이 시원찮으셨잖나.”

본인 얘기가 나오자 맞은편 벽에 기대앉은 유랑술사의 삿갓이 슬쩍 기울었다. 재효는 소영에게 동의했다.

“맞아. ‘그리고요? 그게 전부인가요?’ 연타가 압권이었지.”

이마의 고통도 잊고 재효가 키들거렸으나 소영은 진지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무리하게 거짓을 내세워서라도 선배님께 요청한 점이다. 직접 겪어 보니 알 수 있었다. 그 이무기는 하 가문의 술사들도 조금 무리한다면, 충분히 제압 가능한 개체였다.”

이무기 허물을 뒤집어쓴 뱀은 위력적이었으나 그래도 오대세가 운해 하씨 아니던가. 위험을 감수하고 단체로 나선다면, 능히 토벌할 수 있을 터였다.

“우리가 빠진 땅굴은 규모가 상당했지. 술사를 대거 동원한다 해도 그처럼 거대한 함정은 다시 만들기 힘들 거다.”

“맞아. 나도 우리 할배가 그런 거 만들라고 시키면 당장 짐 싸 들고 튀었을걸.”

스스로 말하고도 위화감이 들었다. 재효는 오는 길에 나눈 잡담을 떠올렸다.

“하씨 애들도 불만이 많았어. 이무기 하나 잡겠다고 온갖 고생을 다 하더니 이제는 삽질까지 시킨다고 하소연했거든.”

“땅굴은 대규모 토목 작업이다. 반대 여론이 극심했을 텐데 무릅쓰고 강행했겠지.”

“그런데 실패했네? 우리 때문에.”

“이무기도 같은 수에 두 번은 안 당할 터. 좋든 싫든 이제는 직접 손을 쓰는 수밖에 남지 않았을 거다.”

“현장 술사들한테 이무기를 산 채로 잡아 오라 시키면 죄다 들고 일어날걸? 단순 토벌보다 훨씬 어렵잖아. 술사로 살면서 부상이나 사상 위험은 늘 염두에 둔다지만. 더 안전한 방법이 뻔히 있는데도 위험한 길을 가라시면 당연히 열 받잖아.”

“그때 부상, 사상 위험 없이 단독으로 이무기를 생포할 능력자가 나타났다.”

둘은 동시에 유랑술사를 쳐다보았다. 느닷없이 주목받은 술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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