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현우…, 이런 식으로 정보를 쏟아 냈던 것 같은데, 아닌가? 미치겠다. 조현우랑 대화 좀 해 둘걸.
“스토커 아니고, 안 좋아해.”
한우주는 말없이 자기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 보여 줬다. 야구공이다.
“아까 내 쪽으로 굴러오는 걸 주웠거든.”
“어….”
“인화성 걔가 내 쪽으로 뛰어오길래 공 찾으러 왔나 보다, 싶었어. 그런데 공은 안 찾고 한참을 떠들더라. 나 오늘 걔 때문에 지각했잖아.”
웬 거짓말이야. 애초에 늦잠 자서 지각할 거였잖아.
“그 뒤에 선생인지 선배인지가 불러서 가 버렸거든. 그런데 그, 인화성이 공을 안 가져가서.”
그래, 인하성과의 첫 만남 이벤트 내용이다. 그리고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 것 같다. 아까부터 자꾸 화성이란다.
“네가 갖다줄래?”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눈썹을 찌푸린다.
“너 인화성 좋아하잖아.”
“아니, 야!!”
어이가 없어 큰 소리가 나왔다. 한우주가 웃음을 터트린다. 그 모습에 말문이 막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장난이야. 야구부랬지? 공은 야구부 갖다주면 되겠네.”
“….”
“조현우 방금 네 표정 엄청 웃겼어.”
…아, 골 당겨. 몸을 돌려 한우주를 시선에서 치워 버렸다. 여러 이유로 마음이 어지럽고 복잡했다.
첫 번째, 야구공은 한우주가 인하성에게 직접 찾아가 돌려줘야 한다. 그래야 다음 이벤트가 발생하고 호감도를 올릴 수 있다. 두 번째, 나는 조현우 역할을 처음부터 시원하게 말아먹은 모양이다. 좀 더 자연스레 말해야 했나 봐…. 게임 캐릭터라고 방심했다.
마지막으로 한우주. 저걸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한우주가 무얼 기준으로 말하고 움직이는지도 모르겠다.
기운이 쭉 빠진다. 그대로 몸을 돌려 책상에 엎어졌다. 그러고도 한우주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걸려 떨어지질 않아서, 결국에는 두 귀를 막아 버렸다.
***
점심시간에 난리가 나는 건 어디든 마찬가지인가 보다. 건장한 남고생들이 먼저 나가겠다고 앞다투어 교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익숙했다.
그중 몇 무리가 내게 와서는 점심 먹으러 가자는 걸 일일이 쳐 내느라 진이 빠졌다. 조현우의 넓은 인맥이 귀찮기만 하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어야지….
밥을 포기하고 교실에 남은 이유는 단 하나, ‘한우주 연애 작전’을 짜기 위함이다. 내가 아는 것만 믿고 설치는 정도로는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다. 전략이 필요했다.
노트와 펜을 꺼내 표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볼펜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바로 뒷자리의 기척까지 필요 이상으로 생생히 느껴진다. 교실에 남은 것은 나와 한우주뿐이었다.
…긴장하지 말자. 할 수 있다. 어차피 한우주는 곧 교실을 나갈 것이다. 게임이 멀쩡히 돌아간다면 말이다. 점심시간은 이벤트가 가장 많을 때니까, 교실에 콕 박혀 있어도 공략캐 한 명은 찾아올걸.
드르륵-
역시나. 누군가가 적막을 깨고 교실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딘가 익숙한, 맑고 차분한 목소리다.
“또 밥 안 먹어?”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다.
‘서연준이다.’
공략캐 중 가장 선명히 기억하는 캐릭터다. 이 망할 게임에 들어오기 직전에 서연준 트루 엔딩을 봤으니까.
한우주의 십년지기 친구이자 미래의 감금 범죄자 녀석. 짧고 단정한 흑갈색의 머리카락, 투명한 회색 눈동자. 쌍꺼풀이 진하고 피부까지 하얀 게 서구적으로 생겼다.
착하고, 상냥하고, 항상 미소를 달고 다니는지라 인기가 많다. 겉보기로 사람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에 걸맞게 속에는 음험한 걸 품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냥 얼른 한우주랑 연애했으면 좋겠다.
한우주는 대답이 없었다. 어쩐지 숨소리가 고르다 싶더니 자고 있었나 보다. 서연준이 다가와 등을 두드리자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킨다. 나는 집중해 공부하는 척, 열심히 볼펜을 놀렸다.
디링-
「System:인물 수첩이 갱신되었습니다. :: 공략 가능 인물 :: 서연준」
「System: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귀찮아.」
“아, 뭐야….”
한우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다. 쟤는 학교에 자러 온 건가?
“일어나. 매점 가자.”
“배 별로 안 고픈데.”
“그래서 굶으려고? 몸에 안 좋아.”
“그렇다고 억지로 먹으면 속에 얹혀.”
“한우주 너는….”
좋아, 이벤트가 순탄히 진행되고 있다. 이 뒤에 한우주가 마지못해 서연준을 따라 매점에 가고….
꼬르륵-
“…….”
두 사람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인다. 아주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곧 서연준이 나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너는 밥 안 먹어?”
“나는 할 일이 있어서.”
“그렇…,”
꼬르르륵-
“…구나.”
썅.
개 쪽팔려….
배가 고프긴 하지만 참을 만한 수준인데 이게 무슨 일이냐? 위장이 눈치를 아주 밥 말아 먹었다. 그냥 조용히 가 줬으면. 제발 조현우 같은 건 무시하고 둘끼리 이벤트를 즐겨 주길 바란다.
“매점 갈까.”
그때, 한우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한테 말한 거야? 아니지?
“잘 다녀와!”
당황하지 않은 척, 손을 흔들며 정답게 배웅하려 했다. 하지만 한우주는 보란 듯이 내 희망을 박살 냈다.
“너도 일어나. 몸에 안 좋다잖아.”
그것도 굳이 서연준을 가리키며 말한다. 서연준이 그렇다니까? 하고 맞장구를 치더니 공부보다는 배 채우는 게 먼저라며 난리다. 결국, 나는 둘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쪽팔려서 죽을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내가 아직 살아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된 거 뭐든 얼른 먹어 치우고 빠져나오려 했다. 그게 조연 된 도리 아니겠는가? 매점에 도착하자마자 초코 빵과 바나나 우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계산하려는데….
‘…어?’
조현우의 지갑에 든 건 먼지와 500원짜리 동전 하나뿐이었다. 미칠 노릇이다. 덕분에 ‘배가 너무 고파 허겁지겁 음식을 골랐는데 돈이 없는’ 상황이 연출되어 버렸다.
와, 돈도 가오도 없다. 아무리 조연이라도 이런 캐릭터가 미연시에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캐삭 안 하냐? 마음 같아선 허공에 따져 묻고 싶었다.
결국, 내 빵은 한우주가 사 줬다. 쟤는 가진 게 오만 원짜리뿐이더라. 다 합쳐도 만 원이 안 되는 걸 가지고 오만 원을 척, 내밀며 하는 말이 또 가관이다.
“내일은 네가 사.”
안 돼. 내일도 점심을 나와 함께할 생각이면 아주 곤란하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 싶어 말없이 어색하게 웃었다. 한우주는 웃지 않았다. 진지해 보였다. 그것 때문에 머리가 또 아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합이야? 한우주, 서연준, 거기에 뜬금없이 조현우가 껴서는 복도를 나란히 걷고 있다. 게다가 서연준은 자꾸만 내게 말을 걸었다. 어색할까 봐 배려하는 거겠지. 서연준은 사랑만 안 하면 멀쩡하니까.
한우주는 말 한마디 없이 앞장서 계단을 척척 오르다가, 옥상 문 앞까지 와서야 멈춰 섰다.
“아. 잠겼다.”
무작정 와 본 거냐고.
“…다른 데 갈래? 밖에 나가서 먹어도 좋겠는데.”
장소를 옮기면서 슬쩍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밖에 시끄러워. 그냥 여기서 먹지, 뭐.”
1초 만에 계획이 망했다.
어쩔 수 없이 계단에 앉는데, 순서가 또 이상하다. 왼쪽에 한우주, 중앙에 나, 오른쪽에 서연준 이딴 식이었다. 나는 구석 자리에 앉으려 했는데 서연준이 ‘한우주의 친구인 조현우’에게 중앙 자리를 내어 줬다. 섬세함에 감동하여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꼼짝없이 중앙에 갇혀서 초코 빵을 먹는데, 왼편에서 버석버석,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한우주가 빵 봉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불안하다.
‘지금 이거… 서연준 이벤트 내용 아냐?’
아니나 다를까 서연준이 한우주를 쳐다보고 있다. 그래! 여기서는 서연준이 한우주의 빵 봉지를 뜯어 줘야 한다고! 그런데 거리가 너무 멀잖아!
“한우주. 이리 줘.”
나는 한우주의 손에서 빵을 거의 뺏다시피 하고 서연준에게 넘겼다. 서연준은 어리둥절하더니 빵 봉지를 뜯어 다시 내게 줬다. 그걸 또 내가 한우주에게 전달했다. 이게 뭐냐?
“…고맙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인사다. 한우주에게도 이 상황이 퍽 이상한가 보다. 그런 건 상관없다. 분명히 이 뒤에 또 무언가 있다. 화장실 급하다고 하자. 어떻게든 이 자리를 뜨자.
“나 화…,”
“아.”
“…….”
늦었다. 한우주가 소시지 빵에 케첩을 뿌리려다 지 바지에 뿌려 버렸다. 서연준 이벤트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한우주가 유독 실수를 많이 하는 걸 서연준이 곁에서 도와주다가 어느 순간 눈 맞는 거다.
“하여간에 칠칠찮기는. 나 손수건 있어.”
서연준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어? 미안. 없다.”
뭐, 잠깐만.
“바보.”
“분명 들고 왔거든. 그런데… 아니다.”
“…….”
지금 내 주머니에 손수건이 있다. 파란 손수건이. 서연준의 목소리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바로 오늘 아침에 화장실에서 들었었다. 궁상맞게 변기에 앉아 울고 있던 내게 손수건을 준 게 서연준이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이벤트가 꼬이게 생겼고!
내 이마를 열 번은 때리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 내고 손수건을 서연준에게 비밀스레 건넸다.
“응?”
“빠, 빨리 받아.”
“이걸 네가 왜…. 혹시 너 화장실…?”
“그래. 그땐 고마웠고 이거나 얼른 받아 주라, 제발.”
“너희 뭐 하냐?”
어느새 바짝 다가온 한우주가 현장을 목격했다. 망했다.
“뭐야, 손수건 있잖아. 조현우 거야?”
“아니!”
나의 외침에 서연준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내 거긴 한데.”
“근데 왜 조현우가 들고 있어?”
“그건….”
서연준과 시선이 마주친다. 대충 넘어가. 얼른 케첩이나 닦고 사랑에 빠지라고. 내 눈빛을 무어라 읽은 것인지 서연준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런 게 있어. 됐고, 이거 받아.”
“…고맙다.”
“그래. 빨아서 돌려줘.”
“어.”
망했다. 서연준은 한우주에게 손수건을 그냥 건네고 말았다. 원래는 서연준이 닦아 줘야 하는데, 한우주는 스스로 케첩을 닦았다. 그 뒤로는 별 대화가 없었다. 다 먹고 자리를 옮길 즈음에야 한우주가 한마디 툭 던졌다.
“너희 둘 진짜 이상해.”
“…….”
서연준이 한우주를 약하게 치고는 “네가 제일 이상하거든?” 하며 웃는 게 누가 봐도 친구 텐션이다. 남자 둘이 썸 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렇게 절망할 날이 올 줄이야. 온몸에 힘이 빠진다.
2학년 3반 앞, 서연준이 한우주에게 친구답게 인사하고, 한우주가 친구답게 받아친다. 황금 같은 점심시간을 이렇게 보낸다고? 머리가 복잡해 대충 인사하고 들어가려는데, 서연준이 대뜸 나를 불러 세웠다.
“조현우!”
“…응?”
“현우라고 불러도 되지? 제대로 인사를 못 했네. 난 서연준이야. 6반.”
그래, 네가 서연준인 것도 알고 6반인 것도 아는데 나한테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어.
“번호 좀 주라.”
“뭐?!”
“아, 싫으면 안 줘도 돼.”
“아니… 그, 그게.”
이럴 시간에 한우주한테 말 한마디 더 붙이라고. 아, 몰라. 적당히 답하자.
“…내가 번호를 바꾼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못 외웠어.”
“그래? 그러면 네 폰 줘. 번호 찍어 줄게.”
“…….”
마지못해 핸드폰을 건네주자 서연준은 자기 번호를 찍고는 전화까지 걸었다.
“그럼 또 보자, 현우야.”
“그, 그래.”
“아, 그리고….”
또 뭐, 왜.
“힘들 때 연락해. 혼자 앓지 말고. 말하는 것만으로 속이 풀리기도 하니까….”
“…….”
디링-
「System:이벤트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 서연준 :: 끼니 거르지 마!」
알림음이 울리고, 서연준이 떠났다.
‘하하…. 이걸 이벤트로 쳐주는구나.’
엉망이다. 조현우라는 이물질이 낀 데다가 원래의 전개와는 완전히 달랐다. 분명히 이 이벤트를 계기로 서연준이 한우주에게 ‘친구 이상의 호감’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런 낌새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에 엉뚱하게도, 서연준과 조현우가 가까워진 것 같다.
이 정도로 말아먹었으면 망설임 없이 리트 해야 하는데 그것도 안 된다. 세이브 로드 없어, 게임 종료도 못 해. 이건 뭐, 더는 게임이라 부를 수 없다. 그냥 고난의 장이다. 지치다 못해 혼이 나가 뭘 제대로 생각하기가 힘들어서, 오후 시간은 그대로 흘려보내고 말았다.
한우주는 교실에서 나갈 생각을 않았다. 덕분에 새로 발생한 이벤트는 없었다. 제발 좀. 돌아다니면서 공략캐들 만나고, 이벤트도 보고 하면 좀 좋아? 한우주가 원망스럽다.
나도 좋은 플레이어는 못 되지만, 한우주는 최악의 근무 태만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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