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어쩔 수 없지요. 수줍은 서방님을 위해 잠시 다녀올게요.”
재차 기척이 사라졌다. 아무개는 욕조 너머로 눈만 슬쩍 내놓았다. 술사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훌훌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뜨거운 온도에 전신이 노곤노곤 풀어졌다. 아무개는 숨을 한껏 들이마시고는 머리끝까지 잠겨 들었다. 피부와 머리칼에 엉긴 끈적한 혈흔이 물에 탄 소금처럼 녹아 사라졌다.
물에 잠겨 아득한 귀에 둔탁한 음이 웅웅 울렸다. 술사가 돌아온 모양이다. 아무개는 욕조 가장자리에 달라붙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술사가 병풍형의 가림막을 설치하고 있었다.
나무 살에 종이를 덧바른 가림막에 술사의 동세가 그림자극처럼 비쳤다. 그가 새 옷과 수건을 가림막 위에 걸쳐놓았다.
“씻고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멀리 돌아간 술사가 이불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개는 생경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한쪽에서 씻는 자신과 다른 쪽에서 이부자리를 마련하는 술사님. 이건, 이건··· 살림이라도 차린 것 같지 않은가?
찰싹! 두 손으로 뺨을 두드렸다.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니··· 아무것도.”
차진 소리가 동굴에 울려 술사에게까지 전해졌다. 아무개는 대강 얼버무리고 다시 잠수했다.
정신 차리자. 혼례니 서방님이니 하는 건 죄다 농지거리다. 멋대로 홀려서 이상한 상상 하면 안 돼.
마음을 다잡은 아무개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빼냈다. 얇은 가림막이 그들 사이를 막아 주었다. 고작 그걸로도 한결 편해져서. 아무개는 가림막 뒤에 숨어 조심스레 속내를 풀어냈다.
“저기··· 술사님.”
“네에.”
“나··· 막,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가림막에 고인 상대의 그림자가 우뚝 멈췄다. 아무개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미안해서 그래? 그치만··· 술사님 탓이 아니잖아. ······장승들이 날 거부한 건.”
오히려 아무개가 미안할 일이었다. 저 때문에 주단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축지로 이쪽저쪽 왕래하며 들이는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
“그렇다 해도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죠? 두 번이나 연달아 문전박대당했잖아요.”
아무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가림막 때문에 그에게는 제 모습이 보이지 않으리란 걸 잊고.
“별로··· 흉신을 꺼리는 건··· 당연하잖아.”
아무개는 정말로 마음 상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거부하는 건 자연스러운 본능이니까.
더불어 아무개는 저를 싫어하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해 줄 의향이 잔뜩이었다. 좀 전에도 그렇다. 만약 술사가 곁에 없었다면, 장승이 흔적도 남지 않게끔 잘게 토막 내 땔감으로 썼을 터였다.
운해 하씨도 마찬가지. 술사가 있어 혹여나 죽지 않을 정도로 손 본 거지. 그렇지 않으면 번거롭게 살려 둘 까닭이 하등 없었다.
“어찌 당연해요.”
정리를 마친 술사가 가까이 다가왔다. 가림막 너머에 선 그가 얇은 한지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지 마세요.”
미움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요.
술사의 말소리가 공동에 잔잔히 울렸다. 아무개는 가림막에 드리운 어둑한 인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 의중이 어떻든··· 현실이 그렇잖아···?”
아무개는 움츠러들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덤덤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나열할 따름이었다.
“딱히··· 신경 안 써. 그러니까, 술사님도······ 신경 쓰지 마.”
벌레를 혐오하는 이에게 벌레도 댁을 싫어한다 하면, 어떤 대답을 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개는 딱 그 정도의 감응이었다.
“진정으로 개의치 않으시나요? 세상 사람 모두가 당신을 미워해도?”
“······어? 그건···.”
수면이 출렁이며 따끈해진 손이 서늘한 공중으로 빠져나왔다. 아무개는 가림막을 향해 젖은 손을 가져다 대었다. 술사가 손 짚은 반대쪽에. 얇은 종이 한 장을 두고 서로 맞대듯이.
“전부는 좀······ 한 명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온 세상 사람이 미워하든 말든 상관없다. 어차피 아무개도 인간이라면 질색이니까. 하지만 단 한 사람은.
······만약 술사님이 날 미워하면, 난 죽고 싶을 거야.
“전부터 여쭤보려 했는데요.”
세모꼴의 삿갓 그림자가 기울어졌다. 마치 고개를 갸웃하듯이.
“혹시 저희. 예전에 만난 적 있나요?”
아무개가 움찔했다.
“이상하죠. 제 기억으론 함 장군님 댁에서 처음 뵈었는데. 아무개 님은 저를 잘 아는 듯해서요.”
아무개는 눈치가 썩어 문드러진 작자도 알 수 있으리만치 술사를 편애했다. 아주 노골적으로 티를 냈더랬다.
“저와 일면식도 없이 무작정 호의를 품은 분은 의외로 많아요. 유랑술사니 사대귀인이니 하는 소문이 퍼진 바람에 무어든 들어주는 만능해결사 취급하시더라고요.”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지식과 잡다한 재주로 기괴한 난제를 풀어내는 그에게 만능해결사라는 표현은 잘 어울린다고. 아무개는 이 와중에도 잠시 딴생각을 했다.
“하나 풍문으로 전해 들은 이에 대한 근거 없는 호의라기엔··· 아무개 님은 조금, 과한 편이시죠.”
그러니 혹 우리가 과거에 만난 적이라도 있느냐, 그런 뜻이렷다.
“······있어. 만난 적.”
찰방, 수면이 요동쳤다. 아무개는 손을 거둬들이고 온수에 턱 끝까지 잠겨 들었다.
“역시 그랬군요. 미안해요. 몰라뵈어서.”
“아니야······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해. 내가··· 너무, 달라져서.”
“그런가요? 하긴 아무개 님 얼굴을 봤다면 기억 못 할 리 없죠.”
술사의 그림자가 희미해졌다.
“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던 듯한데, 제게 아무개 님과 꼭 닮은 벗이 있었거든요. 깊이 교제한 사이는 아니지만··· 아무개 님을 처음 뵀을 때, 그 친구가 환생이라도 한 줄 알았어요.”
언젠가 흘러가듯 들었던 이야기였으나, 아무개는 재차 움칫했다. 가림막이 있어 다행이다. 지금 얼굴을 보이지 않아도 되어서.
“어찌 됐든 다행이네요. 아무개 님께는 제가 썩 괜찮은 인상으로 남았나 봐요.”
“···응?”
무슨 뜻이지? 아무개는 욕조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 봤자 가림막에 가려 뵈질 않았지만.
“저야 약소하게나마 힘을 보탤 뿐이라. 제가 조력해도 결국 곤경에 처한 분들이 허다해요. 한데 이런 얘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더라고요.”
가림막에서 손을 뗀 그가 서서히 멀어졌다.
“아무개 님은 일이 잘 풀렸으니 저를 좋게 봐 주셨겠죠?”
“어······ 그, 렇지?”
떨떠름함을 기색으로 긍정인지 의문인지 모호하게 대꾸하자 술사가 하하, 웃었다.
“슬슬 저녁상 받아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의 기척이 사라졌다. 꼼지락꼼지락 씻으며 아무개는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눈을 감고 목욕통 밑바닥까지 잠수해 웅크려 앉았다.
내가 일이 잘 풀려서 술사님께 호감을 느꼈다고?
맞다. 실상 별다를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이리 기분이 저조할까.
바닥에 가라앉아 곰곰이 생각하는데 불현듯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술사님은 내가 도움을 받았을 거라고, 당연히 그러리라 여긴 거지?
사람이 사람과 맺는 관계란 얼마나 다양한가. 가깝게는 동료나 친우, 이웃 등이 있으며 원수 따위의 부정적인 인연도 더러 있다. 한데 술사는 기억에도 없는 아무개가 자신에게 도움을 받았으리라고, 무의식중에 단정 지었다.
그건 마치··· 유랑술사의 주변에는, 그에게 도움받은 자들로만 이루어졌다는 증명 같잖은가.
숨 막히는 답답함이 극에 달했다. 더는 견딜 수가 없어서. 아무개는 두 다리를 곧추세우고 일어섰다. 흠뻑 젖은 머리가 축 늘어진 채 물기를 뚝뚝 흘렸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눈뜨자 맛있는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아무개 님. 저녁 드세요.”
분주한 기척 속에서 술사가 자신을 불렀다. 아무개는 몸을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수건을 머리 위에 뒤집어쓴 채 슬금슬금 가림막 옆으로 나선 아무개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바닥에 깔린 멍석과 그 위에 놓인 너른 평상. 좌등을 놓아 어두운 동굴을 한층 밝히고 벌레 쫓는 향까지 피워놓았다.
“여기로 오세요.”
술사의 손짓에 아무개는 홀린 듯 걸어갔다. 멍석 언저리에 신을 벗고 평상에 올라앉으니 칠첩반상이 자신을 맞이했다.
이건··· 실외에서 야숙하는 형국이 아니잖은가.
풍찬노숙을 예상했던 아무개는 기대를 배반하는 광경에 당혹하며 엉거주춤 수저를 들었다. 맞은편의 술사도 젓가락을 쥐었다. 그의 소매 안에서 검은 뱀이 머리를 내밀었다. 술사가 검지로 뱀 머리를 슬슬 문질러 주었다. 아무개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뱀을 빤히 보았다.
실상은 조그만 새끼였으나, 덩치만 놓고 보면 큼직한 구렁이만 했다. 저런 놈이 소맷자락에 다 들어갈 리 없는데.
술사가 넉넉한 소매를 걷어 올렸다. 핏줄이 도드라진 흰 팔에 검은 뱀이 문신처럼 스며들었다.
“······걔는 뭐 먹어?”
아무개와 마주친 뱀이 찔끔하며 고개 숙였다. 녀석의 머리가 술사의 손등으로 쑤욱 들어갔다. 술사의 육체가 너른 화선지라도 되는 양, 뱀이 피부를 기어 다녔다.
“이무기 허물을 다루느라 기운이 쇠하셨더라고요. 해서 제 영력을 나눠드리고 있어요.”
아무개는 입술을 삐죽였다. 저거, 저 뱀. 계 탔네.
청현수에서 수천 년을 수련하고도 이무기로 거듭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 힘들여 이무기가 되어도 게서 또 용이 되는 건 한 손에 꼽는다.
하지만 유랑술사가 친히 영력을 나누어 준다면? 하찮은 미물조차 영물이 될 지경일진대. 저 뱀은 이제 이무기는 물론 용까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밥은 무슨. 영력만으로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겠네.
“이분께도 이름이 필요하겠죠?”
“······어? 그, 렇지···?”
꽁해지려던 찰나라 아무개는 조금 늦게 반응했다.
“아무개 님이 지어 주시겠어요?”
“···내, 가?”
놀라 눈을 끔뻑이자 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아무개 님이요.”
“······그래도 돼?”
젓가락으로 애꿎은 밥알을 괴롭히며 주저하자 술사가 하하 웃었다.
“안 될 까닭이 무어예요. 앞으로 오래 함께 지낼 텐데.”
오래. 함께.
고작 두 단어에 마음이 뒤숭숭하게 흔들렸다. 아무개는 괜스레 겸연쩍어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