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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연시 주인공이 나를 공략한다-4화 (4/150)

4화

조현우는 야자를 하지 않았다. 나는 지문 인식으로 핸드폰 잠금을 풀고, 쇼핑 앱에 들어가 ‘내 집’으로 설정된 주소를 찾아가야 했다. 그런데 집 방향이 묘하게 한우주와 겹치는 것이다. 의도치 않게 한우주를 뒤따르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어정쩡한 거리감이 신경 쓰였다. 그러다 한우주가 갑자기 뒤를 돌아봤을 땐 정말로 창피한 짓을 해 버렸다.

“그런 거 아냐! 나도 집 이쪽이야!”

미친놈아.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렇지만 한우주는 워낙에 스토커를 줄줄 달고 다닐 운명이다 보니 그만…. 한우주가 눈을 가늘게 뜬다.

“그런 게 뭔데?”

…할 말이 없다. 한우주는 자리에 우뚝 서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너도 집 이쪽이라며.”

“어? 응.”

“계속 뒤에서 걸으려고? ‘그런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한우주의 목소리에는 짓궂음이 잔뜩 묻어 있어서, 저걸 한 대 때리고 다른 길로 가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지 않을 거지만.

어쩔 수 없이 한우주의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나 확인하려 핸드폰 지도를 흘끔거리는데, 곁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한우주 진짜 방해돼.’

내게 호감도 수치가 있다면 당장 떨어지고 있을걸. -1, -1, -1…. 한우주를 향한 호감도가 –20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아까.”

“어?!”

얘는 조용히 있다가 전조 없이 말 거는 게 특기인가 보다.

“계단에서 서연준이랑 뭐였어?”

뜬금없이 한다는 말이… 아, 설마. 지금 질투하는 건가? 서연준이 신경 쓰여서?

“별거 아니야. 진짜로! 나랑 걔랑 생판 남이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인사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색하게 헤어질 사이. 안면만 겨우 튼 사이. 신경 쓸 거 하나 없어.”

“그래?”

“응!”

“그럼 복도에서는?”

“응?”

“폰 들고 둘이 뭐 하던데.”

그걸 또 보고 있었냐? 하여튼. 이제야 한우주가 조금은 깜찍하게 보인다. 아무래도 아예 망한 건 아닌가 보다. 서연준 루트를 타도록 잘 유도하면 될지도 모르겠다.

“그냥 번호 교환한 거야.”

“아.”

한우주는 그 뒤로 말이 없었다. 10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길이 갈리길래 기분 좋게 인사하고 헤어지려고 했다.

“조현우.”

그런데 갑자기 한우주가 핸드폰을 내 쪽으로 내민다. 이걸 왜 나를 줘?

“번호 찍어.”

“예?”

놀라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안 줄 거야?”

“내 번호를? 왜?”

“우리가….”

목소리가 차분하다. 내 속은 난리가 났는데.

“생판 남은 아니지 않아?”

“…….”

멱살 잡고 흔들고 싶다. 나한테 이러지 말고 서연준한테 가서 키스라도 해 보라고 하고 싶다. 둘 다 못 할 짓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번호 알려 주는 것밖에 없다. 아, 그것도 못 한다. 조현우 번호를 못 외웠다.

“번호를 바꿔서….”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핸드폰을 건넸다. 한우주는 조현우의 핸드폰을 이리저리 만지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내 번호 있는데?”

“어?”

“이미 있다고.”

날 쳐다봐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저거 이미 예전에 조현우랑 번호 교환해 놓고 잊어버렸거나, 지운 거 아니야?

“그…, 아까 서연준이 네 번호도 알려 줬어.”

그러나 어쩌겠는가. 대충 변명하는 것이 나의 최선인 것을.

“걔가?”

“어….”

“네가 알려 달라고 했어?”

“아니.”

한우주가 미간을 좁힌다.

“아니, 응. 내가 알려 달라고 했어.”

“왜 그랬는데?”

“…비상 연락망으로?”

“비상 연락망?”

야, 이…, 그냥 대충 넘어가라고.

“알아 둬서 나쁠 거 없으니까?”

“그래?”

이젠 아예 팔짱을 끼고 쳐다본다. 나 뭐 잘못했냐? 내가 너한테 원한 살 만한 짓 했냐고.

“…너는 내 번호 왜 물어보는데. 어디다 쓰려고?”

“안면 튼 사이고, 알아 둬서 나쁠 거 없으니 비상 연락망으로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아.”

하…. 재수 없어. 얄미워. 쥐어박고 싶어. 얼굴 빼면 장점 없는 놈.

마음속으로 실컷 욕하는 사이 한우주는 “내일 봐.”라며 인사까지 하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잘만 걸어갔다. 끝까지 속을 모르겠는 게 마음에 안 든다. 나는 짜증을 견디지 못하고 멀어지는 한우주의 등을 향해 중지를 내밀었다.

…머지않아 한우주에게 쏟아부은 욕을 전부 철회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돌아보면 그때의 일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하늘에 맹세컨대, 나는 한우주의 번호가 필요한 순간이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엔딩을 보고 게임에서 나가는 순간까지 한우주에게 연락할 일은 없으리라 여겼으니까.

***

골목길, 언덕, 골목길, 그리고 또 언덕. 한우주와 헤어지고 한참을 걷고 나서야 조현우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지갑에 500원 하나 덜렁 있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형편이 안 좋긴 한가 보다. 낡은 빌라의 반지하 방은 밖에서 보기에도 좁아 보였다.

‘…도어 록이네.’

문을 두드리는데 반응이 없다. 아무도 없나? 핸드폰 연락처를 살펴봤지만, 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조현우 얘 혼자 사나 봐. 동거인은 없고, 비밀번호도 모른다.

‘망했다.’

어떡해. 발만 동동 구르다가 미친 척 아무 번호나 눌러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후회했다.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나도 이젠 모르겠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문 앞에 허망하게 서 있었다.

“누구야!”

귀가 먹먹할 즈음 아주머니 한 분이 빗자루를 들고 뛰어 내려왔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장이라도 쥐어 팰 듯한 기세가 금방 누그러졌다.

“학생. 놀랐잖아!”

“그, 죄송합니다.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요….”

아주머니는 빗자루를 내려놓으며 아이고, 하는 탄식과 함께 말했다.

“어쩌다 그랬어. 우린 마스터키 없는데.”

아, 집주인 분이신가 보다.

“방법이 없을까요?”

“열쇠 집 불러야 해. 저번에 저기 윗집에서도 그렇게 했어. 그런데….”

불안하다. 오늘 내 재수가 다 털릴 모양인가 보다.

“10만 원은 들 텐데. 학생 괜찮겠어?”

“아….”

“현우 학생?”

“…번호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주인집 아주머니는 정 기억이 안 나면 찾아와라, 학생 사정도 있으니 싸게 해 줄 수 없는지 물어보겠다, 말씀하시고는 도로 올라가셨다. 조현우가 10만 원이 있을까? 핸드폰에 깔린 은행 앱을 열어 본다. 이건 지문 인식으로 열려서 다행이지….

‘…….’

못 본 척하고 싶을 정도로 처참한 잔고다. 돈으로 해결할 생각은 접어야겠다. 아. 혹시 창문이 열려 있지는 않을까? 밖으로 나가 창문을 확인해 보았다. 열리긴 개뿔, 아주 단단히 잠겨 있는 데다가 창살까지 있다. 그쯤부터 이성을 잃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비엘 게임에 갇혀서 돈도 집도 가족도 없이….’

설움에 돌아 버린 나는 창문에 설치된 방범 창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흔들어도 꼼짝도 안 한다. 당연한 것에 짜증이 치민다.

“저기요!”

아, 망했다.

“여기 저 사는 곳이에요! 도둑 아니에요! 진짜예요!”

“…현우야? 조현우?”

“네? 허.”

금발에 안경? 익숙하게 생겼는데. 아, 설마 저거…, 윤태현? 윤태현이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어?

“현우야,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그게.”

윤태현은 공략캐 중 한 명인데,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새끼다. 학교에 새로 취임한 수학 선생이라는 설정에… 변태다. 저거 공략하는데 진절머리가 나 그대로 게임 접을 뻔했으니 말 다 했다.

이놈만큼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가장 곤란할 때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는 처지가 야속하다.

“심정은 알겠지만 무리한 짓을 했구나.”

“네… 그렇죠. 죄송합니다.”

“내게 죄송할 필요는 없지. 그나저나….”

윤태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어 갔다.

“현우야, 오늘 갈 곳이 없다면 내 집에서 자고 가도 돼.”

“미쳤어요?”

“…뭐?”

미친…, 이런 개….

“미쳤다고 제가 선생님께 그런 폐를 끼치겠어요…?”

“…부담스러운가 보구나.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꺼져 줬으면 좋겠다. 속으로 읊는 중에 진동이 울린다. 전화다.

「사장님」

…사장님? 안 좋은 예감에 곧장 전화를 받았다.

“…네. 죄송합니다. 금방 갈게요.”

아니나 다를까, 조현우의 알바처다. 다른 건 됐고 당장은 윤태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현우야?”

“선생님. 저 알바가 있어서요. 이만 가 볼게요.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얼른 자리를 뜨려는데 손목이 붙잡혔다. 이 새끼가 진짜?

“잠깐만. 이대로 보내면 선생님 마음이 안 좋지.”

망할 선생님 마음은 알아서 하시고요. 윤태현이 작은 메모지와 펜을 꺼내더니 무언가를 적어 건넨다. 핸드폰 번호다.

“곤란하면 연락해야 한다. 알겠지?”

“네.”

나는 태현의 손을 거의 뿌리치다시피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속이 훤하다. 조현우같이 기댈 곳 없는 애 데려다가 제게 의지할 수밖에 없도록 하려는 거다. 적어도 내가 파악한 윤태현은 그런 질 나쁜 자식이었다. 저 새끼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상상만으로 역겹다.

…도대체 왜 다들 나한테 지랄인데. 조현우가 뭐라고.

한우주도 조금 이상하고, 서연준에 윤태현까지. 우연인가? 아니면 히든 루트에 들어서면서 공략캐들의 행동 패턴이 바뀌었다든가, 내가 조현우답게 구는 데 실패해서 게임에 영향을 준 걸까? 심란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알바처에 도착한 순간부터 생각할 틈이라곤 없이 더럽게 바빴다.

조현우는 자정까지 고깃집에서 홀 알바를 했다. 손님은 많은데 홀 담당은 조현우, 고작 한 명이다. 결코, 혼자 일할 업무량이 아님에도 말이다. 웬만한 숙련자가 아니고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현실에서 안 해본 알바가 없었다. 음식점 홀 알바 경험 역시 당연히 있다. 그냥 있다 할 뿐인가? ‘숙련자’에 해당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업무에 능숙했다.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조현우의 미친 알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술에 잔뜩 취한 손님을 콜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니 자정이 훌쩍 넘어 있었다. 힘들다. 그런데 갈 곳이 없다.

대충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 벤치에 앉았다. 밤의 공원은 유독 어두웠다. 주변에는 산책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아 괜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을 떨치려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메신저나 입출금 내역, 앨범 같은 것들을 살피다 보면 실마리가 잡힐지도 모른다. 연락할 친지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

친구는 확실히 많다. 그러나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는 없어 보였다. 가족은 찾아볼 수 없고, 연락하는 어른이라곤 사장님, 집주인, 담임 정도가 전부다. 앨범은 비밀번호로 잠겨 있어 열지 못했다.

은행 앱을 보고 추측건대, 평일에 4일은 음식점에서 알바를 하고 가끔 주말 단기도 뛰는 것 같다. 고정적인 수입이 약 90만 원, 그중 43만 원이 월세로 빠져나갔다. 식비, 교통비, 통신비, 관리비…. 이거저거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가난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있다. 조현우만큼은 아니지만, 우리 집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돈이 없었다. 누나도 나도 철들 무렵부터 알바를 쉰 적이 없다. 그러다 작년과 올해 걸쳐 집안에 좋은 일이 연달아 생기더니, 겨우 숨통이 트인 것이다.

갑자기 운이 너무 좋다, 그동안 고생한 거 보상받는 건가 싶었는데 결국에는 이 꼴이다. 어떻게 이러냐? 곧 수험생 될 놈이 게임 좀 했다고 벌받은 거야?

밤바람이 차가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웬 종이가 잡혀서 꺼내 보니 윤태현이 준 번호다. 재수 없다.

‘이러다가 얼어 죽으면 어떡하지.’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게 나을까. 퍼뜩 든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절박해도 그건 좀. 그러고 보니 서연준도 번호를 줬지. 연락하면 도와줄까?

‘…서연준네 집은 사람이 너무 많아.’

집이 아주 포화 상태일 것이다. 신세 질 공간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 많은 가족 사이에 나 홀로 이방인일 걸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답답하다.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리고.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스쳐 갔지만, 연락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우주가 보였다.

‘한우주한테 연락해서 뭐 해.’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과 조연. 같은 반 친구. 조현우가 오지랖 부림. 요약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 연락한다고 도와줄 리 없을 텐데도 미련스럽게 액정을 만지작거렸다. 슬슬 고민하기도 지칠 즈음이었다.

“아.”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쳤다. 종료 버튼을 연타하려 했는데,

[여보세요.]

한우주가 1초 만에 전화를 받아 버렸다.

[…조현우?]

어떡하지.

[할 말 없으면 끊는다.]

“자, 잠깐. 잠깐만!”

[뭔데?]

“한우주, 나….”

미치겠다. 뭐라고 말해?

“나…, 갈 곳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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