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뭐야, 누구야…. 쪽팔려서 대답을 못 하겠다. 그냥 가요!
“이거 받으세요.”
화장실 문 아래 틈 사이로 파란색 손수건이 보였다. 차마 받지도 못하고,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딸꾹질이 나왔다. 이놈의 몸은 눈치가 없다.
“안 돌려주셔도 돼요.”
“…….”
이 사람은 내가 받을 때까지 떠날 생각이 없나 보다. 복도에 쭈그려 앉은 채로 문 아래 손을 넣고 있을 걸 생각하니 조금 미안했다. 엄청 눈에 띌 것 같은데…. 체면 상할 것 같은데…. 마지못해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힘내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문 너머의 남자는 그 말만 하고 바로 자리를 떠났다. 나는 결국 끝까지 대답을 못 했다. 신경 써 준 상대에겐 미안하지만, 울어서 잠긴 목소리로 말하기가 싫었다. 받은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는데 기분이 영 찜찜했다. 이거 비엘 게임이잖아. 무슨 이벤트 같은 거 아니야?
눈물을 마저 닦으며 ‘이벤트 목록’을 열었다. 무사히 열리는 걸 보니 ‘게임 종료’ 기능 말고는 잠긴 게 없는 듯했다. 창을 죽 살펴보니 온통 물음표투성이다. 열린 이벤트는 없었다.
‘방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나 봐.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 둘 걸 그랬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걸 어떡해? 의미 없는 후회는 안 보이는 곳에 치워 두는 것이 이로웠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 나올 수 있다고 했다. 정신 차리고 호랑이를 꼬셔야 살아 나갈 수 있는 굴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것 같지만….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몇 번 훌쩍이고 나니 눈물이 거의 멎었다. 이전보다는 머리가 맑아졌다.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엔딩만 보면 나갈 수 있다고 하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머리를 굴렸다. 지금껏 마음먹고 시작한 게임 중 클리어하지 못한 건 없었다. 이 게임, <네 품에서 잠들고 싶어>도 완전히 정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미처 플레이 못 한 히든 루트는 빼고.
‘메뉴부터 천천히 살펴보자. 뭐든 돌파구가 있을 거야.’
메뉴 창을 쭉 훑었다. 상단에 ‘Tue 4/1’, ‘게임 마스터’라고 적혀 있다. …‘게임 마스터’는 뭐야? 이 게임을 하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어인데?
의아함을 뒤로하고 인물 수첩과 이벤트 목록을 열어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이벤트 목록의 칸 개수는 현실에서 히든 루트를 개방한 이후와 같았다. 내가 모르는 선택지와 엔딩이 추가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변한 게 없다. 인물 수첩은 총 다섯 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네 페이지가 공략캐의 것이었다. 아직 열린 캐릭터가 없는지 내용은 물음표투성이고, 프로필 사진은 실루엣 처리가 되어 있었다. 사진이 멀쩡히 붙어 있는 건 ‘주인공: 한우주’라 적힌 페이지뿐이다.
황당하다. 이렇게까지 뭐가 없을 수 있나? 4월 1일이면 게임 시작하고 한 달은 지난 거 아닌가? 나라면 2일 차 안에 인물 수첩은 다 열 텐데. 뭘 얼마나 엉망으로 플레이하면 이러지. 아니, 아니다.
몰려오는 게임 꼰대의 본능을 겨우 물렸다. 중요한 건 이 게임이 여전히 ‘한우주’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조현우와 관련한 건 흔적조차 없다.
그렇다면….
주인공이 연애하면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있다. 이 게임의 주인공은 한우주다. 한우주가 연애를 하면 엔딩을 볼 수 있다. 조현우는 여전히 조력자일 뿐이다. 즉, 나는 연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 게임에서 조현우의 역할은 한우주가 요구하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조현우의 역할을 이행하면서 한우주가 연애할 수 있도록 도우면 된다. 대충 공략하기 제일 쉬운 애랑 엮어 주고, 엔딩 보고, 게임 종료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거 아닌가?
‘내 가정이 옳다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나만큼 조현우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게임의 모든 선택지와 공략법을 꿰차고 있으니까. 히든 루트는 갖다 버리련다. 비엘 게임 인물로 빙의해서 사는 것보다 전 루트 공략 포기하는 플레이어가 되는 게 백 배 나았다.
기다려라, 한우주. 이 형이 최단기 루트로 연애하게 해 준다!
의욕을 불태우며 변기에서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수업 종이 쳤다.
…나 화장실에 얼마나 오래 있었던 거야?
***
곧장 반에 돌아가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선생님은 아직 안 오셨다. 그리고 한우주도 안 왔다. 분명 늦잠 자고선 따스한 햇볕 쬐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겠지….
1교시와 쉬는 시간이 끝나고 2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늦어도 너무 늦는데? 얘 늦잠 자서 한 달 결석한 바람에 아무런 진척 없는 거 아니야? 그럴듯한 의심에 골이 아플 즈음이었다.
디링-
「System:인물 수첩이 갱신되었습니다. :: 공략 가능 인물 :: 인하성」
「System: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인하성 :: 굴러온 공」
…아, 만났다. 첫 공략 캐릭터, 인하성. 첫 번째 이벤트까지 무사히 진행되었다. 음, 게임에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알림음이 울리고 15분쯤 지났을까.
드르륵, 문이… 정확히는 교실 앞문이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린다.
“…한우주! 어딜 뻔뻔하게 들어와!”
선생님이 교탁을 내려치며 큰 소리를 냈다. 한우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태평한 얼굴로 서 있다가,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아…, 나갈까요?”
“이 자식이 그걸 말이라고! 복도에 서 있어!”
“네.”
그대로 돌아서 나가 버린다. 열이 단단히 오른 선생님이 태도의 중요성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교실에서 얌전히 수업을 듣던 학생들까지 싫은 소리를 잔뜩 들어 버린 셈이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자 “하여간 요즘 애들은!” 하고 성을 내며 나가셨고, 곧바로 다시 호통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한우주 쟤는 쉬는 시간 내내 붙잡혀 있을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치겠다.’
저게 한우주 본래 성격인가? 내가 플레이할 때엔 저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지각을 해 버렸다. 선생님이 화가 난 모양이다. 어쩌지? 「선생님께 사과한다 / 사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교실을 나간다」 같은 선택지가 있으면 첫 번째를 택하는 플레이어였다.
교실 분위기가 묵직하다. 아침부터 ‘요즘 애들’로 싸잡혀 욕을 먹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한우주는 수업 종이 울리고 또다시 앞문으로 들어왔다. 진짜 주변 눈치 안 보고 사나 보다.
“한우주, 안녕.”
굳은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조현우는 한우주가 등교할 때마다 잊지 않고 먼저 인사하는 착한 캐릭터니까.
“…안녕.”
여태 잠이 덜 깬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자연스레 시선이 마주친다. 일상의 틈새를 누군가 비집어 놓은 듯, 감각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창 너머로 불어오는 엷은 봄바람이나, 커튼이 살랑 흔들리며 사르륵 스치는 소리가 낯설고 간지러웠다.
그리고 한우주가 보였다. 가까이서 본 한우주는 뭐랄까…, 짙고 단정했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결 좋은 눈썹도 진했다. 가지런한 눈가를 따라 예쁘게 진 쌍꺼풀, 그 아래 자리한 눈동자는 유난히 깊고 검었다. 긴 속눈썹에 닿은 햇빛에 그림자가 따랐다.
먹구름 같기도, 깊은 물속 같기도 했다. 이름에 걸맞게 우주 같다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한우주에게는 중력이 있었다.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힘이.
“…곧 선생님 오실 텐데.”
“어, 어. 응?”
“나 앉을게.”
단조로운 어조였다. 맞닿은 시선이 떨어진다. 한우주가 나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나 방금 뭐 한 거냐?’
정신이 멍했다. 뭘 그렇게 쳐다본 거야?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할 정도로 집요한 시선이었다. 한우주는 내 곁에 바로 선 채로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신경을 안 쓰는 것인지, 둔감한 것인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내 잔잔했다.
내 머릿속에는 한우주가 혹여 시선에서 무언가를 읽지는 않았을까, 매일 보던 친구의 뜬금없는 행동이 수상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 섞인 생각이 가득 들어차 수업 따위는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요란한 종이 쉬는 시간을 알릴 때까지, 내내 한우주를 곱씹고 곱씹었다.
신기해서 그랬을 거야. 19년 살면서 연예인 한 번 실제로 본 적 없었다. 솔직히 한우주는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예쁘고 잘생겼다.
‘이 맛에 사람들이 연예인 쫓아다니나 봐.’
…처지에 안 맞게 한가롭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양 손바닥으로 뺨을 착착, 약하게 친다.
꾹, 꾹.
동시에 무언가가 내 등을 찔렀다. 돌아보니 한우주가 내 쪽으로 검지를 펼치고 있었다. 한우주는 사람 등을 찔러 놓고 말도 없이 턱을 괴고 있었다. …뭐야.
“장난친 거야?”
결국, 내 쪽에서 먼저 말을 붙였다.
“아니.”
“그럼 뭔데?”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부담스럽다.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린다. 그래도 쳐다본다. 나는 아까의 한우주처럼, 집요한 시선에 태연할 수 없었다. 진 기분이 들어 분했다. 그게 표정에 드러난 것일까?
한우주가 고개를 조금 숙이더니 입가를 가렸다. 저거 웃는 거야?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한우주!”
“미안. 별건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아!
올 게 왔구나. 그래, 뭐든지 물어봐라. 아까 만난 공략캐 이야기겠지. 곧 예상이 적중한다.
“오늘 아침에 누굴 만났거든….”
“응.”
“아까 아침에 체육복 입고 운동장에서 공 던지던데.”
그렇게 말하곤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그 정도 설명으로 알아먹고 대답하면 소름 끼치겠다. 대답이 없자 한우주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린다.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 같았다.
“야구하는 것 같더라. 키는 나랑 비슷했나….”
“그래?”
“이름 알려 줬는데 까먹었어. 너 발 넓잖아. 아는 애일까 싶어서.”
이 정도 했으면 알려 줘도 괜찮겠지?
“누군지 알 것 같아. 그러니까….”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어 간다.
“1학년 인하성이네. 학교에서 꽤 유명한 애야. 야구 협회에서 추천서 받고 체육 특기생으로 입학해서 바로 선발 투수 자리를 꿰찼거든. 1학년 6반이긴 한데 교실에는 거의 없어. 평일에는 운동장에서, 주말에는 구장에 가서 찾는 게 빠를 거야. 주말 리그 선수로 발탁되었는데 시합이 얼마 안 남아서 수업 안 받고 훈련만 해.”
“아, 그렇….”
“야구 외길이라 연애 한 번 안 해 봐서 표현에 서투른데 내가 봤을 땐 그냥 미친놈….”
아 젠장.
“그러니까 야구에 미친 아이인 것 같아!”
“음.”
“완전 애 입맛이라 단 음식을 좋아하고, 매운 건 잘 못 먹어. 운동화가 자주 닳으니까 선물로 운동화 사 주면 좋아할 거야. 고향이 지방인데 야구 때문에 상경해서 지금은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 그리고 이상형은….”
“잠깐만.”
“어?”
“걔 이름이 뭐라고?”
“인하성.”
“그래, 인화성.”
잠깐, 방금 내가 잘못 들었나? 인…화성이라고 한 거야?
“너 걔 좋아해?”
“뭐?”
“인화성 얘기하는데 즐거워 보여서.”
“어?”
“아는 것도 많고.”
“네가 물어봤잖아.”
난 조현우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데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응. 걔가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봤지.”
“그래서 알려 준 건데…, 내가 걜 왜 좋아해?”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닌가? 한우주 얘는 게임 캐릭터면서 뭐가 이렇게 깐깐해? 알려 주면 대충 그렇구나, 하고 알아 뒀다가 나중에 꼬실 때 써먹으면 안 되는 거냐고.
“별걸 다 알고 있길래. 스토커인 줄 알았어.”
“…….”
이 자식이 뭐라는 거야.
스토커는….
스토커는 인하성이 네 미래의 스토커고!!!!!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