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혼설 (109)화 (109/138)

109화

점주는 눈 속에 파묻힌 황제를 힘겹게 꺼내었다. 진땀을 빼며 설원 위로 황제를 누이던 점주가 멈칫했다. 

황제의 발목 아래가 없었다.

“놀랄 것 없네. 도자역 증상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네. 그렇습죠.”

점주는 힐끗 원귀를 곁눈질했다. 설원처럼 창백한 청년은 흑기를 두루마기처럼 몸에 휘감았다.

원과 한을 다스리지 못해 범람하던 이전과 판이했다. 확실히 통제하는 모습.

“이보게, 점주. 묵월당이란 치의 화도는 죄 이 모양인가?”

도로 황제에게 시선을 돌린 점주는 면전에 불쑥 들어온 시뻘건 것에 소스라쳐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시 보니 붉은 동백꽃 한 송이였다.

사람 놀래키는 것에 한 재주 하는 원혼과 추격전을 벌인 탓일까. 아주 새가슴이 다 돼 버렸다. 

“이 모양이라 함은, 어인 말씀이시온지요···?”

점주가 공손히 동백꽃을 받아들자 황제가 풍광을 음미하듯 찬찬히 눈을 굴렸다.

“묵월당의 그림은 모두 이처럼 현실적이냔 말일세.”

등골을 오싹하게 훑는 냉기와 하얗게 뒤덮인 설원. 손톱으로 콕 찌르면 반달형으로 짓이겨지는 동백 꽃잎까지. 어느 것 하나 실제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묵월당의 작품 중에서 극히 일부, 특정한 종이를 쓴 것만 이렇습죠.”

“종이가 비결이라?”

“네. 천지십경도를 그리고자 여정에 오른 묵월당은 저자도(楮子島)로 향했습니다.”

입을 나불거리면서도 점주의 눈은 거듭 원귀를 향했다. 어쩐 일로 잠잠하다만, 저런 게 지척에 있거늘. 이리 딴소리해도 되나 싶은 모양으로.

그렇다 한들 감히 폐하의 하문을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라. 점주는 언설을 풀어 나갔다.

“명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 닥나무가 많은 섬입니다. 구 제국 황실에 진상했을 정도로 유명한 종이 생산지입죠.”

저자도는 다환을 종단하는 거대한 물줄기 원강(元江)이 품은 하중도(河中島) 가운데 하나로 풍광이 아름다워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였다. 하지만 묵월당의 목적은 유람이 아니었다.

그곳은 한지를 생업 삼은 이들이 다수였으며, 섬 안팎으로 닥나무 껍질이나 종이를 파는 지점이 번성했다.

“묵월당이 저자도에서 구한 한지로 산수도를 그리자 이렇듯, 화도 속 풍광이 실존하게 되었습니다.”

“허어. 그런 기묘한 종이가 있었단 말인가? 어찌 짐은 몰랐을고.”

“당연합니다. 저자도의 모든 종이가 그렇진 않으니까요.”

뒷머리를 긁적인 점주가 기억을 복기하듯 먼 하늘을 올려봤다.

“연나라 말 무렵. 저자도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거대한 불길은 시인 묵객이 찾던 풍광은 물론 주민들의 집과 재산, 항산(恒産)이 되어 준 닥나무까지. 모조리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사방에 강이 흐르는 하중도라 인명피해는 미미했습니다. 불길이 잠잠해질 때까지 강물에서 기다리면 되니까요.”

“하나 잃어버린 가산은 돌아오지 않지.”

“예. 화재로 저자도 닥나무는 씨가 말라 버렸습니다. 그렇게 불모지가 되는가 싶었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새까맣게 타 버린 저자도에 꽃과 나무가 무성히 우거졌다. 하루아침 새에 잿더미 섬에 녹음이 돌아온 것이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그야말로 기적.

아무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한 이를 알고 있었다. 율해서. 홍의백면.

······수호지신.

“화마가 휩쓴 섬. 신기루처럼 하룻밤 새 우거진 숲. 그곳에서 처음 자란 닥나무로 제조한 종이.”

점주가 세 손가락을 꼽으며 나열했다.

“병풍 속 세상은, 이 조건에 해당하는 종이와 묵월당이라는 희대의 기재가 만나 벌어진 괴이입니다.”

율해서라는 전무후무한 천재 술사가 잿더미에서 소생시킨 나무로 만든 종이. 마찬가지로 탁월한 재능을 지닌 묵월당.

천지십경도의 기이한 세계는, 이 둘이 어우러져 생긴 이변이었다.

그림에 깃든 이적을 목도한 묵월당이 추후 저자도에 재차 방문했으나, 폐허에서 자란 닥나무는 이미 다 베어진 후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오로지 율해서의 신력만으로 생장한 나무는 더 없었다.

“재료가 소진됐으니 그 종이를 다시 제조할 수도 없고, 묵월당 같은 화공도 보기 드물지. 이리 괴이한 귀물은 다시 없겠군.”

“예. 혹여 묵월당이 여분의 종이로 남몰래 명작을 그렸다 한들. 지난 세월 동안 남아나지 않았을 겁니다.”

묵월당은 연나라 말기의 인물. 연제국이 스러지고 이백여 년의 난세가 근래까지 이어졌다.

이 혼란한 시대에 어느 누가 그림 따위를 간수하려 했을까. 만물점주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진즉 군홧발에 짓이겨졌을 터다.

“아쉽군. 이런 화도가 더 있다면, 원귀를 어찌 처리할까 골머리 앓을 필요도 없었을진대.”

원귀가 들을까 걱정도 안 되는지. 황제는 대범하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어찌하겠나? 이 몸이야 예서 죽어도 상관없다만, 원귀가 병풍 안에 얌전히 갇혀 주진 않을 것을.”

“저라고 달리 방도가 있겠습니까. 겉모습이 멀끔해진 만큼, 말이 통하길 바랄 수밖에요.”

“말이 통한다라···.”

점주의 헛소리를 되뇌던 황제가 돌연 원귀에게 소리쳤다.

“여봐라! 내 말을 듣고 있느냐?”

원귀는 새하얀 설원 속 홀로 붉은 동백을 멀거니 응시했다. 그에게서 별다른 반응을 끌어내진 못했으나, 황제는 개의치 않았다.

“여긴 병풍 속 세상이다! 너를 화폭에 끌어들인 까닭은, 민간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이라!”

그때. 원귀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스르륵 돌아간 원귀의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칠흑 같은 기운에 둘러싸인 희멀건 낯은 귀신처럼 창백했다.

“네가 인명을 해치지 않겠다면, 함께 밖으로 나가도 좋다!”

홍채와 동공의 경계가 불분명한 새까만 눈이 두 사람을 스치었다. 그 시선은 사람이 아닌 사물을 보듯, 온기가 담기지 않았다.

원귀가 미끄러지듯 홀연히 움직였다. 그를 둘러싼 어둠이 발끝에 늘어져 흐릿한 잔상을 남겼다.

얼마간 자리를 옮긴 원귀가 돌연 허공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촤아악⎯! 설원 한 귀퉁이가 갈기갈기 찢어졌다. 병풍 속 세상을 쉬이 찢어발긴 원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그를 화폭에 가둘 수 있으리라는, 두 인간의 오만한 착각을 정정하듯이.

“거 성질머리하고는···. 점주, 자네는 저게 무언지 아는가?”

“글쎄요. 일단은, 신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런 게 신령이라?”

되묻는 황제의 미심쩍은 어조에 점주는 간만에 편히 웃었다.

“비술사들의 흔한 오해입죠. 신령이라고 반드시 선하고 영묘한 존재는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역병신이 있잖습니까? 신령이란 그저··· 현상입죠.”

태초의 물과 불, 바람과 대지가 그러했듯.

해가 뜨고 꽃이 피듯, 우리 곁에 당연하다는 양 존재하는 현상.

“허면 저 원귀는 무언가? 어떤 신령이지?”

“미천한 소인이 감히 분류해 보자면, 역시 재앙 아니겠습니까?”

한이 짙고 짙어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원혼. 그들을 모은 항아리에서 태어난, 만물점주가 빚은 최악의 수집품.

“재앙을 불러들이는 신··· 흉신이라 할 수 있겠군요.”

기나긴 시간. 켜켜이 쌓여 온 원한이 마침내 재앙으로 화했다.

탁, 탁, 탁···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뒷마당에 울려 퍼졌다.

점주는 목륜의(目輪椅)를 만들었다. 의자에 바퀴를 달아 움직일 수 있게끔 한 것이다. 두 발로 걸을 수 없는 황제를 위해.

“쓸데없는 짓을.”

곧 죽을 사람 때문에 사서 고생이라며 황제가 만류했으나, 점주는 외려 정색했다.

“내일 죽어도 오늘 배고픈 게 사람일진대. 하루라도 편히 살다 가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습니까?”

하여 황제도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점주는 직접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바퀴를 밀어 보았다. 앞뒤로 잘 움직인다. 오르막이나 산길에선 힘들겠지만, 만물점 내에선 충분히 쓸 만했다.

점주는 등받이에 손잡이도 달았다. 황제의 손가락도 몇 개 부러졌으니. 뒤에서 잡고 밀어 주는 편이 나으리라.

“그나저나···.”

마루에 앉아 목륜의가 제작되는 과정을 가만 보던 황제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뒷마당 구석. 재해에서 겨우 살아남은 나무 위에 원귀가 걸터앉았다. 그를 휘감은 어둠이 길게 늘어져 바닥에까지 드리웠는데, 끝자락이 연기처럼 넘실거렸다.

“의외로 조용하군그래.”

천지십경도 안에서 세상을 휩쓸던 기억이 생생한 탓일까. 두 사람은 원귀가 얌전해도 불안한 듯했다.

“당장 뛰쳐나가서 인근 성을 함락하고 주민을 몰살시킬 줄 알았는데.”

“어찌 그런 끔찍한 소릴 하십니까? 이러나저러나 저놈이 가만있으면 좋죠.”

손잡이를 고정하느라 끙끙대던 점주가 조심스레 부연했다.

“아마··· 결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결계? 결계가 또 있나?”

“네. 가게를 자주 비우다 보니 곳간채 외에도 만물점 전체를 아우르는 결계부가 또 있습니다. 삿된 것들의 출입을 금하는 결계인데, 말 그대로 출입만 금하는지라···.”

“밖에서 들어오는 걸 막으면, 안에서 나가는 것도 막혔겠군.”

“그렇습죠. 설마하니 만물점에서 저리 사악한 게 나리라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점주에게 황제가 되물었다.

“허면, 저 원귀는 만물점의 결계에 갇힌 겐가?”

“갇히긴 갇히되, 자발적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나 원. 자발적 감금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소린고?”

“잊으셨습니까? 저놈은 곳간채 결계를 단지 힘으로 으깨 버렸습니다. 만물점 결계도 엇비슷한 수준이니 마음만 먹으면, 능히 깨부수고 나갈 겝니다.”

“허면 어찌 결계를 부수지 않고 얌전히 갇혀 있는 게지?”

“소인이 관심법은 터득을 못 한지라.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다소 까칠하게 관심법 운운한 점주가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황제가 팔짱을 꼈다.

“자네 항아리 말일세.”

텅, 텅, 빈 소리만 요란하던 항아리. 든 게 없음에도 심히 무거워서 한 치도 들어 올리지 못했더랬다. 실상 원혼이 담긴 줄은 모르고.

“내 평생 그리 무거운 건 처음이었네. 웬 항아리에 태산이라도 담긴 줄 알았어.”

갖은 애를 써도 꼼짝 않던 그것은, 다름 아닌 혼의 무게렷다.

“괘념치 마십시오. 저도 저승 차사의 포승줄로 옭아매서 들 수 있는 겁니다. 그 항아리는··· 맨손으로는, 어떤 인간도 들 수 없을 겝니다.”

“한 맺힌 혼의 무게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나 보군. 설령 무소불위의 황제라 한들.”

죽음을 앞두고도 초연하던 황제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은··· 조금, 무력해 보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