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뭘 믿고 서신을 그리 대충 썼나 그래. 장소와 시간을 제하면 겨우 한 줄이지 않나?”
“대충 쓴 게 아니라··· 어쨌든 서신을 보고 물건을 가져오지 않으셨습니까.”
“흥, 아직이야. 자네 얘길 들어 보고 넘겨줄지 말지 결정할 걸세.”
점주는 보따리를 품에 안고서 맨땅에 털썩 앉았다.
“폐하··· 를 위해 유명경이 필요하다니. 대체 뭔 소린가 그게?”
이후 양 의원이 풀어논 곡절은 아무개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복수를 감행한 의원과, 자결한 아씨.
“진부하긴. 흔해 빠진 사연이야.”
그 절절한 내력을 전해 듣고도 점주는 코웃음 쳤다.
“정인을 되살리려는 작자가 어디 한둘인 줄 아나? 자네 같은 치가 한 해에만 수십 명은 찾아오네. 죄다 내쫓아 버렸지.”
하나 이번만은 쫓아내지 않았다. 오히려 점주가 친히 납시었다.
“지금껏 찾아온 놈팡이랑 자네의 차이는 딱 하나, 폐하일세. 자네가 폐하를 거론하지 않았다면, 국물도 없었어!”
목함이 든 보따리를 두드리며 점주가 엄포를 놓았다.
“하나만 확실히 해 두세. 내게 이 몹쓸 거울이 있다고 알려 준 작자가 있지? 누군지 대충 감이 오는데, 그놈에겐 결코 넘겨줘선 안 돼. 알겠나? 놈은 자넬 이용해 먹을 심산이야. 그리될 바엔··· 차라리 부숴 버리게.”
양 의원이 그러리라 확답하자 점주가 허공에 대고 삿대질했다.
“너, 인마. 몰래 훔쳐보는 거 다 안다! 화왕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놈이. 난데없이 애꿎은 내 뒤는 왜 캐고 지랄인지 모르겠다만, 유명경은 억지로 뺏어가지 마라! 그랬다간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아무개로선 통 모를 누군가에게 목청껏 협박을 늘어놓은 점주가 연달아 의원에게 경고했다.
“유명경은 죽은 이를 살려 낼 수 있으나, 그만큼 치명적인 결함도 있네. 자네는 필시 오늘을 후회하게 될 게야. 그래도 원하나?”
양 의원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간절히 원한다 하였다.
츳, 혀를 찬 점주가 몸을 일으켰다. 목함 보따리는 그대로 놓아두고서.
“분명히 말했네. 유명경은 심각한 결함이 있어. 거울로 되살린 정인은··· 자네가 알던 것과 많이 다를 게야.”
끝까지 불길한 소리만 거듭한 점주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양 의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인적 드문 길목에 다다른 점주가 쓴웃음을 흘렸다.
“구제할 길 없는 쓰레기로구나.”
그 자신을 향한 비난이었다.
“멋모르는 젊은이에게 유명경을 넘겨 놓고는. 염치도 없이 누구더러 남을 이용하지 말라고 탓하나 그래.”
유명경으로 살려 낸 이는 생전과 반대로 뒤바뀐다. 외면의 신체적 특성은 물론, 내면의 성격과 감정마저.
점주는 이 점을 명확히 거론 않고 두루뭉술 넘겼다. 그의 목적은 아마도 황제의 누이동생을 되살리는 것. 살아난 아씨가 얼마나, 어떻게 변모할는지는 고려치 않았다.
어차피 도자역에 걸린 황제는 얼마 못 산다. 누이의 성정이 어찌 변했는가 따위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테지.
점주는 어찌하여 양 의원에게 거울을 넘겼을까?
어느 늦은 밤, 황제가 흉신에게 들려준 가정사가 그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으려나. 하필이면 황제의 누이동생이라. 황제가 난세를 평정하리라 결심한 계기라서?
혹은 난세를 종결한 영웅에게, 불치의 역병에 걸리고도 일신의 안위보다 후세를 염려하는 위인에게. 한 명의 인간으로서 경애를 표한 것일는지도.
좌우지간 일은 벌어졌고, 점주의 변덕은 함 장군 댁으로 이어진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아씨는 기행을 저지르고··· 결국 유랑술사를 초청하기에 이른다.
점주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의 결행은 아무개가 술사와 만나는 데에 일조했다. 때늦은 자각이 아무개를 일깨웠다.
이 당시 흉신은 살아 숨 쉬는 모든 생명이 눈엣가시인 양했다. 황제고 점주고 모다 죽일까, 하는 충동이 하루에도 수십 번 치밀어 올랐다. 직접 실행에 옮길 뻔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만일 그때 충동에 휩쓸려 점주를 죽였다면··· 지금쯤 많은 게 달라졌을 테지.
안도가 이다지도 서늘한 감정이었던가. 몸서리쳐지도록 섬찟한 안도감이 아무개를 잠식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서 한 푼도 안 받았잖아?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투덜투덜. 누구든 아무나 들으라는 양, 점주는 구태여 소리 내 제 행동을 합리화했다.
소환부를 구하려고 곳간 하나를 통째로 털었다는 둥 황금 기둥을 뿌리째 내놨다는 둥 하던 함 장군이다. 돈이 부족하진 않을 테고. 값을 치를 정신머리도 없을 만큼, 양 의원이 다급하고 초조했던 것이리라.
계산하쇼. 딱 한 마디만 했다면, 분명 값을 치렀을 텐데.
저승 차사도 속여 먹은 사기꾼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건지.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나마 덜어 내려는 수작인지.
구시렁거리던 점주의 가슴팍에서 돌연 푸른빛이 번쩍였다. 점주가 옷깃 새로 연경을 꺼내었다.
⎯ 말씀하신 대로 연나라 성터를 뒤지던 중 사초를 발견했습니다. 값나가는 것들은 진작 털렸습니다만, 일부 기록은 남아 있더군요.
손바닥만 한 거울 너머 정객이 사초를 뒤적였다. 사초는 간지와 날일이 명시된 만큼, 특정한 시기의 기록을 찾기 수월했다.
정객이 특히 주목한 부분은, 북방의 외침을 물리치고 환궁한 황제가 친히 주최한 연회였다. 황궁 연회 도중 괴한이 난입한 것이다.
사관이 흘리듯 휘날려 쓴 글꼴과 곳곳에 흩어진 먹물 자국이 당시의 긴박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 주는 듯했다.
⎯ 여길 보시면, 대신들이 웬 놈이냐 물을 적에 괴한이 대답한 말이 쓰여 있습니다.
정객은 연경에 사초를 들이밀며 해당 부분을 읽었다.
⎯ 괴한이 이르되, 나는 대지를 계승한 자.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자 군주이니라.
순간, 점주는 연경을 떨어트릴 뻔했다.
⎯ 괴한, 군주가 손을 들어 올리매. 땅이 흔들리고 벽이 무너졌다. 대소신료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읍소하였다.
⎯ 군주께서 가로되, 내 허락지 않은 권좌에 스스로 오른 자 모두 죄인이라.
⎯ 이 손으로 친히 죄인을 거두매, 육신의 업은 흙으로 돌아갈지니.
⎯ 이는 섧게 흐른 피에 바치는 맹세인즉. 권좌에서 혈맥으로 이어지리라.
⎯ 죄인과 그 혈에 조력하는 자 또한 죄인이라.
⎯ 산산이 부서지는 그 곁에 무엇도 남기지 않으리.
사초를 다 읽은 정객이 손끝으로 가리켰다.
⎯ 여기,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산산이 부서진다는 것에서··· 무언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도자역.
「사실이라면, 질병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깝지 않나요?」
잠들기 전, 술사가 거론한 의문이 아무개의 뇌리를 스치었다.
⎯ 사초에 남은 기록을 토대로 추측건대, 도자역은 어느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발현한··· 저주로 보입니다.
“······스스로 대지의 군주라 칭하며, 뜻한 바대로 지진을 일으키는 초월적 존재 말이지.”
점주가 이마를 짚었다. 그의 탈력감이 아무개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허락지 않은 권좌에 스스로 오른 자 모두 죄인이라.’ 황제건 뭐건 제 허락 없이 멋대로 왕관을 썼다간, 가만두지 않겠단 게로군. ‘권좌에서 혈맥으로 이어진다’ 함은, 후계자에게도 저주가 이어진단 뜻이렷다. 주단 금씨에서 알아낸 정보와 일치하는군. ‘죄인과 그 혈에 조력하는 자 또한 죄인이라’ 이건 도자역 환자를 도운 이에게 병이 옮는다는 뜻일 테고.”
사초를 해석한 점주가 쓰라린 속내를 토로했다.
“알다시피 나는 오래 살았네. 참 오래도 살았지. 그리 오래 살았는데도······ 기억에 남는 왕조가 몇 없어. 상 다음에 제와 건, 환으로 나뉘고··· 연이 꽤 오래 버텼지.”
연나라가 망하고 이백 년간 왕조가 없었군. 점주가 중얼거렸다.
“이백 년일세. 지난 이백 년간 적당히 땅따먹기해 놓고 칭제 건원한답시고 설친 것들이 어디 한둘이겠나? 개중에 채 한 달을 버틴 놈이 없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연경 속에 맺힌 정객은 뭐가 문제인지 통 모르는 낯이었다. 그가 살아온 시대의 상식으론 당연지사였으니.
하나 난세 이전을 기억하는 점주로선 충격적인 자각이었다.
“어디서 나라를 세웠다 치면, 곧장 망했다는 소리가 매번 따라붙었네.”
진강 이남의 린족이 세운 온나라. 해적질로 다환 동부 해안을 정복한 채씨 일가의 공나라. 사막국과 무역로를 개척한 상인들이 세운 표나라.
그 밖에 크고 작은 국가 모두. 무너졌다.
분구필합 합구필분(分久必合 合久必分)이라, 흩어진 지 오래면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흩어진다 했거늘. 어찌하여 이 세상은 흩어지고 또 흩어질 뿐이던가.
그 해답이 밝혀졌다.
“도자역이야. 망국의 끝은 늘 도자역이더란 말일세.”
도자역. 그 이명은 살천병(殺天病).
이는 천자도 피해 갈 수 없다는 뜻이었으나···
“선후가 바뀌었어. 왕도 피해 갈 수 없는 병이 아닐세.”
점주가 확언했다.
“도자역은, 왕이 걸리는 병이야.”
⎯ 허락지 않은 권좌에 스스로 오른 자, 모두 죄인이라.
이는 섧게 흐른 피에 바치는 맹세. 온 대지가 받드는 군주이자 이 땅의 진정한 주인, 다화련이 인간의 권좌를 용납지 않겠다는 선언.
“안 돼. 이건··· 이런 건,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없어.”
점주가 절망했다. 그의 손에서 연경이 힘없이 떨어졌다. 돌부리에 부딪혀 파삭, 깨진 유리는 평범한 거울로 화했다.
반면 아무개는 생각을 달리했다. 율해서의 꿈을 통해 물의 군주와 화왕에게 전해 들은 바가 있던 탓이다.
그들이 묘사한 군주 다화련은 태초 이래 줄곧 잠들어 감정조차 깨우치지 못한, 그저 존재할 뿐인 표상이었다.
그런 자가, 이렇듯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특정 대상을 저주한다고? 대지의 군주는 인간이란 종 자체에 익숙지 않을진대. 단일 개체로서 인간을 구분할 수나 있을까?
아무개는 사초를 곱씹어 보았다. 도자역 환자에게 도움을 베풀면, 병이 옮는다. ‘산산이 부서지는 그 곁에 무엇도 남기지 않으리.’에서 알 수 있듯, 저주 대상을 철저히 고립시키겠다는 의도다.
이건··· 너무 인간적이잖은가.
인간을 잘 알고 극도로 증오해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악의적인 저주. 아무리 생각해도 다화련이 이 같은 저주를 내렸으리라곤 믿기지 않았다.
차라리 군주를 사칭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의 술사가 저지른 짓이라 보는 편이 타당했다. 이리 지독한 저주를 내릴 만큼, 연 황실에 반감이 깊은 술사 말이다.
‘······어?’
불현듯, 해당 조건에 정확히 들어맞는 이가 떠올랐다.
수호지신. 율해서.
다환 북부의 지형을 바꾼 전대미문의 천재 술사. 목숨 바쳐 헌신했으나, 그 대가는 멸문과 탄압이었던.
‘설마.’
그날. 국경에 절벽을 세우는 이적을 행하고도 살아남은 걸까.
아니, 아니다. 아무개는 즉시 생각을 달리했다. 율해서가 아무리 대단한들 그 상황에서 살아남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럼 혹 아무개 자신이 그러했듯··· 인간에서 비롯되었으나,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소생한 걸까?
그리하여 수호신이라 불리던 과거를 뒤로한 채, 복수귀로 변모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