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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근무 태만 주인공
해가 바뀌고, 열아홉이 되었다.
「안태원: 앱삭함. 급한 연락은 전화」
방학을 맞이하자마자 메신저 상태 메시지를 바꿨다. 벌써 기합이 잔뜩 들어가서 공부하려고 저러나, 싶겠지만 아쉽게도 아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학기 중에 미뤄 둔 게임 해치우기. 딱 한 달이다. 한 달 동안은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만 할 것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 지금 안 해 두면 고3 학기 중에 이 미친 짓을 할 것이다.
플레이하고, 엔딩 보고, 플레이하고, 엔딩 보고…. 미친 듯이 게임만 하고 나니 나의 비장함이 무색하게 2주 만에 할 게임이 동나 버렸다. 요즘 게임들은 왜 이렇게 쉬워?
남은 2주 동안 무슨 게임 하냐.
고민하는 시간이 아깝다. 아직 게임이 고팠다. 고3이 되기 전에 하나라도 더 해 두어야 한다. 그렇게 뒤지고 뒤져 겨우 건져 낸 게임이 하나,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라는 낯간지러운 이름의 미연시였다.
미연시 나쁘지 않지. 수백 번의 리트와 세이브 로드를 반복하며 데이터를 알아내고, 앨범을 꽉 채우고 났을 때의 성취감이 쏠쏠하니 말이다.
문제는 이 미연시가 BL이라는 것이다. 보이즈 러브, 남자끼리 연애하는 거. 결코, 내가 산 게임이 아니다. 작년 생일 때 누나가 날 골려 먹이려고 선물한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나를 두고 비웃던 누나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했다.
‘…한번 켜 보기나 할까?’
있는 게임 구석에 박아 두기만 하면 불쌍하잖아? 당장 할 수 있는 게임이 이거뿐이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괜히 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으며 게임을 켰다. 남자들이 가득한 일러스트가 모니터를 꽉 채웠다.
잠깐의 망설임 뒤, 게임 시작 버튼을 누른다.
평범한 봄날, 새 학기의 아침. ‘한우주’라는 이름의 잘생긴 주인공이 ‘아…, 또 지각이네.’라고 독백하며 침대에 누워 천장만 쳐다본다. 태평하기 짝이 없다.
지각이면 달려 인마.
주인공은 잔뜩 게으름을 피우다가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얘 뭐야?
주인공이 어벙한 성격인가? 아침도 안 먹고 학교 가는 거야? 애초에 왜 늦잠을 자는데? 나는 새벽 3시까지 게임해도 7시엔 귀신같이 일어나서 등교했다! 비엘이고 뭐고, 일단 주인공이 학교에 가는 걸 보고 싶다. 그런 마음에 마우스를 다시 잡았다.
달칵, 달칵.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생각보다 이벤트 조건이 섬세하고 엔딩이 다양한 데다가, 일러스트까지 수려한 게 전체적인 완성도가 좋았다. 덕분에 정복욕이 불타올랐다.
보조 모니터에 엑셀을 띄워 놓고 공략캐들의 선택지, 취향, 시간대별 상주하는 장소, 발생 이벤트와 조건 등을 빼곡히 적어 가며 각 잡고 플레이해 버렸다. 정리한 데이터에 의하면 이게 마지막 엔딩일 것이다.
이 게임이 비엘인 건 의외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엔딩 하나 보고 나니 장르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져 버렸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생각만으로 골이 지끈하고 심장이 떨렸다. 설렘이 아닌 공포와 두려움 탓이었다. 심호흡을 한 번 마치고 마우스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제발 이 엔딩만은!
달칵.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린다. 주변이 캄캄해 앞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부드러운 천의 감촉이 눈가를 스쳤다.」
이 미친.
「몸을 움직이자 무거운 사슬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 손목과 발목을 조이는 찬 금속의 감각만 소름 끼치도록 생생히 느껴졌다. 균형을 잃은 몸이 힘없이 기운다. 넘어지겠구나, 생각한 순간 누군가 나를 끌어안았다.
한우주: …서연준?
서연준: 응, 나 여기 있어.」
야, 이것들아….
「서연준: 답답하지? 미안해. 사랑해서, 네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 없었어.
이런 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서연준 쟤는 개소리하는 거 전부 빼고 나면 대사가 없을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서연준의 품이, 사람의 온기가 좋았다.
서연준: 너도 날 사랑하지, 응? 그렇다고 말해 줘.
한우주: …….
무어라 답할까, 고민하다가 작게 웃어 버린다.
당장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그러지는 네 표정이 보인다. 눈을 가려도 알 수 있다.
서연준: 한우주, 제발….
서연준이 입을 맞춰 온다. 입술을 조심스레 핥아 오는 게 꽤 귀엽다. 부러 반응 없이 가만히 있으니, 금방 떨어져 머뭇거린다.
넌 이상한 녀석이야.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묶어 둔 주제에 하나하나 눈치를 보고.
그래서 네가 마음에 들어, 서연준. 나를 갈구하는 모습이 보기 좋거든.
한우주: 서연준.
서연준: …응.
한우주: 역겹다, 너.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네가 바라는 걸 쉽게 내어 줄 생각은 없다.
인내심을 가져 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킨다면
그땐 사랑한다고 말해 줄게.
True Ending. :: 서연준 :: 영원히 내 곁에.」
‘…….’
경찰 불러!!
쿵, 쿵….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이게 뭐야? 너희 뭐 하는 거야? 저기서 행복한 사람이 있기는 해? 마음 같아선 캐릭터들 멱을 붙잡고 흔들고 싶었다.
이 게임은 전부 다 이런 식이다. 아니, 방금 본 엔딩이 제일 나은 것이었다. 감금, 스토킹, 폭행, 집착…, 미친 짓 한번 다채롭게 한다. 당최 멀쩡한 공략캐가 없다.
그래! 취향은 다양하니까! 피폐한 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만들었겠지! 하고 속을 달래 보지만 금방 실패했다. 엔딩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쯤은 행복한 걸 줄 수 없느냐는 말이다.
일주일, 그것도 고3이 되기 직전의 귀중한 시간을 이 게임에 바친 플레이어로서 이 정도는 화내도 될 것이다. 물론 화가 나도 할 일은 해야 했지만.
엑셀 표의 서연준 란에 방금 본 엔딩을 입력했다. 여전히 속이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완벽히 정리된 데이터를 보니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하…. 아니 근데 진짜로 내가 지금까지 뭘 본 거냐?’
아니다. 됐다, 됐어. 잘 플레이했으니 됐지. 이제 꽉 찬 앨범과 이벤트, 엔딩 목록을 보고 뿌듯함을 충분히 느낀 뒤 겜삭하면 된다.
곧장 앨범 란에 들어간다. 일러스트로 꽉 차 있다. 뒤로 갈수록 피폐해지는 상황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성취감을 만끽했다. 그런데….
“어?”
스크롤을 다 내리고 보니 빈 앨범 칸이 여덟 개나 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서연준 엔딩을 보기 전에는 없었다. 혹시 몰라 정리해 둔 엑셀 표를 확인하며 앨범 수를 세 보았다.
역시 개수가 달랐다. 정확히 54개였던 앨범 칸이 62개로 늘어나 있었다. 황당함에 곧장 이벤트 목록을 확인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물음표 쳐진 칸이 눈대중으로도 열몇 개는 있었다. 이어서 엔딩 목록에 들어가니 처음 보는 알림 창이 나타났다.
「System:시크릿 도전 과제 달성! :: 히든 루트가 개방되었습니다.」
히든 루트? 아, 그런 시스템이구나.
모든 엔딩을 달성하면 열리는 보너스 루트. 미연시나 육성 시뮬레이션에서 꽤 보이곤 한다. 그런 것치고는 DLC로 판매해도 될 정도의 분량인 게, 통이 커서 놀랐다.
어쨌든 게이머로서 이런 서비스를 거부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빈 앨범을 두고 게임을 끌 성격이 못 되었다. 망설임 없이 새 게임 시작을 누른다.
「System:모드를 선택해 주세요 :: 일반 루트 / 히든 루트」
이걸 또 나눠 놨네. 도입부부터 뭐가 다른가?
달칵, 히든 루트를 클릭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
「System:…….」
「System:……습니다.」
「System:…가 삭제되었습니다.」
‘……?’
주변이 밝다. 이른 아침인 것 같았다. 내가 언제 잠들었던가? 아니, 그런 것보다….
‘나 왜 교실에 있지?’
그것도 교복까지 말끔히 갖춰 입은 채로 창가 쪽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교실에는 나뿐이었다. 텅 빈 교실의 적막이 기분 나쁘고 으스스하기까지 해서, 서둘러 교실을 나섰다.
복도에 나와 팻말을 확인한다. 내가 있던 교실은 2학년 3반이었다. 주변을 서성이며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고민해 보았는데, 역시 꿈인 것 같다. 학교에 가는 꿈은 자주 꾸는 편이니까.
‘잠깐…, 여기 우리 학교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고민하다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나저나 꿈속인데 졸리냐. 세수나 할까.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화장실을 찾아보기로 했다. 느적느적 걷다 보니 도달한 화장실에 들어섰다. 죽 늘어선 세면대 위로 큰 거울이 있었다. 자연스레 거울로 시선이 향한다.
‘이거 누구야?’
거울에 비친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급하게 얼굴을 더듬었다. 거울 속의 누군가도 얼굴을 더듬는다. 미친, 소름 돋아.
…꿈이라 그런 거겠지? 내 이상형과는 조금 다르지만, 나쁘지 않게 생겼다. 속눈썹 길고, 콧대 높고, 하얀 게, 연예인인가? 보기 드문 외모인데도 어딘가 익숙했다.
어디서 봤더라. 연신 얼굴을 살피며 기억을 헤집는다. 완전히 정신이 팔려 수도꼭지 방향도 확인하지 않고 물을 틀어 버렸다.
“악!”
개 뜨거워! 데인 부분이 붉게 부어오른다. 따갑다.
‘잠깐만, 뜨거워? 따갑다고?’
이거 꿈이잖아. 꿈이 이렇게 생생할 수가 있나?
“야!”
화장실 안으로 학생 두 명이 들어왔다. 어깨를 툭 치며 친근하게 굴기에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아예 초면인 사람들이다.
“누구세요?”
목소리까지 낯설다. 간지러울 정도의 미성이다.
“조현우 잠 덜 깼냐?”
“조현우? 나?”
저 사람들이 지금 날 조현우라고 부른 건가?
“뭐래, 고장 났냐?”
“눈 뜨고 자나. 졸리면 교실 가서 자라.”
한 명이 내 등을 팡 치고는 볼일을 보러 갔다. 다른 한 명은 손을 씻으면서 나에게 무어라 말을 건 것 같다. 나는 그 자리에 멀거니 선 채로 제대로 듣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간신히 발걸음을 떼고는 비틀비틀, 화장실 칸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벽에 머리를 세 번 정도 박았다.
아프다. 꿈이 아니다. 환장하겠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왜 그렇게 익숙했는지 이제 알겠다. 이 얼굴은 분명 조현우다. 미친 소리지만 아무래도 내가 조현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조현우는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의 등장인물이다. 주인공은 아니고, 공략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미연시에서 가끔 보이는 ‘이상할 정도로 뭐든지 알고 있는 조력자 캐릭터’. 한우주가 뭘 물어보면 버튼 누르듯 정보를 좔좔 쏟아 내는 녀석. 주인공인 한우주와는 고교 1학년 때부터 같은 반이었던 데다가, 붙임성이 좋아 한우주의 친구를 자처한다는 설정이다.
사실 친구보다는 힌트 자판기 같은 느낌이라, 뭐든 직접 캐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플레이하는 나로서는 자주 볼 일이 없는 등장인물이었다.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다. 이 비상식적인 상황은 뭐냐고. 이거 게임 속인 거야? 빙의물 뭐 그런 데 나오는 것처럼? 몰라. 겜종 하고 싶다. 내보내 줘. 옵션이나 메뉴 창 그런 거 없어?
디링-
「System:Tip. 메뉴 란의 인물 수첩을 활용해 보세요! 게임 진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생각하자마자 눈앞에 글씨가 나타났다. 미쳤나 봐. 메뉴는 어떻게 여는데. 메뉴, 메뉴 열어.
디링-
「Tue 4/1│게임 마스터」
「:: 메뉴 ::」
「인물 수첩」
「이벤트 목록」
「지도」
「게임 종료」
메뉴 창이다. 모니터 너머로만 보던 게 코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놀라 고꾸라질 뻔했다. 어떡해, 나 진짜 게임 속에 들어왔나 봐. 그것도 비엘 미연시에. 그냥 비엘도 아니고 온갖 미친 짓이 난무하는 게임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잠깐, 게임 종료 있잖아?’
재빠르게 게임 종료 버튼을 했는데 손가락이 메뉴 창을 뚫어서 기겁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게임 종료. 게임 종료, 게임 종료. 속으로 읊어 본다. 아무 반응이 없다.
“게임 종료! 게임 종료! 게임 종료! 망할!! 제발 게임 종료!!”
입으로 외쳐도 아무 반응이 없다. 밖에서 누군가 욕하는 소리만 들렸다.
아 제발, 내보내 달라고.
디링-
또다시 눈앞에 글씨가 나타났다.
「System: Tip. 게임 종료 기능은 엔딩 달성 이후에 개방됩니다.」
“…….”
열이 올라 욕을 짓씹었다. 엔딩을 보라고? 이 게임에서? 조현우 몸으로? 도대체 어떻게? 어이가 없다. 화도 나고 슬퍼서 눈물이 찔끔 맺혔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은 채로 훌쩍였다. 그것도 변기 위에서. 내가 미연시 개발자면 이렇게 멋없는 등장인물은 당장 삭제해 버릴 텐데.
“흡…, 으흑….”
똑똑.
“저기요?”
그때,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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