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예나 지금이나 화양 율씨는 교전과 거리가 먼 가문이다. 그들에게 율해서는 양 떼를 지키는 늑대처럼 이질적인 존재였고, 언제든 돌변하여 물어뜯을 수 있는 위협이었다. 늑대가 양의 살과 피를 취하는데 목동이나 몰이 개 따위에게 손 벌릴 리 만무하잖은가.
“제가 드리고픈 말씀은, 신분의 벽을 초월한 진정한 우애 따위는 없다는 거예요.”
여전히 그린 듯한 미소를 띤 술사가 쾌히 덧붙였다.
“패관소설에서나 볼 법한 망상이죠.”
단 한 번이라도 가족인 적 있었냐는, 오랜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으니. 온 천하를 뒤져 보면, 어디선가 천자와도 진실된 교분을 나누는 천민이 있을는지 모르나, 저는 아니에요.”
율해서는 율해원을 가족이라 여긴 적 없다.
단 한 번도.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전해 들은 대답은, 해원에게서 열화와 같은 노기를 폭발시켰다.
무작정 장창을 휘두르자 창날이 액체처럼 출렁이며 늘어났다. 술사는 고개를 뒤로 하며 불시의 일격을 가뿐히 피했다.
그 순간. 창날이 가지 치듯, 첨단이 비죽 치솟았다.
금속성의 흉기가 즉각적이고 유동적으로 형체를 변형했다. 술사가 재차 회피했으나, 조금 늦어 버렸다. 날붙이에 베인 삿갓의 고정끈이 끊어졌다.
툭, 삿갓이 떨어졌다.
“죽어!”
치밀어오른 분기에 휩싸인 해원이 길게 늘어진 창을 회수하며 일어섰다. 잠시간 소강 국면을 거쳐 2차전이 개시되려는 중차대한 순간.
술사가 굳어 버렸다.
해원이 단단히 세운 창을 역수로 쥐고 내리꽂았다. 창대에 황금빛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신력이 육안으로도 확인될 만큼, 극도로 응축된 것이다.
한데 술사는 여전히 꼼짝도 않았다. 피하지 않는 게 아니라, 피하지 못하는 듯이.
그는 발치에 떨어진 삿갓만 지극히 응시했다. 멀쩡히 살아 숨 쉬던 이가 돌연 석상이 되어 버린 양. 극도의 살의를 품은 적이 지척에 다다르는데도 고스란히 거리를 허용하던 찰나.
또 다른 인기척이 나타났다.
“···뭐야?”
해원은 술사를 향해 내지르던 공격을 비틀었다. 겁도 없이 생사결에 끼어든 침입자부터 제거할 셈이었다.
“방해꾼은 꺼져!”
그때. 술사가 움직였다.
해원의 공격성을 간파한 술사는 즉시 공간을 단절하는 결계를 형성했다. 군주를 계승한 형제의 난투가 끼칠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함이었다. 대지를 제멋대로 주무르던 해원의 지배력조차 결계 안에서 그쳤을 뿐, 술사가 지정한 영역을 벗어나진 못했다.
이 결계를 아무런 저항 없이 자연스럽게 넘어올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명뿐이다.
그가 만든 모든 결계를 무효화할 수 있는, 만능 열쇠를 지닌······
“무, 슨···!”
술사가 해원의 공격로를 가로막았다.
대지의 계승자가 진노하여 전심전력으로 응축한 신력. 그런 공격을 아무런 방비 없이 맨몸으로 막아 낸 결과는 참혹했다.
콰득—···!
부서진 팔이 산산이 터져 나갔다. 간신히 형태가 남은 팔꿈치 아래 하박이 멀찍이 날아가더니 툭, 부딪혀 떨어졌다.
***
“깼나?”
손끝을 움칠했다. 만물 점주가 재차 말을 건넸다.
“정신 들었거들랑 한번 일어나 봐라.”
조르륵, 주전자에서 물 따르는 소리가 설핏 들렸다.
“네가 혼절하고 몇 달이나 흐른 줄 아느냐? 어여 일어나야지.”
······몇 달?
잠깐 정신을 잃었다 깬 것 같은데. 아무개는 무심하기 그지없는 세월의 흐름에 당혹했다.
마찬가지였을까. 율해서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애썼다.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다만··· 그, 네가 살려준 놈 있잖냐? 그놈이 전해 달라더라.”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실낱처럼 가늘게 벌어진 시야로 염료가 번지듯 흐린 윤곽이 어렴풋했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땐 정말로···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거라고.”
쿠당탕—! 녀석이 침상에서 굴러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점주가 서둘러 다가왔다.
“아이고! 기운도 없는 놈이. 얌전히 일어날 것이지 웬 난리 법석이야?”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어 든 율해서가, 바닥에 웅크리듯 엎드리고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쌔액 쌕, 거친 숨결 같은 말소리가 입술 새로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응? 무어라 했느냐?”
덩달아 엎드린 점주가 가까이 귀 기울였다. 팔등에 얼굴을 묻은 율해서가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천장을 가리켰다.
“······발, 이···.”
발이 보여요.
비틀비틀. 율해서는 힘없이 걸어갔다. 허름한 삿갓이 시야 절반을 가리었다.
공중에 매달린 발이 보인다는, 소년의 말에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낸 점주가 방을 나섰다. 다시 돌아온 그는 낡은 삿갓을 머리에 얹어 주었다. 이리하면 안 보이겠지, 하고.
휙— 세상이 뒤집혔다. 축지술이다.
현재 율해서가 감각하는 범위는 예사가 아니었다. 당장 발 디딘 땅을 넘어 언어가 다른, 멀고 먼 타 대륙 땅끝까지. 만천하가 손바닥 안에 놓인 듯, 선명히 느껴졌다.
다만 소년의 육신은 드넓은 천하에 비하면 먼지만도 못한 까닭에. 실재하는 육신과 인식하는 감각 간의 괴리가 축지술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고작 강을 건너려 했을 뿐인데 천 리를 건너뛰어 버리거나, 산 하나를 넘으려 했더니 국경에 다다라 버렸다.
통제를 벗어난 힘은 소년을 사방팔방 온갖 곳에 데려다 놓았다. 한 발 내디디면 울창한 삼림의 지저귀는 새 소리가 들려오고, 한 발 내디디면 설원 위 혹독한 눈보라가 전신을 후려쳤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작열하는 태양과 사막의 버석한 모래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거리감 속을 헤매며. 소년은 걷고, 또 걸었다.
한 걸음을 떼자 무너진 황궁이 보였다. 두 걸음을 떼자 무너진 도심과 저자가 나타났다. 세 걸음을 떼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방치된 시신을 시꺼먼 까마귀 무리가 쪼아 댔다. 네 걸음을 떼자 집을 잃고 산과 들로 내몰린 사람들이 걸신들린 듯 무언가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그들 뒤로 살점 하나 없이 깔끔히 발골된 하얀 뼈대가 언뜻 보였다.
지나간 걸음걸음마다 보고 듣는 광경이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휘청휘청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던 소년이 우뚝 멈춰 섰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산중이었다. 소년이 품에서 은장도를 꺼냈다. 눈에 익은 형태라 아무개도 곧장 알아보았다. 화양의 마님이 전낭과 함께 건넨 것이다.
「어찌해도 사는 게 지옥이라면··· 차라리 편히 쉬도록 해 다오.」
칼집에서 장도를 꺼내 든 소년이 그 자신을 향해 날을 겨눴다.
금방이라도 제 목을 찌를 듯했으나··· 무언가 가늠하듯, 생각에 잠긴 소년이 제 왼손으로 대뜸 장도를 찍어 눌렀다.
푸욱— 날카로운 감각이 손바닥을 관통했다. 끔찍한 고통이 홧홧하게 쑤셔 댔다. 그 여파는 단순 자해에서 그치지 않았다.
콰과과광! 와르르—!
산 전체가 뒤흔들렸다. 소년은 굉음이 울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산 너머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평야. 너른 대지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멀쩡한 땅이 별안간 깊숙이 패이며 길고 긴 협곡이 생겨났다. 소년은 제 손과 협곡을 멍하니 번갈아 보았다. 아무개는 그 모든 감각을 함께했다.
저것은, 저 협곡은 소년의 상처였다.
과거 군주의 몸부림에 온 땅이 요동쳤듯이. 군주를 계승한 소년은, 그 자신이 대지가 되고 말았다.
“하—”
전란을 극복하고자 목숨 바쳐 분투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천하를 배회하며 망가진 세상을 낱낱이 목도한 소년은 기어이 자결하려 했으나, 그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제 죽음이 미칠 여파 때문에.
“하하, 하. 하하하하—···”
소년이 웃었다. 실성한 것처럼, 미친 듯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흙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낄낄거리던 소년은, 느닷없이 웃음을 뚝 그쳤다. 흙바닥에 맥없이 드러눕고는 삿갓으로 시야를 덮었다.
몇 날 며칠을 꼼짝도 않고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소년의 몸 위로 하나둘 떨어진 낙엽이 수북이 쌓일 때까지. 이대로 죽어 버릴 듯 미동조차 없이 고여 있던 소년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 작은 기척이 조심스레 접근했다. 어린아이로 추측되는 그것은 소년을 곰곰 살피더니 품에서 전낭을 빼 갔다. 마님이 준 것이었다.
묵직한 전낭을 챙긴 아이가 시시덕거리며 멀어졌다. 소년은 여전히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아이의 것처럼 작고 가볍되, 좀 전과 달리 질질 끌리는 걸음이 주위를 맴돌았다. 머뭇거리는 기척이 느릿느릿 다가오고. 얼굴에 덮어쓴 삿갓을 건드리려던 찰나.
소년이 손목을 낚아챘다.
“아아아악—!”
아이의 비명이 크게 울렸다. 실로 간만에,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이건 안 돼요.”
한 손에 다 잡히는 작고 마른 손목을 경고하듯, 한 차례 움켜쥐고는 놓아주었다.
허둥지둥 도망치던 아이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더니 엉덩이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소년은 삿갓을 고쳐 쓰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툭, 툭, 낙엽을 털어 낸 그가 아이를 힐끗 일견했다.
꼬질꼬질한 거지 꼬마. 여기저기 엉겨 붙은 흙먼지와 언뜻 보이는 타박상. 낡고 헤진 옷감 한가운데에 찍힌 것은, 성인 남성의 것이 분명한 발자국.
“······맞았어요?”
아이가 얼굴을 붉히며 무어라 떠들어 댔다. 적당히 말을 받아 준 후.
소년은 다시금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